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일본 장르소설 출판계의 연대기가 작성된다면, 2012년은 이렇게 기억될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 한국 진출 원년의 해.’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스릴러·미스터리 소설의 입문자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이다. 트릭과 반전 같은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과 맞닿은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좇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의 토대를 세운 이가 바로 그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작가들이 지금 한국 장르팬들을 열광케 하는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 모리무라 세이치 등이다. 마흔한살에 데뷔해 40여년간 1천여편의 저서를 ‘쏟아’냈고, 일본 평단으로 하여금 ‘세이초 이전, 세이초 이후’라는 수식어를 만들게 한 이 괴물 작가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한국에선 그의 ‘아이들’보다 뒤늦게 조명되는 감이 있다. <점과 선> <모래그릇> 같은 그의 대표작이 단발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었고 2009년부터는 미야베 미유키가 엮은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이 세 권으로 선을 보였지만, 장르문학 출판사 북스피어와 역사비평서 출판사 모비딕이 판형과 디자인을 통일해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함께 출간하기 시작한 2012년이야말로 진정한 ‘세이초 월드’가 열리는 원년이라 할 만하다.
두 출판사의 ‘세이초 월드’ 시리즈가 더더욱 반가운 이유는 작가로서 글의 형식을 넘나드는 데 거침이 없었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마쓰모토 세이초는 단편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장편으로 대중성을 얻었으며, 논픽션으로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거장의 자리에 올랐는데 올해 출간된 ‘세이초 월드’ 시리즈에는 그의 장편과 단편, 논픽션이 고루 섞여 있다. 북스피어의 <짐승의 길> 상하권은 마쓰모토 세이초식 사회파 추리소설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 여관 종업원이 비운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고, 일본 정계 거물의 성적 도구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간다. 권력과 폭력, 돈과 탐욕을 상징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서서히 한 여자를 ‘짐승의 길’로 내모는 과정이 묵직하고 박력있는 필치로 묘사된다. 모비딕의 <잠복>은 마쓰모토 세이초 추리소설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여덟편의 단편을 수록했다. 일본의 수많은 ‘마쓰모토 세이초 연구자’들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진면목은 단편에 있다”라고 말해왔다. 신문 연재를 기반으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보다 대중적인 스타일을 띨 수밖에 없는 장편에 비해 이야기의 밀도가 짙다는 이유에서다. <잠복>의 경우 마쓰모토 세이초의 승부수는 결말 부분에 있는 듯하다. 간결하지만 이야기 전반을 단숨에 아우르는 파국의 결말이 소설을 읽은 뒤에도 강한 여운을 남긴다. 수록작 <얼굴>과 <잠복>이 특히 그러하다. 북스피어의 <미스터리의 계보>와 모비딕의 <일본의 검은 안개>는 논픽션이다. 특히 일본사회의 열두 가지 미제사건을 작가 특유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일본의 검은 안개>는, 일본사회와 조직의 불투명한 비리를 의미하는 ‘검은 안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걸작이다. 이 책을 읽는 한국 독자들로서는 마냥 남의 나라의 신기한 사건 구경하듯 할 순 없을 거다. 모든 미제사건은 동아시아 질서가 바쁘게 재편되던 1950년대의 ‘한국전쟁’을 종착역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에 비견할 만한 이 작품까지 읽고 나면 마쓰모토 세이초의 무한한 깊이에 탄식만 내뱉을 뿐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비교해 말하자면 마쓰모토 세이초가 사회를 사랑하는 방법은 첫째로 사회에 대한 글을 치열하게 써나가는 것이었고, 둘째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를 담아내는 프레임을 탐구했으며, 셋째로 그 스스로 역사가가 되어 사회의 비뚤어진 이면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평생을 삶의 진창 속으로 기꺼이 내던진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읽히지 않은 수많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저서들이 남아 있다는 것, 북스피어와 모비딕의 ‘세이초 월드’ 시리즈가 벌써 40여권의 라인업을 장전해두고 있다는 점에 기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