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숨결을 찾아서 – 11세 조산공(휘 광문)이 재직하셨던 김포 장릉
2021. 6. 5 여천(與天) 정철중(鄭喆重)
Ⅰ. 장릉(章陵) : 사적 제202호
경기도 김포에 소재한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仁祖)의 부모인 추존 원종(元宗, 1580~1619)과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 1578~1626)의 능이다. 원종은 선조(宣祖)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셋째아들로 1587년에 정원군으로 봉해졌고 16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씨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623년에 아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大院君)으로 추존되고 1626년에 묘를 원으로 높여 흥경원(興慶園)이라 불렀다. 1632년에 다시 원종으로 추존되고 원을 능으로 높여 장릉이라 하였다.
인헌왕후는 구사맹(具思孟)의 다섯째 딸로 1590년에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고 1623년에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계운궁(啟運宮)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되었다. 1626년 세상을 떠나 김포에 원을 조성하고 원의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 불렀다. 1627년에 흥경원이 김포로 옮겨지면서 원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하였으며, 1632년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흥경원이 장릉으로 승격되면서 봉분의 호석과 문석인을 제외한 석물은 다시 세웠다. 장릉의 제실과 연지는 원형이 잘 남아있다.
Ⅱ. 조산공(朝散公)과 장릉참봉(章陵參奉)
12대조 조산공의 휘(諱)는 광문(光門)이신데, 조부는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서해(瑞海) 휘 응규(應奎)공이시고, 부친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 증 호조판서 영사당(永思堂) 휘 연(演)공이시다. 모친 의령남씨(宜寧南氏)는 국창(菊窓) 응운(應雲)공의 따님이다.
남응운공은 문무과에 모두 급제한 문무겸재의 준재(俊才)로 남병사를 세 번이나 지냈으며, 공조참판을 지냈는데 글씨에도 능하였다. 개성에 있는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과천의 허엽신도비(許瞱神道碑), 장단에 있는 허종신도비(許琮神道碑) 등의 전서가 남아있으며, 사돈이신 서해 절도사공의 묘표를 지었다.
조산공은 5남으로 선조 기묘(己卯)년인 1579년에 출생하였다. 배위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조세하였고, 후비(后妃) 개성최씨(開城崔氏)는 청단찰방(靑丹察訪) 광서(光緖)공의 따님이시다. 일남 삼녀를 두셨는데, 아들은 시(糹式), 장녀는 의령 남종표(宜寧 南宗標) 강서현령(江西縣令), 차녀는 문화 류중수(文化柳重秀) 정릉참봉(靖陵參奉), 삼녀는 문화 류증(文化柳增)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공의 유일한 관직기록은 조산대부(朝散大夫 종4품) 장릉참봉(章陵參奉)이신데, 당시 인조(仁祖) 부모의 왕릉이므로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흥경원(興慶園)에서 장릉으로 승격된 것이 1632년이므로 재직기간은 1632년부터 1636년간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과 영인 개성최씨는 병자호란 중 1637년 1월 17자로 전화(戰禍)를 입어 별세하셨으니 58세였다.
<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葱臺試藝圖) :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
의령남씨가전화첩(宜寧南氏家傳畵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2호)중 이 그림은 조선 명종 때 서총대에서 실시한 문무시예(文武試藝)를 그린 것으로 외조부이신 남응운공이 말을 하사받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Ⅲ. 병자호란과 조산공 부부의 피화(被禍)
* 광 : 광교산(光敎山), 험 : 험천(險川), 쌍 : 쌍령(雙嶺)
■ 경기도 광주(廣州) 인근의 전란(戰亂)
1636년 12월 9일 청군이 압록강을 도강한 후 12월 13일에 들어서야 조정은 청나라의 침공을 알게 되었다. 이미 12월 14일 청군 선봉대가 한양을 압박하였다. 인조와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란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의 선봉대가 양천을 끊고 강화도 길을 막았으므로 12월 16일에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 1627년 정묘호란으로 서북의 방어체계가 무너지자 속수무책이었다. 이후 조정을 구원하려는 삼남의 관군은 남한산성 인근에서 연락체계가 끊겨 고립무원 속에 힘없이 패퇴를 거듭했다.
경상감사 심연은 1636년 12월 19일 조정의 급보를 받고 근왕병 6천을 거느리고 1637년 1원 2일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 도착하였다. 경상좌병사 허완(許完)은 대쌍령 우측고지(229미터)에 우병사 민영(閔泳)은 대쌍령의 좌측고지(125미터)에 분산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 1월 3일 청군은 6천의 병력으로 공격하였다. 2천의 병력으로 경상우병사 진영을 견제하고 4천의 병력으로 좌병사 진영을 공격하였다. 화약이 떨어진 진영이 돌파당하고 좌병사 허완은 전사했다. 청군은 다시 우병사 진영으로 공격을 집중하였다. 우병사 민영은 적극적인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진영의 화약고가 폭발하여 수십 명이 사상되었고 이 혼란을 틈타 청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허무하게 패퇴하였다.
1636년 12월 18일 근왕병 모집의 급보를 받은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는 병사 7천명을 거느리고 1637년 1월 2일 험천(險川 : 성남 탄천)에서 진을 쳤으나, 20리 북방에 진을 친 7천명의 청군에 가로막혔다. 조총병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화약이 떨어지고 병력의 반을 잃은 후 공주로 퇴각하였다.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용(金俊龍)은 1636년 12월 20일 급보를 받고 6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1637년 1월 4일 김준용의 선봉군 2천명이 광교산 부근에 진출하였으나, 1월 2일 충청도 근왕병을 물리친 청군은 양굴리(청 태종 홍타이지의 매부)의 지휘로 2천명이 남한산성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다시 본대 5천명을 투입하였다. 1월 6일 하루 종일 교전한 결과 양굴리가 패사하고 청군은 패퇴하였다. 병자호란 중 보기 드문 승전이었으나 화약과 총탄이 떨어져 수원방면으로 후퇴하자, 본진 이시방은 패배한 것으로 알고 승병을 포함한 본대 6천명이 공주로 후퇴하였다.
이 밖에도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耈)가 금화(金化)에서 전사하고, 도원수 김자겸은 황해도 토산(兔山)에서 패배했다. 그 후 전국 각지의 의병이 봉기하여 전라도 정홍명 의병은 수원까지 진출한 후 화의로 해산하는 등 청군의 조기철군에 영향을 주었다.
■ 조산공의 전화(戰禍)
청나라 군대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는 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특히 남한산성이 코앞에 있는 광주 오포 자작리(自作里)의 상황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종전에 조산공이 재직하였던 김포 장릉은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고, 강화도의 부성(府城)조차 함락되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잡혀갔다. 너무나 급박하여 공은 자식과 식솔을 남쪽으로 피란토록 하고 뒤늦게 동쪽으로 피란길에 나섰으나 부부가 함께 1637년 1월 17일자를 피화되셨다. 그 상황은 아들 처사공의 묘비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었다.
< 12세 아들 처사공(處士公) 정시(鄭糹式) 묘갈명(墓碣銘) >
公端潔修雅望之知爲莊士孝于出於天賦年十八値丙子之警 承朝散公命先以家衆南下聞寇急蒼黃北還朝散公與崔令人避東畿俱及於禍公路聞變奔走號呼返葬盡禮仍又加服喪期六年廬墓 旣外除衡恤如一日積毁成病以至不起 其至性可見也
공은 행의가 맑고 바르셨으며 덕을 닦으심에 인망이 드높았다. 장사(莊士)로 알려지셨을 뿐 아니라 효성이 출천하였는데 18세에 병자호란의 변고(丙子之警)를 겪으셨다. 선친이신 조산공(朝散公)의 명을 받들어 먼저 식솔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망히 북으로 길을 돌렸으나 조산공과 최영인(崔令人)께서는 동쪽으로 피란하시다 모두 참화를 당하셨다. 공로(公路)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울부짖으며 내달아 반장(返葬)하여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또 상기를 더해 6년 여묘(廬墓)하시면서 살피고 보살핌이 한결같아 날로 건강이 훼손되고 병이 들어 몸을 일으키지 못할 지경이었으니 그 지성스러움을 여기서 보게 되었다.
■ 척화(斥和)의 대상 청(淸)
조선은 청나라에 의해 두 번의 침략을 받고 그 충격은 컸다. 야만족이라 일컽고 무역을 구걸하던 여진을 누루하치가 통일하여 1616년 후금(後金)을 세우더니,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켜 형제지국을 칭하고 1636년 병자호란을 겪고는 군신관계가 되었다. 인조는 패전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라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일찍이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명군을 파병하여 왜군을 물리친 것에 비하면, 너무나 비현실적인 사건이었기에 많은 선비들은 청나라 연호를 거부하였다. 공식적인 관계는 어찌할 수 없었다 치더라도, 묘비 등의 기록에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를 사용하여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ㅇㅇ年)’이라 하여 200여년 가까이 명나라 연호를 썼다.
Ⅳ. 과거의 장릉(章陵)을 찾아
경기도 광주 추자리(楸自里)에서 김포 장릉은 그리 먼 곳 가까운 곳도 아니다. 380여년을 지났어도 병자호란의 전화가 마치 김포공항을 이륙하는 비행기의 굉음처럼 후손들의 가슴에는 아픈 한으로 남아있다. 그 곳 장릉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가까운 곳이지만 마음은 과거의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 숨어있다. 마음이 멀면 이웃도 멀어지는 법! 오늘 조산공의 숨결을 찾아 떠난다.
장릉은 김포시청 남쪽이고 150미터의 장릉산의 남향받이에 자리한다.
■ 근무처 재실(齋室)
재실(齋室)은 제례를 지내기 전 제관(祭官)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종9품 참봉(參奉) 등의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과 그 주변 등을 살펴보았다. 주요 시설로는 향(香)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祭禮)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典祀廳),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행랑채(行廊-) 등이 있다. 단청은 칠하지 않았다.
< 재실 옆 연못 연지(蓮池) >
< 장릉(章陵) >
< 제각과 뒤편의 왕릉 >
왼쪽은 신도(神道) 오른쪽은 어도(御道)
< 수복각(守僕閣) : 노복 관리 각 – 부엌과 단칸 온돌방 >
< 비각(碑閣) >
< 조선국 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 부좌 >
비신(碑身)과 비개(碑蓋)가 간결하고 강직하다
< 제각내 제상(祭床) >
< 제각 뒤 왕릉 >
< 장릉의 물이 모이는 하택지(下澤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