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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에 대한 설명과 비판 차례
Ⅰ.기본소득 10문 10답
Ⅱ.기본소득 연재
1. 기본소득의 역사적 기원,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기본소득 -김성일
2. 해외사례 소개 - 최광은/3. 기본소득과 기존복지제도(워크페어) 비교 - 권문석
4. 기본소득과 민주주의 실현 -금민
5.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경제성장(고진로) 가능한가 - 안현호
6. 기본소득의 정치경제적 효과분석:빈곤과 소득 불평등 해소는 가능한가 - 백승호
7. 기본소득 재원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 강남훈
8. 자본주의, 노동패러다임, 기본소득 - 김원태/9.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 - 강연자
10.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과 여성 - 김미정
11. 한부모, 비혼모,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와 기본소득-야마모리 토오루
12. 이행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 - 곽노완/13. 대안사회를 향한 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 - 이수봉
Ⅲ.기본소득에 대한 비판
Ⅲ-1어떤 유토피아론에 대해서-기본소득론 비판
Ⅲ-2 불필요하고 해로운 기본소득론
Ⅲ-3노동에서 분리된 소득? 참신하지만 매력적이진 않아-기본소득, 섣부른 제도설계에 대한 우려
Ⅲ-4 기본소득, 체제 내부 전략이며 이행전략--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의 무지와 몰역사성 비판 /금융수탈체제
Ⅰ.기본소득 10문 10답
제가 10문 10답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것은 토론을 위해 제 개인의견을 많이 담아 만든 것입니다.
녹색당의 정책으로 기본소득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 제 의견과 다른 내용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저는 먼 미래가 아니라 2016년 총선에서 기본소득을 녹색당의 핵심정책으로 하자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본소득을 어떤 식으로 정책화할 것인가에 대해 제 생각을 밝히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에 관한 여러 쟁점들까지 다 정리하다보니 내용이 좀 길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소득을 처음 접하는 분은 <문> 1,2 정도까지 읽어보셔도 좋을 것같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문1> 기본소득이란?
기본소득은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노동을 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조건없이 일정액의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입니다. 극심한 불평등,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일자리, 불안정노동, 생태적 위기의 시대에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은 추가의 소득을 위해 노동을 할 수도 있지만, 노동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사회참여나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본소득 외에도 생존소득, 시민소득, 사회소득, 보편소득, 시민배당같은 이름들도 사용됩니다.
점점 더 많은 지식인들이 기본소득을 몽상이 아니라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 마틴 루터 킹, 앙드레 고르.. 이런 사람들이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미드(James Meade)같은 경제학자도 기본소득을 제안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문2> 기본소득을 왜 주는가?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이 모두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데 기여했다고 보고 일부의 경제적 부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가게 하려는 장치입니다(바티스트 밀롱도).
특히 토지같은 경우는 본래 공유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토지가 철저하게 사유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토지를 부분적으로라도 공유재로 되돌리기 위해 토지보유세 강화같은 것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만약 부동산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에 대해 세금을 걷거나 토지보유세를 걷어서 시민들에게 현금으로 나눠주는 것을 어떨까요? 만약 그런 것이 현실화된다면 일종의 공동체가 실시하는 배당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본소득은 시민배당같은 성격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기본소득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되어야 자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렇다면 소득에 대한 최소한의 접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권리로 보장하자는 것이 기본소득입니다.
이런 식의 기본소득은 현재의 복지제도가 갖고 있는 ‘낙인효과’나 관료주의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심사를 받지 않아도, 신청을 하지 않아도 지급하는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년에 있었던 ‘세모녀 자살’ 사건같은 비극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한편 기본소득은 정보화, 자동화로 인해 실업이 점점 더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대안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실업, 특히 청년실업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기존의 정치세력들은 ‘일자리 창출’을 내세우지만, 설사 경제성장을 하더라도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현실적인 대안은 임금노동을 하는지에 관계없이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개인이 다양한 일(사회공동체를 위한 일을 포함해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없어지는 일자리’에 매달리게 하는 것보다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날로 심각해져가는 불평등을 줄일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이 재분배효과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는 저는 스위스에서 논의되었던 임금격차 상한제나 일정 금액 이상의 소득에 대해서는 강력한 소득세를 부과하는 것도 논의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기본소득을 보장하고 한편으로는 임금격차를 줄여나가면, 불평등은 완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격차 상한제 등에 대해서는 아래의 이상헌(국제노동기구 사무부총장 정책특보)의 <한겨레21> 칼럼을 추천합니다.
<미국프로농구 연봉체제 도입을>
또한 기본소득은 생태적 전환을 위한 밑바탕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경제성장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원전을 짓고, 온실가스 배출을 방치하고,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착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녹색당은 ‘경제성장을 국가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국가의 목표는 ’구성원들의 좋은 삶‘과 생태/정의/인권/평화같은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경제성장을 국가정책의 목표에서 지우는 것, 즉 탈성장이 생태적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경제성장도 추구하지 않고 일자리도 줄어드는 상황에서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불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통해 ‘생태적 전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다른 사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사람들 사이에 퍼뜨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돈을 벌기 위해 굳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습니다. 좀 덜 벌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재원을 생태세나 생태파괴에 대한 부담금 형식으로 걷는다면, 기본소득은 기후변화 등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Carbon Fee & Dividend'라는 형식으로 입법운동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관련된 링크를 아래에 겁니다.
이런 식으로 온실가스배출에 대해 세금이나 부담금을 매기고, 그 돈으로 시민들에게 배당(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획기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농업,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귀촌이나 귀농을 생각하면서도 선 듯 실행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매월 일정액의 현금수입이 보장된다면 귀촌, 귀농을 선택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특히 청년들의 경우에는 농촌이나 농업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막상 귀농을 했다가도 기본적인 현금수입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귀농을 포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경우도 생깁니다.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소농들이나 귀농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지급은 일자리를 늘리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앙드레 고르는 프랑스에서 유기농업이 활성화되면 농사를 전업적으로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5배 늘어날 것이라고 했는데, 대한민국도 그럴 것입니다. 문제는 친환경농업을 하는 소농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을 지급해서 친환경농업을 하는 소농들이 늘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일자리 정책입니다.
다른 한편 저는 더 평등한 사회가 생태적 문제를 덜 낳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온실가스 배출량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영국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상위 10%가 하위 10%에 비해 2배이상 내뿜는다고 합니다(아래 링크 참조). 더 평등하면서, 지탱가능한 사회를 위해 일정정도 불편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한편 기본소득은 여러 굴레에 매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청소년에게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진로와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높은 대학진학율(80%가 넘는)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대학을 가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는 청소년들, 청년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업주부인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어떨까요? 문화예술을 하면서 알바로 생계비를 버는 사람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어떨까요? 그동안 임금노동이 아닌 일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왔습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인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본소득은 여성이나 젊은 사람들의 독립성을 강화할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가구별이 아니라 개인별로 지급되므로 가족 각자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기본소득은 현금으로 지급되며 어떻게 쓰는 지도 각자의 책임에 맡기는 것입니다.
** 기본소득에 대해 제가 <행복하려면 녹색(이매진)>에 쓴 글을 붙입니다.
세계는 생태위기와 극심해지는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겪고 있다. 또한 자동화,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경제성장을 한다고 해서 더 이상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드러났다.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어떤 일자리인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원전을 더 지어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방사성폐기물이 늘어나면, 그것을 처리할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대량살상 무기를 더 만들어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사회가 더 불평등해져서 범죄율이 늘어나도 일자리는 늘어난다. 교도소도 더 지어야 하고 교도소를 지킬 사람들도 더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먹거리를 사람들에게 제공해서 아픈 사람들이 더 많아져도 일자리가 늘어난다. 이런 일들이 많아지면 그것을 담당할 관료조직이 비대해지고, 이런 일에 돈을 투자하거나 빌려주는 곳도 늘어난다.
이런 활동은 경제성장률을 올리는 효과도 있고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바람직하지 않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앙드레 고르도 무기를 제작하는 일이건, 사치스런 물품을 제작하는 일이건, 1회용 물품을 제작하는 일이건, 전세계의 방사성페기물을 처리하는 일이건 간에 고용을 창출하는 모든 일자리가 좋은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게다가 이런 식의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한들 불평등은 더욱 심해진다. 실제로 위험하거나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은 저임금.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으로 돌아가기 쉽다. 그리고 이런 일로 많은 돈을 버는 것은 극히 소수이다.
더구나 문제는 이런 식의 일들을 통해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더 많은 온실가스를 내뿜고 더 많은 폐기물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생태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심각한 불평등과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본소득에 주목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하지 않는 ‘베짱이’에게 왜 국가가 돈을 주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을 하지 않는 ‘베짱이’와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 노동자 중에 누가 더 ‘기여도’가 높은지, 아니면 세상에 해악을 덜 끼치는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베짱이와 부패한 재벌총수 중에 누가 더 세상에 기여하는지? 라는 질문도 던져봐야 한다.
그 베짱이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1주일에 한번은 동네어린이들에게 기타를 가르칠 수도 있고, 노인들에게 식사를 만들어 배달하는 자원봉사를 할 수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한 일만 일인 것은 아니다.
<문3> 기본소득은 얼마나 지급될 수 있나?
기본소득의 지급액수는 우리나라나 외국에서나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정책으로 만들려면, 기본소득의 지급액수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일단은 그리 높지 않은 금액으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소득에 대해 일찍부터 고민해 온 강남훈 교수님은 최근 월 30만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생태적 측면까지 고려하고 재원조달의 문제까지 고려해서 기본소득의 지급액수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번역된 <조건없이 기본소득(바다출판사)>에서 프랑스의 경제학자 ‘바티스트 밀롱도’는 생태학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과도한 기본소득 액수를 주장하는 것은 기만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도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편입니다. 기본소득은 ‘탈 성장’의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기본소득을 과도하게 지급하자는 것은 현실성도 없고 생태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강남훈 교수님이 월 30만원을 얘기하는 것도 그런 측면을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낮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인당 월 30만원이면, 2인가구면 60만원, 3인가구면 90만원, 4인가구면 120만원입니다. 만약 농촌에 거주하는 4인가구가 월 120만원의 현금수입이 고정적으로 생긴다면, 그것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갓 귀농한 소농가구의 연간 소득보다 더 많은 금액일 수 있습니다. 2011년 농가의 가구당 농업소득이 연간 875만원에 불과한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만난 귀농하신 당원 한분은 월 50만원만 있으면 누구도 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촌에서는 생활비를 줄여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 당원님은 지금까지도 농사를 지어서 나름대로 잘 살아 왔지만, 국가에서 얼마라도 기본소득을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기본소득의 금액은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나 사회의 모습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높지 않은 금액으로 기본소득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기본소득 모델을 발표한 핀란드 녹색당의 경우에도 440유로 정도를 제시했습니다. 핀란드의 최저생계비의 절반 수준입니다. 핀란드는 우리보다는 소득이 높은 국가이니까 그것까지 감안해서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생각해 보면 될 것같습니다.
<문4> 기본소득과 복지제도, 최저임금과의 관계는?
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해서 기존의 사회복지제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기본소득을 높지 않은 수준으로 지급할 경우에는 기존의 사회복지제도에 더해서 지급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다만 일부는 통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차등적으로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7월부터 '기초연금'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같은 경우에는 그 성격이 기본소득과 유사하므로(조건없이 지급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다르지만, 매월 현금지급을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기존의 사회복지제도는 원칙적으로 유지하고, 일부 조정하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기본소득은 생활임금과 연계해서 추진되어야 합니다. 자칫 기본소득의 지급이 저임금착취를 용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녹색당은 생활임금 보장을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기본소득은 복지제도 개선과 상충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경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 이명현 교수가 쓴 <복지국가와 기본소득> 마지막 부분에 아래와 같은 얘기가 나오는데, 저도 공감하는 편입니다.
“기본소득은 복지국가를 초월할 것인가? 노동과 복지의 형태를 수정하여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높인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복지체계로부터 한걸음 전진한 것이다. 그렇지만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유산 위에 세워져 있으며 복지국가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5> 기본소득의 재원은 어떻게 조달할 수 있나?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습니다. 제가 썼던 책 <행복하려면 녹색>에서도 개략적인 논의를 아래와 같이 소개했습니다.
“제임스 미드같은 사람은 자본과세와 투자신탁으로부터의 수익 두 가지로 실업 수당 정도의 생계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거래세(토빈세)를 재원으로 삼자는 주장도 있고, 온실가스 배출이나 환경오염에 대해 재원을 부담시키자는 애기도 있다. 소비세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자는 주장, 소득세를 증세하자는 주장, 통화발행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면 된다는 주장 등등 다양한 제안들이 있을 수 있다. 국가마다 상황이 다르고, 조세제도 등 여러 제도들이 다르므로 반드시 기본소득의 재원조달방법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이런 일반적인 논의에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현실에 맞춰 재원조달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보면 정부재정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이 많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핀란드 녹색당의 기본소득모델에서도 * 노동소득세와 자본소득세를 상향조정하고 몇몇 면세항목을 철회하고 환경세를 새로 도입하며 * 기본소득보다 낮은 금액의 사회보장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해서 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정부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여 사회신용을 기금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제안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강남훈 교수가 월 30만원의 기본소득 지급할 경우의 재원마련 방법에 대해 제시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한겨레21에서 인용).
- 생태세 : 기존에 있던 교통·에너지·환경세와 부가가치세를 혼합해 생태세로 전환. 거래되는 모든 물건에 생태세를 부가가치세 형식으로 매겨 40조원을 마련.
- 토지세 : 기존의 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를 토지세로 전환. 2013년 전국 토지의 개별공시지가 총액 3879조원에 1%의 토지세만 매겨도 39조원을 거둬들일 수 있음.
- 지하의 숨어 있는 돈에 과세 : 지하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250조원의 ‘숨어 있는 돈’을 포착해서 10%의 세금을 매길 수 있으면 25조원이 확보.
- 소득세 : 2014년 예산안에서 종합소득세(근로소득 포함)는 54조2천억원으로 잡혀 있는데, 여기에 50%의 기본소득세를 부과하면 27조1천억원이 마련. 또 배당과 이자소득 원천세율을 현재 15.4%에서 30%로 인상하면 추가로 각각 15조원을 걷을 수 있음. 증권양도소득(파생상품 포함)도 종합소득에 포함해 세금을 부과하면 30조원을 확보할 수 있음. 2010년 법인을 포함해 5% 미만의 지분을 갖고 있는 모든 투자자가 상장 주식을 양도해 얻은 차익에 대해 20%의 세율로 과세하면 22조4천억원이 추가 징수됨.
- 기존 사회복지지출과 중복되는 부분을 줄여 13조원을 마련.
저는 강남훈 교수님의 제안에서 빠진 부분에도 주목합니다. 토건예산을 줄이면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각종 토건사업에 쓰는 예산이 1년에 40조원 정도 됩니다. 쓸데없는 도로건설, 건물공사에 들어가는 돈들이 많습니다. 전체 토건예산의 절반만 줄여도 20조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정부예산속에 있는 반환경적인 예산, 낭비예산들은 줄여 나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새로운 세금을 걷지 않고도 상당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조세지출을 줄이면 상당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조세지출이란, “조세감면, 비과세, 소득공제, 세액공제, 우대세율 적용 또는 과세이연”같은 방식으로 국가가 세금수입 손실을 감수하면서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이 혜택중에서는 서민에게 돌아가는 것도 있지만 고소득자나 대기업들에게 돌아가는 혜택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2014년 조세지출은 무려 33조원이 넘습니다. 이 중에 고소득자나 대기업에 대한 조세지출만 줄여도 최소 10조원 이상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수규모가 크지는 않더라도, 상속.증여세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과세관청의 의지에 많이 달려있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토건예산, 낭비예산을 줄이고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대한 조세지출만 줄여도 최소 30-40조원 이상의 재원이 추가확보 가능합니다.
어쨌든 재원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더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한편 프랑스 녹색당 소속의 이브코셰는 부자에게도 일단 기본소득을 지급하되, 세금을 통해 회수하는 방법을 제안하는데, 그런 방법을 사용할 경우에는 기본소득 지급에 필요한 재정규모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제가 보여드린 계산과 얘기들만 보더라도, 기본소득의 재원마련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문6> 기본소득의 부작용은 없나?(인플레이션, 게을러진다? 등)
기본소득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지 않느냐? 는 것은 당원 중에 두 분 정도가 질문하신 부분입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만약 기본소득의 재원을 세금이나 기존 정부예산의 낭비 절약을 통해 마련한다면, 기본소득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에 관계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것이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느냐? 는 우려도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본소득의 지급액이 높지 않을 경우에, 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해서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급속하게 늘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개인의 선택에 따라서 노동시간이 줄어들 수 있고, 가난을 감내한다면 노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노동시간을 줄여 그 시간에 사회활동에 참여하거나 여가를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꼭 유급으로 돈을 받는 노동만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7> 기본소득을 제도로 현실화한 사례가 있나?
아직 기본소득을 국가적 차원에서 지급하고 있는 국가는 없지만, 다양한 사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주정부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곳으로 미국 알래스카주가 있습니다. 알래스카주는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을 재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공동의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이기에 주민 모두가 지분을 가진다고 보고 배당금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알래스카 주정부는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의 4분의 1 이상을 ‘영구기금’(Permanent Fund)이라는 이름으로 적립하고 있습니다. 1976년 주헌법을 개정해서 이런 기금을 설치했습니다.
영구기금이라고 한 이유는 석유자원이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석유가 고갈된 뒤 살아갈 세대를 위해 돈을 적립해놓겠다는 의미입니다. 영구기금의 운용수익으로 매년 주민들에게 배당금(Permanent Fund Dividend)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본래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천연자원(석유)에서 나오는 수익이므로 주민들에게 공평하게 배당한다는 개념입니다.
이 돈의 액수는 기금 운용 상황에 따라 매년 변동합니다. 5년간의 평균수익으로 계산해서 지급하는데, 가장 많이 지급한 2008년에는 1인당 2069달러를 지급했습니다. 물론 이 금액이 주민들의 기본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주민이면 누구나 정당한 권리로 받는 돈인 것입니다. 주민배당, 시민배당인 것입니다.
그리고 브라질의 경우에는 노동자당 소속 상원의원인 수플라시가 발의한 ‘시민기본소득법’이 2002년 상원과 2003년 하원에서 승인되었다고 합니다. 룰라대통령의 서명과 동시에 2004년 1월 8일 정식으로 공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법안은 통과는 되었지만, 10년이 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2013년에 스위스에서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국민발의가 성립되어 주목을 끌었습니다. 12만 6천명의 국민이 서명을 해서 국민투표에 붙여지게 된 것입니다.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서는 스위스가 기본소득을 국가정책으로 채택하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설사 당장 되지 않더라도,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은 계속 중요한 의제가 될 것입니다.
<문8> 외국 녹색당은 기본소득에 대한 입장이 어떠한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핀란드녹색당과 영국녹색당의 사례에 대해 이미 홈페이지에 정리해서 올린 내용을 붙입니다. 점점 더 많은 국가의 녹색당이 기본소득을 정책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 스페인 카탈루냐, 미국, 핀란드, 영국 녹색당 등이 기본소득을 정책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더 있을 수 있지만, 제가 일일이 다 찾아볼 수 없어서 일단 자료를 통해 확인가능한 곳들만 언급했습니다.
그 중 핀란드녹색당과 영국녹색당의 사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리잡은 원내정당들입니다.
그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선거의 핵심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기본소득이 실업, 불안정 노동, 기존 복지제도의 한계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기본소득을 잘 설계하면 '생태적 전환'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핀란드 녹색당(1983년 원내정당이 되었고, 지금 10석의 국회의석이 있음)은 일찍부터 기본소득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핀란드 녹색당의 '오스모 소이닌바라(Osmo Soininvaara)'라는 분이 핀란드 전체의 기본소득 논의를 이끌어 왔다고 합니다. 이 분은 핀란드 녹색당의 대표(2001년-2005년)도 맡았고, 2000-2002년에는 연정에 참여하여 사회건강부 장관을 맡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핀란드 녹색당은 2007년에 구체적인 기본소득 모형을 만들어 2007년 의회선거에서 선거정책으로 발표했습니다. 당시에 핀란드 녹색당은 월 440유로를 지급할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재원은 주로 세금으로 만드는데, 구체적인 계산까지 해서 조세개혁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핀란드의 경우에는 녹색당 뿐만 아니라 좌파연합도 기본소득을 공식정책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핀란드의 유력정당인 '중앙당'도 기본소득에 우호적이라고 합니다.
복지국가라는 핀란드에서도 청년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청년들은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율이 80%에 달한다고 합니다. 핀란드의 경우에도 청년실업률이 18.9%에 달한다고 합니다(2012년 기준).
또한 핀란드 전체 시민들의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도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2013년 4월기준으로 핀란드인의 54%가 기본소득에 찬성한다고 합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없이 현금으로 지급'하는 돈입니다. 실업, 불안정노동, 선별적 복지로 고통을 받는 우리 사회에서도 기본소득은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 핀란드 녹색당에 관한 내용은 최근 출판된 <기본소득운동의 현황과 전망(박종철 출판사)>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한편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에서 고전을 거듭하다가, 2011년 최초의 지역구 당선자를 내면서 영국국회에 진출한 영국녹색당의 움직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1년 선거 당시에 영국녹색당은 시민연금(citizen's pensions)을 정책에 포함시켰습니다. 영국의 모든 연금수급자들에게 조건없이(연금납부실적과 무관하게)최저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준의 연금을 지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15년 총선을 앞두고 영국녹색당은 이제 기본소득(영국에서는 시민소득이라고도 합니다)을 선거캠페인의 핵심이슈로 삼기로 했답니다. 모든 성인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정책을 선거캠페인의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영국녹색당 대표를 맡고 있는 Natalie Bennett가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기본소득을 알리기 위해 직접 일주일에 최소 한두차례 시민들과 만날 것이라는 의지도 밝혔습니다.
영국녹색당은 내부적으로 기본소득의 액수, 재원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녹색당에게는 낯선 정책이 아닙니다. 그동안 고민과 토론을 해 오던 외국의 녹색당들도 하나하나 핵심정책으로 채택해 나가고 있습니다.
<문9> 기본소득은 국적자에게만 지급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소수자인권특별위원회에서 해 주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지급할 때에, 거주요건만 충족하면 되지 국적을 요건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주요건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해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브라질의 시민기본소득법(안)에서는 5년이상 거주한 외국인들도 기본소득 지급대상에 포함시킨 바 있습니다.
<문10> 앞으로 기본소득을 어떻게 의제화하고, 정책으로 구체화할 것인가?
저는 올해 10월부터 당장 기본소득을 한국사회의 핵심의제로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 가지 경로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강연을 전국적으로 여는 것입니다. 제가 제안드리고 있는 ‘돈보다 생명’ 투어와도 연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본소득에 동의하는 세력이나 개인들을 연결하는 작업입니다. 이미 기본소득과 관련해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 뿐만 아니라, 인권단체, 시민단체, 여성단체, 환경단체, 농업단체 등과 기본소득을 주제로 만나는 자리를 만들고 함께 할 것을 제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정책으로 다듬어나가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정책위원회, 녹색전환연구소, 기본소득 관련 전문가 등으로 주체를 구성해서 진행해 나가면 될 것입니다. 녹색당의 기본소득 모델 초안을 정리하는 작업을 4-5개월 정도내에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업을 한 후에 내년 3,4월 경에 당내부에서 기본소득 모델초안에 대해 토론하는 토론자리를 충분히 갖고, 내년 상반기가 끝나기 전에 녹색당의 기본소득 모델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고 녹색당이 2016년 총선에서 기본소득을 핵심정책 중에 하나로 제안하고, 2017년 대선 국면까지 염두에 두고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더 구체적인 계획은 이후에 당원들, 그리고 함께 할 주체들과 함께 만들어 가겠습니다.
Ⅱ.기본소득 연재
"모든 시민에게 무조건적으로 소득을 지급하라. 그리고 여기에 다른 소득을 더하여 시민들의 총소득을 증가시키게 하라."
새로운 분배제도에 대한 논의 중 하나인 기본소득(Basic Income)은 21세기를 위한 명료하고 강력한 아이디어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고 한국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기본소득은 자산조사나 노동조건부과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개인 단위로,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보편주의, 완전고용시대의 종말에 따른 탈노동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신자유주의 시대의 복지 사각지대 해소, 행정비용 감소효과 등등 그 장점이 보인다. 하지만 재정마련, 실현성 등을 두고 논란도 있다.
이번 기본소득 기획연재는 기본소득네크워크(http://cafe.daum.net/basicincome)에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 전반을 소개한다. 관심과 이해가 커지고,논쟁이확산되기를 기대해 본다
목차
1. 기본소득의 역사적 기원,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기본소득 -김성일
2. 해외사례 소개 - 최광은/3. 기본소득과 기존복지제도(워크페어) 비교 - 권문석
4. 기본소득과 민주주의 실현 -금민
5.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경제성장(고진로) 가능한가 - 안현호
6. 기본소득의 정치경제적 효과분석:빈곤과 소득 불평등 해소는 가능한가 - 백승호
7. 기본소득 재원은 어떻게 마련되는가? - 강남훈
8. 자본주의, 노동패러다임, 기본소득 - 김원태/9.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 - 강연자
10.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과 여성 - 김미정
11. 한부모, 비혼모,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와 기본소득-야마모리 토오루
12. 이행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 - 곽노완/13. 대안사회를 향한 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 - 이수봉
사회는 성원 모두에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기본소득①] 기본소득의 역사와 현재
기본소득의 역사
기본소득은 지역과 사람에 따라 기본소득, 시민소득, 보장소득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기본소득이 어느 한 사람의 돌발적인 주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논쟁의 역사를 통해 생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기원을 따지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18세기 프랑스에서 기본소득과 철학적 맥락을 공유하는 주장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자코뱅의 지도자였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의 연설에서 사회는 성원 모두에게 물질적 · 사회적으로 살아갈 권리를 최우선적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전제군주적 정치경제'가 탈취 과정에서 비롯되며, '민중적 정치경제'를 위해서는 재산을 탈취당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를 살았던 토머스 페인은 이 '탈취'와 '보장'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토지가 자연적 유산이라는 논리에 따라 '토지독점'을 수탈로 규정지었고, 자연적 유산을 상실한 모든 이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방법으로 사유지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국가 차원의 기금’을 창설하고, 21살 이상의 모든 이들에게 매년 총액 10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그가 이 모든 조치를 사회성원에 대한 '자비'가 아니라 사회성원의 '권리'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샤를 푸리에 역시 자신이 제안한 새로운 공동체 아이디어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의식주에 필요한 소득을 무상으로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이 아이디어는 푸리에주의 작가인 죠셉 샤를리에가 한층 더 구체화하였는데, 그는 모든 시민에게 의회가 매년 정하는 금액을 매월 조건 없이 지급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이기 시작한 것은 영국 옥스퍼드의 경제학자 조지 D. H. 콜에 의해서이다. 그는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를 통해 사회보장을 ‘사회배당’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는데, 1953년에 출간된 자신의 책 <사회주의 사상사>에서부터 명확하게 ‘기본소득’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80년대 중반, 벨기에에서 스스로 ‘샤를 푸리에 서클’이라 지칭한 이들이 '개인의 생활에 필요한 돈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조건 없이 매달 지급하라'라는 선언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이들은 기본소득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정립했고, 그 원칙들은 지금까지도 기본소득의 원칙으로 합의되고 있다. 그들은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진 세계의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 유대는 점점 부피가 더해져 1988년에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Basic Income Europe Network)라는 이름으로, 2004년에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Basic Income Earth Network)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조건도,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은 그만큼 단순한 이야기이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기자
한국에서도 2000년대에 들어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간간이 있어왔지만, 그 논의와 요구가 작게나마 집단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회양극화와 복지의 시장화, 여기에 고용조차도 명확하게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새로운 사회시스템 구축의 한 방법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확산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분배도, 고용도 없는 성장시대
최근의 지하철 역사에는 무인 발권기가 창구를 대신하고 있다. 지하철, 사무실, 공장, 병원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 있던 자리에 기계가 들어서고 있다. 일자리는 분명히 줄어들고 있다. 우리 사회의 빈곤과 실업, 양극화 문제는 더 이상 '고용창출'이라는 말이 해법으로 작용할 수 없다.
임기 중 600만 개 일자리 창출을 약속한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는 데에 분명히 실패했다. 쌍용차 사태에서 보듯 오히려 해고는 폭발적으로 늘었고, 희망근로를 위시한 정부주도의 일자리들은 안정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생산적이지도 않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정부는 해고유연화와 복지축소를 감행한다. 서민들의 목을 조르는 정책기조에 대해 정부는 '경제위기'를 방패로 내세우고 '트리클 다운'을 우상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올해 대기업 2분기 매출은 사상 최대수준을 기록했고, 그 '성장'은 가계경제에 보탬이 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체제는 '분배 없는 성장'과 함께, '고용 없는 성장'을 계속 경신 중이다. 이러한 악화일로에 대한 해답으로 정부는 '더 큰 신자유주의'를 내세운다. 절벽으로 질주하는 자동차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되레 속도를 올려야 한다는 소리다. '트리클 다운'은 허구다.
빚잔치 대신에 기본소득을
공장은 하나 둘 문을 닫는다. 서민들에게 생산품을 구입할 능력이 없으므로. 정부는 서민들에게 요구한다. 기업들이 무너지니, 물건을 사라고. 내수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서민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이라고 모를리 없다. 서민들의 삶터에 순방을 나서며 '정부 탓 하지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훈시만 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점도. 이명박 정부가 위기도 벗어나고 고집도 지키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신용카드 가입기준을 완화하고, 대출상품을 늘리는 것. 그리 먼일도 아니다. 최근 아이돌 그룹을 내세워 '고객을 생각한다'는 광고를 내보내는 모 카드회사는 회원 메일로 '빚테크'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그리고 10년 후의 목숨을 담보로 서민들의 주머니에 대출금이 채워질 때, 그들은 외친다.
“질러라!”거품은 무한정 커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도 미국처럼 거품대폭발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이것이 선진국을 따라잡았다며 축배를 들 일은 분명히 아니다.
문제는 단순하다. 서민들 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가 단순하면 해답도 단순하다. 주머니에 돈을 채워주면 되는 것이다. 주머니에 돈이 채워지면, 내수는 활성화되고 가계 부채는 줄어들 것이다. 내수의 활성화는 생산을 증대시키고, 생산의 증대는 고용 확대를 낳는다. 트리클 다운이 아니라, 역(逆)트리클 다운이 필요한 시기다. 부자 감세로 채워진 재벌의 재화는 곳간에서 썩을지언정 흘러넘치지 않는다. 우물에 물이 넘쳐 흘러내리길 바랄 것이 아니라, 물을 퍼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조건도, 차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은 그만큼 단순한 이야기이다.
유럽에서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로 확산되는 기본소득/[기본소득②] 해외사례와 시사점
현대적인 기본소득 논의는 1980년대 중반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남미는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그 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했고, 나미비아에서는 구체적인 실험이 진행되고 있으며, 브라질에서는 단계적인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는 이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여기서는 독일의 기본소득 논의, 브라질의 시민기본소득 제도,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시험 프로젝트, 미국 알래스카 주의 영구기금 배당을 간략히 살펴보고, 몇 가지 시사점을 끌어내 보고자 한다.
독일의 기본소득 논의
독일은 기본소득과 관련하여 가장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국민의 관심도 많다. 한 예로, 2008년 12월 10일 수잔느 비스트(Susanne Wiest)라는 한 여성이 ‘사회보장 개혁 제안 -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란 제목으로 독일 연방하원에 제출하는 온라인 청원운동을 시작했는데, 이 온라인 청원운동은 2009년 2월 17일에 막을 내리기까지 최저 기준치인 5만 명을 훌쩍 넘어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현재 좌파당 내 기본소득 연방연구회의 모델을 포함한 7개의 구체적인 기본소득 모델과 괴츠 베르너(Götz Werner)의 기본소득 모델을 포함한 다소 구체성이 떨어지는 세 개의 기본소득 모델이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유명한 기업가인 괴츠 베르너의 모델과 좌파당 내 기본소득 연방연구회의 모델이다.
괴츠 베르너의 우파적 기본소득 모델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주는 대신 기업이 각종 사회비용에 대한 부담을 지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는 이것이 오히려 기업에 이득이 된다고 본다. 그는 독일에서 기존의 연금, 실업연금, 사회보조금, 자녀양육보조금, 주택보조금 등을 통합해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면 1인당 매달 800유로를 지급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종 행정비용까지 줄이면 연간 약 1,000억 유로를 기본소득 재원에 보탤 수 있어 1인당 매달 830유로까지 지급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장기적으로 1인당 매달 1,500유로의 기본소득 지급을 주장한다. 세제 개편과 관련하여 그는 모든 직접세를 폐지하고 모든 세금을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로 단일화하자고 제안한다.
반면, 좌파당 내 기본소득 연방연구회는 이러한 입장과는 다르다. 좌파당 전체의 입장은 아니지만, 좌파당 내 기본소득 연방연구회가 지지하는 기본소득 모델은 이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좌파당 부대표인 카트야 키핑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빈곤위험선에 기초하여 16살 이상의 모든 사람에게 950유로(16살 미만은 475유로)의 기본소득 지급 △모든 소득원에 대한 35%의 가산세(기본소득세) + 사치품에 대한 세금 + 주요 에너지세로 기본소득 재원 마련 △기본소득 수급 자격은 시민권이 아닌 거주권. 이 모델을 적용할 때 월 7,000유로 미만의 총소득이 있는 사람은 현재의 개인 순소득보다 더 많은 순소득을 얻게 된다. 카트야 키핑은 덧붙여 기본소득의 도입이 다음과 같은 부가적인 조건들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본다. △시간당 8유로의 통상 최저임금 △노동의 재분배를 촉진하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 △사회적 재생산 노동의 균등한 분배 △연금, 건강, 요양, 실업 보험 체계와 같은 현존 사회보험 유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추가 지원 △지구적인 사회적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을 위한 투쟁 △억압과 강제가 아닌 자기결정권을 증진시키는 교육 체계.
브라질의 시민기본소득 제도
브라질은 2010년 ‘시민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 제도의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있다. 시민기본소득 법률은 2004년에 최종적으로 통과되었는데, 그 시행에 이르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브라질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전국적 수준에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한 법률이 통과된 나라이고, 이제 그 시행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시민기본소득 법률을 기초한 것은 기본소득의 강력한 지지자인 브라질 노동자당 상원의원 에두아르도 수플리시였다. 이 법률은 지난 2002년 12월 브라질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이듬해인 2003년 12월 브라질 하원에서도 통과되었다. 마지막으로 2004년 1월 8일 룰라 대통령의 서명으로 이 법률은 효력을 갖게 되었다.
기본소득 지급 대상에는 브라질 국민은 물론 브라질에 최소한 5년을 거주한 외국인들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이 시민기본소득은 처음에는 2005년부터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부터 단계적으로 혜택을 줄 계획이었다. 또한, 행정부가 이 지급액의 수준을 결정하고 전체 인구가 혜택을 받을 때까지 점진적인 도입의 속도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이는 물론 이 프로그램의 시행이 국가 경제의 발전 정도와 사용 가능한 재원의 수준에 따라 제약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40레알(2009년 7월 현재 약 25,000원)을 2010년부터 브라질 국민 모두에게 매달 기본소득으로 지급한다고 했을 때, 연간으로는 1인당 480레알인데, 이를 약 1억 9천만 명인 브라질 인구와 곱하면 그 총액은 약 900억 레알로 브라질 GDP의 5% 수준에 달한다. 이는 2006년을 기준으로 할 때 볼사 파밀리아 프로그램에 지출된 예산의 약 10배가 넘는 큰 금액이다. 이러한 재정상의 부담 때문에 이 시민기본소득 법률은 지난 몇 년간 ‘실행되지 않는 법률’로 남아있었고, 2010년부터 시행되기는 하지만 당장 전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때 시민기본소득의 재원은 2006년 8월 상원에서 통과된 ‘시민기본기금(Citizen’s Basic Fund)’ 설치에 관한 법률을 토대로 마련될 예정이다. 역시 수플리시가 기초한 이 법률은 연방 소유 회사 주식의 10%, 자연자원 채굴에 대한 사용료의 50%, 정부의 서비스 허가 수입의 50%, 연방 정부 자산 임대료의 50%, 그리고 연방 조세 수입 등으로 기금을 마련하게 되어 있다.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시험 프로젝트
나미비아는 2009년 현재 기본소득 시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나라다. 전국적 수준에서의 도입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이 프로젝트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면 그 도입 움직임이 가속화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2009년 4월 현재 시험 프로젝트 시행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중간 평가 보고서가 나왔다.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시험 프로젝트는 대상도 제한적이고 기간도 제한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경험적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 시험 프로젝트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대상:나미비아 오미타라 지역의 모든 주민(60세 미만 930명, 60세 이상은 모두 노령연금 수급자) △지급 금액:매달 100 나미비아 달러(한화로 약 1만 5천 원) △지급 방식:우체국 예금 계좌로 송금(처음 6개월은 직접 지급) △기간:2008년 1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24개월 △비고:21세 미만은 돌봄 제공자에게 지급.
보고서를 보면, 무엇보다 기본소득 지급 이후 빈곤 문제가 급격하게 개선되었다. 특히 식량 빈곤선에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2007년 11월 72%에서 2008년 11월 16%로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통계는 그 지역으로의 이주민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비고용률도 같은 기간에 60%에서 45%로 상당히 많이 줄었다. 이러한 결과는 매우 놀라울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기본소득의 주요 비판 논리 가운데 하나가 고상하게 말하면 ‘노동 윤리의 실종’, 쉽게 말하면 ‘놀고먹는 사람이 늘어날 것’, ‘게을러질 것’ 등인데, 이 결과는 그러한 예상과는 달리 경제활동인구가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득의 경우 기본소득을 더하면 그 지역 주민의 1인당 소득이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먼저 기본소득으로 인한 소득 증가분은 2008년 7월에 75 나미비아 달러, 11월에 67 나미비아 달러였다. 소득 증가분이 100 나미비아 달러가 아닌 이유는 기본소득 수급자가 아닌 연금수령자와 이주민까지 포함해 평균을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으로 인한 소득 추가분 말고 나머지 소득은 2007년 11월 118 나미비아 달러에서 2008년 11월 152 나미비아 달러로 29%나 증가했다. 이것은 일자리가 증가하고 생산에 참가하여 얻은 소득이 늘어난 덕택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자영업을 포함한 소규모의 사업들이 활기를 띤 것으로 나타났다. 부분적이고 제한적이긴 하나 기본소득의 경제 효과가 실제로 나타난 셈이다. 또한 범죄 건수도 눈에 띄게 하락했다. 사회경제적 조건과 범죄 사이의 상관관계를 다시 한 번 보여준 것이다. 이 밖에 교육, 보건의료, 성 평등 등의 차원에서도 매우 긍정적인 결과들이 나왔다고 이 보고서는 밝혔다.
한편, 이러한 시험 프로젝트를 나미비아 전국으로 확대해 시행한다고 가정하면, 2009년 현재 60세 이상의 노령연금 수혜자 약 15만 명을 제외하고 190만 명의 국민에게 매월 100나미비아 달러를 지급할 때 연간 소요 예산 총액은 약 23억 나미비아 달러이다. 나미비아의 조세 부담 능력은 국민소득의 30%를 초과하는데, 현재는 25% 이하로 조세를 부담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기본소득 제도를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순수 추가 비용은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다. 따라서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적절한 세제 개혁과 예산 우선순위 변경 등의 조합을 통해 국가 재정 안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지속 가능한 기본소득 제도를 즉각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의 실현은 다만 정치적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미국 알래스카 주의 영구기금 배당
미국 알래스카 주의 사례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해당한다. 석유라는 자원에서 나오는 막대한 수익이 없었다면 이러한 시도는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주목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자연자원으로부터 획득하는 수익이 풍부한 나라들 모두가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델의 도입에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알래스카 주지사를 역임했던 제이 하몬드의 역할이 컸다. 그는 북미에서 가장 커다란 석유지대인 프루도 만의 석유 채굴로 얻어진 커다란 부가 오직 주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석유로부터 얻어진 수익 일부를 적립함으로써 이러한 부가 축적되는 것을 보장해주는 기금 설립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76년 주 헌법 개정을 통해 석유를 포함한 주 소유 자연자원의 판매로부터 벌어들인 수익의 최소 25%를 적립하는 알래스카영구기금(APF)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주지사 하몬드는 알래스카 주민들이 이 기금의 성장과 지속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모든 거주자에게 매년 그들의 거주 기간에 비례하는 배당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다른 주들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이유로 수정 연방 헌법 제14조인 ‘동등 보호 조항’에 어긋나는 것으로 판결이 났다. 따라서 이 계획은 나이나 주에서 거주한 기간과는 상관없이 알래스카에 적어도 1년 이상 공식적으로 거주한 모든 사람에게 배당을 준다는 단순한 계획으로 수정되었다. 영구기금 배당이 기본소득에 가까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982년 영구기금 배당이 시행된 첫해에는 특별히 1인당 1,000달러의 배당을 지급했고, 이후 배당은 조금씩 늘어 1995년에 990달러, 2000년에 1,963달러였다. 그리고 지난 2008년에는 애초 1인당 2,069달러를 지급하기로 했는데, 1,200달러의 일시 보상이 추가로 지급되어 2008년 배당금은 최대 3,269달러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때 배당 지급 총액은 지난 5년간의 기금 운용 평균 수익의 절반으로 정해놓은 규칙에 따른다. 2009년 7월 현재 영구기금의 자산 운용 현황을 보면, 국내외 주식이 38%, 채권이 22%, 부동산이 12%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전체 영구기금의 시장 가치는 320억 7,140만 달러에 이른다.
한편, 영구기금 배당은 뚜렷한 경제적 평등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2002년 이전 10년간의 통계를 보면, 미국의 부유한 가구 20%의 평균 소득이 26% 증가했지만, 가난한 가구 20%의 평균 소득은 12% 증가에 그쳤다. 그러나 알래스카에서는 같은 기간에 부유한 가구 20%의 평균 소득이 7% 증가에 그쳤으며, 가난한 가구 20%의 평균 소득은 무려 28%나 증가했다. 미국에서 가장 낮은 1인당 소득을 보여주는 곳 가운데 하나인 알래스카의 시골 사람들과 불안정한 소득이 있는 사람들은 이 배당으로 말미암아 현금 유동이 상당히 안정화되었고, 몇몇 지역에서는 이 배당이 현금 소득의 10% 이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알래스카 주가 이 제도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주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평등한 주가 되었다는 점이다.
각국 사례를 통해 본 시사점
이상으로 독일, 브라질, 나미비아, 알래스카 주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각국의 처지와 조건이 판이하므로 평면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다양한 측면에서 의미 있는 시사점을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선 독일은 기본소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매우 크고, 논의 또한 가장 활발하다. 그러나 이때 기업가인 괴츠 베르너의 역할이 지대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일단 기본소득이 독일에서 사회적 의제로 떠올랐다는 점은 긍정적이나 그의 기본소득 모델이 오로지 경쟁과 효율의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은 좌파는 물론 많은 사람의 우려를 살 만한 것이다. 또한, 그는 소비세 인상이 직접세 인상보다 부의 재분배 효과가 오히려 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유리지갑’을 찬 노동자와 반대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고소득자들의 정확한 소득 파악은 물론 파악된 소득에 대한 추가적인 세금 부과가 어렵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반면, 좌파당의 기본소득 연방연구회는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 방법으로 모든 소득원을 철저히 파악하여 가산세를 부과하는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고, 기본소득이 최저임금은 물론 기본복지와 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본소득 연방연구회의 모델은 좌파당 안에서조차 아직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베르너 모델의 한계를 뛰어넘어 독일 시민사회의 주목을 받는 모델이 되기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브라질의 사례는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에 있어서 집권당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기본소득 제도의 도입이 한편으로는 급격한 전환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 ‘볼사 파밀리아’ 등의 다양한 소득 보장 제도가 성과를 거두어온 과정이 있었기에 이의 연장선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가능할 수 있었다는 점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물론 이 시민기본소득 법률이 2004년에 공포된 이후에도 재원 마련의 문제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실행되지 않는 법률로 남아있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조세 제도의 개혁을 포함한 구체적인 재원 마련 계획이 기본소득 제도의 입법 과정에서 동반되지 않는다면, 기본소득 법제화의 커다란 의의는 그것의 실행이 지체되는 만큼 퇴색될 수밖에 없다. 또한,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쓰일 시민기본기금의 마련 방안이 고소득자에 대한 직접 과세가 미흡한 브라질의 조세 제도 전반을 건드리고 있지 못한 점은 또 하나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나미비아의 사례는 오미타라 지역에 국한하여 2년 동안 실시하는 제한적인 기본소득 시험 프로젝트임에도 그 중간 평가 보고서가 보여준 각종 지표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더욱 총괄적인 결과는 시험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에서 알 수 있겠지만, 이상의 흐름을 볼 때 일단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나미비아의 사례는 기본소득 시험 프로젝트가 기본소득 도입의 장점들을 해당 국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나미비아에서는 교회와 노동조합의 전국 조직도 기본소득 도입에 매우 적극적인데, 이는 기본소득 지지 흐름이 있는 여타 국가들에서는 아직 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어떤 제도의 도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때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관건이다.
알래스카 주에서 시행하는 영구기금 배당은 매우 특수한 사례이긴 하지만, 그러한 발상을 하고 제도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도입 과정에서 대부분의 정치인은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제도가 안착 되어 긍정적인 사회적, 경제적 효과들이 드러난 이후에는 이 영구기금 배당을 허물려는 일체의 시도가 정치적 자살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이 알래스카의 사례는 자원으로 벌어들이는 이윤이 풍부한 국가들에게는 하나의 역할 모델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이 영구기금의 조성과 그 운용에 따른 수익의 배당이 유가 등락과 투자 수익 변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단점이다. 물론 배당액의 연도별 변동폭을 줄이기 위해 지난 5년간의 기금 운용 평균 수익에 기초하여 배당액을 산출한다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는 조세를 통한 안정적인 재원 확보 및 소득 보장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안정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만이 해법이다/[기본소득③] 기본소득과 기존복지제도(워크페어) 비교
복지는 보편적이어야
복지(福祉)는 행복한 삶이다. 삶의 질 향상이라고도 한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국가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회구성원을 심사해 복지를 제공한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복지 방식이다. 경기도의회 한나라당 의원들이 무상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했던 말 역시 “있는 집 아이들에게까지 왜 급식을 무상으로 주어야 하느냐?”였다. 하지만, 저소득층에 대한 시혜적 무료급식은 ‘아이는 물론이고 그 부모들에게까지도 상처를 주는 방식’이다.
선별적 복지는 심사라는 방식으로 대상자에게도 책임을 요구한다. 개인은 수급을 받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격 심사를 위해 사적인 정보를 공개하고 또 증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선별적 복지는 대상자의 특정한 권리들을 박탈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빈곤의 덫
IMF 외환위기 이후, 사회양극화는 한국사회의 근간을 흔들어버렸다. 1999년에 제정되어 2000년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하 기초법)는 생활이 어려운 자에게 필요한 급여를 행하여 이들의 최저생활 보장과 자활을 위한다는 이유로 제정되었다. 초기에는 대상자를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칭했으나, 이후 사회보장이 시혜가 아닌 수급자의 권리라는 측면이 두드러지면서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명명되었다. 기초법은 현금 지급과 현물 지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현금 지급은 생계비지원 총액에서 개인의 소득을 빼는 보충급여 방식이다. 따라서 엄격한 자산ㆍ소득 심사가 존재하며, 재산과 소득으로 간주하는 범위 또한 매우 넓다. 이웃이나 친지로부터 받는 지원금을 소득으로 분류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생활 실태로 보아 소득이 없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자’에 대하여 적용하는 ‘추정소득’도 명문화되어 있다. 이런 문제들은 수급자의 생활을 통제하는 효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재산 축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수급자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을 저지한다.
기초법 10년을 맞아, 많은 시민사회단체가 관련 토론회를 다양하게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한결같이 지적된 것이 통계 추정조차 힘든 광범위한 사각지대다. 200만 명에서 4~500만 명에 이르는 기초법 사각지대는 심사 요건을 완화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기초법 자체가 근본적으로 한계가 너무 많다.
근로장려세제:미봉책의 전형
기초법 시행에 따른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근로장려세제(EITC)다. 근로장려세제는 노동빈곤층(Working Poor)을 지원하기 위해 2006년에 도입된 것으로, 미국에서 1970년대부터 시행된 EITC(Earned Income Tax Credit)의 모방이다. 이 제도 역시 까다로운 자격 기준이 있다. 근로장려세제는 부부합산 연소득 1,700만 원 이하, 자녀 1인 이상인 무주택 가구 단위로 지급된다. 이 기준은 기혼 여성의 노동 의욕을 확연히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좁은 기준만큼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만든다. 독신자, 한 부모 가정, 자녀가 없는 부부 등은 의심할 여지없이 대상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이중지원 방지 원칙에 따라 기초수급자들도 추가로 배제되는데, 이 점은 빈곤층이 차상위 계층으로 편입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근로장려세제는 노동연계복지(Workfare)에 속하는데, 자본주의 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고용과 소득보장 문제를 부분적으로만 해결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완전고용은 불가능하고, 고용 없는 성장만이 계속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조건이다. 많은 사람이 비정규직 등의 불안정노동, 실업, 불충분한 소득의 문제를 안고 있다. 노동연계복지는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양심을 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임금을 약간 보충해주는 역할밖에 못 한다. ‘절망근로’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희망근로사업이 그렇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지마저 꺾는 것이 노동연계복지다. 이명박 정부와 같은 정권이 계속될 경우, 노동연계복지는 더 강화될 것이다.
원래 근로장려세제는 노동 의욕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수입 기준을 장벽으로 만듦으로써 노동 의욕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진다. 노동 의욕의 저하 역시 일종의 자유권에 대한 통제 중 하나라고 볼 때, 기존의 복지제도는 노동을 강요하고 포기하게 하는 통제를 동시에 행하는 셈이다. 이런 문제점은 복지에 조건을 붙이지 않는 보편주의적 전환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은 노동에 대한 국가 및 제도적 통제를 일부분 없애며, 노동연계복지의 대척점에 있다.
선별적 복지의 근본적 모순
선별적 복지에 있어 심사와 선별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명분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별적 복지가 정당화될 수 있는 요건은 ‘결과적 보편성’이며,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선별적 복지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보완을 거듭하며 또한 양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그리고 이 증식이 끝날 즈음엔, 인구와 복지제도의 종류 사이에 별다른 수적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또 엄격하게 강화된 심사와 관리는 개인에 대한 통제로 작용하며, 복지 재정의 상당 부분이 그 제도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쓰일 것이다. 선별적 복지가 ‘정말로’ 결과적 보편성을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보편주의에서 벗어난 복지관은 복지를 사회구성원에 대한 통제의 수단이 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기본소득의 ‘심사도 요구도 없다.’라는 점은 선별적 복지의 이런 점과 비교할 때 도덕적 우위까지 가진다.
사회보험제도 개선:조세형 기본복지로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바뀌는 복지제도
고용ㆍ산재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의 사회보험제도 확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정노동 계층의 사회안전망 확보가 불가능하다. 최저임금 현실화가 수반되지 않는 한 남성ㆍ정규직ㆍ대공장 중심으로 짜인 소득비례방식 사회보험 내에서의 불평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식의 확대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수탈 경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더라도 저출산 고령화, 기술 진보에 따른 일자리 감소와 노동시장 유연화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다. 이미 현실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또한,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모든 사회보험제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교육ㆍ의료ㆍ주거ㆍ보육ㆍ노후 등의 기본복지로 재편돼야 한다. 기본소득 도입은 기본복지와 함께 이뤄져야 온전한 의미가 있다. 사회보험제도를 조세형 기본복지로 전환하는 것은 사각지대 개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보편적 복지는 소득 재분배를 넘어서는 효과 가져와
기본소득 도입은 상당수 현금 지급형 복지의 통ㆍ폐합을 의미한다. 보편적 복지는 모든 선별적 복지의 총합을 포함한다. 기본소득이 도입된 사회에서 기초법과 근로장려세제와 같은 것은 불필요하다. 그 대상자들 자체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본소득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은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기본복지라는 사회서비스 보편화 과정과 함께 확대돼야 한다. 교육ㆍ의료ㆍ주거ㆍ보육ㆍ노후 등이 이에 속한다.
기존의 선별적 복지제도가 소득 재분배와 사회양극화 해소라는 목표 달성은커녕 스스로 존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기에 빠져 있다. 공공부조와 사회보험으로 이뤄진 현재의 복지제도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선택의 갈림길에 있다. 현재의 복지제도를 보완하면서 더 많은 선별적 복지제도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 복지의 길인 기본소득을 전면적으로 실시할 것인가.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기본소득을! [수정보완]
기본소득제도 도입
사람들에겐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제도가 그 수단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누진세를 강화하고 주식과 토지 등 불로소득에 세금을 무겁게 매기고 국방비를 줄이면 일정한 수준의 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
기본소득제는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적정 액수의 소득을 국가가 지급하는 제도입니다.주민등록이 된 모든 국민은 개인 통장을 국가에 등록하고 국가는 매달 이 통장에 기본소득을 입금합니다. 이는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소득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제 도입을 지지하는 사람들[각주:1]은 대체로 부자 증세를 통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내용의 기본소득제도가 도입된다면 소득 하락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다.
대기업주와 땅부자, 주식부자들은 일하지 않는 사람에 돈을 주는 건 노동의욕을 떨어뜨려 경제의 생산성을 낮춘다고 말합니다.
지금처럼 실질 실업률이 13퍼센트에 이르고 경제위기를 빌미로 대규모 해고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런 말은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정당화하는 수작일 뿐입니다.
사 실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습니다. 한국의 부동산 부자들은 정부의 거품 정책으로 앉아서 돈을 법니다. 부동산 가격이 노동소득보다 빨리 오르면 집을 사려는 월급쟁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재산 손실을 보게 됩니다.
한국의 1백 대 주식 부자들의 74퍼센트가 재벌 2·3·4세들입니다. 이들 다수가 미성년자입니다.이들이야말로 소득을 창출하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평범한 노동자들 수백 명이 평생 아도 벌지 못할 돈을 소유합니다.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세계적 차원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협력적 노동의 기여 없이는 결코 부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업주와 부자들이 이 사회 전체 구성원을 위해 돈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보장하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체적 이유로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정주부와 어린이 노인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이들의 경제적 자립도를 높여 사회적 지위를 더 높이고 천대와 차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보장은 실업 상태의 노동자가 당장 생계를 위해 열악한 저임금 일자리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신대 강남훈 교수가 기본소득 재원을 계산했습니다. 만 19세까지 30만 원, 만 39세까지 40만 원, 만54세까지 50만 원, 그 이상은 60만 원을 매달 지급하면 현재 인구 기준에서는 1년에 2백15조 원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무상 교육․의료 비용을 더하면 총 2백40조 원이 필요합니다.
강남훈 교수는 “모든 소득에 과세한다”는 원칙에서 이자와 배당 등 불로소득에 30퍼센트의 소득세를 매기고 토지세와 주식 거래 양도소득세를 도입하자고 말합니다.[각주:2] (한국은 주식 거래 차익에 무는 증권거래세가 0.3퍼센트 밖에 되지 않음)
진보 진영의 일부는 이 주장에서 기존 복지제도 일부를 기본소득 재원에 사용하자는 말에 반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소수지만 기본소득 요구가 신자유주의 플랜의 하나인듯 말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그러나국가복지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에서이런 인식은 과도하다고 봅니다
강 교수의 제안을 보면, 국민연금에 한정해 재원을 돌리자는 것인데, 그것은 국민연금 제도 자체는 개념상으로 기본소득처럼 보편주의 복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본 성격이 같기 때문에 더 포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데 당겨쓰자는 겁니다. 전 합리적이라 봅니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현재 인구의 절반이 소득이 부족해 국민연금 미가입 상태입니다. 국민 절반이 연금을 받질 못하는 것이죠. 평균 소득이 1백50만 원 정도일 때, 이 소득 기준으로 20년을 납부해도 65세부터 월 30만 원을 조금 넘게 받습니다.(물론, 이 정도도 사보험보단 훨씬 높은 급여입니다)
이런 한국의 조건에서 지금 당장 모든 국민에게 40~60만 원 수준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려 기존 연금일부를 돌리는 건 그리 불합리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밖에 고용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법, 장애연금 등이 좀 중요한 현금지불식 복지제도라 할 수 있는데, 이 제도들은 그 지급액이 생계 유지에 도움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습니다. 두 제도 모두 수급 자격을 심사하고 부정수급을 감시하는 데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며 수급자에게 사회적 모멸감을 줍니다. 기본소득은 조건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제도에 비해 장점이 있습니다.(실업급여는 예외일 수 있겠네요)
물론 일부 기본소득 모델은 이런 제도까지 통폐합하자고 합니다. 이 점은 논쟁거리이며, 전 이 견해엔 반대합니다. 이런 '필요에 따른 지급'이라는 목표는 중요한 것이고, 이에 비춰 이 제도들은 지속돼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실업을 개인의 문제라고 가르칩니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적 복지' 등의 이름으로 노동 여부/의지/능력과 복지를 연계시키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의 아이디어는 신자유주의적 복지에 저항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기존 제도의 비용 이전이나 불로소득 논란에 있는 게 아닙니다. 노동계급 구성원들이 순소득을 늘리는 복지를 하려면 여기에 쓰일 돈을 어느 계급이 부담해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열쇠라 할 수 있습니다.이것은 복지제도를 다룰 때 늘 명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제도 자체는 오히려 부차적일 수도 있습니다.
주식과 부동산 등 투기로 번 불로소득은 경제의 다른 부문에서 생산한 부를 약탈한 것에 불과하므로 불로소득에 세금을 무겁게 매기는 것은 정당합니다.
기업들에게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하려 사회와 개인들은 많은 비용을 들여 보육에서 교육, 복지를 실행합니다. 노동자들 덕분에 막대한 수익을 올린 기업들이 이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업들에게 줘야 할 것은 '해고의 자유'가 아니라 복지 비용 부담 의무입니다. 이런 점들에서 분명하다면 기본소득 요구는 꽤 쓸 만한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혁신적인 요구가 단지 대화와 설득으로 채택되진 않을 것입니다. 이 제도 하나가 자본주의 체제의 시장 질서를 근본에서 바꾸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본소득 요구는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를 어느 정도 거부합니다. 실행될 수 있다면 노동계급과 서민들이 사회적 자신감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 폭넓게 단결해 싸운다면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권력자들인 대기업주들과 벌일 싸움입니다. 특히, 경제 위기 시대에는 대자본가들이 사회 전반에 경제 위기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조직 노동자들의 저항이 매우 중요해 집니다. 기간 산업 등에 고용된 '조직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갖는 이유입니다.
기본소득 요구는 이 점에서도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경제 위기 규모가 커 실업자가 늘어나는 때 조직 노동자들과 미조직 노동자, 실업자 등이 단결해 싸울 수 있는 요구입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단체로는 사회당과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있고, 학자로는 한신대 강남훈 교수와 시립대 곽노완 교수 등이 있습니다. 이들 사이엔 약간 색조 차이가 있습니다. 기본소득 지지 단체와 개인들은 기본소득네트워크 (http://cafe.daum.net/basicincome)를 구성해 정보를 공유하고 활동합니다. 제가 취재한 기본소득 국제학생대회도 이 네트워크가 주축이 돼서 개최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강남훈 교수가 재원 마련에 적용한 주요 기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음. ① 모든 소득에 과세한다. ② 근로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는 지금대로 유지. ③ 불로소득(이자·배당·증권양도소득 등)은 30퍼센트 과세. ④ 환경 관련 세금 통합해 환경세로. ⑤ 재산세, 종부세 등은 토지세로 통합해 3% 과세. ⑥ 250조원 정도 추정되는 지하경제 철저 과세. ⑦ 단계적으로 연금을 기본소득으로 전환.
충분한 기본소득과 진정한 민주공화국/[기본소득④] 기본소득은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해법
기본소득은 일체의 자산 심사나 노동 강요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동등하게 지급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을 통해 노동과 소득의 연계는 부분적으로 완화되며 사회구성원에게 시장임금의 형태 이외의 소득이 주어진다. 지급액은 경제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의 유지가 가능할 만큼 충분한 액수여야 하며 물가상승률과 연동된다. 기본소득은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고용이 줄어드는 시대에 실업자, 비정규직, 돌봄 노동자, 가사 노동자, 노인층의 경제적 배제를 완화한다. 기본소득의 경제적 효과는 서민 중심의 내수를 촉진하여 수출ㆍ내수 동반성장으로 경제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되며, 개별 노동자의 교섭력을 제고하여 과잉노동을 줄이고 일자리 나누기도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기본소득은 임금노동 형태 이외의 사회적 활동의 여러 대안적 형태들에 사회적 기초를 부여한다. 또한 기본소득은 노동의 성격과 질도 변화시킨다. 즉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지식기반노동으로의 전환을 위한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까지, 기본소득의 지지자라면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 글은 기본소득에 대하여 다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즉 기본소득은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전제 조건이며, 2008년 이후 더욱 심화되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를 해소하는 대안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본소득 그 자체가 새로운 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뜻한다.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다. 이런 주장에 마주치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단지 복지체계의 한 형태를 의미하지 않고 포괄적인 경제대안임을 확신하는 사람들도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다'와 같은 주장을 들으면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기본소득 개념을 구성하는 원리들을 분석적으로 뜯어보고 또한 민주주의와 국민주권, 공화국의 이념에 전제된 원리들과 비교해 본다면,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다'라는 다소 생경한 주장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오늘날의 현실에 기본소득을 끼워 맞추기 위한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다는 부당한 혐의를 벗게 될 것이다.
기본소득과 민주주의는 같은 원리로부터 나온다.
17세기 초 영국의 구빈법(救貧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존의 복지체계는 선별주의로 요약된다. 복지에서의 선별주의는 복지 요건을 선별하고 제한하여 당사자의 특수한 처지에 따라서만 복지를 제공한다. 우파는 복지를 시혜로 보며, 복지가 시혜로 간주될 때 수혜자에게는 하루빨리 그와 같은 수치스런 처지에서 벗어날 것이 의무가 된다. 좌파는 복지를 처지가 어려운 사회 구성원에 대한 사회연대로 파악한다. 하지만 시혜이건 연대이건 선별주의는 복지를 사회 구성원 모두의 동등한 권리로 파악할 수 없다는 공통적인 한계를 가진다. 기본소득은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보편적 복지다. 기본소득을 지급받는 이유는 수령자의 '특수한 처지' 때문이 아니라 그도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사회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복지의 요건은 가난, 실업, 노동능력 상실 등과 같은 특수한 처지로부터 사람, 경제사회의 구성원, 국민과 같은 보편적 자격으로 바뀌게 된다. 기본소득은 개별 사회 구성원의 특수한 처지를 요건으로 하지 않으며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원리처럼 오직 국민 또는 사회 구성원이라는 보편적인 자격에 근거를 둔다. 따라서 자비나 연대성의 원칙에 근거를 둔 선별주의 복지와 기본소득의 보편주의는 원리부터 다르다. 기본소득은 약자에 대한 시혜나 연대를 넘어 평등한 권리에 근거한 만인의 진정한 통합으로 나아가는 지렛대이다.
정치적 국민주권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나 평등한 선거권을 가진다. 기본소득도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다. 기본소득은 재산 정도나 노동 여부 등 어떤 특수한 경제적 조건과 상관없이 오직 사회 구성원이라는 평등한 자격에만 근거를 두고 동일한 액수로 지급된다.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주의 복지에서 복지 원리와 민주주의ㆍ국민주권 원리의 상동성(相同性)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본소득은 국민 모두의 나라, 곧 '공화국'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면 이제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다'라는 언명이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는 점이 좀 더 분명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를 좀 더 전개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은 민주주의와 원리적 상동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의 평등은 소득 일반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본소득 도입에도 불구하고 시장임금이나 자산 소득을 통해 사회구성원들은 경제적으로 여전히 불평등하다. 물론 기본소득은 불평등을 완화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소득불평등이 존재하는 한에서, '기본소득은 민주주의다'라는 말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기본소득은 무조건적 평등 원리에 기초하지만 소득 일반은 조건적인 불평등을 허용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본소득이 소득불평등을 완화한다는 점은 기본소득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 중에 아주 작은 지점만을 비추어 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를 좀 더 다른 각도, 곧 평등 원리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통성의 원리, '공화국'의 이념에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 모두의 나라로서 '공화국'은 국민의 일정한 수준에서의 공통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바로 이 공통성이란 사회경제적 차원의 공통성을 뜻한다. 즉 자유 의지의 주체라든지, 자유권의 주체라든지 등으로 표현되는 자유주의 근대의 인간공통성 이상의 공통성, 곧 사회적 조건에 있어서 사회구성원 모두의 최소공통성을 전제한다. 달리 말하자면, 국민 모두의 나라로서 '공화국'은 국민 모두에 대한 적극적 복지를 전제한다. 즉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에 충분한 정도의 기본소득을 공통적으로 획득하며 의료ㆍ교육ㆍ주거ㆍ보육ㆍ노후에서의 기본복지가 예외 없이 보장될 때, 국가는 비로소 '공화국'일 수 있다. 기본소득은 경제사회 구성원들의 공통성, 국민의 사회적 공통성을 형성한다. 기본소득을 통해 국가는 비로소 '공화국'이 된다.
우리는 같은 논리를 국민주권의 개념에 대하여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국민주권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부여만으로 실현할 수 없다. 기본소득과 기본복지를 통해서 국민의 사회적 공통성이 확보될 경우에만 모든 국민이 주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획득하며, 국민은 비로소 나라의 실질적인 주권자가 된다.
기본소득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해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를 민주주의 후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만 퇴진하고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민주주의가 과연 실현되는가? 민주주의 후퇴와 같은 상황 규정, 민주회복과 같은 과제 설정은 우리가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말할 때 정작 위기의 성격이 무엇이며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의 문제를 은폐한다.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도 역시 봉쇄되어 버린다.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회복 담론은 이명박을 악마화하며 이명박 정부를 단순하게 반민주주의로 과잉 규정해 버린다. 1987년 민주주의가 성취한 모든 성과들이 일정하게 후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를 법치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정지시키고 평등 선거권을 박탈하는 반민주주의라고 규정할 수 없듯이 당면한 '민주주의 위기'의 해법도 이명박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 없다.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해서 위기의 세계적 수준, 위기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현재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1987년 이전으로의 퇴행의 문제가 아니며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민주주의 위기의 일반적인 증상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시대란 사회국가와 사회공공성의 파괴의 시대이고, 공공적 복지체계가 시장화되고 잔여화되는 시대이며, 그 결과 그 이전에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접근 가능했던 공공서비스가 시장에서 구입해야만 하는 것으로 바뀐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회변화는 서유럽에서도 진행된 일이었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극단적 신자유주의 정부이다. 이명박 정부를 통해 1997년 이후 진행되어 온 민주주의 위기는 심화된다. 하지만 이미 민주주의 위기는 1997년 체제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 민주공화국과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신자유주의의 일반적 관철이며 1997년 이래로의 신자유주의 경제의 필연적인 정치적 귀결이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와는 달리 민주화 운동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명박 정부가 노골적인 사영화, 부자 감세, 복지 삭감을 행함으로써 과거와 같은 착시현상이 사라졌을 뿐이다. 하지만 또 다른 착시현상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수정권의 등장에 의한 민주주의 후퇴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민주주의 위기의 극복방향은 1987년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1997년 이래로의 신자유주의 극복의 문제와 불가분의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극복의 대안은 무엇일까? 당연히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 서민중심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이고, 곧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다. 그리고 기본소득이야말로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 아닌가?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경제 성장 가능한가?/[기본소득⑤] 산업정책으로서의 가능성
무조건적 기본소득의 지급이 경제성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대표적인 논자인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이 경제성장에 해를 주지 않는 것은 물론,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파레이스는 사회의 전체 총생산, 즉 총소득을 기본소득으로 100% 나누는 것을 이상적인 미래 사회로 보는 것은 물론이다. 이 경우 시장에서 생산되고 거래되던 재화와 서비스가 더 이상은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생산되고 유통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즉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행위로서의 노동이 강제적이고 소외된 노동이 아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론은 사적 소유의 철폐를 전제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 적용가능한 사회정책으로 주장된다. 따라서 다른 여러 형태의 자본주의적 유형과 비교하여 기본소득을 내장한 자본주의가 가진 생산성과가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철학적,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기본소득의 경제적 유지가능성 문제로 눈을 돌리면, 기본소득의 세원 확보도 중요하겠지만 이 정책이 유지가능하기 위해서 기본소득이 현재의 다른 경제정책에 비하여 재생산을 더 활성화한다는 점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실현가능한 정책으로서의 기본소득이란 100% 기본소득이 아니라, <그림>과 같이 총소득의 일부를 기본소득으로 하고, 나머지 일부를 시장소득으로 경쟁에 맡기는 정책이다
기본소득이 지금 문제되는 경제적, 현실적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양극화를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양극화는 일차적으로는 소득분배의 양극화이지만, 최근 20년 간의 우리나라 경제를 볼 때 단순히 소득분배의 양극화 만이 문제가 아니라 정규직 대 비정규직이라는 고용구조의 양극화, 수출과 내수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산업구조의 양극화가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지급은 양극화된 산업구조가 가져온 병폐인 소득분배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잡한 복지체계가 가져온 비효율적 배분구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그런데 기본소득이 단순한 소득분배 정책에 그친다면 기본소득의 유지가능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기본소득이 단순한 소득분배의 영역을 넘어서서 산업정책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까? 이는 다음의 두 가지 쟁점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첫째 기본소득은 시장임금을 상승시키는가, 하락시키는가의 문제이고, 둘째는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생산성을 증가시키는가 하락시키는가의 문제다.
전자의 문제에서 기본소득으로 인해 저임금이 보다 확산된다면 사실상 보다 우월한 자본주의적 체제로 간주되기 어렵다. 물론 저임금이 확대되면 거시경제적으로 실업율은 저하할 것이다. 하지만 저임금이 보편화된 사회가 그 구성원으로부터 선호되는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노동인구 중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반반의 비율인데, 평균임금을 비교하면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1/2 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는 오래가기 어려울 것이다.
일부의 기본소득 논자들은 기본소득과 저임금의 결합가능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기본소득은 고임금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기본소득을 지급하더라도 임금율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노동공급이 증가하는 효과가 없으며, 절대소득이 증가하므로 소득 증대로 인해 노동자들이 노동공급을 감소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비자발적 실업이 증가하여 전체의 노동공급이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본소득론에 대한 비판가들이 생각하듯 기본소득을 지불하면 근로의욕이 감소할 것이라는 추측을 지지하는 부분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이 기본소득이 저임금과 결합한다고 보는 이유는 최저보장소득과 달리 1시간을 더 일해도 기본소득보다 더 많이 받기 때문에 노동자의 근로의욕을 감퇴시키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최저소득보장제와 대비한 근로의욕 감퇴에 대해서는 맞지만 기본소득 채택의 전, 후를 비교한다면 없을 때 보다 있을 때 자발적 실업자가 더 생길 소지가 크다. 만약 기본소득으로 노동공급이 줄어든다면 시장임금이 상승한다(물론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이 줄어든다는 점에서는 시장임금이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노동의 수요 측면에서 볼 때 소득 증가로 인해 생산성이증가한다면 수요곡선이 상향이동하여 임금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
부분적 기본소득 제도 하에서 기본소득을 갖추지 못한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경쟁력이 있다면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내에서 점차 확산될 것이다.ⓒ 민중의소리 김철수
시장임금이 상승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산업정책에 관한 통상의 논의에서는 임금의 상승이 자국의 생산기반을 구축하여 산업공동화를 야기할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다른 측면이 분명히 있다. 시장임금이 상승할 경우 高進路적 구조개편이 강화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임금이 상승하면 기존의 저임금에 기초한 산업체들은 도산하거나 구조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고생산성 노동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우 거시경제적 실업율은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지급하므로 실업보험과 같이 실업자에 대한 사회적 방어장치를 새로이 만들 필요가 없다. 실업률은 증가하되 실업자로부터 야기되는 사회적 불안(자살, 범죄, 사회적 갈등 등)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회적 낙오자에 대해서 사회가 공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해도 사회는 궁극적으로 대가를 지불하게 되어 있다. 사회 불안의 증가 자체가 대가인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으로 그 대가를 미리 지불한다면 사회 불안을 예방하는 이득이 있다.
둘째 문제, 즉 기본소득이 생산성을 증가시키는가를 살펴보자. 이는 생산성 증가의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되며, 특히 임금과 생산성의 관계가 문제다. 우선 기본소득은 상층의 소득으로부터 중, 하층으로 소득을 이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중, 하층의 평균 소득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그 사회의 소비성향을 증대시켜 소비를 활성화시키고 국내 경제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가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은 기본소득 자체보다, 기본소득을 제외한 시장소득의 차별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필요의 충족에 해당하는 기본소득이 모든 소득을 점하지 않는 한 개인의 총소득은 기본소득과 시장임금의 결합으로 결정될 것이므로 개인별 소득의 격차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되는 시장임금의 차별은 생산성 격차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하며 생산성 향상의 유인으로 남을 것이다.
파레이스에 의하면, 이러한 기본소득과 결합한 차별적 총소득으로 인해 힘든 노동(3D)의 임금은 상승하고 보다 매력적인 노동의 임금은 하락할 것이다. 따라서 힘든 노동 분야 산업의 임금이 상승하여 이윤율이 저하하므로 기술혁신의 방향은 힘든 노동의 산업분야에 대해서 생산성이 증대하고 이 부문의 노동고용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산업구조 개편이 이루어질 것이다.
반면 중, 하층의 소득의 전체적 증가는 중, 하층 노동력의 생산성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직접적 생계형 저생산성 노동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효율적인 업무와 교육에 투자할 시간과 자금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소득만 받고 노동시장에서 이탈하는 노동자 군은 이전에도 룸펜으로서 생산활동에 들어올 수 없는 그룹이므로 기본소득제도 이전이나 이후에 노동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 인구군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사회적 비용이 지불되지만 사회의 안녕과 재생산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으로 간주한다면 그 비용은 기본소득 이전과 이후에도 비슷한 규모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회적 총소득을 완전 평등하게 나누는 100%의 기본소득이 아닌 현실적 의미에서 부분적인 기본소득의 규모는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 세율을 증가시킬 때 과세 가능한 사회적 총생산이 줄어든다고 본다면, 세율을 증가시키면 처음에는 세액이 증가하다가 일정한 최고점을 달한 후부터 세율을 증가시키더라도 세액 총액이 줄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소득을 모두 세금으로 흡수하기 위해 완전히 100% 부과하면 과세가능한 사회적 총생산은 0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때는 과세가능한 사회적 총생산은 0이지만, 과세불가능한 사회적 총생산, 즉 시장에서 유통되지는 않으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행동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자본주의가 아니다. 문제는 이 단계 이전, 즉 부분적 기본소득 제도 하에서 기본소득을 갖추지 못한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경쟁력이 있다면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내에서 점차 확산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 때 최고의 세액을 얻을 수 있는 세율은 완전평등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세율보다 훨씬 낮은 수준일 것이다. 파레이스는 한 사회가 기본소득을 채택할 때 그 세율의 수준은 최고의 세액을 얻을 수 있는 세율과 완전히 평등하게 하는 세율 사이의 지점에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생산성이 점점 증가한다면 동일한 세율의 조건 하에서도 세액은 증가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시장소득은 모두 단순한 필요 수준의 충족을 넘어가는 완전평등적인 기본소득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논리전개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도 바로 기본소득이 경제성장을 보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기본소득으로 빈곤과 소득 불평등 해소가 가능한가?/[기본소득⑥]기본소득과 소득재분배
기본소득 제도는 심사와 노동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매월 일정액이 무조건 지급되는 소득보장제도이다. 현재의 복지국가 시스템에서 소득보장제도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사회보험료 기여금을 재원으로 하는 사회보험이다. 그리고 일반조세를 재원으로 자산조사에 기초하여 대상자를 선별하는 공공부조제도가 존재한다. 또한 복지 선진국에서는 아동, 장애인 등 특수한 욕구를 가진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수당제도가 존재한다. 기본소득 제도는 조세를 기본재원으로 하며 대상자를 선별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기존의 제도들과 구분되는 가장 보편주의 원칙에 충실한 소득보장제도라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소득재분배 효과는 일반조세를 재원으로 하는 공공부조제도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되고 있다(이인재 등, 2008). 사회보험은 보험수리원칙을 기본으로하고 있어 자본주의의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소득재분배 효과가 크지 않고, 공공부조 제도는 누진적 조세를 기본 재원으로 가장 소득이 낮은 계층에게 집중적으로 급여를 제공하기 때문에 수직적 재분배가 가장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복지정치의 차원을 고려하지 못한 주장으로 평가된다. 또한 실증 분석 결과는 공공부조 제도에서 소득재분배 효과가 전형적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른바 ‘재분배의 역설’론이다(Korpi &Palme(1998). 선별주의적 방식의 공공부조제도는 매우 제한적인 인구 계층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소득 재분배 효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으며, 보편주의적 방식의 사회보험제도는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 냄으로써 평등주의적 성과들을 달성하는데 유리하다는 것이 ‘재분배의 역설’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사회보장제도를 보편주의와 선별주의로 구분해 본다면, 기본소득 제도는 사회보험보다도 더 전형적인 보편주의 제도이다. 기본소득 제도는 대상자를 선정할 때 소득기준도 없으며, 집단 구분 기준도 없고, 노동경력 여부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 제도가 소득재분배 측면에서는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이 실증적으로도 검증되고 있는가? 현재로서는 기본소득 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나라가 없기 때문에 검증은 불가능하다. 다만, Garfinkle등(2006)은 미국을 대상으로 한 시뮬레이션 분석을 통해 기본소득 도입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재분배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Garfinkle등(2006)의 분석결과를 소개함으로써 기본소득 제도가 빈곤과 소득불평등을 완화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Garfinkle등(2006)은 네 가지의 기본소득보장 안에 대해 시뮬레이션 분석을 실시하였다. 이 네 가지의 기본소득 보장안은 표준안, 아동우선안, 한부모우선안, 성인 우선안으로 구체적인 급여 내용과 재정방식은 아래와 같다.
표 1- 기본소득보장(Basic Income Guarantee) 안ⓒ 백승호
분석결과 기본소득 보장안이 빈곤에 미치는 영향은 아래와 같다.
표 2- 현재의 소득보장제도와 기본소득보장안의 빈곤에 미치는 영향 비교 (수급자에게 제공되는 현물급여의 실질 가치를 액면가의 75%로 환산한 경우임)ⓒ 백승호
분석결과 모든 안에서 빈곤율이 감소하고 있으며, 성인우선안은 빈곤율을 10%에서 5.8%로 낮춤으로써 빈곤율 감소효과가 가장 큰 것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빈곤갭은 절반이하로 감소됨을 알 수 있다. 아동우선안은 아동빈곤율을 14.5%에서 8%로 줄였다.
다음으로 기본소득 제도가 수직적 재분배에 미치는 영향은 아래와 같다.
표 3- 현재의 소득보장제도와 기본소득보장 제도의 소득재분배 효과 비교ⓒ 백승호
분석결과 소득 최하분위와 최상 분위에서의 재분배 효과는 매우 의미있게 나타나고 있었다. 현행제도는 소득 하위 1분위의 소득 점유율을 5.1% 정도로 증가시켰고, 소득상위 5분위의 소득점유율을 42.7% 수준으로 줄였다.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기본소득 제도는 미미하지만 소득 1, 2, 3분위의 소득 점유율을 증가시키고 있는 반면, 소득 5분위의 소득 점유율은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성인 우선안에서 상위소득 분위의 소득점유율은 2%이상 감소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상으로 기본소득 제도가 빈곤과 소득재분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았다. 위에서 Garfinkle 등(2006)이 시뮬레이션 분석을 위해 사용한 기본소득 안들은 적정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안들이었다. 소득재분배 목표를 달성하기위해 보편주의적 방식의 소득보장제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적정수준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위의 기본소득 안 중에서 추가적인 5.5% 포인트의 소득세를 부과함으로써 더 많은 재원이 소요되는 성인우선 안이 빈곤 감소 및 소득재분배 효과에서 가장 좋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적정 수준의 기본소득이 빈곤과 소득재분배에서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소득조사를 통해 빈민들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선정하는 정책들은 거의 빈곤을 감소시키지 못해왔다(Burtless, 1994). 또한 보편적 복지제도가 더 재분배적이라는 연구결과들(Korpi &Palme, 1998)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가 확립된 이후 수 백년동안 지속되어왔던 선별주의적 탈빈곤정책들이 어떤 국가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빈곤과 소득재분배를 개선하기위해서는 보편적 복지제도의 확장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어떤 제도 보다도 가장 보편적인 방식의 제도가 기본소득 제도이다. 적정 수준의 기본소득 보장은 인류 역사의 영원한 과제인 빈곤문제의 해결과 소득재분배의 개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지만 전혀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의 기본소득 제도를 통해 극적으로 빈곤문제를 해결하고, 소득재분배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소득⑦] 필요한 경비와 재정적 효과
기본소득에 필요한 경비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제안을 처음 들으면, 누구나 재원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질문하게 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에 필요한 경비가 얼마인지 추정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금액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가정한다.
기본소득 필요 경비ⓒ 강남훈
이 계획에 따르면, 19세 이하는 연간 300만원을 지급하고, 그 이후 연령에 따라 지급액을 증가시켜나가서, 55세 이상에게는 연간 600만원을 지급하게 된다. 이러한 기본소득 지급에 필요한 경비는 215조원이 된다. 여기에 무상급식과 무상의료를 더하면 총 250조원의 재원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본소득과 사회적 서비스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세 이하에게 300만원이 아니라 2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무상보육,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이라든지, 55세 이상에게 연간 5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면서 무상수발을 실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
재원 마련 방법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근로소득세나 부가가치세를 중심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도 많이 주장하는 방법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표 2>와 같이 불로소득을 중심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기본소득 필요 경비ⓒ 강남훈
이 재원은 다음과 같은 원칙과 방법으로 마련된 것이다.
① 모든 소득에 대해서 과세한다. 이 원칙에 따라 증권양도소득세와 토지세를 신설한다.
② 근로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에 대해서는 현재 세율을 그대로 유지한다.
③ 불로소득(이자, 배당, 증권양도소득 등)에 대해서는 30%의 세율로 과세한다.
④ 환경관련 세금을 환경세로 단일화하고 현재 GNP의 1.1% 수준인 환경세를 4% 수준(약 40조)으로 3%만큼 증가시킨다. 유럽의 환경선진국 중에서는 환경세가 이미 GNP의 5% 수준에 도달한 나라가 있으며, 각국의 환경세율은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⑤ 재산세, 종부세 등은 모두 토지세로 통합하여 단일화하고 지가총액에 대해 3%의 세율로 과세한다.(지가 총액 2000조로부터 60조원의 세금이 걷힌다. 여기서 기존의 재산세와 양도소득세 등 부동산 관련 세입 제외) 앞으로 토지세율을 더욱 인상하는 대신 근로소득세 등 근로의 결과에 대한 조세를 그만큼 감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⑥ 지하경제의 규모는 250조원 정도로 추정되는데, 일정 금액(예를 들어 10만원) 이상 전자거래 의무화 등의 입법 조치를 통하여 철저하게 과세한다.
⑦ 연금을 기본소득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과도기가 필요하다. 기본소득 도입 직후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연금과 기본소득 중에서 선택하게 한다든지, 기본소득과 연금의 차액을 지급하는 등의 방법으로 단계적으로 연금을 기본소득으로 전환해나간다고 가정한다.
기본소득 필요예산은 약 250조원인데 재원은 약 254조원이므로 약 4조원의 잉여자금이 생긴다. 잉여자금은 기본소득기금으로 적립하여 재원이 부족할 경우에 대비해 나간다.
기본소득의 재정적 효과
215조원의 재원은 매우 커 보이지만, 국민 전체로 보면 기본소득으로 인하여 세금을 더 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 전체로 보면 추가로 낸 세금만큼 기본소득으로 되돌려 받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이와 같이 세금과 지출을 재분배하는 효과만 있지, 세금을 추가로 걷는 것은 아니다.
지하경제 세원을 포착하는 것을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현대의 IT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정 금액 이상의 거래를 전자거래 의무화하고, 전자 거래에 대하여 수수료를 면제해 주고(증가된 조세 수입으로 은행과 카드사에게 보조), 전자거래 금액의 일정 비율만큼 소득세를 감면해 주면, 거의 완전한 세원 포착이 가능하다. 문제는 조세당국의 의지이다.
환경세 강화도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인 일이다. 환경세 강화는 공해를 줄이고 자원을 절약하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다. 이러한 환경세 강화로 마련된 재원을 기본소득으로 쓴다면 환경을 보존하고, 소득을 공평하게 하는 이중의 효과가 발생한다.
흔히 투기 같은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한다고 할 때, 과세를 하면 투기도 없어지게 되므로 기본소득도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불로소득에 대한 30% 정도의 과세는 선진국 수준이므로 특별하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토지세와 환경세는 과세로 인해서 사라지지 않다. 토지세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더 커지게 되고, 환경세도 생태 위기가 심해질수록 더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재원 마련을 위해서는 조세 변혁이 필요하다. 탈세가 사라져야 하고 세금을 안 내던 불로소득자들은 추가로 세금을 내야 된다. 이러한 조세 변혁에 대하여 국민 전제의 동의를 받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투명하고 공평한 조세는 우리가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표이다. 기본소득을 통해서 이러한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면 아주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기본소득은 실제로 이러한 조세 변혁을 용이하게 해 줄 수 있다. 조세 변혁을 해서 마련한 세금으로 기본소득으로 나누어주겠다고 하면 동의하는 국민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과 여성/[기본소득⑩] 성(性)평등 사회에 대한 기여
무조건적으로 모든 개인에게 지급되는 일정 금액의 기본소득은 성(性)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과연 기본소득은 여성이 공평한 기회와 평등한 결과를 획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인가?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성별 노동 분업을 극복하는데 기본소득은 어떠한 기여를 할 것인가? 사회에서, 직장에서, 오로지 성(性)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는 여성에게 기본소득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기본소득이 성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얘기할 때, 우선 주목되는 것은 기본소득이 개인에게 지급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는 많은 사회보장제도가 ‘가족을 기준’으로 한 소득비례방식으로 보장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재 한국의 공적연금은 소득이 없는 사람은 ‘기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수급자가 될 수 없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단위로 묶여 소득이 있는 사람의 ‘부양가족’이 된다. 소득이 없는 사람의 몫으로는 가족이 있는 경우, 부양가족의 몫으로 +@(매우 적은 금액)를 수급자에게 더 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여럿이 가족을 구성하더라도 각 개인에게 지급되고, 혼자 살던, 혹은 수입이 있건 없건 무조건적으로 지급된다.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이 성평등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성에게 경제적 자유를
많은 사회보장제도가 ‘가족을 기준’으로 한 소득비례방식으로 보장되는 것과 달리, 기본소득은 개인에게 지급된다.ⓒ 민중의소리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8년 50.0% 이었다. 설사 경제활동에 참여를 한다고 해도 여성 임금노동자의 64.9%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성별 임금불평등을 보면 평균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62.3%의 임금을, 여성비정규직은 남성 정규직의 39.1%의 임금을 받고 있다(김유선, 2009). 공적 연금 가입현황을 보면 2007년 기준으로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을 합해 여성은 남성(9백2십1만1천명)의 절반 수준인 5백1십3만 명만 가입해있다. 고용보험 피보험자는 여성이 전체의 겨우 35.4%(2007년)이고, 반대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여성이 전체 수급자의 57.5%로 8십4만7천40명에 달한다. 2009년 총가구수 중 여성이 가구주인 가구는 374만9천 가구로 총가구의 22.2%를 차지하고 있다. 그 비율은 1980년 14.7%, 2000년 18.5%, 2009년 22.2%로 계속 증가 추세이나 이들에게 ‘생계부양자’로서의 임금이 지급되고 있지 않음은 남녀 임금 격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의 경제적 열악함은 더 나열할 것도 없이 심각한 상황인데 소득비례방식의 사회보장제도는 수많은 사각지대 특히 여성을 지독한 사각지대에 놓이게 한다. 비혼모의 경우를 보자. 정확한 통계가 없다는 것이 비혼모의 현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가끔 사회문제로서 지적될 뿐 이들을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나누고자 하는 관점과 태도로 접근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되고 있는 비혼모는 그들의 처지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혼자서 책임지거나 시혜의 대상자로 여겨진다. 그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정액의 기본소득이 매월 꾸준히 지급된다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하겠는가? 그들 아이의 삶은 또한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또 소득이 없는 여성들, 즉 부양가족으로 인식되며 온갖 무급의 가사노동, 돌봄 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경제적 자립의 어려움 때문에 매를 맞고 살아도,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도 홀로서기(이혼)를 하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은 어떤 힘이 되겠는가?
‘낙인’이 아니라 권리를
여성들의 이러한 경제적 상황은 이들을 돌보아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비혼모의 여성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 소득이 없어 사회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여성들, 매 맞는 여성들, 가사노동자나 간병노동자 등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 이들은 현재의 사회보장 체계 내에서 사회나 혹은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사각지대에 놓이거나 ‘시혜의 대상’이 되고,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된다. 보편적 복지인 기본소득은 이러한 여성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을 하기 위해 자산조사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삶을 낱낱이 파헤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이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이들에게는 더 유용한 그리고 더 절실한 수입원이 될 것이다. 보편적인 복지제도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가장 필요한 곳에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 기본소득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노동시간단축과 가사노동분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의 노동을 한다. 많은 남성들이 ‘남성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하루 종일, 때로는 야간, 철야, 휴일 근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심지어 똑같은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남성들과 ‘성(性)’이 다르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오면 가사, 양육까지 도맡아야 한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은 일과 생활의 균형(life and work balance)을 어렵게 한다. 장시간 노동과 가부장제적인 ‘남성 생계부양자’논리가 만나면 여성의 3중고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고, 여성이든, 남성이든 매월 꾸준히 일정액이 안정적으로 지급된다면 실질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해진다(노동시간단축과 기본소득은 지난 호 참고). 실질적인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일과 가정의 균형이 가능해진다. 그 뿐이 아니다.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문화 활동, 지역공동체 활동, 혹은 보다 폭넓은 사회활동도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여성과 남성이 사회적 차원으로 자신의 유의미한 활동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미있는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기본소득만 있어서는 안 된다. 공공 보유시설이 보다 확충되지 않으면 노동시간 단축으로 생긴 시간들이 ‘자신’의 아이들, 가족들을 돌보는데 머무를 수도 있다. 때문에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은 다른 공공재의 강화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 공공보육의 확충, 무상의료, 무상교육, 돌봄 노동의 사회화 등을 기본소득과 바꾸는 것이 아니다. 많은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얘기하듯 공공재는 더욱 확충되어야 한다.
실질 노동시간단축으로 일과 가정의 균형, 의미 있는 사회적 활동도 가능하지만 또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가능해진다. 개개인의 실질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면 노동자의 필요∙충족에 의해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사용자는 일할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일자리가 남성에게만 국한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성별 노동분업과 기본소득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성별 노동분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지급되면 여성들은 갈등을 하게 된다. 특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 또한 아이가 있어 상당히 많은 액수의 보육비를 지출해야 하는 엄마들은 갈등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100만원의 임금에 40만원의 보육비를 지출하고 있던 여성이 만약 4~50만원의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과연 계속 노동시장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집에서 아이를 ‘직접’ 돌보는 일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이는 단순하게 금전적인 이유만으로 선택할 일은 아니다. 아이에게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하고, 직장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는 일도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은 한 돈 십만 원 더 벌자고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싶지는 않을지 모른다.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가! 아마도 노동시장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의 예를 생각할 수 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녀들에게 기본소득 4-50만원이 매달 지급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최저임금조차 받기가 쉽지 않다. 차비에, 식비에 이렇게 저렇게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기본소득이 있으니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노동시장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최저임금의 일자리를 선택하는 여성들의 경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최저임금에, 비정규직으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녀들에게 기본소득은 ‘추가’의 소득이 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여성들이 기본소득이 생김으로써 그녀들이 일자리를 떠난다면? 이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많은 여성학자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성별 노동분업을 더욱 고착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이다. 요지는 이렇다. 여성 개인에게 기본소득보장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저임금 일자리를 이탈하게 되어 가정에 머물게 되며, 그렇게 가정에 머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정 내의 돌봄 노동을 전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별 노동분업은 더욱 고착화되며, 언제가 노동시장으로 복귀하고 싶을 때 또 다시 ‘성별 노동분업’에 근거한 일자리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일자리의 일은 ‘생계부양자’가 하는 일이 아닌 부수적 일로 여겨서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기본소득은 여성에게 성별 노동 분업을 고착화시키며 여성에게 ‘평등’은 더 요원한 일이 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생각할 일인가? 다른 경우의 수도 생각할 수 있다. 여성 개인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되고, 그로 인해 저임금의 일자리에서 이탈을 하게 된다. 가정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 후 장시간∙저임금의 여성 노동자들이 감당했던 그 열악한 일자리에 누가 채워질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 일자리는 기본소득 때문에 여성들이 떠났다면 똑같이 기본소득을 받는 남성들이 그 자리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공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저임금 등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장시간 일하고도 적은 임금을 받았다는 것은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그 동안 초과적인 착취를 당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적어도 이러한 초과착취는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기본소득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떠날 것이라는 논리에 따른다면 그들이 떠난 일자리에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게 되고 보편적인 기본소득체계 아래서는 과거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를 노동시장으로 유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소득이 도입되었을 때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개인에게 또한 사회에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기본소득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 변화의 토대
물론 기본소득만으로 여성의 평등을 완전히 실현할 수는 없다. 사회적 제도와 문화, 의식의 변화를 위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의료, 보육, 교육 등의 공공성 강화는 매우 중요한 기본조건이다.
기본소득은 임금 노동, 돌봄, 휴식을 섞어서 취할 수 있는 개별의 선택의 가능성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증진시킨다. 때문에 누구도 노동자와 돌봄자, 둘 중의 하나만 되어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임금 고용의 세계에서 그리고 돌봄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바뀌기 위한 가장 가능성 있는 재분배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기본소득만으로는 진정한 성평등에 도달하지 못한다. 기본소득은 다른 제도와 정책들의 변화 즉, 공보육 시설의 확충, 무상교육, 무상의료, 돌봄 노동의 사회화, 가부장적 문화 극복을 위한 사회적 노력과 함께 그 빛을 더욱 발하며 성평등을 실현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노동패러다임, 기본소득/[기본소득⑧]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극복의 전략인가
기술발전과 산업구조의 변화로 완전고용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고용노동과 연계된 복지체제를 보편적 복지체제로 전환하자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일정액의 소득을 보장해 주자는 기본소득 도입운동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은 질문은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을 위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전략일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우선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을 추려보고, 기본소득 운동이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극복하는데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자본주의와 노동패러다임
잘 알려진 것처럼, 자본주의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노동할 수 있는 능력, 즉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드는 사회이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일정기간 동안 사는 대신, 노동자에게 같은 기간 동안 노동자 자신 및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지불한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기간, 즉 노동자가 일하는 전체시간은 그 기간 동안의 노동자의 생계비용을 마련하는데 요구되는 노동시간과 같지 않다. 즉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비용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넘어서 더 오래, 노동계약 상에 적혀 있는 대로 자본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착취이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이러한 노동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자본가는 더 많은 이익, 착취를 위해 노동자에게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익, 착취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회적 삶의 모든 면을 노동을 중심으로 조직한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노동은 생존하기 위해 수행해야만 하는 활동으로, 따라서 고통, 저주로 인식된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오히려 그 자체 바람직한 윤리적 활동으로 군림한다. 반면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아닌 활동은 게으름으로 비난된다. 이는 단순히 노동이데올로기를 통해 유포된 것이 아니라, 노동수용소 등을 통한 규율, 물리적 폭력의 결과였다. 자신만의 창조적 활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백수가 사회적 루저(loser)로 낙인찍히고, 노동자의 얼마 안 되는 자유시간마저도 학원을 다니는 등 노동능력 향상을 위한 시간으로 쓰거나, 다른 누군가의 노동시간이 들어간 상품의 소비시간으로 쓰도록 조장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노동숭배는 여전하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노동을 지배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노동이 지배하는 사회, 노동패러다임의 사회이다.
둘째, 자본가의 이익, 착취는 자본주의적 기업조직 내의 노동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고용노동만 노동으로 인정받고 소득이 주어지며, 가사노동을 포함한 여타의 비고용노동은 노동 범주에서 쫓겨나 고용노동의 예비군 지위로 전락한다. 즉 자본주의는 고용노동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이는 자동화 등을 핑계로 자본의 이익을 우선하여 시행되는 자본주의적 해고가 만연할지라도 마찬가지인데, 고용노동 경험이 있는 사람만 실업급여를 받고, 고용노동할 의사가 있는 사람만 복지혜택을 준다는 자본주의 논리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셋째,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익, 착취를 위해 노동자의 의사에 반해 노동과정을 통제하며, 감시카메라 등의 지배기술을 사용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노동 안에서 자기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억압한다.
넷째, 자본주의에서 서로 다른 상품의 교환의 양적비율은, 수요와 공급이 서로 상쇄된다고 볼 때, 기본적으로 각 상품의 가치량에 따라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각 상품을 만드는 각 노동의 서로 다른 구체적 성격은 추상되어, 모든 노동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동등한 인간노동으로 환원되고, 이러한 노동이 쓰이는 시간, 즉 그 상품을 만드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량을 규정한다고 가정된다. 이렇게 노동시간이 가치량을 결정한다는 ‘가치법칙’은 이 법칙이 작동하도록 돕는 이데올로기적, 물리적 폭력장치를 동반하면서, 노동력 상품을 포함한 모든 상품의 생산과 교환의 원리로 기능한다. 자본주의에서 상이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동등한 가치량을 지닌 상품들만 서로 교환될 수 있으며, 더 많은 가치량을 얻기 위해서만 물건이 생산한다. 즉 자본주의는 가치,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의 지배는 다시 가치를 구성하는 노동의 지배를 의미한다. 가치, 가치법칙이 생산, 교환, 분배의 원리라는 것은 노동, 노동시간이 생산, 교환, 분배의 규제적 원리라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이상, 노동이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생계필연적 수단에 불과하며 따라서 노동착취뿐만 아니라 노동 자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노동자 스스로에게도 망상으로 치부된다. 자본가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도 더 많은 가치를 위해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또한 가치법칙을 원리로 하는 사회에서 생산의 목적은 더 많은 가치이기 때문에, 생산과정에서 노동의 성격과 노동이 인간에게 주는 질적 의미는 철저히 무시된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노동중심주의, 고용노동중심주의, 노동 안에서의 자기실현 가능성의 억압은 자본주의적인 착취동기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치, 가치법칙 자체에도 기인하는 것이다.
다섯째, 자본주의는 기존에 존재하는 성, 인종, 민족 등의 사람들 사이의 균열선을 이용해 각 집단을 노동세계에서 상이하게 대함으로써, 노동자 집단 내부에 균열을 만들고, 노동자의 연대를 막으며, 자본에 대한 복종을 공고히 한다. 즉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분할해서 지배한다. 경험적으로 드러나듯이, 여성-타인종-타민족 노동자는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노동세계의 하위에 그리고 바깥에 배치되어, 무임금, 저임금으로 노동하거나, 승진이나 직업능력 향상의 기회가 적은 일을 하며, 남성-자인종-자민족 노동자는 자신의 보다 나은 지위가 위협받는다면, 이러한 노동의 분할을 극복하려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의 분할 및 위계를 비판하는 운동에 적대적으로 돌아선다.
자본주의 비판과 기본소득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는 가치법칙의 토대 위에서 착취를 목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을 지배하는 동시에 노동이 지배하는 체제이며, 노동을 분할하는 체제이다. 그렇다면 최근 논의되는 기본소득은 이러한 자본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가.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이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보장하는 액수를 국가로부터 개별적으로 지급받는, 소득심사 및 노동의무와 같은 조건 없이 지급받는 소득이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첫째, 모든 사람의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인식을 바꿔 노동이 사회적으로 신성한 활동이라는 자본주의의 신화를 부순다. 기본소득을 통해, 노동은 애초 생계를 위한 필수적 활동일 뿐이었으며, 인간은 오히려 자신만의 독특한 역량을 개발하고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이상, 즉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이상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관련해서 기본소득은 또한 노동시간단축을 실현시킬 수 있다. 지금처럼 고용노동만이 임금을 지급하고 임금이 노동시간과 연계된 경우, 노동시간단축 그 자체는 임금을 떨어뜨려 저임금 노동자, 임금수준과 연계되어 있는 연금수령자 및 사회이전지출 수급자의 생활을 더 악화시키며, 따라서 이들의 반발과 노동자 간 분열을 초래할 뿐이다. 반면 기본소득의 보장은 사람들이 그동안 억압되었던 자유시간 확대에 대한 이해를 직접적으로 표명하도록 하고 따라서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전체노동시간단축을 실현하기 위해 연대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의 고용노동 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고용노동만을 소득과 연계시키는 자본주의와 달리,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기본소득은 사실상 모든 활동에 소득을 보장해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자유로운 활동에도 소득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노동 범주에서 배제되었던 고용노동이 아닌 가사노동을 포함한 여타의 생계활동을 노동으로 다시 인정하며 소득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을 통해 자본주의를 뒷받침하는 고용노동의 지배는 약화될 수 있다.
셋째, 기본소득은 노동자가 소득보장을 바탕으로 쉽게 노동시장 진입을 거부하거나 노동시장에서 탈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기업문제 전반, 특히 노동과정 문제에 대한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인다. 그리고 기본소득을 통한 노동자의 협상력 증대는 노동과정에서 지배기술을 철수시키고, 노동의 인간화를 위한 기술의 도입을 촉진시키며, 노동자의 노동과정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권을 강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착취의 문제를 잠시 덮어둔다면, 기본소득은 자유로운 노동, 소외되지 않은 노동, 노동 안에서의 해방을 촉진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또한 기본소득을 통한 협상력의 증대,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자기결정권 강화는 노동시간단축이 노동강도 강화를 포함한 다른 노동조건의 악화를 동반해 노동시간단축의 실현의 의의가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넷째, 기본소득은 고용노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고 따라서 조건 없이 소득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활동시간과 소득의 양은 비례하지 않고 그 관계가 아예 없으며, 한 활동이 만들어 낸 (비)물질적 부와 다른 활동이 만들어 낸 (비)물질적 부가 각각에 들어간 활동시간을 기준으로 교환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지출된 활동시간과 관계없는 교환과 분배는 지출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에 따라 교환되고 분배되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넘어선 것이다. 즉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상품을 만드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량을 결정하며 이에 따라 상품이 교환된다는 자본주의의 가치법칙, 그리고 노동력 상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노동시간만큼의 가치량을 임금으로 받는다는 임금법칙과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원리는 더 많은 가치, 따라서 더 많은 노동에 대한 사람들의 강제된 그리고 동시에 내면화된 열망을 진화하면서, 한편으로 노동 밖의 자유로운 활동을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의미를 노동하는 사람 자신의 입장에서 곱씹어 볼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 기본소득은 더 많은 가치를 추구하는 생산체제, 생산과 교환의 규제적 원리로 노동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생산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인 것이다.
다섯째, 기본소득은 성, 인종, 민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생활을 보장해 줌으로써,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혹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기존 사회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타 노동자 집단과 서로 경쟁하고 적대적인 투쟁을 벌이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다. 즉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사회적 소수자정치와 더불어 기본소득은 자본주의가 노동자에 대한 분할지배를 위해 활용하는 노동세계 내의 성위계, 인종위계, 민족위계를 비판하고, 노동의 분할에 저항해 노동자가 연대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로 기능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기준
모두를 위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마디인 노동패러다임, 고용노동 중심주의,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 가치법칙, 노동의 분할을 꺽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노동 안에서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게다가 기본소득은 노동자에게 직접적인 공통이익을 제시하는 슬로건이라는 점에서 노동자를 설득하고 조직하기에 효과적일 수 있다. 물론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에 대한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자본주의 지배의 물질적 토대인 사적 소유의 문제, 착취에 대한 직접적 비판은 우회될 수 없으며, 노동자 자주관리 등을 포함한 전통적인 반자본주의 전략도 여전히 적극적으로 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은 위에서 말한 이유로 사회운동의 중요한 하나의 지점을 차지한다. 따라서 이제 본격적인 논의는 기본소득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기본소득이냐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하의 기본소득의 기준은 이러한 논의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 도입운동은 이 기준에 따라 자본주의 비판운동에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 기본소득의 액수가 얼마나 높은가? 국가가 낮은 액수의 기본소득을 사실상 임금보조금의 성격으로 지급한다면, 사람들은 기본소득으로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저임금 노동이나 노동조건이 열악한 불안정 노동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낮은 액수의 기본소득은 저임금 노동이나 불안정 노동의 확산을 위한 자본주의의 전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2. 기본소득의 재원마련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기본소득의 재원이 자본의 이윤을 회수하는 징세방식으로 마련된다면,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띨 수도 있지만, 기본소득의 재원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간접세나 노동자 집단 내부에서만 소득이 재분배되는 징세방식으로 마련된다면, 이는 자본주의 비판과 아무 관련이 없다.
3. 기본소득과 기본소득으로 대체되는 기존의 사회보장의 양과 질의 차이는 어떤가? 당연히 기본소득의 양과 질이 기본소득으로 대체되는 기존의 사회보장의 양과 질 보다 커야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의의가 있을 것이다.
4.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대신 국가나 기업이 노동시장정책 등을 포함한 전반적 노동정책을 악화시키려 하고 기본소득모델이 이에 타협하지는 않는가? 기본소득은 노동정책의 개선과 함께, 최소한 노동정책의 악화 없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5. 기본소득으로 확보되는 사람들의 자유시간이 다시 자본주의적인 소비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자율적 활동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체계, 조직, 대안적 문화정치가 기본소득모델에 함께 고려되는가? 기본소득의 도입은 첫걸음일 뿐이다. 기본소득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자유공간이 자본주의적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기본소득의 도입 이후를 내다볼 필요가 있다.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의 결합은 '필수'‘/[기본소득⑨]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기본소득
노동시간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독일 산업노동자의 경우 1일 노동시간은 1800년경 10-12시간, 1820년경 11-14시간, 1830-1860년경 14-16시간으로 증가하여 주 80시간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농부와 수공업자들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노동하였으나, 산업노동자들은 기계의 속도에 맞추어 노동해야만 했다. 특히 초기 산업노동자의 경우에는 얼마 되지 않는 휴식 시간마저 엄격히 제한되어 노동자들은 거의 초주검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증기 기술)이 일어나면서 노동시간은 주 60시간대로 감소하였으며 20세기 2차 산업혁명(석유 및 전기)후 주 40시간대로 감소하였다. 물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노동자들의 피나는 투쟁이 뒷받침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3차 산업혁명(컴퓨터와 새로운 정보 및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술) 이후, 우리는 노동시간을 주 40시간대에서 20시간대, 아니 더 짧은 시간대로 단축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기술적 조건이 갖추어졌음에도 신자유주의 공격이라는 자본의 역습을 맞이하여 노동시간 단축 추세는 중단되었다. 오히려 임금은 삭감되고 노동시간은 증가하는 한편 높은 실업률이 유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되는 시점인 70년 중반의 선진자본주의, 그리고 97년 IMF를 기점으로 하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내리막길로 치닫는 시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서유럽 일부의 경우 8,90년대 주 30시간대로의 시간단축 움직임이 있었고, 우리나라도 40시간대로의 법정노동시간 단축이 있었지만 한국의 경우 실질노동시간 단축에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08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노동자 1인당 연간 평균노동시간은 2357시간이며 주간 노동시간은 45.2시간으로 OECD 국가 중 2000시간이 넘는 유일국가다. OECD 국가의 연평균노동시간은 1777시간이고 주당 34시간으로 한국 노동자들은 이들보다 1주일에 11시간 더 일한다. 가장 짧은 네덜란드(1391시간)보다 연간 966시간, 미국보다는 연간 560시간이 더 길다. 역설적인 것은 이렇게 오래 일할만큼 일거리가 많은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늘어만 간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09년 7월 통계청 발표 공식 실업자 수는 92만8000명으로 실업률은 3.7%이다. 그러나 한국노동연구원이 산출하는 공식 실업자에다, 구직활동을 아예 포기해버린 실망실업자와 취업준비자를 더하고 부분실업자(단시간 근로를 하고 있지만 취업을 희망)를 보태는 방식의 확장실업자수는 09년 7월 현재 245만1000명이며 실업률은 9.5%나 된다. 한쪽에선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한쪽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놀 수밖에 없는 지독히도 모순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총노동시간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사회 전체적으로 감소한다
과학기술의 발달, 지식노동 사회로의 전환,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에 따라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지식과 기술수단을 넘치게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생산력은 대폭적으로 증가하고 사회적 총노동시간은 감소하고 있다. 역사의 전개는 인간을 자연적인 리듬으로부터 기계의 속도에 종속시켰지만, 이제 증대된 생산력을 유지하면서도 다시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고용이 필요 없는 성장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자본과 정부, 미디어, 하물며 노동진영조차 일자리가 없다,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한결 같이 외치고 있으며 일자리 창출을 위해 온갖 고민을 쏟아내고 있다. 경제위기가 본격화 된 올 초 정부와 자본은 임금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일자리 지키기·나누기·만들기’를 제시했다. 하지만 노동진영의 ‘일자리 지키기, 나누기’는 대중들에게 고용된 자들의 일자리 지키기에 연연하는 모습으로 비춰졌고, ‘만들기’는 공공부문의 좋은 일자리 창출을 요구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의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나 저임금 단기간 일자리 창출 이슈에 말릴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 총필요노동시간 감소 현상으로 노동자가 필요 없게 된 사회에서 노동자 방출에 대한 해법이 일자리창출이 되는 한, 노동은 우선 파이를 키워 나누자는 식의 성장전략 등의 자본의 논리를 이길 수 없게 되고, 노동의 양보는 불가피하게 된다.
이러한 기술 조건의 변화와 자본의 이데올로기 전략으로 인해 노동사회는 그야말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에 노동운동은 객관적 조건을 고려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야만 한다. 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필요한 노동 총량의 감소가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서 오늘날의 노동이 처한 위기에 대한 답은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포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운동 진영 일각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통한 비정규직 철폐, 고용권·노동권의 입법화, 사회복지의 개혁 등에서 노동운동의 대안을 찾고 있다. 이는 서구에서 끝장난 완전고용 하의 복지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갈망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마찬가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실업자간의 갈등이 만연되고 정규직조차 고용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한 채, 정규직에 대한 연대 호소를 통해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꿈꾸는 것 또한 정규직이 처한 현실 조건을 비껴간 해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고용권, 노동권 입법화의 구체적 내용이 노동시간 단축을 핵심으로 하여 현재화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의 결합은 필수다
그렇다고 실업, 비정규직, 사회적 소외,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 노동사회의 전반적 위기를 노동시간을 몇 시간 단축하는 ‘기술적’ 처방만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대폭적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노동의 요구나 재산에 대한 심사 없이 전국민에게 매월 지급되는 것으로 선별주의에 의한 자비나 시혜를 거부하고 정당한 권리로서의 보편주의를 지향한다.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노동이 생존을 담보하는 개념인 실업(失業)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고 자의이건 타의이건 노동영역에 흡수되지 않아 발생하는 실업으로 인한 사회의 낙오자는 더 이상 없어지게 된다
기본소득 지급과 함께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만들어진 일자리는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는 노동 공유의 조건을 만들 것이다. 즉 고용권, 노동권이 확보되는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이 완전고용을 꿈꾸는 건 아니다. 전후 자본주의 성장기와 구사회주의권에서 완전고용을 지향하거나 완전고용에 근접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완전고용을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노동이 생존을 담보하게 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노동강제를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조건에 처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낙오자로 찍히게 되며 시혜 대상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대폭적인 시간단축을 통한 노동공유 사회에서는 임금노동을 원치 않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으로 생활하게 되며 임금노동이 아닌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지급되기 때문에 임금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소득이 커지게 되고 그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그 한계도 분명하다. 노동시간이 단축되었다 하더라도 임금노동을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에(비록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붙지만)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강제 노동적 한계는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노동시간단축은 체제 내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근본적으로 자본과 임노동관계를 지양하지 않고, 노동강제적 성격을 지양하지 않은 채 단지 양적으로만 노동을 감소하려는 시도라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따라서 소유의 사회화와 노동자 민중의 통제를 통해 자본주의 하의 노동강제적 성격을 자율노동, 자유노동으로 전환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게 되는 것이며 노동시간 단축은 이를 앞당기는 지렛대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고민할 때는 임금, 노동유연화 등 다양한 쟁점이 연동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 진영은 어쩌면 이러한 문제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을 쟁점화하지 못하는 지도 모르겠다. 임금과 노동유연화 문제는 현재 노동을 향한 자본의 공격 지점이므로 현재조건에서는 노동자민중의 생존을 위해서도 사수를 위한 투쟁은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을 동시에 고민할 때는 전향적 판단이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장시간 노동이 유지되는 한 어떠한 형태의 노동해방도 상상할 수 없다. 그렇기에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진보진영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노동시간 단축은 필수 요건이다.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사회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를 통한 주체형성, 때 지난 완전고용과 복지국가를 향한 요구에 매달려서는 노동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유지발전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대폭적으로 단축되고 있는 현실, 점점 더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자본주의의 발달한 현실에 착목하자. 그리고 자본에게 일자리를 만들어달라고 애원(?)하는 노동운동을 벗어나자.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과 여성/[기본소득⑩] 성(性)평등 사회에 대한 기여
무조건적으로 모든 개인에게 지급되는 일정 금액의 기본소득은 성(性)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 과연 기본소득은 여성이 공평한 기회와 평등한 결과를 획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인가? 오랫동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성별 노동 분업을 극복하는데 기본소득은 어떠한 기여를 할 것인가? 사회에서, 직장에서, 오로지 성(性)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는 여성에게 기본소득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기본소득이 성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얘기할 때, 우선 주목되는 것은 기본소득이 개인에게 지급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는 많은 사회보장제도가 ‘가족을 기준’으로 한 소득비례방식으로 보장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재 한국의 공적연금은 소득이 없는 사람은 ‘기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수급자가 될 수 없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단위로 묶여 소득이 있는 사람의 ‘부양가족’이 된다. 소득이 없는 사람의 몫으로는 가족이 있는 경우, 부양가족의 몫으로 +@(매우 적은 금액)를 수급자에게 더 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여럿이 가족을 구성하더라도 각 개인에게 지급되고, 혼자 살던, 혹은 수입이 있건 없건 무조건적으로 지급된다. 이것이 바로 기본소득이 성평등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성에게 경제적 자유를
많은 사회보장제도가 ‘가족을 기준’으로 한 소득비례방식으로 보장되는 것과 달리, 기본소득은 개인에게 지급된다.ⓒ 민중의소리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8년 50.0% 이었다. 설사 경제활동에 참여를 한다고 해도 여성 임금노동자의 64.9%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성별 임금불평등을 보면 평균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62.3%의 임금을, 여성비정규직은 남성 정규직의 39.1%의 임금을 받고 있다(김유선, 2009). 공적 연금 가입현황을 보면 2007년 기준으로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을 합해 여성은 남성(9백2십1만1천명)의 절반 수준인 5백1십3만 명만 가입해있다. 고용보험 피보험자는 여성이 전체의 겨우 35.4%(2007년)이고, 반대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는 여성이 전체 수급자의 57.5%로 8십4만7천40명에 달한다. 2009년 총가구수 중 여성이 가구주인 가구는 374만9천 가구로 총가구의 22.2%를 차지하고 있다. 그 비율은 1980년 14.7%, 2000년 18.5%, 2009년 22.2%로 계속 증가 추세이나 이들에게 ‘생계부양자’로서의 임금이 지급되고 있지 않음은 남녀 임금 격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의 경제적 열악함은 더 나열할 것도 없이 심각한 상황인데 소득비례방식의 사회보장제도는 수많은 사각지대 특히 여성을 지독한 사각지대에 놓이게 한다. 비혼모의 경우를 보자. 정확한 통계가 없다는 것이 비혼모의 현황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가끔 사회문제로서 지적될 뿐 이들을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나누고자 하는 관점과 태도로 접근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되고 있는 비혼모는 그들의 처지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혼자서 책임지거나 시혜의 대상자로 여겨진다. 그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정액의 기본소득이 매월 꾸준히 지급된다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하겠는가? 그들 아이의 삶은 또한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또 소득이 없는 여성들, 즉 부양가족으로 인식되며 온갖 무급의 가사노동, 돌봄 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경제적 자립의 어려움 때문에 매를 맞고 살아도, 온당한 대우를 받지 못해도 홀로서기(이혼)를 하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기본소득은 어떤 힘이 되겠는가?
‘낙인’이 아니라 권리를
여성들의 이러한 경제적 상황은 이들을 돌보아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게 한다. 비혼모의 여성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 소득이 없어 사회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는 여성들, 매 맞는 여성들, 가사노동자나 간병노동자 등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 이들은 현재의 사회보장 체계 내에서 사회나 혹은 주변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사각지대에 놓이거나 ‘시혜의 대상’이 되고,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된다. 보편적 복지인 기본소득은 이러한 여성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을 하기 위해 자산조사라는 명목으로 그들의 삶을 낱낱이 파헤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이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이들에게는 더 유용한 그리고 더 절실한 수입원이 될 것이다. 보편적인 복지제도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가장 필요한 곳에 시혜가 아니라 권리로 기본소득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노동시간단축과 가사노동분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의 노동을 한다. 많은 남성들이 ‘남성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하루 종일, 때로는 야간, 철야, 휴일 근로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심지어 똑같은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남성들과 ‘성(性)’이 다르다는 이유로 집에 돌아오면 가사, 양육까지 도맡아야 한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은 일과 생활의 균형(life and work balance)을 어렵게 한다. 장시간 노동과 가부장제적인 ‘남성 생계부양자’논리가 만나면 여성의 3중고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도입되고, 여성이든, 남성이든 매월 꾸준히 일정액이 안정적으로 지급된다면 실질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해진다(노동시간단축과 기본소득은 지난 호 참고). 실질적인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일과 가정의 균형이 가능해진다. 그 뿐이 아니다.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문화 활동, 지역공동체 활동, 혹은 보다 폭넓은 사회활동도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여성과 남성이 사회적 차원으로 자신의 유의미한 활동을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미있는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기본소득만 있어서는 안 된다. 공공 보유시설이 보다 확충되지 않으면 노동시간 단축으로 생긴 시간들이 ‘자신’의 아이들, 가족들을 돌보는데 머무를 수도 있다. 때문에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은 다른 공공재의 강화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 공공보육의 확충, 무상의료, 무상교육, 돌봄 노동의 사회화 등을 기본소득과 바꾸는 것이 아니다. 많은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얘기하듯 공공재는 더욱 확충되어야 한다.
실질 노동시간단축으로 일과 가정의 균형, 의미 있는 사회적 활동도 가능하지만 또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가능해진다. 개개인의 실질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면 노동자의 필요∙충족에 의해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사용자는 일할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일자리가 남성에게만 국한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보수적이다.
성별 노동분업과 기본소득
개인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성별 노동분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지급되면 여성들은 갈등을 하게 된다. 특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 또한 아이가 있어 상당히 많은 액수의 보육비를 지출해야 하는 엄마들은 갈등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100만원의 임금에 40만원의 보육비를 지출하고 있던 여성이 만약 4~50만원의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 과연 계속 노동시장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집에서 아이를 ‘직접’ 돌보는 일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이는 단순하게 금전적인 이유만으로 선택할 일은 아니다. 아이에게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하고, 직장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는 일도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은 한 돈 십만 원 더 벌자고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싶지는 않을지 모른다.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가! 아마도 노동시장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의 예를 생각할 수 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녀들에게 기본소득 4-50만원이 매달 지급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도 최저임금조차 받기가 쉽지 않다. 차비에, 식비에 이렇게 저렇게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기본소득이 있으니 차라리 집에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노동시장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최저임금의 일자리를 선택하는 여성들의 경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최저임금에, 비정규직으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녀들에게 기본소득은 ‘추가’의 소득이 될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여성들이 기본소득이 생김으로써 그녀들이 일자리를 떠난다면? 이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많은 여성학자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우려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성별 노동분업을 더욱 고착화시킬 것이라는 우려이다. 요지는 이렇다. 여성 개인에게 기본소득보장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저임금 일자리를 이탈하게 되어 가정에 머물게 되며, 그렇게 가정에 머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정 내의 돌봄 노동을 전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성별 노동분업은 더욱 고착화되며, 언제가 노동시장으로 복귀하고 싶을 때 또 다시 ‘성별 노동분업’에 근거한 일자리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일자리의 일은 ‘생계부양자’가 하는 일이 아닌 부수적 일로 여겨서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기본소득은 여성에게 성별 노동 분업을 고착화시키며 여성에게 ‘평등’은 더 요원한 일이 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생각할 일인가? 다른 경우의 수도 생각할 수 있다. 여성 개인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되고, 그로 인해 저임금의 일자리에서 이탈을 하게 된다. 가정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그 후 장시간∙저임금의 여성 노동자들이 감당했던 그 열악한 일자리에 누가 채워질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 일자리는 기본소득 때문에 여성들이 떠났다면 똑같이 기본소득을 받는 남성들이 그 자리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공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저임금 등 열악한 조건의 일자리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장시간 일하고도 적은 임금을 받았다는 것은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그 동안 초과적인 착취를 당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적어도 이러한 초과착취는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기본소득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떠날 것이라는 논리에 따른다면 그들이 떠난 일자리에 새로운 인력이 필요하게 되고 보편적인 기본소득체계 아래서는 과거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를 노동시장으로 유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소득이 도입되었을 때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개인에게 또한 사회에 역동적으로 작동하는 기본소득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 변화의 토대
물론 기본소득만으로 여성의 평등을 완전히 실현할 수는 없다. 사회적 제도와 문화, 의식의 변화를 위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의료, 보육, 교육 등의 공공성 강화는 매우 중요한 기본조건이다.
기본소득은 임금 노동, 돌봄, 휴식을 섞어서 취할 수 있는 개별의 선택의 가능성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증진시킨다. 때문에 누구도 노동자와 돌봄자, 둘 중의 하나만 되어야 하는 선택을 강요받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임금 고용의 세계에서 그리고 돌봄의 영역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바뀌기 위한 가장 가능성 있는 재분배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기본소득만으로는 진정한 성평등에 도달하지 못한다. 기본소득은 다른 제도와 정책들의 변화 즉, 공보육 시설의 확충, 무상교육, 무상의료, 돌봄 노동의 사회화, 가부장적 문화 극복을 위한 사회적 노력과 함께 그 빛을 더욱 발하며 성평등을 실현하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대안사회를 위한 기반/[기본소득⑪] 이행전략으로서의 기본소득
기본소득론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중 가장 체계적인 기본소득론을 제시한 사람은 판 빠레이스라 할 수 있다. 판 빠레이스는 신자유주의적인 형식적인 자유 및 시장의 극대화에 반대하여,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를 주창하였다. 여기서 실질적 자유는, 자유를 누릴 수단으로서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최대한 평등한 권리를 담고 있다. 이 기본소득은 유아부터 노령층, 그리고 특정기간 이상 국내에 거주한 외국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신청·심사과정 없이 그리고 기존의 노동소득에 더해져 추가적으로 지급되는 소득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기본소득은 생태적‧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GDP의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최대한 커야 한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현금뿐만 아니라, 교육·의료·보육·깨끗한 길·보행자전용도로·장애인 편의시설 등의 현물공유재의 무상공급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에서도 도입될 수 있지만, “필요에 따른” 분배를 기본 경제원리로 하는 코뮌주의와 상충하지도 않는다. 그는 기본소득은 오히려 코뮌주의의 “필요에 따른” 분배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그래서 실업 및 경제공황 등을 통해 사회의 생산력을 막대하게 탕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본소득+지분배당경제(share economy)’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지분배당경제란 웨이츠만(Weitzman)이 주창한 것으로, 노동자가 고정임금을 받는 현재의 임금노동시스템과 달리 기업별 순부가가치(순수익)를 일정비율의 이윤과 일정비율의 노동소득으로 분배하는 것을 뜻한다. 곧 자기기업의 순부가가치가 크면 노동자의 노동소득은 커지지만, 순부가가치가 적으면 그만큼 노동소득도 적어지는 시스템이다. 판 빠레이스는 이러한 ‘기본소득+지분배당경제’에서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자본주의보다도 노동유인이 클 뿐만 아니라, 고용주 측에서도 고정임금에 대한 부담이 사라져 일자리제공을 늘리게 되므로 기존의 자본주의보다 경제성과에서도 우월할 것이라고 한다. 곧 이러한 경제시스템은 평등과 정의라는 도덕적 우월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지속가능성에서도 지금까지의 어떤 자본주의보다도 우월한 ‘최적자본주의’라고 한다. 이는 자본주의를 폐기하진 않지만, 지속가능한 최대한의 기본소득을 담고 있는 만큼 자본주의 내에 최대한의 코뮌주의를 담자는 주장이기도 하다.
판 빠레이스의 기본소득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재원마련 대책일 것이다. 판 빠레이스는 불평등한 재산 및 능력의 분배로 인한 수혜자들은 대부분 자기의 노력과 무관하게 고소득의 특혜를 누린다고 본다. 따라서 이에 대해 고율의 조세를 부과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비정규직과 실업이 확대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상당수의 정규직조차 일종의 부당한 특혜를 누린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선망 받는 고소득의 일자리에 대해 고용지대세를 부과하자고 제안한다. 이는 기존의 조세만으로는 기본소득의 재원이 충분치 못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나아가 최근에 판 빠레이스는 일국적인 기본소득을 넘어서서 지구적 차원의 기본소득을 주창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들은 영어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으므로 이들 국가들로부터 언어세를 거두고, 나아가 생태자원을 많이 소비하는 선진국들로부터 생태세를 거두는 등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지구인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함으로써, 지구적 차원에서 기아와 빈곤을 극복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러한 판 빠레이스의 재원조달방식과는 달리, 민주노총에서 출간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에서 제시된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은 노동소득에 대한 증세는 최소화하고, 이자‧배당‧지대 등 불로소득 및 증권양도차익‧부동산양도차익 등 투기소득 그리고 토지에 대한 고율과세 등으로 가처분GDP(전체GDP에서 감가상각을 뺀 부분)의 30% 수준에 달하는 재원을 마련하여, 무상교육‧무상의료를 포함한 기본소득을 모든 국민과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지급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이렇게 될 경우, 2009년 기준으로 39세 이하의 사람들은 개인별로 연 400만원, 그리고 40-54세의 사람들은 연 600만원, 55-64세의 사람들은 연 800만원, 65세 이상의 사람들은 연 9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명목GDP상승률 이상으로 매년 증액된다).
이는 판 빠레이스가 간과한 투기소득에 대한 고율과세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증권양도차익뿐만 아니라 부동산양도차익이 막대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투기소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다. 통계자료가 미비하여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투기소득은 최소한 가처분GDP의 20-30%를 차지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가처분GDP의 60% 수준에 달하는 노동소득의 반 가까이가 투기자본 및 투기꾼들에 의해 수탈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자‧배당‧지대 등 자본주의적 불로소득이 가처분GDP의 40% 수준임을 감안하면,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합은 사실상 가처분GDP의 60%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이러한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더욱 극대화된 측면이 있지만,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는 노동소득보다는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의 극대화를 조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노동소득을 극소화하며 불로소득과 투기소득을 극대화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 막대한 시간을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 획득에 탕진하게 만든다.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은 이점을 감안하여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에 대한 고율과세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사회 전체자본 및 토지를 사회전체성원의 공동소유로 전환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전액 환수하여 코뮌주의적인 기본소득(사회연대소득)의 재원으로 전환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가처분GDP는 현재의 ‘사실상의 노동소득 40% + 불로소득 40% + 투기소득 20%’에서 종국적으로는 대략 ‘노동소득 50% + 코뮌주의적인 기본소득(사회연대소득) 50%’를 담는 새로운 21세기형 코뮌주의로 전환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코뮌주의는 현재의 자본주의보다 사실상의 노동소득비율을 증가시킴으로써 보다 높은 노동‧생산 유인을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우월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이 당장에 이러한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사회연대소득)’을 담고 있는 아니다.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은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으로의 이행모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행모델이 아직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완전히 환수하지 못하여 가처분GDP의 30% 정도에 달하는 기본소득을 담고 있다면, 코뮌주의적 모델은 불로소득 및 투기소득을 완전히 환수한 50% 수준의 기본소득을 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2단계론은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과오로 인해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새겨진 레드콤플렉스를 고려한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레드콤플렉스가 정치적으로 상당히 극복된 상태라면 이행모델과 같은 우회로를 거칠 필요 없이 ‘코뮌주의적 기본소득’으로 직행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사회에 축적되어 있는 250조원 수준의 연기금과 주식회사에 대한 은행대출(사실상 사회전체성원의 예금을 원천으로 하는 것이다)의 주식으로의 전환방안을 활용한다면, 경제적으로는 사회전체자본의 대부분을 당장이라도 전체사회성원의 공유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한국사회에는 이미 코뮌주의 시초축적을 위한 경제적 조건들이 넘쳐날 만큼 축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본소득모델은 이처럼 최종적으로 탈자본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50% 코뮌주의+50% 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 ‘최적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판 빠레이스의 모델과는 다르다. 뿐만 아니라 노동소득에 대한 대폭적인 증세로 인해 생산유인을 감퇴시킬 가능성이 있는 판 빠레이스의 모델과 달리, 노동소득세 증세를 최소화하고 불로소득‧투기소득에 대한 증세를 극대화함으로써 생산유인을 높게 유지할 수 있으므로 판 빠레이스의 모델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를 기본소득의 피해자로 만들 수 있는 판 빠레이스의 고용지대세와 달리 수혜자로 만듦으로써, 그들도 기본소득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담고 있다. 나아가 판 빠레이스는 기본소득의 도입되면 노동시장이 유연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한국의 모델은 최종적인 코뮌주의적 모델에 도달하기 전까진 최저임금제의 강화와 병행하는 기본소득이라는 점도 중요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소득은 기존의 노동과 연계된 사회복지 패러다임과 달리, 무조건적으로 지급된다는 점에서 임노동과 강제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계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연금이나 실업급여, 희망근로프로젝트 등 기존의 대부분의 현금지급형 사회복지는 과거나 현재 또는 미래의 노동과 연계되어 있다. 이는 사실상 노동을 강제하는 사회복지인 셈이다. 기본소득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임노동강제로부터의 해방을 담고 있으며, 각자가 보다 원하는 노동이나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준다.
기본소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생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내지 ‘가능한 좋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기본소득이 그러한 사회를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충분조건의 일부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부일 수 있다. 그것은 빈곤과 실업에 대한 유력한 대안이며, 소년소녀가장‧장애인‧외국인 모두가 떳떳하게 품위 있는 생존권을 향유할 수 있는 방안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던 사람들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자와 자영업자처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본소득만큼 더 많은 것은 누릴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령층의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본소득의 최대수혜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노동자‧영세자영업자‧여성‧장애인‧청소녀‧사회활동가‧대학생‧외국인‧노령층 등 인구의 90% 이상이 환영하고 연대하게 될 계기를 담고 있다. 이는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넘어선 변혁 및 이를 향한 이행의 획기적인 주체형성전략이기도 하다는 걸 뜻한다. 기본소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게 된다면,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내지 자본주의를 넘어선 대안사회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특히 보다 급진적인 한국형 기본소득은 그동안 착취당하고 수탈당했던 90% 이상의 사람들의 연대를 활성화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내지 대안사회를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데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