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을 돌이켜보면, 임금과 신하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준비 없이 태평스럽게 미증유의 전쟁을 맞이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어 숫제 억장이 무너진다. 일본에 대한 정보부재로 그 원인을 돌리지만, 그걸로도 설명이 잘 안 된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흔히 거론하면서 우리는 한탄을 하는데,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한 해 전 적진을 살펴보고 온 통신사들의 말만 들었더래도, 그렇게 어이없이 인구의 3분의 1이 죽는 비극은 겪었을 리가 없다.
정명가도(征明假道)니, 함께 명나라를 도모하자니 어쩌니 하여 대마도주를 중간에 내세워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자, 1590년 3월 조정에서는 마침내 통신사를 파견하게 이른다. 이 때 정사(正使)가 황윤길, 부사(副使)가 김성일, 서장관이 허성, 김성일을 따라간 무관이 황진이었다. 꼭 1년 후 1591년 3월에 이들이 돌아왔다.
정사인 황윤길은 틀림없이 병선을 많이 준비하는 걸로 보아, 왜병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했으나, 부사인 퇴계 이황의 직계 제자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풍채가 쥐새끼처럼 생겼다느니, 전쟁 준비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느니, 하면서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국사 책에 나와 있는 이야기는 대개 여기까지이다. 그리고는 곧장 당쟁 탓으로 전쟁을 대비하지 못했다고 친절하게 해석해 준다.
한국의 사학자들이 겨우 이 정도이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에 번연히 기록된 사실도 무시하고 그 원인을 이런 식으로 호도하고 있다.
동인 김성일, 서인 황윤길을 따지기 이전에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말을 듣고 김성일과 같은 동인인 서장관 허성이 호통을 쳤다.
"아니, 공은 직접 보고 와서도 엉뚱한 소리를 하오? 왜는 이미 전쟁 준비가 다 끝나 있었지 않으오!"
이어 유일한 무관(武官)으로 역시 동인인 황진(저 유명한 황희 정승의 5대손인 그는 후에 왜적과 열심히 싸워 그 공로로 충청병사가 되었다가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모든 병사, 백성과 더불어 장렬히 전사한다.)이 결연한 어조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맞소. 전쟁 준비는 끝났소. 시간만 남았을 뿐이오."
그러자 비록 문관 출신이지만, 병조참판이었던 황윤길이 보따리에 싸 왔던 괴상한 물건을 두 개 꺼냈다.
"보시오. 이것은 조총이라 하오. 새 '조'자, 라고 하여 새 잡는 총이 아니고 사람 잡는 총이오. 일본 사신 현소를 따라갔다가 오는 길에 대마도주 종의지에게 들러서 그에게 부탁하여 특별히 두 자루 얻어왔소. 이건 대단한 위력이 있소. 화살은 아무 것도 아니오. 이리 작아 보여도 쏘면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총알이 튀어나가 사람을 즉사시키오. 왜국에는 이런 총이 수십만 자루 있다고 하오. 어서 이걸 보고 우리도 조선형 조총을 만들어야 하오. 전하 통촉하옵소서. 김공, 어서 사실대로 말하시오. 나는 군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전직 병조참판이잖소. 또한 이번 일에서 나는 정사고 당신은 부사요. 당신과 같은 동인이면서도 같이 보고 온 허성과 황진도 내 말이 맞다고 하지 않소? 왜 직접 보고 듣고도 엉뚱한 소리를 하오?"
이처럼 직접 보고 온 사람 네 사람 중 당파에 관계없이 솔직히 자기 의견을 말했다. 특히 발언권은 없지만, 군사에 대해서 잘 아는 무인 황진마저 정사인 병조참판 황윤길에 동조하고, 누구보다 김성일과 친했던 서장관 허성마저 전쟁이 틀림없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에 어디 서인, 동인이 있었던가? 오직 직접 본 것에 대해, 느낀 것에 대해, 사실에 대해 평소의 친분과 관계없이 솔직히 말했을 따름이다.
문제는 김성일과 조정 대신과 선조였다.
김성일은 직접 보고도 믿지 않았거나 거짓말을 했고, 조정 대신은 누가 보아도 자기 당파의 사람 말까지 부정하는 걸로 보아 틀림없이 일본이 침략할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지만, 이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군사에 대해, 현실에 대해, 사실에 대해, 진실에 대해, 일본에 대해 거의 무지했던 조정의 대신과 선조는 직접 보고 온 사람들이 3대 1로 전쟁이 임박했음을 보고하는 데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약간의 승강이가 있었지만, 기실 여기에는 서인과 동인이 따로 없었다. 동인 중에서도 2:1로 전쟁 가능성을 주장하는데, 동인이라고 해서 전쟁 가능성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다. 비록 그 당시에 동인이 약간 우세했다고 하나, 서인이 일제히 성토하고 나섰으면, 일본을 정찰하고 온 동인 세 명 중 두 명이나 정사인 서인 황윤길을 지지했기 때문에 능히 전쟁에 대비하도록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전쟁 가능성을 심각히 고려했다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조정에서 어전회의 한 번 하고, '냉전적 사고'를 떨치고 '교류와 협력의 시대'에 걸맞게 '긍정적 사고'로 '괜히 평화 무드를 깨는 쓸데없는 짓을 하여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가슴 섬뜩한 한 현상을 본다. 사람들은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문화의 틀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전혀 다른 문화에 대한 어떤 현상을 보면, 그것을 자기 문화의 잣대로 맞추어 멋대로 '해석'하고서 그 현상을 이해했다고 본다. 본질은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자기 문화의 눈에 보이는 겉만 보고 속까지다 보았다고 착각한다. 속속들이 본질을 알았다고 확신한다. 어떻게 제대로 보고 온 사람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이 믿어 주지를 않는다.
조선은 그 당시 200년을 평화롭기 짝이 없게 살았기 때문에 군사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심지어 군사 전문가인 황윤길과 황진이 주장하는 것도 이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틀림없이 무엇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조총이란 것도 그저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다.
성리학에 의해 모든 사고가 세뇌가 되어서 오로지 명분만 알았을 뿐, 똑똑한 강자가 어리석은 약자를 보면 나무 한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산을 지나고 들을 지나면서 거대한 강이 되듯이 슬금슬금 못된 마음이 생겨 마침내 약자를 잡아먹을 생각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현실적으로 누가 강하고 약한지를 아예 몰랐다. 삼강오륜을 모르는 왜국은 당연히 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못된 자가 나쁜 짓을 하면 천벌을 받을 줄로 확신하고 아무 준비도 없이 걱정이란 걸 할 줄 몰랐다.
오죽 했으면 임진왜란 후에도 전쟁의 무서움을 그 사이에 다 잊고 애오라지 '민족적 자존심' 하나만 내걸고 삼강오륜을 모르는 사악한 오랑캐한테 절대 굴복할 수 없다고 왕년의 왜적보다 더 강해진 절대강자 청을 아직도 국경근처에서 노략질하는 왕년의 그 여진족으로 알고, 은혜를 베풀어 준 대국,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대국 명 나라를 아직도 하늘같이 떠받들며 절대 배신할 수 없다고 마음대로 '큰 소리' 치다가, 마침내 백성을 무수히 죽이고 포로로 빼앗기고 임금이 머리에 피가 나도록 바위에 찧으면서 항복을 했던 것이다(삼전도의 치욕).
조선만 그런 게 아니다. 공산권은 70년 동안 미몽에 사로잡혀 있었다. 공산당이란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어 공산국가가 실은 전혀 평등하지 않고 자유는 애초에 없어서, 무엇보다 먹을 게 없어서, 인간의 삶이 갈수록 괴로워질 따름인데도 한사코 '공산주의를 지고지선의 진리'로 확신을 했다. 그러다가 한꺼번에 붕괴되었다.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소로 변했다. 윤리와 법은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머리에 문자가 들어있지 않은 민초들은 공산주의가 현실을 지극히 단순화한 엉터리 이론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지만, 똑똑한 공산당원에게 이론으로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체제에 순응하여 열심히 '줄을 섰던' 것이다. 다행히 빵이라도 하나 더 사면 다행이었다. 5시간 줄서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다시 1591년 3월로 돌아가서, 이 때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 유성룡의 태도를 살펴보자. 현실을 보는 눈이 날카로운 그는 이미 사태를 짐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아무리 입씨름을 해 봤자, 사람들의 굳어질 대로 굳어진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본다. 그는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웅이 절실함을 깨닫는다.
그는 즉시 이순신을 떠올린다. 그라면 1년의 준비 기간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즉시 그는 행동으로 들어간다. 온갖 무리를 다해 일개 현감을 순식간에 전라좌수사로 만든다. 전라좌수사보다 전선과 군사가 두 배나 거느린 경상좌수사(박홍)나 경상우수사(원균)를 만들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조정의 반발이 너무 심해서 잘못하면 다 된 일에 재를 뿌리게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과연 이순신은 홀로 나라를 구했다.
만약 이 때 유성룡이 자기와 동문수학한 김성일의 말을 믿었으면, 신중하기 짝이 없는 그가 온갖 무리수를 다해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등용하게 뒤에서 조정했을 리가 없다. 유성룡은 통신사가 다녀온 지 불과 만 1년 1개월만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임금이 격분하여 김성일을 죽이려 하자, 즉시 나서서 현실적으로 그가 분골쇄신함이 충성을 다함이라고 하여 오히려 경상초유사로 임명하게 한다. 과연 김성일은 나가서 왜병을 물리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인다. 그래서 학봉 김성일의 후손들은 지금도 학덕이 높았던 조상을 엄청나게 존경한다.
현실로 돌아와서 2000년 11월, 황장엽이 폭탄 선언을 했다. 국가정보원에서 자기 행동과 말에 족쇄를 채운다며 결연한 어조로 비판하고 '햇볕정책'을 통박했다. 수령절대주의를 전혀 모른다고 주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에서는 발끈해서 즉시 그를 보호 대상자에서 해제했다. 그러자 정부와 친정부 세력은 일제히 한 때는 주체사상을 만든 사람으로 신처럼 받들던 세력까지 합세하여 황장엽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기 시작했다.
'시대착오적인 자'라고.
'남북 화해에 찬물을 끼얹는 자'라고.
'북한에서 권력에서 밀려나자 일신의 안위를 위해 가족까지 버린 파렴치한 자'라고.
사실 1997년 2월, 황장엽이 북한의 요원을 따돌리고 김덕홍과 자유대한으로 넘어온 일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의 제1성을 이것이었다.
"나는 전쟁을 막으러 왔소."
그러나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좀 측은하게 생각했다. 한국에서 그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을 비롯해 여당과 정부도 반신반의했다.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야당과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황장엽은 꼬장꼬장했다. 나이 일흔을 넘겼지만, 느릿느릿하지만 논리가 빈틈없었고 예나 지금이나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주체사상을 버리지 않고 한사코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그를 악용했다는 입장도 변함없다. 이것은 역으로 황장엽의 말에 신뢰성을 가져다 준다. 만약 그가 주체사상을 하루아침에 버렸다면, 오히려 그의 말이 신빙성을 잃게 될 것이다.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자의 자기 변명으로밖에 안 들릴 것이다.
북한 체제의 핵심을 차지했던 황장엽이 월남한 지 9개월만에 오히려 한국이 IMF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도 5년, 아직까지 서해교전 외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뿐이랴, 서해교전 1주년인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이 만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화해와 협력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그랬다. 다시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4강 진출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한국이 3강을 넘보는 바로 그 날, 북의 대담한 선제공격에 의해 제2차 서해교전이 백주에 벌어졌다. 압도적인 장비를 갖춘 우리 함정의 27명 전원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러나 '우발적이었다는 유감' 표명 한 번으로 '사과'로 가늠하고 그 누구도 촛불 하나 켜들고 거리에 나서지 않았다. 식량이 가고 비료가 가고 경제시찰단이 오고 핵위협이 왔다.
육이오 이후 반공정책을 고수하던 때는 한 번도 정규군이 전쟁을 도발하지는 못하고 가끔 무장 간첩을 보내어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고는 남조선의 자작극이라고 절대 보낸 일이 없다고 잡아떼던 북한이 도리어 햇볕정책으로 온갖 시혜를 다 받고는 대담하게 비록 규모는 작지만 두 번이나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확전을 두려워 해서 한국이 절대 보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들여다보고 한 대담무쌍한 짓이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황장엽의 태도는 단호하다. 한국이 속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1999년, 2000년 10년간 가장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강행한 것을 보라고 한다. 김정일이 겁쟁이라서 전쟁을 못 일으킬 뿐, 변화된 것은 전술이지 전략이 아니라고 한다. 미국과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하는 황장엽은 그 후로 사실상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몸에는 차꼬가 채워졌다. 한국에서 서해교전을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하여 북한군 내부의 강경파에 의해 저질러진 우발적인 사고일지도 모른다고 하자, 황장엽은 입의 재갈을 옆으로 밀치고 코웃음을 쳤다. 북의 의사결정구조를 전혀 모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말이라고. 북에서는 김정일의 명령 없이는 단 한 방의 총알도 남을 향해서 절대 쏘지 못한다고.
자,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객관적인 황윤길과 허성과 황진, 이 세 사람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소신 있는 김성일을 믿을 것인가? 역사를 아는 우리는 100% 황윤길과 허성과 황진을 믿을 것이다.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자,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직접 살다 온 황장엽과 김덕홍 외 무수한 탈북자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잘 정비된 평양을 구경하고 온 우리 대통령 이하 여러 정부 요인과 화려한 연회석에서 흩어진 가족을 상봉한 사람들의 말을 믿을 것인가?
1591년으로 되돌아가면, 황장엽은 그저 통신사 정도가 아니라, 풍신수길 아래서 은인자중하다가 끝내 그의 사후에 천하를 차지했던 덕천가강이 조선에 투항해서, 풍신수길의 조선침략 야욕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느 것을 믿는 사람이 많으냐에 따라, 누가 대세를 장악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역사는 전혀 달라질 것이다. 역사는 절대 두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또한 진리는 다수결과 전혀 무관하다. 만유인력을 알아챈 사람은 뉴턴 단 한 사람이었다. 2차 대전의 위험을 경고한 영국 정치인은 처칠 단 한 사람이었다.
누가 말없이 유성룡처럼 이순신 장군처럼 준비하는 사람이 없을까? 우리의 안보는 과연 북이 헛된 생각을 못할 만큼 튼튼할까, 사기가 하늘을 찌를까, 미군까지 있으니까! 급속히 사기가 떨어진 미군이지만 세계 최강의 미군이 있으니까.
굴러 들어온 복, '고급 정보의 보고' 황장엽을 햇볕정책에 대한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인식하는 한, 설령 한반도에 또 다른 전쟁은 없다고 해도 '상상한 정보'에 의존하게 되어, 한민족은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일합방, 육이오동란 당시 국제정세에 너무 어두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적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적의 의도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몰랐다. 몰라도 몰라도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북의 힘과 의도는 전혀 모른다. 오직 그들이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고 웅변하는 것을 '민족'의 이름으로 곧이곧대로 해석하거나 최대한 선의로 해석할 뿐이다. 저들을 경계하라고 하면 즉시 '냉전적 사고'를 가진 '수구보수주의자'로 '전쟁광'으로 매도된다.
오늘날 미국의 최고 대통령으로 자타가 칭송하는, 성인의 반열에까지 오른 링컨이 당시에는 평화를 버리고 '남과 북'의 전쟁을 부추기는 분열주의자요, '전쟁광'이라고 같은 북쪽 사람에게조차 무수히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다. 심지어는 최고사령관이란 작자가 전쟁터에 나가서 같은 나라끼리 싸울 수 없다며 전쟁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북부군이 연전연패했다. 케네디도 흐루시초프로부터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동서 데탕트를 깨는 '전쟁광'이라고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다.
임진왜란 전에 1년 동안 적정을 살피고 온 서인 황윤길과 동인 허성과 황진 두 사람도 그런 소리를 들었다. 외롭게 같은 당파의 두 사람마저 자기를 저버렸지만, 천만 명 앞에서도 외눈하나 깜짝이지 않을 기개로 김성일만이 소신껏 평화를 외쳤고, 전쟁을 미워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은 철석같이 '의인' 김성일의 말을 믿었다. 그러다가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은 3분의 1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게 죽었다.
링컨은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지만 적의 위협 앞에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전쟁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남북분단을 넘어 아메리카합중국의 통일을 이뤘고, 케네디도 진정한 평화주의자였지만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간교한 술책에 넘어가지 않고 전쟁을 불사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지켰다. 비록 둘 다 암살 당했지만, 누구도 그들을 '전쟁광'이요 '독재자'라고 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