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 순례 동행기2 에서는 절 서쪽에 있는 전향각으로 부터 출발 하겠읍니다
전향각은 운문사에 서는 외부손님들이 머무는 영빈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요
1998년 명성스님이 건축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전향이란 중국 당~송대에 진서 모양으로만든 향을 이르는 말 입니다
불을 붙여 벌레를 쫒았는데 타 들어가는 것 으로 시간을 재기도 했다고 해요
하나 타는시간이 하루밤의 100분의1에 해당하여 백각향 이라고도 하구요
통도사에도 전향각이 있는데 중노전의 네 법당을 관리하는 노전스님들이사용 한다
고 합니다, 운문사의 전향각 현판은 통도사의 현판과 동일한 글씨 체로 통도사에서 빌려 온 것 이라고 합니다
전향각에서 서쪽으로 더 들어가면 극락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느면 수행하는 스님들의
휴식공간이 있다고 해요,
일반인 출입은 금지되어 있고요, 그래서 그런지 문은 특별한 일 외에는 늘 잠겨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다리 밑을 흐르는 약야계의 풍광인데요, 어제 내린비로 말 그대로 산자수명 한 곳 입니다
운문사 말고도 중국에 저장성의 제기시에 약야계가 있다고 하는데 약야계 완자상류에
예전에 운문사로 불렸던 대각선사가 있어 운문사와 약야계의 밀접한 관계가 있나하고
살펴 봤는데 그런것 같지는 않고요 자료를 찾다가 반진용이란 청말 근대화가의 춘계완사를
보게 되었읍니다
저라산 기슭은 바로 우리집
약야계 냇가에서 즐거히 빨래하네
곳곳의 봉우리 푸르고 물 빼어난데
봄빛 가득 품고 꾀꼬리와 꽃에게 말을거네
저라산은 서시란 여인이 태어난 고향뒷산 이고
약야계는 저라산 아래에 있는 개울, 서지가 이곳에서 빨래를 빨았다고 합니다
서시는 누구인가?
서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해당되는 기원전 5세기경에 현재의 저장성 주지시
출신 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양귀비, 초선, 왕소군과함께 고대중국의 4대 미녀중의 한 사람으로 널리알려진 인물
이 었다고 하고요 당송 팔대가 중의 한사람 이었던 소식이(1036-1101) 가인박명이라 했듯이 그녀의 운명 또한 기박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까닭 또한 미모가 너무나 출중했던 탓이 었다고 합니다
월나라의 왕 구천이 오나라의 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참모 점례에 의해 구천이 패배에대한
공물로 서시를 오나라에 바치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서시는 부차왕의 여인이 되었구요 이윽고 부차왕은 서시의 미모에빠져 월나라를 괴멸시켜야 후완이 없을 것 이란 주장을하는 오자서란 충신을 죽이기까지 하면서 월나라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면서 결국 범례의 계략처럼 오나라는 국력을 키운 월나라에게 패망하기에 이르렀 읍니다
오나라가 패망을하자 서시는 다시 월왕 구천의후궁이되어 총애를 받게 되지만 정부인인
월부인에 의해 비밀리에 암살 당하고 말았어요.
서시의 곤련된 고사는 많이 유래 했는데 대표적인것 하나가 침어라고 합니다
어릴때 부터 천성이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주위의 부러움을 샀는데 하루는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맑은 강물에 비친 서시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지못해 강 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현재 서시의출생지로 알려진 저장성의 제기시에는 서시가 빨래하던 완사라는 곳이 전설의
그 곳이라며 관광지로 정해 놓았다고 합니다
서지가 빨래를 빨았다는 약야계를 보지는 못 했지만 극락교에서 내려다보는 운문사 약야계의
풍광은 그 에못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갤러리 그림앞에 서서 난해한 그림을보며 의미를 찾으려고 애쓸 필요 없고요
앞에서기만 하면 첫 키스 처럼 느껴지는 전률은 자연이 주는 명화의 감동이 라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읍니다
빨래하는 서시가 눈 앞에 아른거리는 운문사 약야계의 풍광은 좀 처럼 잊혀지지 않을것 입니다
흐르는 물은 옥수와같고 작은 돌에 부딛친 포말은 엔돌핀을 가져다 주는 생명수 처럼 느껴 집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 물의 깊이는 더 깊었을 것이고 힘을 비축한 물고기는 하늘로 비상할듯한 분위기를 상상케 하는 약야계 입니다
약야계 소나무 아래서 발견된 보물 제 208호 동호 입니다
정확한 용도는 알수없다 하고요,감로준이란 이름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용기의 하나로 추측되며
전체가 흑색을 띠고 있읍니다(문하재청 자료)
만세루애서 본 대웅보전 입니다, 임진왜란때 불타고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1994년에 새로지은
건물 입니다
대웅보전 내부에는 삼세불, 즉 과거불인 연등불, 현재불인 석가모니불, 미래불인 미륵불이 모셔저 있고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대세지보살의 입상이협시 보살로 모셔저 있읍니다
불단 좌측에 운장대가 보이는데요 화엄경전이 들어 있어 한번 돌리면 경전한권을 읽는 것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내부에 운장대가 있는것도 처음 보는것 갔읍니다
불단 아래 다리부문은 사자와 연꽃이 위로는 여러문양으로 장엄한 난간이 있읍니다
불단 뒤에 있는 관음응신도 인데요 관음보살이 중생을 제도 하고자 나투신 32 가지 모습을 그린 것
이라고 합니다
연등불과 머리를 풀어 혜친 선혜동자수기 벽화입니다
세상에 연등불이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 연등불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죠
석가모니의 전신인 선혜동자는 연등불에게 바칠 연꽃을 구하려고 사방으로 수소문 했으나 연꽃은 이미 다른사람 손에 들어가고 한송이도 남은것이 없었읍니다
늦기전에 꼭 연꽃을 구해야하는 선혜동자는 울상이되어 사방으로 꽃을 찾아 뛰어 다녔죠
그런데 우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연화 일곱송이를 가진 구리천녀라는 여인을 거리에서 만났읍니다
동자는 뛸듯이 기뻤죠. 그래서 동자는 천녀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 오백량을 줄터이니 그 연꽃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였 읍니다 천녀는 그렇게 많은돈을 주고 이 꽃을 사서 무엇을 하려는가 물었 읍니다
동자는 연등불에게 이꽃을 바치고 연등불로 부터 래세에 성불할 수기를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 했읍니다. 자기일신의 안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에서 허덕이는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성불 하려는 것 이라고 설명 하였 읍니다
그 말을들은 구리천녀는 한동안 동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이 꽃을 그대애개 그냥 드리겠 읍나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가지 소원이 있읍니다 내 소원은 좋은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것 이라며 동자께서 저와 결혼 해 주십시요.하였읍니다
나는 이미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는 몸 이므로 결혼을 할수없다고 말 하였읍니다
다만 결혼을 한다해도 다시 수행을 위해 출가를 할때는 언제라도 헤어질수 있다는 조건이라면
구리천녀의 요구를 받아 드리 겠읍니다 하였읍니다
선혜동자에게 반해버린 구리천녀는 그 말에 따르 겠다며 7송이의 꽃을 동자에 주었읍니다
그리고 5송이의꽃은 선혜동자의 뜻에따라쓰고 2송이는 자기의 사랑을 위해서 바쳐 달라고 하였다
선혜동자는 꽃을들고 연등불에게 달려 갔다
그후 몆겁의 세월이 흘렀다. 선혜동자는 이 세상에 싯달라 태자로 태어나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되었고
구리천녀는 아쇼다라 공주로 태어나 태자의 비가 되었죠
그리하여 두사람은 결혼을 하였으며 전생에서 맺은 약속대로 태자가 성불하자 서로의 부부의 인연을
끊어 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화랑오계비 입니다
만세루 입니다
33석불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회원 들 입니다
회원2 입니다
회원3 입니다
회원4 입니다
법륜 입니다
응진전과 조영당 입니다
응진전과 조영당은 한건물안에 있으며 부처님과 16나한상, 원광국사, 보양국사, 원응국사, 3대중창주를 비롯하여 운문사에 머물었던 10대 조사들의 영탱과 운문사 수호에 공이 많은 장군들의 영정이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칠성각 입니다 칠성각은 1890년에 지었다고 하고요.불교에서 북극성을 뜻하는 치광여래의 탱화를 봉안 하였읍니다 도교에서 유래한 민속 칠성 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모셔진 전각으로
삼성각, 산신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는 4대 독자로 대가 실하지못한 턋에 어머니가 칠성님께 빌어 아들을 낳았다며 너는 칠성 자손이라고 자주 말 하였는데 미신을 믿는다고 친구들이 놀릴까봐 듯기 싫어하였던 어릴때 생각이 난다
대웅전이나 대적광전 같은 곳에 먼저 참배를 먼저 올리는 습관이 있지만 칠성각을 빼놓지 않고
참배를 드리는 것은 어머님이 말씀해주신 찰성자손이라고 말씀해주신 어머님의 잔영이 내마음속에 잠재 되어 있기 때문 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칠성각 내부 입니다
이사진은 직접 적으로 33석불을 찾아떠나는 순례와 관련이 있지는 않지만 습관적으로 누루는 사진가의 손 놀림이 만든 순간 포착 사진 입니다
인사를 받는사람이나 올리는 사람의 표정이 맑고 부드러우며 우리 불자들이 새겨야할
표정으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어 올 렸읍니다
10시간 이상을 차량속에서 보내고 참배와 공양시간을 빼면 개인적인 자유시간은 1시간정도에 지나지 않읍니다 저같은 경우는 사진을 찍느라 그렇다 치더라도 불자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참 모자라지요 대한민국에서 걷고싶은 운문사 솔 숲길을 버스로 절까지 올라오는 바람에 걷지는 못 해도 사진이라도 도 한장 찍을까 해서 달려가,샷다 한번 눌렀는데 거사님 뼈스 출뱔시간 다 됐어요 어느 보살림의 목소리에 이것이 오늘의 마지막 사진이 되었 답니다
운문사에서 악착보살을 보면서 신문에났던 기사 한장면을 소개 할까 합니다
태풍 차바가 남해안을 강타 하던날 신승용 여수해양경비 안전소 구조 대정이 풍랑에 떠밀려 표류한 여객선 (미남 쿠르즈호) 1421톤 에 타고 있던 승무원 6명을 방파제 윗쪽으로 구조한 직후 구조대원 7명과 승무원 6명은 초속34m의 강풍이 불어닥치는 방파제를 빠져나와 해안쪽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두번의 큰 파도를 간신히 버티고 다시 앞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세번째 파도가 이들을 집어 삼켰다,
여객선장 주모씨등 승무원 2명과 박정해 경사등 구조대원 4명이 파도에 휩쓸려 그대로 바다에 떨어졌다, 긴박한순간 신대장이 방파제의 난간을 붙잡고 있는 구조대원 2명에게 밧줄을 내리라고
소리쳤다 파도 위에는 파도에 휩쓸린 4명의 구조대원이 승무원 1명씩을 껴앉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신대장은 바다속 대원들에게 헤엄쳐 밧줄을 잡으라고 목이쉬어라 외쳤다,
물에빠진 대원들은 승무원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헤엄쳐 밧줄으 잡았다,
그리고 방파제 벽면에 설치된 철재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 위로 올라오는데 성공 했다
2016 10월 6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운문사의 악착보살과 이구조대원들의
사투를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나 젊은 애들이 패싸움을 벌이는 현장에 서 있는 나의 팔을 잡아끄는
아내의 마음을 긍적적으로 생각하고 돌아선 기억이 있다 서있다가, 참견하다가 변이라도라도 당하면 어쩔가 싶어 내 손목을 잡아 끈것을 왜 모르겠는가?
정의로운 일에 선뜻 나서기가 보통 용기가지고는 힘에부치는 세상에 살면서 승무원을 구조한 대원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육신으로 현세에 살아있는 여래를 보는것과 무엇이 다르 겠는가 싶었다
이들에게 반야용선에 승선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밧줄에 매달리지 읺고 관음보살의 편안 한
인도가 이루어 지기를 ()()()....
33석불 을 찾아 떠나는 운문사 순례길,자신을 뒤돌아볼수있는 기회가 되었다
순례길에 대한 제언 하가지, 일화스님의 대웅보전 에서의 해설시간에
힘이들어 보이는 보살림의 모습 입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비하여 간호 보조원 한두명이 동승하기를 제안 합니다
수습보다는 사전 예방이 슨례길의 필수 입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개심거사님. 서시의 고사와 약야계. 서시의 고사를 읽으니 臥薪嘗膽(와신상담)이란 古事成語가 생각납니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 왕 합려가 월나라를 쳐들어갔다가 월왕 구천에게 패하고 중상을 입었읍니다.병상에 누운 합려는 죽기전 부차를 불러 이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하였고 부차는 가시 많은 장작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복수를 준비했다.한편 이 소식을 들은 월나라 왕 구천은 잠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매일 핧으면서 쓴 맛을 되씹었읍니다.부차의 臥薪과 구천의 嘗膽을 합쳐 臥薪嘗膽.
32가지 모습의 관음응신도는 운문사 갔을 때는 제대로 보지 못했읍니다.
연등불,선헤동자,청연화 일곱송이,구리천녀의 선혜동자 수기 이야기.다시 한번 학습합니다.운문사와 원광국사의 화랑오계.이번에 처음 알았읍니다.
보덕심,여래심,청정수,대덕심,심불성,보광성,일주향,성행심,자등심,여래화보살님.화계33석불순례 도반님들과 가정에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하시길 기원하겠읍니다.
수정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