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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명상의 세계
< 사념처 명상의 세계는 그간 발표한 대념처경 주석서 1권 2권 3권과, 12연기 1권 2권의 방대한 내용을 새롭게 간추린 글입니다. 대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 내용도 있습니다. 수행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연재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묘원 합장 >
5) 네 가지 요소[四大]를 알아차림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다섯 번째가 몸에 있는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몸은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이고 몸의 실재는 사대(四大)입니다. 몸의 네 가지 요소를 빨리어로 마하부따(mahābhūta)라고 합니다. 마하(mahā)는 크다는 뜻의 접두사고 부따(bhūta)는 태어난 요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하부따는 물질의 큰 네 가지 요소를 말합니다. 사대는 물질을 인식하는 기본 요소입니다. 이러한 사대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실재입니다. 물질은 존재하지만 이 존재는 실재가 아니고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네 가지 요소가 실재입니다. 사람의 몸이나 다른 물질을 인식할 수 있는 실재는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라는 네 가지 요소입니다.
이 네 가지 요소는 홀로 있지 않고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서 각각의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요소 중에 어느 요소 하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다른 요소는 강한 요소에 가려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대는 항상 함께 있는 요소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나 살아 있지 않은 무생물도 모두 네 가지의 요소인 사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사람의 몸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곧 사대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인식할 때 바로 이 사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사대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에 속합니다. 수행자가 몸을 알아차릴 때는 반드시 몸의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의 네 가지 요소를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이 깨달음을 얻는 수행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몸을 존재로 보지 않고 인식하는 요소로 알아차립니다. 가령 몸을 단지 몸으로 보면 몸이라는 명칭을 보는 것으로 개념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몸이 가지고 있는 요소를 보면 몸을 존재나 개념(槪念)으로 보지 않고 실재(實在)로 보게 되어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이라고 말할 때 손은 부르기 위한 명칭입니다. 이 명칭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냥 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때의 손은 개념이고 명칭이고 존재입니다. 그러나 손이 있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손의 단단함과 부드러움, 축축함과 건조함, 따뜻함과 차가움, 진동 등의 느낌이 있어서 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이렇게 아는 것이 손의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재에서만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손은 관념이고 손을 인식할 수 있는 느낌인 사대가 실재입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관념을 제거하고 실재를 통해서만 존재의 특성을 알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념처경에서 몸의 네 가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을 현재 있는 그대로, 놓인 그대로, 네 가지 요소별로 알아차린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地大], 물의 요소[水大], 불의 요소[火大], 바람의 요소[風大]가 있다. 마치 숙련된 푸줏간집 주인이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소를 잡아서 큰길 사거리에서 부위별로 잘라서 쌓아놓고 앉아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현재 있는 그대로, 놓인 그대로, 네 가지 요소의 측면에서 알아차린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
이상이 대념처경에 있는 네 가지 요소에 대한 간추린 내용입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대념처경이 설해진 지역의 수행자들은 매우 수행근기가 높아서 수행에 대한 총론적인 것만 밝혔습니다. 그렇다고 경전의 내용이 간단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지역에서 설한 경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다음은 사대의 요소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땅의 요소인 지대(地大)는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흙이 가지고 있는 본성인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강도의 특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지대를 말할 때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단함은 부드러움의 요소가 있어서 단단함을 알 수 있으며, 부드러움 또한 단단함의 요소가 있어서 부드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지대는 몸이 가지고 있는 단단함과 부드러움, 가벼움과 무거움 등을 통틀어서 말합니다. 우리의 손이나 발이나 몸이 무엇인가와 접촉했을 때 단단하게 느끼거나 부드럽게 느끼는 것이 바로 지대의 특성입니다. 물을 만졌을 때 부드러움을 느낀 것은 지대의 요소입니다. 돌을 만졌을 때의 단단함도 지대의 요소입 니다. 얼굴에 바람이 불 때 느끼는 부드러움이나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느끼는 단단함과 부드러움도 지대의 요소입니다. 이처럼 지대는 몸의 어느 부분에나 항상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부드러운 살과 단단한 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선도 부드러운 살과 단단한 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수행자가 몸을 알아차릴 때 몸이라고 알아차리지 않고 단단하거나 부드러움으로 알아차리면 몸이라는 개념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오직 몸이 가지고 있는 특성만 있습니다. 이 특성은 조건에 의해 변합니다. 이것이 몸에서 지대를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에게 지대의 특성은 ‘단단함과 부드러움’입니다. 그리고 지대의 기능은 항상 어디에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탕’으로 작용합니다. 다시 지대의 나타남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거나 얻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의 요소인 수대(水大)는 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가지고 있는 본성인 흐름이 있는데 이러한 유동성이 물의 특성입니다. 물은 흐르며, 서로 모이려는 응집성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져 강이 되고 거대한 바다가 되는 것이 모두 물의 특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변하기 쉬워서 유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은 어떤 용기에 담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고 항상 변합니다. 물이 수증기가 되고 때로는 얼음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은 강력하게 결합하는 응집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약 70퍼센트가 물이며 이러한 물이 몸의 세포들을 결합하게 합니다. 만약 인체에 물이 없다면 몸의 각 부분들은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하면 덩어리가 되듯이 물은 엉기도록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몸에서 물의 요소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단단하거나 부드러운 지대의 요소로 드러나기도 하고 뜨겁거나 차가운 요소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수행자가 몸을 알아차릴 때 몸에서 물의 요소를 알아차리면 몸이라는 존재는 사라집니다. 몸은 수대의 요소로 결속되었기 때문에 단지 이런 조건들이 몸을 구성하는 요소로 알 때 내 몸이라는 개념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몸에서 물의 요소를 알아차리는 이유입니다.
불의 요소인 화대(火大)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 본성인 따뜻함 은 몸을 성장하게 하고 또 쇠퇴를 가져오는 것이 화대의 특성입니다. 인간이 탄생할 때도 온도는 기본요소로 작용합니다. 인간은 마음, 업, 온도, 자양분이라는 네 가지 조건에 의해 태어나는데 여기서 온도가 없으면 태어나지 못합니다. 또 이러한 따뜻함은 몸의 성장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다시 따뜻함이 몸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밀가루로 된 빵에 열을 가하면 빵이 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해서 열을 가하면 빵이 타듯이 인간에게도 열은 성숙의 요소이기도 하면서 늙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화를 하는 것도 모두 따뜻함의 영향입니다. 또 몸에 일정한 열을 유지하고 있어서 병을 이겨내도록 합니다. 감기가 걸려서 열이 나는 것도 외부에서 침입한 병원균을 이겨내려는 화대의 작용입니다. 불의 요소는 따뜻함과 함께 차가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뜻함은 차가움의 요소가 있어서 따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차가움도 따뜻함의 요소가 있어서 차가움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따뜻함은 항상 차가움을 함께 동반합니다. 손을 바닥에 닿게 했을 때 바닥이 차갑다고 느낀 것은 손의 따뜻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몸을 알아차릴 때 몸에서 불의 요소를 알아차리면 몸이라는 존재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몸에는 따뜻함과 차가움이란 요소만 있다고 알아차려서 내 몸이라는 개념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몸에서 불의 요소를 알아차리는 이유입니다. 바람의 요소인 풍대(風大)는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인 몸을 움직이게 하는 특성을 의미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바람의 요소는 에너지, 운동, 긴장, 지탱 등 모든 진동과 움직임을 일으키도록 합니다. 몸은 끊임없이 진동하는데 이것이 모두 바람의 요소입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것도 바람의 요소이며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것도 지탱하는 특성을 가진 바람의 요소입니다. 풍대는 공기의 요소입니다. 바람의 특성은 팽창하게 하고 수축하게 합니다. 그래서 넓히기도 하고 줄어들게도 합니다. 호흡을 할 때 공기가 들어가 몸이 부풀고, 다시 공기가 빠져나와 몸이 수축하는 것이 모두 바람의 요소입니다. 가고 서고 앉을 때 똑바로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바람의 요소입니다. 바람의 요소의 기능은 동작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동작은 바람의 요소로 일어납니다. 바람의 요소의 나타남은 몸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몸에서 나타나는 바람의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몸의 위쪽으로 가는 바람의 요소가 있습니다. 기침을 하거나 하품이나 딸꾹질을 하거나 먹은 것을 토하는 것이 모두 상승하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둘째, 몸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바람의 요소가 있습니다. 방귀를 뀌거나 대변이나 소변을 보는 것이 모두 하강하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셋째, 내장 바깥쪽과 배 안의 바람의 요소입니다. 내장기관과 배 안에 있는 기관의 진동이 모두 바람의 요소입니다. 수행자가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도 모두 세 번째에 해당하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우리가 단전호흡이라고 할 때 배의 호흡은 사실 여기에 해당하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이 때 코로 들이쉰 바람이 배까지 바로 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배에서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몸 전체에서 일어나는 풍대의 요소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넷째, 내장 안의 바람의 요소입니다. 내장 안에서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연동운동을 하게 하는 것이 모두 바람의 요소입니다.
다섯째, 팔과 다리에 모두 퍼지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팔과 다리가 아프고 쑤시는 것이 모두 바람의 요소입니다.
여섯째, 코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은 바람의 요소입니다. 호흡은 공기가 코로 들어가서 다시 코로 빠져나오는 바람의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호흡은 풍대에 속합니다. 이상이 바람의 요소인 풍대의 작용입니다.
이처럼 몸에서 일어나는 사대의 요소는 항상 함께 일어납니다. 수행자가 길을 걸을 때 어떻게 사대의 요소가 함께 일어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걷기 위해서는 먼저 발을 들어 올립니다. 이때 발을 들어 올릴 때 발의 가벼움이 있습니다. 발을 들어 올릴 때의 가벼움은 화대의 요소입니다. 발을 들어 올리고 내릴 때의 움직임은 풍대의 요소입니다. 다시 발을 내릴 때의 무거움은 수대의 요소입니다. 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단단함이나 부드러움이 있는 것은 지대의 요소입니다. 이렇게 발걸음 하나를 내딛는 것에 사대의 요소가 모두 있습니다. 그리고 걸음이 계속되면 사대의 요소가 계속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발이나 몸의 형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이라는 개념이나 몸이라는 개념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실재하는 것은 오직 지수화풍이란 사대의 요소입니다. 수행자가 이처럼 사대의 요소만 알아차려서 집중하면 존재에 대한 개념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나의 발이라는 인식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발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통해 궁극의 법인 무상, 고, 무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은 “마치 숙련된 푸줏간집 주인이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소를 잡아서 큰길 사거리에서 부위별로 잘라서 쌓아놓고 앉아 있는 것처럼”입니다. 소를 도살하기 전에는 소라고 하지만 고기를 팔 때는 여러 가지로 부위를 잘라서 팝니다. 이때 등심이나 갈비라고 하지 소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위별로 잘라서 팔 때 개념적인 소는 없어집니다. 이처럼 몸에 대해서도 사대로 인식하면 몸이라는 개념과 나의 몸이라는 개념도 함께 사라집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바른 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몸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지대, 수대, 화대, 풍대만 있다고 알면 궁극의 법을 봅니다. 그래서 최고의 진리라고 하는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이란 네 가지의 실재에 접근합니다. 네 가지 궁극의 법이라는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은 그것 자체로는 궁극의 법이 아닙니다. 이 네 가 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궁극의 법이 결정됩니다. 정신과 물질을 관념으로 보면 관념적 진리이지만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보면 열반에 이르러 궁극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이와 같이 관념이 아닌 실재를 보면 깨달음이라는 이익을 얻습니다.
붓다고사가 쓴 청정도론이란 주석서에서는 몸을 알아차릴 때 네 가지 요소로 알아차리는 것에 관한 이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요소를 명확하게 밝히는데 노력한 수행자는 공허함에 깊이 빠진 채로 살아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인식을 없앱니다. 그는 야생짐승, 초자연적인 존재, 도깨비 등에 관한 그릇된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무서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즐거움과 싫어함을 극복합니다. 그는 좋거나 싫은 것들에 의하여 기분이 들뜨거나 우울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는 불멸의 영역에서 끝을 내거나 행복한 운명으로 살게 됩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몸을 알아차릴 때 네 가지 요소로 보면 이 요소로 인해서 생기는 이차 삼차의 표상이 생기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대로 알아차릴 때 존재라는 개념이 사라지며, 나라고 하는 개념도 사라지고, 이로 인해서 생기는 야생짐승, 초자연적인 존재, 도깨비도 생기지 않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각종 느낌을 단지 사대의 요소로 보면 야생짐승과 같은 허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표상이 생기는 것을 막는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무속인이 입신을 할 때 몸의 느낌을 통해서 야생짐승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의 야생짐승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니고 몸에서 일어난 단순한 느낌을 자신이 투사해서 표상을 만들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무속인은 표상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산신령이나 관운장이나 모두 이런 표상일 뿐입니다.
초월적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서 일어난 각종 느낌을 사대로 알아차리지 않으면 스스로 표상을 만들어서 봅니다. 이때의 표상은 느낌을 원인으로 일어난 허상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 보기를 간절하게 원하면 스스로 표상을 만들어서 봅니다. 이렇게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로 알아서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존재란 최고의 힘을 가진 여러 가지 형태의 초월적 존재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정부분 초월적 존재에 의지해서 고난을 이기는 이익도 있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지혜를 얻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도깨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서 일어난 으스스한 느낌이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과 결합하면 그 순간 도깨비란 허상이 보입니다. 그러면 실재하지 않는 현상을 스스로 만들어서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합니다. 이런 모든 현상들이 몸에서 일어난 사대의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생기는 허상입니다. 도깨비도 관념이 만들어낸 표상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재하지 않는 표상을 만들어서 사실처럼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몸에서는 단지 몸을 알아차려야 하고 느낌에서는 단지 느낌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40가지에 이르는 수행 주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 주제는 스승에 따라서 또 각자의 근기에 맞게 선택을 해서 수행을 합니다. 이때 사마타 수행의 주제는 실재가 아닌 관념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깊은 선정을 이룹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오직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에 있는 실재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법으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릅니다. 이런 지혜를 얻는 길이 몸의 사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대, 수대, 화대, 풍대라는 사대의 요소는 몸에서 하나만 작용하지 않고 모두 함께 작용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서로 부딪치고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이들 사대 중에 하나를 따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이들이 함께 작용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이 나타납니다. 이때 두드러지지 않은 다른 요소들도 함께 있습니다. 이처럼 몸에서 일어나는 사대는 모두 함께 결합하여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작용합니다. 그리고 사대는 어떤 요소 하나만 가지고 있지 않고 상대적인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사대는 단단함과 부드러움, 가벼움과 무거움, 뜨거움과 차가움, 팽창과 수축이 함께 있습니다. 이러한 사대의 부조화는 병을 만드는 원인이 되고, 반대로 사대의 조화는 병을 이겨내는 원인이 됩니다. 수행자가 몸에서 일어나는 사대를 통하여 지혜를 얻을 뿐만 아니라 사대를 알아차려서 조화를 이루면 건강해지는 이익이 있습니다.
몸에 암이 생긴 것도 지대의 나타남입니다. 부드럽다가 단단해진 것이 암입니다. 몸에 노폐물이 축적되면 부드러운 근육이 단단해지고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려고 할 때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수행을 해서 고요함이 생기면 몸이 자연스럽게 이완이되지만, 화를 내거나 욕망을 가질 때 근육이 경직되는 것도 사대의 부조화 현상입니다.
몸에 있는 물의 요소도 감기가 걸리면 즉각 콧물로 바뀌거나 가래로 바뀝니다. 몸에 병원균이 침투하면 물의 요소가 고름으로 바뀌는 것도 모두 사대의 현상입니다. 몸에서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서로 부딪칩니다. 몸이 너무 뜨거우면 고열로 죽게 되며 뇌세포가 손상을 입습니다. 몸이 차가우면 감기에 걸리거나 체온 저하증세로 죽습니다. 몸에 있는 뜨거움은 소화를 시킵니다. 그리고 병원균이 침투하면 열을 내서 병원균을 죽입니다.
몸에 있는 바람의 요소는 진동으로 기의 흐름입니다. 기의 흐름이 막히면 신 체의 움직임이 원활하지 못해서 병이 납니다. 기가 막히면 손이나 다리에 경련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무심히 손과 발을 흔들거나 떱니다. 목이나 상체를 앞뒤로 좌우로 흔드는 것도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해 자기도 모르게 푸는 신체적 현상입니다. 아이들이 욕구불만이 많으면 좌우로 앞뒤로 몸을 흔듭니다. 이것도 욕망으로 인해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스스로 뒤트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히 하는 이런 행동들도 모두 몸의 사대의 부조화에서 온 영향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사대가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면 사대의 균형이 깨진 것입니다. 죽었다면 사대의 변화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단지 사대의 변화입니다. 죽음이란 몸이 부드럽다가 단단해지고, 피가 흐르다가 멈추고, 따뜻하다가 차가워지고, 움직이다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과 동시에 호흡이 정지되는 것도 풍대의 작용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사대의 변화일 뿐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태어날 때 사대의 요소를 가지고 태어나서 물질을 유지하지만, 죽을 때는 사대의 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활동을 끝냅니다.
누구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음을 피해서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죽음을 피할 곳은 없습니다. 이러한 죽음은 어느 날 한 번에 오지만 사실은 서서히 준비했다가 한 번에 나타납니다. 이 죽음의 준비가 바로 사대의 요소입니다. 누가 나를 죽이나요? 나를 죽이는 자는 바로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의 변화와 부조화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대라는 살인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또 나는 사대라는 은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대가 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대는 양면성을 가지고 어떤 조건이 성숙되었느냐에 따라 그에 합당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나를 죽이는 것은 지대입니다. 지대라는 살인자는 부드러운 몸을 단단하게 하여 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죽음을 맞이하게 합니다. 수대라는 살인자는 자신의 몸을 나쁜 요소로 바꿉니다. 그래서 병을 일으킵니다. 나중에는 대소변을 가릴 수 없어서 결국에는 죽습니다. 화대라는 살인자는 뜨거운 몸을 차갑게 해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합니다. 화대가 작용하지 못해 소화를 못하고 병을 이겨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을 식게 하여 죽도록 합니다. 풍대라는 살인자는 호흡을 멈추게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모든 진동을 멈추게 하여 죽도록 합니다. 움직이다가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대는 우리의 생명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대의 역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죽음을 단지 사대의 변화라고 알면 죽음이란 하나의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정지된 것으로 보게 됩 니다. 그러면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비밀을 다른 것에서 찾을 것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대의 조화가 생명을 이어가게 하고 건강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대의 부조화가 건강을 해치게 하고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내몹니다. 여기에 오직 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함께 마음도 있습니다. 마음과 몸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 건강하게 살 수 있고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병에 걸리거나 죽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마음과 몸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하면 사대가 균형을 이루게 하여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대를 통하여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마음이 몸에 영향을 주어서 사대가 일어나게 하고 몸의 사대가 마음에 영향을 주어 행복과 불행을 줍니다. 수행자가 정신적 영역과 물질적 영역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각각의 영역이 다른 영역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을 할 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해서 보는 지혜입니다. 우리의 몸만 사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생물도 모두 사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을 칠 때 물의 부드러움만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물에 단단함과 무게가 있기 때문에 지느러미를 흔들어서 앞으로 차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물이 태풍이 될 수도 있고, 폭포가 되어 전기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새가 날갯짓으로 날 때도 공기가 부드럽기만 하면 앞으로 날아갈 수 없습니다. 공기의 부드러움에 단단함이 함께 있어서 날갯짓으로 공기를 차고 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사대를 알아차릴 때 사대는 하나의 느낌입니다. 이 느낌은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합니다. 가령 단단함이 있을 때 ‘이것은 지대다’라고 개념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뜨거움을 느낄 때도 ‘이것은 화대다’라고 개념화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단하거나 부드럽거나, 뜨겁거나 차갑거나 몸을 통해서 느껴지는 모든 느낌은 그냥 느낌으로 느껴야 합니다.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에 명칭을 붙이는 것은 말하기 위해서 개념화한 것입니다.
대상을 개념화 하는 것을 빨리어로 빠빤짜(papañca)라고 합니다. 사대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명칭이지 그것 자체가 실재는 아닙니다. 대상을 개념으로 보면 대상의 느낌을 느낄 수 없어 법을 보지 못합니다. 수행자가 몸을 알아차릴 때 모양을 보지 않고 사대로 보는 것도 개념이 아닌 실재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재를 또 지대라거나 수대라거나 화대라거나 풍대라고 말하면 다시 개념화됩니다. 그러므로 몸에서 사대를 느낄 때는 그냥 느껴지는 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실재가 구체화됩니다.
6)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
지금까지 밝힌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은 다섯 가지입니다. 들숨과 날숨, 네 가지 자세, 분명한 앎,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의 네 가지 요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은 수행 방법을 하나로 분류하지 않고 아홉 가지 방법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므로 아홉 가지는 각각의 독립된 수행 방법에 속합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앞서 밝힌 다섯 가지에다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을 포함하여 모두 열아홉 가지 수행으로 나눕니다.
묘지에서 아홉 가지를 알아차리는 수행은 인도에서 시체를 내다 버리는 풍습이 있는 곳에서나 할 수 있는 수행 방법입니다. 현재는 이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서 이렇게 수행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시체가 썩어가는 과정에서 백골이 되는 과정까지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직접 시체를 보지 않더라고 시체를 보는 것처럼 생각하고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수행에 포함된 백골관은 현재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 뼈의 모형을 그대로 갖추어놓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모두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가족이나 친척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이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묘지에 성묘를 갔을 때도 할 수 있으며 부모님의 기일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 고 갑자기 누군가의 죽음이 생각났을 때도 이런 수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들의 삶에서 죽음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죽음에 대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은 앞서 밝힌 몸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수행과 같은 목적을 가진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수행 방법이 필요한 것은 오직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만이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읠 수 있기 때문입니 다. 수행자에게 몸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고 법의 성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수행이 필요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많은 성자들은 이러한 과정의 수행을 해서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은 몸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숙고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은 그 자체가 두려움과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데 이렇게 중요한 죽음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인생을 훌륭하게 마무리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수행을 하면 끌려가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차이에 대한 결과는 매우 큽니다. 끌려가는 죽음을 맞이하면 죽을 때 괴롭고 죽고 나서도 좋지 않은 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면 죽을 때 괴롭지 않고 죽고 나서도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하기 때문에 어떻게 죽는가가 중요합니다. 죽음은 일생을 마감하는 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제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을 수행하는 것처럼 죽음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이렇게 불가피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보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죽음은 사대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사대의 변화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대념처경에 있는 묘지에서의 아홉 가지 알아차림에 대한 간추린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면 부풀고, 검푸르고, 문드러진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둘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 떼가 달려들어 마구 쪼아 먹고, 솔개무리가 쪼아 먹고, 독수리 떼가 쪼아 먹고, 개떼가 뜯어먹고, 자칼들이 뜯어먹고, 온갖 벌레들이 다 모여서 파먹는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셋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이 붙어 있는 채로 해골로 변한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넷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이 없이 핏자국만 남은 채로 해골로 변한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다섯째,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 있고, 살점이나 핏기가 없는 채로 해골로 변한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여섯째,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여기에 손뼈, 저기에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두개골 등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일곱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조개껍질 색깔처럼 백골이 된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 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여덟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백골로 변해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아홉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삭아서 가루가 된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
이상이 간추린 내용입니다.
경전의 내용 중에 “첫째, 다시 비구들이여, 그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지나면 부풀고, 검푸르고, 문드러진 것을 보는 것처럼.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첫 문장의 끝에 있는 “보는 것처럼”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체가 변하는 과정을 보는 것처럼 알아차리라는 말은 반드시 시체를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묘지에 가서 이 수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에서고 이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것에 비추어 본다. 이 몸 또한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에서 피할 수 없다고 안다”라고 했을 때는 위빠사나 수행의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해당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무상이며 이와 같이 되는 것은 괴로움이며 피할 수 없는 것은 무아입니다. 이 수행이 바로 법념처며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묘지에서 아홉 가지 알아차리는 수행은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면서 지켜야 할 사항도 매우 많습니다. 이러한 절차는 이런 수행으로 인해 장애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묘지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이 아니더라도 죽음에 대한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바른 가르침을 받으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 수행에서 자비관을 할 때는 이성을 대상으로 알아차리지 않고, 원수를 대상으로 알아차리지 않고, 죽은 자를 대상으로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이런 대상으로 인해 장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어떤 대상이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윤회가 끝나지 않은 한 새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음 과보를 받아 새로 태어납니다. 죽을 때의 마음상태에 따라 세 가지 표상 중의 하나가 뜹니다.
첫째, 자신이 일생 동안 한 행위의 표상이 뜹니다. 그러면 표상과 관계된 세계의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둘째, 자신이 일생 동안 한 행위에 대한 상징적인 표상이 뜹니다. 그러면 이 표상과 관계된 세계의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셋째, 죽은 뒤에 갈 곳의 표상이 뜹니다. 그러면 이 표상과 관계된 세계의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생명은 거의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선하게 살아야 하고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표상은 자기가 한 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평소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을 외면할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죽음의 성품을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런 지혜가 날 때만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죽음을 관념으로 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죽음이 두려워서 애써 부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지옥에 있는 생명에게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지혜가 나지 않은 한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줍니다.
수행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개념이 아닌 실재를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지혜가 계발됩니다. 지혜가 계발된 상태에서는 대상을 볼 때 모두 지혜로 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바른 성품을 아는 마음이 생기면 이제 보는 것마다 바른 성품이 있습니다. 이렇게 법이 앞에서 이끌면 두려움 없는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죽을 때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세계에서 훌륭한 생명으로 새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수행에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따릅니다. 살아온 습관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각오가 필요합니다. “나는 시체다.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없으며,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자존심이 없다.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을 수 없으며,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남에게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탐욕을 부리지 않으며,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는다.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낮은 곳에 누워 있으며, 나는 시체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시체다.”
수행자가 자신을 시체라고 생각하고 모든 감각기관의 문을 닫고 오직 아는 마음만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법의 성품을 보아 괴로움이 소멸됩니다. 그러나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어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수행자가 자신을 시체처럼 낮출 때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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