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독일 땅에서 울컥… 망명길 청년 멈추게 한 '주홍색 열매'
김민철 기자
입력 2026.07.04. 03:00업데이트 2026.07.04. 07:03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세계문학전집에
어린 시절과 유학 과정 수묵화처럼 그려
꽈리, 이국 땅에서 수구초심 자극한 열매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 500번째 책으로 이미륵 작가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펴냈다. 이 책은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의 수배를 피해 독일로 망명한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다. 1946년 독일어로 출간됐고 1959년 작가 전혜린 번역으로 한국 독자와 처음 만난 작품이다.
소설은 나라가 망해 가는 20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추억, 그리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간결하고 담담한 문체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는 글이다. 특히 어린 시절과 역사적인 사건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 인간이 성숙해 가는 과정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져 있다.
꽈리, 그리운 고향의 열매
양반집 외아들인 주인공은 따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형으로 지은 넓은 집 담 밑에는 봉선화가 피었고, 붉은 열매가 열리는 큰 석류나무도 있었다. 뒷마당에는 꽈리도 있었을 것이다. 밝은 달밤 살구나무 아래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 술을 얻어먹고 취하기도 했다. 여름에 수많은 노목이 우거진 옥계천에 가서 아버지와 바둑을 두고 목욕하는 장면도 있다.
주인공은 ‘유리창이 있는’ 신식 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을 접하며 유럽에 대한 동경심을 갖는다. 그리고 서울의 의학 전문학교에 다니다 3학년 때 3·1 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지하로 잠복한 학생운동에서 삐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3·1 운동의 결과로 일본은 언론의 자유 선포 등 유화 정책을 폈지만 3·1 운동 가담자들을 체포해 중형을 가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 쫓기자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독일 유학을 권했다.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겠다.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작가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하이, 싱가포르, 콜롬보, 수에즈 운하를 거쳐 프랑스 마르세유 항에 도착했다. 이어 다시 기차를 몇 번 갈아탄 끝에 중부 독일의 작은 도시에 도착하는 내용이다.
소설 마지막 부분엔 주인공이 혹시나 고향에서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러 우체국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꽈리를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얼마 후 눈이 온 날 주인공은 지난가을 어머니가 며칠 동안 앓다가 갑자기 별세했다는 맏누이의 편지를, 고향에서의 첫 소식으로 받는다. 어머니가 별세한 시기는 주인공이 꽈리를 본 즈음이었을 것 같다.
부푼 오렌지색 껍질이 열매 감싸는 구조
이미륵은 필명이자 아명으로 그의 본명은 이의경이다.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해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1920년 독일로 유학을 간 것은 소설 내용과 같다.
이미륵은 독일에서 의학과 철학, 생물학을 전공했고, 뮌헨대학에서 중국학을 강의했다. 그리고 1946년 독일어로 ‘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해 독일 문단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그는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1950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꽈리는 가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은 노란색을 띤 흰색인데, 가을이면 부푼 오렌지색 껍질 속에 열매가 있는 꽈리가 꽃보다 더 예쁘게 달린다. 이 껍질은 꽃받침이 점점 자라는 것으로, 풍선 모양으로 열매를 감싸는 특이한 형태다.
어릴 적에 꽈리는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뒤뜰 같은 곳에 흔했다. 마을 부근 길가나 빈터에서 자라며 일부러 심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엔 고향 집 주변에서도 찾을 수 없고 일부러 재배하는 곳도 찾기가 쉽지 않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이 1.5센티미터 정도로 빨갛게 익으며 먹을 수 있다. 이 열매는 옛날에 어린이들의 좋은 놀이감이었다. 잘 익은 꽈리 열매를 손으로 주물러 말랑말랑하게 만든 다음 바늘이나 성냥개비로 꼭지를 찔러서 속에 가득 찬 씨를 뽑아낸다. 속이 빈 꽈리 열매에 바람을 불어넣은 다음 입에 넣고 혀와 이와 잇몸으로 가볍게 누르면 ‘꽈르르 꽈르르’ 소리가 난다. 특히 많이 불면 보조개가 생긴다고 극성스럽게 부는 아가씨도 있었단다. 이 꽈리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는 수억만 리 이국 땅으로 유학을 간 주인공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자극하는 소재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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