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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맛집 스크랩 서산 혜미 읍성 1
양재경 추천 0 조회 46 13.12.15 12: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산 해미 읍성 1 < 2013. 12. 14. >

 

해미 읍성 -

사적 제116호. 지정면적 194,083㎡, 둘레 2,000m. 현재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동문·서문이 있고, 성내에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 등의 건물이 있다.

본래 해미는 1414년(태종 14) 덕산(德山)에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이곳으로 이설된 뒤 1651년(효종 2)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 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성하여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를 맡았던 곳이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 절도사영은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있었으며, 석성으로 둘레 3,172척, 높이 15척, 우물 세 군데, 군창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읍지에는 읍성의 둘레가 6,630척, 높이 13척,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이 380첩(堞),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이 두 곳, 남문은 3칸이며 홍예(虹霓 : 무지개 모양의 문)를 틀었고, 2층의 다락을 지었으며, 동문·서문도 3칸이나 북문은 없고, 우물이 여섯 군데이며, 성밖에 호(壕)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의 병마절도사영과 읍성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병마절도사영에는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선조 12)에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잠깐 근무한 적이 있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으로는 가장 잘 남아 있어서 대표적인 표본으로 삼기 위하여 성안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성벽의 보수 등 연차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즉,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와, 현재의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官衙)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가 발견되었다.

 

1866년 천주교 박해 때 관아가 있는 해미읍성으로 1,000여 명의 천주교 신도들이 잡혀와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는데 고문당했던 회화나무에는 지금도 그 흔적으로 철사줄이 박혀 있고 태형으로 죽인 자리에는 자리개돌이 있어 천주교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해미읍성 안에 있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 172호로 지정되었다. 이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이 있었는데,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졌으나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토양을 개량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천주 교인들이 감옥살이 한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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