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당선작_양송이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외 4편
양송이
우리는 서울의 번화가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서울은 번화가가 너무 많아서 강남이나 혜화, 영등포 같은 이름을 대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너의 방 근처였다
아니면 나의 방, 아니면, 아니면…… 어디든 거기보다 간판이 많은 곳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다 우린 서울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그게 중요해
식은 안주를 젓가락으로 헤집으며 레몬소주를 들이켰잖아
재밌었다 그때 하지만
그 졸업식은 너무나 엉망이었지 축사했던 그 새끼 기억해?
응 그 군의관이 말야
팔뚝을 주물렀대 주무르던 손이 점점 아래로 위로 아래로 아무튼 말이야
잘 산대 아직도 말이야 얼마 전에 거기 부궐선거가 말이야
우리는 새벽녘에 헤어졌다가 나이가 들었다
어느 날 네가 날아와 창밖을 두드리는데,
방범창 사이로 너의 피곤이 둥둥
난 그동안 구에서 구로 동에서 동으로 행정구역을 착실히 바꿔왔고
열정적으로 주민 센터에 신고하러 다녔고 나를, 내가 여기 있음을
넌 서울이었다가 거기였다가 다시 서울이었다가 거기였다가 이러다 영영
행정의 구역을 벗어날까 봐 무서웠다고 엉엉
아냐 울진 않았어 다만 서울이 말이야 도무지 말이야
그렇다고 거긴 말이야 도무지 말이야
이런 생각에 열중하다 보니 둥둥 떠올랐어
떠오르기만 하고 통 가라앉질 않는데 떠오를 거면 확 떠오르든가 어중간한
나의 둥둥 차오른 내면이 말하더라고
우리, 어디든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위화감 없이 죄책감도 없이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참 웃기는 내면이네 으하하 으하하 그러다가 옆방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 쾅쾅쾅좀좀이고릅써!
……
우리는 이 시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했지, 안 그래?
그래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지 않았지, 안 그래?
너는 마음을 놓았다 너의 행정은 공무원을 당황시키지 않고 이해받으리라
자신에 찬 너는 조금씩 땅으로 땅으로
이대로 안착할 것인가 나는 궁금했지만 방범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 수 없어서
인사를 못 했다
중간에서 만나요
너는 멀리 살았다
서울보다 파주보다
하바롭스크보다
틱시보다도
더
까마득한 너와 어느 날 만나기로 했다
점심을 함께하며 서로를 알아가기로 했다
너는 나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할 예정이었다
(우리의 말 없는 시공간이 보송보송해지는 것 같아)
나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네가 울고 웃는 박자에 맞춰 안무 하나를 발명할 생각이었다
(멈추지 않는 피루엣*)
아무래도 우리,
잘 맞는 것 같아
우리에게도 난관은 있었다
내가 너무 멀리 살았다
목포보다 마라도보다
포트모르즈비보다
맥머도기지보다도 더
더
멀리서
우리는 극점과 극점보다도 더 멀리서부터
가까워지기 위해 각자의 채비를 했다
고어텍스 점퍼와 고글, 챙이 넓은 모자와 수영복 같은 것들을 꺼내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로놓인 대단한 것이 너무 많다
우리는 회의를 열었다
아니면,
각자의 방향으로 점점 더 멀어져서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도 좋아요
경사면에서부터 하염없이 떠올라
대기권 너머 꼭짓점에서 맞부딪쳐도 괜찮고
우리 질료가 산산이 기류에 섞여 날아다니다가
상공의 어느 한순간에서 스쳐 가도 참
좋을 것 같아
우리가 인간의 물성을 포기할 수 없을 것 같다면
2년마다 한 번씩 서로를 향하는 방향으로 집을 옮기는 수도 있겠죠
시나브로나 살다 보면 언젠가는 같은, 인간적인 전략이에요
아니면
아니면
우리는 오랫동안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꺼내놓은 수영복과 점퍼를 만지작거리며 가끔 키득대다가 가끔 훌쩍이다가
편안해지고는
이만 자기로 했다
내일 다시 한번
내일이 부족하면 그다음 날 또 한 번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 허리를 꼿꼿이 하고 두 팔로 말 없는 우리의 시공간을 끌어안아요 둥실 떠오른 발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요 마음대로 비틀거리며 편안해집니다
목적지가 전방에
눈부셔
하늘이 끝도 없다
예전에는 저 발전소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색깔을 보며 나머지 하루를 점치곤 했는데
순백색의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오늘은 참 그림 같지, 모두가 모두들 덕분에 풍족해지는 이야기에 삽입된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이야기 속에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눈이 부셨던 것 같아
손차양을 하고 우린 미간을 찌푸렸다
좀더 걸어야 해 아직 멀었어
좀더 걸였다 발전소에서 연기가 매일 다른 명도로 피어오르는 곳 그 아래 작물이 드넓게 자라는 곳을
브로콜리며 양배추, 적채 같은 작물들 무럭무럭 자라나도 무릎에 겨우 닿는 것들 사이에서 송전탑이 하나 둘 셋 가지런히 멀어졌다 옛날에는 황무지였대 네가 역사를 읊었다 그래도 키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 울창한 숲은 아니었을 테지
울창한, 하고 네가 말한 때 한순간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도 같았으나
트럭이 지나가고 우리는 잠시 비켜섰다
우리 이담에 질 좋은 그늘에서 살자 너무 어둡지도 않고 너무 밝지도 않고 해가 움직이면서 각도는 틀어지지만 영원한 그늘 지점이 한 평은 되는
그 한 평이 줄줄이 풍족한 곳
비트, 당근, 콜라비 같은 게 아니고 높다란 것들, 단단하고 흐트러짐 없으며 각각의 모든 면이 빈틈없이 채워진
그런 높다란 것들이 울창한, 하고 네가 말하는데 나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눈이 부셨다
여긴 늘 눈이 부셨어 하늘은 끝도 없이 너무 넓고 그늘을 내려 주기엔 저 송전탑은 너무 빈약하잖아
그래도 언젠가는 저 송전탑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우리도 향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유령) 숙모
그는 젊어서 죽은 여자
자신이 죽은 자리에서 얼마간 지박령 행세를 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기를 소원한
젊어서 죽은 여자는 종종 원한에 사무진 쳐녀 귀신 이야기가 되고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원한에 사무친 처녀 귀신이 되어서 말 많은 이들을 가만두지 않으리
울음을 쏟게 하고 가위에 눌리게 하고 환영을 보게 해서 결국엔
입을 닫게 하리라 세계는 조용하고 평화로워지겠지
평화를 구축하고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처녀 귀신의 원한도 무뎌지고 그에 대한 두려움도 무뎌지고
그러면 홀연히 떠나야지 그가 떠나고도 어쩌면 처녀 귀신 이야기는 남아서,
귀신 들린 여자를 구원한 무당 이야기가 되었다가 승천에 실패한 김에 우주를 유영하는 이무기 이야기가 되었다가 아무나 골라잡아 아무 운명이나 부여하는 초월자 이야기가 되었다가
그동안 그의 이름은 김이박최정누구누구에서 마르타, 올가, 버지니아 같은 이국적인 것이었다가 GHOST - H01 같은 미래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그사이에 그의 정체는 물먹은 종이 처럼 흐물흐물,
흐르는 시간과 그 시간만큼 변주되는 이야기 속에서 와해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정말로 대단한 내세, 하고 죽었던 그는 아연히
자신의 봉분을 마주하고 있다.
저게 언제 솟았어 본관이 뚜렷한 비석을 달고
죽고 나서 생긴 남편과 남편의 조상들, 후손들
낯선 가족들이 장지 한가득 이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산 자들이 그의 봉분을 견고히 다지고 예쁘게 다듬고
동서, 형수, 제수씨 , 며느리, 조카며느리, 올케, 새언니, 새언니, 아가, 새언니, 동서
그를 촘촘하게도 부른다
촘촘하고 영원한 이름들
원한에 사무친 처녀 귀신은 물 건너가고
새로 생긴 시조카에 의하여 옥사나, 파트마, 밍A 대신 숙모라는 제목의 시가 되어버리는 결말
우리 주변을 깨끗이 해요
우리가 죽은 개를 도로에서 치우기는 했다
한낮이었다 조용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죽은 개를 눈여겨보기에는
너무 뜨겁고 밝은 시간
죽은 개가 달아오른 아스팔트에 들러붙어 있었고
그는 평온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냈다
적끈을 주워서 죽은 개의 다리를 묶었다 우리 모두가 끈을 붙잡고 도로 옆으로 당겼다
우린 셋이었고 개는 하나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건너편 목재소 아져씨가 언제든지 나타나,
왜 그의 죽음을 훼손하지?
누가 죽음에 마음대로 손을 대라고 가르쳤난 말이다
너희들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경찰과 장의사와 조상신을 불러야겠구나
너희들을 매질해서 죽은 개 대신 눕혀야겠구나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죽은 개가 아스팔트에서 벗어나 잡초 위에 이르렀을 때
목재소 아저씨는 나타나 기지개를 켰다
그가 우릴 보기 전에 서둘러 적끈을 놓았다
우리가 죽인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우리는 걱정했다
정황상 살해 도구와 목격자가 명백하잖아
경찰과 장의사와 조상신이 우릴 아동행동발달심리상담사에게 데려가면 어떡해?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거야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영원히 함구하기로 했다
도로가 아무 일 없는 듯이 잠잠해졌고 목재소 아저씨는 우릴 보지 않고 도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에
그날 저녁 우리는 단지 쓰레기를 치웠다고 일기에 쓴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기대하며
깨끗한 도로와,
다리에 끈이 묶인 채 죽은 개
도덕적인 하루를 보냈다고 쓴다
양송이
1985년 제주 출생.
조형예술 전공.
202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