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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떼르의 관용, 루소의 혁명
2026 07 23 대서(大暑): 이때부터 배 위에 수건한 장으로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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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사에서 프랑스에서는 중세 암흑기라고 부르지 않고, 새로운 사색(통감)의 시대라고 부르면서, 철학과 사상의 생성이 있었다고 한다. 통감은 중국의 자치통감에 비해 느리지만, 프랑스에서는 파리학파와 샤르트르학파의 영향으로 등장한 프란체스코학파는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학파와 달리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신학적 담론들을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연관들을 예로 들어, 여러 논의 방식들을 제기하고, 그 방식들에서 합리적이고 시험 가능한 담론으로 평결하였다고 한다. 법정과 달리 사상에서 이런 평결론이 파리 대학에 영향을 주어 프란체스코파가 대학의 교과목을 장악할 정도였다. 꽁트는 12세기에서 13세기의 이 시기를 프랑스에서 중요한 문예부흥기라 보았다. 그럼에도 교회권력은 마남사냥을 하면서, 아퀴나스를 주축으로 삼아 지금까지도 파리대학은, 마치 사문난적의 주장처럼, 아퀴나스파가 현재도 주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시기는 종교의 시대였고 변혁기였는데, 토지를 너무 많이 소유한 있는 사찰에 대해 개혁을 하려는 신흥불교가 있었고, 다른 한편 변역의 주역이 될 유학자를 길러낸 이색(李穡, 1328-1396)이 있었다. 이 변역기는 새로운 불교든 유교 수입이든 ‘달리 생각하기’가 도래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서양사에서는 평결의 시대에 유명론을 낳았고, 우리에게는 통치체제의 기반을 위한 주자학(신유학)의 수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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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역(變易)기로서 서양사상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는 18세기 인데, 일제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또는 윤석열에 경도된 자들이 ‘계몽’이라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1700년대를 “빛들세기”라고 하고 앵들로색슨에서는 계몽기라 한다. “빛들 세기” 이전에 평결의 시대에는 화두가 신이었다. 그 신과 연관으로부터, 하늘 또는 이데아가 추상관념으로 실재하느냐를 선문답처럼 다루었는데, 교회는 변증법적 통일을 하려고 하나의 동일성, 완전성으로 가야만 한다고 했었다. 이에 비해 이상성과 관념성이 이름뿐이라고 하면서, 사실들에 대한 선문답에서 대답하는 이들마다 각자가 다른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여러 견해들이 등장하고, 이를 합의 또는 협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에, 추론의 과정을 거쳐서 평결을 내렸다. 아마도 사법상의 처리는 하나의 체계로서 귀결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라는 체계 속에서 진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설치면, 다양한 견해들이 마남사냥 시대에는 입을 닫는다(입틀막이다).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 이외 다른 것을 말하는 이들을, 예를 들어 갈릴레이나 브루노의 마남 사냥처럼, 종교재판에 부치거나, 일상의 백성들에서 먹고 살 것이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을 또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을 듣지 않는 과부들을 마녀사냥으로 몰아붙이고 그 재산을 교회가 차지했다고들 한다. 중세 같은 폭압과 강압 속에서 그래도 ‘니르고자 홀배’ 있었던 백성 또는 인민은 심층(深層)으로 흐른다. 이런 저항이 조직화될 수 없었던 시절이다. 조직화라는 글쓰기는 라마르크와 꽁트 이후이다.
“빛들 세기”에는 빛이 화두였다. 신의 계명도 빛으로 전달한다고 설교하였지만, 인민은 빛이 교회에는 성직자에게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온세상에 골고루 비춘다는 것을 잘 느끼며 산다. 그래 알어(알았어), 나는 빛을 쬐러 저 들판과 산으로 가 볼 것이야, 이미 경험이 있었다. 페스트가 창궐했던 14세기 중반(1347-1351)에 신의 기적과 은총을 입으려 교회안에 갔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았다. 자연에서 바람이 불고, 신선한 산 중에 모여 시간을 보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남긴 것이 데카메론(1353)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이시기에, 우리나라에서 불교의 왕사들이 탐진치(貪瞋癡)에 빠진 시기였다.
표면 밑으로 흐르는 심층의 조직화는 프랑스 대혁명과 둘째 혁명을 거친 1830년에서야 인민들에 의해 본격화되고 제반과학이 제각각으로 발달한다. 그런데 중세를 지나 백성이 표면 위로 오르기 전에, 그래도, 프랑스에서는 백성의 ‘니르고자 홀배인’ 프랑스 입말로 글쓰기를 하였다. 몽테뉴에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러 프랑스 입말로 사상과 철학을 이야기했다. 왜 이 때일까, 유일신앙의 추론이 자연의 추론에 비해 억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더불어 믿음의 체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에 대해 풍자한 에라스무스가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문학자 라블레가 있었다. 그리고 성직자도 귀족도 아닌 평민 신분들이 또는 몰락한 진보지식인이(실학 선비 같은 이들이) 세계의 중요한 사상들과 추론의 진리들을 프랑스어 번역하였다(제일 덕본이가 무학이었던 루소였다). 이런 100여년을 지나서 백성이 제 입으로, 제 삶의 터전의 이야기를 제 머리(영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체계를 가진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중구난방이라 했을 것이고, 벩송을 표현의 빗대어 용어를 빌어 오면, 삶은 당연히 “우여곡절”을 겪는다.
“빛들세기(1700년대)”라는 명칭은 나중에 붙인 이름이지만, 자연을 다루는 이야기는 이미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전개했고,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데카르트는 기하학, 굴절광학, 기상학을 저술들에서 빛을 여러 방식으로 다루었다. 이런 학습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서문’으로 짧게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다. 빛의 직진과 경로(궤적) 굴절도 자연의 것이었다. 그 종교가 숲속에 악마(데몬) 또는 요술사(마녀)가 살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한 것은 루소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는 고아가 되어 방황하다가 숲속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숲 속에는 밤에 악마 또는 간을 빼먹은 마녀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소(1712-1778)의 청소년 시절이 1730년대이다.
“빛들세기”라는 것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신은 모든 이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푼다고 하는 것이, 중세의 유명론으로 보면 말 뿐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종교를 믿지 않은 이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전설따라 오만리’에 퍼져있다. 빛은 말(유명)이 아니고 실재이다. 이 실재를 신이 창조했는지, 자연이 발산하는지를 선문답하듯이, 머리(오성, 지성, 이성)로 추리나 추론하여 토론할 필요가 없다. 자연에서 사실로서 경험하고 실험하여 보여주면 될 일이다. 인간은 머리에서 사유의 추론보다 더 많고 더 재미있는 사실들을 끄집어낸다. 이것은, 마치 빛의 무한한 확산처럼 무한한 경우들을 제시하듯이, 악마의 장난이 아니라는 자연의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이 흥미로운 시대인 1730년대에서 인민의 대혁명이 일어나는 시기까지의 과정이 나로서는 철학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고 죽 여겨왔다. 그런데 들뢰즈/과타리가 “1730년대”를 서술한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당황했다. 이야기가 철학일 될 수 있을까하는 추론하는 머리에서는 회의를 느꼈다. 이 알량한 추론이 얼마나 세뇌 받은 교육인지를 깨닫게 되는 데는 사실 오래 걸렸다. - 간단히 이야기하면 삐아제, 뒤르껭, 프로이트, 푸꼬, 라깡, 스피노자 등의 추론적 사고를 오랜 시간 공부를 하면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로서 앵글로색슨사고에서 벗어나면서, 달리 읽기와 달리 생각하기로 들뢰즈/과타리를 읽으면서 무지 재미를 느꼈다. 각설하고.
들뢰즈/가타리가 천개의 고원 을 썼는데 두세 번 읽으면서, 이 두 철학자가 철학사 또는 사상사를 달리 썼다고 느꼈지만 왜 일까? 일단 이들은 철학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편년체로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학사일까 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내가 그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그냥 편하게 이야기 해보라, 그러면 당신도 두 저자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편년체 역사는 왕조사를 중심으로 한다. 그 왕조사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상부의 견해들(공론장이라고들 하지)이다. 말하자면 심층(백성, 인민)의 이야기들 중에 간혹 왕조사가 필요한 것만 끼워 넣었을 뿐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역사관에 대한 관점을, 왕조사에서 인민의 역사으로 바꾸기 이전에 중요한 인물이 있다. 미슐레이다. 그는 왕정역사를 연구하다가 루부르 궁 옆에 있는 혁명자료실에 들어갔다. 정돈된 역사서들의 반대편에서, 먼지가 쌓이고 낱장으로 이런 묶음과 저런 묶음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종이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종이들이 혁명과정에 인민이 혁명공안위원회에 보낸 자술서와 의견서, 즉 소원수리였다. 미슐레가 방향을 바꾸면서 역사서술의 새로운 방향이 생겼다고 한다. 아날학파이다.
역사에 대한 통감(거울 비쳐보기)은 12세기에 있었다고 했었다. 역사의 과정에 대한 대조와 비교를 하는 것도 인류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에 의해 쓰여지던 왕조사의 시기가 끝난 것은 루이 14세(1638-1715)의 이후이다. 권력자가 또는 성직자가 아무리 자비로운 시혜를 베푼다고 해도, 그것은 강압과 명령, 인민의 피를 빠는 것이라는 한 것을 대중이 알아채기 쉽게 글쓴이는 니체였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런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고 쓴 이는 루소이다. 루소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 1730년대를 생각해보면, 인물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그 인물이 두 저자 표현으로 용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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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저자, 들뢰즈/과타리의 이야기, 즉 1730년대의 이야기는, 모든 방면에서 모든 사유에서, 거대한 풍선 위의 찍힌 수많은 점들과 같은 이야기들이 백성들 사이에 흐르고 돌고 있었다. 새로운 사유, 상상, 공상 등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꾸물꾸물 솟아올라 풍선의 가장자리에 그림들을 그렸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를 유모, 필연 모태, 자발성(원인) 등으로 표현한 것도 안에서 솟아나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 어쩌면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이어 김천택의 청구영언(1728)은 이런 이야기의 일부를 모았을 수도 있다. 세계사에서 인류는 그즈음에서 용출선을 내보였다. 탈주선이라고 하는 용어는 기존의 불판(귀족과 성직자의 놀이판, 하버마스의 공론장)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에 쓴 표현이리라.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스키조프네니(1980)의 제10장, 1730년: 강렬하게-생성, 동물-생성, 지각 불가능하게-생성에서, 얼마나 많은 자연의 생성작업과 같은, 즉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의 표면으로 분출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기나긴 의식 안에서 기억은 흐른다. 그 기나긴 기억 속에서 겹겹이 쌓여있어 이리저리 엉켜있던 추억들이 분출한다. 그 분출에는 순서가 있지 않다. 이것을 배치하고 배열하는 논리적 추론이 필요하다. 백과전서파는 인민들이 읽기 좋게, 게다가 합리적 추론으로, 배열하는 작업을 했으리라. - 우스게 소리 루이 18세가 취미가 열쇠 만들기인데, 백과전서에 상세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다가, 왜 이 책이 금서가 되었는지를 장관에게 거꾸로 물었다는 것이다. - 인민은 작업할 줄 알았고, 상층은 금지할 줄 알 뿐이었다.
제10장 안에서 다룬 내용들의 제목만 보아도 흥미롭다. 물론 이것이 철학이 되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천국과 부활은 철학이 되고? - 어느 박물학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naturaliste), 어느 베르그송주의자의 추억들 (Souvenirs d’un bergsonien), 어느 마법사의 추억1(Souvenirs d’un sorcier I), 어느 마법사의 추억들 2 (Souvenirs d’un sorcier II), 어느 마법사의 추억들 3(Souvenirs d’un sorcier III), 어느 신학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théologien),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추억들1(Souvenirs à un spinoziste),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추억들 2(Souvenirs à un spinoziste II), 어느 <이것임>의 추억들(Souvenirs d'une heccéité), 어느 판 짜는 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planificateur), 어느 분자의 추억들(Souvenirs d'une molécule), 비밀의 추억들(Souvenirs du secret)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서, 저자들은 자연이라는 다양체에서 생성들을 이야기 할 것이다. ‘추억들과 생성들, 점들과 블록들(Souvenirs et devenirs, points et bloc)’, 점 체계들과 다선 체계들의 대립(Opposition des systèmes poctuels et des systèmes multi-linéaires), 음악, 회화, 생성들(La musique, la peinture et les devenirs),음악 되기(Devenir musique) 등을 제시한다.
추억들은 순서 없이(서수가 아니라 기수처럼) 마치 터전의 상황에 따라 기호로서 등장한다. 왜 이 시대의 백과전서파들이 사실들에 대해 연대적 배열과 달리, 항목들을 정하여 페이지처럼 작성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배열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사실들의 언어적 배열로서 추론도 있지만, 수학적 계열도 경의 수에 대한 조합도 논의 되는 시기였다. 이들 협력자들 중에는 수학자들이 많다. 게다가 뷔퐁과 같이 생물학적 발생의 계열이 있다고 하는 것도 수학의 계열에서 빌려왔다고 하고, 이런 발상으로부터 라마르크에 이르러 변형론(진화론)을 제시할 것이다. 이 많은 이야기가 철학사와 연관이 있을까?라고 아직도 걱정하는가!
통감(사변, 거울비추기) 시대와 평결의 시대를 지나서, 입말이 소통되는 “빛들세기”에 다양체의 발현을 보았던 것은 아마도 에밀 브레이어의 철학사(1934)”에서 일 것이고, 그는 이 시기를 재미있는 표현으로 “요상한 것들의 박물관”이라고 했다. 인간의 역사는 여러 갈래 중에서, 각 나라는 자기 터전에 맞게 사실들과 사건들을 배열하고 배치한다. 그런데 표현된 배열과 배치 이전의 수많은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흐르고 있다. 언제 불쑥 나올 때, 추억의 지층을 마치 지각변동처럼 표면으로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빛들 세기”의 이야기를 로고스(추론)에 맞게 정리하는 과정이 디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그 시대의 진보 지식인들이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화해와 불화의 중요 인물은 볼테르와 루소였다. 하나는 상층에게 관용을 부탁했고,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민에게 심층의 자발성을 발휘하자고 했다. 디드로의 소설은 프랑스에 알려지기 전에 괴테에게 알려질 정도로, 이 시대의 프랑스어 입말의 소통은 심층에서 나와 표면에서 세계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라틴어가 아닌 그런 입말이 소통되는 데는 거의 200여년이나 걸렸고, 이에 힙입어 제3신분이 등장하고 인민의 혁명 그리고 인민의 제헌의회의 법률을 만드는 것이 대혁명이다.
우리도 통감의 시대를 거쳤으나, 새로운 시대를 열 변역(變易)의 시대를 제대로 형성하고 맞이하지 못한 것이 두 번의 큰 전쟁 때문일 것이다. 왜와 전쟁과 청과 전쟁이었다. 삶의 터전이 피폐해, 백성이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 ‘니르고자 홀배’의 소통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실학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상층의 공론장을 돈독히 하여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 후자에서 노론 지배가 백성과 지식인들의 입틀막을 하였으니, 그것이 “사문난적”이란 이름으로 마치 마남사냥하듯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일제가 “대전통고”를 통해 학파와 가문의 분파싸움을 시켰다고 하고, 지금도 사전이든 무엇이든, 인물을 표현할 때 성씨의 본을 표현하는 것처럼 가문을 먼저 드러내는 것도 상층의 지배의식이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생각하며 자랐는지는 뒷전이다. 이런 ‘사문난적’ 기득권은 미국제국 아래서, 또 다시 노론이 집권의 연장을 위해, 미국의 ‘맥카시 선동’과 같은 빨갱이사냥을 빌려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말하면 악마취급하면서, 지금도 보안법이란 이름으로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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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일제잔재와 미제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백성, 민중, 대중, 인민은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흐르고 있다. 민중운동은 동학에 끈을 연결하고 있고, 민주화라는 노동 해방의 이름으로 대중 운동도 죽 이어져 왔다. 사상사에서 사문난적 이래로, 사상의 자유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백성의 입말은 흐른다. 해방 후 80여년 동안, 입말을 한글로 문자화하면서, 인민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게다가 프랑스의 백과전서와 같은 방식이 위키피디아가 형성되었고, 그보다 더 나아가 쳇GPT와 AI지식를 통한 소통도 되고 있다. 입말이 오랜 억압과 강제에 벗어난 것은, 촛불시위와 응원봉 불빛 항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부터 이제서야 공화정이라는 입말이 터전에서 흐르고 있다. 대표자 선출에서 1인 1표제가 당연한데도, 이게 일제의 간화선을 배운 이들처럼 선문답하듯이 말장난 하려 든다.
프랑스 공화정의 등장은 대혁명에서였다. 이 공화정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제와, 황제[참주]제 이전의 고대 로마의 원로원의 의회 제도를 함께 모방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놀이판에서 제3신분이, 즉 성직자 또는 귀족에서 기득권을 내려놓은 지식인들이, 백성 또는 인민과 더불어 현실의 표면에서 주인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직접민주제와 권력자들의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민이 소환하는 소환제가 공화정의 기본이다.
민주당과 같은 한 정당에서 1인 1표제의 공화정을 실험하려고 한다. 볼테르처럼 시대의 깃발을 드는 유시민도 있고, 루소처럼 공화정을 추구하려는 조국도 있다. 게다가 독일식 사법체계가 노동자 억압과 인민 강제라는 것을 알리는 박은정 같은 조국혁신당의원과 재야에서는 이병철 변호사와 최강욱 변호사 같은 이들도 있다. 프랑스 혁명의 동인이었던 제3신분이 발언하는 것처럼,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은 문제를 제시한다, 즉 1) 사회주의란 (붉은 칠) 낙인찍기, 2)문조털래유로 돌팔매를 하는자들, 3) 검찰개혁의 기둥에 도끼질 하는 자에게 반격을 공언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길을 가도 된다고 하는 것을 실행하려는 진보당의 김재연도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우리 입말로 백성(민중, 대중, 시민, 인민)이 ‘제 뜻을 펼치는’ 시대, 즉 프랑스 에서는 2백여 년이 걸려 피의 혁명을 일으킨 다양한 생성의 시대를, 우리는 80여년 만에 촛불 또는 응원봉을 든 빛의 혁명을, 평결과 조화정의로서 이루어 갈 것이다.
입말의 시대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알리는 목탁소리에 깬 새벽 새소리들처럼 유시민, 조국, 박은정, 이병철, 최강욱, 신장식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의 시험대에 오른 정청래 민주당 후보 대표에게 응원을 보낸다.
(4:41, 59RMC) (5:32, 59RMCC)
# 볼테르의 영국 망명 사건 전후
볼테르(1694-1778)는 앙리아드(La Henriade 1723)[스물아홉]를 썼다, 관용의 시대를 연 앙리 4세를 칭송한 서사시로 이름을 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26년 사건 후에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1728년까지 머물면서 뉴턴의 과학과, 로크의 관용론에 영향을 입었다.
1726년[볼떼르 서른둘] 로양-샤보(1683-1760)는 연극 극장 앞에서, 볼테르에게 “당신이 볼테르요, 아루에(Arouet, [Arouet종달새]요.”라고 조롱쪼 농담을 던졌다. 볼테르가 이에 지지 않고 “내 이름은 훌륭하지 않지만, 나는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사람이오” [fr.Wiki: « Voltaire ! Je commence mon nom et vous finissez le vôtre ». 나의 이름은 시대의 알리는 시작이지만, 당신의 이름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비꼬아 받아쳤다
며칠 후, 볼테르가 그의 친구인 쉴리 공작(le duc de Sully, 쉴리가계는 유명하지만 이 인물은 유명하지 않아서 ?-?) 집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누가 불러서 그가 바깥에 나갔을 때, 그날 모욕당했다고 여긴 기사는, 마차에 앉아서 보면서, 하인들을 시켜 볼테르에게 매질(le gourdin: la bastonnade 몽둥이질, 태형 笞刑)을 가하였다. [로앙 기사는 “머리는 때리지 마시오, 거기선 아직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으니”라고 모욕적인 말까지 던졌다고 한다.] 볼떼르는 항의하기 위하여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쉴리 공작조차도 경찰서에 동행하기를 거절했다. - 이 사건에 대해 꽁띠 공(Louis-Armand de Bourbon, prince de Conti, 1695-1727)은 « Ils ont été bien reçus mais mal donnés ». ("의견은 잘 전달받았으나, 해석이 잘못되었습니다.: 말씀은 잘 들었지만, 뜻이 잘못 전해졌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볼떼르는 부상도 당했지만, 치욕을 당했기에, 샤보 기사에게 결투 신청을 했다. 당신의 법률로서는 평민이 귀족에게 결투신청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루앙가(les Rohan)는 루이 15세에게 체포영장[레뜨르 드 까셰(Lettre de cachet, 체포 및 구금 영장)]을 발부 받았다. 볼테르는 4월 17일 바스티유 감옥으로 끌려갔다. 2주 후에 국외로 추방의 조건으로 풀려났으며,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나중에 이런 경험을 포함하여 철학 서간들(Lettres philosophiques, 1733)을 남겼다.
1683 로앙-샤보(Guy-Auguste de Rohan-Chabot, 1683-1760), 프랑스 귀족(슈발리에), 볼테르와 언쟁(altercation)으로 세상에 알려졌을 뿐 유명하다.
16??- 쉴리 공작(le duc de Sully, 유명하지 않아서?-?), 쉴리가계 쉴리 1세 공작(Maximilien de Béthune, 1er duc de Sully, 1559-1641)에 속할 것이다. 쉴리1세는 프로테스탄트로, 앙리4세의 측근이었고 군대 원정을 동반했다. 여기 볼떼르와 저녁식사를 한 쉴리는 손자 정도일 것이다.
1695 꽁띠 공(Louis-Armand de Bourbon, prince de Conti, 1695-1727), 그는 에스빠뉴 전쟁에 참여했고, 섭정의 고문관이었다. 꽁띠가의 대꽁띠(François-Louis de Bourbon 꽁띠 4세, 1664-1709)의 아들이다.
사회제도에서 관용정치
볼떼르는 평민으로 귀족과 말다툼으로 바스티유 감옥에 가게 되었다. 정권은 볼떼르가 망명한다는 조건으로 풀어 주었다. 그는 영국으로 가서 크게 보아 중요한 2가지를 배워왔다. 하나는 천문학을 통한 뉴턴의 자연과학이었다. 다른 하나는 로크가 종교와 정치에서 사회적으로 사투를 벌리라는 것을 관용으로 풀어야 한다는 점이다.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 볼테르는 뉴턴철학의 계승자인 클라크도 만났다.
의회가 피를 흘리지 않고 1689에 “권리장전”으로 권력 없는 왕이 등장한다. Essai sur la tolérance (1667)과 Lettre sur la tolérance (1689) 두 편이 있다. 1688년 명예혁명이후, 1689년 발표한 저서 관용에 관한 편지를 통해 국가와 교회의 역할을 명확히 나누고, 종교의 자유가 평화로운 사회의 기본 조건임을 강조
볼테르의 관용론의 정리는 영국에서 배워온 것이라기보다 그의 삶의 과정에서 정치적 핍박과 종교적 박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직접겪었기 때문이다.
#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에 연관된 사건들: 1598년 낭뜨 칙령이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위그노)가 공존하였다가, 1685년 퐁텐블로 칙령으로 국교를 카톨릭으로 선회하여 위그노를 탄압하였다. 위그노 지식인들은 프랑스를 떠났다. 그 후유증은 100여년이 지나도 일어난다. [- 해방 후 우리 입말과 외래 사상의 대립은 79년이 지나 표면으로 올라오고 있다. 보도연맹과 혁신계열의 죽음이후 표면 아래로 흐르다가 간간히 표면 위로 올라오려고 했으나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 등의 죽음으로 인민의 저항에 대한 저항의 각질에 균열이 있어왔다. 2024년은 새로운 용출선이 등장했다.]
1761 칼라스 소송사건(L’affaire Calas, 1761): 툴루즈에서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사이의 종교적 갈등으로 1761년에서 1765까지 전개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인 가족에서 아버지와 카톨릭인 하녀 + 카톨릭으로 개종한 아들 사이에 갈등이었다. 아들의 자살을 아버지가 죽인 것으로 고발되었다. 아버지(Jean Calas, 1698 -1762, 화형)는 무혐의를 주장하였으나, 화형 당했다. 볼테르는 이 처형을 보며 이런 명언을 남겼다. “네가 타인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 역시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 그는 파리의 법정에서 1765년 복권되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1788》]
1761 시르뱅 소송사건(L’affaire Sirven, 1761) 1760년에 마자메(Mazamet, 지역 Occitanie)에서 전개되었다. 시르뱅(Pierre-Paul Sirven, 1709-1777) 부부와 3딸은 프로테스탄트이다. 막내[둘째] 딸이 23살에 정신이상이었는데, 그녀가 집을 나가 여성 수도원에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녀를 데려왔다. 그녀는 의사에 의해 치매로 판정되었다. 1761년에 다시 그녀가 집을 나갔고, 그녀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딸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라고, 고발당했다. 1769년에 풀려났으나 사면되지 않았다가, 볼테르의 개입 덕분에 1771년에 복권되었다.
1765 라바르 소송사건: 라 바르 기사(騎士)(Le chevalier François-Jean Lefebvre de La Barre, 1745-1766), 1765년 이 귀족 가정의 젊은이는 아브빌(Abbeville, 지역 Hauts-de-France)의 법정에서, 그리고 파리 대법원에서도 불경건과 신성모독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766년 7월 1일 집행되었다. 그런데 1766년 7월 30일에 신성모독이 사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라 바르 기사는 1793 혁명의 제헌의회에서 복권되었다.
1766 랄리 소송사건: 랄리 백작(Thomas Arthur, baron de Tollendal, comte de Lally, dit « Lally-Tollendal », 1702-1766)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고급공무원. 프랑스 인도령의 장군, 파리의 제네바 광장에서 사형. “왕의 이익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7년 전쟁(1756-1763: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패배의 희생양이었다. 배반 혐의는 풀렸으나 다른 혐의가 유지되어 랄리는 복권되지 않을 것이다[아직도].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승계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루소
제도 자체가 인간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
관용과 저항
동정과 연민
인권선언
1700 우리나라 고증학: 고증학은 영, 정조 때 일어난 한국 실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반계수록(磻溪隨錄),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색경(穡經),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서(湛軒書),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燕巖集),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발해고(渤海考),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1798)(홍역 연구),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십륙지(林園經濟十六志) 등 각 분야의 실학적인 저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정호(金正浩, 1804-1866)의〈대동여지도, 18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