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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집회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사람
3. 구원 받은 사람-노아
2014년 7월 28일 이현래 목사님
[창세기6:~9:]
“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역사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계시라고 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사람이 그 길을 따라 갈 것이다. 그런데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고, 또 잘 모르고 사람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여러분도 교회에 다니실 때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보다도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또 많은 설교를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를 알기 전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주인이 무엇을 하는 줄 알아야 일하는 사람이 예의를 맞춰서 하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일하는 사람이 열심히 해보았자 주인의 뜻과는 맞지 않은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집안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이 저녁에 종에게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충주에 갔다 오라고 말했다. 아직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충성스러운 종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충주에 갔다. 충주에 가서 보니 무슨 일 할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두리번거리다가 돌아왔다. 주인은 일어나서 보니까 종이 벌써 가고 없다. 일을 시켜야 되는데 벌써 가고 없으니까 못 시켰다. 종이 그때야 돌아와서 다녀왔다고 한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하니까 충주에 갔다 왔다고 한다. 충주에 뭘 하러 갔다 왔느냐고 하니까 어제 주인님께서 충주에 갔다 오라고 하여 일찍 갔다 왔다고 한다. 이러면 안 된다.
주인이 무엇을 하는 줄 알고 일을 해야 하는데,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일을 하면 헛수고만 할뿐만 아니라 주인의 일을 망치게 된다.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노력은 엄청나게 많이 한다. 새벽마다 남 잠잘 때 일어나서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금식해가면서 기도한다. 40일을 금식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인데 그것을 한다. 열심이 대단하다. 아프리카에 간 사람도 있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 가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모르고 가면 아무리 목숨을 걸고 일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고, 아무리 어려운 곳에 가서 일을 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려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것을 알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를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옛날에는 농사를 지을 때 정말 불안했다. 왜냐하면 기후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비가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서 농사가 좌우되기 때문에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지내야 되고 별 짓을 다 한다. 논에 물을 대다가 싸워서 죽기도 하고 별 짓을 다했다. 왜냐하면 하늘의 일을 모르니까 그랬다. 요즘은 인공위성을 올려서 기상을 관측하고 있다. 지금도 100%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농사짓는 사람들도 기후를 예측할 수 있게 되어 일이 훨씬 쉬워졌다. 그리고 훨씬 목적을 성취하기가 좋아졌다.
하늘의 일을 아는 것이 인생을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무리 내가 논에 물골을 잘 대고 열심히 하고 벼를 심고 해보았자 비가 안 오면 다 헛일이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져도 헛일이다. 우리 인생도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먼저 알아야 내 인생을 차질 없이 갈 수가 있다. 내가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나라의 경제도 마찬가지로 나라의 경제를 운영하는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돈을 크게 버는 사람들은 돈의 흐름을 알게 되고 그래야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런데 나라에서 어떤 방향으로 경제를 운영하는 것을 모르면 정부에서 하는 일과 반대되는 일만 한다. 그러면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일이 위에서 무엇을 하는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려온 것이니까. 위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를 알면 내가 일하기가 쉽게 되고, 정확한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이번 제목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창조했는지를 말씀 드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었다. 이보다 더 인생을 복되게 하는 말씀은 없다. 무엇을 위해서 지었다 하면 인생이 그렇게 복되겠는가? 사람 별 것 아니다.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가 인생이지 사람 별 것 아니다. 다른 동물과 다를 것 없다. 다른 동물과 뭐가 다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가 다르다. 내가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살게 되면 사람은 신성해지는 것이고, 더러운 목적을 위해서 살면 저절로 더러워지게 되는 것이다. 용도에 따라 달라지니까.
똑같이 박을 심어서 박이 열렸다. 박을 타서 하나는 물바가지로 사용하고, 하나는 똥바가지로 사용한다. 똑같은 박인데 하나는 물바가지가 되고 하나는 똥바가지가 된다. 용도에 따라서 달라진다. 우리 인생도 신성한 목적에 거룩한 목적에 쓰여질 수 있게 되어있는데 그 일을 떠나서 다른 길로 가면 되면 똥바가지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 박을 심은 이유는 바가지를 만들기 위해서 심었다. 요즘은 플라스틱 바가지가 있어서 별로 인기가 없지만 사실은 플라스틱 바가지보다도 박으로 만든 바가지가 훨씬 좋다.
인생은 쓰기에 따라서 다르다. 용도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 그런데 박은 그 용도가 물바가지 아니면 똥바가지다. 용도가 별로 여러 가지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너무너무 용도가 많다. 하늘에서 땅까지 용도가 많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가장 좋다는 것이 엄청나게 차이가 많다. 바가지는 두 가지 밖에 용도가 없다. 인간은 용도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 중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은 가장 고상한 삶이다. 가장 완전한 삶이다.
육신으로 지어진 인간은 똑같은데, 이 육신만 생각하면 너무 인간이 허망하다. 이번에 세월호 사건이 나서 피신해 다니던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며칠 후에 가보니까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다 썩어 버렸다고 한다. 왜 그렇게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되는가? 사람이 죽으면 파리들이 와서 알을 깐다. 그러면 구더기가 생겨서 싹 먹어버린다. 어디를 가다가 봤는데 개 껍데기만 있다. 봤더니 구더기가 다 파먹어 버리고 껍데기만 남아있다. 이번에 사진을 보면서 그것이 생각났다. 개는 껍데기가 있어서 못 파먹었지만 사람은 껍데기가 별로 없으니까 다 파먹었을 것이다. 싹 파먹어 버리면 아무것도 없고 뼈만 남는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별 것 아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용도가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서 엄청나게 귀하게 되기도 하고, 그냥 썩어버리면 흙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사용하신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다. 다른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내 인생의 행복이다. 나는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장애가 굉장히 많다. 평생 한 번도 시원한 찬물을 실컷 먹어보지 못했다. 한 컵도 먹어보지 못했다. 여름에 더울 때 시원한 것을 먹어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마음 놓고 먹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매사에 제한을 받아야 된다. 모든 일을 할 때마다 제한을 받아야 된다. 아무리 좋을 일을 할 때도 나는 육신적으로는 제한을 받아야 된다. 항상 이런 제한 안에서 살아야 된다. 얼마나 불편한가? 그런데 왜 내가 행복한가?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 그 경륜 안에 들어왔다. 그것이 행복이다. 다른 것이 없다. 양복도 누가 해주어서 좋은 것을 입고 있는데 양복을 입고 있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 누가 가지고 가버리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 이 경륜 안에, 나만 사용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그 경륜 안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면 다른 데 사용한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판도 있고, 다른 데 사용하는 판도 있다.
우리 동네에 화상경마장이 있다. 이 사람들은 경마장에 직접 가지 못하니까 서울에서 경마하는 것을 화상으로 보고 투기(도박)를 하는 것이다.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이틀 간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많이 온다. 도로에 차가 서지 못할 정도로 많이 온다. 이틀 간 하고 나면 얼굴이 밝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어찌된 것인지 다 시커멓게 되어서 간다. 따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요행을 바라고 거기에 오는 모양이다. 그것을 보면서 인생이 저렇게 쓰이면 얼마나 불행한가.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부르는 데도 안 가고 이틀 동안 경마장에 간다. 거기는 지정석도 있다. 전에 없었는데 지정석이 있다. 돈을 더 내면 자기 지정석을 따로 주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서 지정석에 앉은 사람은 자기가 상당히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정석에 앉는다고 패가 잘 나오겠는가? 안 나온다. 매 한가지인데 그렇게 인생을 산다. 아까운 인생을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정말 귀중한 인생을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의 경륜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사람은 어딘가에 쓸데없이 쓰여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거기다가 신성한 목적을 두었다는 것은 복음이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두고 지었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서 지었다는 말은 복음이다.
아마 요즘 대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졸업하면 삼성회사에서 데려가기로 계약되어 있다면 아주 자부심이 대단할 것이다. 나는 졸업하면 삼성그룹에서 데려가기로 계약이 되어있다. 고등학교도 요즘은 마에스트로 고등학교가 있어서 이미 계약이 되어 학교를 다닌다. 그런 학생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보면 45세 쯤 되면 나가라고 한다. 부풀었던 꿈이 얼마 있지 않으면 팍 가라앉아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우리를 쓸 때,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 자체를 쓰기 때문에 숨 쉬고 있을 때까지 쓰는 것이다. 죽은 후에도 쓸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고 말했다. 죽는 것도 헛되이 죽는 것이 아니다. 이 얼마나 완전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었다는 말보다 복된 말이 없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 길을 떠나서 다른 길을 갔다. 이것을 보고 타락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탈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다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아담이 멸망의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집안이 구원을 받았다. 이 집은 노아와 그 식구들이었고 방법은 방주였다.
오늘은 노아의 때에 의인이 만유를 포함하고 구원받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세상에는 의인들이 많이 있다. 그 의인들이 자기가 의인인데 그렇다고 자기가 의로움을 통해서 다른 모든 사람을 의로워지게 할 수는 없다. 어쩌면 반대가 된다. 한 사람이 너무 의로우면 사실은 다른 사람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어도 불의하게 된다. 학교에서 어느 학생이 공부를 너무 잘해버리면 상대적으로 다른 학생들은 괜찮은 학생들인데 병신이나 바보가 돼버린다. 시골학교에서 그래도 5등정도 했는데 도시학교 명문이라고 갔더니 5등이 30등이 돼버리는 것이다. 공연히 값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왜? 그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잘하니까 내가 공부 잘하던 것이 싹 죽어버리고 만다. 세상은 이렇다. 무엇이든지 어떤 사람이 참 의로운 사람이 나왔다면 모든 사람이 같이 의로워지면 좋다. 그런데 그렇게는 못 된다. 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나오면 다른 사람들은 다 불의한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꼭 불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세상에서는 의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썩 좋은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 불의하면 좋은가? 그것도 아니지만 굉장히 의로운 사람이 나왔다면 상대적으로 불의한 것이다.
이 의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이 진짜로 의로운 사람인가? 자기도 의롭고 자기의 의로움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 의로워질 수 있으면 그 사람이 참으로 완전하게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공부를 잘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도 다 공부를 잘하게 된다면 그야 말로 천재다. 나만 공부 잘하면 천재라도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하는 망재다. 나는 잘되지만 다른 사람은 망하게 하니까.
오늘 자기가 의로움으로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한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세상에는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내가 의롭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다 의롭게 만들 수가 도저히 없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는 내가 의로우면 내 의로움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까지 다 의로워진다.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것이 복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설사 좀 부족한 사람들이고 불의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분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함께 의로워지는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상상이 안 된다. 그런 일은 세상에 없기 때문에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의로워졌는데 그 의로움으로 인해서 나도 의로워졌다는 일은 세상에 없다.
성경 말씀은 겉으로 슬쩍 보면 노아라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잘못 읽으면 멸망이다. 노아가 의로우면 다른 사람은 불의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한 사람이 의로우면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 방식이다. 너무 신기하고 너무 신비롭고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인간 세계는 불가능하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1) 의인이 만유를 포함하고 구원 받음
(1) 노아의 때
노아의 때는 네피림의 시대로서 모두들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살았다. 타락한 천사들은 인간들과 연합하여 거인들이 되어 강포를 자유로이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거인들은 인간의 소원대로 된 사람들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자기 옳은 대로 살기 위해 먹은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어 완전한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때가 노아의 때요 거인들의 때였다(창6:1~참).
의인이 만유를 포함하고 구원 받았다는 말은 의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사람이 노아라는 사람인데 노아의 때는 어떤 때인가? 네피림의 시대라고 했다. 네피림은 자이언트라는 말인데 거인이라는 뜻이다. 거인시대다. 몸이 크고 키가 크다는 말만이 아니고 위대하다, 놀랍다, 이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와서 전부 아내를 삼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들이 자이언트였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자들을 말한다. 천사들을 가리켜 말한다. 천사와 사람이 결합하면 완벽해지지 않겠는가. 우리 인간은 천사의 속성이 없고 천사에게는 인간의 속성이 없으니까 둘이 합한다면 완전한 인간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판을 치는 시대다.
고대 사회에서는 유명한 사람들을 하나님 아들들이라고 했다. 황제, 이런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을 때 소원한 대로 된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 같이 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돼버렸다.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생각하지만 아니 그렇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면 괴물이다. 개가 소같이 돼보라? 좋은 일인가? 아니다. 괴물이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면 사람으로서는 멸망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렇게 된 시대라는 뜻이다.
히틀러가 판을 칠 때는 히틀러가 신이었다. 스탈린이 판을 칠 때는 스탈린이 신이었다. 김일성이 판을 칠 때는 김일성이 신이었다. 신이 아니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고 하겠는가? 스탈린 치하에서 2천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2천만명이 죽었는데도 그 죽은 사람들이 스탈린이 나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이다. 스탈린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놀라운 사람이다.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이런 사람들이 다 네피림이다. 그러니 스탈린이 한 사람만 있었으니 다행이지 이 지구상에 열 명만 있었으면 우리는 여기에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한 사람 있다가 간 것이 다행이다. 히틀러가 한 사람만 있기 다행이다. 김일성이 한 사람만 있기 다행이다. 그 사람이 떼거지로 있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는 다 죽는다. 뼈도 추리지 못한다. 그런 시대였다.
그런데 성경이 말한 말은 바로 그런 인간들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는 말이다. 세상은 바로 그런 인간들이 지배를 한다. 그래서 서로 그런 인간들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 거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그 원리는 동일하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강함과 위대함을 얻으려고 경주를 하듯 달려가고 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자기들 중에서도 누가 더 하나님 같으냐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평화에 관한 일을 알 리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노아의 때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위대해지려고 경주를 하듯 달려간다. 이것은 누가 더 하나님 같은가?, 하고 달려가는 것과 같다. 네가 하나님 같아지나, 내가 하나님 같아지나 보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의 때는 여전히 오늘날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모양만 다를 뿐이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고 지면에 사람지은 것을 내가 후회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저렇게 된다면 짓지 않아야 된다. 아마 스탈린을 보고 하나님이 저 인간은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는데...,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히틀러를 보고 저 인간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래서 그 시대를 멸망시켰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멸망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멸망이 된다. 100명의 히틀러와 100명의 스탈린이 있었다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멸종될 것이다. 멸종되고 나면 자기들끼리 남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남으면 또 자기들끼리 싸울 것이다. 그래서 다 죽는다. 하나님이 멸망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다 멸망된다.
(2) 노아의 인격
노아는 왜 모든 사람이 멸망하는 이때에 구원을 받았는가? 노아는 당세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 하였다(창6:9). 의인이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이라는 뜻이며, 완전하다는 것은 연합하기 위해서 온전하다는 것이다. 모두들 신이 되려고 하는 판에서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로서 완전한 자였다.
이때(이런 때, 이런 시대)에 노아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셨다.
노아는 왜 모든 사람이 멸망하는 이때에 구원을 받았는가? 노아는 완전한 자요 당세에 의인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의인이고 완전한 자인데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이 사람으로 인해서 만유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의인,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다는 말이고, 완전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완성하기 좋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완전이라는 것은 배가 완전하게 만들어지면 그것이 완전이다. 철판조각이 있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합해져서 배가 되면 완전한 것이다. 판자조각들이 널려져 있으면 불완전한 것이고, 판자조각들이 연합하여 배가 되면 완전한 것이다.
의인이고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세상의 개념과 다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사람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연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쉽다.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을 완전한 자라 하는가? 의인이라고 하면 저런 사람은 의인이야, 저런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야 하는 것이 있다. 굽히지 않고 목숨 내놓고 정의를 위해서 뭘 하는 사람들을 보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 의인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사람을 의인이라고 한다. 완전한 사람이란 무엇인가? 결격이 아무것도 없는, 무결점 인간, 이런 사람을 보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무결점 인간을 보고 말한 것이 아니라 방주를 짓는데 완전한 사람이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사람이 완전한 사람인가? 둘이 연합하여 애기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 따로 완전한 것이 없다. 둘이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완전한 것이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다. 이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고 했다. 모두가 신이 되고 싶어 하는 판에서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완전한 사람이었다. 신이 되려는 사람 속에서 네피림이 되려는 사람 속에서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를 나타내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 완전하다는 것은 거짓이며 거역이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교회에 와서 제일 답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안 된다, 왜 안 될까?, 이다. 우리교회에서 ‘안 된다.’파가 생겼다. 몇 몇 사람들이 안 된다.’파가 돼버렸다. 그분들이 참 노력을 많이 했다. 말씀을 들으려고도 노력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려고도 노력했는데 왜 나는 안 되느냐다. 결국 ‘안 된다.’파로 가버렸다. 참 안타깝다. 그렇게 말씀을 들었는데 다른 말만 들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여 저 사람은 저렇게 찬양을 잘하는데 나는 못해. 저 사람은 저렇게 충만한데 나는 저렇지 못해,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자기는 항상 열등감에 쌓여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안 된다.’파가 모인 곳으로 가버렸다.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려 하거나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하면 더 안 된다. 혼자 완전이라는 것은 없다. 혼자 의롭다는 것도 없다. 그러니까 혼자 하려고 하면 다 안 된다. 혼자 완전해지려고 해도 다 안 되고, 혼자 의로워지려고 해도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해서 그를 나타내야 그것이 완전한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완전하다는 것은 거짓이다. 저 사람은 도를 많이 닦더니 완전한 사람이 됐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속이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속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완전해지지 않는다.
목적이 있어야 완전하다. 목적을 놓고 봐야 그 사람이 완전한지 아닌지를 알지 목적도 없는 사람이 뭐가 완전한가? 하늘을 뚫어지게 본다고 완전한가? 내일 천기를 안다고 완전한가? 그것이 인간이 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아야 완전하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연합해서 하나의 완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인데 여기는 아무 소용없고 자기가 무결점 인간이 됐다고 해서 완전한 것이 아니다.
건축 현장에 가보면 좋은 재료라도 버려진 것이 많다. 왜냐하면 건축에 못 들어갔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서 못 들어간 것도 있고 너무 나빠서 못 들어간 것도 있다. 담을 쌓는데 가보면 못 들어간 돌이 있다. 너무 커서 못 들어간 돌, 너무 둥글둥글 해서 못 들어간 돌, 자기 혼자 잘난 돌은 담 쌓는데 필요하지 않다. 담을 쌓으려면 비슷해야 되지 너무 잘나도 쌓을 수가 없고 너무 못생겨도 쌓을 수가 없다. 차라리 못생긴 것이 낫다. 자잘한 조각들은 뒤에 잡석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아주 큰 것은 쓸모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그런 위대한 돌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안 된다.’가 된다.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하고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면 안 된다. 의도 완전도 다 상대적이다. 자기 혼자는 아니다.
교회생활도 누가 완전한가? 상대적으로 완전하다. 교회생활에서 자기 혼자 완전한 사람은 없다. 교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연합이다.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혼자 잘나서는 안 된다. 혼자 의로워도 안 되고 혼자 완전해도 안 된다. 둘이 합해서 완전해야 된다. 참 신기한 일이다. 세상에서는 혼자 잘난 것을 잘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완전한 것을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맨날 싸운다. 혼자 완전해지려고 하니까 싸울 수밖에 없다. 조금 자기가 나으면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남보다 조금 높아지면 다른 사람을 누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 그런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선거철이 돌아오면 90도로 절한다. 고관대작들이 와서 90도로 절한다. 선거가 끝나면 언제 90도로 절하는가? 안 한다.
네피림이 판을 치는 시대에 노아는 그 판에서 놀 수가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예비하라는 명을 받은 것을 보면 스스로 무엇을 하는 위대한(?) 네피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종속 되어 명령을 기다리는 종-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피림이 판을 치는 시대에 노아는 그 판에서 놀 수 없는 사람이었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 홍수가 날 테니까 방주를 예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것을 했다는 것은 사람이 좀 멍청한 사람이다.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 같았으면 그 말을 듣겠는가? 쨍쨍 햇빛이 나오고 있는데 홍수가 나서 세상이 다 멸망할 것이니까 너는 큰 방주를 지으라. 그것 듣고 짓겠는가? 좀 어리숙하고 멍청하니까 짓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할 수가 없다. 나도 못할 것 같다.
방주를 예비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한다. 이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조롱받는 사람일수도 있고 좀 멍청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주인에게 필요한 것일 수 있다.
바울은 우리 몸을 지체로 표현했다. 아무것도 아닌 지체가 가장 존귀한 지체가 된다는 말을 했다. 엄지만 중요한 줄 알지만 새끼손가락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없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새끼손가락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한다. 발가락도 새끼발가락도 없어도 될 것 같은데, 그것이 없으면 뒤뚱거린다고 한다. 균형을 못 잡는다고 한다. 가장 천하고 보이는 것이 가장 존귀하게 쓰인다고 한다.
다가올 홍수를 앞두고 하나님은 왜 노아에게만 말씀 하셨겠는가? 하나님은 들을 만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네피림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는다.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도 싫어하거니와 들을 수 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는다. 또한 말씀했어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택하여 말씀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의로운 사람인 것이다. 성경은 그의 행위를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그 말씀을 청종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그의 말씀을 청종하면 된다. 의는 스스로 무엇을 행하는 문제가 아니다. 위치의 문제이며 태도의 문제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하고서 양심으로, 율법으로, 혹은 지식으로 의로워지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는 없다 고 한다(롬3:20참). 물론 지식으로도 의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노아는 위치와 태도에서 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가올 홍수를 앞두고 하나님은 왜 노아에게만 말씀했을까? 다른 사람에게도 말해서 방주를 짓게 하지 왜 노아에게만 말씀했을까?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들을만한 사람에게만 말씀하신다. 아무한테나 말을 하면 다 듣는가? 안 듣는다. 오히려 비웃고 조롱할 것이기 때문에 말을 안 한다. 들을 사람한테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도 어떤 얘기를 하려면 들을 사람에게 얘기한다. 안 들을 사람에게 얘기하다가는 뺨 맞는다. 싫어하는 사람에게 얘기하면 얻어맞는다. 눈치 봐서 들을 만한 사람에게 말한다. 들을 만한 사람, 그 사람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늘 유익이 온다.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유익을 얻을 수 없다. 자기 혼자 잘났지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한다.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선택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내가 생각할 때 저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내 생각에도 저 사람은 들을 것 같다. 그리고 내 생각에 저 사람은 도저히 듣지 않을 것 같으면 안 한다. 그 사람은 복이 없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봐도 그럴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아무도 좋은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저 사람은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대부분 다 그렇다. 다른 사람도 그렇다. 그 사람에게 좋은 얘기는 하지 않고 남 흉보는 얘기나 해준다. 이런 것을 좋아하니까. 그러면 거기는 똥만 쌓인다. 계속 그 사람에게는 똥만 날라간다. 좋은 것이 있으면 저 사람에게 얘기해주고 싶게 보이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좋은 말을 들을 수 있는 그것이 복이다.
의롭다는 것은 행위 이전에 위치의 문제다. 태도의 문제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하여 자기의 양심으로 자기의 지식으로 의로워지려고 한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했다.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결국 무엇을 주어도 도로 자기 양심으로 하려고 한다. 도로 자기 율법으로 하려고 한다. 도로 자기 지식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했다. 지식으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다. 자기 양심으로도 의로워질 수가 없다. 노아는 위치와 태도에서 의로운 사람이었다.
2) 방주로 구원 받음
네피림의 때는 홍수로 멸망당했다. 홍수는 네피림의 모양대로였을 것이다. 홍수는 큰물이다. 홍수가 땅에 창일하듯이 네피림이 땅에 창일 했다는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의 강포가 심하여 여호와께서는 지면에 사람 지은 것을 후회하셨다고 했다 (창6:6). 강포가 심해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가 권세를 만들어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멸망의 말기적 증상이다.
그들은 홍수와 같다. 홍수는 모든 것을 쓸어 가버리는 것이다. 네피림은 땅의 모든 축복을 홍수처럼 쓰러버린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다(창3:17). 그런데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을 받는다. 방주는 창일하는 바다 위에 떠서 사망의 물을 이기는 것이다.
누가 네피림을 이기며 사망의 바다를 극복할 것인가? 그런데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을 받는다. 방주는 여러 개의 작은 판자들을 연합하여 만든다. 네피림이 위대한 통나무 같고 그 시대가 통나무 시대라면 노아는 작은 판자 같은 사람이고 그는 작은 판자들로 방주를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결국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서 그의 여덟 식구들과 각종 생명을 보존 할 씨를 포함하여 구원을 얻는다. 판자 하나하나는 보잘 것이 없고 작다. 그러나 연합하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구원의 방주가 된다. 이것은 교회가 만유를 포함하는 구원이 될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방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의로운 사람을 무엇으로 구원했는가? 방주로 구원받았다. 의로운 사람이 무엇을 지었는가? 방주를 지었다.
네피림일 때는 홍수로 멸망을 당했다. 홍수는 네피림의 모양과 같다. 홍수가 나면 다 쓸어간다. 마찬가지로 네피림도 세상에서 판을 치면 사람이 수천만명씩 죽는다.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 네피림들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면 수만명씩 죽는다.
미국에 가면 국립묘지가 있다. 가보니까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비석이 쭉 서있다. 영토별로 전쟁별로 비석이 서있다. 월남전에서 죽은 사람들, 한국전쟁에서 죽은 사람들, 1차 대전 때 죽은 사람들이 쫙 서있다. 그 사람들은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니까 다 젊은 사람들이다.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 네피림들이 일으킨 것이다. 네피림이 판치면 세상은 망한다. 홍수와 같다. 누가 네피림을 이기겠는가? 사망의 바다를 극복할 것인가?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네피림이 위대한 통나무였다고 하면 노아는 통나무가 못 되는 사람이다. 통나무 시대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이고, 노아는 작은 판자조각 같은 사람이다. 작은 판자로 방주를 만든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침에 노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나님이 방주를 지을 사람을 찾아다녔는데 그 중 노아가 선택이 되었다. 어떻게 노아를 선택했을까? 배 만드는 목수였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배를 만드는 것은 통나무로 못 만든다. 통나무로 만드는 배는 크게 만들 수가 없다. 조각을 붙여서 만들어야 크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아마 한국 땅에 와서 하나님께서 큰 배를 하나 지으려면 어디를 찾아가겠는가? 현대중공업을 찾아갈 것이다. 그래서 아마 그때 하나님께서 오셨다면 정주영씨를 찾아갔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100만톤 짜리 배를 지으려고 하는데 네가 지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그 영감님께서 물론 내가 짓겠다고 대답하고 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100만톤급 배를 만들었을 것이다. 늘 배를 만드는 사람은 판자조각을 붙이는 일이 보통 일이다. 항상 조각을 붙여서 만드니까. 판자로 방주를 지으라는 말이 너무 귀에 익숙한 말이다. 이 사람은 판자로 배를 짓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네피림들은 판자로 배를 지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위대한 통나무이이기 때문에 통나무를 파서 배를 만들려고 하지 판자조각으로 배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왜 판자로 배를 만들었을까? 물론 배를 크게 만들려고 하니까 일부러 판자로 쪼개서 만들었겠지만 그 시대에 그런 사람이 있었겠는가? 노아의 시대 같으면 그렇게 기계가 발달하여 나무를 많이 쪼갤 수 있었겠는가? 노아 영감님은 통나무는 네피림들이 다 가져가고 굴러다니는 판자를 모아서 배를 짓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맞을 것 같다. 하나님이 돌아다니다 보니까 다 통나무배를 만들고 있는데 어떤 영감이 판자조각을 모아다가 배를 만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일을 시키면 잘하겠다 싶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예수님은 작은 분이다. 유대인들에게 정죄 되고 로마인들에게 살해 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버린바 된 한조각의 작은 판자 같은 사람이다(사53:1~참).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 피로 값 주고 산 많은 판자 조각들이 있어서 방주를 짓는다.
예수님은 작은 분이다. 유대인들에게 정죄 받고 로마인들에게 살해된 사형수다. 모든 사람들에게 버린바 된 작은 판자 같은 사람이다. 자기가 만일 통나무였다면 절대로 방주를 짓지 못한다. 예수님 자기 자신이 판자조각이다. 그 사람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피로 값 주고 산 많은 판자조각들이 있다.
그들은 바벨을 건설하기 위하여 가는 위대한 통나무- 사람들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작은 판자-사람들이다(엡1:7). 이런 사람들이 방주를 건축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인 것이다. 이 방주는 만유를 포함하는 구원의 배가 되었고 이는 교회의 예표가 되었다. 통나무는 아무리 커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방주는 얼마든지 커질 수 있음으로 만유를 포함할 수 있다.
알고 보면 예수님도 그것으로 방주를 짓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방주를 만들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도 작은 판자조각이니까. 통나무 같으면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겠는가? 남은 죽일 수 있지만 자기는 안 죽는다. 통나무들은 다 그렇다. 판자조각이니까 죽은 것이다. 위대한 통나무들과 어린양은 대조가 된다. 통나무와 판자조각, 사자와 어린양, 다 대조가 된다.
그런데 만유를 구원하는 구속 안에 들어오면 다 이상하게 통나무가 아니고 판자조각이고 호랑이가 아니고 어린양이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오는 구원은 그런 구원이다. 이런 사람들이 방주를 건축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다. 비록 작기는 작은데 한 개인 개인으로서는 아주 작은데 연합하면 커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판자조각은 작다. 그런데 배가 되면 커진다.
그런데 이 방주가 교회의 예표가 되었다. 이 방주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교회다. 만유를 포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다.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 있는 의로운 배는 어떤 배인가? 방주다. 얼마든지 커질 수 있는 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는 어느 시기를 지나면서 갑자기 통나무배로 변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위대한 자가 개입했고 그의 힘을 의지하여 위대해졌다. 위대한 네피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놀라운 교인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숭배하고 따르기 시작했다. 작은 판자 쪽들은 밀려나고 버려지게 되었다. 방주를 건축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이 위대한 사명을 버리고 말았다. 교회도 위대해지려고 하다가 변질되고 말았다. 어느 시기를 지나면서 교회가 갑자기 통나무배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제와 맞먹는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변질되고 말았다. 이것은 판자조각으로 지은 배가 아니라 통나무배였다. 교회 안에는 위대한 자가 개입했다. 그 힘을 의지해서 위대해졌다. 위대한 네피림들이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연합이 안 된다. 위대한 신앙가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연합이 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만 쫓아다닌다. 그러니까 연합이 될 수가 없다. 교회는 중요해지지 않고 위대한 성자들이 나타나서 그 사람들을 추종하도록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교회가 변질되고 만 것이다. 판자조각들은 다 밀려나고 버려지게 되었고 방주를 건축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이것이 교회의 타락이다.
교회는 방주가 되기 위하여 다시 고난을 겪게 되었다. 최초의 교회의 예표인 하와는 네피림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생산기능에 상처를 입어 해산의 고통을 교회에 물려주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고난을 겪게 된 것이다. 이제 교회를 지으려면 고난을 겪게 되었다. 왜냐하면 통나무 교회에서 판자조각 교회로 바꾸려면 상당히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통나무 교회에서 판자조각 교회로 바꾸고 있는 중이다. 교회는 결코 위대한 것도 아니고 놀라운 것도 아니고 큰 것이 아니다. 작은 데 그것이 연합해서 커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작은 판자 조각들만을 겨우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여기서 다시 회복 된다. 교회는 작은 판자 조각들의 연합체로서 만유를 포함하는 구원의 방주가 되기 때문이다. 노아는 작은 판자로서 의롭고 완전하다는 말을 들었으며 자기와 같은 판자들로 방주를 지어 만유를 구원한 사람이다.
최초의 교회의 예표였던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네피림이 되려고 했다.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 생산기능에 상처를 받아서 해산을 고통을 받는다고 되어있는데, 그 말은 생산기능에 상처를 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을 교회에 물려준 셈이다. 오늘날 교회는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작은 판자조각들을 구원하여 그 판자조각으로 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고 판자조각들이다. 판자조각들이기 때문에 연합하기에 딱 적합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위대한 사람은 연합이 안 된다. 참 이상한 위치다. 세상에서는 다 위대함을 추구하고 있는데, 교회는 위대한 것을 추구하면 연합이 안 되고 만다. 심지어는 신앙적인 것에서도 위대한 신앙을 찾으면 연합이 안 된다. 배를 짓는 원칙이 그렇다. 판자조각을 계속 연결해야 배가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배를 지어놓으면 엄청나게 큰 배가 된다.
왜 이렇게 큰 배가 필요한가? 이 배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가야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읽으면 방주에 들어간 것들이 무엇인가? 노아의 여덟 식구가 들어간다. 그리고 여덟 식구가 40일 동안 먹을 양식이 들어가야 된다. 그 다음에 집에서 키우던 소도 들어가야 되고 돼지도 들어가야 되고 염소도 들어가야 되고 토끼도 들어가야 되고 가축이 다 들어가야 된다. 그것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 아니고 들에 사는 짐승들도 다 들어가야 된다. 온갖 것이 다 들어가야 된다. 온갖 것, 이것이 만유다.
이것이 다 들어가려면 방주가 굉장히 커야 된다. 그리고 칸칸이 칸을 지어 만들어야 되었다. 왜냐하면 돼지와 소를 같이 키울 수가 없다. 돼지와 토끼를 같이 키울 수도 없으니까 돼지 들어갈 데가 따로 있고 토끼 들어갈 데가 따로 있어야 된다. 방주는 칸칸이 만들었다. 칸을 다 막아놓았다. 그렇게 하려니까 통나무로는 불가능하다. 작은 판자조각이라야 가능하지 통나무로는 그런 배를 지을 수가 없다.
오늘 교회는 이런 사람도 들어가야 되고 저런 사람도 들어가야 된다. 교회에서도 일정한(일률적인)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수준의 사람, 어느 정도 수준의 사람을 원한다. 어떤 형제가 말하는 것처럼 주차질서 예의만이라도 있는 사람을 원하는데 그것이 안 된다. 그렇게 말해도 앞으로 주차하라고 해도 뒤로 주차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교회에 못 오게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들어갈 칸도 하나 만들어놓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은 독방 차지다. 방주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독방이다. 독방이 좋은 방이 아니고 흉악범만 들어가는 곳이 독방이다.
교회는 만유를 포함하는 구원이다. 예수님께서 만유를 포함해서 우리를 구원했다. 이것은 노아가 방주를 통해서 만유를 구원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의로운데 그 의로움이 어떤 것인가? 만유를 포함할 수 있는 의로움이다. 자기 혼자 잘난 의가 아니고 남이 못한 의를 한 것이 아니라 만유를 포함하는 것이 의다.
우리 교회가 의로운 교회가 되려면 말 듣지 않는 사람도 수용하는 교회라야 의로운 교회가 된다. 말 안 듣는 사람은 나가라고 하면 의로운 교회가 못 되고 불의한 교회가 된다. 참 이상하다. 내가 생각해봐도 이상하다. 세상에 이런 데가 어디에 있겠는가? 대구교회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도 어떤 수준이 돼야 멤버십이 될 텐데 멤버십이 될 수가 없다. 그런데 교회가 참 풍성한 것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풍성하다. 주차를 다 정확하게 하면 주차 담당 형제가 일할 것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주차하는 형제가 필요한 것이다.
교회는 참 이상한 곳이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다. 여기 모든 사람이 연합할 수 있는 곳이다. 연합하여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이 지구상에서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딘가? 물론 스웨덴과 같은 나라가 있다. 안정되고 근심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좋은 나라라고 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에게 어디에 가서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다 미국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나라가 복잡하다. 매일같이 사건이 터지고 매일같이 문제가 있고 총을 들고 다니니까 어디서 총소리가 날지 모른다. 수퍼 카운터(계산대)를 방탄유리로 만들어놓았다. 계산을 하려면 방탄유리 창구에 돈을 넣고 계산을 한다. 그렇게 험한 데가 있다.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앞좌석과 뒷좌석이 방탄유리로 가려져있다. 무시무시하다. 그런데도 다 미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다. 다양하다는 말이다.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있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다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회에 가면 좋기는 좋아 보이는데 일정한 기준에 있는 사람만 살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러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인종이 다 사는 나라가 미국이다.
오늘 우리 교회도 모든 인종이 다 살 수 있는 나라다. 중국에서도 오고 아프리카에서도 왔는데 이것은 표면적인 문제고 우리 사람 속은 얼마나 많이 다른가!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르고 다 다른데 이 사람들이 다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는 나라!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어 찬양을 할 수 있는 나라! 이 나라가 가장 좋은 나라 아니겠는가! 세상에 가면 큰 문제거리인데, 교회 안에 들어오면 문제거리가 안 된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의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를 즐길 때 그렇게 즐겨야 되는 것이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즐기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이건 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니고 조화를 생각하면 된다. 이 우주는 조화다. 코스모스는 조화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 조화로운 세계를 만든 것이지 어떤 한 가지 세계를 만들어놓지 않았다. 하나님의 세계는 아주 다양하다. 왜 모기가 있는지 우리는 아직도 모른다. 수만년을 연구해도 왜 모기를 만들어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도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모기 눈깔로 만든 요리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정말 신기한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너무너무 많은 다양한 세계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율법이나 규칙으로 딱 정해놔 버리면 어떤 것은 남지만 어떤 것은 다 잘라내야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것을 잘라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가 있게 되면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완전히 살아내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교회가 필요하다. 인간에게도 역시 그 교회가 필요하다. 내가 숨 쉴 곳이고 내가 잠잘 곳이고 내가 밥을 먹을 곳이고 내가 쉴 곳이 바로 그 교회이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세상 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보면 너무너무 안 된다. 전혀 기준이 다른 것이고 전혀 세계가 다른 것인데, 같은 기준으로 어떻게 재겠는가? 잴 수가 없다.
여기서는 인간이 사는 곳이다. 그냥 인간이 사는 곳이다. 아무 조건 없이 인간이 사는 곳이다. 어떤 조건도 필요 없는 인간만 사는 곳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쉽다. 나는 이렇고 너는 이렇고, 그것이 서로가 조화를 이루고 산다. 나와 똑같은 사람만 있으면 좋은가? 그렇지 않다. 똑같은 사람과 같이 있으면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런 사람과 같이 있으면 심심해서 못 견딘다.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 말이 많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야 도움이 된다.
이번에 정목사님 사모님이 오셨는데 정목사님과 나는 죽마고우다. 100m도 안 되는 옆집에 살았다. 그런데 성격이 정반대로 다르다. 너무너무 다르다. 이 양반은 이미 자기가 임종할 것을 알고 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유서까지 준비를 해놓았다고 한다. 사후에 어떻게 하라는 것까지 다 준비해놓고 갔다고 한다. 그 전에 자기는 예감이 있다고 했다. 꿈을 꾸면 늘 맞는다고 했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교단에서 쫓겨났을 때도 꿈을 꾸었다고 했다. 좋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나는 꿈이 거의 100% 안 맞는 사람이다. 천기누설이니까 얘기 할 수 없고 진짜로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그리고 나를 불러낼 때도 이 친구가 불러내었다. 나와 성격이 100% 다르다. 이 100% 다른 사람이 나를 불러내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절대로 불러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쓸 때, 그런 사람을 쓴다. 나를 위해서는 그런 사람을 쓴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 100명이 있어도 안 된다. 그런데 어떻게 결정을 하여 말 몇 마디도 안 됐다. 양면지에 썼는데 편지가 다섯 줄 정도였다. 원래 편지를 길게 안 쓰는 성격이기 때문에 요점만 썼다. 글씨가 악필이다. 길게 쓰면 잘못 쓴 글씨가 노출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죽을 자리에서 살려주셨으니까 이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생각이 없느냐? 있으면 나오라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렸다. 내 안에 전혀 없는 말이다. 평생 가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참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딪힐 일도 많겠지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에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일을 못한다. 내가 다 해버리니까. 나와 똑같은 사람은 100명이 있어보았자 나 혼자 해도 다 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일도 별로 할 수 없고, 나와 다른 사람이 내가 못하는 일을 한다. 이 이치를 알게 되면 세상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안 좋은 사람도 하나도 없다. 다 필요하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절대적으로 의롭다거나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없다. 다 상대적으로 의롭고 상대적으로 완전하다. 우리 교회 안에 와서 우리는 상대적인 세계에 왔으니까 우리는 서로서로가 필요한 사람이고,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날 때마다 늘 새롭다. 여러분이 순모임을 해도 늘 똑같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 다른데 재미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된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지 나와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보았자 별 것이 없다. 다 내가 생각하던 것이니까. 나와 다른 사람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한다. 나와 다른 사람이 내가 하지 못할 일을 하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지 나와 똑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겠는가?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방주를 칸칸이 지어서 거기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만유를 포함하게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만유를 포함하는 의로움이다. 그분이 의로우신 것은 혼자 의로우신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의롭게 하는 의로움이다. 나는 이런 사람은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로운 사람도 많고 위대한 사람도 많지만 그 사람은 자기만 의롭지 남을 의롭게 할 수가 없다. 공자님도 의롭고 석가모니도 다 의로운 분이다. 다 완전한 분이다. 하지만 자기만 그렇지 우리 전체가 그렇게 되지 못한다. 공자님이 예수님만큼 말을 못하는 줄 아는가? 가르치지 못하는 줄 아는가? 훨씬 더 좋은 것을 가르쳤다.
이번에 어디서 보니까 어떤 사람들 둘이 분쟁이 일어나서 싸우게 되었다. 예를 들어 3x4=12인데 가게에서 장사를 하면서 물건을 사고파는데 3x4=12로 계산을 하니까 12를 내야 하는데 한 사람은 13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3x4=12와 3x4=13이 분쟁이 붙었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라는 분이 지나가는데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기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 우리 선생님께 가보자고 하여 공자님 앞으로 데리고 갔다. 공자님이 말씀을 들어보더니 어떻게 작정하고 왔느냐고 하니까 3x4=13이라는 사람은 만일 이것이 틀리면 내 목을 내놓겠다고 하고 왔다. 그리고 3x4=12라는 사람은 만일 내가 틀리면 내 관을 벗겠다고 했다. 옛날에 관도 중요하다. 그 말씀을 듣고 하시는 말씀이 3x4=13이 맞다고 하셨다. 3x4=12가 아니고 3x4=13보고 맞다고 했다. 제자인 안회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3x4=1가 맞는데 3x4=13이 맞는다고 하나? 고민을 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것 같아서 다시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 3x4=1가 맞는데 왜 3x4=13이 맞다고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생각해봐라. 3x4=13이 맞다는 사람은 이것이 틀리면 자기 목을 내놓겠다고 하고, 3x4=12라는 사람은 자기가 틀리면 관을 벗겠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3x4=13이 맞다고 했으니까 그 사람이 살아서 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어야 되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과 다른 것이 있는가? 놀랍다. 자기는 그런데 남이 다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부처님도 얼마나 놀라운 분이겠는가! 심오한 분이다. 자기는 그렇지만 자기의 그러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의 의로우심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다 의롭게 된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는 인생으로서 완전 밑바닥에 내려가서 처형당한 자리에서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자기와 하나가 된 사람이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예수님이 공자님보다 더 위대한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보다 더 심오한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자기 안에 만유를 포함하는 분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서 예수를 만나겠는가? 물위를 걸어가는 데서 만나겠는가? 바람을 잔잔케 하는 데서 만나겠는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데서 만나겠는가? 거기에 가면 갈수록 거리가 멀어져버린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신 자리에 가보면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한 치도 다름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된다. 바로 그 자리가 의로운 자리다. 우리 모두를 그 자리에 모아서 함께 의롭게 만들어버린다. 우리에게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버린다.
노아, 방주의 계시를 받고 방주를 건축한 노아, 우리는 이 사람을 주목한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 벌건 대낮, 햇빛이 쨍쨍한 맑은 날씨에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짓는 사람, 보잘 것마저 없는 작은 판자들을 모아 만유를 포함하는 구원의 방주를 짓는 사람들, 예수와 그의 사도들, 세상은 이 사람들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노아의 구원이다. 노아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만유를 포함한 구원이 노아의 구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완성된 것이다. 오늘 교회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의로우면 안 되고, 내가 의롭다면 내 의로 모든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의로움이어야 된다. 자기만 의롭다는 것은 의로움이 아니다. 자기의 의로움 안에 모든 사람이 포함될 수 있어야 의로운 것이다.
예수님의 의로움 외에 다른 의로움은 그런 의로움이 없다. 인류를 위한 어떤 지도자도 그런 지도자는 없다. 우리가 공자님이나 석가모니를 따라 가는 것은 너무 힘이 든다. 지금 세계 인류가 70억이라면 70억 가운데 몇 명이나 따라 가겠는가? 공자님을 따라 갈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위대한 분들은 위대한 분들인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안회 같은 그렇게 충실한 제자라고 하더라도 공자님 생각을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겠다고 한다. 왜 3x4=12를 3x4=13이라고 하나? 그렇게 수제자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하물며 누가 그것을 따라 가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아무나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아무나 똑같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다 똑같다. 모든 인간이 다 똑같은 자리로,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되어서 모든 사람을 그리로 불러 모았다. 자기만 의로우신 분이 아니고 자기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셨다. 자기만 완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자기 안에서 완전하게 하셨다.
아까 ‘안 된다.’파처럼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왜 안 된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 구원의 방주가 마련되었으니까 이 방주 안에 들어가면 될 것을 자기 혼자 떨어져 나와 안 된다고 하니까, 방주는 타지 않고 안 된다고 하니까 어찌 되겠는가? 이것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분의 구원 안에, 그분의 그렇게 되심 안에 내가 있어야 되는 것이지 내가 물위에 떠서 40일 동안 살겠는가? 방주 안에 들어가야 산다. 나를 위해서 마련한 방이 많이 있으니까,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는 방을 칸칸이 만들어놓았다. 안 들어가고 자기 혼자 똑똑한 체 하는가? 알고 보면 자기 혼자 똑똑한 체 하려다가 망한 것이다.
방주 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다. 방주 안에서 우리가 다 동일한 사람들이다. 똑같은 사람이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따로 없다. 방이 각각 다를지는 몰라도 잘나고 못난 사람은 거기에 없다. 여기 시설에도 방들이 많다. 방들이 1000명이 수용이 되는데 방은 다르지만 사람은 똑같다. 어느 방에 들어갔다고 더 잘난 것이 없다. 다 같은 방이다. 방주도 마찬가지다. 칸은 많지만 어느 칸에 들어갔다고 나와 다른 것은 아니다. 다 같은 사람이다. 오늘 교회생활은 우주적인 것이다. 단지 1000명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놀라운 세계다. 잘 생각해보라. 세상에는 절대로 없는 세계다. 우리가 이 세계를 전파하는 것은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를 전파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다 하나된 세계, 하나로 사는 세계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방주에 들어온 여러분께서는 전부다 방주의 일원으로, 방주 안에 있는 사람으로, 그렇게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절대로 혼자하면 안 된다. 혼자 의로워지려고 하거나 혼자 완전해지려고 하면 안 된다. 둘이 연합하여 의로워지고 둘이 연합하여 완전해져야 된다. 혼자 완전한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을 죽이는 것이다. 나 혼자 완전해지면 다른 사람은 죽는다. 나 혼자 의로워지면 다른 사람이 죽는다. 나 혼자 의로워지려고 하면 남을 죽이는 것이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 혼자 완전해지려고 하면 남을 불완전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연합해서 하나로, 연합해서 한 생명으로, 연합해서 한 방주로, 이렇게 지어지게 되기를 원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다 쓸모없이 버려지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인데,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다 하나된 세계 안으로 당신의 의로우심 안으로 우리를 불러 모아서 의롭게 하시고, 당신의 완전하심 안으로 불러서 우리를 완전케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길을 지키기를 원하고, 이 길을 전파하기를 원하고, 이 길에 영광을 나타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