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식] 네트워크 군대의 엄지 손가락

[청산]

[이인식] 네트워크 군대의 엄지 손가락



▲ 이인식·과학칼럼니스트

4월 1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 17대 총선 기간 중 중단됐던 대통령 탄핵반대 촛불시위가 다시 열렸다. 열린우리당이 압승함에 따라 마지막 촛불집회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다음 날인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15일 동안 전국적으로 연인원 150만 명 이상이 거리에 나와 촛불을 밝힌 것으로 추정된다.
수 만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군중 집회가 사회 분위기를 들뜨게 한 것은 이미 일상사가 된지 오래이다. 2002년 여름에는 월드컵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붉은악마들이, 가을에는 미군 장갑차 사고로 숨진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웠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수십만 명이 운집한 촛불시위를 지켜보면서 한 편으로 감동하고 한 편으로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군중 집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개념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참가자의 상당수가 네트워크 군대(network army)라는 사실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네트워크 군대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고 휴대전화로 무장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뜻한다.

네트워크 군대는 한국사회에서 낯익은 존재이다. 한국에서는 2002년 네티즌들이 노사모를 중심으로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사용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네트워크 군대는 한국의 대선에 앞서 필리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적이 있다. 2001년 1월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네트워크 군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필리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동전화로 짧은 문자 메시지를 교환하는 행위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2001년까지 총인구 7000만 명 중에서 500만 명의 필리핀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날마다 7000만 개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2001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그와 가까운 상원의원들이 갑자기 종결시키자 ‘피플 파워’가 발동했다. 야당 지도자들은 문자 메시지를 발송했고, 탄핵소송 절차가 갑작스럽게 중단된지 75분만에 2만 명이, 1986년 마르코스를 권좌에서 몰아낸 시위가 발생했던 바로 그 자리에 모여들었다.


▲ 휴대폰 문자메시지

나흘에 걸쳐 100만명 이상의 마닐라 시민들이 문자 메시지의 파도에 휩쓸려 밀물처럼 몰려오자 결국 에스트라다는 실각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휴대전화의 문자를 눌러대는 사람들, 곧 엄지족(thumb tribe)에게 권력을 잃은 역사상 최초의 국가 수반이 되었다. 총 한발 쏘지 않고 엄지손가락에서 나온 문자 메시지만으로 권력자를 몰아낸 것은 네트워크 군대의 역사에서 기념비가 될 만한 사건이다. 물론 그것이 유일한 성과는 아니지만.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회의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농민, 노동조합, 환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 특정 목적을 가진 소규모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지도자나 조직도 없었으며, 장기적인 전략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WTO 회의를 세계적 화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시위 이전에는 WTO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위대들은 ‘시애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들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휴대전화, 라디오, 휴대용 컴퓨터로 급조한 통신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시애틀에서 마닐라에 이르는 시위나 서울의 탄핵반대 촛불 집회에 참여한 네트워크 군대는 특정한 쟁점에 대해 관심을 공유하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모인 공동체이므로 공식적인 지휘 체계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 군대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마치 흰개미와 같은 사회적 곤충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흰개미는 역할에 따라 제각기 여왕개미, 수캐미, 병정개미, 일개미로 발육하여 수만 마리씩 큰 집단을 이루고 살면서 질서 있는 사회를 형성한다. 특히 아프리카의 초원에 사는 버섯흰개미들은 높이가 4m나 되는 탑 모양의 둥지를 만들 정도이다. 말하자면 흰개미 집단은 개개의 흰개미가 가진 것의 총화를 훨씬 뛰어넘는 지능과 적응능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전체가 그 부분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항상 큰 경우에는 상향식 사고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상향식은 부분(아래)의 행동이 전체(위)를 결정한다고 전제한다.

네트워크 군대는 전적으로 상향식으로 행동한다. 네트워크 군대의 상향식 체제에서 분출되는 집단적인 힘은 시애틀, 마닐라, 서울에서 여러 차례 그 파괴력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모든 네트워크 군대가 반드시 현명한 군중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만약 네트워크 군대의 대다수가 정치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행동에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민주주의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테니까.

어쨌거나 네트워크 군대의 엄지 손가락에서 권력이 나오는 세상이 된 것을 싫든좋든 받아들여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