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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베1901시간념1902강1213노트
12강 3월 14일 강의, - 13강 3월 22일 강의 노트
- 강의 참석자, 프시카리(Ernest Psichari, 1883-1914)의 노트
벩송: 시간관념(L’idée de temps),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1-1902)
- 메이에르-비쉬(Gabriel Meyer-Bisch s.d.), 편집, PUF, 2019, pp. 159-175(P.395).
- 프시카리(Ernest Psichari 1883-1914) "잡문집"에 안 나옴. 프랑스 장교이자 작가인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31살] [도미니끄 재가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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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강의 노트(프시카리)는 앞에서 정리된 강의노트들[쟈크 마리땅]과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보기에, 벩송의 사상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올 수 있을 것이다. 프시카리(1883년생)과 쟈끄(1882년생)과 사이에 나이차이가 한 살로서 거의 차이가 없지만, 아마도 쟈끄가 받아쓰기에 좀 더 숙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프시카리의 노트는 부록으로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어느 노트가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14강에서부터 샤를 뻬기에 의해 속기록자에 의한 내용을 보면, 두 수강자들의 노트가 매우 간략하고 또한 자기 이해에 맞게 작성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강조점은 비슷하지만, 둘이 어느 쪽이 더 벩송의 서술 방식을 따랐느냐는 문제는 다른 문제일 것 같다. (55W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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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강 3월 14일 강의, 177-179
우리는 칸트의 두 안티노미들을 검토할 것이다.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에 대해 가능한 증명과 같은 것이 있다고 제시하고자 원했다. 그러나 칸트에게서 시간과 공간의 혼동[혼융]이 없는가?시간이 순수 선천적(a priori)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다섯 가지 이유들이 있다. (177)
1. 동시성과 계속은 지각에 필연적인 틀들(des cadres nécessaires)이다. 지속 없이 우리는 사물들을 계속들로서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선천적이다. 이런 개념작업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왜 연속은 경험에 의해 주저지지 않는가? 지속은 경험 자체이다. 그러나 칸트는 지각작용을 먼지들처럼 묘사하고서, 그는 말하기를, 이 가루들이 접착되기 때문에, 접착제와 실에 앞서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지각의 다양성은 먼저 주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먼지들의 가루들은 주어지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루들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러면 접착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리작업은 우리의 작품이다. 우리가 분리작업을 조작하는 빈 환경이라는 공간은, 그것은 선천적이며, 그런데 그것은 공간이다. (177)
2. 시간은 재현[표상]이다. 사람들은 이 재현[표상]을 해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시간의 폐기를 재현할 수 없다. 나의 편에서 보면, 나는 지속의 부재와 - 내가 지속에 이른 과정 – 그 과정을 재현하지 못하기에 이른다. 모든 기억의 폐기, 따라서 모든 의식의 폐기를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선 개별[불가분]의식은 있고, 그리고 동물적 의식이 있고 그리고 우주적 의식이 있다.시간은 더 이상 없다. 공간에게서는 다르다. 우리가 공간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공간, 그것은 가설상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 존속하는 무엇이다. (177)
고대인들은 그것을 잘 보았기에 그들은 공간은 비-존재(le non-être)라고 불렀다. 우리는 개별적 지속들 대신에 비인격적 지속을 대체 한다. 칸트로부터 존속하는 것, 그것은 시간에게 상징으로 쓰이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추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바로 공간이다. (177-178)
3. 시간에 상대적인 공리들(des axiomes)이 있다(하나의 차원만 갖는 공간이 있을 뿐이다). 원리들은 경험에 의해 주어질 수 없다. 맞아요. 하나의 선에 의해 재현된 시간은 하나의 차원만을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상징적 공간일 뿐이다. - 동일한 시간으로 된 하나의 시간만 있을 뿐이다. 아뇨, 우리게 불평등하게 펼쳐져 있는 지속들이 있다. 리듬들이 많은 만큼이나 많은 의식들과 많은 기억들이 있고, 그 만큼이나 지속들이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의 선위에 이런 시간들을 수렴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선을 가질 것인데, 그 선과는 시간들은 부분들(des portions, 지분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거기에서, 그것은 공간적 재현이다. (178)
4. 시간은 논증적 개념, 즉 일반적 관념이 아니다. 여러 다른 시간들은 그 시간에 연관하여 단지 전체와 부분들일 뿐이다. 여러 다른 시간들은 개별적 시간들처럼 다르지 않다는 것이 확실한가{?} 리듬들에 따르면, 우리는 같은 류에 대해 많은 개별자들 가질 것인데, 개별자들은 동일한 전체의 부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만일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상징적 재현[표상]을 얻었다면, 시간의 부분들은 하나의 선의 선분[분절]들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협약(convention)이다.
5. 시간의 재현은 마치 무한정(indéfini)하다. 공간은 무제한성(illimit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서 공간이 작용하지 않는지를 또한 자문할 수 있다. 지속, 그것은 진행(un progrès)이고, 그것은 행동이며, 시작과 끝이 있는 어떤 것이다. 공간, 그것은 사물이며, 아마도 마치 무한(infini)처럼 제기된다. 만일 우리가 시간을 하나의 선과 같이 일치하는 것으로 습관처럼 다룬다면, 칸트가 근거(raison, 이유) 있다. 그러나 작용하는 것은 상징으로부터 이다.
우리는 안티노미들로 지나가자. 칸트는 감성론에 시간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은 보존하지는 않는다.그러한 것이 없다면 안티노미들도 없었을 것이다. 안티노미들 속에서 실재성과 맞대결(corps à corps)이 있다. 공간은 더 이상 순수 상태로 검토되지 않는다. 칸트가 공간은 지속에 의해 감염된 것으로 다룰 때, 칸트는 마치 합산(une sommation)처럼 제공하지 않아서, 따라서 [합산은] 유한하다. (178)
제1안티노미: 명제: 세계는 시간 속에서 시초가 있다, 그리고 공간 속에 한계가 있다. (179)
반명제: 세계는 무한하다 .
시간은 유한하다. 계열의 무한성은 점진적 종합에 의해서 완전[충만]하게 될 수 없다. 지속 전체는 종합이다. 지속이 흘렀기 때문에, 무한한 종합이 흘렀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불합리(absurde)이다. 우리가 말했던 것과 유사하게, 지속은 구체적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종합이고, 조작이고 따라허 유한한 어떤 것이다.
반명제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것을 만들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지속을 유한한 것으로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것[지속]을 빈 시간으로 둘러쌀 것이고, 우리는 저넘어로 가도록 강제당할 것이다. 그러나 빈 시간이란 무엇인가{?} 공간이 아니라면. 명제 속에서 하나의 작동(acte, 현실태)처럼 제기되었던 지속이 여기서 하나의 사물(une chose)처럼, 한 마디로 공간처럼 제시되었다. 이것이 시간을 위해서 이다.
나는 공간에 도달한다. 주제: 공간은 유한하다. 왜냐하면 만일 세계가 무한하다면, 모든 부분들을 나열하기 위해서 무한한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그런데 (주제), 시간은 유한하다. 공간이 무한이기 위해서, 부분들의 무한한 수의 종합은 완성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 그러나 내가 보기에, 칸트는 이로써 시간이 항상 유한하다는 것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공간은 유한한가? 그러지 않다. 공간의 정의 자체 상으로 공간은 마치 완전히 이루어진 어떤 것처럼 – 항상 조작을 넘어서는 어떤 것처럼 – 제시되었다.
반명제에서, 칸트는 공간의 무한성을 증명한다. 만일 우리가 공간에게 제한된[한정된] 수를 할당한다면, 주변에 공간적인 것이 있다. 이런 추론은 모든 반대에 뒤로 숨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시간에 관한 한에서 칸트는 안티테제에 이유가 있고, 주제에서는 잘못이다. 안티테제[반명제]는 어디서 오는가? 칸트의 주제[테제]의 이런 부분에서부터, 시간과 공간은 뒤섞여(brouilles)있다. 공간은 유한한 것으로 나타나며, 시간은 무한하다. (179) (55W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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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강 3월 22일 강의 노트 180-182[3쪽]
칸트는 시간의 양립불가능한 두 이론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우리가, 지속 전체는 시초가 있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시간에 앞서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로써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 바깥에는, 영원성이 있다. (예를 들면 2+2=4). 또한 구체적 영원성보다 더 많은 영원성이 있다. 사람들이 지속을 제기하자마자, 사람들은 의식을 제기한다. 그런데 의식을 폐기함을 가정하는데 있어서 모순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지속 전체로부터 시작과 끝을 표상하는데 어떠한 어려움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한 공간을 제시해야만 한다. 칸트의 주제에서, 구체적 시간이 문제이다. [칸트의] 반명제에서 순수 공간이 문제이다. 나는 셋째 안티노미, 즉 더 이상 정태적이 아닌 역동적 안티노미에 이른다. 주제: 자연적 원인성(la causalité naturelle)은 충분하지 않다. 자유(la liberté)를 필요로 한다. 반명제: 세계 속에서 전체는 자연의 법칙들에 의해 도달한다. (180)
1. 칸트는 자연적원인성과 자유를 구별한다. 자연적[원인성]: 원인은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즉 결과라는 것은 원인의 조작작업(l’opération)이다. 자유: 원인 없는 원인의 원인성은 절대적으로 현상들의 모든 계열들을 시작한다. 시크 볼로, 시크 유베오(Sic volo, sic jubeo). 테제는, 자유에 의해 원인성이 있어야만 한다. 무엇이 우리가 원인을 찾게 하는가{?} 일어나는 어떤 것이 “에크바스 게쉐헨etwas geschehen”이며, 다른 형태로 현존해야만 하는 어떤 것, 즉 생성하는 어떤 것이다. 원인성: 불충분한 것을 충분하게 하는 경향성, 일어난 것을 {끝내게하는}(finir) 경향성이다. 그러한 것이 원인성의 원동력(le ressort)이다. 그것이 우리가 원인들의 계산을 거슬러올라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계열이 끝없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완성된 어떤 것을 인정한다는 구실아래, 우리는 결코 완성되지 못할 어떤 것을 취하게[다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원인성 법칙의 원동력 자체 덕분에, 우리는 후퇴를 멈춰야만 하고, 그리고 우리는 시작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렇게 논능하는 방식은 우리를 인간의 자유의 관념에로 보다, 세계의 시초에 대한 관념에로 더욱 이끌어 간다. 칸트에서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자유는 시초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의 시초일 것이다. (180)
참조: 칸트, 안티노미들에 관한 논평(§ 1 테제.) 칸트는, 자신의 추론이 전체의 창조작업에서 자유를 제시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렇게 절대적 시초가 가능하다면, 절대적 시초들은 계열들에서 가능할 것이다. (181)
2. 시초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연쇄고리는 단절된다. 그리고 경험의 통일성에 대한 더 많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인성 법칙의 두 기원들이 있다. 1) 생산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 그러나 연결하기와 통일하기 또한 필요하다. - 그러나 왜 말하지 않는가[?]: 계열들의 내부에 연속성의 해결책은 없다.
- 칸트는 응답한다: 당신들은 역동적으로 첫째라는 아무 것도 찾을 필요가 없다. 안티테제에서 칸트는 시간의 무한성을 어떤 사물처럼 인정한다. 경험의 통일성의 원리 이외에, 시간이 무한하다는 관념[생각]이 있다. - 하여튼(au fond, 밑바탕에서) 둘째 안티노미의 테제와 안티테제는 첫째 안티노미의 테제와 안티테제를 가정한다. 칸트는, 사람들이 지속을 유한하고 또 무한하다고 차례차례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일치로서 간주한다.
{셋째 안티노미의}테제에서, 시간은 유한하고, 안티테제에서 시간은 무한하다. 칸트의 첫째 인위[성]는 자유의 문제를 전체의 기원의 문제로 끌어가는 데 있다. 만일 지속이 유한하다면, 시초와 자유가 있다. 만일 지속이 무한하다면, 원인성이 있다. 인위성이 두 문제를 일치하게 하는데 있고, 두 모순적인 방식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한한 지속을 확립할 수 없다고 칸트에 반대하여 확립했다면, 모순은 더 이상 없으며, 테제를 위해 선택해야만 한다. [그런데] 셋째 안티노미에서 그러한 것만이 있다면, 그것은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요소들이 있다.
칸트에게서, 원인[인과] 관계는 - 그가 다양한 현상들 일반과 지속을 표상하는 방식으로 - 그 방식으로부터 결과 되어 나온다. 칸트에게서 「선험적 감성론」에서 시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 그것을 제시했다. 시간은 무한한 중간(un milieu infini, 무한한 매질)이다. 사실들[만들어 진 것들]은 우리에게 먼지처럼 주어졌고, 원인 관계는 밖으로부터 온 어떤 것이고, 외부 연결에 의한 것처럼 재통합한다. (181)
칸트에게서 사실들은 진주들(des perles)과 같다. 경험의 통일성이 있기 위해서, 진주들을 꿰기 위해서 실이 필요하다. 여기서 원인관계는 이 관계가 통합하는 사실들의 본성을 고려하지 않는고, 더군다나 실은 진주들의 본성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181-182)
요약하자면, 칸트에게서 원인성은 정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는 원인성이 적용되거나 또는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원인성과 자유에 대하여 칸트의 개념작업에서는 어떤 광폭함(brutalité, 거친작업)이 나온다. 만일 어떤 비결정[비규정]화 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충만한 자유이다. 이 때에 자유를 현상들의 세계 밖에 재인도해야만 하는 것이, 즉 칸트가 행했던 것이, 놀라운가{?},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의 의미에서 또는 다른 의미에서 선택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하여튼, 모든 것은 항상 동등하게 경지된 원인성의 개념작업에 근거한다. (182)
원인관계는 바로 그러한 것인가? 칸트는 여기서 공간으로 번역된 지속을 자기의 생각으로 적용하지 않는가{?} 나는, 마치 서로서로 이어지는 사실들의 연속성처럼, 내부로부터 우리에 의해서 지각된 지속이 있다고 가정한다. 여기에 사실들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외적인 것으로 표상할 수 있고, 그러고 나서 통합된 사실들이 있다. 우리는 밖으로부터 인식할 뿐만 아니라 안으로부터도 인식하는 계열들을 갖는다. 원인성, 그것은 상태들 자체들의 채색화작업(coloration)을 빌려온 어떤 것이다. (182)
이때에, 우리는 원인성의 많은 형상[형식]들과 많은 정도들을 우주 안에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결정화[규정화] 속에 정도들이 있을 것이라[미래]. 나는 시간 속에 계열들 처럼 내가 본대로 다룬다. 나의 상태들 사이에는 원인 관계가 있다. 하나의 행동은, 그 행동이[자기가] 미리 만들었던 동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라나는 어린이를 다루어보자. 열다섯 나이의 얼굴은 어린이의 얼굴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한 화가가 하나의 주어진 순간에 두 얼굴을 그릴 수 있는가{?} 어떤 선형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미래의 얼굴은 비결정적이다. 전자에 따라서 후자의 미래를 표상[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 그럴듯한 것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은 도덕론에서 확실하다. 우선 의식은 우리게 그것을 말하고, 결혼은 다음과 같다: 칸트에 의한 현상들의 세계로부터 자유의 배제는 항상 지속의 혼동(une confusion)을 포함하고 있다. (182)
(6:16, 55W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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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베날리스(Juvénal, en lat. Decimus Iunius Iuvenalis) 1세기말 2세기초 로마의 풍자시인. 풍자(Satires(90 또는 127): 칸트가 순수 근거비판(1781)에서 여러 번 인용한다고 한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프로이센 철학자. 계몽주의 철학자. 순수 근거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fr. 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증보판, 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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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 프랑스 카톨릭 철학자. 벩송과 대화(Entretiens avec Bergson, 1959)
1882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은 프랑스 철학자. 토마스주의자. 1904년 라이사와 결혼. 뻬기의 권고로 벩송 강의 듣다.
1883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 잡문집에 없음. 프랑스 장교이자 작가인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31살] [도미니끄 재가교인]
- 프시샤리(Ernest Psichari 1883-1914) 애국주의자, 생애 마지막에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아버지(Jean Psichari, Γιάννης Ψυχάρης 1854-1929)는 키오스 출신으로 그리스 문헌학 교수였고, 어머니(Noémie Psichari, 1862-1943)는 에르네스트 르낭의 딸이다. 바깔로레아를 마친 1900년(열일곱)에 쟈끄 마리땅을 만났고, 1903년 소르본에서 철학 학부를 마치고, 그리고 꼴레쥬드 프랑스 벩송의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1901년 뻬기를 만났으며, 이 당시에(19살) 그는 자신보다 7살 위인 마리땅(Jacques Maritain, 1882-1973)의 누나(Jeanne Maritain)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그가 약을 먹고 죽으려 했는데 그의 친구 르뀔(Maurice Reclus, 1883-1972)[역사가 정치가]이 구해주었고, 다시 총으로 자살하려 했을 때도 그 친구가 구해준다. 그는 1903년 11월 병력의무를 시작하게 되고, 식민지 군대에서 그는 반유대주의를 던지고, 국가주의 우파로 돌아서며, 바레스(Maurice Barrès)와 서신교환을 한다.
성직자이며 ‘프랑스 행동’에 가까운 클레리삭(Humbert Clérissac, 1864-1914)[도미니끄파]의 영향과 마리땅의 영향으로 카톨릭으로 개종한다. 끌레리삭은 1908년 이래로 마리땅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1913년부터 마리땅은 끌레리삭을 프시샤리를 만나게 했다. 프리샤리는 결국 도미니끄 신자회(tiers-ordre dominicain)에 들어간다. (48SLH).
(7:09, 55W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