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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귀족과 고려의 문벌귀족
다들 강남에 살고 싶어 한다. 성공한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것은 소박한 필자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본능이다. 인맥이 사회생활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사회에서 내 자식을 좋은 학교를 보내서 좋은 인맥을 만들어 주고 싶다. 이런 이유로 학군이 좋은 강남에서 살고 싶다. 강남에서 사는 사람들은 집값이 올라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집이 한 채면 어차피 강남에서 살 것이기 때문에 집값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자식들에게도 한 채 더 사주고 싶은데 비싸서 못 사주는 것이 아쉽다고 한다. 끼리 끼리 의식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려의 강남 개경도 사정은 비슷했다. 초기 고려는 외적의 침략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고려초기의 혼란이 수습되면서 평화가 찾아온다. 농업은 고려 경제의 기본이었다. 고려는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해 수리시설의 확충, 종자개량, 퇴비를 이용한 농업기술의 발달에 힘을 썼다. 정치적 안정과 농업의 발전은 고려경제를 부강하게 했다. 고려의 인구가 400만에서 500만 정도로 추산할 때 40만에서 60만의 군대를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 상황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는 송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다. 11세기부터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송나라와는 비단, 약재, 서적을 수입하고 금, 은, 인삼, 종이, 붓 등을 수출했다. 송에서 수입한 물건들의 대부분은 사치품이다. 사치품은 왕실과 개경의 귀족들에 사용했을 것이다. 전쟁은 구세력의 해체를 가져오고 평화는 구세력의 강화를 가져온다. 고려를 세운 초기의 무인들은 사라지고 그 중심을 문벌귀족이 차지했다. 문(文)벌 말 그대로 글자를 알아서 출세한 것이다. 공부를 잘 해서 시험을 보아 합격했다는 뜻이다. 고시공부 해서 판사 검사 되고 정치인 된 것이다. 공부는 환경이다. 부모가 책 보면 자식도 책을 본다. 고대사회에서 책을 볼 정도면 귀족이다. 귀족이 많았던 곳은 신라였다. 신라출신들이 시험합격율이 높았던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변화는 현직 판사를 배출한 개별 고등학교 순위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강남3구 출신자들이 주로 진학하는 대원외고를 나온 이가 58명으로 가장 많았다. 비평준화 시절 판사를 가장 많이 배출하며 최근까지 1위를 지킨 경기고(38명)를 큰 차이로 따돌렸다. 법원에서는 경기고 출신 법관들이 꾸준히 퇴직하고 있는 반면, 대원외고 출신들은 올해에만 15명이나 임용됐다.– 한겨레 신문
서울대출신부모가 많고 자식들의 합격율이 높은 강남처럼 개경은 시험에서 합격한 공부로 가문을 만든 문벌귀족이 늘어갔다. 게다가 이들은 토지도 상속을 받았다.(공음전) 강남재건축아파트 소유자 중 공무원들이 많았던 것처럼, 개경파 공무원들도 더 많은 토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불법적인 수단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권력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다는 것은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문벌귀족은 음서제도를 통해 시험을 보지 않고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현대재벌2세들 처럼 별 고생 없이 권력을 얻었다. 힘있는 자들끼리 문제는 없어 보였다. 초기에는 힘없는 자에 것을 뺏으면 되기 때문에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라이벌의 재산도 뺏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현대한국 사회는 재벌과 정치권 사법부와 언론인들이 혼인을 맺는다. 이유는 하나이다. 불안이다. 세상의 급변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고려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1960년에서 90년 초반까지 개천에서 용난다 라는 말이 있다. 요즘에는 개천에서는 미꾸라지만 난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한국사회의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경제발전의 결과로 만들어진 권력이 만들어짐에 따라 계층이동은 어려워지고 있다. 강남고등학교의 서울대진학율이 높고 서울대에서 고시합격을 하여 기존의 자본과 권력까지 가지게 되었다. 신분의 개방성이 강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신분을 이동하기 어려운 판에 고려에서는 더 했을 것이다.
“세상은 물질이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말이 있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이야기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여기 개경파 한 문벌귀족의 이야기가 있다. 이자겸이다. 이자겸의 조상 김은부는 다른 재주는 몰라도 딸들을 왕후로 만드는 재주는 뛰어난듯하다. 고려현종에게 하나도 아니고 세명이나 되는 딸을 왕후로 결혼시켰다. 외손녀가 황후가 되자 김은부의 장인 인주이씨 이허겸도 덕을 보았다. 집안이 잘되려고 했는지 이허겸의 손자 이자연은 22세에 과거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그러나 이미 쟁쟁한 문벌귀족이 있는 상황에서 공부만 잘한다고 출세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는 행운까지 따라 준 셈이다. 좋은 머리와 노력과 관계없이 얻어진 집안의 후광까지 부러울 정도로 복 많은 남자였다. 승진을 거듭한 이자연은 현종의 아들 문종에게 딸 셋을 결혼시킨다. 딸 중 하나인 인예왕후는 순종·선종·숙종·을 낳았다. 후일 순종과 선종의 왕후들도 모두 인주 이씨였다. 이시대는 고려의 황금기 였다. 뛰어난 왕이 있을 때는 처가와 외척은 긍정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문제는 뛰어난 왕이 없을 때이다.
선종의 아들 어린 헌종이 즉위하자 능력이 출중한 그의 삼촌 계림공이 즉위 1년도 안된 조카의 자리를 뺏고 왕에 자리에 선다. 그가 숙종이다. 어린조카왕과 능력뛰어난 삼촌 유명한 단종과 수양대군 스토리와 너무나 비슷하다. 이때 인주이씨는 헌종의 편에 섰고 패배했다. 숙종의 아들 예종은 인주이씨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 숙종과의 권력다툼 패배 후 재기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자겸의 딸은 아들을 낳고 그 외손자는 왕이 된다. 머리가 좋은 예종의 견제에 눈치만 보던 이자겸은 숨을 죽이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4세에 집권한 인종은 삼촌들과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자신의 할아버지 숙종이 어린 조카를 몰아 내고 왕이 된 것을 잘 아는 인종으로써는 두려움이 컷을 것이다. 인종은 두려움에 더욱더 외할아버지에게 의지한다. 이자겸은 인종의 이모들을 즉 자신의 딸들을 인종과 결혼시킨다. 외할아버지겸 장인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그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집을 의친궁이라고 이름을 지을 정도로 오만방자했다. 이자겸은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한다.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한다. 이자겸의 측근 척준경은 자신의 아들과 동생이 살해당하자 궁에 불을 지르고 인종의 신하들을 죽여버린다.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감금당한다. 왕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인종은 어차피 할아버지가 왕위를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의미없이 죽는 것 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한다. 인종의 승부수는 성공적이었다. 이자겸이 아무리 권력자라 해도 주변의 상황을 살폈을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를 그릇이 아니라는 것은 자기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겸손함을 가장하여 왕위를 반납한다. 유명한 이자겸의 난이다.
이후 이자겸은 왕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린다. 심지어 인종을 죽이려는 시도를 수 차례 할 정도였다. 절치부심하던 인종은 척준경을 사주하여 이자겸을 제거한다. 이자겸은 귀향을 당한다. 영광으로 유배되었는데 왕에게 물고기를 진상하면서‘비굴하게 살지 않겠다’ 굴비(屈非)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강한 성격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일화이다. 외척 이자겸을 과감하게 처단한 고려왕 인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인종은 재능있고 서화에 능했다고 한다. 그는 한마디로 모범생스타일 이었던듯하다. 모범생은 정해진 일 외에 새로운 일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인종은 국가재정을 절약하고 환관들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려 노력했다고 한다. 인종이 아무리 능력이 좋은 왕이라 하더라도 급부상하는 문벌귀족들을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의 권위는 이미 심각하게 추락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취약한 왕권을 위해 손잡았던 외척은 왕의 권력을 받쳐주기는커녕 왕의 권력에 독이 된 것이다. 이자겸은 어디를 봐도 역적이다. 그는 왕이 되고 싶어 한듯하다. 이것이 그를 역사에서 아주 나쁜 놈으로 보여지게 된 원인이 된듯하다.
이자겸 눈에 보이는 고려왕실은 어땠을까? 그는 왕씨성을 가진 왕들이 통치해야 할 당위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듯하다. 고려는 호족연합에서 출발한 나라이다. 왕건도 호족연합의 대표선수 정도였다. 왕권으로 치면 궁예가 더 강했을 것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공존이다. 공존은 수평적이다. 광종이 왕권강화를 했다고 하지만 수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왕의 권위는 많이 상실되었을 것이다. 이자겸은 송나라 사신 서긍의 말에 따르면 왕실을 존중했다고 한다. 그는 군대를 키우고 군인들을 우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치부는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는 고려왕실의 이용물이었다. 원칙 없이 자신의 왕권만을 강화하려는 왕실의 욕심이 부른 예정된 결과일 뿐이다. 순종 예종이 인주 이씨와 결혼한 것은 (견제 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현실적인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 듯하다. 혼란한 왕실의 상황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이자겸은 예종의 아들의 후견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동업자였던 것이다. 물론 왕은 이자겸을 동업자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위험을 걸고 왕을 세운 이자겸의 입장은 달랐다. 미련하게 충성만 하다가 대가 없이 버려지는 정쟁을 충분히 경험한 이자겸의 입장에서는 왕을 압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가 추하게 재산을 늘렸다고는 하지만 대대로 별 노력 없이 받은 문벌귀족의 땅이었을 것이다. 백성들의 땅이라고 해봐야 그리 쓸만한 땅이 있었겠는가? 별 죄의식 없이 취했을 것이다. 이자겸의 난은 이자겸의 문제만이 아닌 그를 키워주고 이용하려 했던 고려 왕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적어도 국가를 경영하는 리더십은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에 살고 싶은 나를 비롯한 한국사람들에게 너무 거창한 이야기일 것이다. 주변에서 판사사위는 강남집한채와 생활비500만원이라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결코 거창한 이야기만은 아닐 수 있다. 원칙보다는 혈연에 대한 신뢰를 가지려는 정략혼이 성행하는 한국사회의 귀족들에게 큰 교훈을 보여준다. 권력과 부는 혈연으로 지키는 것이 아닌 철학과 원칙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소통하고 살아야 한다. 지배하는 사람도 있고 지배받는 사람도 있는데, 내 희망은 이 차이가 작길 바라는 거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고 따로 사는 거다. 이런 게 오래가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잘 살겠지만 일반 국민들은 살기가 어려워진다. 권력은 높아지고 소통은 안 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와 국민이 소통이 돼야 한다.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첫댓글 환경이 좋아야 된다는 것을 살면서 많이 느끼는 편입니다.
철학과 원칙 소통으로 발전이 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