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41. 벧엘의 하나님(1)
2020. 10. 3. 이현래 목사
야곱은 돌아왔다. 곤고한 날에 나타났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려고 과정을 거치고 과거를 청산하고 돌아왔다. 사람이 달라져서 온 것이다.
세상에는 인생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사람이 많다. 왜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누구든지 과정을 거치는데도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갈 데가 있는 사람이라야 자기 인생이 해석되고 왜 그런 일들이 생겼는지 알게 되는데 갈 데가 없는 사람은 그런 것이 없다. 늘 문제가 생기지만 자기가 얻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인생이 발전이 안되는 것이다.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 되셨다. 이 말은 각자에게 하나님은 특이한 이름이 있다는 뜻이다.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는 절대자나 제일 원인자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객관적인 하나님을 말해 놓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야곱이 돌베개하고 자던 그곳, 너무나 외롭고 막막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를 본 곳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사다리가 없으면 하늘로 갈 수 없다. 왜 우리가 하늘로 못가는가? 사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동서남북이 다 막혀도 사다리만 있다면 그 담을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담을 넘을 사다리가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야곱은 거기서 사다리를 보았다.
‘벧엘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자기가 고난당했던 것, 하나님이 그를 위로했던 것, 객지에 있을 때도 그의 모든 것을 돌보아 주셨던 것……, 이런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 벧엘의 하나님이다.
벧엘의 하나님은 돌아온 야곱을 다시 축복하셨다.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우리는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한 단계 한 단계 인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의 이름을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룬 자)이라 부르겠다.” 하셨다. 얍복 나루터에서 주신 이름인데 다시 확인하신 것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었어도 죽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념이다. 하나님을 떠났으니까 하나님을 만나면 심판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도 산에 올라갈 때 완전히 죽은 자 같이 되었던 것이다. ‘우레와 번개, 빽빽한 구름, 나팔소리’는 모세가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백성 중에 아무도 산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셨고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만나면 죽지 않는다. 오히려 축복을 받는다.
에덴동산은 화염검으로 가려져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만일 들어갈 수 있는 길만 있다면, 우리가 들어가기만 하면 거기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그러나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 놓았다.
성막도 마찬가지다.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번제단에서 제물을 드리고 가야 한다. 번제단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아무나 못들어가는 곳이다. 그런데 제물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람, 순수하게 사람인 그 사람과 연합하면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이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지성소에 못들어가는 것이다. 간첩이 청와대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위치가 다르고 목적이 다르니까 들어갈 수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인데 그 사람과 연합되면 동산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마지막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셨다. ‘전능’이라는 말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면 끝이 없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전능한 하나님, 유일한 하나님은 의미가 규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특히 동산을 떠난 사람을 부르심과 우리를 건져내심에 있어서 전능하다는 뜻이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부르심과 구원에 있어서 전능하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는 비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럴 수 있는가?’ 하는 일들이 많다. 오히려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있다면 저렇게까지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저럴 수가 있는가. 너무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있다면 저렇게 불쌍하게 될 수 있는가. 저렇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시고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데 저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당연히 ‘저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구나. 잘못했기 때문에 그렇구나.’ 하게 되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되기 쉽다. 어떤 사람이 너무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렸겠지.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면 저렇게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인 항목이 있는 분이다. 출애굽기 20장에는 십계명이 나오는데 서두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규정해 놓았다. 그래서 유일하다고 하는 것이다. 신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낸 분은 오직 한분 뿐이다.’라는 뜻이다. 그분이 어떤 신이었든 상관이 없다. 그들을 구원해 낸 신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심에 있어서는 그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 바벨로 가고 있는데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신 분이 있다. 불러만 놓고 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전하게 구원하실 때까지 책임을 지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다. 우리는 다른 것까지는 모른다. 왜 아프리카에서는 굶어죽는지 모른다. 내 하나님밖에 모른다. 나의 하나님이다.
예수께서도 마지막에 그렇게 부르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분은 어떤 하나님이겠는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게 하신 하나님,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하나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게 하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분, 하늘에 계신 신, 절대자를 향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기를 구체적으로 그렇게 만드신 그 하나님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수 안에서의 구원은 사람을 참 사람 되게 하는 것이다. 참 사람은 무엇인가? 창조의 목적 안에서 지어진 사람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신 그 사람이다.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산 혼이 되게 하셨고, 하나님의 동산을 경작하도록 맡기신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단순히 우리가 어려울 때 건져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이것을 모르고 다니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하셨는지 모르는 것이다. 무엇을 하려고, 어디로 이끄는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지 모르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일이 많다. 자기 생각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왜 안되는가. 기도했는데, 교회에 충성을 다했는데 왜 안되는가?’ 하는 문제가 계속 있는 것은 잘 몰라서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목적이 있어서 부르셨다. 어떤 목적인가? 참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셨다. 세상의 권력이나 기술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으로 지배하라는 것이다. 축복할 때마다 맨 먼저 나오는 말이 이 말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전형적인 축복의 내용이다.
이어 “한 백성과 그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하셨다. 이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세상에는 주권이 많은데 참된 주권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뜻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기술이나 권력으로가 아니라 생명의 충만으로 지배하는 분이다.
생명의 충만으로 지배하는 것을 예를 들면 황무지라도 생명의 씨가 뿌려지면 초원이 된다는 것이다. 황무지가 있는데 매일 와서 총으로 다스린다고 황무지가 변할 수 있겠는가. 황무지가 풀밭이 되려면 생명의 씨가 뿌려져야 한다. 초원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이 지배하는 것이다. 생명이 지배하면 하나님도 쉬는 곳이 되고 사람도 쉬는 곳이 된다.
그러나 권력이나 정치 기술로 지배하면 그런 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주권은 전부 생명과 관계된다. 세상의 임금들이 하는 것과 비교해서 생각하면 안된다. 지배하고 다스리라 하셨지만 세상의 왕들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처럼 하라는 말이 아니다. 생명으로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네 후손에게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땅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앉을 자리가 없어서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땅을 회복해서 영생의 세계를 이루시는 분이다. 다시 말하면 땅에서 인생과 더불어 영생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다.
야곱은 그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엘 벧엘이라 불렀다. 전제물은 제물 위에 향기를 더하기 위해 붓는 술이다. ‘엘 벧엘’은 ‘이는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비로소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다. “내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다.”라고 한 것이다. ‘내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하나님이다. 내 일생을 이렇게 이끌어 오신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야곱은 끝나고 축복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야곱은 끝났는데 축복은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복음이다. ‘끝났는데 축복을 하셨다. 죽었는데 살려 주셨다.’ 이것이 성경 안에 있는 복음이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었다. 그래서 베들레헴 길에 장사하고 묘비를 세웠는데 성경을 기록할 때까지 그 묘비를 라헬의 묘비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라헬은 야곱의 총애를 받았으나 조상의 묘에 들지 못했다. 막벨라 굴에 들어가지 못하고 벧엘로 가는 길에서 죽었다. 가장 사랑하던 아내를 잃은 야곱의 슬픔이 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큰 아들 르우벤이 서모(빌하)와 통간했다는 말이 야곱에게 들렸다. 자기 아들이 자기 첩과 동침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르우벤은 장자였으나 이 일로 장자권을 잃었다. 그리고 장자권은 유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창49:2-4).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는 르우벤이 빠지고 유다가 나온다. 이런 일들은 야곱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청산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삭이 죽으매 에서와 야곱이 헤브론에 장사하였다고 하였다(창35:29). 자식들은 부모 안에서만 하나지 부모를 떠나면 하나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은 창조자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부모 안에서는 하나다.
야곱은 에서와 헤어졌다(창36장). 길이 다르면 헤어지기 마련이다. 길이 달라서 같이 살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창37장). 이것은 야곱에게 가장 슬픈 일이었다. 비록 거짓이었지만 그 일을 모르는 야곱에게는 마지막 소망이 끊긴 것이다. 마지막 희망, 마지막 기쁨, 마지막 자랑이 끊긴 것이다. 요셉은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출중한 지혜가 있어서 야곱에게 가장 사랑을 받던 아들이었다.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혔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형제들의 시기를 받게 되어서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졌는데 유다가 살려주자고 해서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38장에는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았다고 하였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인데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유다의 아들이 셋이었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었는데 다 죽어 버렸다. 이스라엘의 법에 의하면 형이 죽으면 동생이 남편이 되어 주고 그 동생도 죽으면 그 다음 동생이 남편이 되어 주어서 기업을 잇게 해야 했다.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그들의 기업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큰아들에게 다말을 아내로 주었는데 큰아들이 죽어서 둘째 아들에게 형의 씨를 잇게 했는데 둘째 아들도 죽어 버렸다. 유다는 다말이 팔자가 센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마지막 셋째 아들을 주지 않았다. 다말이 생각할 때 유다가 마지막 아들을 주지 않으면 자기는 기업없는 여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베레스다. 베레스는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다.
그리스도 가계의 비밀을 알리 없는 야곱은 부끄러웠을 것이다. 최대한의 수치를 당한 것이다. 유다는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말을 불태워 죽이라고 했는데 다말이 그 현장에서 유다의 도장과 지팡이를 증거품으로 내놓았다. 유다는 꼼짝없이 당했지만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승인했다.
모든 것이 야곱에게서 떠나갔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 된 것이다. 우리에게서 모든 것이 떠나가도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죽을 때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그 동안에 이루어놓으신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갔고 기대와 소망이 다 끊어져 버렸다. 그런데 거기서 새 생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기구한 일인가! 하나님의 집을 떠났기 때문에 인간은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을 떠났기 때문에, 동산을 떠났기 때문에 한번 죽고 다시 나야 되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다. 왜 꼭 거듭나야 되는가? 옛 것을 그냥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는다. 옛 것을 가지고는 동산에 들어갈 수 없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갔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내 힘으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힘으로 얻고 쟁취한 모든 것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이다. 그것을 떠나야 하나님이 지시할 곳으로 갈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는 갈 수 없다.
이삭은 무능(?)했으나 그 아버지를 인하여 복을 받았다. 성경을 보면 이삭은 갈수록 창대해졌는데 그것은 이삭이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다. 이삭은 아무 재주도 없었다. 블레셋이 와서 우물을 빼앗으면 다른 데로 갔고 또 빼앗으면 또 다른 데로 옮겼던 무능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욱 창대해졌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이삭을 축복하셨던 것이다. 이삭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다고 하였다.
야곱은 자기가 얻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런데 영광의 길에 오른 것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망했고 모든 것이 끝났는데 영광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얻으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얻어야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물만이 아니라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가지고,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다.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영광의 길에 들어선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었다는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거기서 이삭을 받았다.
우리는 이 원리를 꼭 알아야 한다. 성경을 보려면, 그리고 예수를 알려면 이 근본적인 원리를 알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절대로 안된다. 내가 얻은 것으로는 절대로 안된다. ‘가인’은 획득했다, 얻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안된다.
‘네피림’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았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것이 네피림이다.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능력껏 한 것이 네피림이다. 그것이 어디로 갔는가. 바벨이다. “흩어짐을 면하자. 벽돌을 구워 성을 쌓자. 망대를 높이 세워 하늘에 이르자. 그리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하게 된 것이다.
가인이나 네피림이나 똑같은 것이다. 가인(획득)이라는 이름이나 네피림이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점점 커진 것이다. 가인이 네피림이 되고 네피림이 바벨이 된 것이다. 저주가 점점 더 확대된 것이다.
이 길에서 부름받았다. 이렇게 가는 대열에서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의 길이다. 다른 길로 가야 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안되느냐 하면 다른 길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길은 그 길에 있으면서 예수만 믿는다. 바벨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것이다. 바벨로 가는 길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돕는 법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데 하나님이 관여하시겠는가.
하나님은 부름받은 사람을 도우신다. 군대로 부름받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지급하는 것이다. 의복도 주고 식량도 주고 모든 것을 다 준다. 군대로 부름받지 않은 사람에게 군화를 주겠는가, 총을 주겠는가. 부름받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의 길은 내 것이 아닌 데서 오는 것이다. 내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아닌 데서 오는 영광이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다른 영광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자랑이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자랑하는 것을 보고 ‘저것은 가난하고 못난 사람들이니까 저러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못난 사람들만 키우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사람을 유명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고 저질이 되도록 키운다는 생각이다. 간증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다. 내가 무엇에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라 실패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는 말이지, 이것을 이루었다거나 저것을 이루었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대구교회에 오면 사람이 하향평준화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 평안과 영광을 모르기 때문이다.
야곱은 겉으로 보기에는 망했다. 그런데 영광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벧엘의 길, 이곳은 두 세계가 교차하는 곳이다. 야곱의 실패와 성공이 갈리는 갈림길이 벧엘이다. 그러므로 ‘벧엘의 하나님’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세상이 모르는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런 길로 부름받았다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내 인생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사람들이 모르는 길로 왔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길로 왔는지 모른다. 옛날에 나를 알던 사람은 더욱 더 모른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아는 길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나온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길로 왔다.
하나님의 동산을 떠난 사람은 야곱과 같은 사람과 함께 부름 받았다. 그 사람 따로, 나 따로가 아니다. 그 길에 부름받았으니까 다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피조물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아담은 피조물이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동산이나 지키고 경작하라고 하셨으니까 형편없는 피조물인 것 같았을 것이다. 우리 교회을 보고 ‘인격이니 복음이니 하지만 그런 시시한 것을 갖고 다른 사람들은 다 바벨로 가느라고 난리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되는가?’ 하는 사람은 대구교회에 못온다. 다른 데서는 시험에 합격하면 축복받았다고 난리인데 대구교회는 그런 것도 없다. 시시한 사람들이 나와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울고 하니까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 오면서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교회 와도 재미가 없는 것이다.
나는 50여년 전에 이 길로 함께 부름을 받았다. 아브라함과 함께, 이삭과 함께, 야곱과 함께 부름받았다. 나 혼자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보니 동창생이 너무나 많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세도 다 내 동문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어찌 그 사람들이 나와 친근하겠는가. 다 동문이니까 친근하지 나 혼자 온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과 함께 부름받았다. 그들 안에서 부름받았고 그들과 함께 부름받았다.
처음에는 나 혼자 부름받은 줄 알았다. 나는 급하니까 나오라고 하셔서 나왔는데 내가 아브라함과 같은 학교에 다닐 줄 어찌 알았겠는가. 야곱과 같은 도장에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제 와서 보니 그분들이 내 선배들이다. 예수님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사람들은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했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서 지음받았다. 지음 받을 때, 우리가 동산에서 위임을 받을 때 이미 예수 안에서 위임을 받은 것이다. 동산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동산을 경작하라는 말은 흙을 경작해서 씨를 뿌리듯이 우리의 인격을 경작해서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과 씨를 뿌리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니 사람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엊저녁에도 곰곰해 생각해 보았는데 사람이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세상에서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인간에게 신성이 있으니 없느니 하며 별소리를 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동물원에 가서 처음 침팬지를 보고 당황했다. 시커멓기는 하지만 사람과 똑같았다. 코가 납작해서 모양이 없기는 했지만 다른 동물들처럼 젖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가슴에 젖이 두 개였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은 누워서 젖을 먹이는데 침팬지는 사람처럼 새끼를 끌어안고 젖을 먹였다. 사람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저놈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황당했다.
TV를 보니 어떤 사람이 침팬지 두 놈을 가운데 철망으로 막아놓고 한 놈에게는 사과를 주고 한 놈에게는 고구마를 주는 실험을 했더니 고구마를 받은 놈이 화가 나서 고구마를 집어던지면서 화를 내는데 사람하고 똑같았다. “왜 나는 사과를 안주고 고구마 줄거리를 주느냐?”라는 식으로 화를 내는 것을 보니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에게 먹지 못할 것을 던져 주면 화를 내면서 되던지는 것은 볼 수 있다. 까 보고 좋은 것이면 먹지만 그 안에 먹지 못할 것이 들어 있으면 화를 내면서 던진다. 아마 철망이 없으면 사람에게 와서 대들 것이다. 그런 것을 보니 인간의 감정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니 인간이라고 무엇이 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다 헛소리다. 아마 침팬지 그놈은 사람을 만들기 직전에 만드신 것 같다. 6일 동안 창조하셨으니까 6일 오후 끝자락에 사람을 만드신 셈인데 아마 침팬지 그 놈은 사람을 만들기 직전에 만드신 것 같다.
사람이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형상으로 지어진 것, 그 생명을 번성케 하기 위해서 흙으로 만들어진 것, 이것이 다른 것이지 다른 것은 하나도 다른 것이 없다. 침팬지와 사촌간밖에 안되는데 사람이라고 으스대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우습다. 인간이라고 자존심이 있다고 하는데 웃기는 이야기다.
사람은 사람의 길에서 사람이 되지 않으면 동물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 무엇이 다른지 비교해 보자.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 해서 짐승보다 낫다고 하겠는가? 날짐승들이 비행기를 보면 얼마나 웃겠는가. “저것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왜 저렇게 시끄럽고 요란하냐.” 하지 않겠는가. 동물들이 사람을 보면 우스울 것이다.
로마서에는 만물이 탄식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하였다. 그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 아니니까 허무한 인간들에게 굴복당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만물도 사람을 시시하게, 없었으면 좋을 존재들이라고 생각한다.
동물들이 회의를 한다면 무슨 안건이 나오겠는가? 동물을 도와주지는 않고 괴롭게만 하니까 저 인간들이 언제 없어지느냐고 하지 않겠는가. 원래는 동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하라고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사람은 위치를 이탈해서 자기만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
이제 인생을 정리하는 마당에서 ‘나는 누군가?’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군가? 인간이 짐승과 무엇이 다른가?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사람이 있다. 자기는 빼놓고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을 원숭이 앞에 데리고 가서 “여보, 저것이 당신 할아버지요.”라고 하니까 화를 번쩍 냈다고 한다. 원숭이가 자기 할아버지인 것은 싫으면서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지식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자기는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다 원숭이 후손이고 아메바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다 아메바 출신이면 자기도 아메바 출신이지 별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할 때 피조물의 영광, 지음받은 자의 영광, 이것이 사람의 길에 있다. 참 사람이 되는 그 길에 있다.
야곱은 점점 하향길로 가고 있다. 그런데 영광의 길로 올라가고 있다. 내려가는 것 같은데 그 길이 올라가는 길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과 함께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야곱과 함께, 이삭과 함께, 아브라함과 함께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나는 오십 여년 전에 이 길로 함께 부름받았다. 그때는 무엇인지 모르고 부름받았고 단지 현실에서 그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응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이 영광스러운 대열에 부름받은 것이다.
이제는 달려갈 길을 마치는 날에 내가 받을 의의 면류관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게는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육신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바울이 말했다. 그리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그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다고 하였다. 사람은 다 이래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도를 닦거나 노력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와 연합에서, 예수 안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당연히 이 길로 가야 되지 않겠는가! 잘났고 못난 것은 다 소용없다. 어느 길로 부름받아서 어느 길로 가느냐가 중요하다. 결국은 부름받은 길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길의 종착역은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 종착역은 예수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하였다. 아브라함이 부름받을 때 예수 안으로 부름받은 것이고 이삭이 태어날 때 예수 안으로 태어난 것이다. 야곱이 연단을 받을 때 예수 안으로 연단을 받은 것이지 그냥 맹목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고생을 했어도 보람이 없다. 고생한 보람으로 돈을 모았다든지 하는 것은 있어도 인생이 영광스럽지는 않다. 왜, 무엇 때문에 자기가 고생했는지 모르니까 돈을 번 사람은 돈 때문에 고생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명예를 얻은 사람은 명예 때문에 고생했다고 생각할 것이나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는 것, 내가 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것이 그 말이다. 그 날이 오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예수 오시는 그 날이 오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충만해지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이 땅을 정복하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이다.
벧엘의 하나님은 참 특이한 이름이다. 야곱의 일생을 조명해 주는 이름이기 때문에 특이한 하나님이다.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의 하나님이 있다. 그 사람만의 하나님이니까 그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상관없다. 자기 하나님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 자기 아버지는 자기만의 아버지다. 내 아버지니까 그분이 어떻게 생겼든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의 구원자는 항상, 영원히 나의 구원자다. 다른 사람은 구원하지 못했을지라도 나에게는 구원자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것은 다 못했어도 나를 부르심에 있어서는 나의 하나님이다.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못하셨을지라도 나를 구속하신 분은 예수밖에 없다. 다른 구속자는 없다. 공자님이나 석가모니가 나를 구속하겠는가. 나를 구속하신 이는 예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선전하고 나타내기를 원한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하고 싶다. 나를 구속하신 분이니까 다른 사람도 구속하실 것이다.
예수 오신지 이천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예수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말았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어디로 갈지 모른다. 옛날에는 천당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천당 간다고 하면 다 웃는다. 그러니 어디로 가겠는가. 그런데도 천당이 없다고 하면 큰일 날 소리를 한다고 한다.
천당이 자기 목표인 사람은 나를 보고 천당이 없다고 한다며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한다. 내가 언제 천당이 없다고 했는가? 모른다고 했지 없다고 하지 않았다. 몰라서 모른다고 했는데 자기들은 아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에게 천당이 있는가? 갔다 왔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갈 수 있어야 되지 자기만 갔다왔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뇌과학을 연구하던 어떤 사람은 의식을 잃었다가 7일 후에 깨어났다고 한다. 그 사람이 쓴 책이 ‘Proof of Heaven’이라는 책인데 그가 7일간 죽었던 이야기를 써 놓았다고 한다. 그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현혹되어서 죽은 후에 그런 데 갈 것이라고 상상한다. 사람이 아닌데 죽은 후에 가면 뭐하겠는가? 사람이 사는 곳이라야 되지 사람이 없는 데를 자기 혼자 가면 뭐하겠는가.
바울은 그런 말을 안했다. 의의 면류관이 자기에게 예비되어 있다고 했지 죽은 후에 어디 간다는 그런 말이 없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내 인생의 마지막에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온 인류가 이렇게 말하게 되기를 원한다. 나는 이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한다.
예수가 없어져 버렸다. 앞으로 기독교는 예수 없는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수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예수는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고 기독교만 있으면 된다. 어느 목사가 독일에 초청을 받아서 루터교 목사들이 모인 곳에 갔는데 강사가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혼자 손을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웃었다는 것이다. 하도 이상해서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당신은 진짜로 하나님이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도 안믿으면서 목사라는 직업이 고상하고 좋아서 목사를 한다. 독일에서는 기독교가 국교나 마찬가지여서 루터교를 믿는 사람들은 세금을 내고 정부부처에서 목사들에게 월급을 주고 교회를 유지하게 한다.
지금 사정이 그렇게 되었다.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필요한 것이다.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다. 예수의 역할은 별로 없다. 병 고치고 은사가 있는 교회에는 아직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데서도 병 고칠 일이 없어지면 예수가 필요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양만 남을 것이다. 기독교적인 교양만 남고 예수는 필요없게 된다.
그런데 예수가 없으면 구속이 안된다. 사람이 제 위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중요하다.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예수는 유일한 나의 구원자다. 세상 어디에도 이런 구원자는 없다. 그러니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