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
그동안
못 본 척 지나쳐
미안하다
세상의 질문이 너무 컸기 때문이야
미련하게,
해답이 우주 뒤편에 이르는 길인 줄 알았어
<시작 노트>
발길 닿는 곳마다 피어 물결이 되는 야생화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름조차 몰라 불러볼 수도 없어 꽃핀 둔덕에 이방인이 되어 서 있었다.
노을이 붉게 다독였지만 공허함이 겹쳐지는 미안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왜 난 오랫동안 먼 곳의 허공을 쏘다녔을까?
내 젊은 시절은 왜 사무치는 그리움 쪽으로만 이정표를 세워뒀을까?
발길을 어루만지는 한 무리 야생화 대신 왜 먼 곳의 별자리를 마음에 담았을까?
유성을 닮은 젊음 때문이었다면 설명이 될까?
꽃자리가 별자리임을 너무나 늦게 알아버린 탓에
노을의 어깨를 애써 붙들며 가삐 야생화의 이름을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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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maeil.com/page/view/2024062609364794206
하나의 몬物에는 사방 세계, 즉〈천-지-신-명〉이 스며 있다. 더욱이 야생화에는 살아있음의 황홀경이 느껴진다. 내 안-마음의 꽃, 花印은 心印이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비밀은 '뒤'에 있다. 꽃이라는 별, 실재의 느낌으로서 앎에 도달하는 길이 그것이다. 절로 피는 꽃은 꽃이 아니다.
야생화의 대척점에 번듯한 실명의 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명은 따지고 보면 임의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꽃의 이름이 유동적이라는 것도, 개화와 낙화가 한몸에 깃든 기제라는 것도 압니다. 무릇 섭리는 뭇 생명의 행위를 물감으로 사용합니다. “야생화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는 건 야생화의 고유한 색채를, 오롯한 아름다움을 뒤늦게 각성했다는 것이겠지요. 야생화라고 이름이 없을까요. 이때 야생화의 이름은 실의에 젖은 친구의 눈빛이나 철없는 아이의 투정 혹은 나를 아끼던 사람의 작은 미소일 수도 있습니다. 좋은 시를 생산해 온 시인이 이럴진대 대개의 장삼이사는 각성은커녕 자신의 색(色)이 무색에 이르도록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의 질문이 너무 컸”다고, “해답이 우주 뒤편에 이르는 길인 줄 알았”다 하는 시인의 흉중엔 지금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갈마드는 듯 보입니다. 이처럼 세심하고 섬부한 시인의 전언으로 우린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커다란 목청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해답은 손톱만 한 야생화 하나를 우주의 열쇠로 인식할 때 딸칵, 구해진다는 것을.
김상환시인, 심강우시인....
시를 읽는 두분의 감각에서 깊이를 느낍니다
깊은 애정이 함께 느껴져
감사의 마음을 공손히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