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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창작론 이양우 저
1. 현대시란 무엇인가?
시(詩), 말씀언(言) 곁에 절사(寺)자를 결합한 결합문자, 이가 글시자(字) 인데, 하필 이 글자를 시라는 형용의 말머리로 쓰이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아마도 짐작키에는 이럴 것같다.
시란 언어 매체를 통해서 고요속에 몰입하는 형태문학이라는 뜻 일 것같다.
정막함의 길은 바로 시이다. 시란 그러므로 깨우침의 무한한 연상작용에서 일어나는 도량인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없이 논의되어 온 것이다.
진리란 하나라고 하지만 그 의미를 헤아리기란 깨알 만한 존재 하나라도 수많은 갈래로 이어지고 결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언어적 의미적 추적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궁국적으로 인간의 고뇌의 한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시란 무엇이냐고 토의를 한다해도 이것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본분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 한다 손 쳐도 계속해서 추리해야만 옳은 것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속성을 추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측면을 설명해 주는 이해의 역할성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시의 길은 등불처럼 밝아지는 것이다.
어찌보면 까다롭고, 황당하기도 한 도정이다.
어쩌커나 시의 근원은 우주자연의 본바탕위에 있고 그 본질은 자연 존재의 생명에 있는 것이다. 이 시적 인간적 생명 카테고리라는 것은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판을 놓고 따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로 생각으로 설명하고 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해명불가한 분석 불가한 존재라는 것일 따름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의 정의(定義)를 내린다는 것은 소경이 코키리 코를 만지고 이렇더라 하는 격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시를 말한다는 것은 誤謬의 誤意에 이른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어트도 다음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해나 <달과 같이 저렇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자체를 말하려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노릇이랴고,> 그렇다고 이 자체를 방치해 놓고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원래 시(Poetry)라고 하는 것은 영어의 희랍어에 행(行)을 만든다라는 뜻이고 만든다-창조한다. 는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독일어에서는 시(Dichtung)응축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같이 시란 의미상의 응축과 언어상의 음율을 가미한 하모니라는 점이다.
시란 말 자체가 어렵다는데서 부터 철학성의 고집을 강조하거니와 시속에는 음율적 템토리즘의 암시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시의 정의는 그만큼 어렵다고 할 것이다.
<다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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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2>
이양우(鯉洋雨)
2. 현대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시라고 하는 뜻은 그 의미상으로 고찰 할 때 서구에서는 포엠(Poem)이라고 한다든지 포에트리(Poetry) 또는 포에지(Poesie)라 지칭하는 두 갈래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좀더 쉽게 설명한다면 흔히 읽는 시의 형식을 말하는 것인 반면 포에트리라고 하는 형식어는 시 이전에 시적 감정을 포유(包有)하고 있는 상태, 즉 마음속으로 시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포에트리는 형식이전의 산물이라는 것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포엠은 이미 시로서 승화되어 형식미를 갖춘 형태인 것에 반하여 포에트리는 얼굴없는 시의 소재. 영상. 환상. 생각. 가시적 현상. 의미의 내재. 영감적 사유. 상상적 사상 등을 일컷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엠은 외형상의 형식을 다 갖춘 상태라는 정의를 내린다면 될 것이라고 본다.
포엠과 포에트리는 유형의 시와 시가 아닌 무형의 대립관계인 구별인 것이다.
우선 엣세이컬한 것과 포에틱 과의 대조적인 관계를 놓고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산문과 시의 특정한 형식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시는 단축 응축의 산물로서 탄생하여 형식을 갖춘바라면 산문은 이를 설명하는 문장구의 형태를 이룩한다.
일종의 시를 해설하는 설명문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산문의 위치는 시 그 자체를 직설하는 부분이 아니라 시를 해설 분석 의향 등을 자세하게 이해시키려는 문장으로서 가능해지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간혹 산문시라고 하는 장르가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산문시가 시를 해설하는 역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고, 시 자체로서의 입장에 엄연히 서야 하는 것이 산문과 산문시와의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긴 산문을 행만을 바꾸어서 단락단락 토막내어 시라고 한다면 그건 아이러니 일 것이다.
예로서 긴 대다나무를 잘라서 토막토막 리드미컬하게 음용(吟用)하기 알맞게 배열하고 그것을 연뿌리를 잘라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로서의 형식면에서는 시의 속성이라고는 할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 면에서는 말도 안되는 터이다.
아래는 시인 박정온(朴定溫)의 시에 형식과 본질에 대하여 설명한 문구이다.
도저히 시라고 생각 할 수 없는 잠언(箴言), 성서나 경서의 경구(警句), 어느 광고문구의 시적 형태, 이런 것들은 형식면에서는 시의 속성을 본딴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시적 본질이라고는 간주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억(金億)의 봄바람과 空超 오상순(吳相淳)의 <한잔 술>을 상고해 보면, 이 두 시인의 글 속에 형태는 뚜렷하다.
김억의 <봄바람>의 경우 7.5.7조의 정형시, 공초의 <한 잔술>에서는 7.5조의 음수율이다.
-봄바람이 휘몰아/꽃이 필 때면/다시 곰곰 옛생각/이하생략*-김억의 시이고 아래는 공초의 시인데...-
-나그네 주인이어 평안하시고/곁에 앉힌 술단지 그럴 듯 하네/한잔 가득부어서 이리 보내게/이하생략* 음수율과 정형시를 구분하여 보아도 이해가 될것이다.
시란 산문과 구별되는 점이 이런 것이고, 서구적 의미시, 즉 무형식의 시라 할지라도 그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운율적 템포, 리드미컬성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다만 정형과 음수율과 일반적 자유시적 유희시는 음악성의 주안점이 아니라 의미성의 형태를 가진 유희의 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위의 두 작품은 음악적 공통점 외에는 읽는 이에게 주는 감동이란게 별로 없다. 그렇다고 특수한 이미지도 안겨주지 못한다. 단지 감정의 어떤 형태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어체시 형태, 즉 음악적 형태시, 그런 멋에만 치중된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시의 초기형태의 양상이요 약점인 것이다.
시적인 본질이 부족한 시로는 현대시라고 하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허다한 것이다.
요즈음 문학지나 인터넷에 올려지고 있는 시들의 대부분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았는데 이것은 우리시의 원활과 폭넓은 과정을
배제하고 좁은 경지에서 낙후성을 면치 못한다는 안타까움인 것이다.
그러한 약점을 아래에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아래의 시는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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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3>
이양우(鯉洋雨)
3. 현대시란 무엇인가?
주요한(朱耀翰)의 시<불 놀이>를 살펴보면-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에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들이 어느새 피었더라마는, 사람의 봄은 또 다시 안돌아오는가,/이하생략*주요한의 <불 놀이> 이 시는 감정표현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시라기 보다는 감정표현의 산문화에 가까운 시이다.
애초부터 자기 감정의 설명문에 지나지 않는다. 시의 중요한 속성이라고 하는 부분을 망각한 것이다. 시의 중심 속성이 메타포어야 하는 데 반하여 엣세이적 호소에 지나지 않는다. 다분히 직설적 표현방법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국외의 독일시를 한번 훝어보자, 독일의 시인 칼.크로로우(1940-대 후반 시인들) 인독일의 서정시인으로 명성이 있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1950년 송가>-앞연생략--그러나 생존이라는/굼뜬 폭력 앞에서/이모저모로 꾀를 쓰면서 푹 쉴 수 밖에/달리 무슨 길이 남아 있을까,/가폿한 신발을 신고/우화의 모습을 찾아 달아난다./-중략-그러기에 또 심연이야기를 하자는 말인가.----아니야. 심연이란 없는 걸세.오히려 시련이 낫지./이의 시에서는 느릿느릿한 련과 행을 바꿔가면서 시적 메타포어를 충실히 이어간다. 이러한 작시법은 충실하고 깔끔한 방식이다. 긴 여운을 남기면서 압축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는 독일시에서 가장 전통이 있는 시맥을 이어가는 굳은 줄기이다.
이른바 자연시의 대표적 원로 오스카.뢰르게(Oskar Loerke=1884-1941). 그리고 빌헬름.레만(Wilhelm Lehmann=1882-)의 영향을 받은 시인이다.
이의 시는 다공성(多孔性) 즉 메타포어의 함축성을 내세운 시인이다.
초기에는 순수자연시와 풍경시를 썼는 데 배후에는 으례히 의미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은유(隱喩=Metapher)는 <시의 살이기도 하지만 감각중추이기도 하다>고 주장한 시인이다.
나중에는 은유를 벗어나 슈르적인 성향으로 넘어 서기도 하였으나 하여튼 이 시인의 주장 역시 메타포어는 시의 근육질이라고 할 정도로 시에 있어서의 비유적 배경의식을 중요시한 것이다.
물론 위의 주요한 님 등의 이 시인들의 정서나 문학사적 위치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나 이미지를 형성하는 메타포어적 시작에는 미숙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점에 대하여는 오늘의 우리 시인들에게 있어서도 깊히 반성해 볼 만한 문제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 나라의 시인 정지용(鄭芝溶) 님의 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시는 아래 지적해 보면 상당히 이미지스트의 결정체 메타포어를 구사하는데 충실하였다. 그 시가<백록담에서>인데 아래와 같이 설명해 보기로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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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4>
이양우(鯉洋雨)
그러면 정지용(鄭芝溶)의 시적 흐름을 살펴보자,
시인들의 정서(情抒)나 시적방식이 각기 다른 것은 어쩔 도리 없다. 그러나 시란 해박한 지식이나 폭넓은 사고를 장항하게 나열해 내는 장문(長文)이 아니라. 단축되고 미려화된 언어의 숙고된 감성의 세공품이라 할 수 있다.
시가 산문식으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다 설피 한다고 한다면 이는 시적 산문일 뿐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사상사유의 함축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지용의 시,백록담에서>를 보면/가재도 기지 않는 白鹿潭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一沫에도 白鹿潭은 흐리운다./나의 얼굴에 하나절 포긴 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祈禱조차 잊었느니라./
다음에는 오일도(吳一島)의 시이다. 제목은 가을은/가을은 /낙엽과 슬픔을/또 한아름/내 가슴에 안아다 주고/등을 넘는다.//잎잎/비에 젖어/서늘한 地殼위에/이제 나는 누웠나니./세월이여!/어느 새 날/예까지/끌어왔느뇨?/................/...........
.../가을은 낙엽과 슬픔을/또 한아름/내 가슴에 안아다 주고/등을 넘는다./위의 시 중에서 정지용의 시는 산문식으로 되어 있다. 정서나 의식이 비유를 통해서 그가 뜻 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뚜렷하다.
또한 오일도의 시 역시 단축된 메타포어를 통해 가을을 소재로 한 산문형식이 아닌 운율적 형식을 띄었다.
각기 다른 형식을 취했음에도 이들 두편의 시는 메타포의 착시(着視)를 정확히 한 작품들이다.
극히 시적이라는 뚜렷함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더 깊숙히 유의해야 할 점은 어떠한 형식만으로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일단 시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역시 시적 구조성 내용성 정신의 맥락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포에트리(poetry)는 포엠(poem)에 의해서 시적 가치로 접근된다. 여기까지 도달되어질 때 말의 뜻이 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적인 것이 시를 전달하는 과정이고,
시에 시적 내용을 포함 시켜주는 것이 포에트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명확히 말하자면 시의 내용과 형식의 일치화를 기해야 한다는 점인데, 시에 도달하려는 극치점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시적심리현상(詩的心理現狀)에 이르는 시정신적 주체가 시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이지 주체가 없는 외형상태의 껍질이 시로 형성되거나 성립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일정한 틀에다가 내용물을 맞추어 넣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우선 전제로 한 외형적 형식을 색깔적 조화를 입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시적 정신이 우선 존재하는 가운데 그 겉에 형식을 구성하는 외피질이 존재 한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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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5>
이양우(鯉洋雨)
시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기에 갖가지 구구한 해설을 안고 있는가, 참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난삽(難澁)스럽다.
그런데 먼저 내가 정의하고저 하는 바는 시란 인간의 靈驗的 미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그러나 미래 현재 과거를 분류해서 시를 해석한다면 진리적이라기 보다는 과거적인 면에서는 반성적, 현재적인 면에서는 실재성, 미래적인 면에서는 가시성, 시의 의식면에서의 세가지로 분류해 두면 어떨까 한다. 이렇게 분류해 보아도 역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나의 견해 일 따름이고, 그간에 많은 시인들께서 시론을 언급한바가 많으니 이를 열거 소개 해 봄이 옳을 것같다.
(1)공자는 고전주의적 시관(詩觀)을 말하였는데 시를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관점에서 그 효용적가치 내지 기능면을 강조한 바를 볼 수 있다.
시삼백일언폐지왈사무사(詩三百一言蔽之曰思無邪)라 일렀으니 시 삼백수를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에 사(邪)함이 없느니라. 하였다. 공평무사하고 진실전달에 아무런 흠점이 없도록 읇은 것이라는 뜻도 된다. 다분히 철학적 의식을 안고 한 표현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란 글자 그대로 공을 앞세워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공리주의는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많은 자기 공리적(功利的)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다.
(2)엘리어트는 시에 대하여 상당히 자기 만족적 표현을 금치 않았다.
그가 말하기는 시는<고급적인 산물, 창조적인 향취, 흥취의 오락>등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3)코올리지가 보는 시의 존재가치의 해설은 시를 쾌락적 전유물로 보았다.
그렇지만 이후로 낭만주의 시인들의 견해는 다분히 진지한 의식과 정서면 감정적 의식세계라는 면에서 시를 더욱 성찰의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시의 내용을 정서라는 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 했다.
<시는 최선의 정신의 가장 행복이고, 최선의 가치적 찰나의 기록이다.
(5)워즈워드는 시란 숭고한 미적 정신에서 울어나오는 인간 본질의 열망이다라고 했으며, (6)쉘리는 <시란 용광로처럼 넘쳐흐르는 뜨거운 정감의 발로라고 하였다.
(7)보들레르는 미적 운율적 창조물>.(8)E A포우도 시란 미적 가치를 중시하였으며 선한 정서에서 축출한 액기스라고 보았다.
또한 (9)E .고스는 시란 지적 창조의 순수물, 즉 최고의 지적 가치의 창조물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밖에도 시에 대한 정의는 수 없이 많다. 시인 각자가 생각하고 내리는 정의란 다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를 형식적 구성적 면만으로 정의하려는 미국 뉴욕 크리티시즘의 정체도 현대시 전체를 설명하는 명해석은 못 된다 할 것이다.
어찌튼 우아하고 심미적인 시란 시인 스스로가 참다운 경지에 들어가서 파낸 시추물이어야 한다.
형식면이든 제재면(題材面)이든 관념과 철학적 의식이든 신비와 환상을 조합한 것이든 수많은 양상을 태어나게 하는 시적 탐색정신 가운데 각자가 자기의 시적 세계를 달견하는 정서감정에서 이룩된다는 말을 곁들이고 싶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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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6>
이양우(鯉洋雨)
<나는 시인이 되어서 마음이 더 고와졌다.
비단을 짜는 직녀같아라.
시인은 죽어서도 시로 말하고
그 영혼은 멀리 죽은 후에도
만인의 가슴속에 빛으로 날아다닌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에게는 감성적 에너지원인 것이다.
어떻게 쓰는 시가 아름다운 시인가, 어떻게 쓴 시가 좋은 시인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 봤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시 해설은 주마간산격이다.
하지만 시를 쓰는 기교에 있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상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시 쓰기를 게을리하는격이나 마찮가지이다.
시를 이해 하는데 이런 문제를 제기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목적인 시를 쓴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의식으로서 여러가지 思惱와 사유를 갖고있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생각을 많이 할 수록 생각의 심도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는 법이다.
그러면서 시를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많이 쓸려며는 많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생각속에서 새로운 사유물이 탄생케 되는 것이다. 좋은 시란 그러면 무엇일까, 과연 그런 시가 있는 것일까, 나쁜 시는 어느 것일 까, 좋고 나쁘다라는 개념은 시인의 견지에서는 납득이 안가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독자의 각기 다른 취향에 따라서는 좋은 시가 존재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견해는 시인으로서의 통념상에 이치이다. 한편의 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소재(이미지), 비유(메타포어), 운율(리드미컬), 그런 것들이 가로놓여 있다. 이 가로 놓인 상태에 시를 쓰는 작자는 혼을 불어 넣는다. 이 혼이란 시인의 시정신이요. 영혼적 소산일지라. 이것을 보는 눈은 여러가지 일 수 있다. 시인 자신도 시를 보는 눈의 독자도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지고 느끼게 될 것이다. 시인은 시인대로의 독자적 감성에 산물이고, 독자는 독자대로 그 산물에 대한 感情偏入이다.
일치화가 될 수 없기에 그 느낌은 다를 수가 있다.
일정한 주제에 대하여 공감 할 수도 있고, 공감치 못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고 느끼는 시야에 따라서 마음에 들을 수도 있고 안들 수도 있다.
작자로서의 입장에서 보면 창작의도의 기교나 방법에 결과 문제이며, 독자로서는 간접체험으로서 생소한 상상력을 체험하게 된다는데 상이점이 있을 수 있다.
시인의 생각이 정위치라면 독자의 생각은 정반대 일 수도 있다.
시란 이처럼 다양성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상상력도 각자의 의식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좋은 시란 일정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시 가변적이다. 이를테면 <미당>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용>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의 시적 성격 시인적 아류를 싫커나 선호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순수시를 좋아하는이가 있는가 하면, 참여시를 좋아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슈르적인 성향을 좋아 하는이가 있는가 하면 전위적, 포스트 모던이즘을 선호하는이도 있을 것이다.
요는 시를 이해하려는 독자의 생각이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는 한편의 시를 대 할 때 그 시를 놓고 자기의 생각과 대조하려 한다. 여기서 시의 진실을 얻고자 한다거나 마음을 안식하고자 한다거나 좋은 시를 만남으로서 자신의 의식을 지탱하려는 이지적 가치로 추구하려한다.
마음에도 없는 시를 찬양 할 바는 없다. 반면에 시인은 마음에도 없는 시어를 나열해서 쓴다고 할 때 그 시는 다른이의 공감대에도 전입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잠깐 작고 선배 시인들의 작품을 두편 놓고 생각해 보자, <招魂>서럽다. 건망증이 든 都會야!/어제부터 살기조차 다----두엇대도/몇백 년 전 내 몸이 생기면 옛 꿈이나마나/마지막으로 한 번은 생각코나 말아라./서울아, 반역이 낳은 都會야!/-尙火-의 시이다.*
<序詩>죽느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아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의 시*/위의 시에서 두 시인의 작품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질적 수준이나 가치를 제외한 독작의 일반적 선호도는 여실히 분별되어 진다.
물론 상화의 유명한 시<나의 침실로>등이 있지만 그런 작품을 두고도 전연 생소하게 익히지 못하고 있는 작품들도 있는 것이다.
위의 <초혼> 역시 소월의 <초혼>에 비하여 독자는 <소월>시 만큼은 익숙치 못하고 있다.
<지용>의 <서시>는 얼마나 많은 독자층을 외워싸고 있는 가, 한 사람의 작품에서도 이와같은 많는 親疏의 차를 느끼게되는 것이다. <지용>의 작품도 마찮가지고 <소월>의 작품도 마찮가지다. <미당. 다형. 석정. 용운> 그 외 많은 시인들의 시에서도 가까히 접해지지 않는 작품들이 있게 마련이고, 낯서른 시로서 영원히 남는 것들도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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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7>
이양우(鯉洋雨)
2.현대시의 가능성과 미래상?
시인이 시를 쓰고 독자가 시를 읽는다. 당연한 논리이기는 하나, 요즘 세상에는 시인이 시를 쓰기는 하나 시를 읽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는 시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확연한 답은 나오지 않는 형편이다.
시를 기호하는 층은 시인이고 시를 탐독하는 대상이 독자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독자가 시인일 수 있고 시인이 독자 일 수가 있다.
그 인구가 급격히 많이 늘어난다는 것이 현대 시단의 기류이다.
이것이 좋은 현상이기도 하고 나쁜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나 저러나 같은 맥락의 해설이기도 하다. 하나마나 한 소리를 왜 하는가? 굳이 설명을 부연한다면 시를 읽고 느낀다든가 생각한다든가 하는 인구수에 따라서 시의 복합적 기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시작업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청중이 많으면 연사의 설파력이 강해진다는 이치와 맞먹는 얘기로서 시인이 독자가 많으면 시를 쓰는 주체나 시를읽는 대상이 다 신바람이 난다는 뜻에서 이다.
이상은 사실 글 쓰기와는 상관 없는 객설이다. 시인의 시쓰기에 열성을 올리는 것이 그리 중요하다는 뜻일까, 그렇다. 남몰래 인고하고 고독하며 참을 성 있게 시를 탐색하고 신혈을 뚫어서 광맥을 찾는다.
이것이 시인의 단련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간다. 그 길을 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때론 실성한 사람이 아닐까, 무엇이 보인다고 중얼중얼거리는 것일까,
하기야 무엇인가 보이기는 보이니까 중얼중얼거리는 것이겠지,
시인의 작업은 바로 이렇게 고단한 역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시의 가치를 발견한다. 뼈를 깎는 산고 없이는 희열의 순간을 맛 볼 수 없으리라. 나는 한마디로 좋은 시가 갖추고 있는 조건은 반드시 이런 데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현대시, 즉 한국현대시는 미래지향적으로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미래가 훤히 열리는 단계라고 보아진다.
우리시의 역사가 비록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은 것이다. 약 100년을 미달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이 기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해방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단의 많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작품 몰두에 정진하는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단히 발전 가능성이 있는 희망적 단계에 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최근에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인터넷 문학의 성행으로 가일층 문학의 패턴이 고조되고 있다. 다방면으로 폭넓은 문학사조가 확장되어지고 있는 터이다.
각 신문사 방송국 문화단체에서 문학강좌가 성행되어지고 있으며, 각급 학교에서도 문예교육이 번창하고 있다. 이런 조류는 21세기 최고의 인간생활의 향기를 드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테면 인간 정서의 함양에 좋은 터잡이가 될 것이라는 견해와 징조인 것이다.
이른바 문예대중화 물결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개화와 열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요즘의 시들은 대개가 구송(口誦)시의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곧바로 시낭송 모임을 만들 계기로 이전되었다. 요즘 각기 동아리를 만들어 시낭송의 붐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보여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한가지 경계해야 할 부분은 시를 취미영역 정도로 하려는 층들이 많다. 전문문학으로서의 단계가 아쉬운 터이다.
문학의 심오한 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시대적 갈망과 고통을 해소하는 문학적 사명이 절실한 바로서, 문학이 단순한 취미영역 정도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문학은 인간을 깨우치고 정서감정을 혁신하는데도 중요하거니와 시대변화를 앞질러 나아가는 선두 깃발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아래, 참다운 시인이란 혼불을 지펴 인간의 본질적
사고와 희망을 깨우쳐주는 역할 자가 되어야 한다.
시의 난해성을 탈피하고 시로서의 정위치에 자리잡을 수 있는 척후병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시를 쓰려는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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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8>
이양우(鯉洋雨)
3.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시를 난해하다고들 하지만 그 시의 난해성을 파괴하고 깊숙히 파들어가서 보면 실제는 난해 한 것이 아니다. 시를 쓰는 작자가 난해를 극복 하느냐 가 문제 일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과제는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를 전달하는 언어는 일상 언어에 비하여 대단히 불완전하고 난해하다. 언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고착된 존재가 아니고 유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성소멸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생성하면서 발전도 하고 때로는 후퇴하면서 사멸(死滅)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쓰는 상용어를 시로서 모두 장식된다면 시어의 의미는 아주 협소한 위치에 서게 되고 말 것이다.
시어의 존재는 무한가변성이어야 함이지, 좁은 한계에 부닥치는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시대나 위치에 따라서 가변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말이란 자체가 놓여진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기에, 그 말이 설혹 정확하다고 치더라도 어떤 실재상태 보다는 불완전 할 수가 있음으로서 "왜 시를 쓰는가,"의 문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가시성, 그것을 사실 이상의 내면에서 가령 꽃의 표정, 나무의 의식, 실로 나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서 추구해 내는 의지, 즉 상상력에 의한 메타포어를 통하여 관조세계를 읽고 걸러내어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임이 시의식의 언어인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수한 세계에 도달하는 감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한 경우, 천연현상에 대하여 은빌한 상상력, 말보다는 사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현상, 사실 보다는 진실에 도달하려는 의식세계를 동경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시의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정신의 상태를 <발레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낙조(落照), 월영(月影), 숲(森林), 바다 같은 수 많은 풍경과 환경들은 인간을 감동시키고, 사랑의 고뇌, 죽음의 환기 등도 마음의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간. 직접의 원인 된다. 이러한 감동은 일반적 감동과 다른 차원에서 엄연히 구별된다..>라 하였고, 그는 이런 반향은 어데서 오느냐 하면 우주적 감각이라는 것과 결합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시에서는 우주적 감각을 관계하여 음악적 소통에 의한 공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시적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시적 감흥이라고 한다면 이는 꿈의 상태와 같은 것이되 실제의 꿈은 아니고 우연한 착상, 동기적 영감, 불규칙하고 비항구적이며, 비의지적인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시적 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 욕구는 하나는 무목적(無目的), 사회적표현(社會的表現)으로 대별 할 수가 있다.
전자는 생명근원적 가치의 영원과 순수성에 지향함이고, 후자는 역사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시대적 정신이야말로 시정신의 형성본질이 되는 것이다.
어찌튼 시를 쓰는 이유는 각기 다를 것이다. 의향되는 대로 자기 취향에 맞는 방향을 설정 할 것이고, 목표도 다를 것이며, 생각의 지향하는 바가 각기 다른 만큼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 할 것이나, 시로서 말하고자 하는 표현세계, 즉 그 자신의 내면세계의 의식이라는 존재는 결국 시에 대하 애착이 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다는 결론이며, 이것이야 말로 인간 영혼의 본질적인 정념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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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9>
이양우(鯉洋雨)
4. 시를 쓴다는 가치와 존재의미
시를 쓴다는 것은 직업적인 것과는 무관한 관계이다. 옛 공자는 공리주의적인 가치를 띄우고 시를 쓴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인이 시를 써서 치부를 노리는 일이 될수 있을까? 시를 써서 명예를 얻고 귀족 냄새를 풍기며 살 수 있는 것일까? 어떤 통속적인 목적달성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 잘 못 선택한 직업이리라.
하기야 요즘 세상에는 시인이 되려고 돈을 들여서 억지 등단을 한다. 이런 경우야말로 공리주의적 까닭이라고 볼 것이다. 시인이 되어서 사회적 명성을 얻고자 하는 류도 역시 공리주의적 속성이다. 그런 시인이 과연 시다운 시를 쓸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저 시같은 시인같은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로되 진정코 시다운 감동에 의하여 발현된 작품을 써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진정으로 문단을 아끼려는 생각에 마음 착잡하기만 하다.
시를 썻기 때문에 출세를 했고, 남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한다라든지 하는 따위는 시적 행위에서 얻어진 결과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이 되었으니 생전에 자기 시비(詩碑)를 세운다라든지, 하는 것도 역시 공리주의적 타습을 벗어날 수 없다.
자연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울 대답은 없을 것이다.
바보같은 질문이요. 대답일 것이다.
사는 일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는 그 자체로서 틀리는 말이 아니다. 시를 쓰는 것이 살 맛이 난다고 하는 것과도 맥락이 일치 한다.
시를 쓰면 마음의 향기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시를 쓰게 되는 원인이요. 결과일 것이요. 애너지이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는 시의 효용론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령 음악을 감상하였을 때 아름다운 감흥을 일으켰다고 한다면, 그 음악은 그 사람에게 정신적 기여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음악의 횽요가치 일 것이다. 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상(無償)의 행복가치가 시였다라고 한다면 시의 효용은 설명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햇빛에 자양이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속에 정신적 자양이 들어 있는 것이라면 효용가치란 소중한 것이 아닐련가, 시를 쓰는 작업이란 일종의 쾌락현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사상이 머리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이 아닌가,.
1. 시를 쓴다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
2. 시를 쓴다는 것이 심신에 안정을 유발한다.
3. 세상을 정온(定溫)케 하는 향기가 있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기 주장과 효용론에 관한 주장이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 는 시의 효용비평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시가 띄는 의미로서 주요한 효용은 독자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동안 독자측의 어떤 습성을 만족시킬 것, 독자의 정신상태를 만족시키고 안정케하며….>-중략-/<시는 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논리성을 무시하거나 제거함으로써 그 효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시의 효용은 언어의 효용이다.>-중략-/<시는 새로운 언어의 생명을 재창조하는 효용율을 가지고 있다.>-중략-/그러기에 시는 신선한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칭한 까닭이요. 언어의 연금술 사라고 까지 그는 강조하지 않았던가, 엘리어트는 시인을 언어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김기림(金起林)의 <詩의 理解>/스티븐 펜더의 <급행열차>/괴테의 <나그네의 밤>/노자영(盧子泳)의 <내 혼이 불탈 때>를 예로 들어 그 효용의 가치를 다음에 설명하고자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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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0>
이양우(鯉洋雨)
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0>
시의 효용론을 들추자면 수 많은 이론이 나올 수가 있고, 이것을 정리하자면 각자의 의견이 분분할 것이라고 보아진다.
어차피 효용성을 짚어보고자 하는 바임에 몇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자한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거니와 효용성은 개인의 심리와 사회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극과 극이 다르듯이, 음과 양이 다르고, 막대의 방향이 다른 것이 듯, 보는 시각차에 따라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보여지는 각도가 달라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을 상반적 질의 방향이라고 하자, 하나는 현실성을 결과 코자 하는데 반하여 하나는 현실성을 거부하는 내용으로 보여진다면 그 하나는 보는 입장의 현실성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하나는 환경을 가공하여 생활을 개선해 나가며 질을 높여간다. 이를 생활예술이라고 한다. 하나는 생활을 등지고자하는 태도로 도피적 사고를 가진 예술성이다. 다분히 부정적 가치와 시대성을 달리하는시각, 또한 동시대에도 각기 다른 질적 각도를 달리하려는 예술로서의 표식( 標識)이 존재함에는 엄연한 평가로는 대조적이기도 하다.
김기림(金起林)의 시의 대조(對照)애서 보면 이러하다.
<힘차고 뚜렷한 첫 선언
"피스톤'의 캄캄한 진술(陳述) 뒤
더 서두르지도 않고 여왕처럼 미그러져
급행열차는 역을 떠난다..
머리도 수그리지 않고 모르는 척 늠름하게 그는
초라스레 밖에 다가붙은 집들과
"가스"공장과 드디어 묘지의 비석으로 인쇄된
음침한 죽음의 정글을 지나간다.
거리 저편에 망망한 시골이 펴져 있다.
거기서 속력을 내며 그는 신비를
대해에 뜬 배들의 눈부시는 무게를 갖춘다.
그가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다.
처음에는 아주 낮게 다음에는 높게
드디어 째즈처럼 미쳐서
구비마다 소리치는 기적의 노래/이하 생략.
-스티븐 스펜더의 "급행열차(Express)-"
나귀 얼굴이
별들의 나귀 젖을 마셨다.
젖빛 타래줄이 하늘 사랑방과 금빛
창살로부터 꺼지면서
"콜롬바인"을 주려 장옷을 이루었다.
바다의 나귀를 발꿈치에 채어
물줄기마다 멋대로 소리치며
신묘한 모래에 쏴 내리면----
그리고 물개들은
수염 여윈 나무 밑마다
"바벨의 탑을 쌓노라 지껄인다.
지금 드리는 것은
카인과 아벨이 또 사우는 겔까,/이하생략.
-아이더스 시트웰 "나귀의 얼굴(Ass Face)"
위의 시 두편을 독자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진솔하게 받아드려 본다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작용이 다를 것이다.
스펜더의 시에서는 힘의 역학적 감정, 서두름 없이 힘차게 역동하는 급행열차,
여왕의 이미지와 연결되고 그러다가 다시 위기감 , 무덤앞의 비석, 바다와 육박하는 전율과 시각과 청각의 조화 풍경과 기계의 리듬 등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아래의 시에서는 파도의 거센 율동, 물개들의 바벨탑을 쌓기같은 연동성, 그에 대한 시적 흐름이 리드미컬하다.
두 시인의 문명에 대한 인식 그것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이질적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애는 필자의 견해에 의한 <괴테와 노자영>의 시를 통한 시의 횽용성을 제기해 보는 각도이다.
산에 산 그 하늘
가라앉고
나무끝에
바람의
하늘거림도 안보이고
새소리 숲속에 잠기는
아아, 이윽고 이제
너도 쉬게 되리니/全篇.
-괴테 "나그네"
-이 시가 주는 언덕에 대하 정감 실제 그는 키케르하인 언덕에서 이 시를 읇었다.
이 시에서 나오는 나그네는 자기 자신이다. 고요가 극에 이르는 순간 대자연에 대한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영혼, 그 시적 세계가 의미심장하다. 상징적으로 부르고 있는 체험시,(쉬게 되리라는 죽음에 대하 예감성) 괴테는 만년에 이 시를 통하여 깊은 감회와 추억에 몰두했다. 괴테가 키케로의 오두막집에서 썼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던 것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시인은 시의 가치와 효용성을 무시 할 수 없다. 비록 벽에 써 놓은 글일지라도 이 글의 의미심장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효용성을 깊이있게 관조해 보고파 한 것이다.
슬피 울든, 가을의 노래!
낙엽 속에나, 누워있는지?
서리찬 들 위에는, 갈대가 울고
일어오는 달밤 위에는
누구를 부르는, 저 기러기 소리!
저 달이 만일 거울이라면
내가 울고 온 우리 고향의
그리운 그 땅도 비춰주련만…/全篇
-노자영 (盧子泳)"망향)"
이 시인은 본래 소설과 수필과 시를 쓴 분이다. <매일신보>에 "월하(月下 )의 꿈"을 2등 당선하여 출발 한 시인이다. 황해도 장연이 고향인데 그의 시에서 맛 볼 수 있는 점은 "망향"의 의미를 통하여 나그네의 애환을 담은 듯 한 작품이다.. "나그네"의 의미가 서로 다른 듯 한 문체이지만 자연정서에 상통부합한다는 점이다.
침묵하는 세계의 관조, 죽음으로 돌아갈 숲속, 그리고 그 실상의 그늘에 대한 잠재의식의 내면을 보여주는 괴테의 심성에서나, 달을 거울 삼아 부르는 망향사(望鄕辭)를 부른 노자영 두 사람 모두 인생귀환의 꿈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노래를 한 것이다.
시는 결론적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실체적인 면과 시인 각자의 자기 내면성찰의 함축적인 소지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시는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아리송한 영혼의 삼입음(揷入音)으로 언제나 가공되지 않은 향유같은 향취가 있다. 철자법이나 어법이나 언어학상의 원칙주의가 아니라. 언어의 해탈과정에서 얻어진 신소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를 통하여 인간심정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현실의 암담과 비통함과 돌발적인 현상들과 절말감과 악에 대항하는 선의 힘을 원천으로 발휘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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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1>
이양우(鯉洋雨)
1. 시의 분류(分類)
자유시에서는 시의 형식을 해체하자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를 규격화하지 말자는 뜻이지 필연적으로 해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동시에 시를 규격화 한다면 이는 재래시를 답습하는 과정이 되고 만다는 점이다. 시를 해체 하자는 것은 시를 산문화하자는 뜻으로 오해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 시를 한계없는 자유 이상의 무한한 의미율(意味律)로 정착하자는 뜻으로 풀이 될 수 있다.
어찌튼 시는 형식과 내용을 무마하고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편의상 시의 구분을 하자면 1.서정시(抒情詩) 2.서사시(敍事詩) 3.극시(劇詩) 등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이는 사실상 정형시(定型詩). 자유시(自由詩). 산문시(散文詩)로 구별 할 수가 있다.
이를 토대로 시의 종류와 시의 구분과 시의 유형별 장르의 선별에 대하여 설명해 보기로 한다.
원래 포에트리(Poetry)라고 하는 영어는 <그리샤말로는 행(行)한다>고 하는 의미와 <만든다(創造한다.)고 하는 두가지의 의미를 띄고 있는 것이다.
독일어에는
그러면 우선 서정시에 대하여 설명해 보기로 한다.
가, 서정시(抒情詩)란 무엇인가?
서정시란 말은 고대 희랍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리얼릭(Lyric)이라는 어원에서 유래 한 것이다.
이 말은 옛날 희랍어의 악기(樂器) 즉 칠현금(七弦琴)을 의미한다. 이 뜻을 대조하여 생각해 보면 시(詩)란 존재가 어떠한 의용어(意用語)일지를 짐작 할 수 있을 것같다.
이를테면 라이어(Lyre)에 맞추어 비롯된 연유라 하는데, 우리가 흔히 인식하기를 시라고 하는 것은 서정적감성(抒情的感性) 감정의 운율적언어, 보통 그렇게 생각한다. 시라면 서정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이 예사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로 볼 수 있겠으나, 시라고 하는 산물이 인간의 양심 순수성, 이성판별의 낭만적 기질의 물질, 대자연과 인생의 초연적 섭리, 생과 사, 생명과 질서, 선과 악의 도덕성 등등 그 서정적 폭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서정시야 말로 시를 시 아닌 것과 대별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정시란 우리가 쉽게 접하고 생각하는 보편성을 띄우게 된 반면에 극시(劇詩)나, 서사시(敍事詩)라는 존재는 산문의 진화과정에서 나온 것같은 이른바 산문의 여과에서 얻어진 산물로 느껴지게도 된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산문의 중심부에 뻘려들고 그 속에 용해되어 질 것같은 운명의 종속물질같은 성질이다.
서정이란 자기의 감정과 정서에 복합물이 아니라 직설불이라고 보아야 한다.
감정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주관적 산물인 까닭에, 서정시를 주관시(主觀詩)라고도 한다.
이런바 리얼릭(Lyric)이란 말에는 서정적이라는 뜻도 있지만 음악적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자에 언급한 칠현금론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운율(韻律)이란 뜻이 바로 여기에 근저한 것이다. 현대자유시는 서정적 운율이어야 한다라는 이론이 성립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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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2>서정시에 대하여
이양우(鯉洋雨)
현대시는 음악성을 일탈하여 의미율(意味律)을 강조하고, 이에 대하여 심오한 세계를 추구하며 창조되어지고 있는 반면에, 현대시로서의 중심자리를 찾이하고 있는 서정시로서는 시의 음악성을 배제 할 수는 없는 경지이다.
다른 현대시가 음악성을 멀리하고 있음에 반하여, 서정시란 운명적으로 타고난 음악적 리듬을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에서 음악성을 강조하는 시인들은 정형적 내재율을 포괄하는 입장에 있는 편이다.
특히 한국시, 한국형시는 기존 형식을 탈피할 길이 없다. 그것은 특이한 한국적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토속적 감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체질을 배제 한다는 모순과도 같은 것이다.
어찌튼 간에 서정시는 그 내용을 환기(喚起)하는 시인의 감정정서에 의하여 감상적 서정시(感想的抒情詩), 감격적 서정시(感激的抒情詩), 회상적 서정시(回想的抒情詩)
필자는 서정시의 분류를 위의 세가지에서 자연통찰시적 서정시(自然通察詩的抒情詩), 서사감상시적서정시
(敍事感想詩的抒情詩)를 추가하여 다섯가지로 구분하고자 한다.
감상적 서정시라고 하는 것은 순주관적 시상을 의미하고, 감격적 서정시란사부(詞賦), 찬가(讚歌), 또는 감정 정서가 고조된 감격적시를 뜻하고, 회상적 서정시는 회한이 넘치는 반성적 시, 또는 목가적(牧歌的)인 시를 의미한다. -박정온"시입문론에서"-참조
자연적통찰시란 자연의 초월적 창조를 통찰하는 신비주의시, 서사적서정시란 시대사적 배경을 토대로 한 희비쌍곡선상의 시를 의미한다.
그에 정서감정여하에 따라서 시적 배경이 달라진다. 많은 장르가 펼쳐지는 면으로 볼때 우선 대별하여, 애정시(愛情詩),자연시(自然詩), 종교시(宗敎詩),애국시(愛國詩),경축시(慶祝詩),조시(弔詩), 송가(頌歌), 찬가(讚歌),만가(輓歌),비가(悲歌), 이별가(離別歌), 신앙시(信仰詩), 철학시(哲學詩), 행복가(幸福歌), 좌절요(座折謠) 등등 많은 장르를 펴쳐나가게 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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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3>서정시에 대하여
이양우(鯉洋雨)
서정시(抒情詩)란 주정시(主情詩) 주지시(主知詩) 주의시(主意詩)로 대별된다.
이에 주정시는 감각적인 시,정조적인 시로 구분되며, 주지시의 경우에는 모더니즘의 시, 초현실주의의 시로 구분되고, 주의시의 경우는 저항의지의 시, 의지의 시로 구분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시란 운율적인 언어로서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 관념이나 정서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한 형식이다. -김용진 시인의 <삶과 언어>대학국어 총서 참조-
시란 문자로써 표현하는 문학에 소속된 한 장르로서 서정시란 주정적 시의 경우 감정의 유발에서 감각, 정서, 정조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는데 특이점이 있다. 또한 주지시의 경우 지성이 토대가 됨으로써 기지, 지혜, 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모더니즘시, 초현실주의 시, 심리주의 시 등의 지적인 시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주의시의 경우에는 의지가 본질이며 이에 구분하면 저항의 의지, 긍정과 창조의 의지를 주요내용으로 한다.
김용진 시인은 다음과 같은 시들을 예로 들어서 서정시의 감촉을 설명한다.
감각적인 시에 대하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 졸음이 흐르도다./
날카롭게 쭉 뻗는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
정조적인 시에 대하여,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하 생략-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되어도/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의 <초혼>-
모더니즘시에 대하여,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포화에 이지러진/
도룬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품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이하생략-
추일서정<김광균>-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이하생략-
거울속에나는참나와는반대이오마는/
또꽤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조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의 <거울>-
저항의지, 의지의 시의 경우를 아래에 별도로 취급해 본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이하 생략-
-유치환의<바위>-
이렇게 서정시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한 강물이 여러 지류로 흘러 각기 다른 문맥의 전답에 물줄기를 대어 주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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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4>서정시에 대하여
이양우(鯉洋雨)
일찌기 시의 시론대가(詩論大家)인 <로랑.드. 르네빌>은 시인의 시에 대하여 "독자들을 시의 식탁에 초대한다는 것은 시인의 영광일지 모른다. 그러나 독자들은 시의 <메뉴.를 모른다. 그러므로 시에 대하여 어느 것이 어느 것이고 이것이 어느 시의 종류인지를 구분치 못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시와 독자와의 거리감이다."라고 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의 시는 난해하기 그지 없다.시는 끊임없는 비난의 화살을 얻어 맞기에 급급한다. 그러나 시의 본질면에서는 아무런 비난의 대상이어서는 안된다.
난해가 시의 본분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시가 일반적 보통언어의 어법으로 쓰여진다면 시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그렇게 동조하고싶다. 시란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란 우리가 일상생활에 젖어있는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언어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달려 시의 평가가 달라진다.
음식의 식탁에도 마찮가지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어떤 음식을 조리하느냐에 따라서 그 음식의 모양새와 맛깔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시어란 마치 새로운 신비의 세계에 도달한 느낌의 언어로서 놀랍게 나타나져야 한다는데 일반적 어법과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시에는 작자의 언어능력, 언어사용의 운용방식에 따라서 시의 효과가 달라진다. 즉 비유와 상징의 특유한 어법으로 시적 효고가 거듭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래 예시(例示)하여 봄에 따른 언어는 일반적 언어임에도 시에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정을 유발케 하는 언어작용을 보여준다.
해와 하늘 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서정주<문둥이>-이 시에서는 전혀 일반적 언어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성의 언어로 태어난다. 이것이 시어의 돌출적 발상인 것이다. 현실적 언어에서 새로운 감각의 언어로 탈피하는 것이다.
단순히 시가 시로서의 노래가락이거나, 음악적 운치에 그치고 만다면 시의 생명은 다하고 마는 셈이다.
시는 정작 오늘의 사회적 결함을 메꾸고 현실에 무언가는 <시인의 개성이 시인의 작품에 등분되어>-김규동의 <지성 고독의 문학>에서-
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새로운 내일의 등불로서 오늘이라는 어두운 밤을 비쳐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시의 역활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시라고 해서 그저 서정적 감정에만 감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정시의 역활이야 말로 무궁무진한 책무를 지고 있는 밝은 등불인 것이다.
산에는 꽃 피네/꽃이 피네/갈 봄 여름 없이/꽃이 피네/
산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꽃이 좋아/산에서/사노라/산에는 꽃이 지네/꽃이 지네/-김소월의 <-산유화>-
이 시는 "진달래꽃" 과 함께 김소월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시는 산에서 피고 지는 꽃을 소재로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가 띄우고 있는 성분은 꽃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자연을 그려내어 "저만치"라는 상대적 물상과 나라는 개체를 대립시켜 놓고 보는 산과 꽃과 나라는 시각선상에 시인의 이상향(生覺)을 삼각화 하여 일정한 거리를 놓고 본 느낌을 주는 시이다. 그것이 이 시인의 한(恨)이요. 고독감이요. 시 전체에 흐르는 향수와 향토적 색채를 띄운 심성과 자연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시인 것이다.
서정시의 특징은 본래 이러하다. 문자 그대로 주관적 감정이나 정서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비유와 상징적 방법을 써서 간접적인 표현을 수식하게 된 것은 1930년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시도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에는 거의가 시적 감정을 자연 발생적 토로(吐露)의 방법으로 사용해 왔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만큼 미숙한 단계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의 시문학의 도두라진 예로는 감정의 솔직성과 시인의 시각적 감성의 심오한 내면의식의 발현은 오히려 비유를 앞잘렀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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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5>
이양우(鯉洋雨)
어느 시든 감정의 여과 없이 그려낸다는 것은 모험이다. 퇴고와 감정은 다르다. 퇴고는 내용을 점검하는 과정이고, 감정이입이란 자기 마음속에 울어나는 내면의식이다. 감정은 원인적인 것이고, 퇴고는 과정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문법적인 것은 형식적인 부분이다. 시가 일상언어에 의한 산물이기는 하나 어법적으로 일상생활용언으로 일정한 규칙에 맞춰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화산이 지하 지층을 뚫고 솟아나는 것에 비유 할 만한 산물이다. 인간의 심중(心中)에 지층을 뚫고 솟아나는 뜨거운 폭발감정 인것이다. 시의 소재는 본래 인간의 감정에 갇혀있는 산물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 주어지는 환경영향에 의한 산물이라는 점이 지하 매장물과는 다른 원자재(原資材)의 양태(樣態)라 할 것이다.
서정시에 있어서 감정적 감각적이란 시적 행위의 중심 소지(素地)이고 그 형태를 구사하는 외피질(外皮質)이 되는 격의 메타포어가 시적 구성의 양상(樣狀)인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퇴고의 과정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의 완성도 충족성에 따라서는 퇴고의 의미는 강조된다 할지라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 할 것이다.
아래 정지용(芝溶)의 작품 등을 예시해 보기로 하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밤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초롬이 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랴//
하늘에는 섞은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랴//
-정지용(鄭芝溶)의 <향수(鄕愁)>-
이 시의 각연(聯) 한 행(行) 한 구절(句節) 마다에는 진한 감정의 엑끼스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시의 한 장면 한 장면마다에 선명한 이미지는 여과되고 영감적인 구슬이 주절이 주절이 맺혀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라고 하는 강조 짙은 행으로 시의 맥을 짚어가면서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시 전체의 연속성을 유기적으로 맺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로서의 빈틈 없는 짜임새라고 보아야 한다.
시적 감정의 자연 발생적인 직감적 토로가 아니라. 지적(知的) 통제를 가하여 매끄럽게 처리되었다는 점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감정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는 매우 꼼꼼함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연 마다에 송이송이 맺힌 구슬이 듯 독특한 감각적 전환을 이어가는 시인의 달관한 표현기법이야 말로 인내력 있는 고뇌와 시인의 순수성임을 알 수가 있다.
생각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심오한 세계를 꿰뚫어보기 보다는 순수 시골 농촌의 촌가에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 현실성을 부각함으로 마음속에 비춰진 감정을 이입시킨 사실화(寫實畵) 인 것이다.
정지용의 시가 이러한 반면에 당시에도 자연감정에 사로잡힌 시를 탈피하여, 일종의 의지(意志)의 시를 개척한 모더니즘적 사고를 가미한 <이상화>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한 경우가 있다.
내가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희노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깎이는대로/억년 비정의 함묵에/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며// -유치환(柳致環)의<바다>-앞에서도 언급 한 시이기 때문에 거듭 설명이 필요치는 않다. 그러나 이 시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대에 대략 이런 과정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바이다.
시는 사상성-구조성-재료성-표현성-가치성-효용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감정이입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소화해 내야 할 문제는 있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건축물을 건조 하려 할 때 그 사용 목적에 해당하는 필요한 설계도면(구조성)이 떠 올라야 하고, 그러면 그 구성면에서 어떠한 재료를 써서 건조물은 완성 할 것이냐를 고려 해야 한다. 좋은 재료가 건축물의 견고와 미려를 감촉케 한다. 이런 연후에 사용 목적에 효과적인 것을 기대 할 수 있고, 그 가치를 평가 할 수 있듯이 시에 있어서도 이런 면밀성은 그저 무대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영감적인 사유에 의하여 축출되는 것이 시의 재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는 끊임없는 사유에 의하여 발생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서사시(敍事詩)에 대하여 비교해 생각해 보고, 다시 서정시(抒情詩)와 극시(劇詩에) 대한 비교 검토를 해보도록 하면서 서정시에 대하여 조금더 열거해 보도록 하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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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6>
이양우(鯉洋雨)
<우리는 서정시를 순한국식 서정에서만 주창하거나 고정된 서정주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세계수준에 다다를 신감각적 인식수준에 올라서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를 위해서 이지요. 우리문학이 세계화에 못 미칠 까닭이 없음에도 작금의 시학이 세계를 추월하지 못하는 안타가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시인으로서의 애타는 마음입니다.>이 말은 필자가 제3차 세계 시인대회에 참석 했을 때에 린환창(林煥彰) 대만 시인과의 환담에서 있었던 내용이다.
그런데 <오스카. 뢰르게>는 <시의 모험>이라는 시론(詩論)에서(1972/V-4/現代詩學에서 참고) 서정시(抒情詩)에 비교하여 다른 장르 즉 파괴적 시에 빗대어 말하기를 어떤 시의 <개운치 않은 감정>(das dumme geftihl)이라는 제하에, 서정시의 입장에서 볼 때 파괴성을 띈 전염성질병인 시작태(詩作態)들이 범람하는 까닭에 몇마디라는 글을 참고로 제시하면 <성서에 소금이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현대시인들의 허탈한 면에 대한 자기 심정을 토로했다. 서정주의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극히 서정적이어야 한다라는데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적인 문학이라도 서정성을 탈피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사실 서정은 시의 본질인 것이다. 서정을 바탕으로 다다이즘도 슈르도 그 여타의 시 장르도 지성주의도 주지주의도 반시주의도 서정을 도외시하고 존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정은 시의 모태반(母胎盤)과도 같은 것이라 할 것이다.
<시인이 시라는 표현을 찾아 서둘러대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세계를 그려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개운치 않은 감정이 지닌 숙명인 것이다. 즉 표현의 대상을 찾아 손을 더듬는다든지, 말을 찾아 손을 마구 내 뻗기도 하고, 율동을 생각하는가 하면 얌부스(Jambus=抑揚格)또는 뒬루스(Daktylus=揚抑抑格)같은 운율(韻律)을 끌어내기도 하고, 화음을 찾고자 애를 쓰는가 하면 음절의 조화라는 것도 응얼거려 보지요.>-오스카. 뢰르게-
이같이 <개운치 않은 감정>이라는 작시행위에서 빚어지는 현상들 즉 마음에도 없는 시어를 끄짚어내어 시를 멋지게 쓰려고 하는 시인의 감정적 괴변성(怪變性) 또는 도에 넘치는 오만한 괴벽성(怪僻性)에 대하여 일침을 가한 셈이다. 무리한 감정을 벗어나 순수서정을 일탈 할 필요는 없다. 어느시에서도 서정격(抒情格)은 깔려있어야 한다.
위에서의 헝크러진 내용들을 정리하면, 필자의 얘기는 한국시의 서정성은 세계수준에 못 미칠 까닭이 없음으로 서정주의를 기반으로 다른 시(時調詩包含)의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고, 서정시가 서정적인 것을 일탈하고 다른 각도에서 시어를 찾거나 표현, 율동, 얌부스, 뒬루스, 운율,화음, 음절의 조화 등을 꺼짚어 낼려 한다면 이는 터무니 없는 모순이요 자가당착이라는 뜻이다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므로 시는 자기감정의 강제에서 울어나오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자연스런 격양(激揚)에서 밀려오는 순수한 물결같은 것이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처마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면/서글픈 엣자취인 양 흰 눈이 나려//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이 뜰에 내리면//먼 곳의 여인의 옷벗는 소리/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이 조각이기에/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디찬 의상을 하고//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金光均의<雪夜>-
1930년대에 들어 와서는, 이 이전까지의 시와는 달라져서 감정의 자연발생적 현상을 그대로 처리하지 않고, 대체로 언어를 지적 여과를 통과하여 감정입이 재처리되어지는 과정적 경향의 시작태도를 보여주었다.
김광균은 서구적인 이미지즘의 차분한 수법으로 시를 써 온 시인이다. 그는 시의 종래에 있어 온 음악성을 배제하고 주지적인 특징을 자기 시로 살려나아갔다.
그러나 이 <설야(雪夜)>에서는 그런 면이 보이지 않고 다른 서정의 일면을 보여주는 특이한 현상이 뱔견된다.
눈의 흰 빛갈, 눈나리는 밤의 감정, "먼 곳의 여인 옷벗는 소리" 상당한 감각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짜릿한 표현이야말로 시로서의 품위있는 서정인 것이라 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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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7>
이양우(鯉洋雨)
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나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네 이마를 숙이고 빌가 하노라
님이여 서른 빛이여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나리여
우리 함께 빌때러라.
-박용철(朴龍喆)의<눈은 내리네>-
한 겨울 나리는 눈낱, 그날 그 아침에 소복히 쌓이는 눈발은 하늘의 축복속에 맞이하는 듯, 포근함에 싸이지요. 이마를 숙이고 맞대어 그리운 님을 그리는 소망, 그대의 입술을 하얀 눈발과 상견(相見)하려는 대조법(對照法)이 시인의 감성이라고 할까, 그 눈속은 하얀 마음으로 염색되고 모든 과오와 행복까지도 감싸 줄 듯한 행복감을 자아 낸다. 이 역시 지성과 서정을 가미한 작품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金永郞),<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 기다리려는 마음, 그 기다림의 보람과 지고 만 낙화의 쓸쓸함, 화려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그 진 꽃잎이 시들더니 감쪽같이 사라지는 아픔을 시인은 눈으로 보고 가슴저리게 여긴다.
그것을 보다 고고하게 높은 음절로 싯귀(詩句)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언어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면면하고 구구절절한 시인의 심성! 서정적 심화(深化)의 과정이요 결과이다.
일생동안 사랑하던 사람을 잊지 못하거나 영원한 아픔을 치유할 기다림으로 참아넘기는 심정처럼 외롭고 고독하고 애처로운 것은 없으리라.
모란을 단념하지 못함은 곧 그리움을 단념하지 못함과 같은 맥락이다. 또다시 오는 봄 그 꽃 떨기를 보려는 그리움이 소박하고 정결하고 아릿다운 감정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 그리고 솔직하고 순수한 시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서정시든 모던이즘이든 지성주의 시든 어느 시든 간에 시인의 가슴과 눈의 매혹성(魅惑性)에 달려 있다.
<모든 것에는 제 사이즈 나름의 것이 있다.-중략- 고뇌의 연금술을 자부하고 출발한 시인이건, 세상만사가 단편적인 푸로시안 맨(Protean man)의 소일(消日)을 위해 시를 쓰는 사람이건 간에 일상의 되씹는 수다스런 못지 않게 수다스런 언어의 시를 내놓게 되는데 그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시의 성공을 자축하는 자의(恣意)의 스텐다드 이다라>고 박석기(朴石基)는 언급했다. 시를 쓰는 사람들 끼리끼리, 서정파니 감성파니 하는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서정주의에도 모더니즘이 깔려있고, 휴머니즘이 깔려있고, 슈르적이거나 심지어 사인언틱한 언어묘사도 가미될 수 있다. 다만 시어는 언어의 조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의 세밀한 여과인 것이다. 서정주의는 언어의 보드라운 감미가 다양하고 짙다는 데 있다. 어느 시가 자축 할 만큼 특별히 성공적이다라는 의미는 부여 될 수가 없다.
언어 구사에서 시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각기 제 나름대로의 시적 감성에 달려 있다. 위에서의 박용철의 시에서나 김영랑의 시에서 보는 것은 각기 자기 사이즈 포인트에 맞춰 시를 쓰는 것이다.
눈(雪)을 보고 죄를 씻고자하는 사람의 시각이이 있고, 눈(雪)을 보고 사랑을 연민하는 시각도 있고, 모란을 보고 죽음을 향한 윤회를 비는바도 있고, 모란이 지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시각도 있을 수가 있다.
여타 많은 생각과 차이에 따라서 시상(詩想)의 폭은 한 사람에게서도 무한한 것이다.
이에 부언하여 <하인츠. 피온테크(크로츠부르크 태생/1925-)>가 거론한 것을 인용하면 시작의 실제(詩作實際)에 관하여 그의 서정시론(抒情詩論)은 다음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정시인이 깔끔한 사람이라면 수사학(修辭學)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대답 될 것이다. 자기 개인의 관찰이라든지, 감동적 경험을 바탕으로 노력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높은 의식상태, 그래서 시를 격조높게 쓸 것이라고 본다면 서정시를 쓰는 동기와 노력도 그런 이유와 원인에서 일 것이라>는 설명을 하였다.
예를 들자면 <폴. 발레리> 같은 시인은 운동연습을 하는 사람이 끊임없는 노력을 쌓듯 자기성찰이라고 하는 것을 방버론의 입장에서 가장 높은 의식상태까지 몰고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시인은 <진주를 캐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시인이 그저 진주를 캐는이에 안주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비유에만 좌초되고 말 것이다. 바다 밑바닥에 숨겨 있는 진주를 캐는 사변적(思辨的)인 마음을 던져 눈을 부릅뜨고 고뇌한다면 그것이 좋은 진주를 캐는 마무리가 될 지도 모른다.
진주를 캐는 일이란 배워 익힐 수가 있지만 그건 기초기술적인 면에서의 일이고, 실제 진주를 캐는 일이란 행운에 속한다고 볼 것다. 그럴랴며는 그저 한 두 편의 시를 쓴다고 해결되어 행운이 주어질까?
내가 고른 소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수 많이 잡아서 닦고 갈고 볶고 끓이고 하여서 시로서 탄생시켰다. 그런 소재를 내가 무슨 재주로 진주를 캐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남다른 사고와 집착력과 인내력 없이는 이룩 될 가망이 없을 것이다.
공상, 감동 ,형상, 추정, 잠재의식, 영혼 그 무엇에라도 찾아 헤매여야 한다는 과제는 우연히 만나는 것 같으나 끊임없는 작동속에 그 노동의 댓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평생 초동시인(初動詩人)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을 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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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8>서정시에 대하여
이양우(鯉洋雨)
서정시에 대하여
시의 본질을 말할 때 시의 정의를 내려야 하고, 시의 특징을 내려야 하고, 또한 시의 구성요소를 말해야 하고, 시어와 시의 리듬을 말해야 하고, 시의 이미지를 생각해내야하고, 시의 표현의 기교를 말해야 한다. 또한 시의 주제라는 것도 빼어놓을 수가 없는 분야이다.
거듭 말해서 시의 종류에서 시 형태상의 종류를 정형시, 자유시로 구분 할 수가 있음에 시 내용상의 종류로서 서정시를 우선 꼽는 데 서정시란 주관적 관념을 토대로 한 개인시라고도 부른다.
개인의 주관적 사상, 감정,소망 등을 표현한 시를 지칭한다. 옥스포드 사전에서 보면 서정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일반적으로 그리 길지 않게 연이나 절 속에 표현하는 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당(未堂)의 서정시관은 동양에서 서정시라 번역된 소위 리릭(Lyric)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이 리릭이 꼭 서정이라는 말이 보이는 것만은 아니며, 감정 내용을 표현 할 수 있는 양식이 된다라 하였다.
또한 <허드슨>은 서정시의 정수는 그 개성에 있지만 세계적인 위대한 서정시의 대다수는 단순히 개성적이고 특수한 것보다 인간적인 것을 구체화시켰다는 사실에 광범위하게 문학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서정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 설명한다면, 순수감정을 표현한 시라고 할 것이며, 시각적 감각적 표현의 시라고 할 것이다.
서정시든 다른 시든 시어는 함축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상과 감정에 대한 내포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메타포어와 이미지를 상징한 직관적 내면성찰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자, 아래에 몇편의 시를 열거 하자면
시몬,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시몬, 너는 좋으냐?낙엽 밟는 소리가.//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레미 구ㅡ몽(1838-1915)의 낙엽-
프랑스 출생, 다재다능한 시인으로 평론가이자 소설가인데<시몬느>의 시인으로 더 유명하며, 염세적인 딜레당트였음. 평론집으로<문학적 산보>와<철학적 산보>가 유명하다.
레미 구르몽의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인생의 자연적 생성소멸을 성찰케 된다. 이 시에서는 한마디로 구슬픈 감정의 소산이다. 직선적인 생명의 윤회사실을 화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