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영(金大暎) dyk5128@naver.com
서울출생,
서울교육대학 졸업 초등학교 교사 재직
콜롬비아 체류(2013.10.~ 2015.4.)
콜롬비아 한글학교 교장 역임
서울교대 평생교육원 <내 글로 책쓰기> 수료
영서 수필문인회 회원
<수상 소감 >
부족한 저의 글이 신인상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우면서도 기뻤습니다. 저는 교직 생활하다가 명예퇴직하였습니다. 마치 새장에 갇혔던 새가 문이 열리면서 하늘로 솟아오르며 넓은 세상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듯,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아침 마다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시고 체조나 명상을 하며 심신 단련을 얼마간 해봤습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가족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그동안 직장생활로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좋은 엄마와 아내로 살기로 했습니다. 평소 내가 해 보지 못했던 일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당시 큰딸이 인도에 있는 데레사 수녀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60세가 넘으신 분들도 봉사하러 온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도 언젠가는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이 퇴직을 앞두고 깜짝 발표를 했습니다. 코이 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의 자문관 모집에 지원했는데,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딸처럼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합니다. 저는 동반자로 수락되어 남편과 함께 콜롬비아에 가게 되었고, 한인교포 2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콜롬비아에 간다니까 주변 사람들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콜롬비아는 고산병은 물론이고, 게릴라들 활동으로 위험하다고 알려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하게 콜롬비아로 날아갔습니다. 도착 후 낯선 나라에서 치안까지 불안하여 가능한 외출을 줄이며 지냈는데도 신변의 위협이 느껴졌습니다. 그곳에서 살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위험 상황을 직접 겪으면서, 아찔했던 순간을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서울교대 평생교육원의 <내 글로 책쓰기> 반을 알게 되었습니다. 차곡차곡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도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인상에 도전까지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부족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이렇게라도 도전하도록 자상하게 지도해 주신 서울교대 평생 교육원의 김낙효 교수님과 문우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남편과 가족들도 고맙습니다.
<당선작>
포위당한 우리 가족
2013년 남편은 콜롬비아에 코이카 자문관으로 파견되었고, 나는 동반자로 가게 되었다. 콜롬비아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데, 나는 까막눈이라서 벙어리처럼 지내며 주로 집에서 나 홀로 답답하게 지내고 있었다. 내 생일은 크리스마스와 연말 사이에 들어있다. 그때쯤이면 가족 모임과 여러 가지 행사로 정신없이 바쁘게 연말을 보냈다. 그런데 이 곳에 온 후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도 우리 집엔 올 사람이 없고 우리가 갈 곳도 없었다. 부모, 자녀, 형제 등 아무도 만날 수가 없으 니 실향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루한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들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가 콜롬비아에 왔을 때, 마침 큰딸은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된 나라 코스타리카의 유엔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작은딸은 로스쿨에 다니며 미국의 뉴욕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딸은 마약범죄자가 많다는 콜롬비아의 위험을 무릅쓰고, 크리스마스와 나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용감하게 날아왔다. 우리는 이산가족 상봉 하듯이 만났다. 간절한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실감했다.
드디어 콜롬비아에서 맞이하는 생일날이 되었다. 우리는 모처럼 외곽에 새로 생긴 백화점에 가서 구경도 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 당 즐거운 하루를 보내려고 계획을 세웠다. 전철을 타고 쉽게 빨리 가기로 하고, 큰 공원의 중간쯤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우리보다 앞장서서 씩씩하게 걸었고, 나와 딸들은 뒤에서 남편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청년 세 명 이 우리 가족 사이에 끼어들더니 남편을 좌우, 뒤 삼면에서 바짝 붙 어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에워싸며 걸었다. 넓은 공간 이 생겨도 옆으로 빠져서 나가질 않고 계속 우리 앞에서 같이 걸었다. 청바지에 얼룩덜룩한 뿔테 선글라스를 끼었고, 걸음걸이와 외모 가 첫눈에 불량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남편에게 이 위험 상 황을 알려 주기로 했다. 우리는 한국말로 이야기하며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빠! 지금 바로 뒤에 세 명의 불량배들에게 포위당하고 있어요!”
불량배들은 우리끼리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가족인 것을 알아챘는지 자기들끼리 손짓하며 슬그머니 우리 가족 사이에서 빠져나 갔다. 그들은 또 다른 패거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우리를 힐끗힐끗 쳐다보곤 했다. 그래도 불안감은 계속 남아 있어서 그들이 다시 따라오고 있는지 주위를 살피며 부지런히 육교를 건너 전철을 탔다. 이곳 전철은 10차선 내외의 도로 한복판을 달리고 있으므로 육교를 이용해서 가운데 부분까지 들어가 전철을 탄다. 전철을 타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 조금 전 따라붙었던 불량배들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출입문 앞에서 우리를 쏘아보며 '꼼짝 마 라! 오늘 너희는 독 안에 든 쥐다' 하는 표정과 늑대의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숨이 막혔다. 육교를 건널 때 아무도 없었는데 어떻게 전철을 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방법이 있었다면 우리를 관찰한 후 도로를 무단횡단하여 철로를 넘어 지름길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우리를 끝까지 쫓아다니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고, 꼼짝없이 당할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전철은 점점 종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엔 모두 다 내려야 하는데, 계속 따라 올 기세였다.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고심하고 있을 때 딸이 말했다. “종점에 도착하면 맨 나중에 내리는 척하면서 전철 운전사 옆으로 바 짝 붙으세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운전사한테 도움을 청하면 돼요!” 이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했다. 우리는 다른 옆 칸의 다른 문 쪽으 로 이동한 후 내리는 척하다가 마지막까지 내리지 않고 운전사 옆으 로 바짝 붙었다. 운전사는 우리가 내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알아채고 전철 문을 모두 닫은 후 오던 길로 다시 유턴하여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불량배들은 우리가 당연히 내리는 줄 알고 먼저 내린 후 우리를 기다리며 두리번거렸다. 간신히 위험한 순간을 겨우 넘겼 지만, 또 불량배들이 나타나 또 다시 쫓아 올 것만 같았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생각뿐이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무사히 집에 도 착했다.
우리 가족은 그물에 걸려들었다가 운이 좋게 빠져나온 물고 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약 우리나라 전철처럼 종점에서 모두 내려 야만 하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라는 옛말이 있다. 위험한 순간에서도 딸들이 침착하게 행동했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딸들은 중남미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대처하는 행동 요령에 관한 책을 읽었고, 스페인어도 부지런히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어느새 나이가 많은 부모를 보호해 주는 딸들로 성장해 주어서 대견했다. 콜롬비아에서의 첫 번째 내 생일 은 비록 미역국도 못 먹었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함으로 가득 찼고,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첫댓글 김대영 작가님,
청룡을 타고 비상하는 2024에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세상이 쳇GPT를 말하지만, 그것의 결과물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임으로,
글쓰기는 끝까지 희망을 줍니다.
수필가로 출발을 하게 됨을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말씀 감사합니다!
칠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신인상을 받게 되어 감개 무량합니다.
더욱 열심히 글을 쓰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성장의 길로 나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