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고성(固城)은 예로부터 선비문화가 융성했던 곳으로서 여말선초(麗末鮮初)에는 행촌(杏村) 이암(李嵒), 도촌(桃村) 이교(李嶠) 형제 선생을 위시하여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묵재(墨齋) 노필(盧王+筆)선생등을 배출하였고 근세에 갈파(葛坡) 최필학(崔必鶴), 서비(西扉) 최우순(崔宇淳), 회산(晦山) 제경근(諸慶根), 의재(毅齋) 이종홍(李鍾弘), 매담재(梅潭齋) 배도홍(裵道泓), 정헌(靜軒) 곽종천(郭鍾千), 구봉(九峯) 이예중(李禮中), 신암(新庵) 허격(許格), 경파(耕坡) 허채(許棌)선생등을 배출하며 그 유풍(儒風)을 면면히 이어왔으나 점증하는 서구(西歐)문물과 그 언어문화의 영향으로 이제 크다란 도전(挑戰)에 직면해 있다.
서비(西扉)는 1832년 하일면 학림에서 태어나 노년에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민영환, 조병세등 충신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詩를 지어 통곡했으며 그후 나라가 망하자 왜놈의 나라가 있는 동쪽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를 서쪽의 문을 일컫는 “西扉”라 지었다.
晦山(회산 제경근)의 저서는 《中庸總說》, 《偶記》, 《讀陳北溪性理字義》, 《書贈庠學諸生》, 《委禽辨》, 《誡神魂文》등이 있다.
毅齋(의재 이종홍)는 일제강점기 한학자겸 의병으로 구만출신이다. 냉천서당(冷泉書堂)을 짓고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연구하였으며, 예학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다. 작품으로는 《독화도심설변(讀華圖心說辨)》,고종의 죽음을 듣고 냉천산(冷泉山)에서 통곡하며 쓴 시 『두견행(杜鵑行)』, 항일운동을 다짐하며 쓴 《차전간재강토음(次田艮齋疆土音)》외에 《의재집(毅齋集)》,《여소학(女小學)》,《가향휘의(家鄕彙儀)》,《묘의(廟儀)》가 있다.
梅潭齋(매담재 배도홍)는 마암 수곡출신으로 《繡谷書堂呈主翁裵道泓》과 《梅潭齋遺稿》가 있다.
靜軒(정헌 곽종천)은 구만면 효대에서 남암(南庵) 곽대곤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숙인 의재(懿齋)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우리 문중의 유학자 新庵(신암 허격), 耕坡(경파 허채)선생에 대해서는 해당 문집,연보등으로 참고되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가하지 아니한다.
앞으로 시대의 사조(思潮)가 변하더라도 우리가 지키고 우러러온 아름다운 유가적(儒家的) 풍습과 가치를 다시 일어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회서당의 강학(講學)활동에 대해 주목하는것도 이러한 점을 바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고 후손 만대(萬代)로 살아갈 이 땅을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가꾸어야 한다.
첫댓글 상기 글의 도입부에 언급한 인명들은 정경태 대한시우회본부장의 2008년 고성전국한시백일장시집(고성향교발행) 고성소개편 기고문 일부를 참고함.
요즈음 이회서당의 새로운 시도도 옛날처럼 유풍진작을 점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 같다.
田艮齋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 간재 全愚를 말함.
靜軒 곽종천선생은 우리종회 금암(許貳)고문님의 처조부 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