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남매 중 장남으로 우리나라 남쪽 바다가 멀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보다 먼저 배운 것은 십 리 밖 바다에서 뜨는 해의 그림자가 가르쳐 준 고독이었다. 자라면서 듣게 된 주워온 아이라는 말은 그 고독의 배경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어린 내가 예뻐 어른들이 놀리는 말인 줄 나중에 알았으나 이 말에 나를 일찍 철들었고 유년기가 가기 전에 나는 이미 늙어버렸다. 누가 가르쳐 주지는 않았어도 해 뜨는 바닷가 어딘가가 내가 처음 있었던 곳이었을 거란 생각에 발걸음이 자주 그곳으로 끌렸다. 종일 바닷가를 헤매다 돌아오면 길가의 하찮은 풀뿌리에도 걸려 넘어져 울음을 터뜨리고 내 근심 깊은 태양은 서쪽 하늘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렸다.
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에 그리는 그림엔 언제나 쪽빛 바다가 일렁였고 청보라 빛 하늘 한 귀퉁이에선 서러운 태양이 떨어졌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그림에 대하여 묻곤 했으나 대답은 피식 웃는 것이었다. 그러면 난로 위에 올려둔 내 가볍고 얇은 도시락 가장자리엔 눈물 같은 한 방울 김이 맺히곤 했다. 학년이 올라가도 그림은 그대로였다. 처음으로 나의 태양과 바다에 대하여 쓴 것은 3학년 글짓기 시간이었다. 그 후로 내 글은 늘 교실의 뒷벽에 걸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선생님이 선물로 준 연필과 공책을 가지고 마당가 배나무에 올랐다. 담 너머 길게 보이는 신작로가 물길로 그려지고, 그 물길로 하얀 돛배가 올라오고, 야윈 가지에 창백한 배꽃이 미래의 내 병력을 토설하듯 하나둘 피어나면 나는 어김없이 횟배를 앓았다. 여린 영혼의 깊은 곳을 찾아 떠나는 내 순례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막내 고모가 시집가고 허전한 심리상태는 예기치 않은 신비한 체험의 순간을 맞이했다. 서울의 고모부가 내려올 때 메고 온 카메라 속 흑과 백의 세계는 선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향해야 할 기계적 미학의 꿈이요 목표가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자취를 하면서 학교 앞 사진관에서 대여해 주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차가운 금속의 셔터가 냉철하게 가르는 빛과 그늘의 경계에서 나의 학창 시절은 언제나 불투명하게 현상되기 일쑤였다. 그늘 속에 아직 숨어있는 투명한 빛을 좇아 허전한 희망의 변두리를 배회하고 있을 때 저녁의 빛처럼 내 가난한 꿈속으로 한 소녀가 들어왔다. 그녀가 내민 손에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음반 겨울 나그네가 들려있었고 나의 계절은 찬바람 속에서도 따뜻한 꽃을 피웠다.
청년기 대학에 들어가서도 음악의 꽃은 시들 줄 몰랐다. 서점보다는 오디오 가게와 음반 가게로의 출입이 잦았다. 사실 내 오디오의 여정은 어릴 적 할아버지의 축음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검은 음반의 소리 골은 장차 끝없는 오디오의 여정으로 들어가는 고난의 첫길이었다. 판소리꾼 국창 임방울의 SP판에서 한탄조가 애처롭게 흘러나오면 저녁 공기는 우리 집 지붕 위에 붉게 쌓이고, 그의 목구멍이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창백한 보름달이 하늘에 떠 있곤 했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한 시절의 절정을 보았고, 한 시절의 폐허 가장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았다. 소리를 눈으로 듣는 일이 어린 내게 의미를 초월하여 감각의 메타포로서 사진과 오디오의 무한한 세계에 눈을 뜨게 한 것이다.
내게 사진과 음악과 시는 무엇인가? 유년기 때부터 나의 눈과 귀엔 청보라 빛 필터가 끼워졌다. 세월이 흐를수록 필터의 색깔은 짙어졌다. 내게 인식되는 대상은 미래에서 과거로의 일방적인 소통의 힘을 가졌다. 나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부른다. 내가 찍는 사진 속에서 대상이 울부짖는 소리와 내가 듣는 음악에서 대상이 그리는 가련한 풍경들과 그리고 내가 쓰는 시에서 애정도 없이 무기력한 생명을 얻는 것들은 서로 대립하고 화합하고 때로는 무화되는 시공에서 조차도 미래를 향해 각각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그림자 속에서 나의 태양들은 떠오르고 태양이 흘리는 뜨거운 빛에도 차가워지는 가여운 영혼을 위해 내가 쓴 어두운 글들과, 내가 찍은 우울한 사진들과 내가 듣는 슬픈 음악을 회개한다.
- 배홍배 산문집 『내 마음의 하모니카』에서
** 아래 유툽 영상의 사진은 꿈에서도 해가 솟고 달이 뜨는 내 고향 앞바다
https://youtu.be/mZv3K9Ry6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