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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자
특집 -오늘의 시조를 진단한다
주) 계간 《시조21》의 특집 인용
본령의 미학
이정환(시인)
1
시조의 형식적 변주의 한계를 ‘단시조, 연시조, 장시조’로 선을 긋는 것이 옳으리라고 본다. 물론 일각에서 창작되고 있는 ‘양장시조, 단장시조’의 존재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을 시조로 붙였을 뿐 3장의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1행시, 2행시에 가깝다. ‘단장시조, 양장시조①’에 몰두하는 이들의 논리는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지만, 시조의 태생에 대한 전면적 부정일 수가 있다. 축소도 확장의 일환이라고 보는 이의 견해는 궤변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3장의 고수는 꼴통 보수가 고집스레 주장하는 말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正論이다.
①절장시조라고도 함.
이렇듯 정형의 기율은 분명하고 그것이 또한 시조미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일이므로 제대로 알아야 할뿐더러 올곧게 운용되어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수긍하는 일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본령의 미학인 율격에 대해 살피고, 참신성에 기인한 몇몇 작품들의 미학적 성취 등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2
금년도 신춘문예 당선 시조들을 일별하면서 걱정스러운 측면이 보였다. 특히 종장 처리에서 ‘율독 단위와 의미 단위②’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시조가 정형시인 만큼 형식 미학에 대한 기본을 철저히 숙지하지 않고서는 ‘시조다운 시조,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시조’를 엮어내기란 어렵다.
②시조의 종장에서 율독 단위와 의미 단위에 관한 논의는 그 이전에도 필자를 비롯하여 몇몇이 거론한 바가 있었다.
넓은 범위에서 율독 단위로 읽히는 경우도 시조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 없이 시조 창작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을 한번 보자.
1)
거룩한 날이 열고 저무는 환한 집을 짓는다
-이양순,「목수 요셉의 꿈」중에서
2)
연착된 열차 기다리며 지평선에 잠든다.
-김재길,「극야의 새벽」중에서
3)
어둠에 갇힌 오늘이여/ 기다린다,/ 커튼 콜
-김주경,「백내장」중에서
밑줄 친 위의 세 가지 예는 모두 의미 단위를 도외시하고 율독 단위로 읽었을 때 가능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각각 ‘5/ 5/ 4/ 3’, ‘5/ 4/ 4/ 3’, ‘5/ 4/ 4/ 3’이다. 물론 종장에서 의미 단위로만 한정할 때 시조라고 부를 수 없는 작품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등단 작품들이라면 율독 단위를 극복하고 의미 단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읽히는 형식 미학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창의적인 의미 공간이자 이로 말미암아 시조가 시조로서 우뚝 서게 하는 종장 첫 구의 형태미③에 대한 진지한 궁구 없이 시조가 본령의 미학을 잘 견지할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1)번 ‘거룩한 날이 열고 저무는’은 문제점이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율독으로 볼 때 둘째 마디가 되는 ‘날이 열고 저무는’은 분명 가락의 파탄이다. 이 대목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시조 고유의 가락과 맛을 제대로 내고 있는지 여부를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낭독 때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본령에서 벗어난 것④이다. 그러므로 특히 신인들은 이 점에 대한 탐구와 천착 그리고 분명한 형식 인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③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시조 작품들에서 의미 단위를 벗어난 종장 처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의미와 한 묶음,
한 호흡으로 가락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④2013 한국작가회의 시조분과가 선정한『좋은 시조』에서도 종장 처리에서 이와 같은 점이 보인다. ‘터지지 않는
목청을 안으로만 되삼킨다’, ‘고통을 물고 있는 말은 말로 하지 않는다’ 등이다.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그야말로 ‘새로운 시조’ 혹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세계’를 보인 작품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 중에 2012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당선작「바람의 각도」는 괄목상대할 만하였다. 참신한 발상과 육화 과정이 주목되었기 때문이다.
추위를 몰아올 땐 예각으로 날카롭게
소문을 퍼트릴 땐 둔각으로 널따랗게
또 하루 각을 잡으며
바람이 내닫는다.
겉멋 든 누군가의 허파를 부풀리고
치맛바람 부는 학교 허점을 들춰내며
우리의 엇각인 삶에
회초리를 치는 바람
골목을 깨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는 것도
내일을 부화시키려 햇살을 당기는 것도
세상의 평각을 꿈꾸는
나직한 바람의 몫
-김태형,「바람의 각도」전문
예각, 둔각, 엇각, 평각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밀도 높은 미학적 축조를 보이고 있다. 여타 당선작들이 지나치게 신춘문예용인데 비해 김태형의「바람의 각도」는 단연 개성적이다. 세상 어디에도 걸릴 것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표상 같은 바람의 움직임에 이만한 의미 부여를 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두 번째로 눈여겨 볼 점은 종장 후구의 형태다. 의외로 이 부분에 대해 별다른 의식 없이 창작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종장 후구가 어떻게 마무리 되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좌우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와 같은 형태는 재고되어야 할 중요한 사안이다.
1)
배 밑을 간질이는 파도 한 길씩 솟고
2)
가을볕 꽃그늘 아래 더딘 기차를 기다리네
3)
희미한 심장박동 소리 수평선을 찾아가는가
4)
씨방 속 온기를 품어 천년 세월 버티고 있다
5)
우수수 시간의 화산재 허옇게 머리를 덮고 있다
1)번은 ‘3/ 2’의 틀이다. 형태미학으로 볼 때 가장 바람직하지 않는 자수율이다. 시조는 첫 마디를 ‘3’으로 시작하여 끝 마디를 ‘3’으로 끝나는 것⑤이 가장 좋은 맺음이다. 2)번은 ‘5/ 4’인데 조사⑥ ‘를’이 거슬린다. 3)번과 4)번은 ‘4, 5’, 5)번은 ‘3/ 3/ 4’구조다. 종장 후구는 시상이 마무리되는 중요한 시적 지점인데 장황한 형태로 말미암아 맛이 반감되고 있다.
세 번째로 살피고 싶은 점이 있다. 종장 이외의 장에 관한 형태다. 요즘도 이따금 한 장에서 한 마디가 더 놓인 경우의 시조⑦들이 보인다.
⑤물론 한 마디에서 한두 자의 가감이 가능하고 작품의 성향에 따라 피치 못할 경우가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종장 후구 끝마디가 자수로 ‘2’인 경우는 정형 율격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므로 삼갈 일이다.
⑥조사 삽입 여부는 한 편의 시와 시조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다. 이것을 원활하게 잘 처리하는 일은 시적 완성도와 직결된다.
⑦때로는 이와 반대로 한 마디가 부족한 작품들도 보인다.
다음 작품을 보자.
선릉역 5번 출구에
다리 없는 남자가 앉아 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못 본 척
지나치는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권영오,「공명共鳴」전문
보다시피 초장 후구의 지나친 과음보 혹은 한 마디가 더 자리 잡고 있는 경우다. ‘다리 없는/ 남자가/ 앉아 있다’를 조금 빠른 속도로 읽을 때 큰 무리가 따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율격이나 시각적으로나 과잉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면 다른 마무리가 불가능할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지치기를 하여 깔끔한 처리를 하였을 경우 시인의 원래 의도와는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화자와 ‘선릉역 5번 출구’에 앉아 있는 ‘다리 없는 남자’가 결국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의미를 함유한 효과적인 제목「공명」에서 받게 되는 작은 충격의 울림은 그 여운이 길다.
권영오의「공명」은 결국 누구나 느낄 법한 정황에 대해 예의 주시한 끝에 보편적인 정서에 깊이 호소하는 한 편의 단시조를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과연 이 작품이 본령의 미학에 충실한 작품인가에 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완결의 미학 일보 직전에 널리 노출되어 버렸다는 아쉬움 같은 것이 있다. 물론 그것은 이후 개작 과정에서 시인 스스로가 판단할 일⑧이다.
⑧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독자로서는 달리 요구할 수 없기는 하다.
네 번째로 참신성과 실험정신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 새로운 시조, 놀라운 반향의 시조, 예술적 성취가 높은 시조를 쓰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항상 언어와 사물과 세계 앞에서 한계를 절감하는 존재다. 피안에 이르고자 때로 극단을 서슴지 않다가 자신을 파괴시키기도 하는 고독한 구도자다. 그런 까닭에 죽음 옆에서 물을 마시며 가혹하리만치 자신을 담금질하기도 한다.
한바탕 소용돌이 휩쓸고 간 모래톱에
깨진 병 조각이 시퍼렇게 꽂혀 있다
누구든 스치기만 해도 살을 쓰윽 벨 기세로
파도는 너를 품으로 보듬었다간 돌아서고
눈물을 삼키면서 보듬었다간 돌아서고
제 혀를 자꾸 베이며
끌어안고 핥아준다
그렇게 숱한 날들이 지나고 또 지난 후에
너울도 닳아져서
지쳐 그만 잦아든 후에
그제야
날을 다 버리고
둥글게
내주는 몸
-김영주,「물의 화엄」전문
의사는 다짜고짜 내 구력을 물어온다
운동?
운동이라면 노동이 고작인데
병명도 분수가 있지
‘테니스 앤 골프 엘보’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내가 뭘 쳤다는 걸까
오른손잡이,
이 손으로 네 등 떠민 적 없었다
무심결 왼쪽 손으로 찻잔을 든 이 아침
세상에, 세상에나
업은 애기 삼 년 찾듯
여태껏 안 떠나고 여기 남아 있었구나
반세기 흘리고 나서
심봤다!
너 왼손아
-문순자,「왼손도 손이다」전문
두 편 다 세 수 한 편이다. 연행갈이도 아주 자유롭고 시상 전개도 거침이 없다. 모두 연시조지만 참신성과 실험정신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 작품들은 착상이 남다르고 깊은 정서적 충격을 안긴다. 그 파장은 길고 오래 간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곧 인생 문제와 직결된 육화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화엄」의 시적 대상은 깨진 병조각과 파도다. 이는 아주 비근한 소재다. 전개 과정에서 공감할 수 있는 구체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살아야 여러 가지 수행을 하고 만덕을 쌓아 덕과를 장엄하게 하는 일 즉 화엄에 이를 수 있는가를 잔잔한 톤으로 노래하고 있다. 화엄 사상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차별 없이 하나가 된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볼 때 김영주의「물의 화엄」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실험정신도 참신성에 기인하지 않으면 놀라움을 안겨줄 수 없다. 수백 편의 시조를 읽어도 가슴 속에 한 편도 아니 한 줄도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두고 향수자의 잘못만이라고 말해야 할까.
정서적 충격이라는 측면에서 문순자의「왼손도 손이다」는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다. 가람의 정의대로 그야말로 실감실정이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일을 담담한 어조와 구어체로 풀어내고 있다. 의사의 구력에 관한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에게 운동은 고작 노동인데 병명은 뜻밖에도 ‘테니스 앤 골프 엘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 운동을 한번도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수에서 화자의 회상이 비롯된다. 도대체 뭘 치면서 살아온 것일까. 오른손잡이로서 다른 이의 등을 떠민 적이 없었음을 상기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왼쪽 손으로 찻잔을 든다. 그런 뒤 현재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오른손을 잠시 잊고 여태껏 떠나지 않고 자신의 몸의 한 부분으로 살아온 왼손에 대한 찬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반세기 흘리고 나서 ‘심봤다!’라는 외침을 혼자 길게 내뱉었을까.
두 편의 연시조를 보면서 단시조의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두 수 또는 세 수로 끌고 가는 연시조가 주는 매력도 만만찮음을 느낀다. 흔히들 ‘실험, 실험!’이라고 하지만 주어진 정형의 기율 안에서 얼마든지 변용과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과 굳이 장시조 형태를 취하지 않더라도 연시조 안에서 주체 구현을 원활하고 능청스럽게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자수율에 매이지 않는 활달한 언어 구사로 말미암아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점이다.
3
작품은 양산되고 있고 정작 마음 속 깊숙이 끌어당기는 시조는 그리 흔치 않다. 눈높이를 낮추어야 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명작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모름지기 시인은 그러한 한 편과 맞닥뜨리기 위해 밤을 새우는 존재다. 뼈를 깎는 절차탁마란 말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단시조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혹독하게 몰아붙이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 눈길
한번 닿으면
장미는 문드러지고
그 손길
한번 닿으면
비단은 남루가 되고
결국은
시라고 써도
난지에 파묻히는 것을
-김상옥,「눈길 한번 닿으면」전문
어떤 이의 눈길이기에 한 순간에 장미를 문드러지게 하는 것일까. 어떤 이의 손길이기에 단번에 비단이 남루가 되는 것일까. 시를 쓰는 일은 사람의 일이다. 시의 화자는 시라고 써도 한때 쓰레기 더미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난지’에 파묻히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초월성에 대한 하나의 강렬한 도전 정신을「눈길 한번 닿으면」에서 읽는다. 태생적인 한계를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오를 수 있는 데까지 오르고자 하는 불굴의 정신성을 담보할 때 우리는 놀라운 한 세계 앞에 어느 날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신의 경지까지는 다다르지 못할지언정 그 언저리까지라도 닿고자 하는 각고의 노력 없이 어찌 ‘가락의 높은 궁전’⑨에 오를 텐가. 시조가 그러한 길을 가는데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채로운 탐색과 더불어 본령의 미학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 정형의 틀, 그 독창적인 조형 미학의 생명력은 운용하는 이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⑨ 박재삼의 시구
이정환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별안간』외 다수.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등 수상.
《시조21》편집위원.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과 출강.
-발췌 계간《시조21》 2013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