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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수요일 <기도와 선행>
[김용호] [오전 4:30] 굿모닝~^^ 주님 안에서 보내는 멋진 수요일~!!
[최해준] [오전 10:36] 요즘 말도 어눌해집니다. ^^;;
[김용호] [오전 10:36] 그래요? 좋은 일이네요.^^
[최해준] [오전 10:37] 그럴 리가!!^^ 그냥 나이 들어간다는 느낌입니다. ㅎㅎ
[김용호] [오전 10:37] 허 전도사가 저에게 가끔하는 말이 있습니다. "전도사님은 어떤 땐 정말 바보같아요." ㅋㅋ 결혼할 때 우리 별명이 어리버리였습니다 제가 버리, 허 전도사가 어리~
[최해준] [오전 10:38] 흠... 위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김용호] [오전 10:39] 터~~엉 비어있어야 로기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수퍼컴을 요란하게 돌리고 있으면 로기온, 신탁이 Input이 안 된다는 거~~
[최해준] [오전 10:39] 아 ㅎㅎㅎ 네~ 기대해 주세요.
[김용호] [오전 10:39]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터~엉 비어 있으면 안 되겠지요. 건전한 옛사람으로서 열심히 충성할 때가 있고 새사람으로서 새로운 지정의로 열심히 충성할 때가 있습니다. 영성 너무 좋아하다간 진짜 바보 되기 쉽습니다. ㅋㅋ 슈퍼컴의 작동을 멈추어야 할 때가 있고 돌려야 할 때가 있는 거지요.
문제는 멈추어야 할 때 돌리고, 돌려야 할 때 멈춘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 진짜 영성이지요.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수퍼컴을 돌려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것입니다. 단. 특수한 경우들에는 주님께서 계획을 변경시키시면서 달리 인도하셨지요.
영적으로 성숙한 제자는 자기의 조직신학을 기준으로 자기 의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충성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중간 중간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불현듯 임하는 성령의 인도를 즉시 인식하기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제자의 모습입니다. 항상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지요.^^
[김용호] [오후 3:28] 아침에 로기온 이야기가 나왔으니 기도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1.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기도해보고 하겠다는 사람
2.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해 묻겠다는 사람
3. 기도 응답을 받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사람
4. 자기는 항상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사람
[정진호] [오후 3:51] 아주 독실한 크리스찬이네요. 서구 기독교 기준으로요. 실제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기도 먼저 해보고 응답받고 하는 크리스찬들이 참 많은데요. 나는 그게 궁금했어요. 응답 받았다는 기준이 뭔가?
[김용호] [오후 3:53]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성경을 안 보거나 보아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신학은 잡신신학이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답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온통 궁금한 것들뿐이지요.
성경적인 기도에 대해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아까 사도 바울에 대해 말씀드린 내용의 연장입니다. 기도의 전제는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뜻과 우리가 해야 할 바는 성경에 완벽하게 계시되어 있다.
2.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1. 성경에 계시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 위해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2.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십니다. (우리의 사악한 결정과 행동도 우리를 혼내주시는 데에 사용하십니다. ㅋㅋ)
3. 따라서 motive가 분명한 자는 자기 판단 대로 마음 놓고 행동합니다.
4.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코스를 예비하시고 계신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주인님의 방문을 쳐다보면서 일해야 합니다. 언제 문을 열고 나오셔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항상 일단 자기 판단과 결정을 행동에 옮기기 전에 주인님의 의사를 여쭈어보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 하겠습니다(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새로운 피조물인 자신의 동역자의 판단을 존중하셔서 별 말씀을 안 하십니다).
한편, 사람들이 죽어라 기도하는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인데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1. 자기의 탐욕과 공포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때문에 앞일이 두렵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2.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에 대한 답은 안 나오기 때문에 처음엔 좀 보다가 나중엔 성경에서 답을 찾는 것을 아예 포기해버리고 냅다 기도만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잡신신학으로 가게 되는 이유입니다. 설교자들까지도 잡신신학을 기반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들도 잡신신학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지요. 다만 업무가 설교이다 보니 잡신신학과 성경을 꿰어 맞추는 일을 열심히 합니다.
불경을 놓고도 똑같은 내용의 설법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등장인물들만 다를 뿐이지요. 그리고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성경도 버리고 불경도 버리고 모두 기도에 매달립니다. 한 사람은 예배당에서, 한 사람은 법당에서~~
기도 응답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인 새로운 피조물은 여쭈어보고 별 말씀이 없으시면 자기 판단과 결정대로 행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째는 자신의 motive가 성경의 명령에 부합된다는 것을 검증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 결과가 어떠하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을 알기 때문이고 셋째는 그 결과가 자신의 길흉화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담대함입니다.
[정진호] [오후 4:25] 과거 나의 신앙생활이 떠오르네요. 뭐 이루어 달라고 기도는 많이 하는데 영 되는 건 거의 없고 그러다 보니 어떤 문제로 기도한다는 게 점점 부담스러워지더군요.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되니까요.
뭐가 잘못되었을까? 기도 자체가 잘못되었나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응답인가? 별 별 생각을 다하면서 지냈는데 참 이상한 게 확률로도 별로 신통치 않은 상태에서 그래도 계속 신앙생활을 버리지 않은 게 신기해요. 뭐 신기할 것도 없네요. 그런 식으로라도 무언가 붙잡을 게 필요했을 테니까요.
[김용호] [오후 4:33] 그렇지요. 간증 나부랭이들이 발목을 잡기도 하구요. 어제 지웅 형제가 히스기야의 기도와 관련해서 했던 말과도 연결되지요.^^
[정진호] [오후 4:35] 그런 혼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요.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요.
[김용호] [오후 4:35] 여기서 2만 번 기도 응답 받았다는 조지 뮬러의 엉터리 주장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말하길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2만 번이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던데 그렇다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아원이 망해버려 고아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린 고아원 원장에 비해 하나님을 잘 써먹었다는 논리가 되고 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지만 결국 자기 공로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조력자로 추락해버립니다.
[정진호] [오후 4:40] 기왕 기도할 거면 이 땅에 고아가 없어지기를 기도하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왜 그런 기도는 안 했을까요?
[김용호] [오후 4:40] 오~ 핵심!!!! 과연 집사님이십니다.^^
[정진호] [오후 4:41] 그 기도는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거지요. 즉 이루어질 거 같은 만만한 거 가지고 기도했고 응답받았다고 한 거 아닐까요?
[김용호] [오후 4:41] 그가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의 엄중함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에이 설마~~^^
(마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조지 뮬러의 간증이야말로 기도에 대한 오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끌어당겨 자기의 목적을 관철하고자 하는 잡신신학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것이 옳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라고 맘대로 생각해버린 것이지요.
[정진호] [오후 4:45]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나면 크리스찬이 하게 되는 기도는 딱 두 가지라고 하신 게 생각나네요.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감사기도를, 그렇지 않을 때 회개기도를.
[김용호] [오후 4:45] 아멘~^^
[예레미야] [오후 4:45] 저조차도 과거에 그런 지극 정성의 믿음에 감동받았고 추구했었음을 고백해봅니다~ 생각하만 해도 화끈.
[김용호] [오후 4:46] 하나님께 감사를~!!! 기도의 오류도 결국 조직신학의 문제입니다. 그 오류의 핵심은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입니다.
[정진호] [오후 4:48] 하나님의 뜻을 점차 알고 나면서 내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게 되더군요.
[김용호] [오후 4:48] 아멘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항상 깨어 있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게는 기도와 관련된 특권이 하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이 예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전혀 상반된 기도와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당시 육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나약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 있을 때 간청하는 기도가 유효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오후 4:53]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기도조차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한 기도를 하는 것이겠군요.
[김용호] [오후 4:54] 바로 그렇습니다. 당시의 아브라함과 모세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전후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를 한 것이지요. 그 기도가 큰 그림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맞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알 도리가 없었지만요. 이스라엘의 보전과 그로 인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이어지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오후 4:56] 그렇다면 내용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포함되는 것이겠지요?
[한금옥] [오후 4:57] 죽기 싫지만 결국 죽어질 것을 이루어지길 울며 겨자 먹기로 기도해야 하는데...
[김용호] [오후 4:57] 예. 자매님. 비밀을 알게 된 신약백성의 기도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한금옥] [오후 4:58] 생각만 해도 기도하기 싫어지는 이유이기도 한...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
[김용호] [오후 4:58] ^^ 조금만 기다리세요. 기쁨으로 그 기도를 드리게 될 겁니다.
[예레미야] [오후 4:59] 저도 꽉꽉 눌러 기도할게요~ 빨리 죽으실 수 있도록~ㅎㅎ
[김용호] [오후 4:5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백성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이 소경의 기도를 드리게 되면 귓방망이가 날아오게 되지요.^^
[예레미야] [오후 5:00] 시혜를 베푸는 중간단계를 자처해서인가요?
[김용호] [오후 5:01] 그건 자기 소원, 자기 의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중보기도는 탐욕과 공포 때문에 드린 기도거든요.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기 위한 기도였지요. 모세의 경우 그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민수기 20장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두 번 두드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한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중매자로서 이스라엘에게 분노했다는 것은 중매자에 불과했음에도 모세가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증거지요. 그래서 그 때문에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되지요.
이 상황을 뮬러에게 대입하면 뮬러의 기도는 고아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의 선한 삶을 위한 기도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아들의 운명은 하나님 소관이거든요. 고아원 원장 때문에 고아들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기도로 인해 무언가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조종했다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구하고 있었던 것은 어디로 갔지요? 귓방망이 안 맞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고 있던 일은 어디로 사라졌지요? 같은 흐름입니다.
성경적인 기도는 집사님도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정확하고도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길흉화복에서 내가 해방되어 있어야 가능해집니다. 즉 물(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 때에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하나님의 뜻을 조직신학적으로 정확히 이해했는데 아직 길흉화복에 묶여있는 경우는 공포로 인해 기도를 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깊은 회개를 하게 되는 엄청난 유익이 따라오게 되지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져가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과정에 심각한 훼방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서구 신학입니다. 기복적 기독교와 도덕적 기독교지요. 내세 구원과 관련해서는 둘 다 기복적 기독교가 되니 마찬가지구요.
히스기야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히스기야야말로 자기를 위해 잘못된 기도를 드려 귓방망이를 된통 맞은 자입니다. 기도한 덕분에 15년을 더 살게 되었고 그 소문을 듣고 축하하러 온 바벨론 사신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려고 성전 보물들을 보여주었다가 그것을 연유로 히스기야 사후에 바벨론에게 유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엄청난 귓방망이를 맞은 거지요. 그런데도 히스기야의 기도를 흉내 내자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니 그래서 제가 어제 “미쳤군!”이라고 비명을 지른 거지요.
이사야 39장을 보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귓방망이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 39:5-6)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서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말을 들은 히스기야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깁니다.
(사 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인간의 쌩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이 히스기야의 기도 기사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지웅 형제가 전해준 설교의 내용이 정말 어처구니없지요? 그야말로 서구 기독교의 쌩얼입니다.
[정진호] [오후 6:36] 죠지 뮬러가 했던 일은 고아들이 아픈 상처를 딛고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추가로 예수를 믿어 내세 구원까지 받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을 본거지요.
[김용호] [오후 6:38] 그렇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던 그 선교사 지망생과 같은 경우입니다.
[정진호] [오후 6:39] 우리가 보는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그런 일은 사회사업가가 해야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구요.
[김용호] [오후 6:39] 그렇지요. 향유 사건에서 제자들의 삽질이 그것이었지요. 그러나 가끔 낚시 밥으로 활용할 수는 있지요. 경우에 따라서요.
[정진호] [오후 6:41]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이고 그것을 위한 필수적인 일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다른 사람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하는 거구요.
[김용호] [오후 6:42] 그렇습니다. 그것이 제자도의 본질이지요.
[정진호] [오후 6:44] 조지 뮬러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즉 건강한 옛사람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보는 거고 우리는 사람들이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보는 것이 차이점이지요.
[김용호] [오후 6:45] 예. 서구 기독교와 우리의 현실적인 차이점이 바로 그 점에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뿌리는 조직신학의 차이구요.
[정진호] [오후 6:46]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떤 쪽이 성경의 약속에 부합되는가는 명약관하하구요.
[김용호] [오후 6:47] 그렇습니다.
[정진호] [오후 6:51] 어제 반기독교인의 질문 차원에서 다시 질문해보자면 이렇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네요. 고아를 잘 기를 수 있게 기도할 때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고아가 없는 세상을 만들게 해 달라고 할 때 그 기도는 응답해 주시지 않는가? 좀 어색한가요? ㅋㅋ
[김용호] [오후 6:51] 정곡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정진호] [오후 6:52] 무려 이만 번이나 응답해주신 하나님이 왜 그 기도는 한 번도 응답해주시지 않나?
[김용호] [오후 6:52] 하나님이 서구 기독교가 주장하듯 세상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완벽하게 무능한 신이라는 것은 이미 검증이 끝났지요. 따라서 믿을 이유도 없는 신이구요. 반기련 입장에서 보면 서구 기독교인들은 거의 정신병자들입니다.
[정진호] [오후 6:54]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또 나름대로 합리화를 만들어 내겠지요. 고아로 태어나서 고생하게 한 데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가 있다.
[김용호] [오후 6:54] 그와 관련해서는 서구 기독교의 소위 신정론에 무려 7가지 대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집사님이 예로 드신 것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다 기억을 못 하겠는데 카페 칼럼에서 그 목록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하신데 왜 세상에는 악이 가득한가에 대한 7가지 답변이지요. 모두 헛소리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고통에 빠뜨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형벌을 주신 분에게 왜 고통 받는 우리를 못 본 체 하냐고 따지면 또 귓방망이만 날아오게 되지요.
[정진호] [오후 6:58] 하나님의 선을 인간의 선과 동일시하니 그런 답변이 나오는 거겠지요.
[김용호] [오후 6:59] 그렇습니다. 징역형을 언도한 판사에게 옥에 갇힌 우리를 꺼내는 판사의 임무를 왜 수행하지 않느냐고 편지를 보내는 셈이지요. 그러니 “미친 거 아냐?”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정진호] [오후 7:01] 조지 뮬러가 한 일은 감옥에서 건강하게 잘 살게 하는 일을 한 거지요. 우리는 그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라고 보는 거구요.
[김용호] [오후 7:02] 그렇습니다. 감옥에서 잘 살게 하시는 것도 아니고 감옥을 부수고 모두 꺼내시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내세구원 교리처럼 죽은 다음에 꺼내신다는 것도 아니구요.
[정진호] [오후 7:03] 조지 뮬러는 사람들의 삶이 감옥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요. 즉 성경의 인간론을 잘못 이해한 거지요.
[김용호] [오후 7:04] 그렇습니다. 헬라철학의 인간 긍정에 의한 서구 신학의 큰 오류지요. 현세를 정상적인 상태로 보는 오류이고 인간을 정상적인 존재로 보는 오류입니다. 좀비들이 자기들을 사람인줄 착각하고 있는 거지요,
[정진호] [오후 7:05] 근데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당신들은 불쌍한 고아들을 안 돌본다는 거냐.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아.”
[김용호] [오후 7:06] 우리는 고아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똑같이 불쌍하니까요^^
[정진호] [오후 7:07] 좋은 대답이네요^^
[김용호] [오후 7:07] 레위기 19장 15절에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들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들 편을 들라는 것은 아니고 가난한 자에게 유리하게 치우친 판결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을 가리킵니다.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것과 동일하지요.
[정진호] [오후 7:09] “다 알겠는데 그래도 고아들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게 크리스찬들이 도움을 주자는 게 뭐 그렇게 잘못되었냐?”라고 한다면요?
[김용호] [오후 7:10] 우리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대상이 누구인가를 판단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라는 처지도 그 판단 기준 중의 하나지요. 그러나 그것이 0순위는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0순위라면 모든 크리스찬들이 아프리카로 가야지요. 왜 한국에서 그러고들 있냐고 되묻고 싶어지는 대목입니다.
[정진호] [오후 7:13] 아! 좋은 대답이네요.
[김용호] [오후 7:13] 그들도 다른 기준이 있어서 아프리카로 가지 않는 거거든요. 그들은 당 짓기라는 못된 기준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진호] [오후 7:15] 우리도 고아를 돌보는 것이 고아들이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통로가 된다고 감동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 일을 하게 되겠지요. 돕지 말라는 것이 아니구요.
[김용호] [오후 7:15] 그렇습니다. 세리와 창기를 동시에 돌보신 예수님이지요. 물론 모든 세리와 창기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바리새인이냐 세리냐 창기냐가 아니라 예수님께 오느냐 안 오느냐였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해준 기준이 바로 우리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느냐로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냄새를 맡으러 오게 만드는 테크닉으로 고아원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인책일 뿐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처럼요.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낚시를 던졌다가 곁에 있던 많은 제자들까지 떠나버리는 사고가 터지지요. 불쌍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는 엉터리 메시야와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기근이 나자 소아시아 교회를 돌며 모금을 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가져다줍니다. 교회 이기주의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부러우면 들어오라는 겁니다. 그러나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행 5:12-13)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칭송하면서도 제자들의 공동체와 상종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은 오만방자한 행동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바로 그 오만방자함의 대표격이지요. 그 많은 가난한 자들을 치료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던 사람입니다. 휴머니스트의 오만방자함이지요. 결국 자기 바벨탑을 쌓은 거지요. 그들은 치료해줘 봐야 곧 다른 병으로 죽을 뿐이고 솟아오르는 것은 테레사의 바벨탑뿐입니다. 그러나 그녀도 곧 죽었지요.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제가 슈바이처를 천재이며 솔직한 자라고 인정하는 부분이 그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성경의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했고 그것을 진리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결정한 순간 신학자로서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거든요. 천재이자 정직한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 같은 타입은 어리석고 교활한 소경이지요.
[정진호] [오후 7:48] 복음을 전하지 않는 원칙이라고 할 때의 그 복음은 예수 믿어 내세구원을 받게 해준다는 것에 불과한 건데 그런 복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원칙을 정한 거는 아니겠지요? ㅋㅋ
[김용호] [오후 7:49] 앗~~~ 혹시 테레사 수녀가 진짜 천재?
[정진호] [오후 7:49] 단지 휴머니스트로서 조건 없이 도와주기를 원했겠지요.
[김용호] [오후 7:49] 그럼 수녀라는 포지션으로 위장을? 흐음~~ 수녀로 위장하고 기독교 안에서 암약한 휴머니스트라..... 멋진데요? 만약 그렇다면 슈바이처가 고지식했고 테레사가 영악했던 셈이 되는군요.^^
[정진호] [오후 7:51] 그런 조건을 달아봐야 좋은 말 들을 리 만무하니까 끝까지 욕 안 먹는 길을 택한 거라고 봅니다.
[김용호] [오후 7:52] 그랬을 가능성에 저도 한 표~^^
[정진호] [오후 7:52] 사람들한테 칭찬 듣는 길, 그 길이 하나님도 칭찬할 길이라고 본 것이겠지요.
[김용호] [오후 7:54] 아예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끊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고해성사를 담당했던 신부가 폭로했지요. 그녀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 괴롭다는 고해성사를 여러 번 했었다는 거지요.
[정진호] [오후 7:56] 만일 그랬다면 사람들한테 칭찬받는 일을 한 거네요.
[김용호] [오후 7:56] 그렇습니다. 자기 선악관에 충실했던 거지요.
[정진호] [오후 7:57] 그 고해성사를 가톨릭에서는 어떻게 해석할까요. 이 땅에서 착한 일을 하면 구원 받는다고 하는 게 가톨릭 조직신학이니까 문제 삼지 않았겠네요.
[김용호] [오후 7:59] 그냥 지나가더군요.^^ 그런데 테레사 수녀는 휴머니스트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행동도 많이 했습니다. 병원 경비를 모금하기 위해 독재자들과 기념촬영을 많이 했어요. 좀 복잡한 멘탈리티를 가진 여인인 듯~~~ 자기 바벨탑을 쌓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철의 여인이었던 거지요. 종교도 이용하고 휴머니즘도 이용한 독한 여인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가 치료해준 사람의 숫자보다 자기가 함께 사진 찍은 독재자들이 죽인 사람들의 숫자가 수십 배 수백 배 많았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진호] [오후 8:27]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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