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광릉 숲에 가서 젖었다. 흠뻑 젖은 숲 안으로 이어진 향기로운 흙길. 우산 쓴 연인들도 비옷 입은 부부들도 촉촉이 젖어 숲길을 걷고 또 걸었다. 삼색의 물봉선, 흰 쑥부쟁이, 말라가는 서어나무 열매들은 저마다 빗방울을 달고 반짝이며 숲길을 밝혔다.
안개비 자욱한 숲으로 들어가던 20대 한 쌍이 마주보며 말했다. "비 오면 어때. 기분만 더 좋은데." "그래. 분위기 너무 좋다." 바짝 붙어 팔짱을 낀 그들은 우산을 하나만 준비했다.
국립수목원 숲해설가 이연규(67)씨가 말했다. "숲에서 방출되는 음이온은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머리를 맑게 해주죠. 기분이 좋아지는 게 당연합니다."
7월부터 토요일에도 개방…산불 한번 안 겪어
맑으면 맑은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들입다 걷고 싶은 숲길이다. 지친 분들, 울화 치미는 분들, 덜 익은 사랑 만지작거리는 분들, 이 숲길에서 한나절쯤 쉬어갈 만하다. 곳곳으로 뻗은 숲길마다 이미 나뭇잎들이 황망히 굴러다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게 한다.
국립수목원 쪽은 지난 7월부터 주말(토요일)에도 수목원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숲 훼손을 우려해 평일에만 예약자에 한해 숲 탐방을 허용했었다.
광릉숲이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의 국립수목원(옛이름 광릉수목원)을 포함한 광릉(남양주시 진접읍) 주변의 천연림을 말한다. 국내에서 가장 잘 보전돼 온 온대림으로 꼽힌다. 굴참나무·졸참나무·갈참나무 등 참나무류와 서어나무·오리나무·까치박달나무 등 활엽수들이 '극상림'(다양한 식생이 안정된 상태를 이룬 산림)을 이루고 있다. 1468년부터 나라에서 관리해 온 아름다운 숲이다.
1468 년은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세상을 뜬 해다. 세조가 이 곳에 묻힌 뒤 왕실에선 능 주변 숲의 벌목을 금하는 등 엄격하게 관리해 왔다.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의 능이 바로 광릉이다.
광릉 주변과 맞은편 소리봉(537m)·물푸레봉(478m) 자락에 걸친 2240㏊의 천연림 중에서 500㏊에 이르는 국립수목원 지역을 개방하고 있다.
숲해설가 이씨가 말했다. "오백년 동안 산불 한번 겪지 않은 자연림입니다. 일제도 이 숲의 가치를 인정해 임업시험림으로 지정했고, 육이오 때도 폭격을 모면해 숲이 살아남을 수 있었죠. 재선충 침입도 아직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숲은 자연을 배우고 즐기며 쉬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한, 국내 최고의 활력 재충전소라 할 만하다. 자연 그대로의 숲을 활용해 탐방로를 내고, 호수를 들이고, 습지를 조성하고, 최소한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쉬엄쉬엄 걷다보면 세 시간은 후딱
광장을 중심으로 관상수를 모아 놓은 관상수원, 한반도 모습을 본뜬 수생식물원, 시각장애인을 위해 냄새나 촉감으로 구분하기 쉬운 수목을 모아 놓은 '손으로 보는 식물원', 습지식물원, 난대식물원(온실), 양치식물원, 덩굴식물원, 향료식물원 등 11개의 전문 전시원에서도 다양한 식물을 만날 수 있다. 국내외 산림 관련 자료를 전시한 산림박물관, 세 마리의 백두산 호랑이, 반달가슴곰 등 18종의 야생동물을 볼 수 있는 산림동물원, 산림생물표본관(연구시설)도 들어서 있다.
수목원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 두 시간 가량 걸리지만, 숲과 나무·꽃의 자태를 감상하며 쉬엄쉬엄 걷다 보면 서너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탐방객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은 460여m에 이르는 숲 생태 관찰로와,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 육림호 주변 산책로다. 생태 관찰로는 울창한 자연림 사이로 나무판을 깔아 만든 매혹적인 길이다. 숲 향기에 젖어 나무와 꽃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숲은 숲을 즐길 줄 아는 이들에게 더 가치있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해설가 이씨는 "아직도 이곳을 유원지로 알고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런 분들은 "왜 개방을 제한하느냐", "왜 좀더 여기저기 멋진 꽃들을 심어 가꾸지 않느냐"며 불만을 털어놓는다고 한다.
이씨는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개방을 더 엄격하게 제한해야 합니다. 토요일 개방 이후 벌써 숲길 주변과 일부 나무들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어요."
숲을 본질적으로 위협하는 것은 지구 온난화다. 한반도가 아열대기후 지대로 바뀌어가면서 광릉숲도 일부 변화 낌새가 보인다고 한다. 이씨는 "야생화들의 개화 시기나 단풍 시기가 크게 앞당겨지거나 늦어지는 등 들쭉날쭉해진 것이 그런 변화 중 하나"라고 말했다.
국립수목원뿐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광릉 들머리 숲길도 걸어볼 만하다. 능에 이르는 300여m의 짧은 숲길이지만, 수백년 된 키다리 전나무·소나무들과 활엽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평일 하루 3회(11시·2시·4시, 토요일엔 4회)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설명을 들으며 왕릉과 왕후릉을 둘러볼 수 있다.
국립수목원엔, 정문 옆 '방문자의 집'에 작은 매점이 하나 있을 뿐 식당도 카페도 없다. 도시락을 준비하면 육림호 앞 휴게광장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