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쩌다 집이 허물어지면
눈이 부신 듯 벌레들은
꿈틀 돌아 눕는다
똥오줌은 어디에다 버릴까
집안 가득 꼴이 아닐텐데
입구 쪽으로 꼭꼭 다져 넣으며
알맞게 방을 넓혀 간다
고추에는 고추벌레가
복숭아 여린 살 속에는 복숭아 벌레가
처음부터 자기집이었으므로
대물림의 필연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어울리는 옷으로 갈아 입으며
집 한 채씩 갖고 산다
벌레들의 방은 참 아늑하다
2
PVC 파이프 대리점 옥상엔
수많은 관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아직은 자유로운 입으로 휘파람 불고
동우리를 튼 새들 관악기를 분다
아귀에 걸린 지푸라기나 보온덮개 쪼가리가
빌딩 너머 먼 들녁을 향해 흔들린다
때론 도둑고양이가 올라와
피묻은 깃털만 남기고 가는
문명과 원시의 옥상으로
통이 큰 주인 아줌마가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또 몇 개의 관이 땅 속이나 콘크리트 사이에서
우리들의 쓰레기나 소음으로 배를 채울 것이다
그리하여 관을 타고 온 것에는
새끼 잃은 어미새 소리가 있고
도둑고양이 이빨 가는 소리가 뛰쳐나온다
피묻은 둥우리, 숨통을 막는
보온덮개의 질긴 터럭이
우리들 가슴에 탯줄을 늘이고,
PVC 파이프 그 어두운 총신들이
퀭한 눈으로 꼬나보고 있다
3
우리들의 가슴 속에도
제 집안 양 덩치를 키워 온
수많은 벌레들 으쓱거린다
햇살 반대편으로 응큼 돌아눕는
그들과 우리는 낯면이 많다
코를 풀고 눈꼽을 떼내며 아침마다
우리는 벌레의 집을 청소한다
그들의 방으로 채널을 돌리고 보약을 넣고
벌레들의 집은 참 아늑하다
■ 세계일보
이사
/원동우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 지하의 네 평 바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썩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목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는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않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가을 건넌다(닻을 올리기엔
조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서랍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발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참
잔판 밑에 장판 밑에
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
강을 건저 이제 마악 변두리로
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
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
쉽게 살아지는 것임을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 문화일보
그리운 약국
/배정원
세번째 약국엔 새장이 있었다
햇살은 넉넉하였고 한 쌍의
카나리아는 하얀 진통제를 쪼고 있었다
구리반지보다 더 가느다란 손이
진열자을 열면 아스피린들,
눈처럼 쏟아져
아직 족지 않은 눈은 눈물겨웠다
병든 과일나무 분재의 웃음이
석유스토브의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던, 겨울
아침 저물 무렵
시장골목이 끝나는 곳에
세번째 약국이 있었고 그곳엔
소복을 걸친 약사와, 정적과, 불치의
病이 있었다
캡술에 든 흰가루를
드링크제의 목을 비틀어 마셔도
해독되지 않는 날들은
식도의 어디쯤에서 분해되는가
유리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햇살은 또 그렇게
저희끼리 몰려다니며 깔깔대고 있었다.
■ 중앙일보
流配詩帖
-남해 가는 길
/고두현
물살 센 노량해협이 발목을 붙잡는다.
宣川서 돌아온 지 오늘로 몇날인가
윤삼월 젖은 흙길을
수레로 천 리 뱃길 시오 리
나루는 아직 닿지 않고
석양에 비친 일몰이 눈부신데
망운산 기슭 아래 눈발만 차갑구나
내 이제 바다 건너 한 잎
꽃 같은 저 섬으로 가고 나면
따뜻하리라 돌아올 흙이나 뼈
땅에서 나온 모든 숨쉬는 것들 모아
花田을 만들고 밤에는
어머님을 위해 九雲夢을 엮으며
꿈결에 듣던 남해 바다
삿갓처럼 엎드린 앵강에 묻혀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
*앵강: 西浦 金萬重이 유배 살던 남해 櫓島 앞바다 이름.
■ 서울신문
한강 갈매기
/김현파
옅은 안개 깔린 강 표면에서 솟구치는
비둘기보다 큰 새를 보았다 차량행렬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흰 바탕에 회색 무늬 날개를 가진 새
혹, 서해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가 아닐까
시내버스 손잡이에 흔들리며 禪僧의 깨달음처럼
번쩍 스치는 예감
삼각지 로터리를 돌아 서울역 남재문을 지나면서
그 새는 빌딩숲 깊숙히 묻혀버렸다 화석 같은
짙은 흔적을 남기고
그날 이후 밤마다 꿈을 꾸었다
뱃고동소리 파도에 부서지는 항구
하얗게 빛나는 등애 위에서 나는 은빛 날개로
푸른 하늘을 날았다 무인도를 지나
황톳물 출렁이는 대륙
사막을 날았다
만년설의 히말라야 산맥에서 날개를 접기도 했고
먼 아프리카 조그만 어촌을 날았다
달빛 별빛 어우러지는 날 밤에는 어훌너훌
춤을 추기도 했다
대낮에도 꿈을 꾸며
청계천이나 남대문시장을 기우뚱대기도 하고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 엉성한 몸짓으로 부리 끝을
갈고 또 갈아 보았지만
어느덧 무서리로 덮어지는 이 땅
벌써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고
보도블럭 위 플라타너스 잎은 한 장 두 장 떨어지는데
헛일이었다 정말 헛일이었다
손목시계를 차고
넥타이를 매고
오늘도 신발끈을 졸라매 보지만 언제나 아스팔트길에서
프득대기만 한다
한 장의 낡은 양복으로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감추고
두고 온 해안
모래톱에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그리우면
한강엘 간다
더 높은 하늘
더 넓은 바다가 그리우면 잡초 우거진 고수부지에서
끼룩끼룩 울어대기는 하고
콘크리트 강둑을 걷기도 한다 남 모르게
날갯짓도 해보고
낚싯줄을 제 목숨마냥 늘어놓은 늙은 갈매기
젊은 갈매기들
노을에 일렁이는 물살을 보며 소주잔에
두고 온 고향을 타 마신다
유람선 선착장을 맴돌다 한강 철교를 향하여 날아가는
갈매기를 망원경을 통하여
지금은 갈 수 없는 그곳을 생각하며
■ 한국일보
소금에 관하여
/서영효
부서진 은비늘이 모여
복귀할 수 없는
윈시의 水草를 모래밭에 그리는
하얀 눈물 자욱.
과학적으로 말하면
이온 결합일 테지만, 미완의 입자들이
손 마주잡고
태양 아래서
날아갈 것은 날아가고
結晶을 이룬 무리들이
맛을 낸다.
나의 몸이 싱거운 터라
한줌 집어 상처 위로 뿌리니
잊었던 꿈들이
일제히 강줄기 따라
횃불을 밝힌다.
그것은 하얀 불이었구나
피톨이 불을 당겨
곰팡이 홀씨 둥둥 떠다니며
간이나 뒤, 뼈 위로 꽃피우는
온몸으로
퍼지는 화염
靑靑한 몸이로구나.
■ 매일신문
삼월의 주남池
/윤우
겨울 동안 내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던 새는
유년의 흑백사진 같은 빈 둥지만 남긴 채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버렸다.
나는 삼월의 주남저수지에서 빵으로 헛배를 채우며
몸의 빛에 쫓겨 엉덩이 밑으로 숨어들어온
갈대들의 깊은 겨울잠을 어쩔 수 없어 했다.
떠나야 할 때 떠날 수 있는 새는
얼마나 잔인한 짐승인가.
나는 휴일의 길지 않은 시간을
쉬이 낫지 않는 겨드랑이의 상처만 바라보다가
저녁 어스름 속을 걸었다.
떠날 수 없는 새,
맥박소리가 낯익게 들렸다.
* 주남지 - 경남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 도래지.
■ 조선일보
상처
/전대효
1
버스가 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옆에 선 사내가 근육을 긴장시키며 손잡이를 움켜쥔다. 사내의 팔뚝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보인다. 둥글고 큼직하게 주위 살들을 잡아당기며 아문 흉터가 세 개 일렬로 박혀 있다. 언제였던가, 나도 그런 시도를 한적이 있었다. 술을 많이 먹고 친구들 앞에서 고토을 참으며 독하게 지졌었다. 상처는 많이 부풀어올랐다. 며칠 동안 팔 전체가 화끈거렸고, 화끈거렸지만 아무 흉터도 남지 않았다.
햇살 내리네 저 햇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따사로운 햇살
사내는 아마 물집이 생긴 자리를 세 번 이상 더 지졌을 것이다. 아무도 근접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기억을 훈장처럼 팔뚝에 새겨넣기 위하여 사내는 아까처럼 팔뚝의 근육을 긴장시키며......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젖은 숫돌처럼.
2
지나간 일들은 정말로 지나가 버린다. 그날에다 지금에나 햇살 저 햇살,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만 있다. 그런 식의 무례한 작별 인사는 그를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들꽃에게라도 말 걸고 싶은 발걸음. 얘 너도 집이니? 아니 나는 城이야.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 기억만 고대인류의 꼬리뼈처럼 전화의 문턱에서 흔들거릴 뿐.
■ 부산일보
새
/김정미
그 집에는 대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정원이 있다
정원과 맞붙는 베란다에는
한 뼘 간격의 가느다란 창살들이 쳐져 잇고
공기 숲 나무 하늘 바람의 유혹을 막아 줄
창문도 칸막이도 없다
창살 중앙위 고리에는 초록색을 칠한 작은 새장이 걸려 잇고
새장 안에는
갓 솟은 태양보다 맑은 순금빛의 노랑새가
자작나물로 만든 횟대에 올라앉아
여린 음성으로 지저귀며 눈망울을 반짝인다
숲에서는 새들의 노래 소리가
가을 참나무 고리보다 요란하다
여기에서의 정적은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와
바람이 투명한 몸짓으로 하얀 파도를 일으키며
싱그런 풀잎을 반대편으로 쓸어 누일 때
견디다 못한 정원 귀퉁이 천리향이 바람을 좇아
뛰쳐나가 아찔한 향기를 숲으로 풀어놓는 순간
가볍게 스쳐가는 하늘의 옷자락과
그들의 귀에만 들려오는 아득한 우주 지구 회전하는 소리
꽃들이 봉오리 틈 사이 주름을 펴며
화관을 만드는 소리
아침이 가라앉을 시각
정오의 우유빛 마취가 그 작은 두뇌 속에
차오르는 졸음을 밀어 올려
가물거리는 눈망울이 가라앉을 때
달려가던 바람이 하얀 풀잎을 세우며
돌아오는 그때일 뿐이다.
첫댓글 문화일보 당선자인 배정원 시인은 당시 목요시창작교실('한국문예창작학교'의 전신)의 창작회원이자 경희대 늦깍기 대학생이었습니다. 지금 태국에 가있는데 참 많이 보고 싶네요. 유샘과는 회관에서 만난 친구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