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秋分)은 24절기 중에 16번째로 가을의 중간이다. 춘분과 함께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다는 날이다. 춘분은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고, 추분은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농촌에서는 수확철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동부콩을 따기 시작하고, 솜을 얻으려고 햇볕에 목화를 말리고, 멍석에 붉은 고추도 말린다. 늙은 호박을 켜서 썰어 말려두기도 한다, 산에 밤송이는 벌어졌고, 도토리나 상수리가 익어서 떨어지고, 들판에서는 벼에 이삭이 올라오고, 사랑방에 키우던 가을누에는 4잠쯤 잤을까, 사각사각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작지만 합창하듯 묵직하게 들린다.
50년 전에는 9월 23일경 맞이하는 추분(秋分)때의 농촌 분위기가 이러했다. 뽕잎을 따서 봄가을로 치던 누에를 보고 자란 세대도 회갑터울을 넘어선 나이다. 하사와 병장이 부르던 [목화밭]이라는 대중가요도 있었는데, 목화를 따서 말리고 물레에 솜을 트면서 씨를 발라내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도 그 나이 또래다.
한겨울 새벽에 마시려고 머리맡에 두었던 자리끼에 살얼음이 얼던 시절 목화솜이불 속의 따스함을 기억하는가. 자급자족해야 할 물품이 많아서 삶이 고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다른 걱정은 없었던 지극히 행복하던 시절이었고, 그 시절 가을 한복판의 농촌풍경은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땀방울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풍년가를 부르며 부지런히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지난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웠고 각종 기록을 깼다. 밤기온이 25도 이상인 열대야 연속일수가 서울이 34일이란다. 기록이 깨지던 날도 24.9도였고 바로 열대야가 지속되었으니, 한반도 기후는 이미 아열대로 진입했다. 고랭지 배추가 더위에 무르고 녹아 내렸다고 하니 씁쓸하다. 고온에는 성장을 멈추고 서늘한 기온이 도래할 때까지 잠시 기다리는 식물들이 많다. 열매를 맺는 것들이 그렇다. 대표적인 것이 애호박이다. 열려도 탁구공만큼 크다가 떨어진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애호박 가격이 일시 상승한다. 물론 아열대 식물인 고추는 잘 자라고 탄저병 관리만 잘 하면 수확도 많다.
고온이 지속되면 해수면 온도가 올라가서 가두리 양식장에서는 물고기 집단폐사가 일어난다. 제주도에서 광어(넙치)가 100만마리 이상 폐사했고, 경남과 전남도 마찬가지란다. 전복 역시 25도가 넘으면 성장을 멈추고 더 높아서 28도 이상이면 죽는다고 한다. 댐이나 강에서는 녹조현상이 일어나고 물고기가 산소부족으로 떼죽음을 당한다. 사과도 ‘볕 데임’이라는 일소피해를 입는 등, 과일도 온전치 못한 날씨가 되었다. 서늘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당도를 높이고 빨간 빛깔도 나게 하는데, 사과 살을 태우듯 데우니 견딜 수 있겠는가. 폭염이 짧아도 이런 현상은 여름마다 반복되는데, 올해는 가을을 대폭 줄여놓고 늘어난 여름 날씨가 이 모든 것들을 속된 말로 작살내고 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이 말 속에는 들판에 익어가는 곡식과 차려놓은 풍성한 음식뿐만 아니라, 알맞은 날씨나 기온까지도 아우르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추석 당일 온도가 33도까지 치솟았으니, 가을 추(秋)를 여름 하(夏)로 바꿔서, 추석(秋夕)이 아니라 하석(夏夕)이라고 빗대는 말들을 많이 접했다. 노년은 더위와 더불어 따뜻(?)하게 보낼 수 있어 행복하겠다고 스스로 위로해야 할 것 같다.
추분은 말 그대로 가을을 둘로 나누는 2분점으로 더위와 추위로부터도 중간이므로 여름에 입던 반팔 옷도 좋고 얇은 긴팔 옷으로 멋을 부려도 어울리는 시기가 아니던가. 드높은 하늘구름이 여름을 몽땅 거둬들이는 시기이기에, 우리는 이 계절을 천고마비(天高馬肥)라 부른다. 애국가 3절처럼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높은 하늘에 가을이 나타날 때, 나뭇잎은 조락(凋落)의 시기가 왔음을 알고 서서히 물들 준비를 한다. 그래서 커다란 오동나무 잎도 가을에 놀라고, 파초잎도 우수에 잠긴다. 하물며 작은 은행잎이야 말할 것도 없다.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다. 들판에 메뚜기 날고, 하늘에 고추잠자리 떼 지어 날 때다. 초저녁 운치있는 귀뚜라미 울음소리 점점 커진다. 이것이 추분(秋分)의 분위기이다. 올해는 아니다.
나무가 꽃을 떨궈야 열매를 맺듯
계절은 여름을 떨궈야 가을이 온다.
올해는 가을 중간인 추분 턱밑까지도 여름이다.
가을 반 토막이 여름에 붙어서 이 계절이 짧아 아쉽다.
가을은 우리에게 넉넉함이고, 아름다움이고, 원숙함이고,
한여름의 알레그로가 지나서 찾아오는 여유로운 안단테이고,
밝은 달 아래 깊은 밤 오랜 벗에게 편지를 쓰는 계절이고,
만물이 익어가듯 사람들의 사랑도 익어가는 계절이어야 한다.
추분에는 따사로운 햇살이어야 하고,
호숫가 연잎은 여전히 푸르러야 한다.
아직은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지 않아야 하고,
추분 인사말에는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들어가야 한다.
(202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