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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4 강 (아산 UBF 메시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9:28-20:18
요절 / 누가복음 19: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 당시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의 개선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개선장군의 개선행사가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개선장군의 전차에 노예 한 명이 타고 영광 받는 개선장군의 귀에다 ‘너는 죽을 인생에 불과해’ 계속해서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개선장군이 로마 가도에 늘어선 시민들에게 환호를 받고 영광을 얻다가 신의 질투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하여 뒤따르는 군단 병사들은 자기 지휘관의 약점을 외치며 따랐다고 합니다. 시저의 경우, 대머리였고 사생활이 복잡했기에 ‘로마의 부인들이여 조심하라 대머리 바람둥이가 돌아왔다’고 외쳤다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마리 말이 이끄는 빛나는 콰드리가 전차를 타지 않으십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가는 입성행사를 하십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나라를 깊이 영접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앞서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리가 있음을 확신하셨기에 고난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습니다. 고난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려는 예수님께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은 피하려는 사람에게 더 부담스럽고 더 두려워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29절-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운 곳에서 두 사람의 제자를 보내어 나귀 새끼 한 마리를 끌고 오도록 방향을 주십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제자들이 가보니 나귀가 매여 있는데 그 주인들이 어찌해서 나귀새끼를 푸느냐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대답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나귀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올 수 있었습니다.
35,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이렇게 준비한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이 땅에 끌렸습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나귀는 온순하고 말을 잘 듣습니다. 나귀는 함부로 뛰지 않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지고 타박타박 부지런히 걷고 일합니다. 온순한 나귀 중에서도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친밀하여 웃음을 머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큰 기대를 안고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 앞에서 굳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시대의 가치관, 그릇된 메시야관에 대한 분명한 도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는 로마의 힘의 철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직 힘이 진리라고 여겼습니다. 유대백성들이 바라는 메시야도 힘 있는 메시야였습니다. 원수 이방인들을 모두 멸하고 이스라엘을 힘으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끼나귀를 타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겸손과 낮아짐과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겸손과 희생으로 평화를 주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의 가장 큰 특징은 평화와 낮아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였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겸손과 희생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희생이 있을 때, 메시야 예수님을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행하여 주신 겸손과 희생을 나의 생활과 나의 삶에서 행해보면 예수님을 가장 확실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속하여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하는 제자들에게 영적 권세를 더하여 주십니다.
주 예수님을 위하여 산다면 예수님께 속한 자의 표시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참 포도나무 에 붙임 받은 가지라면 참포도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습니다. 겸손과 희생, 낮아짐과 헌신은 예수님께 붙은 자의 표시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로마를 미워하면서도 로마처럼 강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만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가진 것 많고 자랑할 것 많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는 이렇게 승리하였다.’ ‘나는 이렇게 양들을 많이 모았다’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 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 좋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겸손, 겸손, 또 겸손입니다. 사실 겸손과 낮아짐이 반드시 있어야 그런 ‘승리’와 ‘열매’가 뒤따릅니다. 겸손함이 없어 배우지 않으므로 개인의 한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겸손함이 없어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으므로 영적인 힘이 없습니다. 겸손함이 없으므로 요구하는 기도, 자기의에 기초한 기도를 하므로 응답받지 못합니다. 겸손함이 없어 듣는 것을 거부하고 겸손이 없어 일체 상의할 줄 모르므로 이전 실수를 오늘 반복하고 오늘의 실수를 내일 거듭하여 늘 같은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을 이벤트로만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겸손의 극치입니다. 죄가 없으면서 가장 흉악한 죄인이 되십니다. 십자가형은 보통의 죄인들에게 주는 형벌이 아닙니다. 십자가형은 지나치게 가혹하여 로마 시민에게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딱 두 죄인, 반역죄를 지은 죄인과 도망친 노예에게만 가하였습니다. 예수님 좌우편에서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강도라 부르는데, 그들이 활동자금 마련을 위하여 민간의 재산을 강탈한 죄가 있어서 그렇게 부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십자가형 받는 이유는 열심당원으로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가장 깨끗하고 거룩하신 분이 세상에서 가장 중한 죄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행하지도 않은 잘못을 하였다며 정죄 받고 짓지 않은 죄를 지었다고 채찍질 당하고 모욕당하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 지고 죽으심으로써 죽기가 두려워 낮아지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낮아짐의 본이 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거창하게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오해 받는 것을 더 힘들어 합니다. 우리 인생은 민주주의, 정의구현 같은 위대한 명분을 위하여 죽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평가하는 것을 더 참지 못합니다. 왜 나를 문제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왜 나의 지난 실수 한 두 가지를 가지고 계속 판단하는가? 섭섭해 하고 분노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작은 오해 작은 판단조차 참지 못하여 부글부글 하니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고 다른 인생을 섬기며 다른 영혼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단 한치도 낮은 곳에 머물기 거부하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단 한 순간도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십니다. 조금도 자기를 내어 줄 수 없어 번민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영광을 버리고 죄인으로 목숨을 버리십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니 우리도 주님을 따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따라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하신 본을 배워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생명력 넘치게 하십니다. 주 예수의 제자로 부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주의 택한 백성을 얼마든지 맡겨 주십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제자의 온 무리들은 나귀새끼를 타신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동안 예수님께서 가난한 모습을 보이셨으므로 큰 주저 없이 메시야를 찬양하였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콰드리가를 타고 많은 병사들을 이끌며 개선하는 로마의 황제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해주실 것이라 기대를 아끼지 않고 찬양 소리를 드높여 외쳤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이 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그들을 막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40)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제자들이 찬양하지 않고 따르는 무리가 찬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돌들을 세워서라도 예수님을 찬양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만유의 주님 이십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을 보시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30년 후에 로마군에게 포위당하여 가장 비참하게 고통당하다가 11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학살당합니다. 그때 로마군들은 흙으로 높은 언덕을 쌓아 성안을 공격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학살을 행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5-4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성전에서조차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서조차 돈벌이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 중심이 돈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둘러엎으시고 영적질서를 바로 하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돈벌이를 막고 자신들에게 도전한다고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시작하였습니다.
20장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타났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19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사치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로마는 유대 통치를 원활하게 하게 위하여 유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해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이 끌어들인 장사치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자 예수님께 대하여 적개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백성들이 말씀의 은혜 받자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이슈는 ‘권위’입니다. 성전에 있는 장사치들을 내쫓는 일을 하였는데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였는가?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무슨 권위,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모든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나왔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였습니다. 그의 메시지와 삶의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운 종이라는 것이 명백하였기 때문입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종교지도자들은 세례요한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내려진 것이라고 하면 왜 믿지 않았는지 지적받을 것 같고 인간적인 권위라고 하면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그들은 난처한 질문에 대하여 빠져나가는 대답을 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도 하늘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반발하고 시비 거는 문제의 근원은 ‘소유’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자기들의 것이기 때문에 장사치를 끌어 들이든 환전상을 끌어 들이든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성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이 자기들 것이라 여겼습니다. 유대와 갈릴리-유대교를 신봉하는 커뮤니티 전체가 자기 것이라 여겼습니다.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유대인들이 모두 내 양, 내 것이라 여겼습니다.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좋은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임대하고 다른 나라에 갔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에게 포도원에 들어와 농사지을 수 있는 권리, 경작권을 주었습니다. 경작 결과물, 소출을 자기들이 쓸 수 있는 권리도 주었습니다. 대신, 임대료를 내야 합니다. ‘세’, 임대료를 내는 조건으로 포도원 경작 권리, 소출 획득 권리가 농부들에게 주어진 것 입니다.
농부들이 주인에게 내는 ‘세’는 계약의 중요 조건입니다. 농부들은 주인에게 세를 내고, 주인은 농부들에게 점유, 경작, 소출을 줍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농부들이 포도원은 점유하고 있으면서 임대료 내기는 거부하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을 때린 것은 주인에게 한 것과 같습니다. 농부들의 악행으로 계약은 파기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주인은 계약이 지속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었습니다.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두번째 종은 몹시 때렸다고 하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주인은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세 번째 종은 더 심하게 때려 불구를 만들어 내쫓았습니다. 농부들은 갈수록 악해 졌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주인은 혹시라도 종들을 보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였습니다. 이번에 아들을 보냅니다. 아들을 보내면 아들은 존대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회개할 기회를 주는 분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에게 오래 믿어주면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분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농부들은 현재 점유하고 있는 포도원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아들을 죽임으로써 불법 점유와 불법 경작 상태를 실제 소유상태로 바꾸고자 합니다. 포도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포도원에 대한 집착이 생겼습니다. 집착과 함께 이것을 우리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도 함께 자라났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포도농사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8월에 추수가 끝납니다. 둘째, 다른 과일이 오래 저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장기간 장거리 유통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포도는 포도주를 만들어 저장함으로써 오래 저장이 가능하고 포도주는 고대에서 화폐처럼 사용되어 재화를 오래 많이 축적 가능하였습니다. 셋째 포도농사는 모든 농사 중에서 가장 힘듭니다. 끝없이 가지쳐주고 살피고 봉지 씌우고 일이 많습니다. 일할 때 앉을 수도 없고 서지도 못하는 자세로 일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매우 고됩니다.
계속 저장할 수 있는 포도주,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확물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면서 탐욕이 생겨나고, 가장 강도 높은 노동을 하였으므로 공로의식, 많은 수고를 내가 했다는 자기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농부들과 같이 된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다윗 왕 이래 정치권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권력의 맛을 아는 자들이었으므로 항상 정치적으로 힘센 자에게 줄을 섰습니다. 그들은 유대사회의 종교, 사회, 사법권을 장악한 것이 그냥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차지했는데...’ 또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다가 한 번에 2만 명이 학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인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의 수호자라는 자부심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얻은 백성들의 지지와 존경인데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보냄 받은 종들은 선지자들입니다. 주인이 만든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일어난 비극이 유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주인의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긴 끝은 진멸입니다. 이 비유를 들은 자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것을 탐하고 주인의 종을 상하게 하고 그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그들이 심판 받을 때 어떻게 심판 받았는지, 어떻게 죽어 갔는지, 얼마나 진멸 되었는지,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내 인생, 나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자식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양들도, 주님의 사명도 센터도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비유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그런 일은 제발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생각하더라도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점들이 많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포도원 소출을 잃었고 믿었던 농부들에게 신뢰 대신 배반의 아픈 상처를 얻었으며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주인의 지시대로 갔던 종들은 맞고 모욕당하고 큰 부상을 입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고통은 주인의 아들이 받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 하였을 뿐인데, 농부들에게 끌려 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모퉁이의 머릿돌은 모퉁이의 기초에 박혀서 건축물을 지지하는 주춧돌인데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처럼 영문 밖에 끌려 나가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고 끝났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이야기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36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부활의 주, 영광의 주가 되게 하십니다. 주 예수님은 다시 살아 만물을 발아래 두시는 주의 주, 왕의 왕이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의 주, 왕의 왕이십니다. 그 날, 하늘의 모든 것이나 땅위의 모든 것, 땅 아래 모든 것들은 모두 심판의 주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거할 자들을 건져 주시고 이 세상을 폐하실 것입니다. 쇠하지 않고 멸하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천군 천사들은 모두 예수님을 거룩하신 주님으로 찬양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로써 아름다운 포도원을 지으신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이 영화로우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 죽임을 당한 예수님을 부활의 주 영광의 주로 만유 위에 세우셨으므로 그 이름이 영화로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버림 받는 삶, 비천하게 낮아지는 삶에 대하여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이 땅에서 버림받고 고난 받고 아픔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도 영광을 주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바요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오늘 말씀에 기록한 것과 같은 일을 행하여 주셨습니다. 아산센터가 개척할 때, 아산센터는 멸시를 많이 겪었습니다. 개척목자만 멸시를 겪은 것이 아니라 개척목자의 가족도 겪었고 양들도 함께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멸시 받게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멸시를 겪고 또 우리가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는 메시지에 활자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나귀새끼를 타는 겸손과 낮아짐을 우리의 삶과 생활에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이 낮아지고 삶이 낮아지고 영혼이 낮아져서 예수님을 실감나게 체험하고 잘 배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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