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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란저우행 비행기를 타야하는 까닭으로 여유있는 식사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호텔에서 마련한 아침 식사 대용 도시락이라는데 내용물이 가관이었다. 커다란 죽그릇 비슷한 것이 두 개였는데 한 통에는 배가 하나 덩그러니, 또 한 통에는 식빵 접은 것 하나와 소세지 외에 하나가 더 있었던 것 같다. 커피는 연암의 권대표가 아침에 원두를 갈아서 내린 것인데 그나마 식사의 격조를 조금은 높여주었다.
출발 시각. 밖에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밤은 아직 세상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이곳은 아직 춥지 않은 곳이어서 이른 새벽에 이동하기가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은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새벽 버스 안. 식사는 거의 끝내고 차분하다 못해 정적이 감도는 듯하다. 잠도 아직 덜 깨었는데 또 여장을 꾸리자니 어련할까?
국내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홍챠오 비행장으로 왔다. 이곳은 이제 서울의 김포나 마찬가지이다. 국제선도 가끔 뜨지만 한정된 곳이다. 그러나 푸뚱 국제공항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이곳이 상하이의 관문이었다. 번체자로 된 공항 간판이 그 옛날의 위상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다.
발권 수속을 도와주고 있는 가이드. 불친절한 상하이 가이드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일행의 불편을 눈치챈 손원장이 돌아갈 때는 부르지 않겠노라고 했고 결과적으로 실제 그렇게 되었다.
다시 탑승 수속. 국내선으로의 이동은 국제선 탐승 수속만큼은 복잡하지 않았지만 오십보백보였다. 획기적으로 간소화되지 않는 한 여행객들에게는 그게 그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우리를 란저우까지 데려다 줄 비행기. 이곳에서도 공항 내의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비행기까지 도착하였다. 중국내의 공항에서 이동할 때는 셔틀 버스를 이용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다.
환담을 하면서 트랩을 오르고 있는 일행. 장거리 이동은 불편하지만 그래도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여행단끼리 이동 중에 환담을 나누면서 친밀도가 높아지는 면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효과가 아닐까 싶다.
아침에 현지 가이드로부터 란저우에는 눈이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 생각에는 그냥 눈발이나 조금 날린 것이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공항에 접근하면서 펼쳐진 눈 세상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세상에, 10월이 가기 전에 이런 눈 세상을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란저우 중추안(中川) 공항 착륙 직전의 모습. 감속을 위해 최대한 펼친 날개 아래로 인근 민가의 지붕 위로 덮인 눈이 마치 나무 조각 쌓기로 만든 장남감 조형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펼쳐진 설국. 더 이상 눈은 오지 않았고 낮이 되면서 상승하는 기온에 가지의 눈을 많이 떨쳐낸 모습이었다. 이 정도로만 해도 밤새 눈이 얼마나 왔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우리를 데리고 갈 버스. 그리고 저 멀리 뻗은 산봉우리들도 머리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접할 수 있는 눈은 란저우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내리자마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곳에 와서는 식사 시간의 개념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냥 근처에 그럴 듯한 식당만 있으면 가서 먹었던 것 같다.
중추안 공항에서 란저우시까지는 70km 남짓 떨어져 있었다. 란저우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표지판. 이제 본격적인 실크로드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기사는 생긴 것에 비해 운전이 상당히 거친 편이었다. 아니면 이곳 기사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던가...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나자 잽싸게 내려 스마트 폰으로 사고의 현장을 기록해두는 순발력을 발휘. 생긴 것은 주윤발을 생각나게 할 정도였는데...
그러나 상대 기사는 요지부동. 시내버스였는데 승객을 모두 내리게 하고 경찰이 올 때까지 무반응으로 일관. 승객이 외국인 관광객이란 것이 우리 버스 기사의 핸디캡이었다고 한다. 어디서나 외국인을 볼모로 잡고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 같다. 왼쪽 난간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버스 기사이다. 오른쪽에 겹쳐보이는 것이 우리 차와 시내버스.
의외로 사건은 쉽게 해결되었다. 기사가 중국돈 100원을 집어주는 것으로 해결. 그 돈은 버스에 타자마자 손원장이 보상을 해주었다. 버스를 몰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운전석을 향하는 기사.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그 옆에서 기사보다 더 활짝 웃으며 좋아하는 사람은 버스 때문에 끼어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삼륜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이다. 참 순박해 보인다. 해결 방식도 그렇고 무던하게 기다리는 사람들도 그렇고...
황하를 지난다. 이곳 란저우는 황하를 낀 도시이다. 지금은 수량이 가장 적은 시기란다. 봄에 수량이 가장 많다는데 기련산의 눈 녹은 물이 몰려오기 때문이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중산교. 황하를 가로지르는 이곳 란저우에 최초로 가설된 다리라고 한다. 독일 기술로 만들었다고 한다. 건너편에는 백탑공원이 있는데 사실은 란저우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을 꼭 가보고 싶었는데 열차 시간이 허용하지 않아 강변의 수차원과 황하모친상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마답비연상이 있는 감숙성 박물관이 휴관일이라 관람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음에 란저우에 올 기회가 있으면 두 곳을 꼭 가보고 싶다.
수차원. 거대한 관개시설이다. 사실 이곳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답사자료집을 준비하면서 많은 분량을 중국 자료를 번역하면서 작성하였는데 그곳의 설명을 보면 규모가 상당히 거창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수차 두 개가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이곳 수차의 동력원은 황하의 물길을 옆으로 빼낸 좁은 도랑에 있었다. 자연을 이용하는 중국인의 지혜가 놀랍다.
사실 중국인들은 세계에서 과학 문명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다.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을 보면 중국인들은 근대에 와서 자신들이 발명한 기술을 잊고 있다가 서양을 통해서 새로 배우고 있다고 하였다.
양피파즈(羊皮筏子). 무이산의 죽벌(竹筏)과는 느낌이 다르다. 말 그대로 양가죽으로 만든 뗏목이다. 13개를 붙여서 만들었다. 지금은 물론 생활수단으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계속 운행한다. 요금표에 따르면 이곳 수차원에서 중산교까지 편도 50, 왕복 80위엔이다. 가장 먼 코스인 수박원(水博園)까지는 편도 200, 왕복 240위엔이다.
바람을 뺀 양피 파즈.. 대충 10장이 조금 넘어보이는데 아마 뗏목 하나 분량일 것이다. 바람을 빼면 이렇게 부피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이렇게 돌로 눌러놓은 모양이다. 바람을 넣을 때는 사람이 입으로 분다는 것이 더 놀랍다. 이 양피파즈도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그러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터 보트가 실생활에서 훨씬 유용한 탈것이 되고 말았다. 문명화 개발이라는 명분에 밀려 옛것은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다.
돌아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돌아본 수차. 천차(天車) 또는 번차(翻車)라고도 하며 바퀴의 폭이 큰 것은 20m이고 작은 것도 10m는 되며 바퀴의 축만 해도 1m 내외에 달한다고 한다.
다음에 들른 곳은 황하모친상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황하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이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의 자명한 여성 조각가인 허어(何鄂)가 이 조형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표석에는 "중화민족의 요람에게 바친다"라 새겨놓았다. 중화민족의 요람이 바로 황하를 가리키는 말이다. 설치 연도는 1987년도이다. 30년이 다 되어 간다.
황하모친상 전경.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여행 중 단장인 이영환 선생이 서양의 조각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서 다루기가 쉽지만 동양의 조각은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더 가치가 있다고 하였는데 사실일 것이다. 조각의 아래쪽에 새겨진 것은 황하의 물결과 채색도기에서 발견되는 물고기 문양이라고 한다.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 어머니는 중국의 젖줄기랄 수 있는 황하를 상징하고 아들은 중화민족을 의미한다고 한다. 애증의 황하를 이렇게 묘사한 것이 특이하게 느껴진다.
황하모친상을 다 보고 또 이동. 우리를 돈황까지 실어다줄 기차가 있는 란저우 역이 보인다. 아직 밤에 내린 눈이 덜 녹은 모습이 역사 뒤로 보인다. 도착 시각은 4시 5분이다. 기차는 6시에 출발하는데...
란저우 역에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마답비연상을 설치해놓았다. 중국의 얼굴이랄 수 있는 판다나 경극 가면 등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압도적인 위상을 차지함을 알 수 있었다.
역사에 도착하여 예매한 표를 받았다. 여행사의 정산을 위하여 금방 다 회수하였지만... 란저우에서 돈황까지 가는 기차로 6시 출발 새벽 6시 반 도착이다. 이때까지 탔던 기차 중 가장 좋은 기차다. 가격은 381.5위엔인데 수수료 같은 것 포함하면 390원 정도 한다고 한다. 우리돈으로 75000원 가까운 돈이다. 호텔 숙박비의 절반 쯤 되는 금액이다.
루안워(軟臥) 대합실이다. 중국에는 잉워(硬臥)와 잉쭤(硬坐), 그리고 루안워와 루안쭤가 있는데 가장 안락하고 비싼 것이 루안워다. 특히 이번에는 4인실인 루안워를 타서 당초 기차여행을 우려했던 사람들의 불안감이 모두 사라졌다. 모두들 상당히 흡족해한 듯한 표정이어서 준비한 사람도 자연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대합실. 루안워면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기차인데도 대합실에는 가죽이 벗겨진 인조가죽 소파 등 허름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래도 정보화 사회답게 대합실에 충전기 시설은 되어 있어서 세상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남의 이목은 별로 타지 않는 편이다. 우리도 한때 그랬지만 그래도 공공 장소에서 노름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얘네들은 뭐 그냥 시간만 나면 이렇게... 카메라를 들이대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대범한 건지 노름에 집중하느라 의식을 못해서 그러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 안의 마트. 이곳에서는 간단한 간식 정도를 살 수 있었다. 우리도 가이드가 선심을 써서 간식을 내었다. 주로 과자 등. 이런 마트 말고도 고급 간식을 파는 매점이 곳곳에 있었다.
마트에서 조성자 선생이 간식을 고르고 있다.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는 우리나라 과자와 맛이 똑같은 쌀과자가 있었고, 혹 밤에 출출하면 먹을까해서 우육면 두 개(컵라면)를 샀지만 시간이 없어서 먹지를 못했다.
시간이 나서 역사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뛰어넘으면 될 정도의 높이지만 출입구를 그때그때 잠궈놓았다. 그래도 들락날락하면서 틈틈이 살펴볼 수 있었다. 역의 광장네 설치해놓은 마답비연상을 역사 안에서 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확실히 이곳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쪽은 일반 열차 대합실. 확실히 루안워 대합실과는 차이가 있었다. 남창에서 기차를 기다릴 때 우리의 모습도 이랬다. 그때보다 사람이 적이서 좀 덜 복잡했을 뿐.
역사 안에서 바라본 플랫폼. 중국인들은 이제 고속철이 어느새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벌써 기술을 태국에 팔아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신깐센과 떼제베 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보급형이라면 얘네들 기술이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저녁 이슥할 무렵의 기차역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건물과 플랫폼의 지붕, 그리고 길게 뻗은 열차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발전된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층간 이동에는 문제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트는 물론이려니와 캐리어를 용이하게 끌 만한 경사로조차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투덜댔다.
돈황호는 작년에 개통한 최신형 고속철이라고 한다. 객실내에서는 담배도 못 피우게 하는 등 청결에 신경을 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한국보다 중국에서 고속철을 더 많이 타봤다. 결론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급은 중국의 것이 나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길게 뻗은 고속철. 현려감숙(絢麗甘肅). 곧 아름다운 감숙성이란 표어를 기차의 객실에 붙여놓았다. 란저우는 이곳 감숙성의 성도(省都)인데 인구가 400만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구밀도가 적고 동서로 길게 띠처럼 뻗은 불모지가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사실 아름답기는 아름다운 곳이랄 수 있겠다.
플랫폼으로 내려와서도 제법 걸어서 객차에 올랐다. 홍계한 선생이 캐리어를 끌고 탈 객차를 찾아서 오고 있다. 멋진 기차여행의 시작이다.
기차의 승무원은 참 예뻤다. 일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그런 중국 여인의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우리 객차에 배정된 승무원이어서 기차 안에서 수시로 볼 수가 있었다.
옛날(7~8년 전)에만 해도 객차 안에는 슬리퍼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다 비치해두었다. 특히 색깔을 여러 개로 하여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게 한 것이 또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호텔에서 만일을 대비하여 챙겨왔던 슬리퍼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챙겨온 것으로 아는데...
저녁 시간이 애매하여 도시락으로 하였다. 호텔 도시락과는 차별성이 느껴진다. 거의 중국 식당에서 빠지지 않는 요리 몇 가지와 함께 밥이 있었는데 먹을 만하였다.
제법 잔 것 같아 잠이 깨었는데 정차를 꽤 오래 하였다. 한 3~40분 정도는 좋이 됨직하였다. 밖을 내다보니 가욕관역이었고 시각은 2시가 좀 넘은 상태였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뒤척이기만 할 뿐 잠이 오지 않았는데 이영환 선생도 같은 처지였다. 담화가 시작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된 것 같았다. 4시 경에는 권씨 형제들도 깨었다.
달라진 4인실. 4인실은 전에 무이산에서 항주까지 갈 때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많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침대당 모니터가 하나씩 달려 있다는 것. 그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전체적인 환경 등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당시에는 판매원이 와서 신발 깔창 등을 팔기도 하였는데...
첫댓글 역시 여행은 기차여행이 참 맛을 느끼게 하지요. 너무 깔끔해 중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
여행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기차여행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 저는 좋던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