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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 끊이지 않았던 대마도에서의 2박3일
최종민(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나는 1년여 전에 양수길원장의 권유로 NSI의 회원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선배인 강경식 이사장님과 21세기위원회 위원으로 함께 일했던 양수길원장 외에 별로 아는 사람이 없어 서먹서먹한 느낌이 있어서인지 근래에는 자주 나가지도 않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지난해 5월 8일 개성 관광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 역사탐방을 한다고 했을 때 “아! 이번에도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신청했다.
2월 6일(금) 새벽에 집을 나서 5시에 서울역 3층 ktx 타는 곳으로 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요모임에서 자주 보았던 회원 한 분이 보였다. 무조건 인사를 하고 오는 분들대로 적당히 인사를 나누며 마음으로 일행 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허남회원(이번 여행의 단장)이 오며 “명단에 있어서 만날 줄 알았어.” 며 반갑게 맞아주어 진짜 일행이 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54명으로 한 분도 낙오 없이 정해진 시간에 기차에 탑승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나누어 준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대부분 한 잠씩 자면서 부산까지 갔다. 부산역에서 배를 타는 터미널까지는 버스로 이동했고 간단한 수속을 마친 다음 9시 50분 SUN FLOWER 라는 배를 타고 대마도로 향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48km 후꾸오까에서 124km 떨어져 있다고 하니까 위치로는 우리나라에 훨씬 가까운데 일본 땅이 되어있으니 멀게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 일행은 대부분 배의 2층 객실에 좌석배정을 받아 바람이 거의 없는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갔는데 대마도의 섬이 나오기까지는 1시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땅콩처럼 생겼다는 대마도의 길이가 82km인데 우리가 정박할 항구는 이즈하라 항구로 남쪽에 있기 때문에 1시간쯤 대마도를 오른 쪽으로 바라보며 더 항해 한 다음 12시 반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기 전 부산항 터미널에서 이상무라는 가이드가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지만 처음 보는 대마도의 풍경은 상당히 촌스럽다는 인상이었다. 발전된 일본의 인상이 아니라 낙후된 일본의 어촌이라는 인상이 짙었다는 것이다. 이즈하라항 터미널의 통관절차부터 낙후된 지역의 여러 가지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건물도 허름한데다 무거운 짐을 든 사람들은 굉장히 불편할 정도로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곳이 있었고 통관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길었다. 우리 일행은 간식을 하지도 못했고 아침 먹은 지도 오래되어서 사실은 배고 고팠다. 그래도 대마도에 왔으니 무엇이든 잘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식당을 향해 가는데 걸어가는 길이 조그만 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오는 개울가 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개울에 숭어인지 송어인지 깨끗한 물에 산다는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떼 지어 다니고 있었고 개울가의 철책에는 몇 칸에 한 칸씩 조선통신사의 그림을 릴레이식으로 새겨 넣어 역사적 사실을 누구나 일상에서 접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통신사가 무엇인지 어떤 모습으로 다녔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택가의 개울에 고기가 떼 지어 다닐 수 있을 만큼 개울을 깨끗하게 관리한다는 것도 부러웠다. 그래서 누군가와 토막말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은 우리가 일본에게 배울 것이 참 많아요.”, “일본을 그대로 따라 해도 좋을 것이 많습니다.”라는 얘기가 오갔다.
점심은 핫죠(八丁)에서 우동과 밥으로 먹었다. 내 입에는 좀 짜서 이곳이 남쪽이어서 이렇게 짜게 먹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배가 고픈 참이라 그런 저런 것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아주 맛있게 잘 먹었다. 1시 반에 점심을 마치고 첫 번째 찾아간 곳은 면암 최익현선생의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였다.
최익현(1833~1906)선생은 조선말 위정척사운동의 마지막 거두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많은 상소를 올려 관철하기도 하고 전국 유림에 큰 영향력을 가졌던 큰 인물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의 철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한편 의병을 일으켜 직접 일제와 싸우는 일선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어찌 개인의 노력으로 그 엄청난 일제를 당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906년 6월 일본군사령부는 최익현에게 3년 임병찬에게 2년형을 선고하고 일본군 헌병이 호송하여 대마도 이즈하라에 연금하도록 했다. 그 곳에는 이미 호서의 의병장이던 이식 남경천 등 9명이 유배되어있었다. 이들은 모두 머리깎기를 거절하고 저항했는데 최익현은 “일본 곡물을 먹을 수 없다.”고 하며 단식을 결행하여 그 해 음력11월 순국하고 말았다. 지금의 순국비는 2m 정도 되는 돌에 大韓人崔益鉉殉國之碑 라고 새긴 것인데 1985년 8월 3일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비가 서 있는 땅 주위 몇 평을 후손들이 매입하여 지금은 명목상 그 순국비와 그 비가 있는 땅은 한국 땅이라고 말 하고 있다.
뼈아픈 사연을 가진 순국비를 보고 수선사를 나오면서 고개를 들어 가파르게 솟아있는 이즈하라 산쪽을 바라보니 군데 군데 히끗 히끗한 흔적이 보였다. 가이드의 설명인즉 그것이 백제인들이 쌓았다는 가나다조(金田城)란다. 백제가 멸망할 때 도망 온 백제인들이 신라군이 쳐들어올까 두려워 667년에 쌓았다는 성이다. 백제 식으로 축조한 성이 남아있는 것이다.
일행은 이즈하라의 다운타운에 있는 큰 건물에 가게 되었는데 1층과 2층에는 상점들이 많이 있어 그 곳에서 쇼핑을 하기로 하고 40분 정도 헤어져 각자 사고 싶은 것을 샀다. 쇼핑이 끝난 다음 3층에 있는 이즈하라 시의 홍보관에 갔다. 그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데 한국에서 대단한 사람들이 온다니까 시에서 나와 브리핑을 해 주는 것이라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무대가 있는 강당 같은 곳에 들어가니까 예쁜 아가씨와 세 명의 남자 직원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책상에는 관광안내 자료들이 있고 그 곳 공무원들은 완전 공무원스타일로 한 사람이 진행을 하며 과장을 소개한 다음 순서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쁜 아가씨는 한국에서 파견 나가 근무하는 공무원이라고 하여 친근감이 갔다. 일본 아가씨가 저 정도 예쁠 수 있을까 했었는데 역시 한국 아가씨였다. 관광에 대한 얘기는 대부분 그 아가씨가 해 주어 기분도 좋았고 이즈하라시가 관광에 대해 무척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고려문과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항구에서 조금 오르막으로 올라 간 곳에 高麗門이라 새긴 조그만 돌과 큼지막한 대문이 있고 그 안에는 隣國交隣之碑라는 내용을 옆으로 돌에 새긴 기념물이 있었다. 그 곳이 조선통신사들이 오면 영접하는 행사를 하던 곳이란다. 한국으로 치면 각 고을의 객사와 같은 것이고 고려문은 객사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 고려문이 있는 경내인 것 같은데 한 쪽에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이 있었다. 내용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대마도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생활용구들을 좀 진열해 놓았고 다수의 문서들이 있었다. 고고학 자료가 될 발굴한 물건들이 있긴 하지만 양과 질에 있어서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간 곳이 이왕조종가결혼봉축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이번에 대마도를 둘러보며 놀란 것 하나는 가는 곳마다 한글로 표지판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왕조종가봉축기념비라는 표지판도 한글로 써서 크게 붙여 놓았기 때문에 누구나 그 표지판을 보고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 표지판을 따라 담 안으로 들어가 보니 큰 돌에 李王家와 宗伯爵家가 결혼하는 것을 봉축하는 기념비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1931년에 일제는 고종황제의 왕녀 덕혜옹주와 대마도 藩主의 아들 소다케유끼(宗武志)를 정략 결혼시킨다. 대마도 번주는 덕혜옹주를 데려오기 전 덕혜옹주가 살면서 보게 될 이즈하라 일대의 환경을 정비하기 위해 산 중턱에 있던 허름한 집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고 나무를 심어 미화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게 한들 왕실의 교육을 받은 한국의 옹주와 야만에 가까운 섬나라 사무라이가 한 정략결혼이 제대로 좋은 부부로 발전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덕혜옹주는 딸을 하나 낳기는 했지만 1955년 이혼하고 1961년 귀국하여 낙선재에 있다가 1989년 별세하고 말았다. 정말 비운의 공주였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김성일 황윤길이 토론을 벌였다고 하는 세이신지(西山寺)였다. 서산사는 이즈하라 항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통신사나 조선의 사절단이 대마도에 오면 숙소로 사용되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임진왜란 전에는 일본에 사절로 함께 일본의 사정을 살피러 갔던 김성일과 황윤길이 함께 그 곳에 자면서 토론을 벌였다고 하고 임진왜란 후에는 조선의 사절로 사명대사가 일본을 갈 때 역시 그 곳에 유숙했다고 한다. 그런 역사 때문인지 절의 뜰에는 큼지막하게 학봉김성일의 시비가 서 있었다. 나는 학봉종가의 종손이 내 친구여서 그런지 훨씬 친근감이 생기고 반가워서 강경식이사장님과 사진을 한 컷 찍었다.
첫날의 관광은 이런 식으로 마감하고 진짜 일본을 체험할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시마모또(島本)라는 식당에 갔는데 그 식당은 이즈하라에서 제일 큰 식당 같았다. 메뉴도 순 일본식으로 갖가지 해산물을 끓는 육수에 넣었다 먹는 것이었는데 맛도 있었지만 먹는 동안의 이야기며 특별한 술을 준비한 회원들이 술 권하는 모습 등 무척 재미있었다. 서비스하는 여자들이 처음에는 상마다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조금 지나니까 술잔이 거듭되고 여기저기서 재미있는 얘기들이 쏟아져 나와 웃음이 연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마담에 해당하는 주인여자가 나와 정중히 인사하는데 기모노를 입은 것부터 인사하는 예가 완전히 게이샤를 닮은 느낌이었다. 마침 나와 같은 테이블에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김대사님이 계셔서 다른 곳에서 술 마시고 있는 여주인을 오게 하여 농담해 가면서 아주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처럼 화기애애하게 술과 식사를 어느 정도 했을 때 가이드가 나가 하는 말이 이 집 주인이 춤을 잘 춘다고 하면서 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무대와 음향실도 갖추어 있어 준비도 잘 되어있는 듯 했다. 그 마담은 처음 여자춤이라고 하면서 부채를 들고 나와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정말 볼 만하게 아담하고 좋은 춤을 추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으로는 남성적인 춤을 보여주겠다고 하면서 군가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춤사위가 완전히 일본군을 느낄 수 있는 춤이었다. 나는 그 춤 두 가지를 보면서 “아! 이것은 관광상품으로 거의 완벽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큰 식당들도 식사와 함께 무슨 문화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하기도 하고 비용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마모또식당처럼 마담이 술 대작도 하고 춤도 출 수 있다면 어느 식당이 그런 프로그램을 하지 않겠는가? 혼자 추는 춤인데도 손님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이니 일본의 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멋진 마담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즐겁게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호텔로 가고 한 팀은 리조트로 가서 첫 날밤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감기와 편도선염으로 오래 아팠기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일부는 어디엔가 모여 술과 이야기로 또 한 번의 웃음판을 벌렸을 것이다.
2월 7일
아침 일어나 밖에 나가니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공기가 달다는 느낌이다. 바로 옆이 바다인데 바다 밑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다. 무엇보다 바다 언저리 어디에도 플라스틱 덩어리나 빈 캔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 바다와 아주 다른 모습이다. 대마도 사람들은 바다 가꾸는 마음이 대단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는 습관이 체질화 되어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침을 맛있게 먹고 버스로 한 참 달려 만제키(萬關橋)를 갔다.
만제키는 대마도의 상도와 하도를 잇는 다리인데 관련된 사연이 흥미롭고 역사성이 대단하다. 대마도는 본래 나누어져 있지 않고 붙어있는 한 개의 섬이었다. 그 섬을 둘로 나누어지게 만든 것은 군사작전을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1900년에 일본군은 지금의 만제키교가 있는 그 운하를 팠다고 한다. 그리고 노·일전쟁이 있었던 1905년 세계 최강의 러시아 발틱함대가 대마도 옆을 지날 때 일본함대를 운하 동쪽에 숨겨두었다가 운하를 통해 이동하여 발틱함대의 옆구리를 처서 격파했다고 한다.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동도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는 일본인들이 지금도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 되었다.
관제키를 보고 간 곳은 신라의 대표적인 신사라고 하는 와다즈미(和多都美)신사였다. 이 신사는 김수로왕의 자손이 건너와 세웠다는 설, 장보고의 소실이었다는 설, 일본 왕가의 조상되는 천신(天神)과 해신(海神)의 결합 전설과 관계있다는 설 등 배경설화가 많은 해양신사이다. 그래서 다른 일본의 신사들의 도리는 대부분 동향이거나 남향인데 이 신사는 서향이고 도리가 다섯 개 바다로 향하여 차례로 서 있는데 두 개는 밀물 때 물에 일부가 잠기게 되어있다. 신사 경내에는 조그만 스모 경기장도 있는데 신성시해서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또 신사 앞에 돌로 된 상이 있는데 그것을 고마이누(高麗犬)이라 하는 것을 보면 옛날 한국 개가 용맹하고 무엇이든 잘 지키니까 일본 사람들이 한국 개를 신사를 지키는 상징물로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와다즈미신사를 본 다음 좀 걸어서 버스에 타고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한 참 올라가 에보시(鳥帽子)전망대에 도착했다. 차를 두고 좀 걸어서 전망대에 오르니 아소만이 한 눈에 들어오고 대마도가 엄청나게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은 선명한 청색이고 산들은 온통 녹색이어서 바다가 산을 끌어들이듯 리아스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 정말 아름답다. 또 그 어느 한 부분에 빨간색 지붕의 건물이 있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하여간 에보시다케 전망대에서 바라 본 아소만은 대만 최고의 절경이다. 그런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것도 모두 한국사람 같은데 전망대가 좁아 오래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산을 내려와 찾아 간 곳이 백제인들이 와서 세웠다는 최초의 절 바이린지(梅林寺)였다. 말로는 백제의 성왕이 사람을 보내 대마도에 지은 최초의 절이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의미가 큰 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하나의 묘지처럼 보인다. 오래 된 절인데도 그 동안 그 곳에 모신 묘들은 돌 비석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많은 비석이 공동묘지를 이루고 있다. 바이런지 건물 왼쪽으로 돌아가니까 그 곳에도 상당히 넓게 묘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말이 절이지 공동묘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일본에서는 결혼은 교회에 가서 하고, 소원성취는 신사에 가 빌고 죽으면 절로 간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바이린지 같은 유서 깊은 절도 묘지 역할 밖에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그런데 바이린지의 절 명칭이 한문으로는 嶺南山梅林寺였다.
평지로 나오니 논들이 있고 어느 집 앞에는 농사일을 하는 아낙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 지역은 옛날에도 농산물이 많이 나는 곳이어서 농산물을 잘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발달했다고 한다. 그 창고라는 것이 돌로 지붕을 이은 이시야네(石屋根)라는 것인데 널따란 판석으로 지붕을 튼튼하게 하고 그것을 바칠 기둥도 튼튼한 나무로 하였고 바닥은 땅에서 30cm정도 뜨게 만들었기 때문에 습기나 비·바람에 관계없이 곡물을 잘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창고는 공동의 것이었던 것 같고 그 지역에 크고 작은 것이 여러 개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지붕만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 또 그냥 모양만 옛날 모양을 유지하고 나머지는 다 다른 것으로 바뀐 것 등 변하기는 했지만 그런 유적을 가능한 한 계속 잘 보존하고 있었다.
점심을 그 곳 메밀로 만든 소바를 먹었는데 유명한 소바집(對州소바)이어서 우리 일행 외에도 손님이 여럿 있었다.
점심 후 간 곳이 유명한 몽고군 전적지 고모다하마(小茂田병)였다. 큼지막한 간판에 한문과 한글로 안내판을 만들어 놓았다. 제목은 元寇의 古戰場(佐須浦)인데 그 곳이 1274년(高麗元宗15년)과 1281년(高麗 忠烈王7년) 두 차례에 걸쳐 려·몽 연합군이 쳐들어왔던 곳이라는 것을 설명해 놓았다. 처음에는 3만명의 병력과 900척의 배가 쳐들어 왔는데 대마도주는 68세의 노장으로 80여기를 이끌고 전쟁을 하여 시체가 두 동강이 나는 장렬한 전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전쟁이 다 폭풍으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내고 물러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바람을 神風 즉 가미가제라 한다는 것이다. 그 곳에는 신사도 있고 비석도 여럿 있는데 큰 비석 앞에 있는 선인장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10년에 한 번씩 핀다는 꽃이 5m 쯤이나 아주 높게 올라가 피어 기이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이즈하라 항의 남쪽 구타(久田)포에 있는 오후나에 선착장으로 갔다. 1663년 소노요시자네가 만들었다는 이 선착장은 에도시대 대마도 번주가 사용하던 것으로 배를 격납하거나 수리하는 곳이다. 돌로 쌓아 만든 구조물이 옛날 그대로 남아 있어 관광지로 유명한데 옛날 이 곳은 조선통신사의 배를 대 놓던 곳이어서 조선통신사가 오는 날엔 화려한 조선통신사행렬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대마도 종가(宗家)의 무덤이 있는 만송원(萬松院)을 향해 갔다. 우리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가이드가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해서 늘 우리를 웃겨주었다. 그 중에서도 진천사람들의 얘기라며 충청도 사투리로 말한 “줄껴”, “할껴”, “워쩌”, “한겨”, “개혀” 같은 말은 회원들 간에 계속 회자되기도 했다. 만송원은 밑에 절이 있고 돌계단으로 된 가파른 산을 올라가면 그 곳에 세 계단으로 묘석들을 주욱 모아 놓은 묘지였다. 종가의 19대 종의지(宗義智)가 1615년에 죽었다는데 그의 묘가 제일 윗단에 20대 종의성(宗義成)과 거의 나란히 아주 크게 만들어져 있다. 이런 묘가 상·중·하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의 사당에는 그렇게 역대 번주와 정부인들의 묘가 있고 중의 사당에는 측실과 아동 등이 있고 아래 쪽 하의 사당에는 일족과 종가에 출가한 누구의 생모 같은 사람들이 모셔져있었다. 이 절에는 도꾸가와이에야쓰 일가의 위패도 모셔져있어서 일본 3대 묘지 중의 하나라고 한다. 또 조선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몇 가지 보물이 있는데 우리들은 절을 수리하는 중이라 보물을 한 곳에 모아 놓았다는 입구의 작은 건물에서 청동으로 만든 학과 거북 꽃 등을 볼 수 있었다.
만송원을 보고 조금 이른 4시에 우리 숙소가 있는 리조트에 와서 1시간 정도 배를 타고 아소만 일대를 보기로 했다. 배는 노래방 시설도 되어있고 음료도 마실 수 있어 몇 사람이 술 마시고 노래하며 노는 놀잇배라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는데 수용인원이 3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우리 일행은 두 패로 나누어 타게 되었다. 종일 보아 온 것이 산과 바다였는데 배를 타고 나가봐도 역시 산과 바다였다. 다만 이곳이 아소만이다 하는 것만 의식하고 우리끼리 얘기하며 즐기다가 6시 저녁 바비큐시간에 늦지 않도록 선착장으로 왔다. 선착장은 바로 우리 리조트에 붙어있는 곳이어서 뱃놀이 하기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저녁은 바다를 바라보며 천막에서 고기와 해물을 구워먹는 바비큐로 준비되었다. 낮에 잡았다는 오징어 새우 조개 등 해물이 풍부했고 쇠고기 돼지고기 소시지까지 양파와 구워먹게 되었다. 술도 모두 즐겁게 마셨고 주먹밥도 맛있었다. 주먹밥을 구워서 먹어 보니 더 고소하고 맛있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가이드가 기타를 가지고 나가 치면서 여흥의 시간을 유도했다. 먼저 가이드가 ‘베사메무쵸’를 멋있게 불렀다. 일행들은 약간 들 뜨는 분위기가 되면서 노래를 더 하라고 하니까 자기의 사부님이라 하면서 우리 회원 중 한 분을 불러내었다. 그런데 그 회원의 말솜씨가 그 분위기에 우리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 할 만큼 재미있었다. 그러고 나서 ‘라노비아’를 노래하는데 전체를 리드하며 노래하는 솜씨가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 여자회원이 들어 온 다음 여흥 분위기를 앞에 나가 이끌던 우리 일행의 허남단장이 느닷없이 나를 불러내었다. 그래서 몸이 좀 불편하지만 할 수없이 나가서 시조는 시의 이름이 아니라 노래의 이름이라는 것을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고 지름시조 “바람아 불지마라 휘여진 정자 나뭇잎이 다 떨어진다.”까지 초장만 불렀다. 모두들 박수를 치고 대단한 호응을 보여주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대마도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잘 먹고 시내 호텔로 갈 분들은 버스를 타고 가고 나머지는 리조트에서 각자의 저녁시간을 보냈다.
2월 8일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다. 7시에 아침들을 먹고 8시에 리조트를 출발하여 대마도 섬의 최북단까지 버스로 가는 날이다. 그 곳에 한국전망대가 있고 부산으로 가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다. 버스길은 좁고 꼬불꼬불하여 옛날 한국의 산골길을 가는 느낌이 날 정도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계속 볼 수 있는 대마도의 나무는 대나무처럼 쭉쭉 곧게 뻗어 올라간 나무인데 이름을 몰라 물어보니 스즈끼나무라고 하는데 목욕탕의 물통을 만드는데 사용하면 좋은 나무란다. 하여간 그런 나무자원이 엄청나게 많은 곳이 대마도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무는 꽤 비쌀 것 같고 돈으로 따진다면 굉장한 자원이 될 것 같았다.
우리들은 한 참 만에 상대마정(上對馬町)에 도착했다. 그곳은 행정기관인 듯한데 역사자료관이 있었다. 옛날 청동기 유물도 몇 점 있고 고서유물 목록도 있는데 놀랍게도 고려의 팔만대장경본과 원나라의 장경본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 유물이 지금 그곳에 있을 리는 없겠지만 대마도가 한국과 가까운 곳이니까 그들이 약탈해 갔거나 무슨 이유로 하사 받은 진기한 물건들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런 경판으로 인쇄한 책이라든지 범종이나 불상 같은 것은 얼마든지 그럴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보물들은 대부분 본토로 가져가 보관중이고 지금 대마도에 있는 것은 모사본이 많다고 한다. 그곳 전시물 중 석관묘가 있는 그 그림 앞에서 가이드는 한국의 묘제에 대해 멋진 강의를 했다. 그런 강의를 들은 다음 우리가 간 곳이 바로 그 석관묘가 있는 벽력신사였다.
벽력신사의 표지판은 조일산벽력신사(朝日山霹靂神社)로 되어있어서 무언가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신사는 바닷가에 임해 있고 바로 뒷산에 해당하는 가파른 곳을 20m쯤 올라가니까 오래전에 발굴했지만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직사각형 석관이 있었다. 우리나라 옛 무덤과 같은 방식이다. 그런 무덤 다음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방후원분이라고 하는 한 반도와 일본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묘제인 것을 상기하면 대마도는 이래저래 한반도와 오래전부터 깊은 관계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벽력신사는 입구부터 짚으로 만든 금줄이며 기이한 모양의 신물이 많아서 흥미를 자아냈다. 일본은 수 만개에 달하는 그 촌스러운 신사를 지금도 유지하고 매년 짚으로 금줄을 치고 의식에 사용하는 도구도 짚으로 만들어 쓰고 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짚을 사용하고 있는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초가집에 살고 멍석에 곡식을 널어 말리고 짚방석에 앉아 군불을 때고 새끼를 꼬아 이것저것 만들어 쓰고 하던 것이 이제는 아주 현실에서 사라진 옛날이 되었는데 대마도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옛날을 상당부분 간직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잘 하는 것인가? 대마도가 잘 하는 것인가? 무엇이든지 살다 간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면 역사적이 되는 것이어서 대마도는 별 것 아닌 것들을 가지고 무슨 박물관 보여주듯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들에 비하며 우리는 변화를 좋아해서인지 개혁성향이 강해서 그런지 우리 것을 다 버리고 지난 것을 없애버려서 100년 된 것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간 곳이 한국전망대이다. 맑은 날은 부산이 보인다고 하는 전망대인데 부산에서의 거리가 49.5km라고 한다. 그 전망대가 있는 곳에 朝鮮譯官使慰靈碑가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112명의 이름을 새겨서 위령비를 만들었는데 그 위령비에 얼킨 사연은 이런 것이었다. 대마도는 역관들의 역할이 많은 곳이어서 제3대 대마도주가 죽은 것을 애도하고 제4대 대마도주가 습봉하는 것을 경축하기 위해 조선역관 108명과 대마도선비 4명이 1703년 2월 5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향해 갔다고 한다. 그런데 대마도의 항구 와니우리에 입항하기 직전에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112명 모두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애도하기 위해 그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런 것도 다 한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작전의 하나 아닐까? 대마도의 인구는 4만명 정도인데 한국관광객은 매년 증가하여 2007년에는 13만 4132명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숫자이다. 전체 관광객의 95%가 한국관광객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웬만한 시설은 다 한글 표지판을 만들어 놓았고 특히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경고성 문구는 다 한글로 되어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양국간의 현실인 것을 -
우리는 볼 것 다 봤다는 심정으로 히다카츠(比田勝)에 있는 식당에서 우동으로 점심을 먹고 바로 옆의 히다카츠항에서 승선 및 출국수속을 마친 후 DREAM FLOWER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 서울을 향했다.
첫댓글 교수님 덕분에 대마도 구경을 잘 하였습니다..^$^ 관광다녀온 설명을 잘해 놓으셔서 이해도 잘 가고 재미도 있네요. 언제 저도 함 다녀오도록 할겁니다. 대마도는 결국 한국의 역사와 애환을 한국 사람들한테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는것이네요.. 독도도 우리땅이고 대마도도 우리땅인데...
안녕하세요..! 장문의 여행기 참 잘봤습니다.마치 여정을 그대로 답사한 느낌입니다.사실 이리 가는 경유지마다 상세히 기억에 담고 메모하여 장문의 후기를 쓴다는게 왠만한 정성 아니고서야 할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덕분에 대마도에 관한 자료로 잘 활용하겠으며 좋은 지식이 되어 감사합니다.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사진도 있으면 더 멋진 감상을 하겠습니다.... 꾸~벅.
대마도 다녀와서 기행문 올리라했더니 기특하게도 숙제를 잘 했구먼. 우리 역사나 대동여지도에 대마도는 독도 울릉도와 함께 분명 우리땅으로 돼있는데 1953년에 일본이 대마도를 빼앗으면서 한국인들을 다 내쫒았던 만큼 아직도 대마도 곳곳에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가 생생하게 남아있을 숨결을 사진과 함께 읽고 싶었는데.. 불과 반세기전까지 우리것이었던 빼앗긴 땅에 갔으니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보다 '울분을 참을수 없었던'으로 했다면 숙제제목으로 더 적당했을것을. 우리가 함께 개성 탐방 갔던 NSI팀과 같이 갔구먼. 그러고보니 우리가 그때 개성 가둔게 참 잘했다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