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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점(頓.漸)오수론(悟修論)에 대한 방외자(放外者)의 견해(2)
이경재/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 한국학과 강사
6. 홀(忽)과 시간
홀(忽)이란 무엇인가? 지눌에 잇어서 홀은 “從迷而悟卽 頓”이라는 말에서 그 단초를 찾아 볼 수 있다. 迷를 觀하는 과정이 쌓이고 쌓이는 가운데 문득 일어나는 어떠한 비등점의 시간이 지눌에 있어서는 忽悟의迷이다. 이같은 忽悟의 경험은 실상 지눌 자신의 경험과 유리될 수 것일 터이다. 젊은 시절의 지눌은 學에 열중하던 중 육조의 단경을 읽다가 또는 화엄경과 이통현의 화엄경 해를 읽다가 또는 대혜의 글을 읽다가 그의 의문이 풀리는 忽悟의 극적 체험을 하였다고 말하여진다. 그러기에 지눌에 있어서의 홀의 순간은 시간 과정에서의 한 점, 새로운 앎이 비등하는 그러한 카이로스적 익은 점이요, 모든 것이 이 점을 근거로 해서 시작되어야 하는 극적 순간으로 작용한다. 그의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홀오의 경험은 이러한 확실한 앎을 통하여야만 修의 삶이 가능하다는 지론으로 정립된 듯하다. 불변의 性을 悟한 순간부터 看心修淨이 올바로 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거꾸로 지눌에 있어서看心修淨 이 요청되기 위하여는 忽悟의悟는 解悟處가 있는 悟이어야만 한다. 만약 解悟處가 없는 悟라면 看心修淨의看과修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기에 지눌은 점수돈오, 점수점오(漸論 頓悟, 漸論 漸悟)의 에 대하여 돈오점수를 해오라 부른다. 그러나 그의 시간관에 의하면 해오라 부른 것은 그의 철학에 있어서修를 위한 頓의 悟解處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지눌에 있어서 홀(忽)의 점은 看心修淨의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오는 시간에 대한 因의 점이며 지난 시간에 대한 익은 果의 점이다. 따라서 그의 이중적 철학 구조 안에서 지눌은 돈오를 말하고 그 돈오는 점수를 위한 출발점 노릇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며 결국은 修를 위한 전제로서의 悟를 말하게 되는 필연을 지닌다. 忽悟 다음에라야 漸修가 가능하다는 논리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철저한 검증을 필요로 하나.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漸이란 시간적 과정의 개념으로써 인과법의 연기적 범부에 속한다. 일상적 시간의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적 연속의 사슬로 나타난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성찰은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실체의 연결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과거란 "이미 지난 현재"요 미래는 "아직 오지않는 현재"일뿐이다. 그러면 현재라는 순간은 무엇인가? 현재란 실체인가? 시간은 현재, 지금이라는 忽의 연속인가 ? 그러나 현재라고 상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현재가 아니요 과거일 뿐이다. 현재라고 상정되는 순간은 실체(Substance)가 아니요 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현재는 실체화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미래를 이미 포함하고 과거와 미래를 여는 (open)비실체적 근원이요 시간의 근원성으로서의 間(하이덱거나 데리다의 Difference와 같은) 자체이다. 현재라는 순간의 忽은 空이면서 시간의 본 모습이요 스스로를 開示하는 性起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忽은 無間之間의 실체가 없는 시간의 體卽用의 순간이다. 결국 우리가 실체로 알고있는 色으로서의 시간은 空의 顯現일뿐이요 空의 起일뿐이다.
연기적 점(漸)이 래디칼화 되면 空이 되고 그 空은 성기(性起)의 논리로 발전된다. 頓은 순간, 그것도 눈깜짝할 순간, 번개불보다도 빠르게 번쩍하는 잡을 수 없는 순간 그러기에 忽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순간이다. 수학에서 點이 면적을 지니지 않는 존재 즉 비존재이면서 선과 면적 부피등의 존재의 원천이듯이 홀은 현재적 순간, 그러기에 실상에 있어서 공의 시간적 표현이다. 아니 그보다 더욱 적절한 말로 점 (漸)은 頓의 현전이요, 頓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점(漸)이다. 頓안에서 漸은 이미 그 실상을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頓에서 보면 漸은 실체가 아닌 환화(幻花) 와도 같다. 頓에 사무치면 시간은 가면서도 가지않고 오면서도 오지 않는 셈이다. 시간적 과정이라는 점(漸)은 頓이라는 性의 起일 뿐이요 頓에서 완성된다 하겠다.
여기에 지눌의 홀(忽)이 禪의 홀(忽)과 다름을 엿볼수 있다. 지눌에서의홀(忽) 이修의 출발점으로서의 홀(忽)이라면 禪의 홀(忽)의 修의 출발점으로서의 忽이 아니라 悟와 修가 한 몸에서 구현되는 그러한 忽이다. 성철의 경우 시간은 이러한 홀(忽) 에 사무쳐 있다. 수修를 위한 출발점이라 하지만 실상 시간의 연속성에서는 출발점도 끝도 없다(무시무종無始無終). 지눌이看心修淨을 위하여 요청하는 홀오(忽悟)라는 출발점도 따지고 보면 출발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라 "생각되어진" 과거에 대한 해석이요 이해요 추정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출발점이라는 구조 자체가 선적 悟안에서는 해체(Deconstruction)되고야 만다. 점(漸)을 요청하는頓은 덜익은 悟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성철의頓은 가장 래디칼한 시간관의 표현이다. 禪이 지니고 있는 현대 철학적 매력도 바로 이頓적 시간관을 통한 전통적 형이상학의 해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忽적 시간에 대한 근복적으로 다른 이해는 지눌로 하여금 출발점으로 시작하여修라는 중간이 있고 구경각이라는 끝이 있는 산문적인 문학구조를 지니게 하는 반면, 성철로 하여금 전체성에 대한 직관이라는 시적 구조를 지니게 한다. 성철의 시간은 철저한 자유의 익은 시간이다.
7. 眞心/ 妄心. 眞我 / 忘我
지눌의 철학적 구조가 이원적이듯이 그의 悟의 내용으로서의 我是佛에 대한 이해도 역시 이원적이다. 지눌은 我를 眞我 / 忘我로 또는 心을 眞心/ 妄心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지눌에 있어서 돈오란 진심을 悟하는 것이요 점수란 妄心을 다스리어 轉凡成聖이 되게하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頓悟가 眞心是佛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悟하는 것이라면 漸修는 그것을 실존적으로 구현키 위한 닦음의 노력이 된다. 그러기 위하여 眞心은修의 因이요 목적이 된다.
그러나 지눌의 이중적 구조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眞心/ 妄心이 실은 心하나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心하나에서眞도 나타나고 忘도 나타나는 것이지眞心은 佛이고 망심은 佛이 아니라는 이중적 논리는 心의 본질을 간과하는 성싶다. 眞心도 妄心도 모두 하나인 心 의 작용일 뿐이다.
心자체가 空임을 悟한다면 어찌 진심과 망심을 구별하고 논할 자리가 생기겠는가. 진심만이佛이라면 妄心의 心은 佛法과는 다른 어떤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心이외에 어떤 또 다른 心이 있다는 말인가? 眞心을悟했다고 하는 믿음마저도 空하는 것이 禪의 철칙이거늘 어찌眞心을 알고 妄心을 다스림이禪이라 할 수 있는가? 禪은 더욱 래디칼한 心자체의 깨달음을 주축으로 하기에 말이다. 달마의 제 2조에 대한 "心을 보이라"는 선문이나 제 6조의 "닦을心마저도 없다"는 게송은 모두 이러한心자체에 대한 禪의 활달 무애의 모습을 보여준다하겠다.
지눌의心의 이중적 구조는 결국 선이 말하는 心자체의 空성을 사무치는 頓悟에 비하면 아직 덜 래디칼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眞心을 따라서 妄心을 다스리고 修하는 지눌의 解悟漸修는 선의 頓悟가 아니라는 성철의 지적은 정당하고 정확한 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눌의 해오점수(解悟漸修)가 敎家의 수행이요 유고적수기(修己) 에 가깝게 보여짐은 우연이 아니다.
앞서 우리는 왜 지눌은 頓悟 뒤에漸修를 놓아야 했던가를 보았다. 忽이라는 시간적 문제에서頓悟 즉 解悟는漸修를 위한 출발점이 되었고 그것은 지눌이 경험한 삶의 내용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았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지눌의 이중적 철학 구조가 낳은 결과임을 언급하엿다. 이를 좀더 상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자.
지눌에 있어서 비인과적인 돈오의 내용이 인과적인 점수의 출발점이 된다 할때에 그 근거는 "頓悟自性 本來空寂 與佛無殊 而比舊習 卒難 頓除故 "(自性 이 본래 공적하고 佛과 조금도 차이가 없음을 頓悟하나 구습을 갑자기 한번에 제거하기가 어려운 고로)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구습(舊習)은 인과법에 속하고 除도 역시 인과법에 속한다. 구습을 갑자기 돈제할 수 없음으로 頓悟의 새로운 因을 가지고 구습을 漸除하는 것의 요청이 점수의 내용이다. 철저히 인과법적이다. 그러고 보면 지눌의 頓悟는 새로운 인과법의 출발을 위한 기준적인 앎이요 그 바탕이 되는 해오일 뿐이다. 즉 頓悟의 내용이眞心是佛 이요 점수의 내용이 전범성성(轉凡成聖)이기에 진심과 佛은 聖이요, 망심과 凡은 聖으로 轉하여야만 할 Telos(종착지- 편집자 주)이다. 따라서頓悟의 내용은修의 因이요 성취되어야 果로서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이는 성철이 말하는 원증(圓證)으로서의 돈오(頓悟)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눌의 돈오점수는 선재동자의 初發心, 수행여정, 편정각의 산문적 이야기 구조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불변/수연을 쌍(雙)으로 놓고 頓悟/漸修를 쌍(雙)으로 놓은 체/용의 이중적 구조속에서 양자를 모두 잡으려 하는 지눌의 회통론은 결국 체와 용의 무애라는 사무침에 이르지 못하고 만 느낌이다.
체와 용이 올바른 논리에 서게되려면 體卽用 또는 用卽體라는 無得의 차원까지 가야한다. 迷 라고 생각되던 用에 대한 대 부정으로서의 眞如의 體는 用에 대한 대긍정으로서의 體로 그 활달 자재의 경지까지 가야한다는 말이다.
흔히들 한 物을 바라보는데 體적접근과 用적 접근을 말하나 그것은 언어가 갖는 한계적 굴레에 의해서 그런 구별이 생기는 것이지 실상 체와 용은 物안에서 두개로 구별된 것이 아닌 하나의 구현일 뿐이다. 體卽用用卽體란 바로 이러한 진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열매맺는 것이 不變/修緣이 자연에서 하나로 구현되어 운행되는 법이듯이 我卽佛이 맞는 말이라면 我는 하나의我일뿐이요 그 하나에서 체와 용은 하나로 구현 되어 있을 뿐일 것이다. 이는 거꾸로 체와 용의 차이는 실상 我안에서 空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禪의 頓悟는 이러한 체즉용의 대긍정의 세계를 보여준다. 성철의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禪語는 실로 이러한 대긍정의 표현이다. 대긍정의 무애한 세계속에서 어찌 悟와 修를 나누어 따질 여지가 있겠는가? 진정한 頓悟라면 悟卽修 가 이 한 몸에서 구현되어 있음을 보여햐한다는 말이다. 성철은 이러한 悟卽修의 頓的 사무침을 圓證이요 究竟覺이라고 표현하고있다.
그러나 지눌은悟와 修를 이중적 구조속에서 파악하는데 충실하다보니 悟는 인과법적修를 위한 悟解處로 상정하게 된다. 돈오의 體성을 강조하면서도 오해처가 없는 頓悟를 걱정함으로 落之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였고 수연의修만을 강조하다 보면 체연상(滯緣相)에 머무를까 염려하였다. 그러기에 지눌의 돈오점수의 辯은 불수공적(不隨空寂)과 불체수연(不滯隨緣)을 피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조사선의 대긍정이 落之空 滯隨緣의 이원상에 있다 하겠는가.
지눌의 悟와 修를 그의 이중적 철학 구조안에서 회통시키려 함으로 결국 悟와 修가 하나로頓되는 禪적 세계를 놓치고야 말았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결과로 지눌의 돈오가 성철의 돈오가 아니게됨은 당연한 일이다. 지눌이 선교의 회통을 돈오점수로 이루었다는 말은 기실 敎에서 禪을 해석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8. 解悟와 知解
앞에서의 논술로 지눌의 돈오가 실상 禪의 원증(圓證)으로서의 頓悟가 아님을 일단은 밝혀졌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다시금 해오와 지해를 말하려는 것은 김호성氏의 지눌에 대한 충실한 미화가 실상 지눌을 오도하고 있지 않나 하는 필자의 우려 때문이다. 불교학자로서의 氏의 학문적 열정을 존경의 念을 지니고 바라보면서 두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해오가 지해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
앞서 우리는 지눌의 철학적 구조와 그의 삶이 갖는 悟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돈오점수의 양문을 두게하였고 또한 그의 돈오는 禪가 에서 말하는 돈오가 아닌 지해의 解悟임을 보았다. 지눌의頓悟卽解悟가 지해인가 아닌가는 禪가의 규범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요 지눌의 禪敎를 회통했다는 데 대한 비판적 검토에서 그렇다는 말임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氏는 시종일관 지눌에게는 해오가 곧 견성이요 절대적으로 완전한 구경각이라고 하면서 지눌의 해오를 지해로 보는 것은 선문정로의 입장에서 보는 편이라고 주장하는 성싶다. 그러나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지눌의 자신의 돈오를 구경각으로 보았느냐 안했느냐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주장했던 해오가 禪문의 구경각과 같은 것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비록 지눌 자신이 氏의 주장처럼 해오를 證悟와는 다른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이라 생각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禪문의 주장과는 다른 것이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지눌은 왜 해오와 증오를 갈라서 생각했는가? 이는 앞서 말한 지눌의 개인적 경험과 그의 철학적 구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先悟後修를先修後悟와 구별하여 해오와 중오로 구별하는 문제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悟와修의 문제를 철저히 先과 後의 문제로 다뤘다는 자체가 앞서 "홀忽"의 이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눌철학이 안고있는 산문적 구조성을 말하고 있다. 지눌의 불변/수연이라는 이중적 구조에서 보면 선후의 문제는 논리적인 선후인 동시에 시간적 선후이기도 하다. 다시말하면 선후의 문제는 넓은 의미에서 因과 果의 문제라는 말이다. 이런 연고로 지눌은 청량(淸凉)의 정원소(貞元疏)
를 따라"약인오이수 즉시해오, 약인수인오 즉시증오(若因悟而修 即是解悟; 若因修而悟 即是證悟)' "(만약 悟를 인하여修하면 해오요 修를 인하여悟하면 증오다)라고 말하는 바이다. 因의 문제는 지눌에게서는 불변/수연의 구조적 요청으로서의 논리적 a priori이자 올바른修를 위한 존재론적 근거로서의 시간적 출발점이다. 그런 양자적 의미가 지눌에게는 혼재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논리적인 a priori로서의悟의 요청은 悟가 항시 올바른 修의 전제가 되게 한다. 그러나 漸修를 위한 출발점으로서의 悟는 동시에 시간적 선후로서 이해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런 의미에서 지눌은 돈오돈수의 돈오도 금생에서 보면 돈오나 來生에서 보면 결국 점수의 결과 즉 因果門의 결과라고 말하는 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해오도 결국 증오일 뿐이다. 단지 지눌이 해오를 굳이 증오와 구별지어 생각한 것은 올바른 修의 요청을 반조(返照)의 근원처, 해오처로서의 因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생각된다. 眞心是佛의 해오처가 없이는 修라는 返照 할 근거가 없음으로 올바른 修가 되지 못한다는 철학적 요청이리라.
氏가 "점수 이후 증오가 없는 것도 해오와 증오가 다른 차원임을 나타내는 것과 함께 해오의 절대성, 완전성을 의미하고 점수뒤에<->가 있는 것은 점수의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지눌 자신을 곡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은 거꾸로 禪가에서 말하는 오수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것임으로 성철의 주장을 오히려 정당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오의 절대성 완전성이 지눌의 철학 국조 안에서는 불변의 非因果門에 해당하는 眞心是佛의 存在論적 동일성에서 그렇다치고 점수의 영원성이 隨緣의 인과문적 실존적과정이라 치더라도 그것은 불변/수연이 하나의 性에서 직시되고 무애로 통합되는 선가의 圓證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더군다나 지눌에 있어서 점수는 氏의 주장처럼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轉凡城聖의 telos를 위한 과정일 뿐이다. 氏의 주장과는 반대로 지눌이 돈오돈수를 해오와 증오의 悟修一時로 보았던 것은 바로 해오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修에서 실현되는 圓證의 세계를 修의 tclos로 삼았다는 것이다. 轉이나 成 이라는 동사가 가리켜 주듯이 지눌의 修 는 영원성 자체가 아니라 聖이라는 悟修一體가 구현되는 목적을 위한 과정이다.
더군다나 氏가 돈오돈수가 시간적 차별적이요 돈오돈수가 무시간적 무차별적이라는 怪說을 말하는 것은 지눌의 철학적 구조를 오해함으로 말미암아 頓/漸의 양자를 모두 절대적, 영원적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라 아니할수 없다. 지눌의 철학 구조는 앞서 본 바와 같이 항시 이중적이다. 不變/隨緣, 性具/現行, 體/用, 先/後 등등이 다 그러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 頓悟/ 漸修도 이러한 구조에 의한 사유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사유구조에 대하여 를 할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이러한 사유구조가 적인 래디칼한 경험과 맞아 떨어지느냐에 있다.
선적인 경험은 양자가 하나로 무애되는 圓證의 구경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氏의 간화선이 근기가 낮은 사람에게 제시된 약이라는 에 대하여:
‘간화결의론’에서 몇 대목을 뽑아 봄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보기로 하자.
" 교외별전, 형출교승, 비천식자, 소능감임., 敎外別傳, 迥出敎乘, 非淺識者, 所能堪任"( 敎밖에 따로 설한 禪문은 敎보다 멀리 뛰어나서 앎이 비천한 자는 능히 이를 감당할 수 없다.)
" 약시상근지사, 감임밀전, 탈략과구자, 재문경절문무미지담, 불체지해지병, 변지락처, 시위일문천오, 득대총지자야. 若是上根之士, 堪任密傳, 脫略窠臼者, 纔聞徑截門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만약 상근기의 선비가 밀전을 감당하여 둥우리를 벗어날 수 있는 자라면 경절문의 무미한 말을 조금만 들어도 지해의 병에 걸리지 않고 곧 낙처를 알아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으니 대 총지를 얻는 자라 하겠다. )
여기 어디에 간화선이 하근기를 위한 처방이라는 괴설이 붙을 소지가 있는가. 오히려 그 정반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간화선은 간화결의론에 의하면 상상근기의 길임이 명백하다. 따라서 論에서는 禪門에도 密傳을 감당키 어려운 자들을 위하여 화엄의 진성연기사사무애법眞性緣起 事事無礙法)즉 화엄교학을 설한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한마디 덧붙이기로 하자.
필자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지눌의 간화결의론이라 하지 않고 그냥 간화결의론이라고 지칭함에 머리 회전이 빠른 독자는 여기에 무슨 음모가 숨어있지 않나 생각할지 모른다. 과연 그렇다. 지눌 사후에 발견되었다는 이 저서에는 놀랍게도 그 어느 곳에서도 지눌의 불변/수연, 돈오/점수의 이중적 구조가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간화결의론이 지눌의 저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 한가지 가능성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저작자의 이름을 어떤 스승이나 성인의 이름으로 갖다 붙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 성서에서도 모세 오경이나 다윗의 시라는 이름이 붙은 책들이 실상 모세나 다윗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임은 다 이런 전통사회의 관습 중의 하나이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름이 강조되고 그것이 중요한것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실상 저서가 소유권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적 개념의 소산이다. 여하튼 전통사회에서는 간화결의논이 지눌의 저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지눌의 이름이 붙었다 한들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이 한 가능성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만약 간화결의 론이 지눌의 저작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실상 지눌 자신의 철학 구조의 부정이요 그 부정을 통한 승화(昇華)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철이 간화결의론을 이런 각도에서 파악한 것은 실로 정확한 진단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간화선은 그 어떤 다른 禪이나 敎와도 비교할 수 없는 중국적 불교의 금자탑이요 세계 정신사에서 그유례를 볼수 없는 독특한 양태의 종교경험이다. 화두선이 독특한 언어 양태를 지니고 있음으로 언어학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보면 간화선은 가장 래디칼한 언어철학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제는 본소고의 한계를 넘는 것이기에 잠깐 맛만 보고 지나가자.
인간은 언어라는 존재의 집을 통하여 사유하고 표현하고 교통을 한다. 널리 말하자면 종교나 문화 일반 자체가 언어적 구조의 표현일 뿐이다. 앞서 말한 지눌의 불변/수연, 체/용, 돈오/점수등의 이중적 구조도 실은 언어적 구조의 이중성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쏘쉬르 이후의 인간 문화의 모둔 구석구석을 언어학적 구조에서 해명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語路, 義路 등의 언어 현상 즉 문화현상의 원천이라는 것이 실상은 인위적(artificial)이요 차별적(differential)기호조직이라는 것이 기호학의 전제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오수론에 있어서 이 기호학의 전제는 어로, 의로를 따라 또는 從迷而悟의 迷를 따라 悟하는 敎는 그 자체의 인위성을 말함으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禪의 悟와는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무리 어로,의로를 따라 悟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解悟요 지해일 수 밖에 없다. 언어자체의 인위성과 차별성, 따라서 인간 현상 일반의 인위성과 차별성을 그 근본에서 하는 길이 언어학적으로 보면 바로 話頭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언어가 깨지는 것은 관습적 기존 사유가 깨지는 것이요 인위적 기존문화가 깨는는 것이요 차별성의 실체가 벗겨지는 깨침의 경험이요 그로인한 대긍정의 깨침의 경험이다. 언어라는 차별성과 인위성의 감옥에서 살던 사람이 비차별적 무애 자재의 경험을 맛보는 것이다. 기호학은 언어라는 구조적 조직에서 그 법칙을 구명하는 작업임으로 이러한 독특한 경험을 상정은 하되 담당할 수는 없다. 그 어떤 철학도 이러한 일을 감당치 못한다. 단지 화두만이 기호학적 Signified/ Signfier의 이중적 구조의 인위적 차별적 구조를 발가벗기는 래디칼한 길을 보여준다. 언어학적면에서 볼 것 같으면 화두선이 지니는 그 유일한 독특성을 敎와 회통시키려는 노력으로 교적인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려는 것은 실로 위험한 발상이런지도 모른다. 아무리 회통이 좋다 할지라도 또는 가령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화두선의 독특성과 그 유일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들어가야겠다는 말이다. 회통도 좋고 통불교도 좋지만 다른 전통의 다름을 획일화시키는 노력은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遇를 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9. 나가는 말
필자는 위에서 마치 성철을 두둔하고 지눌을 매도하는 듯한 논술을 폈지만 그것은 어띠까지나 다름은 다름으로 취급되었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은 다른 철학적 사유구조 속에서 사상을 전개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였을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이제는 만남을 이야기 해보자.
지눌과 성철이 그들의 사상전개에 있어서는 다른 양태를 보이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구도자적 삶은 모두 誠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안에서 보여주는 의 태도는 모두 절실한 것이고 특히 방외자의 눈에는 몹시 존경스런 것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사회와 역사 변혁이라는 19세기 이래의 사회의 어느 구석에서 화두를 들고 씨름하는 선사의 땀방울과 경전을 이마에 대고 밤을 밝히는 수도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마음誠을 발견케되고, 그 성의 마음이야 말로 거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항이요 위대한 거부의 몸짓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도르노(Adomo)는 비상품적 전위예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상품가치만을 따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요 행위라고 보았다. 비록 사상을 다르다 할지라도 세상에 약삭빠르기를 거부하고 묵묵히 용맹정진하는 인간들이 잇다는 자체가 나 같은 방외자에게는 용기가 되고 한국불교사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소이연이 된다.
지눌을 읽어가노라면 우리는 살아 숨쉬는 따스한 스승을 만나게 된다. 앎이 태산을 버금해도 모자라 다 겸하며 배우고 정진하는 후학의 사표, 근기따라 가르치는 한국인의 자상한 스승, 지눌의 끝없는 의 마음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성철을 읽노라면 우리는 性이 사무치어 한마리 白虎가 된 호랑이 너털웃음을 듣게 된다. 마조가 달리고 백장이 꿈틀대는 성철의 맥박은 자상한 지눌의 因地而起의 처방을 거부한다. 실유불성(悉有佛性)과 我是佛의 유아독존적 사무침을 보지 않고는 성철은 임제와 같이 영원한 반항인이요 체재를 떠나 자유인이다. 가야산에 흩어지는 정전백수자[MT1] 구자무불성 동산수산행(庭前柏樹子 狗子無佛性 洞山水上行)의 화두행열은 그의 기개를 드러내는 허공의 자유이다. 성철의 사상은 강자의 철학이다. 땅에 넘어져 코가 깨져도 껄껄대는 장부의 철학이요 상근기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성철의 虎聲은 돈오점수를 지해정도의 아류로 질타하며 敎를 넘어서는 선적 자유의 기개를 과시한다.
지눌을 따르든 성철을 따르든 불자들이 진정 그들의 스승을 위할진대 스승의 교서를 이데오로기화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誠에서 하나가 되는 그 한마음을 배워야 겠다. 心卽佛이요 我是佛을 悟하는 것이 불교일진대 스승의 마음은 곧 우리의 마음이요 佛의 마음이며 그들의 정신, 곧 誠의 정신이 우리의 정신이 되어야 겠다는 말이다. 필자의 난삽한 군더더기 말들도 그 한아름 誠의 허공속에서는 모두 쓰레기처럼 되어 버리는 그런 마음을 그리며 나가는 말을 대신하자.
蒼天을 우러르면
낮과 밤이 흐르고
달과 별이 흐르고
또
蒼天을 우러르면
내마음 구름되어 떠돌고
언어가 비 되어 내리고
또 다시
蒼天을 우러르면
흐르고 떠돌고 내리는 것은
모두
자취없이
無來無去
허공의 잔잔한 미소가
푸르름을 머금고 있다.
친구여
자 이제는
우리 모두 뜨락으로 나가
허공으로 목욕하고
푸르름으로 잔을 채워
한껏 취해 보기로 하자.
1992년 3월 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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