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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두고 간 여자
5부 ―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
“미정아.”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열일곱 해 전으로 돌아갔다.
서윤은 언제나 내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급할 때도, 화가 났을 때도, 술에 취해 웃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미정 씨’라고 불렀지만 서윤만은 끝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나는 최은경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지낸 여자를 바라보았다.
머리는 짧아졌고 얼굴은 야위었다.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 예전의 서윤을 그대로 찾아내기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 있었다.
그러나 눈은 같았다.
“정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서윤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가 멈췄다.
그 순간 서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반가움도 슬픔도 아니었다.
상처였다.
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보다, 알아본 뒤 물러선 것이 더 아픈 사람의 얼굴.
“미안해.”
서윤이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화가 났다.
“미안해?”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칠 년이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산 시간이 십칠 년이라고.”
“알아.”
“알아?”
나는 웃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알면서 내 앞에 있었어?”
“…….”
“석 달 동안?”
서윤이 고개를 숙였다.
“왜?”
대답이 없었다.
“왜 그랬어!”
내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새 한 마리가 놀라 날아올랐다.
“나는 네 장례도 못 치렀어. 죽었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살아 있다고 믿을 수도 없었어. 살아 있다는 증거도 없으니까.”
눈물이 흘렀다.
“사람 하나를 어디에도 놓을 수가 없었어.”
서윤의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미정아.”
“부르지 마.”
서윤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나 자신도 아팠다.
십칠 년 동안 다시 한번 듣고 싶었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목소리로 듣자 견딜 수 없었다.
윤정희가 조용히 말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 창고에 온 남자 때문입니까?”
“네.”
“누군데요?”
윤정희와 서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또 숨길 겁니까?”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다 말할게.”
“그 말을 십칠 년 전에도 했어.”
서윤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
한참 뒤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네가 결정해.”
“뭘?”
“들을지 말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윤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화가 났다.
“말해.”
“미정아.”
“말하라고.”
서윤은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기억을 잃은 건 우연이 아니야.”
빗소리가 다시 커졌다.
“무슨 뜻이야?”
“그날 저수지에서 사고가 있었어.”
“무슨 사고?”
“네가 다쳤어.”
나는 머리를 만졌다.
흉터 같은 것은 없었다.
“어떻게?”
서윤이 대답하려는 순간 멀리서 자동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윤정희가 말했다.
“가야 해.”
우리는 숲길을 빠져나왔다.
서윤의 차는 공원 뒤편 작은 도로에 세워져 있었다.
나는 뒷좌석에 탔다.
윤정희가 조수석에 앉았고 서윤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출발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창밖만 바라보았다.
십칠 년 만에 만난 친구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런데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 전에 배신감이 밀려왔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했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살아 돌아오면 무조건 끌어안게 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때로 죽었다는 것보다 더 많은 설명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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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시내를 벗어났다.
삼십 분쯤 달린 뒤 작은 시골집 앞에 멈췄다.
낮은 담장과 낡은 기와지붕이 있는 집이었다.
마당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꽃도 나무도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서윤이 불을 켰다.
방 한쪽 벽에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한정희.
내 아버지 김태식.
서윤의 아버지 윤상호.
윤정희.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일하던 출판사 사람들의 사진까지 있었다.
사진 사이에는 날짜와 화살표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맨 가운데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낯익은 남자였다.
“누구야?”
내가 물었다.
서윤이 대답했다.
“박기현.”
“모르는 사람이야.”
“네 아버지 친구였어.”
“아버지 친구?”
“사업도 같이 했고.”
윤정희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하나도 빼지 마세요.”
윤정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십오 년 전, 저수지 주변에는 지금 공원이 들어선 땅보다 훨씬 넓은 습지가 있었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오래전 토지개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몇몇 사람들이 저수지 주변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개발계획이 외부에 알려지기 전이었다.
“내부정보였어요.”
서윤이 말했다.
“누군가 공무원에게서 개발 정보를 빼낸 거야.”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이 네 명이었다.
김태식.
윤상호.
박기현.
그리고 한정희의 남편 한재수.
나는 벽에 붙은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도?”
“처음에는.”
서윤이 말했다.
“그런데 네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중간에 빠지려고 했어.”
“왜?”
“사람이 죽었으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누가?”
윤정희가 대답했다.
“한재수 씨요.”
한정희의 남편이었다.
공식 기록에는 실족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발 관련 서류를 빼돌린 사실을 들킨 뒤 박기현과 몸싸움을 하다가 저수지에 빠졌다.
“박기현은 사고라고 주장했어요.”
윤정희가 말했다.
“하지만 태식 씨와 상호 씨는 경찰에 가려고 했죠.”
“그런데 못 갔고요?”
“협박을 받았어요.”
가족.
돈.
직장.
박기현은 두 사람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한정희는 남편의 죽음이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김태식과 윤상호는 증거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17일, 윤상호가 결정적인 장부를 확보했다.
“그날 우리 아버지가 죽었구나.”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어.”
“박기현이 죽였어?”
“증명할 수 없어.”
“지금까지?”
“응.”
나는 벽 가운데 있는 박기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럼 윤정희 씨는 왜 죽은 사람이 됐어요?”
윤정희가 손을 모았다.
“제가 장부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윤상호 씨가 준 겁니까?”
“네.”
사고가 나기 직전 윤상호는 장부 원본을 아내에게 맡겼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김태식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하지만 윤상호는 그날 죽었다.
그리고 윤정희에게도 위협이 시작되었다.
“서윤까지 위험했어요.”
윤정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사라졌어요.”
“죽은 사람처럼?”
“네.”
서윤이 차갑게 말했다.
“나를 버리고.”
윤정희의 얼굴이 굳었다.
“서윤아.”
“사실이잖아.”
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윤정희의 말이 이해되었다.
서윤이 평생 엄마라고 부르지 못했던 사람.
윤정희는 딸을 살리기 위해 사라졌지만 어린 서윤에게 그것은 버림받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럼 서윤은 누가 키웠어?”
“이모.”
서윤이 말했다.
“한정희 씨가.”
모든 것이 한 줄로 이어졌다.
비 오는 날 오후 다섯 시마다 저수지에 앉아 있던 여자.
한정희.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윤정희 씨가 나타나는지 보고 있었던 거군요.”
“처음에는요.”
윤정희가 말했다.
“우리는 매년 8월 17일 오후 다섯 시에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왜 하필 다섯 시죠?”
“상호 씨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정희 씨에게 전화한 시간이었어요.”
한정희는 매년 그 시간에 저수지로 나갔다.
혹시 윤정희가 돌아올까 봐.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비 오는 날마다 나가기 시작했다.
“왜요?”
“박기현이 사람을 붙였다는 걸 알았거든요.”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서윤이 설명했다.
“이모가 일부러 눈에 띈 거야. 엄마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처럼.”
“미끼가 된 거야?”
“응.”
등골이 서늘했다.
스물세 해의 기다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한 사람을 숨기기 위한 연기였다.
“그럼 우리가 한정희 씨를 취재한 것도…….”
서윤이 고개를 숙였다.
“우연이 아니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만든 거야?”
“응.”
“왜?”
“박기현을 끌어내려고.”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정말 허탈한 웃음이었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용당했네.”
“미정아.”
“대학에서 만난 것도, 출판사에서 같이 일한 것도, 그 기획도, 한정희 씨 취재도.”
“아니야.”
“뭐가 아니야!”
“처음은 그랬어.”
서윤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끝까지 그렇지는 않았어.”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서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못 믿어도 돼.”
그 말이 더 아팠다.
“그날 말하려고 했어.”
“십칠 년 전?”
“응.”
“그리고?”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왔어.”
나는 녹음 속 내 목소리를 떠올렸다.
분명 나는 저수지에 갔다.
“그런데 왜 기억이 없어?”
서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붙은 사진 하나를 떼어 내 내 앞에 놓았다.
십칠 년 전 저수지 사진이었다.
빗속에서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서윤.
나.
그리고 한 남자.
사진이 흐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사람이 박기현이야?”
“아니.”
“그럼?”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남자의 체격과 옆얼굴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누구야?”
내가 다시 물었다.
서윤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네가 십칠 년 동안 매년 제사를 지낸 사람.”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
“미정아.”
“말도 안 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넘어졌다.
“우리 아버지는 그때 이미 죽었어.”
“그렇게 알고 있었지.”
“내가 장례를 치렀어.”
“알아.”
“내 손으로 영정사진도 들었어.”
서윤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 관 안에 네 아버지는 없었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2007년 겨울 산에서 실족해 숨진 것으로 처리되었다.
시신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신원 확인은 소지품과 치과기록으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나는 직접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그러면…….”
서윤이 말했다.
“네 아버지는 적어도 2009년 8월 3일까지 살아 있었어.”
십칠 년 전.
저수지.
내가 잃어버린 한 시간.
그리고 살아 있었던 아버지.
“그날 아버지가 나를 만났어?”
“응.”
“왜?”
서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를 데려가려고.”
“어디로?”
“도망치려고.”
“누구한테서?”
서윤이 벽 가운데 붙은 박기현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박기현에게서.”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기억의 가장자리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비.
서윤의 울음.
자동차 전조등.
아버지의 목소리.
‘미정아, 뛰어.’
그리고—
큰 충격음.
나는 비틀거렸다.
서윤이 나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밀어내지 못했다.
“기억나.”
내가 중얼거렸다.
“뭐가?”
“차.”
서윤의 얼굴이 굳었다.
“검은 차가 있었어.”
기억이 파편처럼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서윤이 소리쳤다.
누군가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가 나를 밀었다.
나는 넘어졌다.
머리를 돌에 부딪쳤다.
그다음은 어둠.
“그날…… 누가 운전했어?”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기현?”
침묵.
“말해.”
“아니야.”
“그럼 누구야?”
그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우리 셋이 동시에 창문을 바라보았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췄다.
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설마.”
윤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내렸다.
지하 창고에서 나를 찾던 바로 그 남자였다.
그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대문 앞에 섰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잠시 뒤 내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받지 마.”
세 번째.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미정 씨.”
창밖의 남자가 우리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기억이 좀 돌아오셨습니까?”
“당신 누구야?”
남자가 웃었다.
“저를 기억하실 줄 알았는데.”
“누구냐고.”
잠시 침묵.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그날 운전했던 사람입니다.”
손에서 전화가 미끄러질 뻔했다.
“당신이…….”
“하지만 한 가지는 바로잡아야겠군요.”
남자가 말했다.
“제가 당신을 치려고 한 건 아닙니다.”
“무슨 말이야?”
“그 차가 노린 사람은 따로 있었어요.”
나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의 다음 말이 들렸다.
“당신 아버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구였는데?”
남자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윤서윤.”
나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왜 서윤을 죽이려고 했어?”
남자가 낮게 웃었다.
“그건 서윤 씨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무슨 뜻이야?”
“왜 자신이 죽어야 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니까.”
전화가 끊겼다.
밖의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
곧 굵어졌다.
나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서윤은 창밖만 보고 있었다.
“왜 네가 표적이었어?”
대답이 없었다.
“서윤아.”
그제야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십칠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정아.”
“말해.”
서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내가 너한테 말하려던 건 네 아버지 이야기만이 아니었어.”
“또 뭐가 있었는데?”
“박기현이 왜 우리 가족을 쫓았는지.”
“왜?”
“장부 때문만은 아니었어.”
서윤이 천천히 자신의 왼쪽 소매를 걷었다.
팔 안쪽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나는 그 흉터를 알고 있었다.
대학 시절부터 있었던 것.
한 번 물었을 때 서윤은 어릴 적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화상 자국이 아니었다.
수술 흉터였다.
“이게 뭐야?”
서윤은 손끝으로 흉터를 만졌다.
“내가 여섯 살 때 수술을 받았어.”
“무슨 수술?”
서윤은 윤정희를 바라보았다.
윤정희가 눈을 감았다.
“엄마도 아주 오랫동안 몰랐어.”
“뭘?”
서윤이 말했다.
“내가 윤상호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방 안이 얼어붙었다.
“그럼…….”
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 것 같았다.
벽 가운데 박기현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박기현도 아니야.”
“그럼 누구야?”
그때 윤정희가 입을 열었다.
“미정 씨.”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서윤의 친아버지는…….”
밖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창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무언가가 방 안으로 굴러들어 왔다.
작은 검은 물체였다.
서윤이 소리쳤다.
“엎드려!”
우리는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연기가 퍼졌다.
눈이 따갑고 숨이 막혔다.
서윤이 내 손을 잡았다.
“뒤로 나가!”
우리는 부엌 쪽 뒷문으로 뛰었다.
밖은 폭우였다.
윤정희가 앞장섰다.
서윤과 나는 손을 잡고 달렸다.
십칠 년 만이었다.
그 손은 예전보다 거칠었고 차가웠다.
그러나 분명 서윤의 손이었다.
나는 달리면서 이상한 생각을 했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도.
서윤도.
어쩌면 나 자신까지.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윤!”
서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는 어둠 속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기억 하나를 완전히 되찾았다.
십칠 년 전 저수지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아버지가 내 귀에 대고 했던 말.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야 정확히 떠올랐다.
“미정아, 서윤을 지켜. 그 아이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출 뻔했다.
그 말에는 뒤가 있었다.
아버지는 분명 한마디를 더 했다.
“그 아이는 네…….”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
나는 서윤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아버지가 끝내 하지 못한 마지막 한마디.
어쩌면 그것이 이 모든 비밀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