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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시인 김삿갓 2부-(11) ●
☆ 오얏 나무 이씨(李氏) 조선(朝鮮), ☆
[한양의 풍수와 인심]
참담한 가슴을 안고 남한산성을 내려온 김삿갓은 무거운 발걸음을, 한양으로 내디뎠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봄도 무르익어 이 집 저 집 담장마다
복사꽃과 오얏 나무 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얏 나무는 이씨조선과 인연이 깊다.
김삿갓은 이씨를 뜻하는 성씨가 "오얏 나무 이" 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말엽 공민왕 때, 한양땅에는 난데없이 오얏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며 꽃을 피웠다.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이같이 오얏 나무가 무성하더니
해가 갈수록 그 숫자가 차고 넘쳤다.
"이상하다" 모두가 이렇게 여기고 있을 때,
어떤 술사가 이를 보고 장차 이씨 성 을 가진 사람이 한양땅 에서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또 이런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점 퍼져 나가게 되었고,
마침내 공민왕 의 귀에까지 이 소문이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공민왕은 그런 소문을 듣고 크게 걱정하며,
민심을 되돌리는 조치로 송도에서 벌리사를 보내, 한양땅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오얏 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오얏 나무는 웬일인지 베어도 베어도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무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고려가 망하고,이성계 가 새 나라를 일으킨 뒤 송도에서 이곳으로 천도해 왔으며,
오얏 나무 무성한 한양에 새로운도읍지를 정했으니 한 나라의 흥망은 인력이 아닌 천운에 따라 결정 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광나루를 건너온 김삿갓이 한양 도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흥인지문(동대문)]이나
수구문(광희문)]을 통하지 않으면 들어갈 방법이 달리 없었다.
그러나 수구문으로 불리는 광희문은 한양장안에서 죽은 송장이 나가는 유일한 문이었다.
남달리 유난한 김삿갓은 남들이 다니기 꺼리는 수구문을 거리낌 없이 택하여
도성에 입성하였다.
이렇게 장안에 들어서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길을 오가며 사람들끼리 어깨를 부딪칠 만큼
복잡하였다.
"사람도 많고 집도 크고 많구나!"
김삿갓은 처음 보는 낯선 도시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게다가 시장이란 곳에서는 오만가지
장사꾼이 저마다 목판을 깔아놓고 물건을
팔고 있는데,
지나는 누구라도 붙잡고
"싸구려! 싸구려~ 이 야~
기가 막히게 좋은 호박이 나왔어요!"
"동경 사시오! 동경 ~ 노인네 새치도
잘 보고 뽑을 수 있고, 규중처녀 님의
모양새도 다듬는 데는 동경이 최고요!“
하며 호객을 일삼는다.
김삿갓은 전국 곳곳의 시장판을 다녀 보았으나 한양저잣거리처럼 장사꾼들이 요란스럽게 떠드는곳 은 살면서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도대체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허 참! 조선제일 의 한양 에서도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어려운 모양이군!"
김삿갓은 종로육의전 거리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갔다.
이곳으로 오른 까닭은 한양도성의 면면을 살펴 수학할 때 읽었던 한양의 풍수지리를 실제로 확인 하여 보기 위함이었다.
그때 김삿갓이 어렵게 구해 읽게 된 한양의
지세와 풍수는 아래와 같았다.
한양은 400여 년 전, 도읍지로 결정될 그때
백호인왕산 이 너무 강하여 청룡 북악산을 누르는 형세였다.
이러한 지형 아래에서는 장손 보다는
지손이 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씨조선 3대 임금이셨던 태종대왕 부터, 다음 대인 세종대왕 을 비롯하여 이후로
지손이 번성하였다.
이런데도 장손이 등극을 한때도 있었으나, 이렇게 권좌에 오른 임금 2대 정종 5대 문종은 권좌 를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올랐더라도 정변에 의해 폐위 되었다.
단종 대왕 한양의 지세가 이러했기에 약한
청룡을 보완하여 흥인문을 흥인지문 이라 하여
산맥같이 생긴 之(지)자 한자를 추가하여 문(門)의 이름을 불렀고 성(城)을 산맥과 같이 둥글게 쌓았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도성의 출입문에 이름을 고치고 성을 둥글게 쌓은 효과가 없었던지,
조선권좌 의 이동은 개국초기부터 지금까지 격변에 의한 논란이 끊임없다.
한편, 한양을 처음 수도로 정하고 성(城)과 궁궐을 축조할 때 풍수지리 에 근거한
무학 대사와 정도전의 의견이 서로 달랐는데,
★무학 대사의 주장은 강한 백호를 누르기 위해 궁궐을 지을 때 인왕산 을 뒤로하여 동향으로 앉혀 짓게 되면
그 왼쪽의 청룡이 북악산과 삼각산이 되므로 장손이 번성 하는 이상적인 왕도가 된다는 주장이었고,
★정도전은 유교의 옛 경전까지 인용 하면서
"왕은 마땅히 남면 하는 법인데 궁궐의
대문을 어찌 동쪽으로 앉힐 수 있는가?“
하는 주장(主張)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한다.
당시 새로 집권한 이성계의 추종 세력은 고려 시대 의 숭불정책에 회의를 가득 품고 있는
유교학자 출신의 문신들 이었다.
이성계는 집권 초기에 혼란한 왕권을 유지하는데,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경복궁은 남향으로 지어지게 되었다.
그때 무학 대사는 크게 탄식했다.
"허, 이거 큰일 나지 않았나! 이렇게 대궐을
조성하면 몇 해 안에 국모가 죽고
용상바로 앞에서 붉은 피 낭자한
골육상쟁 이 일어날 것인데,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무학 대사의 예언은 과연 적중하여
1392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조성한 지 2년 도 못되어 신덕왕후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이 뒤로도 왕자의 난을 거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대군
이방원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에도 권좌의 이동은 장자세습의 전통이 이어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아니던가?
김삿갓은 쓸쓸한 왕조의 궁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느덧 멀리 서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남산에서 내려온 김삿갓은 하룻밤을 보낼
잠자리를 구하려고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절간이나 서당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오늘은 여염집에서 신세를 지리라 생각하고 이집 저집 대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어느 집이건 대문은 모두 굳게 잠겨 있었다.
(허~! 문 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교류의 장이 아니던가?
이렇듯 대문을 걸어 잠근 것은 지나는
나그네에게 물 한 잔도 주지 않겠다는 뜻이
아닌가?
한양의 인심이 이렇듯 고약한가?)
김삿갓은 한양이라는 고장에 대해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그러나 어디선가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겠기에 어느 집 대문(大門)을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제법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았다.
그러나 누군가 나오는 듯하더니,
중문 안에서 대꾸를 하는데,
"누구시냐고 여쭈어라!"
하고 거꾸로 묻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는 말투가 집주인인 것이 틀림없었는데,
김삿갓은 한양 에 사는 사람들은 하인
이 없음에도 하인 에게 이르는 것처럼
간접 화법을 쓴다고 이미 들은 바 있었다.
따라서 주인 편에서 하인을 둔 것처럼
대꾸할 때는 손님인 이편에서도 하인을 둔 척하고 간접 화법으로 대화를 해야 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어 찾아 왔노라고 여쭈어라!"
하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중문안에서는 "우리 집에서는 그런 손을 재울 방은 없다고 여쭈어라!"
하며, 씹어 뱉듯, 이 같은 소리를 내 던지고는 중문을 힘차게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하는 수 없이
다음 집으로 가서 대문을 또 두드리며
"이리 오너라!"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더니,
이번에는 숫제 안마당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안 계시다고 여쭈어라!"
그러자 약이 바짝 오른 김삿갓이,
"아무도 안 계시다고 대답 하는
그 소리는 개가 짖는 소리냐고 여쭈어라!“
하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뭣~이! 어떤 놈이!" 안마당에서 건장한 사내놈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중문이 급하게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크!" 개 같은 놈이 뛰쳐나오는구나!"
김삿갓은 지팡이와 삿갓을 각각 손으로 움켜잡고 "걸음아 날 살려라!"
삼십육계줄행랑을 놓았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2) ●
☆ 한양 광교 다리 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
잠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동안
어느덧 거리는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저마다 도망이라도 치듯이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야단스럽던 한양의
거리가 삽시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김삿갓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조금 전
들렸던 종소리는 통행 금지를 알리는
인정 소리였다.
★人定(인정) : [성안에서 밤에 다니는
것 을 금지하기 위하여 밤마다 이경에
쇠 북을 28번씩 치던 일.★
☆이경 :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눈 둘째 부분.
대개 밤 9시부터 11시 사이.☆
그러나 한양 도성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을 알 턱 없는 김삿갓은, (그 많던 사람들이 별안간 어디로 가버렸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어둠이 깔린 거리를 혼자서 유유히 걷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서 순라군인
듯한 사람 네 댓이 김삿갓 쪽으로 비호같이
달려와 둘러싸며
"이 도둑놈아! 통행금지시간에
네 놈은 어디로 무엇을 훔치러 가는 길이냐!"
하고 벼락같이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도둑이 아니오.“
"이놈아! 네가 도둑이 아니라면 어째서
통행 금지시간에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냐?"
"통행 금지라뇨?
한양에 통행을 금하는 시간이 있단 말이오?“
"허 허! 이런 촌놈을 보았나! 너는 도대체
어디서 굴러왔기에 통행 금지도 모른단 말이냐?"
"나는 시골서 조금 전에 한양에 올라온 사람이오. 한양 땅에 통행 금지 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오."
그러자 순라군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을 했다. "통행 금지도 모르는 이런 시골뜨기를 잡아다 가둘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해야 좋지?"
그러자 두목일 듯싶은 순라군이 말하는데,
"아무 생길 것도 없는 놈을 잡아다 가두면
뭘 해! 숫제 광교 다리 밑에 움막 아이들한테
갖다 맡기지."
그러면서 김삿갓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이놈아! 한양에는 통행 금지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다녀라."
김삿갓은 기가 막혔다. 본시, 하늘과 땅이란
남녀노소, 귀천을 불문하고 만인이 공유하는 소유물일진데,
누구나 낮이나 밤이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땅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렇듯 황당한
경우를 당하고 보니 땅을 마음대로 밟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였다.
그러나 잠자리를 구하고 있던 차에
순라군 이야기로 짐작하기에,
잠자리를 구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참 다행이다.)
김삿갓은 광교 다리 밑 움막이라는 곳이 궁금해 "지금 나를 데려가는 곳이 어떤 곳이지요?“하고
광교다리 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
순라군 에게 물어보았다.
"이놈아! 통행 금지도 모르는 놈이 그런 건
알아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감옥 속에서
자는 것 보다. 백번 낳을 것이니 잠자코
따라오너라.
그리고 오늘 밤은 움막에서 자고
내일 아침 파루가 울리거든 어디든지
마음대로 가란 말이다.“
★罷漏(파루) : 조선 때, 큰 도시에서
통행 금지를 풀던 시간인 오경 삼 점에 쇠 북을 서른세 번씩 치던 일. ★
김삿갓이 광교 다리까지 끌려와 보니,
다리 아래 개천가에는 제법 큰 움막이 쳐있고
그 움막 속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순라군 은 김삿갓을 다리 위에 세워 놓고
움막에 대고 소리를 크게 질러댔다.
"애들아! 통행 금지도 모르는 촌사람
하나 데려왔다. 오늘 밤 너희 틈에 재우고
내일 아침에 보내 주도록 하려무나."
그러자 움막 속에서 네댓 아이들이 날치기처럼 잽싸게 달려 나오더니 김삿갓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순라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오늘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비단구렁이 한 놈을 잡아 왔어요.
그놈을 고아 먹으면 아저씨 가운데 다리가 "뻘떡뻘떡" 일어설테니, 한번 써 보세요.
아저씨한테는 특별히 싸게드릴게요."
구렁이를 팔아먹으려고 덤비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이놈들이 광교 다리 밑에 사는
땅꾼 놈 들이로구나!)
하고 아이놈들의 정체를 대뜸 알아낼 수 있었다. 순라군이 웃으며 대답했다.
"예끼, 이놈들아! 나는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밤마다 육봉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못 견딜
지경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내고 그런 것을 사서 먹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라!"
"아저씨가 안 쓰시려거든 돈 많은 부자
양반 들한테 좀 팔아 주세요.
삼백 냥만
받아 주시면 이번에는 섭섭하지 않게 구문
으로 일백 냥 드릴게요.“
★ 口文(구문) : 팔고 사는 두 편의 사이에 들어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알았다, 알았어. 장사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고 어서 이 손님이나 받아!"
"네, 손님은 받을 테니까.
이번 구렁이는 아저씨가 꼭 좀 팔아 주세요.
우리는 이번에도 아저씨만 믿어요."
순라군과는 예전부터 어떤 거래(가 있었든지 땅꾼 아이들은 그렇게 당부(當付)를 하고
김삿갓을 움막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끌려 오셨소?
한양 도성에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셨던가요?"
"나는 한양이 초행이라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인데,
통행 금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소리야!"
김삿갓은 무심결에 통행 금지에 대한 비난
을 한마디 지껄였다.
그러자 땅꾼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뼉을 치며 웃는다.
"그것참 옳은 말씀입니다. 하늘 아래 땅은
누구나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인데,
대감이니 영감이니 하는 날도둑들을 보호하려고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웃기는 얘기지요."
광교 다리 밑에 있는 땅꾼들의 움막은
겉으로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김삿갓이 이곳에 와서 움막 안을 두루 살펴보니 아이들의 살림살이가 놀랄 만큼 풍성 하였다.
"오늘 밤은 아저씨도 우리와 한 식구요.
밥은 넉넉하니까 많이 잡수세요."
하며 늦은 저녁을 차려 내는데 개다리소반에 얹힌 저녁 반찬만 하여도 호박볶음에 낙지 젓갈이 차려져 있고 돼지고기 구운 것과 훈제
오리고기며,
부추 무침에 각종 쌈 채소조차 있는
것이, 정승댁 잔칫상이 부럽지 않을 지경이었다.
김삿갓은 땅꾼 아이들이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조차 스스럼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을
보니,
그들의 인간성 은 대문 을 겹겹이 걸어 잠그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한양 양반님네와는 비교 가 안 될 만큼 다정다감 하였다.
"그럼 나도 자네들과 같이 먹기로 하겠네!"
김삿갓은 몹시 허기지던 판인지라 염치불구
하고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슬며시 말을 걸었다.
"자네들이 이렇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니
장사가 잘되는 모양 일세.“
하며 그들의 생활상 을 떠보았다.
그러자 우두머리인 듯싶은 땅꾼 아이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우리들의 장사는 언제나 잘됩니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장담 할 수 있지요."
"이 사람아! 장사란 경기 를 타는 법인데 자네는 어디에 근거 를 두고 그런 장담
을 하는가?"
"물론 다른 장사라면 시세 와 물량에 따라 굴곡 이 있겠지요.
그러나 뱀 장사만은 땅 짚고 헤엄치기인걸요."
"어째서 땅 짚고 헤엄치기란 말인가?
얼핏 들어서는 알 수 없네."
"생각해 보세요. 사내들치고 계집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좋아하는 계집을 만날 기회 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 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 하초가 영 신통치 못한 법이지요.
젊고 아름다운 소실 이 있어도 배꼽 아래
물건이 영 신통치 못하니까 값은 고하간에 뱀을 사 먹지 않을 수 없답니다.
그러니 우리네 장사는 경기도 안타고 땅 짚고 헤엄치기이지요."
김삿갓이 듣고 보니 과연 그럴듯한 소리였다.
"아까 잠깐 듣자 하니 구렁이 한 마리에
삼백 냥이라 하던데 뱀의 값이 그렇게나
비싼 것인가?"
"아저씨도 참! 뱀의 값이 너무 싸 버리면 뱀을
사려는 사람이 효과 를 의심 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처음부터 높은 가격 을 불러 놓고, 흥정할 때 못 이기는 척하고 조금 깎아주면 인심ㅇ도 얻고 뱀도 팔 수 있고, 서로 좋은 일이지요."
"그래도 그렇지! 뱀 한 마리가 삼 백 냥이면
너무 비싸군. 이건 일종 의 사기로구먼, 안 그래?"
김삿갓이 웃으며 이렇게 말을 하자,
땅꾼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저씨는 잘 모르시는가 본데 한양 장안 에 부자 양반들은모두가 백성 의 등을 쳐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 돈을 좀 나눠 먹기로 무슨 죄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하! 하! 하! 그 말을 듣고 보니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그려. 그러고 보면 세상만사
가 돌고 돌아가며 절로 균형 을 이루게 되는 모양일세!"
"우리는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몰라요. 아무튼 뱀이라는 것은 값을 비싸게 부를수록 잘 팔리는 법이예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돈이 썩어나는
양반 들에게는 돈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고,
오직 정력 을 왕성 하게 하는 것 만이 대단히 중요 하거든요."
"음! 그렇기도 하겠네."
다음 날 아침, 땅꾼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무섭게 제각기 꼬챙이와 자루를 하나씩 들고 움막을 나서며 김삿갓에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산으로 뱀을 잡으러 갈 거예요. 아저씨는 서울 구경을 다니다가 잠자리가 없거든 우리한테 또 오세요."
밤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고맙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고맙네. 덕분에 신세를 많이 지고 가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사람이니,
섭섭하지만 이만 작별 하세. 그리고 앞으로
건강 하고 일 열심히 하면서 돈도 많이 벌게
되기를 빌어줌세!"
"그래요? 이거, 섭섭해서 어떡하죠?"
그러면서 땅꾼 아이들은 저희끼리 눈짓을 하더니,
한 아이가 엽전 열 냥을 불쑥 내밀면서,
"이거 몇 푼 아니 되지만, 가시다가 술이라도
한잔 사드세요."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밤새 신세를 진 것도 고마운 일인데 돈까지
내밀다니. 너무도 고마운 인정을 만났기에
김삿갓은 눈시울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본시 돈이 필요치 않은 사람인데, 자네들이 정으로 주는 돈이니 이 돈을 고맙게 받겠네."
김삿갓은 엽전을 주머니 깊이 간직하고
다시 서울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오늘은
풍수지리상 백호의 기를 담고 있는 인왕산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왕산 에서 굽어보는 장안 의
풍경은 글자 그대로 장관이었다.
만호 장안을 굽어보던 김삿갓은 어제 겪은 일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양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쓰고 살면서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 그릇 먹이려 하지 않으니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이란 말인가!
그런 일에 비한다면 양반님네들이 멸시하고
더럽다 여기는 땅꾼 아이들의 고마움은 상대적 으로 크게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한양이란 매우 극과 극의 삶이
서로 섞여 돌아가는 곳이군.)
이런 생각으로 장안을 내려다보던 김삿갓
갑자기 뒤가 마려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바위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장안을
내려다보며 뒤를 보려는데 별안간 방귀
한 방이 요란스레 소리를 내며 나왔다.
어젯밤 땅꾼 움막에서 과식 한 탓인지,
방귀 냄새가 고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요란스레 방귀 한 방을 뀌고 나니,
속이 그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뒤를 보며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수를 읊어댔다.
방분인왕 제일성 (放糞仁旺 第一聲)
◎ 인왕산에서 똥을 누려니 방귀가 먼저 터져 나와, ◎
향진장안 억만가 (香震長安 億萬家)
◎ 향기로운 냄새로 온 장안이 진동했다. ◎
이 시는 김삿갓이 인심 사나운 한양
도성 을 떠나는 "이별의 시"이기도 했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3) ●
☆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집 주모 “상편 1."
인왕산 을 내려 온 김삿갓은 세검정 을 지나 무악재로 발걸음을 옮겨 파주, 장단을 거쳐, 오 백 년 망국지한 이 서린 고려 의 도읍지 송도에 가보려는 것이었다.
무악재 고개 위에 올라서니 넓은 들판이 한눈에 환하게 내려다보여 한양(漢陽)을 돌아보며 생겼던 갑갑증과 함께 우울(憂鬱)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오던 김삿갓의 눈앞에는
커다란 소나무 그늘의 아래서 농사꾼인 듯싶은 장정(壯丁) 하나가
지게와 낫(鎌)을 옆에 놓고는 네 활개를 쫙 펴고 태평(太平)하게 낮 잠자고 있는 모습(模襲)이 보였다.
아마 나무를 하러 가다 낮 잠자고 있는
듯하였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벌떡 일어나 앉는데,
두 눈이 왕방울처럼 부리부리하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는 것으로 봐, 호락호락한 위인(爲人)은 아닌 듯 보였다.
김삿갓은
"날씨가 무척 덥군요! 산에 나무하러 가시던 길인가요?“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농사꾼은
자신이 앉아있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내려오시던 길인가 보죠?
여기 좀 쉬어 가시오." 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자리에 앉은 김삿갓의 행색을 살피더니, "그런데 남들은 좀체 쓰지 않는
삿갓을 쓰고 다니시는구려."
하며 이상(異常)한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다봤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삿갓이야 사정(事情)이 있어서 쓰고 다니지요.
그나저나 아까부터 목이 컬컬하여 술 생각이
간절(懇切)한데, 혹시 부근에 술집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오? "하고 물었다.
농사꾼은 "술"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정신 이 번쩍 드는지 왕방울 같은 눈알을
대번에 희번덕거리며 입맛부터 다셨다.
"술집이요? 술집이라면 나한테 잘 물으셨소!
저기 보이는 고개를 넘어가면 만만 이라는
술집이 있다오. 술맛도 기가 막히고 안주도
천하일품 이지요."
"저 고개 너머에 그렇게나 좋은 술집이 있어요?
"만만"이라 술집 이름도 참 이상하네."
김삿갓이 이렇게 말을 하자, 농사꾼이 대뜸 대답하는데, "술집 이름이 이상 하긴요? 아, 글쎄, 술 한잔 가득, 또 한잔 가득, 그래서 찰 만, 찰 만, 만만집이라오."
"그것참 재미있는 술집 이름이오." 김삿갓은
농사꾼의 너스레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시는
모양 이구려.“ "아따, 사나이 대장부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 보셨소?
돈이 원수라서 그 좋은 술을 맘껏 못 먹고 밤낮 촐촐하게 지내는 것뿐이지요."
"그러면 내가 한 잔 살 테니 같이 가시려오?“
농사꾼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며,
"돈은 넉넉하시오?“
"돈은 걱정하지 말고 같이 갑시다."
"그럼 나를 따라오시오.“
"지게와 낫 은 안 가져가시려오?"
"술을 먹으러 가는 판인데,
그깟 지게와 낫은 가지고 가면 뭘 하오?"
"그러다가 누가 가져가 버리면 어떡하죠?"
"아따, 그 양반 걱정도 팔자요. 그깟 지게와 낫을 누가 가져간단 말이오? 어서 나를 따라오시오."
김삿갓은, 누가 술을 사고 얻어먹는 것인지
주객 이 전도 된 기분 이었지만 농사꾼의 수작 이 여간 흥미진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장서 허울 대며 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산 아래로 따라 내려오니 산모퉁이에 "(만만)"이라는 초라한 주막(酒幕)이 보였다.
그는 술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며 호기롭게 주인 을 불러 대었다.
"만만 아줌마 계시오?
내가 오늘은 손님 한 분 모시고 왔소.
술은 넉넉하겠지?"
그러나 주모는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아는 듯, 문도 열어 보지 않고
짜증스러운 어투로 대꾸를 했다.
"에구 저런! 이를 어쩌냐
백수건달 이 또 왔는가 보네!
오늘은 아직 개시조차 못 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먹겠단 말이오?
에구머니! 오늘은 제발 그냥 좀 가시구려"
이렇듯 대꾸하는 주모의 말로 미루어 보아서,
이 사람 외상 술값이 어지간히 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모에게 백수건달 로 불린
이 사내는 주모의 매몰찬 냉대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며 또다시 호기를 부려댔다.
"아따, 외상이 몇 푼이나 된다고 이 야단이야?
내가 주모 외상 술값 떼먹을 사람으로 보여?
걱정 놓으시구려! 그렇지만 오늘은 내가 외상술을 먹으러 온 것 아니고 큰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술상이나 차리구려!"
토라진 듯 방문 을 등 뒤로 돌아 앉아있던
주모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서자,
그제야 뒤를 돌아보더니 놀란 듯이 말했다.
"어머나! 다른 손님이 계신 것을 몰랐네."
그러면서 김삿갓을 흘깃 보더니,
"어서 오세요. 상제님이 같이 오신 것 같은데
우리 집은 밑천이 딸려서 외상 술을 드리기
곤란한데 어쩌지요?"
삿갓을 쓰고 있는 김삿갓을 상제로 알고 말했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 먹는 술값은 내가 맞돈 을 드리죠.
염려 말고 술이나 주시오."
그러자 백수건달로 불린 사내는
아랫목에 배짱 좋게 주저앉으며 한마디 하였다.
"그것 보라니까! 오늘은 맞돈 주겠다는데
주모는 웬 잔소리가 그리도 많지?"
그러나 주모(酒母)도 만만치 않은 소리를 하였다.
"내가 술장사를 시작한 첫날부터 삼 년 동안이나 외상 술을 먹어온 주제꼴에 무슨 낯짝으로 큰소릴 치는 게야. 어쩌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원."
"아따, 외상술 주기가 그렇게나 아까우면
숫제 나를 서방님으로 모시면 될 것 아니겠나,
하! 하! 하! 안 그래요? 삿갓 양반!"
백수건달 이 능글맞게 나오자
주모가 입을 삐쭉이며 말을 했다.
"이봐요 백수건달씨!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아들 같은 댁을 서방으로 삼겠소?"
김삿갓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나이를
가늠해 보는데, 백수건달 로 불리는
사내는 갓 40이 넘은 것 같이 보이고,
주모는 오십중반으로 보였다.
그러자 백수건달 이 대꾸하는데,
"아들 같은 젊은 사람하고 살면 더 좋지!
젊고 싱싱한 물건을 밤마다 맛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야지,
그 물건만 먹고 사는가? 개떡 같은 수작은 그만하고 밀린 외상값이나 어서 갚아요."
김삿갓이 두 사람 하는
수작을 듣노라니 그냥 두었다가는
결판이 나지 않을 행색이라,
"외상값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술값은 내가 낼 테니 염려 말고 술이나 가져오시오."
하고 재촉의 말을 하니 그제야 주모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오늘 술값은 틀림없이 손님이 맞돈 주시는 거죠?“
하고 또 한 번 묻는다.
이렇듯 주모가 하도 미심쩍어하므로 김삿갓은
숫제 주머니에서 돈 자루를 꺼내 보였다.
"자, 돈이 이만큼이나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술이나 가져오시오!"
돈 자루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 놀란 사람은
주모 만이 아니라 백수건달 도
왕방울 같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며
주모 에게 호기롭게 소리치는데,
"이것 보아요! 주모! 지금 저 돈 자루 보았지?
아까부터 내가 "큰 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술을 얼마든지 가져오라고. 이런 제길 헐 의심이 이렇게 많아서야, 츳! 츳!“
하며, 제법 혀까지 차가면서 주모를 나무랐다.
주모는 그제야 부엌으로 달려나가 주안상
을 들고 들어오며, "백수건달 이 오늘에서야 삿갓 양반 덕택에 술을 마음껏 마시게 되었구먼.
그러나
남에 호주머니 돈을 내 돈으로 착각은
하지 말고." 하며 또 한마디 쏘아 갈겼다.
그러자 백수건달은 지지 않고 한마디 하는데,
"이런 제기랄, 본래 돈이란 돌고 도는 것.
술자리에서 내 돈 남의 돈이 어디 있어?
안 그래요, 삿갓 양반?“
김삿갓은 동의를 강요당하자
너털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술자리는 시작되었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3) ●
☆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집 주모 “상편 2."
김삿갓은 비록 백수건달 이라 불리는
사나이와 초면부터 술자리를 함께하게
되었지만,
노상 에서 술친구를 만난 것조차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수건달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술잔을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나도록 마시며
말했다.
"어~허 술맛 조 오타. 이렇게나 좋은 술을
한 번도 마음껏 마셔보지 못하고,
그놈에
외상값 때문에 주모 한테 밤낮 구박 을
받아 오고 있으니 신세 가 비참 하기
이를 데 없네.
삿갓 선생! 어쩌다 내 신세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려."
김삿갓은 백수건달 에게 술을
다시 따라 주고 자기도 잔을 채워가며 말했다.
"나도 술을 좋아하지만,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는가 봅니다."
"물론이지요. 남자의 인생 에서
술과 계집을 빼놓으면 뭐가 남겠소."
"하여튼, 돈은 넉넉하니까
오늘은 마음껏 마셔보시오."
김삿갓이 그렇게 말을 하며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자 백수건달은 감격 해 마지않으며
"원, 이렇게도 고마운 일이 있나.
내가 어젯밤 돼지꿈을 꾸었더니
오늘은 술 복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그려."
"그나저나 노형을 두고 주모가 백수건달이라고 부르던데 그 연유 나 들려주시오."
김삿갓은 백수건달로 불리는
사나이의 속내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자 그는 "킥킥" 웃더니 말을 했다.
"내 본래 이름은 백남봉이라오.
그런데 남봉, 남봉하며 남들이 부르다 보니,
난봉꾼처럼 들리게 되었고,
결국은 난봉을 일삼는 백수건달로 불리게 된 것이라오."
"허! 허! 매우 재미있소이다."
김삿갓은 별일 다 보았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곧 정색하며 백수건달에게 말했다.
"내가 노형에게 한 가지 따져야 할 일이 있소이다.“
"예? 나한테 따질 일이 있다고요?"
"그렇소. 노형 이 아까 나를 이 집으로
데리고 올 때, 이 집에 술안주는
천하일품 이라고 말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정작 이 집에 와보니 안주 라고는
고작 도토리묵 한 접시뿐이 아니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김삿갓이 안주 투정을 하자, 주모 가 얼른
앞으로 나앉으며 대답 을 가로막는다.
"우리 집 술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뿐인걸요. 한양 에서도 제법 떨어진
첩첩산중 이라, 다른 안주 는 재료 를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백수건달 을 다시 나무랐다. 노형 은 이 집 술안주가 천하일품 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주모의 말을 들어보면, 이 집 술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뿐이었다고 하니,
노형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게 아니오?"
그러자 백수건달 은 술 한잔을 또다시 단숨에 쭉 들이키고 나더니 도토리묵 한 조각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이 집에 술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뿐이라오. 그러니 그게 바로 천하일품이 아니고 뭐겠어요, 하! 하! 하!“
하고 방안이 떠나갈 듯이 통쾌하게 웃어 댔다.
김삿갓이 들어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속은 것은 분명한데 괘씸하지는 않았다.
"에이 여보시오. 나는 마침 출출하던 판에,
안주가 천하일품 이라 하기에 큰 기대 를 걸고 왔다오.
그런데 도토리묵 하나를 가지고 천하일품 이라고하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소."
백수건달 은 그 말을 듣고 커다란 눈알을 두어 번 꿈쩍거리더니 별안간 "이봐, 주모!"하고 큰소리로 주모를 불렀다.
"왜 또 부른데요?“
"이 집에 씨암탉 몇 마리 있지 않은가?
오늘은 큰손님이 오셨으니
한 놈만 안주 삼아 잡아먹자고.“
그 소리에 주모 는 펄쩍 뛸 듯이 놀랐다.
"백수건달 이 미쳤나? 씨암탉은 우리 집 귀중한 재산 인데 그것을 어떻게 안주로 삼자는 말이냐?“
"그 대신 돈을 많이 받으면 될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돼요!“
"허 긴, 이 집 씨암탉이 주모 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은 내가 알지만,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그깟 씨암탉이 대수인가?"
"그깟 씨암탉이? 나보다 가치 가 있다고?"
주모 가 주먹다짐하듯이 백수건달을 노려보며 말한다.
"그럼! 씨암탉은 매일같이 달걀을 하나씩 낳아 주지만, 주모야 달걀도 못 낳는 식충이 아닌가,
하! 하!"
씨암탉 이야기가 오가자,김삿갓은 새삼스럽게 시장기가 들었다. 그래서 주모(酒母)에게 간청(懇請)했다.
"주모! 내가 허기가 져서 그러니
닭을 잡을 수 있거든 한 마리만 잡아 와요.
닭값은 넉넉히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돈이 문제 가 아니고 내 손으로 키운 닭을
내 손으로 직접 잡아먹기가 마음이 괴로워서
그러죠." 그러자 백수건달 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며 한마디 하였다.
"이봐! 서방이 씨암탉이라도 잡아 오라면 냉큼 잡아 올 일이지, 무슨 핑계가 그리도 많아!“
"아따!, 누가 누구의 서방이라는 거야.
내가 언제 서방질했다고 서방이래!“
"아 참! 이불 속에서 꼭 그 짓을 해야 서방인가?
마음이 서로 통하면 그게 서방 아닌가?
안 그래요? 삿갓 선생 하! 하! 하!.“
김삿갓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비록 남녀 간에
통정 은 안 했더라도 마음이 통하면
애인 이라고도 볼 수가 있으니까 말이오."
"거봐라 벽창호 주모야. 이 손님으로 말을 할 것 같으면 손이 크신 어른 아닌가.
닭을 한 마리만 잡아 오면, 의례 대여섯 마리 값을, 계산 해 주실 것인데,
그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야. 술장사를, 하려면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지 눈치도 없이 사람이 원!“
백수건달 은 슬쩍, 주모 를 도와주기 위해 김삿갓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눈치로 말을 하는 것이다.
"어머!, 한 마리를 잡아 오면 한 마리 값만
받아야지, 도둑놈 모양 으로 어떻게
대여섯 마리 값을 받아요?
어쨌건 손님이
시장하신 모양이니 한 마리 잡아 올게요.
닭을 잡는 동안 두 분은 술을 천천히 들고
계세요.“
주모가 닭을 잡으려고 바깥으로 나가 버리자,
백수건달 은 주모 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4) ●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집 주모 "중편"☆
"지금 저 여편네는 술장사를 해먹을 망정 사람 하나만은 진국이라오. 인정 많고, 남의 사정 잘 알아주고. 계집으로서는 돼먹은 계집이지요."
김삿갓은 조금 전까지 서로 아웅다웅 다투던
모습 과는 달리, 백수건달이 주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 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형이 주모를 칭찬 하는 것은 너무도 뜻밖이구려. 나는 두 사람이 개와 고양이
사이처럼 보였는데.“
"주모와 나 사이가 개와 고양이 사이처럼
보인다고요? 그런데요, 사실은 주모가
나를 아껴주고,
내가 주모의 사정을 알아주고.
딱히 뭐랄 것은 없지만 그렇게 지내지요.“
"노형이 주모를 이렇게 좋게 말하고 있지만,
외상술을 안 주려는 것을 보면 주모는
노형 을 별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오?“
김삿갓은 그들의 관계 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서 의도적 으로 비틀어보았다.
그러자 백수건달 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시 한마디 하는데, 천만의 말씀. 주모가 나에게 외상을 안 주면 누구에게 주겠소.
나는 술을 입에 댔다 하면 억척스럽게 마시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주모는 술을 못 주겠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나를 생각해서 술을 못 주겠다는 것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 년 동안
술장사하는 동안 계속 외상술을 마셨더니,
나라도 외상술 주고 싶은 생각이 나겠소?"
"허 긴! 개업 첫날부터 외상술을 먹어
온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돈이 생길 때마다
갚아 온 것도 사실이고,
꼬투리가 몇 푼 남아 있을 뿐이지. 사실은 거의 다 갚아, 실상 인즉 외상값은 몇 푼 남지 않았다오.
그런데
저 망할 놈의 여편네가 나만 보면 삼 년 전
외상값을 갚으라고 지랄을 하지 뭐에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박장대소 를 하였다.
"하! 하! 하! 삼 년 전의 외상값 꼬투리가
그냥 남아서 돌아간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오? 그나저나 나는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뭐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오?"
"우리에겐 옛날부터 홀아비가 한밤중에
과부를 보쌈해 가는 관습 이 있지 않소?"
이 부근에도 홀아비가 없지 않을 터인데, 이렇게 과부 혼자서 버젓이 술장사를 해오고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이 말을 들은 백수건달 은 생각 나는
일이 있는지, 들고 있던 술잔을 술상 위에 털썩 내려놓으며 말을 했다.
"아 참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군.
이 집 주모가 한밤중에 홀아비한테 업혀 갔던
사건 이 두 번씩이나 있었다오.“
"옛? 홀아비한테 두 번씩이나 업혀 갔던 일이 있었다고?“ 이번에는 백수건달 이 술 한잔을
단숨에 쭉 들이키고 나서, 비어있는 술잔을
김삿갓에게 건네며 말을 했다.
"삿갓 선생! 과부 업혀 갔던 얘기도 좋지만
술이나 마셔 가면서 얘기합시다.
내가 한잔 따를 테니 기분 좋게 쭉 들이키시오.“
백수건달 은 남의 술로 선심을 써가며,
호기롭게 말을 했다.
"이 집 주모가 한밤중에 홀아비한테 업혀 가던 이야기를 들으면 삿갓 선생의 배꼽이 빠질 거요.“
"배꼽이 빠져도 좋으니 그 얘기 좀 들어봅시다.“
"듣고 싶다면 얘기해 드리죠.“
그리고 백수건달은, 주모가 한밤중에 산 너머 마을의 홀아비에게 업혀 가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주모가 30 고개를
막 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주모는 결혼 한 지 10여 년 만에 남편 이 죽고, 딸 하나를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젊고 아름답던 시절이라,
재혼을 시켜 주려고 중신 할미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 왔다.
그중에는 읍내 의 갑부인 최부자가
소실로 데려가겠다는 유혹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과부는 일체의
유혹을 뿌리치며,
누구에게나 다음과 같이 대답 하였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재혼 은 안 해요.
백년가약 을 맺었던 남편이 비록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편은 남편이에요.
재혼했다가 훗날 저승에 가서 남편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딸자식 하나를 데리고 죽는
날까지 혼자 살다가 먼 훗날 저승에 가서
남편 을 반갑게 만날 결심 이에요."
본인이 이런 각오를 다지고 말을 하니,
중매쟁이들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밤, 커다란 이변이 생겼다. 젊은 과부는 잠을 자다가 그만, 포대
자루 속에 갇혀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내 등에 강제로 업혀 가는 신세가 되었다.
젊은 과부 는 업혀 가면서도 포대 속에서도
"사람 살려!" 하는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사지를 결사적 으로 버둥거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납치범 은 그런대로, 포대 자루 속의
젊은 과부를 얼마를 업고 갔다.
그러나 포대 속에든 과부의 몸부림이
어찌나 극성스럽던지, 더는 업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납치범은 마침내 포대 자루를
길바닥에 내려놓고, 제법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설득 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업혀 가기 싫거든 포대 속에서
내놔 줄 테니 아무 소리 말고 따라오라고.
우리 같은 과부 홀아비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줄 알아요.
과부와 홀아비라도
남 부럽잖게 잘 살면 될 게 아닌가.
나는 그만한 자신이 있어 임자를 업어 가는
것이니 잠자코 따라오면 얼마나 좋겠나."
포대 속에 갇혀 있는 젊은 과부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문득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렇게 강제로 끌려가서는 못 살아요.“
"그럼 포대 속에서 내놔 주면 나를 순순히
따라오겠지?
우리 둘은 어차피 한 번씩 아픔을
겪은 사람들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출발해서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보자고."
납치범 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 가는
줄로 알고 포대를 끌러주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젊은 과부는 포대 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별안간 표범처럼 사내에게 달려들어, 대뜸 그의 불알을 움켜잡고 늘어지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나쁜 놈아! 짐승만도 못한
네 놈은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사태는 급전직하 로 역전 되었다.
과부를 납치 해 가려던 사내는 졸지에
급소를 공격당한 아픔에 기절초풍하였다.
"아야! 아야! 아이고 나 죽네.
제발 이것 좀 놔주쇼! 아이고 아야!"
사내는 금방 죽어 갈 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과부 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요동을 칠수록 고통은 더욱 더할 뿐이다.
"개만도 못한 놈아! 또다시 그럴 테냐 어쩔 테냐,
아예 오늘 여기서 뿌리를 뽑히고 갈 테냐.“
사태 가 이쯤 이르자 제아무리
항우장사 라도 배겨날 길이 없었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제발 사람 살려요.“
젊은 과부가 얼마나 납치범 의 불알을
세게 쥐었는지,
마침내 젊은 과부가 그것을 놓아주었을 때는, 납치범은 혀를 가로 물고 쓰러져 버렸다.
김삿갓은 거기까지 듣다가,
배꼽을 움켜잡고 포복절도 하였다.
"하! 하!, 하마터면 하나밖에 없는 귀물을
송두리째 뽑혀 버릴 뻔했구려.
사내의 급소를 사정없이 움켜잡고
늘어졌으니 당사자 는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만 하여도 남의 일 같지 않구려.“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러니까 삿갓 선생도
행여 그것만은 조심 하시오.“
"에이 여보시오. 남에 걱정은 말고
노형이나 조심 하시오.“
"납치 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했는데,
또 한 번의 납치는 어떻게 모면했죠.
그 얘기도 들려주시구려.“
그러자 백수건달 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삿갓 선생은 술 한잔 사주고 그 좋은 이야기를 죄다 공짜로 듣겠다는 말씀이오.
그건 안 돼요." 라고 말을 하면서 거절하는 투로 나왔다. "에이! 밑천도 안 들인 얘기를
무얼 그리도 비싸게 구시오.
술은 얼마든지
살 테니 어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시요
"어험, 그럼 밑천이 안 들은 이야기니
선심을 쓰기로 할까?“ 백수건달 은 김삿갓이 이야기에 바짝 흥미를 갖자, 잔뜩 뜸을 들인 후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리고 백수건달 은 두 번째의
납치 사건 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월무족이 보천 (月無足而 步天)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걸어가고,◎
풍무수이 요수 (風無手而 搖樹)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든다.◎
라는 옛말이 있더니,
첫 번째 납치 사건 은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젊은 과부가 납치범의 불알을 움켜쥐는 덕분에 위기를 모면 했다는 소문 이 며칠 안에
동네방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쫙 퍼졌다.
예나 지금이나 홀아비는 어느 마을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첫 번째 납치 미수 사건을
듣고 난 근동 에 홀아비들은 문제 의
과부를 업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처럼 무서운 과부를 섣불리
업어 오려다가 불알이 뽑혀 버리는 날이면,
인생 이 송두리째 파멸 에 이르게
될 것이라 염려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과부 가 워낙 귀 한데다가
홀아비는 흔해 빠졌으므로, 개중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팔자 를 고쳐 보려는 홀아비가
노상 없지도 않았다.
문제 의 과부 의
집에서 50리가량 떨어진 청석골이란 마을에 살고 있던 황 서방이라는 홀아비가 그런 부류 에 속하는 만용가 40 고개를 갖 넘은 황 서방은, 힘이 황소같이 거침없는 사내로써 동네에서는 고집도 황소처럼 세고,
우둔하기도 짝이 없어 사람들끼리 그를
부를 때는 흔히 , "황소방" 이라고 하였다.
바로 그 황 서방이 어느 날 늙은이들이
그늘에 모여 앉아 한담 5을 나누던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어느 홀아비가 젊은 과부를
업어오다가 그만, 불알을 움켜 쥐이게 되어
뿌리가 뽑힐 뻔하였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장담하였다.
"계집에게 뿌리를 뽑히다니요? 그게 말이 되는소리요. 계집이 제아무리 힘이 세기로, 사내의뿌리를 무슨 재주로 뽑는단 말이오.
나 같으면 계집년을 그 자리에 자빠뜨려 놓고 말뚝 같은 물건을 사타구니 속으로 꽂아 버리겠소.
그러면 계집은 대번에 거품을 물고 나가떨어질게 아니오."
그 말에 늙은이들은 포복절도 하였다.
"이 사람아! 누군들 자네만 못해서 뿌리가 뽑힐 뻔했겠나. 여자들의 ‘악다구니’는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히는 법이네.
자네는 여자들의 무서움을 전혀 모르는가 보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언제나 밑에 깔려 돌아가는 것이
계집인데 무섭긴 뭐가 무섭단 말이오.“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어디,
자네가 그 과부를 업어와 보게나.“
"과부의 집이 어딘지나 알려주시오.
그깟 계집, 오늘 밤 안으로 업어오지요.“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5) ●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집 주모 "하편"☆
이리하여 젊은 과부의 두 번째 납치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날 밤, 황 서방은 젊은 과부 를 포대자루 속에 넣어 등에 업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과부는 포대 속에서 결사적 으로 난동을 부려 보았지만, 황 서방은 끄떡 않고 자기 집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에 온갖 지랄을 해 보아도
끄떡 않는 황 서방의 등에 업힌 포대 자루 속에 과부 자신도 이번만은 "큰일 났구나" 싶었다.
그런데 어느 산골짜기를 지날 때,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저 멀리 산 위에서 홀연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우레와 같은 괴성 을 지르면서 황 서방을 향하여 번개처럼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황 서방은 혼비백산 하여 "악!"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호랑이는 도망가는 노루를 추격해 오는 중이었고 그 방향은
공교롭게 황 서방의 가던 길과 마주쳤던
것이었다.
그러나 황 서방은 호랑이는 자기를
노리고 달려오는 것으로 알고 겁에 질린 나머지 그 자리에서 뻗어 버렸던 것이었다.
납치되어 오던 과부가 간신히 자기 손으로 포대를 끄르고 나왔을 때는, 호랑이는 이미 온데 간데없고 자기를 납치해 오던 사내는 누런 똥을 한 바가지 싸 갈겨 놓고 송장이 되어 있었다.
김삿갓은 두 번째 납치 미수 담을듣고 포복절도 를 하였다.
"하! 하! 하!, 하늘이 무심치 않아,
황서방인가 하는 자가 천벌을 받은 셈이구려.“
"물론이지요, 그야말로 천벌 이지요.".
마침 그때 주모가 삶은 닭고기를 소반에
받쳐 들고 들어오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김삿갓은 웃음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주모를 바라보며 말을 했다.
"아끼고 아끼던 씨암탉을 잡아 오게 해서
미안하오! 우리는 지금 홀아비가 과부 업어
가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소."
주모는 대번에 눈치를 알아차리고,
백수건달을 흘겨보며 정면으로 나무랐다.
"백수건달이 허풍을 떤 모양이구먼.“
그러면서 김삿갓을 보고, "그런 허풍은 믿지 마세요.“
그러자 백수건달도 한마디 하는데,
"허풍은 무슨 허풍이야.
모두가 사실인걸. 누가 없는 말을 꾸며 냈을까.“
"사실 믿거나 말거나 간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 인걸."
주모는 백수건달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간접적 으로 시인 하고 나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닭고기나 먹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김삿갓에게 말을 했다.
"술안주를 정성껏 만들어 오기는 했지만
음식 솜씨가 워낙 없어서.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맛이 없더라도 많이 드세요."
김삿갓은 우선 국물 맛을 보았다.
간도 잘 맞았지만, 어떤 양념을 넣었는지 향취가 그윽하게 풍기는 데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이게 바로 "천하일품"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도 기막힌 음식 솜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토리묵 한 가지 만으로 술을 마시라고 한 것은 너무하지 않았소."
그러자 백수건달 이 딴지 거는 소리를 던지고 나오는데, "삿갓 선생! 섣불리 감탄 하다가는
삿갓 선생도 누구 모양 으로 뿌리를 뽑히게 될까 걱정스럽소.“
"에이! 여보시오. 주인아주머니가 아무리
분별 이 없기로 내 것이야 뽑자고 덤비겠소.
하! 하! 하! 안 그래요, 아주머니?"
주모는 닭고기 담긴 솥을
김삿갓 앞으로 내밀어 놓으며 말을 했다.
"시장하단 양반 이 무슨 군말이 그렇게나 많아요. 어서 닭고기나 드시오!“
그리하여 술은 그때부터 본격적 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술에는 김삿갓도 자신이 있었지만, 백수건달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한이 없이 마셔댔다.
그러자 주모가 김삿갓에게 귀 띔을 하는데,
"저 사람은 한번 폭음 하고 나면
열흘가량 앓아눕는 버릇이 있다오.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게 권하지는 마세요."
주모의 은근한 보살핌에 김삿갓은 은근히
감격해 마지않았다.
아까는 백수건달이 닭값을 많이 받아 주려고 애를 쓰더니, 이번에는 주모가 백수건달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서로 아껴준다는 것은 얼마나 순박하고 아름다운 인정인가?,
출호이자 반호이
◎이쪽에서 마음을 터놓고 손을 내밀어 보이니, 상대방도 무심중에 그 손을 잡아주는 것.◎
이렇게 세 사람은 흉금을 터놓고 말하면서
형용하기 어려운 우정이 쌓여만 갔다.
아울러 이런 친밀감은 양반 사회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아름다운 인간미였다.
(인생이란 이렇게 살아가야만 옳은 것이 아닐까)
김삿갓은 이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들과 어울림이 꾸밈없이 좋아서
술에 취하고 사람에 취했다.
이런 시간이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조반을 먹은 김삿갓은 주모에게 물었다.
"오늘은 길을 떠나야 하겠소.
술값은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그러자 주모는 몹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돈을 안 받았으면 좋겠지만, 살림이 워낙
궁색해서 전혀 안 받을 수는 없는 일이고."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궁리에 잠겼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열냥 만 주세요.“
김삿갓은 술값이 너무도 헐한데 깜짝 놀랐다.
"예 엣? 열 냥이라뇨?
둘이서 사흘 동안이나 먹고 자면서 술을 연달아 퍼마셨는데, 열 냥은 너무 헐하지 않소?
게다가 씨암탉 값도 있는데.“ 그러자 백수건달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삿갓 선생! 주모의 말대로 열 냥만 주시오.
인생은 인정으로 살아가야 할 일이지,
돈으로 셈하면서 살아가면 안 되는 것이
에요
. 열 냥이면 본전은 될 거요." 삿갓 선생같이 좋은 분을 우리가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소."
지난번에는 닭 한 마리를 잡아주고
대 여섯 마리 값을 받으라고 부추겼던
백수건달이었건만, 이제는 술값을 체감해 주려고 애를 쓴다.
"내가 가진 돈은 어차피 며칠 못 가서 죄다
없어질 돈이오. 그러니까 열 닷 냥만 받으시오.“
김삿갓이 주모의 손에 돈을 억지로 쥐어 주고는 "만만" 집을 나서자, 백수건달과 주모는 문밖까지 따라 나오며, "이제, 다시는 만나가 어렵겠지요?"
하고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김삿갓은 대답 대신 시 한 구절 을 읊어 보였다.
今朝 一別後 (금조 일별후)
◎오늘 아침에 한번 헤어지면,◎
何處 更相逢 (하처 갱상봉)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오.◎
後天國 之相逢 (후천국 지상봉)
◎후일 천국에서나 만납시다.
김삿갓, 비록,
오늘 아침에 두 사람과의 이별은 슬퍼도
마음만은 더할 나위 없이 흐뭇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