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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장 주석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부르심 (누가복음 5:1-11)
본문 기사는 시간적으로 보아 앞 장 말미에 나오는 두 가지 기적사건보다 먼저 있었던 일이며, 마태와 마가 기자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불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사실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마 4:18; 막 1:16). 마태와 마가는 제자들의 소명만 안중에 두었으므로 이 기적적 어획 기사를 논술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기자는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행하신 많은 다른 표적 중 하나로서 이 기사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앞의 책에 기록되지 않았던 것이다(요 20:30, 31).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Ⅰ. 그리스도의 설교에는 얼마나 많은 무리가 운집하였는가 ! "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를 옹위하였다(1절). 그들을 수용할 만한 집이 없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해변으로 이끌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리라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 22:17)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중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9:27). 사람들은 그 주위에 운집하였다(원뜻은 그러함). 그들은 그리스도 자신께는 다소 무례한 점이 없진 않았지만 그의 설교에는 존경을 표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한층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밀어닥쳐 압박하였기 때문이다(옹위 하다는 뜻 외에 압박 하다는 뜻도 있음:역주). 어떤 이는 관원이나 바리새인 중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은 때에 어중이떠중이로 이처럼 혼잡을 이룬 것은 예수님의 위신에 관계되는 불명예로 간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일을 자기의 명예로 생각하셨다. 민중의 영혼은 고관대작의 영혼만큼 귀중하였던 때문이다. 권문세가보다 차라리 많은 자녀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예수님께 대해서는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모이리라의 뜻도 있음)고 예언되었다(창 49:10). 그리스도께서는 대중적인 설교자였다. 그는 열 두 살에 선생들과 토론할 만큼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설흔 살이 되어서는 무식한 속인을 대상으로 설교하시기를 좋아하셨다.
무리가 온갖 외면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선한 가르침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살펴 보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밀치고 젖히고 하였다. 그들은 신적 권능과 그에 수반하는 증거에 의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말씀의 청취를 갈망하였다.
Ⅱ.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시는 데는 그 시설이 얼마나 초라하였는가 !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섰다(1절). 그가 서신 위치는 청중과 동일 평면 위치였으므로 무리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그의 말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는 무리 속에 파묻혔다. 모두가 기를 쓰고 그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며 그는 군중에게 둘러 쌓여 물 속으로 밀려 들 위험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야 했던가 ? 청중이 예수께서 설교하시기에 편리하도록 어떤 시설을 제공한 것 같지은 않다. 거기에는 배 또는 고깃배가 두 척 있었다. 그 어선은 뭍으로 끌어 놀려놓은 배로서 하나는 시몬과 안드레의 소유였고, 다른 하나는 세베데와 그의 아들들의 것이었다(2절).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육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고기 잡는 것을 보셨다(마 4:18). 그리고는 그들이 땅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셨다.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늘어놓도록 기다리셨다. 그런 뒤 그리스도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사 강단으로 빌려주기를 청하셨다. 그리고 시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사랑을 위해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셨다. 듣기에는 더 나빴을 테지만 보다 잘 보이도록 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끄시는 것은 그의 들리움에 의해서 이다(요 3:14). 지혜는 높은 곳에서 부른다(잠 8:1, 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강한 음성을 소유하셨다는 것과(그의 목소리는 죽은 자도 듣게 할만큼 참으로 강했다) 그가 자신의 편익을 원치 않으셨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는 거기에 앉으셔서 무리에게 여호와께 대한 선한 지식을 가르치셨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이 어부들을 얼마나 자상히 알고 계셨던가 ! 그들은 이전에 그와 다소 면식이 있었다. 그 대화는 요한의 세례시에 시작되었다(요 1:40, 41). 그들은 갈릴리의 가나(요 2:2)와 유대(요 4:3)에서도 그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 그리스도께 계속 시중하라는 부르심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의 소명 기사를 읽게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보다 친밀한 교제를 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은 이 때였다.
1. 그리스도는 설교를 마치자 베드로에게 다시 자기 직업에 전념하라는 분부를 내리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그 날은 안식일이 아니었으므로 강론이 끝나자 곧 그들에게 일을 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평일에 공적 예배로 소모하는 시간은 시간적으로 보아 우리에게 거의 방해가 되지 않으며, 심적으로는 우리의 세상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굉장한 촉진제가 된다. 우리가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부르심을 받은 의무에 얼마나 즐거이 종사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세상일에 대해 이중적인 축복을 받아 가지고 오며 말씀과 기도로써 우리의 세속 일을 성화시켜 가지고 오게 된다. 신앙의 행위가 우리의 세속사와 화합하도록 처리하고 우리의 세속사가 우리의 신앙 행위의 적이 되지 않도록 주선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인 동시에 의무가 된다.
2. 베드로가 설교하시는 그리스도께 배석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고기 잡는 베드로를 따라 동반하신다. 베드로는 호숫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같이 깊은 데로 가신다.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변함없는 인도자로 모시게 될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자.
3. 그리스도는 베드로와 그 배의 조업자들에게 바다에 그물을 내리도록 명령하셨다. 어부들은 밤새껏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 순종하여 그대로 행하였다(4, 5절).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1) 그들의 일은 매우 울적한 일이었다. "선생이여 우리들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나이다. 배에서 잠을 자야 마땅한 때에 수고를 하였지만 얻은 것이 없었고 헛 고통만 당하였나이다." 이 말이 설교를 못 듣는 데 대한 변명이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애착심은 너무나 깊어서 피곤한 밤을 지새우고도 단잠보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일이 더욱 원기를 북돋아 주고 새 기운을 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고기를 잡으라고 명하시자 이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어떤 직업은 딴 직업보다 더 힘들고 위험하다. 그러나 섭리는 그보다 무용하고 힘 빠지는 게 없을 것 같은 직업에도 이런 저런 소질 있는 자를 두심으로써 공동 이익을 도모하시는 것이다. 자기사업에 따라가며 아주 편안하게 풍족한 것을 버는 자들은 극도로 피로할 만치 수고하고도 자기 직업을 따르지 못하고 생계조차 잇지 못 하는 자들을 측은히 여겨야 한다. 남들은 밤새도록 안식하는 때 라반의 양떼를 지킨 야곱처럼 우리는 밤이 맞도록 수고하는 자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아무리 힘든 직업이더라도 부지런히 애쓰며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보면 훌륭하다. 이들 어부는 그와 같이 부지런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들을 자신의 총애하는 자로 택하셨다. 그들은 이와 같이 어려움을 참을 줄 아셨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 발탁되기에 접합하였다.
[3] 자기 일에 극히 부지런한 자들조차 때로는 실망을 맛본다. 그들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전 9:1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적 성공을 자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계명과 선하심에 의존하여 순전하고 근면히 의무를 수행할 것을 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의무를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4] 우리가 세상 일로 피곤하고 우리의 세속 사업으로 당혹감을 느끼게 되면 즉시 그리스도께 나아와 우리 일을 그 앞에 내놓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우리 일을 환영하시며 인식해 주실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명령에 그들은 아주 즉각적으로 복종하였다. "그렇지마는 내가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 리이다. 당신께서 이 일을 명하시고 권하시는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의 인도에 따를 때에는 성공할 수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4. 어획량은 여태껏 알려진 양을 상회하여 기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6절). 그들이 고기를 에운 것은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잡은 고기를 잃지 않았다. 잡힌 고기는 너무나 많아서 끌어올리는 데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불러도 들리지 않을 만치 멀리 떨어져 있던 동업자들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손짓하지 않을 수 없었다(7절). 그러나 어획량이 굉장함을 알리는 최대의 증거는 그들이 두 배를 고기로 가득 채웠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너무나 많이 실어서 잠기게 되었고, 고기는 다시 살아 나갈 지경이 되었다. 이와 같이 물에서 끌어올린 재산이 너무 과도하여 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는 많다. 이 배들이 각기 5,6톤에 불과하다고 가정하더라도 이 두 척의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이 싣는다면 그 양은 얼마나 막대한가 !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리스도는 육지와 바다, 바다의 파도뿐만 아니라 그 재화까지도 "지배"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셨다. 그는 자기가 단물을 발 "아래 복종시키며 특히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발아래 두시는 인자(人子)라는 것을 이렇게 보이시려고 하셨다(시 8:8).
(2) 그는 이것으로 자신이 방금 베드로의 배에서 설교하신 것을 확증시키려고 하셨다. 우리는 뭍에서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그 설교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그후의 동태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다음 행동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그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잇달아 일어난 이 기적은 그들의 믿음, 최소한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믿음만큼은 확증시켜 주었을 것이다.
(3) 그는 이로써 베드로가 배를 빌려 준 데 대해 보답하려고 하셨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전에 법궤가 오벳에돔의 집에 있을 때와 같이 친절한 접대에 대해 틀림없이 보상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값진 보상을 하는 셈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헛되이 불사르거나 문닫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말 1:10).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행한 봉사에 대한 그의 보상은 풍성하며 넘치고 넘치도록 풍성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4) 그는 이로써 그들에게 견본을 보이시려고 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자가 되어 세상에 나갈 자들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임무의 성공에 대한 견본을 보이고자 하신 것이다. 비록 한 때 어떤 특정 장소에서는 수고를 해도 얻는 게 없을지 모르나 많은 자를 그리스도께 데려 오고 복음의 그물로 많은 자를 예우는 데는 유용하리라는 것을 알리시려고 하셨다.
5. 이 기적적 어획이 베드로에게 던진 인상은 매우 현저하였다.
(1) 관계된 자들은 모두 놀랐고, 그들이 관계됨으로 인해서 더욱 놀랐다. 그 배의 어부들은 모두 고기 잡힌 것은 인하여 놀랐다(9절). 그들은 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그 일과 그 모든 경위를 음미해 보면 해볼수록 벼락을 맞았다고 할만큼 경이감에 사로잡혔다.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역시 그랬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나 안드레와는 달리 이 일 전에는 그리스도를 그다지 잘 알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그 일로 한층 더 많은 감동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그들은 딴 사람보다 이 일을 더 잘 이해하였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 바다에 정통한 노련한 어부였다. 그들은 아마 다년간 이 바다 위를 부지런히 왕래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이 바다에서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은 볼 수도 없었고 그 비슷한 일도 겪은 적이 없었다. 딴 사람이면 몰라도 그들만큼은 이번 일이 우연이라거나 한시라도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할 수가 없었기에 과소 평가할 수도 없었다. 가장 잘 알고 있던 자들이 가장 경탄하였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대단히 확실한 일로 보증하는 증거가 된다.
[2] 그들은 이 일에 이해 관계가 있었고, 이로써 혜택을 받았다.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은 이 큰 어획으로 수지 맞는 자들이 되었다. 그것은 값비싼 횡재였기에 그들을 기쁨에 들뜨게 하였고 그들의 기쁨은 그들이 신앙을 얻는 데 보조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역사 특히 은혜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때에는 그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부러 일으키게 된다.
(2) 딴 누구보다 베드로는 너무나 놀라 예수의 무릎아래 엎드렸다. 그는 자기 배의 선미에 앉았다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는 황홀경이나 무아경에 빠진 자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하고 말하였다. 그는 죄인이기에 고기의 무게로 침몰할까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배에 왕림하신 은총을 감당하지 못할 자로 생각하였고, 그의 왕림은 위로라기보다 두려운 일임직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구약에서 신의 비상한 영광과 엄위로우심이 나타나면 심히 두려워하고 떨면서 말한 자들의 경우와 동일한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자기비하와 자기 부인의 언어로서, "하나님의아들 예수여 당신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마귀들의 어투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1] 그의 고백은 정직하였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어울린다 "오 주여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지극히 선한 자라도 죄인이어서 어떤 경우에라도 그것을 고백할 준비가 갖추고 있어야 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는 기꺼이 그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데 유의하자. 죄많은 사람이 죄인을 구하려고 세상에 오신 자 말고 딴 누구에게 마음을 쏟아야 할까?
[2] 그의 추정은 실제와 다르긴 하였으나 정직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죄인이고 참으로 죄 많은 사람이라면 "주여 ! 내게로 오소서" 하든지 아니면 "나로 당신께 가게 하소서. 그러시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화를 입고 파멸합니다"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죄인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떨며 그이 진노하심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을 참작하면 베드로의 행동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죄 많음과 악함을 생각해서 갑자기 "나를 떠나소서"라고 부르짖었다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극히 친밀한 교제를 허용하시려고 의도하시는 자에게는 먼저 자기들이 그로부터 극히 멀리 떨어져 마땅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다는 짐을 명심하자. 우리는 모두 자신이 죄인임을 자인해야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떠나셔야 적당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무릎 아래 엎드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도록 기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우리를 버리시면, 구주가 죄인에게서 떠나가시면 우리에게 화로다 !
6. 그리스도는 이를 기회로 베드로에게(10절). 그리고 나서 곧 야고보와 요한에게(마 4:21) 그들을 자기 사도로 삼으실 것이며 세상에 자기 종교를 심는 도구로 삼으시겠다는 의도를 암시하신다. 그는 그들 중 누구보다 크게 놀랐던 베드로에게 "너는 이보다 큰 일을 보고 행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무서워 말라. 이 일에 놀라지 말라. 네게 이런 존귀를 베푼 후에도 내가 너에게 더 이상 해 줄 수 없을 만큼 큰 일을 베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복음의 그물로 에움으로써 취하게 되리라. 그것은 이 일보다 구속주의 권능과 네게 대한 그의 은총을 더 크게 나타내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일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될 것이며 보다 의로운 기적이 되리라."
베드로의 설교로 단 하루에 삼 천 명의 영혼이 교회에 더하게 됐을 때 고기가 굉장히 많이 잡힌 본문 기사의 예표는 풍성한 응답을 받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부란 직업에 대한 그들의 고별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항구적으로 모시기 위해 그들의 생업과 작별을 고하였다(11절). "저희는 배들을 육지에 대자 이 기적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고기를 팔 시장을 찾으러 가는 대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았다." 그들은 자신의 세상적 이익을 높이려고 급급해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이익에 부응하려고 부심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자기직업에서 여지껏 어느 때보다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미증유의 성공을 거두었을 때 모든 것을 버려 두고 그리스도를 따랐다는 것은 관찰할 만한 일이다. 재물이 많아져서 우리가 마음을 거기 기울일 유혹을 극히 많이 받을 그때에 그리스도께 봉사하기 위하여 그 재물을 버린다는 것은 감사할 만한 일이다.
문둥이를 깨끗케 하심 (누가복음 5:12-16)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한 문둥병자가 깨끗케 하심을 입음(12-14절). 이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왔었다. 여기서는 한 동네에서 있은 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일은 가버나움에서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지명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 문둥이를 성중에 있도록 용인한 것이 그 성의 관원에서 수치거리가 되는 때문이리라. 이 사람은 온 몸에 문둥병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병세가 몹시 심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죄로 인해 감염된 육신의 병을 보다 적절하게 나타내 준다. 우리는 온 몸에 문둥병 들려 정수리에서 발바닥까지 성한 데가 없는 자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배우자.
1. 우리는 우리의 영적 문둥병을 자각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그를 수소문하고 찾아서 숙지해야 한다. 복음이 그리스도께 대해 가르쳐 준 발견을 가장 환영할 만한 발견으로 간주해야 한다.
(2) 예수님을 보고 엎드린 문둥병자처럼 우리도 그 앞에 스스로를 낮춰야 한다. 우리는 죄에 감염된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그 사실을 깨닫고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쳐든 낯을 붉혀야 한다.
(3) 우리는 죄로 불결해진 데서 깨끗함을 얻고 죄의 병에서 치유함을 받고자 간절히 소원해야 된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부적합한 자로 만든다.
(4)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능히 깨끗케 하실 수 있으시며, 우리를 깨끗케 하고도 남음이 있으시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주여 ! 내가 빌고 온 몸에 문둥병이 들어 있긴 하지만 주는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에 대해서는 의심이 있을 수 없다.
(5) 우리는 사하시는 자비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위해 간곡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엎드려 구하였다."깨끗함을 받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씨름해 볼 만한 은총으로 간주해야 한다.
(6)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선하신 의지에 맡겨야 한다. "주여, 원하시면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하신 의지에 대한 주저나 불신을 나타내는 말이라기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형편을 그의 의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신 의지에 내어 맡기고 복종시키는 말이다.
2.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께 전심할 때에는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1) 우리는 그가 매우 공손하며 기꺼이 우리 형편을 인지하려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13절)."그는 손을 내밀어 그 문둥병자에게 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요구하거나 찾는 자도 없는데 이 문둥병 걸린 세상에 찾아 오셨고 선을 행하기 위해 자기가 얼마나 낮게 굽힐 수 있는지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가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신 것은 놀라운 낮추심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는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다 큰 낮추심이 된다(히 4:15, 체휼과 댄다는 말은 같은 단어임, 역주).
(2) 우리는 그가 매우 동정심이 많아 즉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내가 조금도 의심치 않고 원하노라. 누구든지 내게 치료받고자 오면 내가 결코 그를 쫓아내지 않으리라." 그는 그들이 깨끗케 되기를 원하는 만큼 문둥병 들린 영혼을 깨끗케 하시려고 원하신다.
(3) 우리는 자신이 이 구역질나는 문둥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더라도 그가 전능하시며 우리를 치료하고 깨끗케 하실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한 마디 말씀과 한번 손대는 것이면 족하였다.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그리스도께서 "내가 원하노니 죄 사함을 받으라. 성결함을 받으라"고 말하시면 그렇게 되어진다. 그는 땅 위에서 죄를 사하실 권세와 성령을 주실 권세를 가지시기 때문이다(고전 6:11).
3. 그는 깨끗케 씻김을 받은 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14절).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를 치유하셨는가 ?
(1) 우리는 매우 겸손해야 한다(14절). "그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저를 경계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말하지 말라고 금지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그 자신의 명예가 되도록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 치유함을 받고 깨끗케 된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랑은 영원히 배제하시면서 행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우리는 아주 감사해야 하며 신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고백을 해야 한다. "가서 깨끗케 됨을 인하여 예물을 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치료한 비용을 달라고 요구치 않으시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도록 요청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시되 추호도 모세 율법을 침해하지 않으셨다.
(3) 우리는 우리 의무를 고수해야 한다. "제사장과 그를 시중하는 자들에게 가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온전하게 고치신 자를 성전에서 만났다(요 5:14). 어떤 고난 때문에 공적 규례에의 참여가 보류된 자들은 그 고난이 물러가면 그 규례를 한층 더 부지런히 지켜야 하며 그것을 보다 꾸준히 고수해야 한다.
4.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공적 유용성과 하나님과의 사적 교제. 여기에서는 이 양자가 혼합되어 서로를 더욱 빛내 주고 있다.
(1) 그리스도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시기를 어느 누구보다 즐거워하셨지만 선을 행하시기 위해서 무리 속에 많이 계셨다(15절). 문둥병자는 입을 꼭 다물어야 했지만 그 일은 숨길 수가 없었고, 예수의 소문은 더욱 더 퍼졌다. 예수께서 겸양의 베일 속에 자신을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명예는 그림자와 같아서 따라 다니는 자들에게서는 도망가고(사람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구하는 것은 영광이 아니다) 명예를 거부하고 물러나는 자에게는 따라 오는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칭찬을 적게 하면 할수록 남들이 그 사람에게 대한 칭찬을 더욱 많이 하는 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명성이 널리 퍼지는 것을 하찮은 명예로 생각하셨다. 많은 군중이 와서 자기에게 혜택받게 된 것을 보다 큰 명예로 생각하신 것이다.
[1] 그의 설교를 통해서 혜택을 입음. 무리는 그로부터 말씀도 듣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도 받고자 하여 모여 왔다.
[2] 그의 기적을 통하여 혜택을 입음. 무리는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그에게 왔다. 이런 것이 그의 말씀을 들으러 오도록 불러들였고 그의 가르치심을 확증시켰으며 마음에 들게 하였다.
(2) 공적으로 그 만큼 선을 행한 자가 없었으나 그는 경건하고 독실한 시간을 얻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16절).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이나 겉치레를 할 필요성에서 이렇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본을 세우고자 하셨다. 그는 산란한 마음과 허세를 경계시키기 위해 기도할 경우를 지정해 주실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공적 업무와 은밀한 일이 상호 침해하거나 상충하는 일이 없도록 조정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혜가 된다. 은밀한 기도는 은밀히 행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아무리 많고 또 극히 선한 상업이라고 해도 우리는 시간을 정해 두고 변함없이 그 시간을 지켜야 한다.
중풍병자의 치료 (누가복음 5:17-26)
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설교와 기적에 관한 전반적 기록이 나온다(17절).
1. 그는 어떤 날 가르치고 있었다. 그 날은 안식일이 아니었다. 안식일이라고 해도 그는 그렇게 가르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평일이었다. "엿새 동안은 네가 세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영혼과 그 행복을 위해서도 힘쓸지니라"(신 5:13).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듣는 일은 잘만 행한다면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평일에도 선한 사업이 된다. 가르치신 곳은 회당이 아니라 개인의 사가(私家)였다. 우리가 친구와 한가롭게 담소를 나누는 곳이라 해서 선한 교훈을 주고받기에 부적당한 것은 아니다.
2. 거기서 그는 가르치기도 하시고 치유도 하셨다. 그리고 주의 능력은 그들을 고치는 것이었다(h/n eivj to. iva.szai avutou,j), 그들을 고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굉장한 능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역주). 그들을 치료한다는 것은, 즉 자기가 가르친 자를 치료한다는 것은(우리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노력이 들고 능력을 발휘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들의 영혼을 치료하고 영적 질병을 치유해 주며 그들에게 새 생명과 새로운 본성을 준다는 것은 굉장한 능력으로 되는 일이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고치는 능력이 그 말씀과 함께 따라다닌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심령을 고치신다는 위로를 가지고 오셨다(4:18). 주의 능력은 말씀과 함께 하며 말씀을 바라서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함께 한다. 주의 능력은 그들을 즉각적으로 고친다(그런 사본도 있음). 이 말씀은 몸이 병든 자의 고침을 뜻하기도 한다(대개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치료받기 위해 예수님께 왔던 것이다. 병 고칠 경우가 생길 때마다 그리스도는 자기 능력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고치는 능력이 함께 있었던 때문이다.
3. 이 집회에는 신분 높은 자도 다소 참석하였다. 오히려 여느때 보다 많은 귀족이 끼여 있었던 것 같다.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 가르침을 받으려고 그 발 앞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다음 말씀(그들의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이 방금 말한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찌 그들의 심령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으로(21절). 그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께 트집을 잡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것이 그들 아닌 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상관없는 자로 곁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비나나고 고소할 건덕지를 찾아내기 위해 방관자로, 혹평가나 염탐꾼으로서 앉아 있은 것이다.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우리의 집회 한가운데에는 말씀 아래 앉아 있지 않고(sit under) 말씀 곁에 앉아 있는 자(sit by)가 부지기수이다. 그들이 듣고 있는 것은 자기들에게 보내심을 입은 사신(使信), 즉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서였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또는 율법사)들은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왔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왔던 것이다. 아마 그들은 그 시간과 장소에 만나기로 약속했을 것이다. 그것은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그의 말과 행동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합심하여 혀로 그를 치자"(렘 18:18)고 말한 자들 모양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렘 20:10). 그리스도께서는 이들 바리새인과 유대 교회의 율법 학자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고 그들이 자기를 멸시하며 올무에 걸려고 하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설교하고 병 고치는 자신의 사업을 계속하셨다.
Ⅱ. 중풍병자의 치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이 기사는 앞서 나온 두 복음서에도 많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단지 간략하게 관찰하기로 하자.
1. 이 치유 기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확신시켜 주는 교훈.
(1) 죄는 만병의 근원이며 죄의 용서는 질병의 회복이 편안히 이루어질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이다. 사람들이 병자를 그리스도께 데려 갔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아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런 뜻이다. "죄 사함은 네가 극히 귀하게 여기고 구하던 축복이다. 왜냐하면 네가 죄 사함을 받는다면 질병이 여전하다고 하더라도 자비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네 죄가 사함을 받지 못한다면 비록 질병이 낫는다고 하더라도 진노하심 가운데 있게 된다." 우리의 죄의 줄은 우리의 고난의 띠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시며 그의 병 고치심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증거였다. 병 고치는 그 사실을 증명할 의도로 하신 일이었다(24절). "인자가 비록 땅에서 낮추이신 상태로 있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 즉 복음적 술어를 빌리자면 지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죄인을 자유케 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고 믿게 하기 위하여" 그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즉시 나았다. 그리스도께서 죄 사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실 때에는 왕 중 왕의 비상대권을 요구하신다. 또 그가 그것을 잘 증명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것을 문제 삼겠다. 여기에 자기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이 든 한 사람이 있다. 한 마디 말씀으로 그 병을 즉시 낫게 한다는 것은 자연적이든 인위적 기술로든 가능하지 않다. 순전히 신적 효험이나 신의 즉각적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내가 만일 한 마디 말씀으로 그의 병을 바로 낫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죄 사할 특권이 없으며 메시야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라고 말하여라. 그러나 만일 내가 이 일을 해낸다면 너희는 내게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일은 공정한 시험대에 올려지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단 한 마디 말씀으로 그것은 결정이 나게 되었다. 그는 단지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가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고질적 질병은 즉시 치유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났다." 그들은 이 일에 속임수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병자를 데리고 온 자들은 그 병자가 전에는 완전히 불구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병자를 보는 자들은 그 병자가 이제는 완전히 건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 병자는 자기가 누워 있던 자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갈 만큼 충분한 힘이 있었던 때문이다. 우리의 구속주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극히 위안이 되는 복음이다. 이 복음의 교훈이 완전하게 입증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다음 사실에서 그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1]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생각을 아심(22절). 이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생각을 감출 줄도 알고 얼굴에 나타내지 않을 줄도 알았다. 그들은 이 때에 자기 심중을 숨기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밀히 숨어서 기다리는 자인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를 간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2]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 외에는 행할 자가 없다고 인정되는 일을 행하셨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죄를 사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노라"고 말씀하신다. 그 결과는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얼마나 무서운 악을 범했는가 ? 그들은 그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는 최선의 축복을 말했을 때 극히 참람한 말을 했다고 그를 힐난했던 것이다.
2. 이 기사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권면하는 의무.
(1) 우리는 그리스도께 구함에 있어 매우 간청하고 절박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믿음의 증거이며 그리스도를 아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며 그에게 설득력 있는 것이 된다. 이 병자의 친구 된 자들은 그를 그리스도 안에 들여놓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병자를 그리스도 안에 들여놓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병자를 그리스도 앞에 들여놓고자 하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너무나 사람으로 들어차 있어서 문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지붕의 기와를 벗기로 불쌍한 병자를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19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에서 저희 믿음을 보셨다(20절). 여기에서 그는 그들이 남기는 말씀과 행동을 가장 선하게 해석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다(또 우리가 이 기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다행한 일이다).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은 자기가 간구하는 화자를 그리스도 면전에 데려 오는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멀리서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자들에게서는 좀 다른 생각이 엿보이는 것 같다. 그들은 환자를 예수님의 면전에 데려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는 그들의 믿음이 약하다고 혹평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셨다. "너희는 어째서 집회를 이렇게 방해하느냐 ? 너희는 환자가 집밖에 있으면 내가 고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만큼 믿음이 없느냐 ?"고 그들에게 추궁하지 않으셨다. 그는 이일을 극히 선의로 해석하시사 이 일에서 그들의 믿음까지도 보셨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섬기고 있는 주님이 기꺼이 우리를 최대로 활용하려는 분이시란 사실이다.
(2) 우리가 병이 들 때면 병을 고치는 것보다 우리 죄를 용서받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건강을 위해 하나님을 찾을 때는 용서를 구하는 일로 시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3) 우리가 자비의 위로를 얻게 되는 때에는 하나님께 그 자비에 대한 찬양을 돌려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25절). 죽음을 피하는 일들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일로 영광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은 그 기적을 보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일은 그들이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일이었으며, 그들의 조상도 보시 못한 일이었다. 그 일들은 전혀 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나라에 그런 지혜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은 이분이 메시야시며 백성에게 응분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질투심 섞인 확신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메시야께 대한 그런 대우는 마지막에 가서 그들의 파멸로 나나날 것이었다. 아마 그들을 심히 두려워하게 한 것은 이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며 동시에 그들 자신에 대한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마태를 부르심 (누가복음 5:27-39)
마지막 성구를 제외한 나머지 말씀은 전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이미 나온 것이다. 본문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자연 속에서 행하신 기적 기사가 아니라 그의 은혜의 기적에 대한 설명이다. 사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에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데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된다.
Ⅰ. 그리스도께서 세리를 세관으로부터 불러 내셔서 자기 제자와 추종자가 되게 하신 것은 그의 은혜의 기적이었다(27절). 그가 가난한 어부 즉 최하층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존귀함을 허용하신 것은 그의 놀라우신 낮추심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리 곧 가장 악명 높고 평판이 나쁜 자들을 용납하신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점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낮추시고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롬 8:3 참조). 이 일로써 그는 치욕을 무릅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불쾌한 평판을 얻으셨다.
Ⅱ. 그 부르심이 유효하였고 더욱이 즉각 효력을 발생했다는 것은 그이 은혜의 기적이었다(28절).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은 흔히 거의 신앙에 기울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세리는 신앙을 위하여 세관에 있던 좋은 자리(아마 그것은 그의 밥줄이었을 것이며 거기서는 출세할 가망도 꽤 높았을 것이다)를 버리고 일어나 그리스도를 좇았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역사 하시기에 힘든 심령은 없으며 죄인이 회개하는 데에도 그리스도의 능력이 당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곤 없다.
Ⅲ. 그가 회심한 세리를 자기 가족으로 용납하셨을 뿐만 아니라 회개치 않은 세리들과 교제까지 하셨다는 것은 그의 은혜의 기적이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가 그들의 영혼에게 대해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얻으시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원대한 계획과 일치해서 이 일로도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발병하여 바야흐로 죽게 된 영혼의 의사가 되겠다고 나서신 것은 참으로 은혜의 놀라우신 기적이다(31절). 그는 직능상(office) 의원인 분이시다. 그가 병자를 특별히 주목하시며 죄인을 자기의 환자로 존중하시고, 특히 의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죄인에게 확신을 주시고 각성시켜 주신다는 것은 놀라우신 은혜의 기적이다. 그가 죄인, 극히 흉악한 죄인까지도 불러 회개케 하시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은 은혜의 기적이다(32절). 이러한 것들은 참으로 크게 기뻐해야 할 기쁜 소식인 것이다.
Ⅳ. 그가 자기와 자기 제자에게 대항하는 죄인의 반박을 그토록 인내심 깊게 참으셨다는 것은 그의 은혜의 기적이었다(30절). 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험담에 분노를 표하지 않으셨다. 그는 마땅히 분개하셔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성과 온유함으로 그들에게 답변하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반박을 기화로 자신의 노여움을 표시하시는 대신─나중에는 그렇게 하셨지만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또 다른 종류의 죄인인 불쌍한 세리에게 긍휼심을 표명하시고 그들을 격려하신 것이다.
Ⅴ. 그가 자기 제자들을 규율로 훈육시키면서도 그들의 형상을 참작하셔서 그들의 체력과 신분과 환경에 맞춰 업무량을 할당하였다는 것은 그의 은혜의 기적이었다. 그가 자기 제자들을 바리새인의 제자나 세례 요한의 제자만큼 자주 금식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은 그의 행실에 대한 오점으로서 배척되었다(33절). 그가 극력 주장하신 것은 영혼을 금식시키는 것과 죄를 억제하고 육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금휼이 제사보다 나은 만치(마 9:13) 금식과 육체적 고행보다 더 나은 것이다.
Ⅵ.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의 나중을 위해 시련을 유보해 두신 것은 그의 은혜의 기적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처음보다 나중에는 어느 정도로 시련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혼인집에 있는 손님과 같았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 혼인집 손님은 풍족하고 즐거우며 날마다 잔치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환영을 받으셨으며 제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환대를 받았다. 그 때 까지는 아직 거의 배척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이르리라"(35절). 그리스도께서 저희 마음에 슬픔을 가득 남기시고 일을 저희 손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시며 세상에다 저희에게 대한 적의와 분노를 가득 채워놓고 떠나실 때에는 저희가 금식하게 될 것이며 지금과 같이 잘 먹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었다(고전 4:11). 그때에는 그들이 지금보다 경건한 금식을 한층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섭리가 저들에게 그걸 요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저희가 금식으로 주를 섬기게 될 것이다(행 13:2).
Ⅶ.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근행을 저희 힘에 맞도록 안배하신 것은 그의 은혜의 기적이었다. 그는 새 천을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불러 내시자마자 그들에게 엄격하고 까다로운 제자됨의 도리를 부과하려고 아니 하셨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도중에 달아나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내실 때는 그들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여 블레셋의 길로는 인도하지 않으셨다(출 13:17).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추종자를 훈련시키시는 데는 점진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 가족의 기율에 따르게 하고자 하셨다.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갑자기 즉각적으로 새 술을 원하거나 즐기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묵은 술에 익숙해졌으므로 묵은 것이 낫다고 말 할 것이다.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이 방면의 길에 점차 단련되기까지는 이전의 생활 방식이 더 좋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것이다.
또 달리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잠시 경건한 근행에 익숙하게 될 시간을 주어 보라. 그러면 내 제자들도 너희 못지 않게 풍성한 경건 생활을 보여 주게 되리라. 우리는 그들에게 너무 성급한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이 말씀을 바리새인에게 주는 권면으로 해석한다. 금식을 자랑하지 말며 금식을 가지고 떠들며 과시하는 일은 삼가고 자기 제자들이 그들처럼 금식하는 표를 내지 않는다고 하여 멸시하지 말라는 훈계이다. 바리새인이 고백하는 신앙은 거품이 잘 일고 번쩍이는 새 술처럼 화려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면 누구나 "묵은 포도주가 더 낫다"고 말한다. 술잔에 담긴 묵은 포도주가 빛깔은 그다지 좋지 않으나 뱃속에서는 취기를 더 잘 돋우며 건강에 좋은 법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비록 경건의 모양은 그다지 갖고 있지 않았지만 경건의 능력은 더욱 많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