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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浪漫主義 /Romanticism
(18~19세기)
낭만'이란 단어는 일본에서 나쓰메 소세키가 로맨티시즘을 음차하면서 쓰게 된 표기로, 이 표현은 원래 '제멋대로 하다'라는 뜻이었다. 한국어로는 '낭만'이지만 일본어 발음은 '로망'으로, 한국에서 낭만주의와 로망, 로맨티시즘이 주는 어감이 다르지만 일본에서는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개성이 없는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창작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문학
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루는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을 추구하며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위에서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상이기도 하다. 고전역학이 성공하고 과학이 성장하면서 몇몇 사상가와 시인들이 계몽주의 철학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들의 주장이 호응을 얻으면서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났다.
인간을 중시하고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고 하는 교만하다고 인식되는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고 주장하며 자연을 분석하지 말고 상상력으로 통찰하라고 주장한다.
낭만주의가 크게 일어난 곳은 의외로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과 대륙 철학의 고장이었던 독일이었다. 영국의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과학이 자연을 분석하는 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죽은 자연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과학과 시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은 인식을 통한 재창조로, 영국 1세대 낭만주의자들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죽은 자연을 살아있는 자연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일부는 이러한 인식의 재창조 또한 하나의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고, 실제로 2세대 낭만주의자들은 다양한 과학 지식을 섭렵하고 자신의 사상, 예술을 형성하게 된다.
18세기까지 유럽의 주류 예술이었던 바로크/로코코 양식과 신고전주의는 왕족과 귀족의 취향에 맞게 장엄하고 화려한 표현을 추구하였다.
18세기부터 흔히 부르주아라고 일컫는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시민들(제 3계급)이 산업혁명과 더불어 급성장하였고 예술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신고전주의 사조가 주류에서 밀려나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제 3계급 대중들의 취향에 맞는 예술사조가 주류로 떠올랐는데, 유행했던 예술과 학문의 경향을 일컬어 낭만주의라고 한다.
낭만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시골의 평화로운 전원이 등장하지만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대한 동경이 여전히 남아서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19세기의 유럽은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는데, 제 3계급 시민들이 난잡하고 혼란스럽게 공업화가 되어 가는 도시와 반대되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환경을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우찌 동양철학과 선비정신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뭐죠?
우리 도시인들의 귀촌 생활도 연상되고..
유럽의 시골 농부들이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사람들의 실제 삶은 척박하고 억압적인 것이었으나 낭만주의에 담긴 것은 귀족의 아름다운 시골 정원이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영웅과 같이 부를 이용하여 만들기를 꿈꾸는 상상속의 이상화된 모습이었다.
낭만주의의 다른 특징은 전통적이거나 이성적인 것 보다는 즉흥적, 감정적, 공상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간 이후 왕정이 복고되면서, 유럽의 정치는 혁명의 열정을 억누르는 동시에 질서정연한 구체제인 빈 체제로 회귀하려고 하였다. 현실 정치 환경에 염증을 느끼던 시민 사회의 정열은 문화로 표출되어 감정적이고 공상적인 표현이 문화의 주류가 되었다.
요것도 요즈음 위정자분들에게 염증과 회의를 느끼는 우리처지와 비슷하고~~
다만 차이라면 이 양반들은 19세기에 이런 생각을 했고 우리는 21세기에 한다는 가슴아픈 현실~
역사학에서는 소비자 층의 변화에 주목하는 반면에, 음악사나 미술사에서는 낭만주의 시대 예술가들 스스로의 주도적인 변화를 강조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예술가들이 창작자 자신의 세계가 없이 이전에 있었던 것의 재창조나
답습하면서 성장한 것에 챙기는 대한 반발로 개개인의 공상 세계를 주장하는 낭만주의가 생기며, 이때부터 창작자 개성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과 철학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미술에서 계몽주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조를 탄생시켰다.
하나는 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신고전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감성적인 측면이 강조된 낭만주의로 거의 동시대의 사조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낭만주의라고 하였을 때 '낭만'이라는 단어는 중세 유럽의 통속소설을 의미하는 로망(roman)에서 연원한 것으로 낭만주의 사조의 유행은 기본적으로 중세의 유럽의 고딕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낭만주의에 속한 미술가들이 전적으로 중세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중세 통속 소설에서 보여주는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낭만주의가 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2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다. 하지만 낭만의 기원에서도 설명했듯이 기본적인 생각 자체는 이미 존재했었다.
용어 그 자체만을 따져보면 이미 1798년의 문화, 예술 관련 문건에서도 낭만주의란 용어가 보인다. 따라서 몇몇 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낭만주의 이전의 경향들을 묶어 전낭만주의시대로 규정하기도 한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것은 두 사조가 동일하게 자연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두 사조는 같은 자연을 두고서도 이해하는 방식이 상이하였다. 낭만주의의 경우 자연을 억제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 보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성,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며 행동할 수 있다면 이를 억제하는 요소들인 종교나 제도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았다.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기존의 규범적인 표현 형식을 탈피하고 주제도 고전주의적 규범에 의거한 역사, 신화화를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화가들에게 부각된 것은 광기가 휘몰아치는 광경, 이국적인 전설과 자연의 풍경과 같은 것들이었다.
낭만주의 사조의 기본적인 생각 속에서 예술가 본인의 존재는 이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사조들보다 중요하다.
감성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주체는 예술가 개인이고 따라서 개인의 표현이 예술의 중요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만큼 예술뿐만 아니라 예술가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한 사조는 없었다. 낭만주의 작가들이 고백록적인 성격을 띤 자서전이나 자화상 등을 자주 그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몇몇 낭만주의 작가들은 이 시기 자주 그려졌던 풍경화를 자화상의 일종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터너의 경우 자신의 대표작 <눈보라- 항구 어귀에서 표류하는 증기선>을 그린 후 "난 단지 이런 장면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중략)...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이 그림을 좋아할 의무는 없다"라고 하였다. 그가 보기에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의 외양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표현의 수단이었고 따라서 굳이 남들에게 이해 받아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눈보라-항구어귀에서 멀어진 증기선」/1842경|캔버스에 유채물감|91.5×122㎝|영국 런던, 테이트 컬렉션
눈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가 그린 실험적인 그림들은 1840년대에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이 그림도 일부 비평가들에게 ’비누거품과 흰색 도료’라는 악평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터너를 옹호했던 당시 유력한 비평가 존 러스킨은 이 그림을 매우 좋아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지는데, 그것은 이 그림 속 증기선 ‘아리엘’이 폭풍우를 만나자 터너가 자신을 돛대에 묶었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자연세계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려는 화가의 열정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관람자들은 터너가 많이 사용한 소용돌이 형태의 구성 속으로 곧바로 빨려 들어간다. 질주하듯 움직이는 선들이 눈보라라는 주제에 맞게 현기증과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히 제한된 색채로 표현된 미친 듯이 섞이는 빛과 물결이 꿈같은 상태를 환기시키지만 화가는 모든 요소들을 관찰해 세심히 다루었다. 그는 오직 빛과 색채에 대한 지식으로, 갑판 아래에서 타오르는 불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앞을 가리는 눈보라로 인해 창출된 담황색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전함 테메레스’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증기선은 혼란의 진원지에서 위기에 처한 듯 요동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무기력하다는 터너의 신념이 이 그림에 반영돼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 작품 한점 더 소개..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The Fighting Temeraire). 전열함의 상징이자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전함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증기선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모습이다.
터너는 템즈강에서 예인선을 끌려 폐선장으로 향하는 "테메레르"를 묘사했는데 영국인들은 저물어가는 "해가지지 않는 왕국"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을 느끼면서 감상한다고 한다..
테메레르는 이름은 프랑스식이지만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건조되었는데 영국 해군이 프랑스에게서 노획한 전열함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다.
3층 갑판에 98문의 함포를 탑재한 2급 전열함으로 진수되었고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활약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빅토리(우)와
나란히 항진하는 테메레르. 뒤따라 오는 함선은 테메레르와 같은 함급의 1번함 HMS 넵튠이다. 리처드 그랑빌(Richard Grenville) 작이다.
넬슨이 이끄는 전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의 전열을 돌파하기 위해 항진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때 넬슨은 전대의 모든 전함이 기함 HMS 빅토리 뒤에 줄지어 따라와야 연합함대의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넬슨은 바로 뒤따라오던 테메레르 호에 확성기를 통해 "빅토리 뒤에 붙어주면 고맙겠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투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넬슨의 기함인 빅토리 함이 프랑스의 루카 함장이 이끄는 르두터블에게 역습을 당해 나포당하기 직전까지 가자, 신속히 달려와 빅토리 함을 구원하고 영국이 승리하는 데 일조했다. 이 과정에서 테메레르도 르두터블을 구원하러 온 푸구외(Fougueux)의 공격을 받았지만, 빅토리와 달리 더 높은 함체를 이용해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역으로 포구를 통해 백병전을 건 끝에 푸구외의 항복을 받아낸다. 물론 테메레르도 피해가 적진 않았다. 47명 전사에 76명 부상(사상률 17%), 상부 돛대 3개가 몽땅 부러져 기동성을 거의 잃는 피해를 입었다.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프리드리히도 인체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거대한 자연을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예컨대 그는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통해서 개인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다.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안개바다위의 방랑자는 지난번에 언급한 글이 있어서 링크~~
https://band.us/band/81278916/post/986
낭만주의 사조 속에 들어간 생각 뿐만이 아니라 낭만주의 미술가의 삶도 여타 다른 사조와는 두드러지게 미술 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점이 많다.
'광인'이라 불렸던 테오도르 제리코는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윌리엄 터너는 말년에 은둔 생활로 시종일관 바깥 세계와 격리된 삶을 유지했다. 말년을 검은 방에서 독수공방하였던 프란시스코 고야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미술 사조와 삶이 밀접하게 연관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유럽 세계의 변화와 빈체제로 대표되는 반동적인 경향이 개인에게 미친 영향을 명징하게 드러내며 혁명의 실패에 따른 개인의 충격이 '낭만주의적인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것은 개인의 내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로 대표되는 18세기 ~ 19세기 초의 미술 경향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풍경화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미술사를 바라보면 낭만주의는 풍경화를 역사화와 동등한 지위로까지 올려놓은 획기적인 사조라고 볼 수 있다. 미술사의 큰 역사에서 르네상스 이후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역사화가 이제 풍경화의 부각으로 인해 독점적인 우위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역사화가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아카데미 미술 체제에서 역사화는 중요한 장르였고 평가도 다른 여타 장르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만약 낭만주의자들이 풍경화의 지위를 상승시켜 놓지 않았다면 이후의 이즘( ism)시대로 상징되는 19세기의 여러 사조들이 풍경화를 통해서 자신의 사조를 표현하지 못하거나 늦어졌겠조!
이후는 장르간의 위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위계 자체가 18세기의 구체제를 답습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낭만주의자들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풍경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했고 그러한 가치는 '영웅적인 풍경화',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풍경화와 낭만주의 그리고 낭만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던 문화적인 배경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용어 중 하나다.
영웅적인 풍경화라는 단어에서는 12~13세기 중세의 영웅담에 대한 낭만주의자들의 관심과 이를 풍경화로 은유, 혹은 전이하여 드러내려는 화가들의 생각이 드러났으며 종교적인 풍경화라는 점도 중세 고딕의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경화라는 수단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당대 낭만주의 작품들의 양상에 큰 역설을 드러낸다. 낭만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화가들조차도 신고전주의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화의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며 종교적인 색채라는 것은 역으로 그들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탈피했던 종교적인 색채를 주관적인 영역에서 다시 적용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낭만주의가 사상적으로 오류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니며 역설에 가까운 현상도 삶과 연동되는 역사와 종교를 접목시킨 낭만주의의 주관성과 역동성이 파생한 한 단면인 것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자기 탐구는 창조성의 발견이라는 점이 핵심이었다. 양식의 기원에 있어 낭만주의는 결국 18세기에 발생한 일련의 억압적인 체계들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미술의 측면에서 이런 억압은 표현 형식, 주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고 본인들의 주관이 뚜렷한 역사화로 대표되는 정형화된 미술 형식을 낳게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줄곧 염두에 두었던 창조성이라는 점은 18세기 미술이 보여주었던 다소간의 획일적인 시점에서 탈피하고자 한 수단으로 낭만주의 예술을 특징짓는 기본적인 속성은 반항, 소외, 고통, 광기등과 같은 단어로 규정되며 개인의 창조성 탐구, 현실 세계에 대한 절망으로 인하여 현실도피적 성격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
너무 설명이 장황하죠~~
미술사는 사조가 되다보니 글이 진부하고 교과서적이 되어버리네요~~ 지송!
대표 미술가들 소개합니다..
중간에 소개한 분도 있지만 3분만 엄선해서 가능하면 소상하게~~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3년~1824년) 프랑스의 화가이다. 고전주의에서 해방된 낭만파의 선구자이다. 그는 루벤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1816년 이탈리아에 유학하였다. 들라크루아에게 영향을 주었다.
#오라스 베르네가 1823년에 그린 제리코의 초상화
회화는 다비드 풍으로만 신중히 그린 게랭에게 배웠는데, 동문(同門)으로 후배에 유명한 들라크루아가 있다.
게랭은 천재를 구속하지 않았다. 제리코는 21세에 〈엽기병(獵騎兵)의 사관(士官)〉을 출품했는데, 그것은 전장의 호쾌함을 실감있게 전했고 그로에 이어 정열적인 색채로서 강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天障畵)에 감명을 받아 미켈란젤로처럼 웅위(雄偉)한 제작을 염원하여 일시 화풍을 바꾸었으나, 귀국 후 제재를 찾는 중에 메듀즈 호(號)의 비극을 알고, 1819년에 그 대작을 발표했다. 평판은 의외로 좋지 않아 그는 그 대작을 가지고 영국을 순회했는데, 일찍부터 폐를 앓은 그는 영국의 기후로 병이 더욱 악화되었고, 귀국 후에는 〈질그릇 굽는 가마〉 등을 제작했으며, 낙마(落馬)하여 병이 더욱 악화, 불행한 투병끝에 31세로 요절했다. 그의 대표작은 1점에 불과하지만, 그는 자성(資性) 웅대함에 프랑스 회화가 낳은 가장 대형의 천재였다.
#《메두사호의 뗏목》(프랑스어: Le Radeau de la Méduse)은 테오도르 제리코가 1819년에 제작한 그림이다. 루브르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당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구도는 당시 평면적 전개를 피하고 피라미드형 구조인데, 희망과 감동의 초점을 멋지고 힘차게 그렸다.
당시의 사건을 그리고 있다. 1816년에 범주 전함(帆走戰艦) 메두사호는 식민지로 향해 가는 관원(官員)과 함께 약 4백 명을 태우고 출발했으나 암초에 걸렸다. 배를 버리고 승원은 구명정(救命艇)에 분승했으나 나머지 149명 때문에 커다란 뗏목을 만들었다. 대양에 나와 밧줄이 끊어져 뗏목 위에서는 물과 음식 때문에 피로 물든 싸움이 벌어졌다.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생존자는 15명이고 모두 빈사(瀕死) 상태였다. 이 보도는 세론을 들끓게 했는데, 제리코는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흥분한 순간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제리코는 제작에 임하여 생존자를 남김 없이 방문, 같은 모양으로 뗏목의 모형을 만들고 시체를 화실로 가져다가 그 경직(硬直) 상태를 조사하고, 병원을 방문하여 빈사의 인체를 연구하였는데, 제작할 때 외젠 들라크루아가 선배를 위하여 포즈를 취한 것은 또한 미담이다.
당대의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사건인데 상상하시거나 사건 개요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시길~~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이 루시엔테스(1746년-1828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이자 기록화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특히 고전적인 경향에서 떠나 인상파의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고야의 작품을 언급하자면 스페인과 프라도 미술관이 언급되어야 합니다..
프라도를 소개한 명문의 기사가 있어 허락도 득하지 않고 제멋대로 짜집기하여 올립니다.
비상업용 비공개 망구 혼자 미술사라는 "진짜 망구 혼자 생각으로~~"
프라도 미술관은 티치아노, 베로네제, 푸생, 루벤스, 바르톨로메 무리요, 호아킨 소로야, 히에로니무스 보쉬, 벨라스케스, 그레코 같은 간판 작가들이 수두룩하며 대부분이 스페인에서 활동한 분이지만 고야도 프라도의 슈퍼스타입니다.
#Goya y Lucientes, Francisco de [The Family of Carlos IV], 1800 ©Museo Nacional del Prado
프라도 미술관은 유럽의 다른 제국의 미술관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술사의 걸작들을 각국에서 수집(획득)해 컬렉션을 완성한 다른 미술관과 달리 온전히 스페인 미술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럽의 어떤 작은 미술관을 가더라도 인기가 많은 프랑스 인상파 그림 한두점이 없는 곳은 없을 겁니다.
프라도 미술관만은 자존심을 지키며 스페인의 미술만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루벤스와 렘브란트조차도 스페인 미술의 계보에 포함되는 손님으로서 초청되어 일부 공간만을 할애하고 있을 뿐입니다.
#《야경》(夜警, 네덜란드어: De Nachtwacht) 또는 《야간순찰》(夜間巡察)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의 작품이다. 《야경》의 정확한 작품명은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이다. 《야경》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가장 많은 공간을 할애하는 작가는 프란시스코 고야(1746~1818)입니다.
-1층, 0층, 1층 모두 고야의 방이 있습니다. 소장품 수는 1207점에 달합니다. 고야는 다재다능한 화가였습니다. 각 층과 각 방마다 고야의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초상화, 태피스트리, 동물 그림까지 주제별로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전기의 작업은 밝은 색채의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The Parasol], 1777 ©Museo Nacional del Prado
고야는 18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화가입니다. 어린 시절 마드리드에서 본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그림에 큰 영향을 받았고, 선대 궁정화가였던 안톤 라파엘 멩스의 제자가 됐습니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성 프란시스코 성당 등의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며 유명해지면서 왕실의 눈에 들게 됩니다.
그는 1789년에 갈망하던 궁정 화가가 됐고, 1799년에는 마침내 53세의 나이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수석 궁정 화가(First Chamber Painter)가 됩니다. 직후인 다음해 봄부터 그린 <카를로스 4세의 초상>은 보이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고야는 훈장에서부터 의상까지 왕실 가족의 세밀한 모습을 현미경으로 보듯 묘사합니다. 왼쪽의 창에서 스며드는 빛은 인물의 그림자를 만들며 방을 환하게 채웁니다. 이 그림은 색과 빛의 마술을 보는 것 같습니다.
#〈시녀들〉(Las Meninas, The Maids of Honour)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페인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화풍은 어느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물 사이의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복잡함으로 인해, 이 작품은 가장 많이 연구된 서양화 작품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미술관의 대표작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오마주를 바치는 작품입니다. 왕실 가족을 그린 초상화 왼편에 이젤 앞의 고야가 슬그머니 보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섬세한 사용, 표정과 캐릭터가 다채로운 인물 등도 <시녀들>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벽에 걸린 두 점의 그림 또한 벨라스케스의 그림입니다.
눈에 띄는 건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 왕비(1751-1818)가 그림의 주인공처럼 중앙에 위치한 겁니다. 자세는 <시녀들>의 마르가리타 공주를 연상시킵니다. 대가족을 거느린 왕후는 당시 권력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념사진을 찍을 때를 생각해본다면 이들은 셔터를 누르는 사진사를 기다리는 것처럼 준비된 모습이 아닙니다. 어수선하고 시선은 제각각입니다.
아이들의 익살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어른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지 않아 복잡한 심경을 드러냅니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혼돈이 전 유럽을 강타한 시기였습니다. 강인한 눈빛의 왕비와 달리 왕은 향후 몰락해가는 제국의 운명을 예언하듯 연약하게 묘사됩니다.
실제로 스페인은 18세기를 정점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침공을 연이어 받으며, 제국은 몰락의 길을 향하게 됩니다. 이 왕실 가족의 초상화는 스페인의 영광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그림이었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그들은 우둔한 표정과 함께 주름까지 그대로 묘사되어 추하게 보입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감없이 그려낸 고야의 붓은 가혹할 만큼 솔직합니다.
왕립 소장품 미술관에서도 이보다 1년 전 그린 고야의 왕비 초상화를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의상과 표정까지도 무척 흡사해, 훗날의 가족 초상화를 위한 습작처럼 보였습니다. 이 그림이 완성된 뒤 왕후가 보낸 편지에는 고야의 초상화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며 한 칭찬이 적혀 있습니다. 솔직한 그림을 거침없이 그렸던 고야가 미운털이 박히긴커녕 얼마나 왕실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입니다.
#벨라스케스와 같은 4개의 못을 그린 고야의 [Christ Crucified], 1780 ©Museo Nacional del Prado
#[Naked Maya], 1795-1800 ©Museo Nacional del Prado
#옷을 입은 마야
그림의 모델은 공작부인 알바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후술의 다른 의견도~~
제국의 운명만큼이나 이 화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1792년에는 콜레라에 걸려 고열로 청력을 잃게 됩니다. 이때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의 작품은 확연한 변화를 보여줍니다. 전기에 그린 왕족과 귀족을 그린 화려하고 밝은 그림들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어둡고 음울하게 변화합니다.
그의 일생을 집요하게 괴롭힌 건 종교였습니다. 고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옷을 벗은 마야>(1795-1800)일겁니다. <옷을 입은 마야>(1800-1807)와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이 유명한 그림은 종교나 신화가 아닌 일상을 소재로 한 누드화였습니다. 침대에 기댄 전통적인 비너스의 포즈를 그대로 재현했지만, 이 여인은 신화 속 인물이 아닌 현실의 인물이었죠. 몸을 가리지 않고 정면을 당돌하게 바라보는 여성의 누드는 엄격한 가톨릭 국가의 국기 문란이었습니다.
그림으로 종교재판을 받고 고초를 당하면서 그는 다시 옷을 입은 마야를 그렸습니다. 2006년작인 영화 <고야의 유령>은 종교와 반목했던 고야의 이야기를 그린 무척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고야가 사랑했던 여인을 모델로 그렸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세공해냈지만, 미술관은 이 그림을 소유했던 카를로스 4세의 수상 마누엘 고도이의 정부 페피타 투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도 소유했던 그의 실각으로 재산이 몰수되면서 이 그림은 왕실의 소유가 됩니다.
#1808년 5월2일 마드리드
#[The 3rd of May 1808 in Madrid, or “The Executions”], 1814 ©Museo Nacional del Prado
화가의 인생에 변곡점이 찾아옵니다. 1808년에서 1814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의 반도 전쟁이 일어나면서 그는 여러 기록화를 남기게 됩니다. 전쟁의 학살을 그린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는 역사적 비극을 기록한 명작입니다
스페인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카를로스 4세 시기,
유럽의 패권을 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과의 전쟁을 빌미로 스페인에 프랑스 군대를 주
둔시킨다. 스페인 민중들은 항의의 시위를 벌이자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는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아들 페르난도에게 왕위를 이양하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을 자신의 영향력에 두기 위해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를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인 조제
프 보나파르트를 왕위에 앉혔다. 이에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민중들인 민병대를 조직해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다. 마드리드
의 거리는 여기저기 뒤엉킨 사람들과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위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프랑스 군은 수천 명의 마드리드 시민들을 잔인하게 제압하고 학살했다. 1808년 5월 3일은 스페인 민병대를 제압한 프랑스군이 관련된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마드리드의 프렌시페 피오 언덕에서 처형
하는 끔찍한 순간을 담고 있다
두려움이 가득한 시민들의 표정과 어지럽게 쌓여있는 시체들, 병사들의 잔인한 모습은 한 폭의 그림 속에서 분노와 연민, 공포까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는 전쟁뿐 아니라, 자국민을 학살한 만행까지도 냉정하게 기록했습니다. 이 그림은 이후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The Pilgrimage to San Isidro], 1820-1823 ©Museo Nacional del Prado
1812년 아내 호세파가 사망하면서 그는 돌연 은둔화가가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왕이 복귀했지만 그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가정부 도냐 레오카디나와 그녀의 사생아 마리아와 함께 세상과 떨어져 지내고자 마드리드 교외에 시집을 한 채 구했습니다. 귀머거리의 집이라는 뜻의 퀸타 델 소르도(Quinta del Sordo)에서 그는 혁명적인 그림인 ‘검은 회화(Black Paintings)’에 빠져듭니다. 1820~1823년 이 집의 벽 전체를 그는 14점의 기괴한 벽화로 가득 채우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망명을 떠난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후에 에밀 드 에를랑제 남작은 1873년 이 집을 인수해 캔버스에 그림을 옮기면서, 사후 40년만에 그 정체가 알려집니다. 이 방은 미술관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14점의 블랙 페인팅으로만 채워진 0층 전시의 종착지 67번 방은 유난히 어두운 조명 속에서 검디검은 그림들이 고고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눈길을 끄는 대작은 <산 이시드로 순례길>입니다. 죽음의 공포와 본능에 굴복한 인간들은 마치 좀비 혹은 괴물처럼 묘사됩니다. 전쟁과 같은 비극 속에서는 밑바닥을 드러내는 인간의 검은 영혼을 그는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죠.
#산 이시도르를 향한 순례 1820-3년 검은 그림 연작 프라도
고야가 노년을 지냈던 집의 벽에 그린 그림이다. 이 집을 고야는 1819년에 구매했다. 고야는 1층과 2층 벽에 그림을 남겼고 그림들은 '검은 그림'으로 불린다. <산 이시도르를 향한 순례>는 그 연작 중 하나이다.
미술관그림에는 순례를 위한 행렬이 원경으로 이어지며 배경인 바위산과 하늘 모두 어둡고 칙칙하다. 검은색, 회색, 흑색과 갈색이 주조를 이루어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전경에는 한 무더기의 군중이 뒤엉켜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표정이 기괴하다. 아우성을 내지르는 입모양에 음산한 표정인데 종교적 선동을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불안이나 공포를 조장하는 표정과 몸짓처럼 보여 섬뜩한 느낌을 준다.
#축제날의 산 이시도르 초원 1788년 프라도 미술관
고야는 <축제날의 산 이시도르 초원>을 <산 이시드로를 향한 순례>보다 약 30년 전인 1788년에 그렸다. 전경에는 산 이시도르의 축제에 마드리드 근교 초원으로 소풍을 나온 군중이 즐겁게 여흥을 즐기는 모습이 꼼꼼히 재현되어 있다. 원경에는 마드리드의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다. 쾌활하게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풍경이 조화를 이룬다.
고야는 성 이시드로를 테마로 그린 두 개의 그림을 마치 문명과 야만의 특징적인 부분을 대조하듯이 그렸다. 호화로운 마차가 연이어 있고, 화려하게 차려 입은 젊은 남녀들이 여흥을 즐기며, 왕궁과 교회와 같은 웅대한 건물이 즐비한 마드리드의 도시 풍경을 묘사한 그림은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질서정연한 세계의 모습이다. 반면 하늘과 땅이 모두 검은 빛이 지배하는 척박한 공간에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는 군중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은 무질서와 광기가 난무한 야만적 미신 행사처럼 보인다.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너무나 유명한 그림입니다. 부패한 왕과 귀족, 종교인을 그는 자식을 잡아먹는 괴물로 묘사한 겁니다. 잡아먹히는 아이는 전쟁과 부패로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은유였죠. 이 끔찍한 그림은 그의 집 식탁 앞에 걸려있었습니다. 고야는 이 그림을 보며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Saturn], 1820-1823 ©Museo Nacional del Prado
고야의 작품에서 분열이 드러나는 분기점을 1792년으로 보는데, 그해 11월 고야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평생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고야 작품의 극단적 분열의 양상은 증세는 초기의 하단의 회화에서 쾌활한 표정의 남녀들이 여흥을 즐기는 장면을 그린 테피스트리의 밑그림, 화려한 의상과 장식을 과시하는 왕족과 귀족의 초상화, 그리고 종교화에서 감상에서~~
#그네 1779 년프라도 미술관
정신 분열 후기의 악몽, 죽음, 악마, 마녀를 연상하게 하는 어둡고 기괴한 장면을 묘사한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 전쟁의 참상과 폭력을 그려낸 판화집 <전쟁의 참화>, 그리고 자신의 지 벽에 남겼던 '검은 그림들'로 극단적인 면을 보실수가 있습니다.
인간 세계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그의 판화 연작들을 보면, 유럽의 왕족과 귀족, 고관대작의 초상화를 무수히 그렸던, 그리고 성당에 종교화를 그렸던 화가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운 처참하고 잔혹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로스 카프리초스>에는 극단적인 염세나 비관이 무의식에 잠재된 어두운 환상과 결합하여 발산된 듯 엽기적 그림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방귀, 로스 카프리초스, 1797년 프라도 미술관
#어떤 도움도 없다, 전쟁의 참화, 1812-15년 프라도 미술관
#이건 더 나쁘다, 전쟁의 참화, 1812-15년 프라도
#곤봉 결투, 검은 그림 연작, 1821-23년프라도 미술관
모든 작업들은 고야가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려낸, 공적 주문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일이었다. 공적인 작업과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개인적 작업에서 음울한 비관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발현한 고야에 대해, 현대성에 대한 선구적 업적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샤를 보들레르는 1857년에 이에 대해 쓰고 있다.
"고야는 영원히 위대한 화가이며, 무서운 화가일 때도 많다. 에스파냐 풍자화의 경쾌함과 즐거움에 그는 현대 세계에서 많이 요구되는 현대적인 태도를 덧붙인다. 실체가 없는 무형의 것에 대한 애호, 강렬한 대조에 대한 감각, 무서운 자연 현상, 어떤 상황에서는 동물적으로 변모하는 인간의 야릇한 생김새가 그것이다."
#[Judith and Holofernes], 1820-1823 ©Museo Nacional del Prado
옆에 걸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카라바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비롯해 숱하게 변주된 명작이 고야의 그림보다 더 어둡고 절망적으로 묘사된 적은 없었으니까요. 아시리아 장군의 죽음 또한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벽화 14점의 소재를 고야가 계획적으로 선택했음을 알려줍니다. 화가의 마지막 목소리가 담긴, 자신의 세계에 고립되어 남긴 걸작들인 셈입니다.
기존의 틀을 깬 그의 검은 회화는 인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파괴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과 대담한 붓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에는 고야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화가는 제단 앞에 묻혔습니다. 고야는 1828년에 프랑스로의 망명 중에 사망했습니다. 신비하게 사라진 머리를 제외한 그의 유해는 1919년에야 프랑스 보르도에서 옮겨졌죠.
1798년 카를로스 4세의 요청으로 거장이 그린 고야의 벽화를 원래 배경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쌍둥이처럼 붙어있는 두 성당 중 남쪽 작은 예배당은 그의 천장화가 원형대로 남아있습니다.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성당의 벽화는 사진으로도 찾기가 힘듭니다. 바닥에 설치된 4개의 거울을 통해 천장화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있도록 배려되어 있습니다.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 성당의 고야의 천장화 ©Vivi Smak/Shutterstock
1798년 고야는 6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불과 몇 달 만에 가장 빛나고 혁신적인 천장화를 그려냅니다.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작업할 수 있었던 고야는 단순하고 빠른 붓터치, 풍부한 색상, 다채로운 인물상 등 자신의 특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예배당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빛, 생명, 색채의 폭발이 방 안을 가득 채웁니다. 중앙부 돔의 프레스코화는 성 안토니의 기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는 한 젊은 남자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부당하게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 주위에는 전형적인 마드리드 군중이 모여 있습니다. 역병의 시대의 피폐한 서민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검은 회화’의 원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돔을 둘러싼 원형벽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천사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벽화는 고야의 경력에서 전환점이 됩니다. 고야의 전기와 후기의 특징을 결합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젖은 회벽이 마르기 전 빠르게 그림을 그려야하는 프레스코화의 특징 때문인지, 여러 인물들은 얼굴이 윤곽으로만 그려진 속도감이 넘치는 화법으로 표현됩니다. 그의 후기작업에 발현하는 표현주의적 기법의 시작을 볼 수 있는 셈입니다.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이 이 벽화를 보아도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종교를 그토록 싫어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감동적인 신을 위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지 말로니 윌리엄 터너
18세기 영국의 화가로 당대 거의 미술의 음지나 다름없던 영국의 유명 화가.
낭만주의에 속하는 화가지만 빛을 중심으로 그림을 전개해 나가다 보니 빛의 대비가 강렬하며, 배경과 인물이나 사물의 경계가 흐리다. 때문에 추상화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매우 독특한 화풍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화풍을 이어받은 후계자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작업들은 프랑스에서 이어받아 인상주의로 재탄생하게 된다. 여러 국가를 돌아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풍경화를 그렸으며 젊어서부터 크게 성공하여 부와 명성을 누렸다.
2020년부터 영국 20파운드 지폐의 인물로 선정되었는데, 본인의 초상과 함께 대표작 전함 테메레르의 그림이 들어가게 되었다.
몇해전 영국 BBC 라디오에서는
내셔널 갤러리와 함께 투표를 진행했는데요
"영국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그림은 무엇인가?"
반 고흐의 <해바라기>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같은
세계적인 걸작들을 모두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작품은 다름 아닌 전술한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였습니다.
영국애들도 무식하게 자뻑에 국수주의~~
터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한국어로 제작한 영상을 또 글로 옮긴 분이 있어서 소개하며 낭만주의 마감합니다!
세상에는 미술사 그리고 예술가의 소개에 진심인 분이 너무 많아 저는 감탄만 할뿐~~
터너는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의 풍경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풍경화의 모습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보통의 풍경화는 선명함과 자연의 재현에 초점이 맞춰 제작되어 실제의 광경을
얼마나 잘 담아내는지가 중요합니다.
터너의 풍경화는 다릅니다.
그의 풍경화는 윤곽선도 뚜렷하지 않고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죠!
그린 풍경이 어떤 장소인지 어떤 모습인지 분간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처음 터너의 작품을 접하면'이게 뭐지' 싶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화풍의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터너는 어릴 적 정규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발소에 온
손님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정도였죠
취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터너의 아버지는
터너의 재능을 일찌감치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터너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죠?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터너는 자신이 살던 지역의 자연과 풍경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캔버스에 담아냈죠
정확한 원근법을 준수하며 음영과 형태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전원을 소재로 한 터너의 작품은
금새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는데요!작품들을 판매하면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터너는 여유가 있으면서 더욱 더 예술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후 터너의 예술인생은
말그대로 성공가도였습니다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죠
또한 27살에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정회원 나아가 아카데미에서 원근법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터너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인정받으며 명예와 부를 쌓게 됩니다
터너가 당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영국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을 겪으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문화들이 빠르게 생겨났지만 빠른 세상의 변화 속도에 반해를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 평화롭고 한가한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을 동경하였고 전원적 삶, 목가적인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이전까지 비주류 회화로 취급 받던 풍경화가 조명받았습니다.
다시 말해 '풍경화'를 바라보는 인식이 변화했죠
하지만 터너는 이렇듯 향수만을 담는 풍경화에 그치지 않으며 전통 회화의 양식을 따르는 자신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터너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기 시작하며
세상 곳곳에 다양한 풍경들은 터너에게 새로운 영감으로 도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화폭속에 그려내기 위해 고민했죠!
1819년 그려진 <콜로세움>은
이러한 터너만의 시선을 잘 나타냅니다
작품은 1819년 터너가 이탈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린 작품으로 보통 콜로세움을 묘사한 그림들은 건물의 웅장함과 비장함을 담아내곤 합니다
터너의 콜로세움은 어딘가 아련한 느낌
견고함보다 부드러움과 고요함이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터너는 이렇듯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본 풍경을 화폭 속에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쯤부터 터너의 화풍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풍경화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택했죠!
익숙한 광경보다 자신만의 시선에 담긴
새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발굴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
"나의 일은 내가 아는 7을
그리는 같이 아니라
내가 볼 7을 그리는 7입니다"
My job is to paint what I see,
not what 1 know.
터너의 화풍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독일의 작가이자 과학자 괴테입니다.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수많은 명작으로 유명한 괴테는 1810년 자신만의 색채 이론을 정립한색채론을 출간합니다.
이전 시대의 과학자인
뉴턴의 광학이론을 반박하고자 만들어진 이론입니다
뉴턴은 프리즘을 통해 백색광은 빨주노초파람보 7가지 색의 혼합이란 걸 밝히면서 7가지 색을 세상을 이루는 기본색이라 보았죠!
하지만 괴테는 이러한 뉴턴의 주장을
과학의 권위를 빌린 독재라 비판했습니다.
빛과 어둠, 그리고 보는 눈 사이의 연관성에 따라 색채현상이 나타난다 주장했죠
세상의 색은 7가지 색으로만 구분할 수 없고
서로의 관계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이론으로
과학자들은 이 이론을 철저히 무시했지만
예술가들은 이 이론에 열광했습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변하는 빛과 색 그리고 색이 가진 심리적 효과 모두 괴테의 이론에선 자유로웠기 때문이죠
터너 또한 이러한 괴테의 색채론에 열광한 예술가였습니다.
1790년대 젊은 터너가 그린 드로잉과
1840년대 제작한 유화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그린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후기의 작품으로 갈수록
그의 색채 표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같은 풍경도 아예 다른 방식으로 재탄생합니다.
처음 그의 이러한 도발적인 작품이 등장했을 때 영국 화단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변화된 터너의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미술계의 호평을 받은 자신의 기존 스타일에 안주하지 않고터너는 실험을 멈추지 않습니다.
빛은 색입니다.
Light is therefore color
터너는 자신의 화폭속에
자신만이 바라본 시각을 담아내기 위해
터너는 자신의 화폭속에자신만이 바라본 시각을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실제로 풍경과 자연을 찾아가 그곳을 체험하며 감정을 작품 속에 담고자 했죠!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는데요~~
67세의 나이에 터너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다를 체험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가는 증기선 에어리얼에 탑승했죠
배는 실제로 폭풍우를 맞이했으며
모든 선원과 승객들이 폭풍우를 피해 선내로 도피했지만 터너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폭풍우를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선원들에게 자신을 배의 돛대에 묶어달라 말했죠!
4시간이나 돛대에 묶여 눈보라와 폭풍우에 사투를 벌이며 관찰했습니다
1842년 완성된 <눈보라 항구를 떠나는 증기선>은 노력 속에 탄생한 작품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험난한 광경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죠
작품은 그 당시에 너무나도 파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어떤 비평가는 비누거품과 석회 반죽뿐인 작품이라 혹평했으며 바다와 파도, 배가 구분되지 않는 어지러운 장면은
당대 화풍과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판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만의 시각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눈사태가 난 곳을 찾아가고
눈보라 치는 겨울 산을 넘기도 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본 광경을 화폭 속에 담았죠
기존의 자신의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만들기 위해 몸을 내던졌습니다.
덕분에 그의 예술은 이전의 화풍과도
남들의 화풍과도 다른 자신만의 세계로 나아갔죠
바뀌어 버린 화풍으로 인해 혹평을 받았던 터너는 말년에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습니다
도시를 떠나 해안가에서 가까운 첼시의
외딴집에서 은거 생활을 하죠
젊은 날 탄탄한 경력을 쌓으며 왕성하게 활동한 터너는 작품을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릴 기회가 있었습니다
작품을 판매하는 대신 기부를 택합니다
바로 그의 조국, 영국에 말이죠
터너의 작품이 있는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는 현재 11개의 윌리엄 터너 전시실이 있습니다.
기부 당시 터너가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미술관을 세워달라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으로 남긴 유산들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인상파의 창시자였던 클로드 모네는
1870년 발발한 보불전쟁을 피해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시절 접한 터너를 비롯한 영국의 풍경화들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색과 빛을 표현하는 과감함과 형태에 의존하지 않는 그림체
터너의 화풍이 인상파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보는 사람들이 많죠!
영국은 지금까지도 이러한 터너의 예술세계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1984년부터 이어진 '터너상'은
영국인들의 터너에 대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테이트 미술관은
매년 주목할 만한 활동을 펼친 50세 미만의 영국 미술가를 선정해왔으며 수여하는 상 이름이 바로 터너의 이름을 딴 '터너상'이죠
자신만의 예술철학을 고민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펼치는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예술상 중 하나입니다!
안정적인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예술가 윌리엄 터너~~
영국인들은 그가 생애를 받쳐 구축했던
그의 도전정신을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