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싯다르타는 아버지 슈도다나가 지어준 이름으로 “소원성취” 혹은 “모든 소원을 이루게 하는 사람”이란 뜻
- 가우타마 가의 싯다르타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우주만물은 오직 자기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세상을 사는 고통도 생각하기 나름이므로 자기 스스로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산스크리트어: शाक्यमुनि 샤캬무니)는 불교의 교조이며 힌두교에서는 유지신 비슈누의 9번째 다샤바타라이다. 석가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석존·불·여래 등의 10가지 존칭과 본명인 싯다르타 가우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가우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샤캬족의 국가인 샤캬 공화국(현재의네팔)에서 국왕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윤회하는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보리수밑에서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Buddha,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고,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입멸하였다
참고) 부다가야(힌두어: बोधगया)는 인도의 비하르 주가야구역의 도시이다. 그곳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은 장소로 유명하다. 인도 북동부 비하르(Bihar)주 가야(Gaya)시에서 11km 떨어진 곳에 있다. 탄생지 룸비니, 최초의 설법지 녹야원(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이다. 4대 성지는 부처가 열반하기 전에 제자 아난다에게 사람들이 참배할 4곳을 일러준 데서 유래하며 석가모니의 인생과 관련있다. 이 곳에 있는 마하보디 사원은 2002년에 세계유산이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그곳이 보디만다로 알려져 있었으며 대규모 불교사원의 정착지였다. 주된 불교사원은 보디만다-비하라로 불렸었으며, 지금은 마하보디 사원으로 불린다.
샤캬족의 성자라는 의미에서 “샤캬무니”(산스크리트어: शाक्यमुनि) 또는 한자 음차인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불리고, 줄여서 “샤캬”(산스크리트어: शाक्य) 혹은 “석가”(釋迦)라고 한다. 또한 세존, 석존, 불, 여래 등 10가지의 존칭이 있는데, 모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를 칭한다.[1] 본명은 싯다르타 가우타마(산스크리트어: सिद्धार्थ गौतम, Siddhārtha Gautama 싯다르타 가우타마, 팔리어: Siddhattha Gotama 싯다타 고타마, 한국 한자: 悉達多 喬達摩)로 “가우타마”는 성이며, “싯다르타”는 이름이다. 가우타마 싯다르타라고도 한다.
싯다르타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소원성취” 혹은 “모든 소원을 이루게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씨인 가우타마에 깨달음을 성취한 존재라는 뜻의 “붓다(불타 · 불 · 부처)”를 더하여 “가우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하기도 한다.[주해 1]
기원전 6세기경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카필라바스투(가비라성, 지금의 네팔 티라우라코트)을 중심으로 샤캬 공화국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 정반왕)와 마야 부인(Mahamaya) 사이에서 태어났다. 샤캬 공화국은 일종의 혼합정체가 행해지고 있었다. 라자라는 수장을 교대로 선출하는 독립된 자치 공동체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코살라 왕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슈도다나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왕비가 6개 이빨을 가진 흰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임신했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임박하자, 당시 풍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Devadaha, 구리성)로 향했는데, 음력 4월 8일[주해 2]룸비니에서 꽃이 만발한 무우수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1] 이때 하늘에서 오색 구름과 무지개가 피었으며, 가릉빈가(迦陵頻伽)가 아름다운 소리로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고, 구룡이 나타나 몸을 닦아 주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그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고,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 이는 “우주만물은 오직 자기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세상을 사는 고통도 생각하기 나름이므로 자기 스스로 편안하게 할 수 있다”라는 뜻에서 모든 불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는 생후 7일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을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의 손에 자랐으며, 뛰어난 지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성장하면서 진리에 관해서도 명상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궁전 안의 안락함이 모든 인간의 생활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궁 밖으로 나와 밭갈이하는 농부를 보고 인간들이 수고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인간 사회의 고통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에게 잡아먹히는 벌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쇠약한 노인을 보고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태어나서 병들어 신음하고 죽어야 하는 생로병사의 운명에 슬픔을 금치 못하였다.
석가의 이러한 우울한 심정을 눈치챈 부왕은 혹시 아들이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출가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16세의 나이에 콜리야 왕국의 공주야쇼다라(Yaśodhara)와 혼인시켰다.[1] 이후 아들을 낳았는데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이름을 “라훌라(Rahula)”라고 지었다.[2] 부왕은 많은 미녀들을 시켜 주야로 향연도 베풀었으나, 오히려 출가를 재촉하는 동기만 되었다.
참고) 라훌라
라훌라는 석가의 친자식이며, 또 그 제자의 1명. 석가의 아내인 야쇼다라 왕비가 석가의 출가전에 임신한 아이로, 석가가 출가 이전 태어났다고 여겨진다. 십대제자의 한 명으로 꼽혀 밀행 제일이라고 칭해진다. 또 아라한의 한 명이기도 하다.
29세가 되던 해 어느 날 밤,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깨우쳐야 한다고 결심하고서 가족에게 무언의 이별을 고한 채 출가하였다. 이 출가에는 여러 동기가 중첩되어 작용했지만, 가장 강력했던 요인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다르마를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열정이었다. 싯다르타 왕자가 카필라바스투 성 동문 밖에서 노인, 남문 밖에서 병자, 서문 밖에서 죽은 자, 북문 밖에서 승려를 만났다는 불전의 사문유관(四門遊觀) 이야기는 무상고(無常苦)에 대한 강렬한 자각을 의미한다. 아들 라훌라가 있으니 후계자에 대한 근심은 하지 않게 된 싯다르타는 시종 차닉(車匿)을 데리고 백마를 타고서 성문을 빠져나갔다.
싯다르타는 시종과 헤어지고 나서 브라만 고행자의 가르침을 받아 단식하고 고행하였다. 그는 정신을 통일하려고 허리를 땅에 대지 않고 결가부좌 유지하는 등 온갖 고행을 하였으나 해탈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닫고서 혼자 성지를 찾아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삭발하고, 옷 갈아입고 구걸하면서 남쪽의 마가다 왕국을 향해 갔다. 마가다 왕국의 수도라자그리하(Rajagrha, 王舍城)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브라만교의 행자(行者)에게서 요가를 배웠으나, 역시 정신적으로 만족하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네란자나 강(Nairanjana, 尼連禪河) 부근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하였다.
한때 부왕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귀국을 권하였으나, 석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부왕은 석가의 환국을 단념하고 5명의 현자를 뽑아 태자를 수행하게 하였다.[1] 이 기간이 6년이었는데,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이 없음을 알고 그만두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하던 5명의 수도자도 떠나갔다. 석가는 목욕을 하고 심신을 맑게 하여 마을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죽을 마시고 체력을 회복하였다. 그것을 본 5명의 수도자는 석가가 타락했다고 여겨 떠났다는 설도 있다.[3]이후부다가야근처에 있는 우루베라 촌의보리수밑에 풀을 깔고 법좌를 정하여 빨랑까좌(교족좌)[4]를 하고 깨닫지 못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조용히 내관(內觀)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고행은 일체의 공리적 관념을 버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끊어 없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함이었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도를 닦는 마음을 좌절시키려고 달려드는 마라 파피야스와의 싸움으로 묘사되었다.
35세 되는 해의12월 8일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바이샤카월의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로·병·사의 본원을 끊어 없애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번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 정적(靜寂), 즉열반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을 얻어 눈을 뜬 부처가 된 것을 의미했다.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는 보리수 밑에 대좌하여 7일 동안12연법을 달관하여 모든 의혹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한동안 깨달음의 경지를 혼자 즐기다가 얼마 후 이러한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우선 지난 날에 같이 고행하던 5명의 수행자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라나시 교외의 사르나트(鹿野苑)를 방문하였다. 그들 5명은 고행을 그만둔 석가를 경멸했으나 이내 쾌락과 고행의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의 설법에 감화되었다. 이 최초의 설법을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붓다의 제자가 된 5인의 비구(比丘)가 생기면서 불(佛)·법(法)·승(僧)의 불교 교단이 성립하였다.
이후 45년간라자그리하와슈라바스티(Sravasti, 舍衛城)를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설법을 해나갔다. 붓다의 가르침은 심원하면서도 상대에 따라서 문답 형식이나 비유 또는인연 설화(因緣說話)를 활용하고, 평이한 말로 친절을 다하여 설법했으므로 점차 제자가 늘어났다. 경제적으로 돕는 귀의자도 나타나서마가다의 왕빔비사라가가란타의 동산에 건물을 짓고 헌납하니승가람의 시초가 되었다. 이를 죽림정사라고 부른다. 사위성에도 기원정사라는 큰 절을 세워사부중의 완성을 보았다.
해설) 사부중 - 칠부중
7부중(七部衆)은 모든 불제자(佛弟子)들, 즉 불교의 출가자와 비출가자(재가신자)를 망라하는 모든 불자들을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식차마나·우바새·우바이의 일곱 대중[衆]으로 분류하는 것을 말한다.[1]7중(七衆) 또는 도속7중(道俗七衆)이라고도 한다.7부중 가운데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통틀어4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 한다.[5]4부대중은4부중(四部衆) ·4중(四衆) 또는4부제자(四部弟子)라고도 하는데, 승단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이다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시에서 받은 공양이 잘못되어 심한 이질(식중독)을 앓았다. 고령인데다 금식을 자주 했었기에 장이 매우 약한 탓이었다. 병이 위독함을 깨달은 붓다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북쪽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중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폈다. 이후 쉬지 말고 수행에 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조용히 쿠시나가라에서 입멸하였다. 유골과 사리는 왕후, 귀족들이 분배하여 각자의 나라에 가지고 가서 탑파를 세우고 봉양하였다.
석가모니의 생몰년도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주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불교에서는 부처의 탄생과 반열반을 기원전 624년 ~ 544년으로 보고 있는데, 불교에서 사용하는 달력 체계인 불기가 석가모니가 탄생한 해가 아니라 빠리닙바나(반열반)에 든 해부터 계산하기 때문이다.
연기설이란 “이것으로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너와 나와 만남도 바로 깊은 인연의 까닭이다. 네가 있으니 내가 있는 것인 만큼 자타가 불이(不二)함을 깨달아 머무름이 없는 자비를 실천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연기(緣起)”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인하여 생겨난다”는 뜻이다.
힌두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를 악마나 악인이 베다의 가르침으로 올바른 수행을 하여 힘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을 (힌두교 입장에서는 그릇된 가르침인) 불교로 인도하여 파멸시키기 위해 나타난 비슈누의 9번째 다샤바타라로 간주하지만,[5][6][7]불교 또한 힌두교의 종파 중 하나로 간주하는 힌두교인들은 붓다를 힌두교의 종교개혁가로서 존경하는 경우도 많다.[8]
첫댓글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
불투도(不偸盜): 도둑질하지 않는다.
불사음(不邪淫): 아내 이외의 여성, 남편 이외의 남성과 부정한 정교를 맺지 않는다.
불망어(不妄語):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불음주(不飮酒): 술을 마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