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론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국내외로부터 주목을 받은 미군 장성이 있다. 바로 주한 미8군 참모장 존 K 싱글로브 소장이다. 주한미군 가운데 서열 3위인 싱글로브 장군은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군 관계자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철군 구상에 반발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특히 이 특수부대 출신 장군은 미2사단 철수는 남한의 전력을 약화시켜 김일성(金日成)의 남침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사실 주한 미 지상군 철수론은 카터가 창안한 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카터의 철군 결정은 미 의회·군부로부터 많은 비판과 반발을 샀다. 철군 결정 자체가 미국의 기본정책에 배치(背馳)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터는 자신이 내세운 선거공약의 포로가 돼 충분한 검토와 조언을 거치지 않고 철군을 성급히 추진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싱글로브 소장은 그 비판의 선봉장이었다.
“중국·베트남에서 패배 이후 제기된 문제는 이런 것이다.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군인들이 정책 결정자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충분히, 그리고 큰소리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사태가 올바르게 돌아간다는 확신을 갖고자 한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정책 결정이 내려지면 우리는 정열을 갖고 그 정책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싱글로브 장군의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주한미군 장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당시 미 언론은 “존 W 베시 유엔군·주한미군사령관이 철군계획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보도했다. 또 존 번스 부사령관은 “미 지상군의 계속 주둔이 바람직하며 철군계획은 한반도 군사균형에 치명적인 변화를 야기하지 않고 미국 공약(公約)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글로브 장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지난 12개월간 철저한 정보수집 결과 북한 전력이 부쩍 증가했음이 드러났다. 내가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정책 입안자들이 3년 전의 낡은 정보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미 군부에서는 최초로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철군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한 싱글로브 장군의 발언은 워싱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백악관 대변인은 이 발언을 불쾌하게 여긴 카터 대통령이 싱글로브 장군에게 소환명령을 내려 진상 해명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카터는 싱글로브 장군을 주한 미8군 참모장 직에서 해임,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군부의 철군 반대론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77년 5월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한 싱글로브 장군은 “철군이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보는 나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재천명하고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사령부에 철군의 파급 효과에 관해 물어온 적이 없으며 미 합참본부와 육·해·공 3군 사령부도 철군의 타당성을 해명해 달라는 미8군의 요청을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한 한국 정부와 군에 싱글로브 장군의 카터 정책에 대한 정면비판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공개비판을 했다고 군 최고통수권자가 일개 지역군 참모장을 곧바로 소환해 야단친 것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같은 군인으로서 본받을 만하다고 싱글로브 장군을 격려하는 편지가 줄을 이었다. 카터 대통령도 나중에는 싱글로브 장군을 미 육군 지원사령부 참모장으로 영전시켜 싱글로브 장군이 받은 해임의 수모를 지워주었다. 일부에서는 이것을 군부와의 불필요한 대결을 피하려는 카터의 전략적 후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무튼 싱글로브 사건을 계기로 철군에 대한 미 군부의 입장은 당초의 `전면 철군 반대'에서 `적절한 보완 조처가 뒤따른다면 감내할 만한 모험'(미 육군 참모총장의 하원 군사위원회 증언)이라는 선으로 후퇴했다. 반면에 이제까지 주위의 눈치만을 살피던 미 의회에서는 철군 반대론 혹은 신중론이 일기 시작했다. 한 육군 장성의 외침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보수파인 더몬드 상원의원은 카터의 철군정책은 선거 공약을 실천하려는 위험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공격했다. 마침내 미 상원은 공화당 내 철군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크게 반영한 로버트 버드 민주당 원내총무의 수정안을 채택했다. 버드 수정안은 카터의 철군계획을 지지한다는 원안(原案)의 문구를 삭제하고 어떠한 미군 철수계획도 `대통령과 의회의 공동결정에 의해서만 취해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마침내 카터 대통령은 78년 4월21일 성명을 통해 철군계획의 일부 수정을 발표했다. 즉 78년 제1진 철수 규모를 당초의 6000명에서 3400명(전투요원 800명·비전투요원 2600명)으로 축소 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싱글로브 장군은 몇 해 전 김영삼 정부 시절 군이 개최한 6·25전쟁 기념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나는 싱글로브 장군에게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몇 가지 실수한 것이 있다”고 전제, 두 가지를 지적했다. 미군이 낙동강에서 반격해 파죽지세로 북진하지 않고 허리 부분에서 전선을 멈춘 채 외교공세를 폈더라면 중공군이 물밀듯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고,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단정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말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의미를 그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예부터 중국이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토보전을 위한 입술과 같은 존재로 여겨 어떤 경우든 이에 대한 위협을 막아온 역사적 전통을 유엔군이 알았던들 적절한 선에서 중공군의 대거 남침을 억제하고 외교적 해결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론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국내외로부터 주목을 받은 미군 장성이 있다. 바로 주한 미8군 참모장 존 K 싱글로브 소장이다. 주한미군 가운데 서열 3위인 싱글로브 장군은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군 관계자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철군 구상에 반발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특히 이 특수부대 출신 장군은 미2사단 철수는 남한의 전력을 약화시켜 김일성(金日成)의 남침을 유발할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사실 주한 미 지상군 철수론은 카터가 창안한 정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카터의 철군 결정은 미 의회·군부로부터 많은 비판과 반발을 샀다. 철군 결정 자체가 미국의 기본정책에 배치(背馳)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터는 자신이 내세운 선거공약의 포로가 돼 충분한 검토와 조언을 거치지 않고 철군을 성급히 추진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싱글로브 소장은 그 비판의 선봉장이었다.
“중국·베트남에서 패배 이후 제기된 문제는 이런 것이다.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군인들이 정책 결정자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충분히, 그리고 큰소리로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사태가 올바르게 돌아간다는 확신을 갖고자 한다. 만약 그런 상태에서 정책 결정이 내려지면 우리는 정열을 갖고 그 정책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싱글로브 장군의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주한미군 장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당시 미 언론은 “존 W 베시 유엔군·주한미군사령관이 철군계획에 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보도했다. 또 존 번스 부사령관은 “미 지상군의 계속 주둔이 바람직하며 철군계획은 한반도 군사균형에 치명적인 변화를 야기하지 않고 미국 공약(公約)에 대한 신뢰를 실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글로브 장군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지난 12개월간 철저한 정보수집 결과 북한 전력이 부쩍 증가했음이 드러났다. 내가 깊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정책 입안자들이 3년 전의 낡은 정보 속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미 군부에서는 최초로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철군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한 싱글로브 장군의 발언은 워싱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백악관 대변인은 이 발언을 불쾌하게 여긴 카터 대통령이 싱글로브 장군에게 소환명령을 내려 진상 해명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카터는 싱글로브 장군을 주한 미8군 참모장 직에서 해임,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군부의 철군 반대론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77년 5월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한 싱글로브 장군은 “철군이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보는 나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재천명하고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사령부에 철군의 파급 효과에 관해 물어온 적이 없으며 미 합참본부와 육·해·공 3군 사령부도 철군의 타당성을 해명해 달라는 미8군의 요청을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한 한국 정부와 군에 싱글로브 장군의 카터 정책에 대한 정면비판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공개비판을 했다고 군 최고통수권자가 일개 지역군 참모장을 곧바로 소환해 야단친 것에 대한 비판도 거셌다. 같은 군인으로서 본받을 만하다고 싱글로브 장군을 격려하는 편지가 줄을 이었다. 카터 대통령도 나중에는 싱글로브 장군을 미 육군 지원사령부 참모장으로 영전시켜 싱글로브 장군이 받은 해임의 수모를 지워주었다. 일부에서는 이것을 군부와의 불필요한 대결을 피하려는 카터의 전략적 후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아무튼 싱글로브 사건을 계기로 철군에 대한 미 군부의 입장은 당초의 `전면 철군 반대'에서 `적절한 보완 조처가 뒤따른다면 감내할 만한 모험'(미 육군 참모총장의 하원 군사위원회 증언)이라는 선으로 후퇴했다. 반면에 이제까지 주위의 눈치만을 살피던 미 의회에서는 철군 반대론 혹은 신중론이 일기 시작했다. 한 육군 장성의 외침이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보수파인 더몬드 상원의원은 카터의 철군정책은 선거 공약을 실천하려는 위험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공격했다. 마침내 미 상원은 공화당 내 철군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크게 반영한 로버트 버드 민주당 원내총무의 수정안을 채택했다. 버드 수정안은 카터의 철군계획을 지지한다는 원안(原案)의 문구를 삭제하고 어떠한 미군 철수계획도 `대통령과 의회의 공동결정에 의해서만 취해져야 한다'고 못박았다.
마침내 카터 대통령은 78년 4월21일 성명을 통해 철군계획의 일부 수정을 발표했다. 즉 78년 제1진 철수 규모를 당초의 6000명에서 3400명(전투요원 800명·비전투요원 2600명)으로 축소 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싱글로브 장군은 몇 해 전 김영삼 정부 시절 군이 개최한 6·25전쟁 기념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나는 싱글로브 장군에게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몇 가지 실수한 것이 있다”고 전제, 두 가지를 지적했다. 미군이 낙동강에서 반격해 파죽지세로 북진하지 않고 허리 부분에서 전선을 멈춘 채 외교공세를 폈더라면 중공군이 물밀듯이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고,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단정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말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의미를 그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예부터 중국이 한반도를 자신들의 영토보전을 위한 입술과 같은 존재로 여겨 어떤 경우든 이에 대한 위협을 막아온 역사적 전통을 유엔군이 알았던들 적절한 선에서 중공군의 대거 남침을 억제하고 외교적 해결을 도모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