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을 바로 알자
<10만원권 지폐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
박정학/사학과 강사
광개토대왕, 그는 서기 392~413년(22년)간 재위한 고구려 19대 임금으로서, 부르는 호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광개토(廣開土)’라는 수식어가 들어간다. ‘땅을 넓게 개척했다’는 의미다. 그 뒤의 ‘왕’이라는 직책의 호칭은 ‘왕’(삼국사기), ‘대왕’(교과서 등), ‘태왕’(비문 등), ‘열제’(환단고기) 등 다양하다. 비문에 적힌 ‘태왕’ ‘대왕’이 당시의 호칭으로 신빙성이 높으며, 중국의 ‘황제’ ‘제’와 동격이면서 우리 민족 고유 명칭으로서의 차별화 의미가 있다. 요즈음 역사드라마 등에서 ‘황제’ ‘황’ ‘제’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중국식 호칭을 따라가는 것이므로 나로서는 권장할 수 없다.
어쨌든 예하에 ‘왕’들이 다스리는 연맹국을 거느린 ‘태왕’의 지위이고, ‘광개토’라는 수식어에서 보듯 나라의 땅을 크게 넓혔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고교 교과서에서는 오히려 장수왕 때 땅을 더 넓힌 것처럼 기술되어 있고, 신라 후예들의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얼마나 넓혔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며, 그의 비문에 나와 있는 정복지명이 현재의 어디인지는 학자마다 비정하는 위치가 달라 정확히 그 지역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 지명들이 중원지역에 있는데도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 안에 있다는 전제로 한반도에서만 찾으니 보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 우리들로부터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일본보다는 훨씬 적으나 50여 편의 광개토대왕능비 연구 논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주로 마모된 글자 찾기와 왜(倭) 관련 기사의 해석에만 관심을 집중하였을 뿐, 그 속에 나오는 지명에 대해서는 충분하고 세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세부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오히려 재야의 한암당 이유립(『대배달민족사』 저자)과 오재성씨다.
그들은 신라, 백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반도사관을 탈피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중국 『25사』와 『삼국사기』를 근거로 광개토대왕비문의 대왕이 점령한 신라, 백제, 왜의 지명 중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없는 수많은 지명들이 중국의 하북ㆍ하남ㆍ산동ㆍ산서ㆍ섬서ㆍ안휘ㆍ절강성 지역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광개토대왕이 넓힌 땅이 한반도 전체와 중국의 태행산맥 동쪽 양자강 이남, 내지 그 이상이었다고 주장한다.
우리 민족으로서 중국 한족의 중심부인 중원지역까지를 모두 차지한 역대 3번째 임금이 된 것이다. 첫 번째는 배달나라(또는 구리)의 14대 임금인 자오지 환웅(속칭 치우천왕)이었고, 두 번째인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이었다.
얼핏 황당해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반도사관에 입각한 역사지식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임진강 이북까지만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희한한 교과서로 공부를 했다. 중국은 ‘옳다구나’ 하고 반도사관에 따라 우리가 그렇게 버린 역사 강역을 그냥 주워갈 뿐이라는 듯이 ‘한민족은 임진강 이남에 있었고, 고조선은 자기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도사관으로써는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아무리 고구려사 연구재단이나 동북아역사재단을 만들어도 안 된다. 치우천왕으로부터 고조선, 고구려, 발해, 요금원청까지의 우리 겨레가 차지했던 드넓은 만주와 몽골, 중원지역을 스스로 버림으로써 그 지역이 영원히 중국인의 역사 강역이 되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의 ‘광개토’와 ‘대왕’(또는 태왕)의 의미를 제대로 찾는 사관으로 만주, 몽골, 중원 지역에서 명멸한 치우천왕, 고조선, 단군, 광개토대왕, 요금원청의 역사를 볼 때, 한반도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던 당시의 지명들이 중원 땅의 신라 백제 지역에서 보일 것이다. 그럴 때가 되면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쉽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10만원권 인물이 되는 것은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007.3.26 강원대학신문 1020호에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