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내 마음 깊숙한 곳까지 뚫고 들어와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성서의 말씀은 마태오 복음 5장의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이었다. 그 말씀이 씨가 되어 말씀과 만난 그날부터 크리스천이 되었고 이어 수도생활을 선택하게 되고, 종신서원때 상본에 넣은 말씀이 되었다. 처음 이 말씀을 접하던 중3때의 생각과 내년이면 지공대사에 등극할 만큼 산 지금의 생각은 물론 다르다. 어렷을때는 하느님을 뵈온다는 것이 뭔가 중뿔난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뉘앙스가 많았는데, 이제는 단순히 “있는 것 있는 그대로 보고, 없는 것 안보는 것” 이다. 일견 매우 쉬운 일인듯 하나 작금의 ‘가짜뉴스가 허구의 세상을 만들어 내어 많은 사람의 삶을 더욱 질곡에 빠트리는걸 보면 그리 간단한일이 아니다.
여하튼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이라고, 최근 들여온 피에타 상을 봐도 그렇다. 작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보고 형상화함으로 사람들의 마음까지 고양시킨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보신다고 볼 관(觀)자를 써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라하는 것을 보아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이 간다. 오관의 순서도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이지 않는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처럼 예수는 다른 세상을 보았다. 기존 종교인들이 설파하고 주장하는 하느님과는 영판 다른 하느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와 동굴 속에 갇혀 가짜 뉴스가 만들어낸 환상에 홀려있는이들을 일깨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수백 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들 스스로 한번 보게 하는 것이다. 소경에게 무지갯빛이 어떠한지 골백번 이야기하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소경 스스로 무지개를 보게 해야 한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처럼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 다만 우리 스스로 진리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라!” 어떻게?
수도생활이 존재하는 이유다. 동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율법에 묶여 좁쌀영감이 된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긴 이야기 짧게 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눈을 떠 스스로 무지개를 볼 수 있을까? 진정한 변화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체험함으로 오는 것이지, 율법과 계명을 준수하고 하느님이 자비하시다고 억지로 믿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찾아 온 동서의 역사와 체험을 요약하여 세단계를 상정한다. 첫 째는 심재(心齋-마음의 재계) 이다. 음식을 절제하듯이, 마음의 먹이인 생각을 절제한다. 만트라와 같은 짧은 기도문을 반복함으로 충동적이고 무질서한 생각들을 걸러낸다. 생각의 소음이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독서 삼매경이라든가, 일을 하다가 일 자체가 기도가 되는 순간, 기도가 진정한 기도(관상기도)로 넘어가는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저 있음만 있게 되는. 그것을 좌망(坐忘)이라 한다. 좌망에 들면 조철(朝澈-아침의 맑음) 이 멀지않다. 물론 이렇게 도식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굴을 벗어나 다른 세상을 본이들의 체험을 집대성한 결과이다. 마침 사순 4주의 주제가 단식이다. 마음의 단식을 실행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