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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망정 齊物論제물론 11
原文원문: 可乎可가호가하고 不可乎不可불가호불가라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하고 物謂之而然물위지이연이라 惡乎然오호연인즉 然於然연어연이라 惡乎不然악호불연이즉 不然於不然불연어불연이라 物固有所然물고유소연이즉 物固有所家물고유소가라 無物不然무물불연하고 無物不家무물불가라 故고로 爲是擧艸+廷與楹위시거정여영하고 勵-力與西施여여서시이고 恢心+危言-心+譎怪회궤휼괴이니 道通爲一도통위일이니라 其分也成也기분애성야이고 其成也毁之시성야훼지라 凡物無成與毁범무물성여훼로 復通爲一복통위일이고 唯達者知通爲一유달자지통위일이니라 爲是不用위시불용이 而幾矣이기의니라 因是已인시이하고 已而不知其然이라 謂之道위지도이니라.
語譯어역:세상 사람들은 可가를 가하다하고 不可불가를 불가하다고 한다. 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므로 이루어 지고, 만물은 이것을 그렇게 일컬어서 그렇다고 한다. 무엇을 그렇다고하느냐? 그러하지 않은 것을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만물은 본디 그렇다 하는 게 있고, 만물은 본디 가하다 하는 게 있다. 만물로서 그렇지 않은 것은 없고,만물로서 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를 위하여 들보와 기둥, 문둥이와 서시 등 엄청난 것과 괴이한 것까지 거론 하지만 그러나 도는 오직 하나로 되어 통할 뿐이다.
그 나눔은 다른 한편에서의 이루어짐이고, 그 이루어짐은 다른 한편에서의 허물어짐이다. 무릇 만물은 이루짐도 허물어짐도 없이 본디 하나이다. 오직 도를 깨닫은 자만이 통틀어 하나임을 안다. 이리하여 분별하는 법을 쓰지 않고 이것을 자연의 의지한다. 자연의 작용이 곧 用용이고 용은 곧 通통이다. 통이란 모든 것에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통하면 道도를 체득하는 것이다.
도의 극치란 무엇인가. 자연 본래의 길에 순종할 뿐 아니라, 자기가 순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 경지ㅣ이다.
註주: 可乎可가호가 不可乎不可불가호불가: 사물에서 본래 ′可가′니 不可불가니 하는 것이 없지만, 세상에선 흔히 자기 마음에 맞는 것을 ′可가′라 하고 자기에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不可불가′라고 하는데 그것을 가르키는 말,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 길이 없는 벌판이라도 사람이 지나다니면 자연히 길이 됨. 여기서 道도는 단순한 길.物謂之而然물위지이연: 물은 만물을 뜻 하지만′세살 사람′을 의미하기도함. 세상 사람이 지껄이는 것을 습관젃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인정 함. 然연은 그러하다로 만물을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렇다고 한다는 뜻. 惡乎然오호연 然於然연어연: 於어는 어조사, 무엇을 그렇다고 하는가. 그러므로 그렇다. 物固有所然물고유소연 物固有所可물고유소가: 所소는 ′......바′. 물에는 본디 그러하다는 바가 있고, 물에는 본디 ′可가′하다는 바가 있다는 뜻. 所소는 然연과 可가의 목적어로 쓰임. 故爲是擧艸+廷與楹고위시거정여영: 艸+廷정은 들보. 楹영은 기둥. 石-礪與西施여여서시:勵-力여는 문둥이, 西施서시는 절세미녀. 恢心+危言-心+譎怪회궤휼괴:恢心+危회궤:는 엄청난 것.言-심譎怪휼괴: 요사한 것. 회는 크다. 궤는 예사롭지 않다는 뜻. 또 휼은 거짓. 괴는 수상쩍은 것. 爲是不用위시불용 而寓諸庸이위제용 庸也者用也용야자용야: 寓우는 몸을 의지하고 이를 좇는 것. 用용은 두번 나오는데, 전자는 차별의 지혜를 활동시킨다는 뜻. 庸용은 用용과 의미도 통하지만, 전자의 用용과 구별하여 자연의 활동.후자의 用용은 庸용과 같은 뜻으로써서, 역시 자연의 활동이란 의미. ′庸용을 凡庸범용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설도 있지만 여기선 채탁하지 않음. 因是已인시이: 여기서는 是시는 시비의 ′시′가 아니고 시비의 대립을 초월한 차원 높은 시.
解說해설: 자연의 도는 모두 하나라는 장자의 주장이다. 앞에서 우리는 무리고 불리우는 것에도 두 가지의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상식으로 말하는 무이다. 상식의 무는 유를 배재할 때 생기는 것으로, 유와는 대립인 관계에 있으므로 유에 대한 무, 즉 相對無상대무라 할 수 있으리라.
이것에 대해 무한의 무라는 것이 있다. 앞에서 든 거울면이 이것에 해당된다. 그것 자신은 무이지만 무이기 때문에 무한인 물체를 비치고 온갖 유를 그 안에 포용 할 수가 있다. 상식의 무가 유를 배재하는데 반해 이 무한의 무는 유를 배재하기는커녕 萬有만유를 포용하는 것이다.그것은 적대자를 만들지 않는 무이므로 絶對者절대자라고 부를 수가 있으리라
잘 생각해 보면, 상식이라는 상대무라 하는 것은 참된 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유를 배제하는 무라 하는 것은, 유ㅠ와 사이에 경계일 수 있다.유를 배제하는 무라 하는 것은,유 와의 사이에 경계를 마련하는 것이므로 한계를 가진 무이다그것은 무라고는나′무라고 하는 物물′,′무라는 이름의 유′이고 유의 일종에 지나지 않는다도 하겠다. 이와 같은 무를 고집하는 입장이′리힐리즘′이라 불리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 존재 중의 하나인 특수한 자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거울면과 같은 무, 노자가 말하는 和光同進화광동진의 무는 온갖 유를 자기 속에 포용해 버리는 무한의 무이고 긍정의 무이다. 그것은 유무의 상대를 초월한 무이다.
그러나 실제로, 노자는 절대무의 세계에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그것에 철두철미 하지 못하고 상대무인 세계를 남기고 있는 점도 없지 않다.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은 바퀴의 중앙에 있는 바퀴통에 모인다. 바퀴퉁의 중심부는 비어 있지만, 이 무로 되어 있는 곳에 수레를 움직인다는 활동이 있다. 찰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지만,. 그 그릇에 빈 부분이 있어 있어야 비로소 물건을 담느다는 그릇의 쓸모가 생긴다. 문이나 창문이라는 무의 부분을 만들어야 비로소 방도 방으로서의 쓸머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ㅣ다. 이와 같이 모두 유가 유로서의 쓸모를 가질 수 있음은, 이면에 무의 활동이 있기 때문이다.三十幅共一殼삼십폭일각 當其無당기무 有車之用유차지용 연埴以爲器연식이위기 當其無당기무 有器之用유기지용 鑿戶유以爲室착호(창유)이위실 當其無당기무 有室之用유실지용 故有之以爲利고유지이위이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제11장)
이것이 이른바′無用무용이 용용′이라는 것으로 장자도 다루고 있는 테마의 하나이다. 얼른 보아 쓸모없다고 보이는 것이 실은 커다란 활동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상식으로는, ㅇ라무런 활동도 없다고 생각되는 무에서 커다란 활동을 인정한다는 점에선 확실히 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를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무의 활동은 유의 활동을 뒤로부터 도와주는, 이를테면 유의 이면적인 역할밖에 맡고 있지 않다고 하겠다. 무의 용을 강조하려다가 오히려 이것을 왜소화시켰다고도 볼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를 유에 대립시켰기 때문에 무 그것이 상대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노자는 절대무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아직도 철저하지 못한것을 남긴 것처럼 보인다. 그 철저와 완성은 다음인 장자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의 계가 제위에 있기를 39년, 78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太康태강이 뒤를 이었다. 태강은 사냥에 열중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리하여 다른 부족이 대두하여 한때 정통인 하 왕조는 끊겼다. 여기에 대해선 활의 명인 예의 이야기로 앞에서 설명했다.
태강이 죽고 그 동생 中康중강을 거쳐 少康소강 때에 이르러 왕조는 안정기로 들어간다. 이 소강부터 7대째인 孔甲공갑은 이른바 暗愚암우했다."즐겨 귀신과 겨루고 음란을 일삼으며, 하후씨의 덕이 쇠약했다. 제후가 이를 배반했다." 라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하는 급속히 멸망의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진다. 이윽고 폭군의 桀걸의 시대가 되었다. 걸은 여색을 밝혀 岷山國민산국을 공격하여 두 미녀를 얻고 이들을 총애하였다.
걸왕에게는 이미 妹喜매희라는 총비가 있었는데 이들을 총애했으므로,멸망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때 湯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탕부터 14대 거슬러 올라가手-楔설이라는 인물이 있다. 설의 어머니는 簡狄간적으로 有女+戎氏유융씨의 딸이고 제곡의 次妃차비였다. 제곡은 앞에 나온 황제의 증손으로 오제의 하나이지만 순과 동일이라는 설도 있다.
간적은 냇가에서 목욕을 하다가 (玄鳥현조: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 설은 중 장성하자 商(상:하남성)에 봉해졌는데, 은을 상이라 부르는 것도 이때문이다. 아무튼 이것으로 보아 은은 제비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라고 추측된다.또 卵生說話난생설화는 각지에 있지만 특히 퉁그스족등 동방 민족에 많기 때문에 은을 동의 계통으로 보는 설도 있는 것이다.
탕은 이윤이라는 명신이 있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즉 명군과 명재상의 콤비는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데.이들은 그 제1호였던 셈이다. 伊尹이윤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이윤의 어머니는 伊水이수 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이를 가졌을 때 하루는 꿈에 신이 나타나"물에 맷돌이 떠 있다면 동쪽으로 달아나라."고 일렀다.
이뜯날, 과연 맷돌이 물에 떠있으로 그녀는 동쪽으로 한사코 달아났다. 그러나 10리쯤 갔을 때 아무래도 궁굼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마음은 벌써 물 속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한그루의 ′空桑공상′ 변했다.
공상은 줄기 아래쪽이 비어 있는 봉나무를 말한다. 뽕잎을 따러온 有莘國유선국의 처녀가 공상 속에서 아기를 발견하여 유신의 군주에게 바쳐졌다, 군주는 그 아이를 包人(포인:요리사)에게 맡겨 양육시켰다. 이윽고 유신씨의 딸이 탕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윤은 노예로서 공주를 따라 솥과 도마를 짊어지고 탕의 영지로 가게 되었고 그ㅡ가 조리하는 음식이 매우 맛이 있어 탕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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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자에 대한 설명 고맙게 잘 보았습니다. 무(無)에 대한 설명에 공감합니다. 유가 무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무를 유의 상대적 의미로 본다면 무라고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되겠지요. 이때의 무는 유의 상대적 의미로서의 무가 아니라 유가 분화되기 이전의 그 어떤 것을 일컬어 무(절대무)라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유를 생성시키는 무(절대무)와 유의 상대적 의미로서의 무(상대무)는 분명히 구별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위 설명 중 和光同進은 잘못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도덕경 56장 和光同塵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래의 자료 중 知者不言, 言者不知.를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도와 명의 관계, 무와 유의 관계, 체와 용의 관계는 설명상 이름만 다르게 불렀을 뿐 그 본질적 의미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에 끄달리지 말라고 도덕경 첫머리에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고 천명해 놓은 겁니다. 그 분명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도덕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三十幅共一殼삼십폭일각은 三十輻共一轂(삼십복공일곡)을 잘못 표기해 놓은 것 같군요. 여기서 체와 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중과 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