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
동학세상
동학농민혁명지 장흥역사기행(3)
-장흥 동학농민혁명 정신계승과 현장실천
정암 이무성_광주교구, 소설가
장흥지역의 동학혁명을
지역사로 축소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다.
장흥 동학혁명은
장흥이란 지명의 단순한 지역에서 발생한
지역사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
꺼져가는 동학혁명 정신을 되살려나갔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업 성취는 시대적 상황, 사건
이를 추진할 주체로서 인물 등
민중의 축적된 동력 3박자가 결합되어야 한다.
장흥 동학혁명의 유적지를 기념하여
추억으로서 이를 회상한 것만으로는
장흥동학혁명의 정신을 기릴 수는 없다.
장소로서 지금, 여기 시대란 상황에서
그 동학정신을 생활 속에서 재현 실천해 나가는 것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할이다.
동학혁명의 반대편에서
이를 탄압하고 제압하였던 관군 등 대부분 인사들은
이후 친일파로 변신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었다.
그네들은 일시적으로 장흥 동학혁명을 진압하였지만
결국 그네들의 용어로서
정신까지 말살하는 토벌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장흥의 동학혁명 후예들은
1906년 석대전투지 바로 옆에
동학 천도교 장흥교당으로 그 정신을 이어갔다.
장흥은 문림의향(文林義鄕)으로도 호칭된다.
그 전통들이 장흥동학혁명으로 승화하였고
그 이후 정신계승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필자는 1, 6일이 겹치는 토, 일요일에 열리는
장흥 용산 마실장을 자주 찾아 나선다.
장흥엔 많은 귀농자들이 있다.
이들은 장흥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 살아있는
장흥에 그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나름 현장 실천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용산 마실장이다.
기존 전통5일장과는 달리
주민들 자체로 프로그램들이 꾸려져 가고 있다.
오전에 장을 개설하고 공동체 밥상을 점심으로 나눈다.
각자 수확한 작물도 교환하고
자원재활용도 현장에서 행해진다.
마을학교 학생들도 이날 현장학습으로 참여한다.
사회적 경제학자인 필자로서는
장흥 용산 마실장이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인근 보성. 고흥 등에도
재현되어 추진되기를 크게 희망을 갖고 있다.
천도교 장흥교당을 중심으로 접주제도를
제한적이나마 장흥동학농민혁명 정신 계승을 위하여
매년 펄쳐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취지들이 알려지지 않아
현재는 조그많게 진행되고 있다.
마침 대의정치의 한계로 직접 참여하는
마을공화국 활동이 자발적인 시민조직에 의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마을학당도 준비되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한국엔 85,000개의 마을이 있었다.
이 중 도시와 농어촌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도시지역에서 마을은
아파트 등 서양식 주택제도의 급격한 팽창으로
거의 소멸되었다. 있다고 하여도
이름만 기념비 형태로 남아 있다.
농어촌 지역도 많은 마을들이
급격한 탈농, 생활환경의 변화로 해체되고는 있다.
그러나 15,000개 정도의 마을이
그 형식을 유지하고는 있다.
농어촌 지역이 갖는 그 사회적 가치는 무한하다.
단순히 투입대비 성과산출의 자본 효율성만으로
마을존재를 부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자발적인 주민중심의 장흥의 다양한 실험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형 창출을 통해 타 지역으로의 확산효과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흥역사기행을 3회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역사현장으로서 장흥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등
인물중심 그리고 장흥동학혁명정신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계승하는 형태로서 장흥동학농민혁명이다.
장흥은 지역의 향토사학자, 학계에서 관심을 갖고
민관정언의 결합으로
많은 자료들이 기록 보존되고 있다.
향후에도 그 내용을
더 풍부하게 채워나갈 수 있는 분위기이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목판화가 박홍규 화백의 판화전이
오월미술관에서 있었다.
박홍규 화백은
장흥교당에서 머물면서 작품구상도 그리고
실제로 판화작품도 높은 예술적 가치로 창출하였다.
예술, 문학 분야에서도 장흥지역은
많은 작품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장흥출신 송기숙교수는 『녹두장군』을,
한승원 소설가 등도 동학관련 작품을 집필하였다.
장흥 동학농민혁명은
우금치 전투로 괴멸상태의 민중들의 좌절을
다시 불을 댕기는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 침략야욕으로 당초 척왜 구호 현장실천은
성공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항일 저항정신의 근원지로서
그 맥을 꾸준히 이어갔다.
장흥지역은
산과 바다 그리고 논밭이 병존하는 지역이다.
동학 천도교의 근원은 농어촌이다.
그 중심은 농어민들이다.
실제로 장흥동학농민혁명엔
무수한 민초들인 그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동학 천도교의 역할은 현시대에 참으로 많다.
그럼에도
이를 적극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동학농민정신으로서
농어촌에 우선뿌리를 내리는 동학 천도교를
많은 사림들이 기대하고 있다.
민족종교 동학 천도교는
타 종교와는 달리 전문 교역자 제도를 두지 않고 있다.
지역 교당들이 개설될 수 없는 한계로
전문 교역자의 부재를 필자는 꼽는다.
서구 생활방식이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이를 전문으로 교역하는
전문교역자 제도 없는 조직체는
그 확장력에 제한이 있다.
그렇다고
동학농민정신이 깃든 그 정신을 훼손할 수는 없다.
그 시대정신에 맞게
농어촌에 동학 천도교가 뿌리를 내리는
교역에 대한 고민은 교단 전체적으로 필요하다.
농어촌에서는 전문교역자 없는 생활과 종교 활동이
도시보다는 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장흥 동학혁명을 통해
모순에 가득 찬 한 시대를 개벽하고
민중들을 착취하는 나쁜 관행을 떨쳐버린다면
역사발전의 주체로서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올바르게 익혀
이를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는 관념이 아닌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게
사회정의 실종의 현 한국사회에서 행해야 할
태도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3회에 걸친 장흥동학혁명 기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필자로서 향후 장흥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수행해야 할 일들이 주변 분들과 공유코자 한다.
장흥 향토사학자들의 주문으로는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기에
고증 등 제약을 따르는 내용에 대해서는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소설 등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주라는 당부를
여러 차례 전달받았다.
동학 천도교 등 민족종교 교계에서
동학정신의 실천적인 구현자로서
적극적으로 동학정신의 현장재현에 임해주라는
현지인들의 강한 염원도 있다.
‘장흥동학농민혁명 사료총서1’에 기술한
장흥동학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발췌 인용함으로서
글을 매듭 하고자 한다.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근대사의 주역으로
반외세 반봉건을 쟁취하여,,,이하 중략...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수천 년 지탱해 오던 봉건체제나 인습이 타파되었다.
장흥동학농민혁명은
반외세 민족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남북접이 연합하여 전개한 구국항왜 투쟁은
반외세 민족주의가 절정에 달했다.
장흥동학혁명군이 전개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기포는
어느 곳보다 활발하게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였고
역사발전의 주체인 민중이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주장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항쟁을 장식하는
최후 격전지로 대미를 장식하는 서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