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나주 - 한양 꼭 빼닮은 목사골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금성산을 등지고, 남쪽으로 영산강이 흐르니 도시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고, 예부터 이름난 인재가 많이 난 곳’이라고 적고 있다. 나주엔 예부터 2가지 배가 있었다. ‘먹는 배’와 ‘타는 배’. ‘먹는 배’는 그 너른 들녘에서 고단한 노동을 달게 하던 ‘꿀’이었다. 여전히 입맛을 사로잡는 과일이다. 하얀 속살은 우리 민족의 색깔이요, 고유 정서로 다가온다. 그런데 ‘타는 배’는 산업화·근대화라는 탐욕스런 가치를 만나 서럽게 퇴출됐다. 영산강에 거대한 둑이 가로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 배는 언제나 나주의 지평을 열어준 통로였다. 서남해를 호령하고, 들판 가득한 하얀 쌀로 국운을 쥐락펴락하던 나주의 권위도 배를 빼놓고 운위할 수 없다. 나주가 그 배를 다시 띄우는 작업을 시작했다. 2~3년 후면 목포~영산포 사이 70㎞ 뱃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 짜릿한 메시지 ‘생생한 나주의 역사”
나주는 마한문화의 중심지였다. 백제·신라와 독립적으로 600년 이상 존속된 마한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옹관(항아리 관)을 만들어내는 등 수준 높은 문명을 갖고 있었다. 나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러브 스토리’ 하나로 역사의 무대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놓고 있다. 후고구려왕 궁예의 명령으로 나주지역을 차지하러 온 왕건과 버들낭자가 그 주인공. 왕건은 영산강을 따라 올라와 후백제의 견훤과 ‘금성산 싸움’을 벌이게 된다. 서기 911년. 이때 왕건은 17세 연하인 버들낭자를 만나면서 열렬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나주시청 정문 앞 300m 지점에 완사천이란 샘터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왕건이 전황을 둘러보러 왔다가 한 여인한테서 ‘버들 잎 띄운 물’ 한 바가지를 얻어먹은 것이 인연이 됐다. 당시 왕건은 전투를 마치고 목이 말라, 완사천에 들러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뜻밖의 로맨스로 버들낭자는 고려2대왕 혜종이 될 무를 잉태하게 되고, 그는 나중 장화왕후가 된다.
- 역사의 중심으로 ‘목사골’ 나주
고려 성종 때인 998년 나주는 지금 광역자치 단체에 해당하는 ‘목(牧)’이 됐다. 나주·전주 등 전국 12개 주요 고을이 그랬다. ‘목사골’이 된 것이다. ‘전라도’라는 고유명사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뒤이어 병마절도사가 주둔했다. 이때부터 나주는 도시다운 도시로 하나하나 단장되기 시작했다. ‘목(牧)’의 지위는 1895년까지 누렸다. 그동안 나주는 세종 때 한글창제를 도운 신숙주, 거북선을 발명한 나대용, 천재시인 임제 등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수두룩하게 낳았다. 조선 성종 때 ‘로빈슨크루소 표류기’보다 흥미진진하다는 ‘표해록’을 지은 최부도 이곳 출신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1929)의 기폭제가 된 ‘댕기머리 사건’도 났다. 나주에서 광주로 오가는 통학기차 안에서 일본 학생이 우리 여학생 머리채를 당긴 일이 독립운동으로 발화됐다. 등교 후 바로 광주에서 불이 붙은 일본타도 시위는 한반도는 물론 북간도까지 들불처럼 번져갔다. 진원지인 죽림동에 나주역사가 보존되고 있다.
- 다시 일어서는 전라도 맏고을
나주는 조선말까지만 해도 서울 도성과 같은 사대문과 객사, 동헌 등을 고루 갖춘 전라도의 대표적인 석성(石城)이었다. 둘레가 3.7㎞, 면적은 97만 2,600여㎡가 됐다. 중세시대의 성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0~15년 사이 일제가 멋진 중세시대 도시 하나를 무참히 허물어버렸다. 1993년 남문인 남고문을 시작으로, 2006년 동문인 동점문이 복원됐고, 2010년 말 서문인 서성문이 다시 태어난다. 북문인 북망문도 2011년까지 세울 계획이다. 목사가 일을 보던 금성관(객사)도 본모습을 찾았고, 또 일제 강점기 당시 내륙 침탈의 전진 기지였던 전남 나주의 영산포 선창 일대가 ‘근대 역사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곳은 옛 영산포 선창에서 정미소까지 750m에 일본식 가옥 등이 남아 있다. 이웃에 나주의 명물 ‘홍어의 거리’가 있다. 광주 쪽인 금천·산포면 일대에 2012년까지 나주의 위상을 한 단계 올릴 명품도시 하나가 탄생한다. 면적 7,315㎡(221 만평)에 공기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한국전력공사 등 16개 기관이 들어서는 ‘빛가람 혁신도시’ 공사가 한창이다. '천년고도' 나주 - 한양 꼭 빼닮은 목사골 (신택리지, 배명재, 경향신문)
= 나주망화루/금성관/사마비/금성토평비 – 정수루 – 나주목문화관 –나주목사내아 – 서성문 – 나주향교/대성전 – 나주읍성북망문 – 심향사/건칠아미타여래좌상/석조여래좌상/나주북문외삼층석탑 – 동점문/석당간 – 남고문 – (구) 나주역 –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 영산포 등대 – 국립나주박물관 – 반남고분군 === 마산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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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금성관[羅州錦城館] 보물 제2037호 (2019.10.25.) 전남유형문화재제2호(1972)
소재지;나주시 과원동 - 조선전기 나주목사 이유인이 건립한 관청.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1603년(선조 36)에 크게 중수하였고,
1884년(고종 21)에 목사 박규동(朴奎東)이 또다시 중수하였다.
1910년 이후 민족항일기에는 건물의 일부를 개조하여 군청 청사로 사용하다가
1963년과 1976년 두 차례에 걸쳐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이 금성관에는 정문이 있었으나, 1966년나주공원에 위치한 정렬사(旌烈祠)의 정문으로 이축하였다. [羅州錦城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주 금성관은 조선시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던 객사 건물로서,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종 기록과 구조양식으로 보아 전체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중수시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정되며, 목조 가구와 세부 공포형식은 1775년과 1885년 중수시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금성관은 주심포계 양식의 요소를 채용한 익공계 공포 구성이 돋보이며, 1출목 3익공식의 공포형식은 제한된 공력으로 충분한 위계를 드러내고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변형 기법으로 볼 수 있다. 월대와 평면 및 입면 그리고 천장 등을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한 점은 금성관만의 고유성을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다. 금성관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정청과 대비되는 희귀성을 갖는다. 이 점은 부근에 위치한 나주향교 대성전이 일반적인 조선시대 향교 대성전의 맞배지붕과 달리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점과 함께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 금성관은 무엇보다 지역성에 주목하여 대표적인 지역역사문화유산이라는 점,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오랫동안 나주군청 및 시청으로 사용되면서 벽체와 바닥, 천장 등의 변형을 거치면서도 전체적인 원형을 유지하여온 역사적 건축물로서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금성관은 나주 읍치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원래 자리를 잘 지키고 있으며, 다른 객사와 뚜렷한 차별성을 띤 격조 높은 건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역사적, 건축적,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문화재정보)
** 사마비(駟馬碑) 전남문화재자료 제89호 (1984.02.29.)
-규모;높이95cm,너비35cm,두께13cm -시대;조선시대(1653년) -재료;화강암
현감 정지호(鄭之虎)가 다리를 중수하고, 그 기념으로 1653년(효종 4)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원래는 과원동 사매기(사마교의 와음인 듯함)로, 강태식 집의 담 근처에 있었던 것을 1968년 옛 나주군청 내로 옮겼다.
-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은 수도 개경을 떠나 남으로 몽진하는 도중 나주에서 10여 일 동안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현재의 ‘사매기’라고 부르는 다리를 지나가서 다리를 사마교라 칭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 현재 아무 흔적도 없으나, 옛날에는 경현리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으로도 흘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다리가 좁아 백성들이 몸으로 다리를 놓았다는 말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 현재 석비 윗부분에 ‘駟馬橋碑’라는 비명이 가로로 써 있다. 전면과 후면에 음각문이 있으나, 심하게 떨어져 나가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많다. 직사각형의 지대석에는 연화무늬가 조각되었고, 비신에는 별다른 조각은 없고, 윗부분에 이수를 올렸다.
[駟馬碑] (두산백과)
** 금성 토평비 [錦城討平碑] 전남문화재자료 제175호 (1990. 02. 24.)
소재지; 나주시 금성관길 8
- 시대;고종 35년(1895) - 규모;높이 190cm, 너비 58cm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동학농민운동 이듬해인 1895년에 세운 비가 바로 금성토평비다. 금성토평비는 본래 나주목 동헌 정문인 정수루 앞에 세워졌으나 1930년 금성관 바로 앞으로 옮겼고, 1976년에 지금의 위치인 금성관 안마당에 옮겨졌다. 안마당 한쪽에 즐비하게 서있는 각종 불망비·선정비·기념비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기념비다. 비문에는 먼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나주에까지 농민군이 들어오게 되는 과정이 기록돼 있고, 이후 유학을 장려하고 충효를 강조했던 민종렬 나주목사가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다고 써놓았다. 동학군과 관군이 나주목의 여러 곳에서 직접 맞닥뜨려 전투를 벌인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토평비는 동학혁명 당시 나주를 비롯해 호남지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전남문화재자료 제175호로 지정됐다. 비문은 나주 유림인 송사 기우만이 짓고, 송재희가 글씨를 썼다고 나와 있다. 금성토평비는 나주관아의 후손들에게는 기념비이지만 민중들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동학군의 후예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기념물일 것이다.
** 정수루 [ 正綏樓 ] 전남문화재자료 제86호 (1984.02.29.)
소재지;나주시 금성관길 13-20 - 규모; 정면 3칸, 측면 2칸, 중층누각
나주읍성 한복판에 있는 친근하고 오래된 큰 누각 하나가 시선을 끈다. 나주목 관아의 관문이었던 정수루다. 정수루에 오르면 주요 건물과 거리가 훤히 보인다. 조선 중기, 정수루 서쪽으로는 나주관아의 외동헌인 ‘제금헌’과 내동헌(현 나주목사 내아, 금학헌)이 있었고, 주변으로는 목사를 보좌하던 육방 관속들이 집무를 보던 이청들이 즐비했다. 정수루에 올라 관원을 시켜 북을 울리게 하고 육방관속을 호령하던 나주목사의 기개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1층의 양측 벽만 벽체로 구성되어 있고 동서방향은 개방되어 있다. 2층 누각에는 대형 북이 놓여 있고, 정수루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진자료를 보면, 정수루 2층 누각에 유리 미닫이문이 설치된 것이 보이는데, 일제가 일부 변형하여 업무공간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수루는 위치와 전망이 좋아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나주사람들의 노래자랑이나 잔치 무대로 자주 이용되었다. (문화재정보)
** 나주목문화관[ 羅州牧文化館 ]
고려·조선시대 나주목(羅州牧)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세운 문화관
소재지;나주시 금계동.
- 나주는 고려 성종(983) 때부터 1895년 나주 관찰부가 설치될 때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주목(羅州牧)이 유지된 곳이다.
- 나주목문화관은 나주가 ‘천년고도 목사고을’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설립한 전시관으로 옛 금남동사무소를 개조하여 만들었으며 2006년 10월 19일 개관하였다.
-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큰 고을에 두었던 지방행정단위였던 ‘목(牧)’에 대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각종 조형물과 사진,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어향나주 목이 되다’, ‘나주목사 부임행차’, ‘나주읍성 둘러보기’, ‘관아 둘러보기’, ‘다시 태어나는 나주’ 등 8개의 주제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20명에 이르는 목사들의 명패와 목사의 하루 일정 등도 살펴볼 수 있다.
나주목문화관은 나주시에서 직접 운영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羅州牧文化館] (두산백과)
* * 나주 목사내아(羅州 牧使內衙) 전남문화재자료 제132호 (1968.09.29.)
소재지 ; 나주시 금계동 - 별칭 ; 금학헌
조선시대 나주목에 파견된 지방관리인 목사(牧使)의 살림집
동헌의 정문이었던 정수루에서 서쪽으로 약 65m 떨어진 곳에 있다.
언제 지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대문 옆에 있는 문간채를 고종 29년(1892)에 만든 것으로 보아 살림집 역시 19세기에 지은 건물로 여긴다.
앞쪽에 퇴칸을 둔 ㄷ자형 집으로 앞면 3칸 규모이며,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 남아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일제시대 이후 군수의 살림집으로 사용하면서,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다.
- 나주목사 내아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객사와 아문루가 함께 오늘날까지 남아 있어, 관아건축의 원래 모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나주 읍성 (羅州邑城) 사적 제337호 (1990.10.31.)
면적 43,799㎡
고려시대에 쌓은 성으로 조선 세조 3년(1457)에 성을 확장했고, 임진왜란(1592) 후에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있었다.
-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둘레는 3,126척(약 940m), 높이는 9척(약 2.7m)이며 대포를 쏠 수 있는 성벽에 나온 포루가 3개이고, 우물이 20여 개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4개로 동·서·남·북에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없어지고 북문터에 기초석만 남아있다.
- 1993년 남문터에 복원한 남고문이 있는데, 2층으로 된 누(樓)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화려하다.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나주읍성의 옛 모습 일부분을 보여준다. 남문터의 석축은 비록 적게 남아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보존해야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옛 서문(西門) 주변의 성벽 약 100m만 남아 있다.
** 나주 서성문 안 석등[ 羅州西城門─石燈 ] 보물 제364호 (1963. 1. 21.)
소재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시시;고려전기. 1093년 높이;3.27m
원래 전라남도 나주시 나주읍성의 서문 안에 있었는데, 192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현재는 용산으로 옮긴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단면이 8각으로, 널찍하고 네모난 바닥돌 위에 서 있다. 8각의 아래받침돌은 윗단과 아랫단으로 구분된다. 아랫단은 옆면에 각 모서리마다 모서리 기둥이 가지런히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가운데 아랫부분에 귀꽃 무늬가 새겨진 안상(眼象)이 오목새김되어 있다. 윗단에는 2장의 꽃잎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 8개가 새겨져 있으며, 그 위로 2단의 받침이 간주(竿柱)를 받치고 있다. 가운데받침돌인 간주는 단면 8각의 기둥으로, 각 면에는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둘렀는데, 그 안에는 1줄씩의 명문(銘文)이 오목새김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불을 켜 놓은 부분인 8각의 화사석(火舍石)은 파손되었기에 새로 만들어 올려 놓았다. 다만, 이전 것을 따라 4면에는 화창(火窓)을 두었다. 8각의 지붕돌은 여느 석등의 지붕돌과 달리 퍽 장식적인 모습이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보개(寶蓋)가 놓여 있는데, 상당히 마멸되어 완전하지 못한 상태이다. 다만 약간 남아 있는 무늬를 살펴보면, 대체로 지붕돌과 비슷한 모습이었던 듯하다. 보개 위에는 새로 만들어 올린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이 석등은 신라 석등의 기본 양식인 단면 8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세부 조각은 둔중해 보이고, 특히 지붕돌에는 공예적인 기법이 더해졌다. 가운데받침돌에 새겨져 있는 명문에 따라 1093년(선종 1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羅州西城門─石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주향교[ 羅州鄕校 ] 전남유형문화재 제128호 (1985년 02월 25일)
소재지;나주시 교동 32-1
나주목은 전주부에 이어 호남에서 두 번째 가는 고을이었으므로 향교의 규모도 컸다.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단지 동재·사마재의 상량문과 문묘 중수 상량문이 있다. 1597년(선조 31) 당시 대성전 수복이었던 김애남이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위패를 금성산으로 옮겼다가 왜병이 물러간 뒤 다시 안전하게 봉안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나라에서 듣고 그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가 있다. 현종·숙종 때에도 중수,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성전은 이때 중수된 듯하다.
그러나 1900년대에 사마재·수복청·양사재 등이, 1920년대에 서재·충복사가, 1952년에는 동무·서무·동재 등이 헐리게 되었다. 이후 1959년 동재·서재를 중건, 1980년 명륜당과 동·서익당 보수,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과 동재·서재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 배치는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앞에 제향을 두는 대성전을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방법이다. 이는 서울의 성균관과 같은 배치법으로 평탄한 대지에 건물을 배치할 때는 이와 같은 법칙을 따랐다. 즉, 강학은 명륜당이라 명명하여 경전학업의 중심으로,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성전으로 두 부분을 기본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현존하는 향교의 시설물들은 한국의 전통적 공립학교 건축으로 의미가 크다.
향교 앞에는 이 향교를 지킨 김애남을 기리는 충복사유허비가 남아 있고, 박성건의 금성별곡시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여름에는 서당이 개설되고 시민들의 전통혼례식장으로도 이용된다. [羅州鄕校] (두산백과)
** 나주향교 대성전 (羅州鄕校 大成殿) 보물 제394호 (1963.09.02.)
소재지 ; 나주시 향교길 36-11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나주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세워 제사와 교육기능을 수행하다가 신학제 실시 이후로는 제사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 대성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인데, 기둥 사이에는 꽃모양의 받침을 만들어 위에 있는 부재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뼈대가 다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 평면과 세부기법에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향교 대성전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며, 서울문묘·강릉향교·장수향교와 더불어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중요한 향교문화재이다. (문화재자료)
** 심향사[ 尋香寺 ] 전남문화재자료 제88호 ( 1984. 02. 29.)
소재지 ; 나주시 대호동 825 - 시대 ;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에 원효(元曉)가 창건한 사찰.
1984년 2월 29일 전남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 금성산(錦城山)에 있으며, 백양사(白羊寺)의 말사(末寺)이다. 1358년(공민왕 7) 중수하고, 1789년(정조 13) 몽수(夢守)가 중창하였다. 옛 이름은 미륵원(彌勒院)이었으나 신왕사(神王寺)로 바뀌고,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 당우로는 대웅전·미륵전·요사채가 있으며, 전남유형문화재 제99호인 건칠불좌상(乾漆佛坐像), 지장(地藏)·독성(獨聖)·산신(山神) 탱화가 있고, 500년 전에 심었다는 팽나무와 모과나무가 있다. [尋香寺] (두산백과)
**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羅州尋香寺乾漆阿彌陀如來坐像 ]
보물 제1544호 (2008. 03.12.)
- 높이 ;1 .32m. - 제작시기 ; 고려말, 조선초
불상 밑바닥에 개금기가 적혀 있고 베에 칠을 한 건칠불상이다.
목심(木心)에 천을 여러 겹 바르고 옻칠을 하면서 상을 형상화한 아미타건칠불상이다. 얼굴이 크고 신체가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은 고려13세기경 단아양식에 속한다.
- 심향사 건칠아미타불상은 봉림사 아미타불상, 개운사 아미타불상, 개심사 아미타불상 등과 동일한 양식 계열에 속하는 불상으로 다소 건장하고 당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의 육계는 높고 큼직하며 나발이 촘촘하게 열을 지어 박혀있는데 중앙계주는 작은 나발에 비슷하게 작은 원처럼 보이며 정상계주는 후에 보수된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게 큼직하며, 콧날이 높고 긴 편이고 백호나 입은 작은 편이어서 눈, 코, 입이 중앙으로 몰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특징도 봉림사 아미타불상에 가까운 편이지만 얼굴이 봉림사상에 비해서 다소 넓다.
상체는 건장하면서 당당한 편인데 어깨의 선이 둥글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긴장감은 왼쪽 어깨에서 옆구리로 내려지는 옷자락과 팔로 내려지는 촘촘한 옷주름 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진 옷주름은 3단의 Ω형 주름을 형성하고 있는데, 긴장된 수직 주름선은 봉림사, 개운사, 개심사상과 유사하지만 Ω형 주름은 이 상이 다소 더 복잡한 3단을 이루고 있어서 고산사 소아미타불상에 더 가까우며 내의 띠매듭이 있는 것도 고산사상에 가깝다. 그러나 왼쪽 무릎에 풀잎형 옷자락이 내려진 것은 봉림사상 등과 상통하므로 이 상은 12세기 말 13세기 초 양식과 14세기 양식의 사이로 편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불상이라 하겠다.
- 의의와 평가 - 이 불상은 봉림사 불상이나 개운사 불상과 유사하면서 다소 진전된 13세기 불상으로 추정되는 상으로 고려불상 편년 연구에 귀중한 상이다. 또한 희귀하게 남아 있는 건칠 아미타불상으로 고려불상 기법 연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불상으로 높게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주 심향사 석조여래좌상[ 羅州 尋香寺 石造如來坐像 ]
전남유령문화재 제309호 (2011.12.20.) - 시대 ; 고려 - 제작시기 ; 미상
1976년에 미륵전에서 1789년(정조 13)에 쓰여진 신황사(神皇寺) 용화전(龍華殿) 상량문이 발견되어 조선시대에는 신황사로 불리웠고 현재의 미륵전 역시 용화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 미륵전의 본존불은 조선시대에는 용화전의 본존불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미륵으로 신앙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좌상은 통견식 착의법에 항마촉지인을 한 작품으로 빈약한 어깨와 볼륨감이 전혀 없는 신체의 표현이 특징인 고려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재 불상의 어깨 부분이 특히 부자연스러운데 광배 보수시 불상의 어깨 와 팔 부분에도 호분이나 석고로 보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석조여래좌상은 길죽한 신체에 넓은 어깨, 사각진 넓은 무릎에서 안정감있는 비례를 보이며 편단우견에 편삼을 입은 착의법, 항마촉지인의 수인이 특징이다. 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전기에 걸쳐 유행했던 형식이다. 얼굴은 길죽한 형상에 소발의 육계가 봉긋 솟은 모습이다. 신체에는 통견식의 대의를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에서 팔로 흘러 내린 대의자락이 왼쪽 가슴의 옷과 분리된 점에서 편단우견의 대의를 입은 위에 오른쪽에는 별도의 편삼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전기에 걸쳐 유행했던 형식이다. 오른쪽 가슴에서 왼쪽 어깨위로 균일한 옷주름이 잡혀 있으며 사각진 무릎 밑으로 반원형의 주름이 흘러내렸다. 수인은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였으며 왼손은 선정인의 자세를 하였다. 광배는 윗부분이 깨져 있고 전체에 호분과 채색을 이용하여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는 광배를 보수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옛 사진을 참고해 보면 광배의 왼쪽 부분이 많이 깨진 상태인데 보수시 전체 광배의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심향사 석조여래좌상은 조선후기에 항마촉지인의 불좌상이 미륵으로 봉안된 사례이다. 불상은 전체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원래의 불상 위에 석고를 발라 상의 변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깨어진 광배를 보수하면서 상과의 분리를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의 상태는 보수로 인해 많이 훼손된 상태지만 착의법이나 수인에서 통일신라 여래좌상 형식을 계승한 작품으로 전라 지역에서는 그 예가 많지 않은 사례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미륵으로 믿어진 점에서 새로운 신앙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주 북문 외 삼층석탑[ 羅州北門外三層石塔 ] 보물 제50호 (1963.01.21.)
소재지 ; 나주시 대호동 824(삼향사 경내) - 높이 ; 3m - 재료 ; 화강석
나주 북문 밖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놓았다. 2층 기단 위의 3층석탑으로 된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하대석(下臺石) 위의 중석(中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모각(模刻)되어 있고, 갑석(甲石)에도 우주의 형체가 표시되어 있다. 상층기단(上層基壇)의 중석은 4장의 판석(板石)으로 짜여 있으며, 큼직한 우주와 탱주 1주(柱) 씩을 모각하였고, 갑석은 2장의 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윗면은 경사를 이루고 있다.
-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옥신에는 우주의 형체만이 있고, 1층 옥신에 비하여 2층 옥신은 크게 줄었든 형태를 띤다. 옥개석은 두꺼우며, 추녀 밑은 직선으로 나가다가 우각(隅角)에서 약간 치켜올라간 듯하다. 옥개석 위에는 우주의 형체가 있고 전각(轉角)에서 치켜올렸으나 석재가 취약하여 파손된 곳이 많다.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는 완만하고, 상륜부(相輪部)에는 1장의 돌로 만든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불탑에서 노반 위에 얹는 엎어놓은 사발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 상층기단 갑석의 일부만 손상되었으나 전체가 심한 풍화를 받아 마멸되어 있다.
- 비록 수작(秀作)은 못 되지만 단정한 작품으로, 그 일부분에서 양식의 간략화를 볼 수 있어 고려 말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羅州北門外三層石塔] (두산백과)
** 나주읍성 동점문
동점문은 나주의 관문이자 나주읍성의 동문이다.
- 나주읍성 안쪽으로 나주천이 흐르는데, 나주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영산강과 만나는 하류 부근에 나주읍성의 동문이 위치하고 있다. 동점문 2층 문루에 올라서면 나주 영산강과 나주대교까지 눈에 훤히 보인다. 동점문이라는 현판 이름에 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동점문은 중국의 경서인 서경에 나오는 동점우해에서 따온 것인데, 나주천이 동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만나 바다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 고려 말 삼봉 정도전이 원나라를 멀리하고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해 나주로 귀양살이를 오게 되는데, 이때 나주읍성 동문에 올라 ‘나주 주민들에게 드리는 글’(등나주동루유부로서)을 읽었다고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이런 역사를 거론하며 2006년 동점문 복원 당시 현판 글씨를 썼다. (나주시 홈페이지)
** 나주 동점문 밖 석당간[ 羅州東漸門─石幢竿 ] 보물 제49호 (1963.01.21.)
소재지 ; 나주시 석당간길 58-1(성북동) - 건립시기 ; 고려 - 높이 ; 11m
돌로 만든 당간지주와 당간이 나주읍성의 동문 밖에 온전히 남아 있다. 곧 나주경찰서 동남쪽의 길가에 서 있는데,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의 지세가 배 모양이어서, 배가 뒤집어지지 않고 안정되기를 빌기 위하여 돛대의 의미로 이 당간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강암으로 만든 당간지주는 마주보는 안쪽면은 물론 바깥면이나 옆면에도 아무런 조각이 없는 간결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정상 부분의 윗면은 평평한 편인데, 바깥면 가까이에 이르러 둥글게 곡선을 그리면서 바깥면과 접하는 모서리를 깎아냈기 때문에, 앞뒤에서 보면 곡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당간은 화강암으로 만든 8각의 돌기둥으로, 5장의 돌을 연결시켜 간주(竿柱)를 세웠고, 그 위에는 지붕돌과 함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간주는 각 석재의 위아래쪽 끝부분을 간주 두께의 반이 될 정도로 길고 가늘게 깎고서 서로 완전하게 붙이는 일반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연결하였다. 다만, 연결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각 석재의 위아래 2군데에 둥근 구멍을 뚫고서 간(杆)을 끼웠으며, 다시 둥근 구멍의 위아래에 2개의 철제 띠를 둘렀다. 간주의 4군데에서 이러한 시설이 확인된다. 간주는 맨 아랫부분이 굵은 편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가늘어져, 전체적으로는 가늘고 길지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지붕돌은 8각으로 다듬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각 변마다 경사가 심하고 전각(轉角)에 반전(反轉)도 심하여 경박해보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당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 위에 놓인 보주 역시 섬세한 모습은 아니다.
[羅州東漸門─石幢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주읍성 남고문[ 羅州邑城南顧門 ] 사적 제377호 (1990.10.31)고
소재지;나주시 남내동
나주 읍성의 남문, 즉 남고문이다. 남고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남문을 나서면서 임금님이 계신 곳인 금성관쪽을 돌아보았다고 하여 남고문이라 했다고 한다. 삼봉 정도전이 나주로 귀향 오면서 여기에 올라 '유부로서'를 읊었다고도 한다.
1920년 경 일제에 의해 약간의 석축만 남고 완전 철거되었다가 1993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으며 그 후 추녀와 천장이 훼손되어 2005년에 보수하였다. 2층으로 된 문루(門樓)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나주읍성에는 중층 문루로 된 철문인 남문 남고문과 동문 동점문(東漸門), 단층 철문인 서문 서성문(西成門)과 북문 북망문(北望門)이 있었는데 이중 남고문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한다.
[羅州邑城南顧門] (두산백과)
** (구 ) 나주역 전남기념물 제183호 (2000. 12. 29.)
죽림동에 있는 구 나주역의 역사(驛舍)는 1929년 광주로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이 충돌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시킨 역사의 현장으로, '광주학생 독립운동진원지 나주역사'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어 있다. [羅州驛] (두산백과)
- (구) 나주역사는 나주인의 항일정신을 보여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이다.
1913년 7월 1일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설치된 나주역을 이용하여 광주로 통학하던 한국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1929년 10월 30일 사건이 발생하자 나주지역의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돼 전라남도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됐다. 현재 구 나주역사내에는 나주역 영업당시의 개찰모습, 일제 강점기에 썼을 법한 역무원들의 근무모습이 밀랍인형들로 재현되어 있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역사 바로 옆에는 광주학생항일 운동 기념관이 개관해 당시의 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영상자료도 볼 수 있다.
**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羅州學生獨立運動記念館 ]
일제강점기 때 나주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관.
당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 7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고 2011년 9월 보훈기관에 등록되었다. 기념관은 나주시 죽림길 26에 위치하는데 구 나주역사 인근에 건립되었다.
부지면적은 10,273㎡이며 건축면적은 846.12㎡이다. 1층과 2층에 당시 학생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영상관이 마련되어 있다.
당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은 서로 다른 객차를 이용하였는데 같은 칸을 이용하는 경우도 종종있어 서로 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당시 한국 학생들은 독서회라는 학생조직을 결성하여 항일정신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광주에서 나주역에 열차가 도착하자 열차에서 내린 일본 학생이 한국 여학생(박기홍)의 댕기를 당기며 희롱하자 이를 두고 여학생의 사촌동생인 박준채라는 학생이 일본인 학생을 나무라자,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이라고 멸시하는 발언했다. 이에 박준채 학생이 격분하여 주먹으로 때리자 서로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경. 일본인 남학생들이 한국 여학생들을 희롱하자, 한국 남학생들이 이를 저지하며 순식간에 한·일 학생간 싸움으로 번졌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시킨 나주역 사건의 정황이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4대절의 하나인 명치절인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 후에 있을 신사참배를 집단 거부하고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쟁소식은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 전국의 194개교 54,000여명이시위운동에 참가한 역사적 사건으로 확산됐다. 이렇듯 나주역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평가이 사건으로 대규모 항일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해 11월 3일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격었다. 나주학생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羅州學生獨立運動記念館] (두산백과)
** 나주 영산포 자기수위표(自記水位標) 등록문화재 제129호 (2004.12.31.)
별칭 ; 영산포 등대[ 榮山浦燈臺 ]
소재지;나주시 이창동 280-1
- 수량/면적 ; 1동, 높이 8.65m, 면적 6.1㎡ - 시대 ; 일제강점기
1915년 영산포 선창에 건립한 산업 구조물이다. 한국의 내륙 하천가에 있는 유일한 등대로, 등대 기능과 함께 해마다 범람하던 영산강의 수위 측정을 위해 지은 시설이다. 영산대교에 새로 수위 측정 시설이 생긴 1989년까지 사용되었다.
영산포 지역은 당시 해상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호남선 철도 개통 이듬해인 1915년에 이 등대를 건립한 것으로 보아 일제가 영산포를 곡창지대인 호남 지역의 수탈의 거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기본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적 자료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아치형 지붕 위의 조명 장치 등과 주변 시설물은 많이 변하였다. 등대에 접근하려면 철사다리를 이용해야 한다.(두산백과)
** 국립나주박물관[ 國立羅州博物館 ] ; 설립일 ; 2013.11.22.
소재지 ; 나주시 반남면 고분로 747 (신촌리 277)
규모 ; 지상1층, 지상2층 총면적 74,272㎡, 건축면적 11,086.34㎡
제 1전시실과 제 2전시실로 구분되어 있으며 제 1전시실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고, 제 2전시실은 유물의 발굴과 관리, 보존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체험관이 마련되어 있다.
[國立羅州博物館] (두산백과)
** 나주 반남 고분군[ 羅州 潘南 古墳群 ] 사적 제613호 (2011. 07. 28.)
소재지 ;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103 등 126필지 - 크기 ; 121,397㎡
삼국시대 고분군인 반남 고분군은 대형옹관고분(大型甕棺古墳) 수십기가 분포하여 영산강 유역의 고대 문화를 상징하며, 일제 강점기 시대의 발굴조사에서 나주 신촌리 금동관[국보 295호]이 출토된 이후 10여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가치를 인정받았다. 본래 사적 76호의 나주대안리고분군(羅州大安里古墳群), 사적 77호의 나주신촌리고분군(羅州新村里古墳群), 사적 78호의 나주덕산리고분군(羅州德山里古墳群)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인접 지역에 있는 세 고분군을 통합하고 사적 제513호로 재지정하였다.
대안리는 반남 일대의 주산인 자미산(紫微山)의 북서쪽에 있다. 이 지역의 고분군은 1917~1918년 및 1938~1939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된 이래 현재까지 독무덤[甕棺墓] ·돌방무덤[石室墳] 등 12기의 고분이 발굴되거나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들 독무덤은 일본 고분과 형태가 같아, 백제 묘제(墓制)가 일본 독무덤의 선구임을 입증한다.
반남면 지역에는 위와 같이 대안리고분군을 포함하여 신촌리 ·덕흥리 ·덕산리 일대에 7지역 30여 기의 고분이 알려져 있다. 고분의 밀집도로 볼 때, 이곳은 반남지역이 마한(馬韓)의 마지막 세력인 목지국(目支國)의 중심지로 지배세력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羅州 潘南 古墳群]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