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人類文化)의 아이러니(Irony)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제법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프랑스는 예술(藝術)의 나라’, ‘영국은 신사(紳士)의 나라’, ‘독일은 정직(正直)한 국민성’,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가톨릭 국가로 신앙(信仰)의 나라’ 등으로 불리는데 과연 사실일까?
나는 그 나라들을 두루 여행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는데 과연 그러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여러 가지 이치에 맞지 않는 아이러니(Irony)가 읽어진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라틴아메리카(Latin America) 침략사(侵略史)를 약술(略述)해 보면,
나는 스페인 전역(全域)을 3주간 배낭여행을 하면서 골고루 둘러보았는데 가톨릭 신자인 나에게는 가는 곳마다 성지(聖地)나 다름없어서 여행 내내 벅차오르는 기쁨과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성당, 마드리드(Madrid) 대성당,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성 가족(Sagrada Familia) 성당,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의 검은 성모자 상(聖母子像)....
중세(中世), 항해(航海)의 대국으로 영국과 어깨를 겨루던 스페인(Spain)과 포르투갈(Portugal)은 중남미(中南美/Latin America)로 눈길을 돌리며 침략에 나선다.
16세기 초(1519), 스페인의 정복자(征服者) 코르테스(Cortes)와 피사로(Pizarro)는 숱한 만행을 저지르지만 그중 하나만 소개하면, 당시 멕시코지역은 면적도 넓고 여러 부족이 살았는데 아스텍(Aztec)제국의 수도(首都)였던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현재 멕시코시티)을 코르테스가 점령한다.
아스텍인들은 흰 피부에 처음 보는 말을 타고 온 스페인 정복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고 한다.
테노치티틀란은 당시 둘레 10km의 호수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고 건설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도시(首都)였다고 한다.
아스텍(Aztec) 인디오들은 그들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들로 착각하여 스스로 성문을 열고 맞아들이지만, 코르테스는 당시 아스텍 왕이었던 몬테수마 2세(Moctezuma Ⅱ)를 잡아 가두자 깜짝 놀란 아스텍인들이 제발 놓아달라고 빌자 왕이 갇혀있는 방에 금을 가득 채우면 살려주겠다고 한다.
아스텍 인디오들은 집에 있던 모든 금붙이를 가지고 와서 방에 가득 채웠지만, 코르테스는 복수가 두려워 약속을 어기고 왕을 죽여 버린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일들이 한도 끝도 없는데, 결국에는 모든 지역을 스페인이 차지하면서 신성제국(神聖帝國)으로 기록되는 잉카(Inca)제국, 마야(Maya)제국 등 인디오 왕국들이 무너지는데 속죄의 의미인가, 여행하면서 보면 가는 곳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화려한 성당(聖堂)들이 들어서 있었다.
산토도밍고 성당(쿠스코) / 마추픽추 전경(집사람과 여행) / 마추픽추(태양을 묶는 기둥)
당시 잉카의 수도였던, 현재 페루(Peru)의 수도(首都)인 ‘쿠스코(Cuzco, 배꼽)’는 ‘세계의 중심(中心)’이라는 의미의 대도시였는데 스페인의 피사로(Pizarro)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만다.
현재 그곳에는 ‘산토도밍고 성당(잉카왕궁 꼬리칸챠가 있던 자리)’, ‘삭사이후아망(성벽)’ 등 가는 곳마다 고귀한 유적(遺蹟)이자 가슴 아픈 흔적(痕迹)들이 널려있다. 중남미를 여행하면서 보면 유럽의 정복자와 약탈자들을 피해 인디오 왕들이 숨어 살던 유적들도 곳곳에 있다.
잉카의 왕은 피사로의 무자비한 학살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지만 계속 패배하자 쫓기면서 가는 곳마다 맞서던 요새들이 남아있는데 끝내 대적할 수 없어 달아나 영원히 종적을 감춘다.
최후의 보루로 알려진 빌까밤바(Vilcabamba)는 수수께끼 속으로 사라져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빌까밤바에는 잉카의 왕이 도망갈 때 가지고 간, 엄청나게 많은 황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탐험가들은 지금까지도 찾기에 혈안(血眼)이라고 한다.
수도였던 쿠스코(Cuzco)에서 신성계곡(神聖溪谷)으로 불리는 삐삭(Pisac)은 가는 곳마다 지금도 요새(要塞)의 유적들이 있고 이곳에서 멀지 않는 우루밤바(Urubamba) 강가의 고대도시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에도 요새가, 그리고 숨겨진 공중도시 마추픽추(MachuPicchu)도 온전히 유적이 남았는데 이곳 봉우리에서 보면 잉카의 왕이 스페인 침략자들을 피해 도망갔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계곡 절벽의 잉카길(Inca Trail)도 곳곳에 보인다.
인도의 열차 / 영국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의 만행 / 인도 왕실의 수모
영국의 경우를 보면 1600년,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를 설립하여 아시아권과 무역을 활성화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인도(印度)에 첫발을 내디디는데 영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의 몇몇 나라들도 앞다투어 인도에 발을 들여놓는다.
18세기 초, 영국은 제1차 산업혁명(産業革命)으로 경제적인 부를 쌓게 되자 1757년에 인도에 눈독을 들이고 첫 영·인(英·印) 전쟁이라 할 수 있는 ‘플라시 전투(Battle of Plassey)’를 기점(起點)으로 인도를 정복해 나갔고, 프랑스도 뒤질세라 앞다투어 인도의 영토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1876년에 이르러 가장 세력이 우세했던 영국은 인도 주변의 여러 나라를 묶어 인도제국(印度帝國)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최고 통치자인 황제 자리를 영국 여왕 빅토리아가 겸임했으니 명실공히 인도 대부분 지역이 영국의 속국(屬國)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한 달간 인도를 배낭여행 하면서 당시 인도인들의 수난(受難)과 고통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인도 남부지역은 지명이 영어(英語)와 불어(佛語)로 이중으로 불리는 지역도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