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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글들 스크랩 중국화가 쉬페이홍(徐悲鴻) /조정육 미술사가
속초등대 추천 0 조회 39 12.07.08 22: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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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골 목수 피카소를 이기다

 

조정육 미술사가

 

 

▲ 치바이스, 석문24경, 체루취적도, 1910

“선생님, 정말 이 그림을 사실 계획이십니까?”

 

“그렇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베이징예술전문학교 교장 쉬페이홍(徐悲鴻·1895~1953)이 지인의 초대로 전시장에 갔을 때였다. 전시장에는 베이징 화단을 대표할 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었는데 한결같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망한 그는 서둘러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사람들 눈이 거의 닿지 않는 구석에 걸린 그림 한 폭이 눈에 띄었다. 새우 몇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는데, 소재도 참신하고 능숙한 붓놀림이 마치 물속의 새우가 금세 튀어나올 것처럼 기운생동했다. 흥분한 쉬페이홍이 구입 의사를 밝히는 붉은 띠를 걸려고 하자 곁에 있는 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은 것이다.

 

“작가가 나이도 많은 데다 베이징 화단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 목수 출신입니다. 그런 사람의 작품을 사시겠다니 선생님답지 않으십니다. 선생님 명성에 누가 될 수도 있으니 다시 한번 신중히 고려해보시지요?”

 

“무슨 소린가? 나는 이 작가를 우리 대학의 교수로 초빙할 생각이네.”

 

1929년 가을의 일이었다.

 

 

치바이스와 쉬페이홍

 

그로부터 82년이 지났다. 눈밝은 쉬페이홍의 천거로 시골 목수에서 일약 베이징 화단의 총아로 부상한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는, 2011년 세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가가 됐다.

그의 작품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는 베이징의 자더(嘉德)경매에서 5720만달러(약 718억원)에 낙찰됐다.

2위는 원(元)나라 때 화가 왕멍(王蒙)의 ‘치천이거도(稚川移居圖)’가 차지했고, 쉬페이홍의 ‘구주무사낙경운(九州無事樂耕耘)’은 6위였다.

이는 파블로 피카소(7위)와 구스타프 클림트(8위), 에곤 실레(9위)와 앤디 워홀(10위)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이었다. 현재 세계 미술시장에서 중국 미술품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반영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작가들이 유럽과 미국의 ‘수퍼스타’를 물리치고 당당히 세계 미술계의 상층부로 급부상한 원인은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와 희소성 외에 구매자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중국은 경제성장으로 신흥 부자들이 증가하고 예술 인구가 확대됐다. 높은 소득수준으로 경제적 안정을 누리게 된 부자들은 부동산과 주식투자를 넘어 자신의 품격을 과시할 수 있는 예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여기에 중국 경제의 가능성을 예측한 서양인들의 관심과 투자도 한몫했다. 중국 미술품은 이제 중국 내수시장을 넘어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제 최고가를 경신한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를 살펴보자.

축(軸)으로 된 이 작품은 가로 1m, 세로 2.66m로 두 그루 나무 위에 매가 그려져 있다. 작품의 좌우에는 간략한 전서체로 ‘인생장수 천하태평(人生長壽 天下太平)’이라고 적어 놓았다.

화제(畵題)를 전통적인 옛 그림과 달리 그림에 버금갈 만큼 크게 쓴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화제에 비하면 그림은 오히려 소략하고 담담하다. 이는 그림이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됐다기보다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졌음을 말해준다.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보통 사람들의 염원이라면, 천하가 ‘태평’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은 ‘영웅’의 몫이다. 영웅은 매의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송백고립도’는 치바이스의 작품성을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점잖다. 지나치게 전통적이고 과거 형식에 안주한 듯한 혐의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의 작품은 ‘송백고립도’에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생명력이 넘치고 참신하다.

 

독학으로 그림 공부

 

▲ 작년 세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로 팔린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

 

 

치바이스는 후난성(湖南省) 상탄현(湘潭縣)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어 목공이 됐다. 그의 아버지는 허약한 아들에게 농사 대신 목공일을 익히게 했다. 그는 16세 때 나무에 꽃을 새기는 목공기술을 배웠고 20세 전후에는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힘든 노동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계속했다.

전각에도 관심이 있어 내로라하는 전각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10여년 동안 전국을 여행하며 예술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50세에 베이징에 정착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서 얻은 감흥을 붓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고화(古畵)에서 습득한 문인화의 깊이에 민간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생동감과 경쾌함이 더해졌다. 배추, 무, 오이, 죽순 등 창작의 소재는 친숙한 일상생활에서 나왔고 표현기법은 언제나 새로웠다. 심지어는 쥐나 올챙이도 등장했다. 그는 특히 새우 그림을 잘 그렸는데, 한번은 물을 길으러 가던 아낙이 그의 그림 앞을 지나가다 새우에 넋을 잃고 취해 서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수적인 베이징 화단에서는 치바이스를 받아주지 않았다. 파격적인 형식과 색감으로 무장한 시골 촌뜨기의 그림은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강고한 화단에서 철저히 외면받고 비난받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쉬페이홍이 그를 발견할 때까지 10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새로운 화법을 모색했다. 쉬페이홍이 구습에 물들지 않은 치바이스의 작품을 보고 ‘중국 화단의 막중한 짐을 질 수 있는 한 필의 천리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60년 동안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밀고 나간 고집스러운 창작력 때문이었다.

 

쉬페이홍과 젊은 그들

 

▲ 쉬페이홍의 ‘우공이산’(부분), 1940

 

 

유화. 2m x 4m 중국 쉬베이홍기념관

 

유화 50cm x 1m

 

 

치바이스가 아무리 뛰어난 작가였다 한들 그를 알아주는 쉬페이홍의 안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골 목수’ 출신 무명씨의 작품을 산 쉬페이홍은 삼고초려 끝에 치바이스를 교수로 모셨다. 치바이스의 나이 66세 때였다. 먼 훗날 치바이스는 쉬페이홍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그대다.”

 

쉬페이홍의 발굴로 천의무봉의 솜씨를 발휘한 작가는 치바이스만이 아니었다. 우쭤런(吳作人), 장자오허(蔣兆和), 류보수(劉勃舒) 등 기라성 같은 대가들이 쉬페이홍의 도움으로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쉬페이홍이야말로 현대 중국미술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장쑤성(江蘇省)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쉬페이홍 역시 어려서부터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며 자랐다. 수해로 13세 때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한 그는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서양화 복제품을 접하게 됐는데 동양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화려한 색채와 구도, 명암법에 의한 생생한 묘사에 깊이 매료됐다. 20세에 상하이로 떠난 그는 한 클럽에서 아편 침상으로 쓰던 곳에서 잠을 자고 그림을 그렸다. 말 그림을 잘 그려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 그는 일본 유학을 다녀와 베이징예술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베이징예술대학은 신문화운동의 주역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교장이었는데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학술 풍토를 혁신하기 위해 후스(胡適), 루쉰(魯迅), 천두슈(陳獨洙), 쉬페이홍 같은 젊은 교수들을 채용했다.
   
1927년 가을에 쉬페이홍은 32세의 나이로 프랑스에 유학을 떠나 8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중국적 소재를 서양화법으로 그렸다. ‘비사실적이고 여기(餘技)적인 접근’을 배격하고 정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철저히 사실주의적인 시각에서 그릴 것을 주장한 그의 회화관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서양화라는 그릇에 동양의 내용을 담는 ‘중서융합(中西融合)’의 태도를 버리고 수묵으로 전환했다.

그의 대표작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서양화의 명암법과 해부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동양화의 필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는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특정한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각각의 장점만을 취할 줄 아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더불어 가능성이 있는 여러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육성할 줄 아는 참다운 교육자였다. 삶의 철학을 예술작품으로 구현해내고 다시 젊은 세대에게 전해준 쉬페이홍에 의해 현재의 중국 현대미술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치바이스 이후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미술시장은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홍콩과 마카오, 대만에 이르기까지 주요 대도시에는 곳곳에 갤러리가 성업 중이다. 세계의 화상들은 ‘중국 현대미술 4대 천황’인 왕광이, 장샤오강, 팡리쥔, 웨민쥔의 작품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의 화랑가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개혁개방시대(1976~1989)를 거치면서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세계로의 전환을 경험한 젊은 작가들은 개인과 사회의 대립과 갈등, 인류 문명에 대한 비판과 고민을 중국적인 그릇에 담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현대작가들의 작품에서 다른 나라 작가들이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중국’만의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20세기 초에 살았던 1세대들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1세대의 고집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서 2세대는 마음껏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다. 이것이 2세대의 작품값보다 1세대의 작품값이 더 높게 책정되는 근본 이유다. 이것이 또한 담담한 필치의 치바이스의 ‘송백고립도’가 최고가를 경신하게 된 비밀이라 할 수 있다.

 

 

 

 

▲ 리커란의 ‘이강산수’, 1963

 

중국의 전통적인 산수화를 강렬한 색채와 자유분방한 붓으로 표현한 장다첸(張大千·1899~1983)은 1930년대부터 치바이스와 더불어 ‘남장북제(南張北齊·남의 장다첸, 북의 치바이스)’로 일컬어질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화가로, 서예가로 그리고 시인이면서 수장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그는 중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체류하다가 말년에 대만에 정착했다. 그는 당(唐)대부터 시작되는 화려한 청록산수의 전통을 현대인의 감성에 맞게 혁신했다. 말년에 그린 ‘도원도(桃園圖)’의 화려한 색상과 감각적인 발묵법은 전통 산수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 답안으로 제시될 정도였다.

 

중국 현대 산수화의 거장 리커란(李可染·1907~1989)은 치바이스나 장다첸과는 전혀 다른 길에서 중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 16세에 상하이사립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우창숴(吳昌碩·1844~1927) 계열의 그림을 배웠다. 21세 때는 차이위안페이가 설립한 서호국립예술원에서 린펑미엔(林風眠·1900~1990)을 만나 형상의 과학적인 관찰과 소묘의 사실적인 묘사방법을 배워 철저한 현장 스케치를 실천했다.

 

그에게 쉬페이홍과 치바이스와의 만남은 큰 자극제가 됐다. 치바이스의 필(筆)을 논하면서 ‘그의 선이 마치 현(弦)과 같다’고 감탄했다. 그는 오대(五代) 송(宋)대부터 전해오는 산수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그의 ‘이강산수’는 강한 먹빛과 힘찬 필치로 먹을 되풀이해서 쌓듯이 칠하는 적묵법(積墨法)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장다첸이 화려한 봄 산을 그렸다면 리커란은 녹음이 무성한 여름 산을 그린 듯 강렬하다. 그래서 리커란은 현대 화가 중에서 먹을 가장 잘 쓴 화가로 평가받는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중국 화가 쉬페이훙(徐悲鴻·1895~1953)의 회화 ‘파인급수도’(巴人汲水圖·사진)

 

 

 

 

 

 

미술계 '中 돈바람'… 피카소도 끌어내려

 

지난해 경매 낙찰 총액, 장다첸 5700억으로 1위

 

장다첸

 

중국 화가 장다첸(張大千·1899 ~1983)이 피카소(Picasso·1881~1973)를 제치고 세계미술시장의 새로운 패자로 떠올랐다.

 

프랑스의 글로벌 미술시장 분석회사인 아트프라이스는 3일(현지시각) 발표한 '2011년 세계시장 개요'에서 "2011년 경매 낙찰총액에서 피카소가 중국의 장다첸과 치바이스(齊白石·1860~1957)에게 밀려 3위를 차지했다. 최근 15년 새 피카소가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 자리를 내놓은 것은 지난 2007년 앤디 워홀에게 밀렸던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아트프라이스는 매년 3~4월 전년도 세계미술시장 동향을 결산하는 보고서를 발간한다. 이번 '개요'는 연례 보고서에 앞서 발표한 요약본이다.

 

아트프라이스에 따르면 지난해 장다첸의 경매 낙찰총액은 약 5억달러(약 5700억원), 치바이스는 약 4억4500만달러(약 5100억원)로, 약 3억2000만달러(약 3673억원)인 피카소를 앞질렀다. 장다첸과 치바이스의 낙찰총액은 피카소가 2010년 세운 역대 개별 작가 연간 경매낙찰총액 최고가(3억6000만달러·약 4130억원) 기록을 앞선 것이기도 하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강남대 교수)은 "이는 중국이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에서뿐만 아니라 개별 작가 경매낙찰총액으로도 서구를 앞질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이미 2010년 경매총액에서 세계 미술시장 점유율 33%로 미국(29.9%)을 앞질렀다. 아트프라이스는 "중국의 2011년 세계미술시장 점유율은 39%로 2010년보다 6%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25%로 4.9%포인트 떨어져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2011년 생존작가 낙찰총액에서도 강세를 보였다. 아트프라이스는 "자오우지(趙無極)가 9000만달러(약 1000억원), 쩡판즈(曾梵志)가 5700만달러(약 654억원), 판정(范曾)이 5100만달러(약 585억원), 장샤오강(張曉剛)이 4100만달러(약 470억원), 취루줘(崔如琢)가 3900만달러(약 447억원)를 달성한 데 비해 미국 작가 제프 쿤스(Koons)는 연간 낙찰총액이 '겨우' 3600만달러(약 413억원)로 6위에 머물렀다"고 밝혔다.

 

한편 2011년 경매낙찰가 1위는 지난해 5월 베이징에서 열린 경매에서 4억2550만위안(약 718억원)에 낙찰된 치바이스의 1946년작 수묵화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가 차지했다.

 

조선 / 2012.01.05

 

 

 

[문화 中華 세계 점령] 中 정부·인민해방軍 합세, 그림값 올리기

 

중국 미술, 폭발적 성장

"中 작가는 피카소보다 비싸야" -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 점유율, 2006년 4.9%→작년 39%로

골동품·작품값 경쟁적 올려 낙찰금 안주고, 거품 논쟁도

 

 

668억원짜리 왕몽 그림 - 2011년 세계 미술품 경매가격 2위를 차지한 왕몽의‘치천이거도’.

중국 바오리 옥션에서4억250만위안(약 668억원)에 팔렸다.

 

 

2002년 세계 미술시장은 유럽·미국의 서구 작가들이 장악했다. 그 해 미술경매 낙찰가 1위는 루벤스의 '유아대학살'(약 823억원), 2위는 피카소의 '목걸이를 한 누드'(약 265억원)였다. 낙찰가 톱100 안에 비(非)서구 작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로부터 불과 9년.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2011년 낙찰가 1위는 치바이스(齊白石)의 '송백고립도(松柏高立圖·718억원)', 2위는 668억원에 팔린 원말 화가 왕몽(王蒙)의 '치천이거도(雉川移居圖)'가 차지하는 등 톱 10에 든 중국작가는 세 명이다.

세계 미술시장이 중국에 점령됐다. 2006년 중국의 세계미술경매시장 점유율은 4위(4.9%)였으나, 2010년엔 33%로 1위, 2011년에도 39%로 2위 미국과 차이를 더욱 벌리며 1위를 고수했다.

軍·官·民 합심 중화주의

중국미술의 괄목할만한 성장 뒤에는 '세계 미술의 중심도 중국'이라는 중화(中華)주의가 있다. 중국 정부·군(軍)·거부(巨富)는 3각편대를 구성해, 중국 화가의 그림 값을 올리고 있다. 2010년 11월 런던 베인브리지 경매에서는 18세기 청(淸) 건륭제 때의 도자기가 익명의 중국인에게 5160만 파운드(약 915억원)에 팔렸다. 중국미술품 경매가 최고 기록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전문가들은 중국 국영기업이자 최대 방산업체인 바오리(保利·영어명 Poly) 그룹의 의뢰를 받은 에이전트들이 경합상승을 부채질했을 것"이라며 "청나라말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겠다는 바오리 그룹의 의무감이 작품가를 전례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보도했다.

중국 최대 경매회사인 바오리의 모기업 바오리 그룹은 중국 인민해방군 직영 기업.

중국 인민해방군은 무기제조사부터 청바지메이커까지 수만개의 자회사를 거느려 엄청난 돈을 주무르며, 한편으로는 '문화중화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바오리는 앞서 2005년 5월엔 홍콩 크리스티에서 9000만달러(약 897억원)어치의 중국 골동품을 사들이고,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중국 왕실 청동 항아리를 800만 달러(약 87억원)에 사들였다.

中미술경매회사는 인민해방군 산하 미술계에 중국 바람이 거세다. 사진은 중국 인민해방군 산하 경매회사인 바오리(영어명 Poly)가 2007년 베이징에서 개최한 경매에서 응찰자들이 전화로 가격 경쟁을 하는 모습. /블룸버그

 

 

중국 제2의 경매사인 지아더(嘉德·Guardian)는 중국 정부가 주요 투자자. 지아더는 홈페이지에 "우리 회사는 해외에 반출된 중국 문화재를 들여온 공로로 중국 인민과 정부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김순응 아트컴퍼니 대표는 "중국 컬렉터들로부터 '중국 작가 작품이 피카소보다 싸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며 "중화 자긍심 회복을 위해 중국 정부와 군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2009년 미술품 경매 관련 규정을 제정, 정부와 경매협회 주관으로 중국 문물예술품 경매 국제포럼을 개최하는 등 미술시장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 중국 내 경매 회사는 2000년 13개에서 2010년 204개로 10년 새 16배, 낙찰총액도 2000년 10억1437만8520위안(약 1300억원)에서 2010년 573억5160만 위안(약 10조원) 수준으로 57배 증가했다.

 

특히 경매시장에서 인기있는 작품은 중국 고서화 및 치바이스·장다첸(張大千) 등 청말 및 근대화가 작품. "서구에 위축됐던 동양 전통문화의 긍지를 되찾자"는 생각이다. 장샤오강(張曉剛)·쩡판즈(曾梵志)·웨민쥔(岳敏君) 등 현재 활동하는 아방가르드 작가들도 중국적 작품으로 화풍을 바꿨다.

 

 

 

낙찰금 미지급·거품 논쟁 등 부작용도

미술계 중화주의는 국제 시장에서 부작용을 낳고 있다.

2009년 이브 생 로랑 소장품 경매에서 청나라 때 조각 두 점을 약 540억원에 낙찰받은 중국인은 "프랑스가 중국서 약탈한 것이니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최윤석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팀장은 "중국인들이 작품값만 올려놓고 정작 돈을 안 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홍콩 크리스티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가을 경매부터 보증금제를 도입했다. 신규 고객이나 2년간 구매 실적이 없는 고객에게는 20만 홍콩달러(약 2980만원), 혹은 응찰 작품 추정가 최저치 합산가의 20% 중 더 높은 금액을 보증금으로 받는 것.

추정가의 수십 배에 달하는 가격도 '거품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강남대 교수)은 "피카소 작품은 수요가 전 세계적인 데 반해 중국 그림은 오직 중국 수요만 있다는 사실도 거품 논쟁이 제기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처지가 “참을 수 없는 슬픔 가운데에서 애처롭게 우는 기러기와 같다

(不禁悲從中來,猶如鴻雁哀鳴)”고 하여 본명인 ‘수강(壽康)’을 스스로 ‘비홍(悲鴻)’으로 개명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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