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멜렉의 최후
삿 9:22-25
본문은 형제 70인을 모두 죽이고 세겜의 왕이 되었던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 아비멜렉이 몰락하는 과정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의 죽음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보여집니다. 물론 가알의 반역이 있었지만 그를 쫓아냈고, 가알과 함께 반역을 시도했던 세겜 사람들을 징계하는 일에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데베스에는 왜 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데베스 사람도 반역에 동참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래서 데베스까지 거의 정복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같은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자신이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어져 죽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시 73:19에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이 일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예상치 못한 일입니까? 이 질문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아니다’입니다. 즉 아비멜렉의 비참한 종말은 예고없이 갑작스럽게 임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002년도에 개봉되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운명을 미리 볼 수 있는 예지자들이 있다는 가정 하에 그들이 미리 예지한 살인 사건들의 범인들을 살인의 현장에서 미리 체포하여 살인율 0%를 만든다는 첨단의 컴퓨터를 동원하지만 사실은 우매한 현대인들이 신뢰하는 점술에 근거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과연 인간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을까? 성경에 근거하여 점술을 믿지도 않지만 설령 그들이 예언한 운명이 그대로 된다 하더라도 구약성경은 점술가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탄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짧은 미래에 대해 예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의 선한 대로 갚아 주시고, 악인은 자신이 지은 악한 행위대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런 면에서 아비멜렉의 결과는 이미 예상되어졌다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22절에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삼년에”
아비멜렉은 3년동안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시간이 아닙니다. 어제 새벽에 요담이 우화를 만들어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외친 것에 대해 보았는데 사실은 저주의 예언입니다.
18절 이하에“너희가 오늘날 일어나서 우리 아버지의 집을 쳐서 그 아들 칠십인을 한 반석 위에서 죽이고 그 여종의 아들 아비멜렉이 너희 형제가 된다고 그를 세워 세겜 사람의 왕을 삼았도다 만일 너희가 오늘날 여룹바알과 그 집을 대접한 것이 진실과 의로움이면 너희가 아비멜렉을 인하여 즐길 것이요 아비멜렉도 너희를 인하여 즐기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을 사를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 족속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니라 하고 요담이 그 형제 아비멜렉을 두려워하여 달려 도망하여 브엘로 가서 거기 거하니라”
이 저주의 예언이 있은 후 3년이 지난 후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70인의 형제 중에서 막내인 요담을 죽지 않게 하시고 그를 통해 저주의 예언을 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시나무같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면에서 3년의 시간은 아비멜렉에게 기회의 시간입니다. 요담의 저주가 있자마자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행동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 모든 시간들은 홍수로 멸망받았던 자들에게는 회개할 수 있었던 기회의 시간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그 시간이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 짧게 나타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 더 길게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기회의 시간들은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그 기회의 시간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나중에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처음에 아비멜렉이 왕이 될 때 세겜 사람들의 힘을 빌려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둘은 원수 지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23절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신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다림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기 시작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들을 통해서 나를 힘들게 하십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물질이 나를 괴롭히는 시험거리가 되게 하시고, 내가 가장 사랑하던 자식들이 내게 아픔을 던져주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삭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삭조차도 바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야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입니다.
24절에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인에게 행한 포학한 일을 갚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둘 다에게 시행됩니다. 왜? 아비멜렉에게는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묻고, 그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서 형제를 죽이게 한 죄를 세겜 사람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시작됩니다.
여러분! 인간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생을 살아가며 올바른 인간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가를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주지 않습니까?
시 146:3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 관계도 믿음 안에서 이뤄져야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자신이 그렇게 믿던 세겜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한 아비멜렉과 같은 결과를 볼 때가 많습니다. 왜? 자신들의 인간 관계는 좋았는지 몰라도 인간 관계를 맺고 행한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인간 관계에 끌릴 때가 참 많습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들을 보면 그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실패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인간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인간 관계를 가지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가알이란 인물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갈라놓게 하기 위해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합니다. 결국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는 끝이 나고, 세겜 성 사람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칼에 죽고 불에 타 죽고, 아비멜렉은 세겜과 동조했던 데베스 사람들을 얼마 남겨두지 못한 상황에서 한 여인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습니까?
3. 심은 대로 거둔다.
아비멜렉은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너무도 잘 되니까 하나님이 두려운 줄도 모르고 제 멋대로 행동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난 화살입니다.
아비멜렉의 죽음은 아버지를 배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자신의 미를 자랑하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다가 요압의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한 압살롬의 죽음과,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죽이고 바알을 섬기다가 아람과의 전투에서 바꿔입은 갑옷의 솔기에 화살을맞고 돌봐주는 이가 없어 피를 흘리다가 죽어간 아합의 죽음과 더불어 구약의 가장 비참한 죽음에 속합니다.
56절에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을 하나님이 그들의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예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찰스 베어드라는 유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에게 하루는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박사님, 박사님은 평생토록 역사를 연구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박사님께서 평생 역사를 연구하시면서 깨달은 것을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찰스 베어드 박사는 네 가지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나라나 사람들을 멸한 때를 보면, 반드시 그 사람이나 나라가 교만했을 때였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교만합니다. 이 길은 필경 망하는 길 임을 알기에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또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보아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바라보면 역사에 대한 심판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바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네로가 로마의 황제로 있을 때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러 매달려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네로가 로마제국의 황제로 엄청난 권력을 행사했고, 베드로는 그의 한마디 명령에 꼼짝없이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네로는 폭군으로 인류의 역사가 영원히 남게 되고,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로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지 않습니까?
부천에 세계의 위대한 건축물들을 축소시켜 한 자리에서 볼 수 있게 만든 곳이 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많은 건축물들을 보면서 베드로 대성당보다 아름다운 건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미켈란젤로 같은 위대한 미술가가 베드로 대성당의 병면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않았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 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들이 역사를 움직여 가는 것처럼 교만합니다. 수많은 영웅이라 부려지는 이들이 역사를 자기 힘으로 움직여 보려고 했습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같은 이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어 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등불이 완전히 꺼진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항상 그루터기가 남아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져 가는 겁니다. 아합의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지 않습니까?
히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은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계산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반드시 서게 되어 있습니다.
갈 6:7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결국 자신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진리입니다. 자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아비멜렉의 삶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