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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4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받은 사랑, 받은 소망, 받은 믿음
벧후1:12~15
여러분은 ‘주는 것’을 좋아하세요? ‘받는 것’을 좋아하세요?
주는 편입니까? 받는 편입니까?
“준다. 받는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지요. 산다는 것이 별거 아닙니다. “주든지, 받든지.”
아이가 태어나면 주는 일을 먼저 합니까? 받는 일을 먼저 합니까?
어머니에게 젖을 받아먹습니다. 보살핌을 받습니다. 사랑을 받습니다.
온통 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주었나?” “무엇을 주었나?”
설교 준비하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맨 처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 일은 언제였을까? 그때, 내가 무엇을 주었나?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준 기억이 별로 없어요.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참, 이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그저, 나만 알고 살았어요.
어디서 뭐, 받을 것 없나? 두리번거리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행20:35)” 말씀하세요.
세상에서는 많이 받는 사람을 복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예요.
“주는 것이 복되다.”
오늘부터라도, 이제부터라도, 저와 여러분은, “받기보다 주는 사람이 됩시다.”
<사랑은?>
그런데 막상 주려고 하는데, 뭐 가진 게, 있어야지요?
무엇을 줍니까? 줄 게 없네요?
그러나 재물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 사랑,
‘사랑은 줄 수 있어요.’ 돈 없어도, 재물이 없어도, 사랑은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줍시다.”
유행가 가사도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 아낌없이 주는 것’
가진 게 없어도, 사랑은 줄 수 있어요!
그런데, 복음성가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에 대해서
‘잘못된 노래다!’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어요. 이 노래를 자꾸 부르다보면, 사람들이 사랑을 베풀 생각은 안하고, “받을 생각만 하게
된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내가 사랑받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교회에서 사랑을 받자!’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서 다 퍼 옵니까?
교회는 사랑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내가 사랑을 쏟아놓는 장소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올 때는, 사랑을 한 소쿠리 담아 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쏟아놓고 가십시
오. 갈 때는 빈 소쿠리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그 빈 바구니에 또 다시 사랑을 담으세
요. 그리고 주일날 교회에 와서 그 사랑을 쏟아놓으세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 할렐루야~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습니다. ··· 위로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
“힘 드시지요?” 이 한 마디가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이 한 마디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합니까?
그런데요, 진짜 위로는, 아무 말 없이, 고난 받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지요.
하나님, 아무개 성도님, 아무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이 고난 중에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세요. 그의 상처를 싸매주세요. 그 고난이 영광이 되게 해 주세요.
비용 들이지 않고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또 있습니까? ··· 배려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거지요, 우리는 내 입장만 내세웁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아요.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나 힘든 것만 생각합니다. 옆 사람도 어렵고 힘든 것, 챙기지 못해요.
‘내 코가 석 자’ // 남들은 거들떠도 안 봅니다.
내 손톱 밑에 가시만 들어도 호들갑을 떱니다.
그런데, 옆 사람 다리가 부러졌어요. 한번 힐끗 쳐다보면 끝입니다.
우리는 “배려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배려하는 사람이 됩시다.”
어떻게 배려합니까?
“곁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더 힘들다.” “네가 나보다 더 힘들구나”
이해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는 것, 사랑입니다. 베푸는 사랑이지요.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사랑이 뭐라고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러면 소망은 어떻습니까? 소망은 받는 것입니까? 주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소망은?>
지금 그 소망, 어디서 왔습니까?
청년이여 소망을 가져라, “보이스, 비 엠비셔스, Boys, be ambitious!”
이 말 듣고 내가 야망을 품었습니다.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내가 가진 ‘소망’ 욕심이 앞서면 ‘욕망’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소망이 욕망이 될 수 있어요.
소망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처럼, 소망도 주고 받습니다.
특히 부모는 자녀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소망 없는 자녀로 키우는 부모? “낙제 부모!”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친 것만도 어딘데? 지들이 알아서 해야지, 어떻게
그것까지 부모가 해줘? 부모가 만능인가?”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소망을 줍시다.”
그러고 보니까, 소망도 주는 것이네요? ··· 소망을 어떻게 줍니까?
“너, 학교 가서 절대 기 죽지마아!” 이것이 소망을 주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 “하나님께 여쭤야 합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해야지요.
“하나님, 우리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아이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듭니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 개밥그릇…
토기장이가 용도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개밥그릇이,
“나는 청와대 대통령의 밥그릇이 될 겁니다.” 고집을 부리면 어찌됩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이 땅에 보내셨어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보석을 담는 보석함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약수터의 물 떠먹는 바가지로 만드셨을지도 모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 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 그 뜻을 물어야 합니다.
기도해야지요. 응답을 받고 그 소망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소망을 줍시다.”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믿음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제 믿음이 남았습니다.
오늘 주제가 무엇입니까?
주는 것이냐? 받는 것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줄 것이냐 받을 것이냐?
사랑도 주어라! 소망도 주어라! 그러면, 믿음은요? 주어야 합니까? 받아야 합니까?
“남편은 아내에게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말이 되네요?
“남편은 아내에게 믿음을 받아야 합니다.” 좀 어색합니다.
믿음도 주는 것입니다. ··· 상대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내가 말해야 합니다. 믿을 수 있게 행동해
야지요. “믿음을 줍시다.”
사랑도 주어라. 소망도 주어라. 믿음도 주어라.
하나님은 온통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을 보십시오. ··· “받은 사랑, 받은 소망, 받은 믿음”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
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 그랬어요. “믿음을 받았다.”
지금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베드로 사도의 두 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보배로운 믿음을 나와 함께 받았다.” 선포합니다.
보배로운 믿음, 지금 내 안에 예수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베드로의 믿음과 동일하다” 베드로 사도가 인정하고 선포합니다.
“내 믿음이 그렇게 대단해?”☺ 맞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성경이 증명하고 있어요.
내 안에 아주 작은 믿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셨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 믿음, “사도 베드로의 믿음과 동일하다.” 어떻게 동일합니까? “받은 믿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들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주는 믿음”
믿음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믿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믿음, ‘받은 믿음’ ‘받는 믿음’입니다.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 하리라”
예수 믿는 믿음은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의 택하심입니다.
그래서 ‘받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어떻게 하라고요? ··· “굳게 하라” “믿음을 굳게 합시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려는 것>
(12절)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 가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진리에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 까먹어요. 망각해요.
예수님이 계시므로, 내가 이미 진리 안에 있다는, 귀중한 사실도 망각해요. 까먹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베드로 사도가 안타까워 외칩니다.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인간은 늘 무언가를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생각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온종일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까?
베드로 사도는 다른 어떤 생각보다, “이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
“주님이 나를 택하셨다.”
“나는 그 믿음을 굳게 해야 한다.”
“나는 베드로 사도와,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
바로 이 생각을 하십시오.
우리는 사랑도 주어야 합니다. 소망도 주어야 합니다. 믿음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받을 사랑이 있습니다.
받을 소망이 있습니다.
받을 믿음이 있습니다.
받을 사랑,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십자가 구원입니다.”
받을 소망,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세요. “천국 소망입니다.”
받을 믿음,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믿음’ 할렐루야~
이 믿음, 이 소망, 이 사랑,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냥 내버려두면 어찌 됩니까?
인간은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정욕의 일을 생각합니다.
허탄한 생각, 죽음의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제멋대로 내버려두면, 허황된 생각, 허탄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의 흉계 때문입니다.
하와가 사탄의 작전에 말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악한 생각이 드는 것은 사탄의 작전입니다.
그것을 물리쳐야 합니다. 어떻게 물리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망,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
다. 물리 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유언>
“이런 것을 생각하라!”
‘쉽지요 잉?’ 쉽지 않습니다. 경험해봐서 압니다.
어떤 악한 생각이 한번 스치면 그 생각이 괴롭힙니다. 사악한 생각입니다.
힘들 때, 고난을 당했을 때, 더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을 물리치고 ‘받은 믿음’을 생각해라!
베드로가 이 말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쉬울 것 같으면 유언으로 하겠습니까?
13절에서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육신의 몸을 입고 있을 때, 그 뜻입니다.
14절에서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임종이 가까웠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할 것이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순교한다.’ 겁내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하는 그 날까지 예수님의 사도로서 십자가를 증언합니다. 예수님 부활을 증언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임종을 코앞에 두고 거듭 거듭 당부합니다.
(15절)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하노라”
“받은 사랑, 받은 소망, 받은 믿음”을 생각해라,
허탄한 것에 휘둘리지 말고, 너의 귀한 믿음, 그 믿음, 내 믿음과 똑 같다.
“너희는 이미 있는 진리 안에 있다.”
이 생각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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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랑합니다..사랑합니다..하루 열번씩 할려해도 잊어먹고 맙니다. 그래도 사랑합니다..하고 기억할려구 애를 써봅니다..
말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