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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또는
[백]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므로 성령을 따라가자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의 잘난 체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나무라시며 그들을 불행하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욕정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5,18-25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20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21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23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24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5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고,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는데, 우리는 지금도 기도하는 법을 묻습니다. 어쩌면 주님의 기도를 아직 다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진심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친밀함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이를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려면, 먼저 내 안에서부터 그 나라를 가로막는 모든 요소를 없애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때로 우리에게 작은 겟세마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오도록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때에도 아버지의 나라를 바란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바란다면,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저에게”가 아니라) “저희에게”(11,3) 양식을 주시기를 청한다면 오늘 양식이 없는 이에게 양식을 마련하여 주어야 하고. 우리에게 하루하루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내일을 맡겨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기를 바란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11,4)를 용서하여야 합니다. 우리 형제의 죄는 하느님께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자신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 날마다 바치다 보니 쉽게 느껴지는 이 기도는 아직도 배워야 할 기도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정작 필요한 정결은 내면의 정결, 마음의 정결, 눈의 정결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래전부터 유다인들이 목숨 걸고 준수해오던 정결예식, 사실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관습이었습니다. 팬데믹 시대를 거쳐오면서 감염병 예방을 위해 손을 잘 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정결 예식은 얼마나 극단적 형식주의로 치달았던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결 예식은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특히 자칭 거룩한 존재로 여겼던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을 다녀오면 죄인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집단 세심증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모습 앞에 율법의 주인이자 자유로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합니다.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던 정결례를 무시하는 정도를 넘어 파기하십니다. 보란 듯이 손도 안 씻고 그냥 음식을 드십니다.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될 나병 환자의 손을 서슴없이 잡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정결은 내면의 정결, 마음의 정결, 눈의 정결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 안에서도 작은 정결 예식의 순간이 있습니다. 입당 후 곧바로 이어지는 참회 예식의 순간, ‘제 탓이요.’를 세 번씩이나 외치는 그 순간이 어찌 보면 작은 정결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기 전, 사제는 복사가 가져다주는 물그릇에 손을 담그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작은 정결 예식을 행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돌아보니 정말이지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손 씻는 예식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가 제 삶 안에서 의식화되고 성취되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손 씻을 때 마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겠다는 마음으로 임해야겠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이 미사 안에 재현되는 파스카 신비를 제 삶 안에서 구체화시키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미사 때마다 어제의 나를 죄와 종살이의 땅 이집트에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홍해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이자 구원의 땅 새로운 이스라엘로 넘어와야겠습니다.
기도나 묵상, 로사기오 기도나 각종 전례 행위 등 영적 의무를 실천하는 기회 때마다 매일 회개하고 순간순간 새로워져야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사람으로 끝없이 거듭나야겠습니다. 이것이 그토록 예수님께서 질타하시는 위선과 형식주의, 율법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사필귀정(事必歸正)’도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악이 선을 이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어둠이 빛을 가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모든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독서는 신앙을 차갑게 만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을 뜨겁게 만들어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주변을 보면 활활 타오르는 불을 꺼버리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불행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재물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궁핍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건강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몸이 아프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불행의 이유를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외로우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려운 이웃을 돕지 않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잘난 척하고, 교만한 사람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의 불을 꺼버리려는 사람입니다.
주변을 보면 꺼져가는 불도 다시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이유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재물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건강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몸이 건강하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의 이유를 관계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행복할 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할지라도, 굶주릴지라도,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의 불을 뜨겁게 살리는 사람입니다.
‘花無十日紅이고 權不十年’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곧 사라지고 마는 것들 때문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돈 때문에 소중한 가족을 등한시하기도 하고, 권력 때문에 우정을 팔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蘭香千里 德香萬里’라는 말이 있습니다. 난의 향기는 멀리 가야 천리이지만 사람의 덕은 만리까지 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희생, 사랑, 나눔, 봉사는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나보다 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나
살기보다
너
살게 하기를
나
빛나기보다
너
빛나게 하기를
나
가지기보다
너
가지게 하기를
나
기쁘기보다
너
기쁘게 하기를
나
아프지 않기보다
너
아프게 하지 않기를
나
슬프지 않기보다
너
슬프게 하지 않기를
나
더럽지 않기보다
너
더럽히지 않기를
오늘의 성인
성녀 헤드비히(헤드비제스)
활동년도 : 1174?-1243년
신분 : 과부, 수녀
지역 :
같은 이름 : 야드비가, 헤드비가, 헤드비그, 헤드비제스, 헤드비히, 헤트비히
성녀 헤드비지스(Hedwigis)는 독일 바이에른(Bayern)의 안데흐스(Andechs) 성에서 베르톨트(Berthold) 공작의 여덟 자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그녀는 프랑코니아(Franconia)의 키칭겐(Kitzinge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12세 때에 18살의 폴란드 왕자이자 후에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의 공작이 된 하인리히 1세(Heinrich I)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또 용기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아내의 신앙생활과 자선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는 아내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브로추아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의 설립을 후원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수도회에 아낌없는 후원을 보냈다. 또한 1202년 노이마르트(Neumarkt)의 병원에서 나환자 여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아내의 활동에 감동을 받아 트레브니츠(Trebnitz)에 있는 자신의 땅에 시토회 수녀원을 지어 기부하였다. 이 수녀원은 슐레지엔 지방에 세워진 첫 번째 여자 수도원이었다.
성녀 헤드비지스와 하인리히 1세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1238년에 남편과 사별한 성녀 헤드비지스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하여 큰 덕을 쌓았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물질적, 영성적 이익을 위하여 늘 헌신하였으나, 자기 자신은 극도의 가난 속에서 하느님만을 섬겼다고 한다. 헤트비히, 야드비가(Jadwiga) 등으로도 불리는 성녀 헤드비지스는 1243년 10월 15일 트레브니츠의 수녀원에서 세상을 떠나 수녀원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성인으로 불렸던 그녀는 1267년 3월 26일 교황 클레멘스 4세(Clemens IV)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슐레지엔 지방의 수호성녀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et Mary Alacoque)
신분 : 수녀, 환시자
활동연도 : 1647-1690년
같은이름 : 마가렛, 마르가리따, 마르가리타, 말가리다, 말가리따, 말가리타, 알라콕
클로드 알라코크와 필리베르트 라멩의 딸인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는 1647년 6월 22일 프랑스 샤롤레 지방 베로브르의 로트쿠르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8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샤롤레의 성녀 클라라(Clara) 수녀회의 기숙학교에 보내졌다.
그러나 15세가 될 때까지 5년 동안은 류머티즘 열로 인하여 자리에 누워서 지냈는데, 어릴 때부터 성체께 대한 신심은 남달리 뛰어났다. 그녀는 결혼을 거절하고 1671년 6월 20일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성모 방문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그 이듬해 11월 6일 ‘마르가리타 마리아’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서약을 하였다. 그녀는 모범적인 수녀였으나 유머 없는 수녀로 통했던 것 같다.
그녀는 1673년부터 1675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4번이나 경험하였다. 이러한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당신의 성심께 대한 신심을 널리 전하는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알렸고, 특별히 첫 번째 금요일에 영성체할 것과 매주 목요일 밤에 성시간을 갖고 구속사업에 참여하라는 신심을 그녀에게 교육시켰으며, 예수 성심 축일의 제정을 요구하셨다.
그녀는 자신이 환시 중에 받은 교육을 따르려는 노력 중에 장상으로부터 수많은 퇴짜를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노력하여 온갖 장애를 극복하였으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발현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당신의 수녀회원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당시 수녀원의 고해신부였던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2월 15일) 신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콜롱비에르 신부는 파레르모니알의 예수회 원장이었는데, 그는 마르가리타의 환시가 올바르다고 선언하였다. 1684년 멀랭 수녀가 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도원 내의 반대도 종식되었으며, 후일 그녀는 수련장이 되었다.
1686년 초에는 수녀원에서 예수 성심 축일을 거행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고, 2년 후에는 예수 성심께 봉헌된 경당이 수녀원 뜰에 세워졌고, 곧이어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는 관습이 전세계의 성모 방문 수녀회로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마르가리타 마리아는 1690년 10월 17일 수녀원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1864년 9월 18일에 시복되었으며, 1920년 5월 13일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마르가리타와 성 요한 에우데스(Joannes Eudes, 8월 19일) 그리고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성심의 성인들’로 불린다.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765년에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선포되었으니, 그녀의 사후 75년 만의 일이었다.
성 갈로 (Gall)
활동년도 : +635년경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지역 :
같은 이름 : 갈루스
아일랜드 태생인 성 갈루스(Gallus, 또는 갈로)는 뱅거(Bangor)에서 성 콤갈(Comgall, 5월 10일)과 성 콜룸바누스(Columbanus, 11월 23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성 콜룸바누스를 수행하여 프랑스 지방 선교에 나섰던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며, 스승과 더불어 안느그레(Annegray)와 뤽세이유(Luxeuil)에도 갔었다. 그 후 그들은 취리히(Zurich) 지방을 돌며 복음을 선포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스승은 이탈리아로 갔다. 이 때 그는 건강이 나빴으므로 수행하지 못하고 슈타이나흐(Steinach) 강변에서 은수자 생활을 하였는데, 많은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성 갈루스(오늘날의 장크트갈렌, Sankt Gallen)의 수도원은 중세까지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의 중심지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는 스위스 아르본(Arbon)의 사도로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