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 호수 알혼섬의 부르한(샤먼) 바위. 전 세계에서 명상가들이 몰려 오는 기 체험 장소다. 사진 김동률
노자가 그랬던가? 흙으로 꽃병을 빚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병이 아니라 병 속의 빈 공간이라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TSR)는 꽃병과 같다. 버려서 얻고 비워서 채운다는 노자의 주장과 딱 맞아떨어진다. 낡은 열차에서 사나흘을 지내려면 비우고 또 버려야 한다. 예상보다 매우 고되다. 들었던 얘기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투식량·컵라면으로 열 끼 때워
승무원 감시 피해 보드카도 홀짝
남한 절반 크기 바이칼 호수에서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 만나
한민족의 시원이라는 바이칼로 가는 길, 하바롭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TSR을 탔다. 기차로만 사나흘 달린다. 상상조차 쉽지 않은 거리다. 이등석 1인 9000루블. 한국 돈으로 15만원 정도다. 복층 침대칸, 모르는 네 사람이 한 칸에 기거하게 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객실 내부 모습. 이 좁은 공간에서 사나흘을 먹고 자고 수다를 떨어야 한다. 사진 김동률
의자는 따로 없다. 낮에는 그냥 침대에 걸터앉아 가야 한다. 나흘 동안 폐쇄된 공간에서 먹고, 자고, 씻고, 수다를 떨어야 한다. 열차 안은 금주다. 감춰 온 보드카는 승무원 몰래 페트병에 넣어 마셨다. 들키면 뺏기고 재수 없으면 강제로 내려야 한다. 요리는 못 한다. 비치된 끓는 물에 전투식량과 컵라면으로 열 끼 이상을 때워야 한다. 누룽지는 미리 물에 불려 놓아야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문제는 화장실이다. 차 밑으로 뿌려지는 옛날 방식이다. 정차하기 전후 20여 분 전부터 승무원이 문을 잠가 버려 급한 사람은 큰 낭패를 겪게 된다. 그 깨끗하지 않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식기를 씻고, 면도를 한다. 미리 준비한 플라스틱 바가지로 샤워까지 했다는 여행의 고수도 있다. 한국인의 로망이자 버킷 리스트 최우선 순위에 있는 TSR 여행의 민낯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고난의 기차를 사나흘 타고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아낙네의 살결보다 희다는 자작나무와 끝없는 초원 때문이 아니다. 열차에는 삶의 단내가 배어 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고난의 행군’이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사나흘 힘듦 속에 오욕칠정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다 서다 반복하는 기찻길이 인생길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러고 보니 누가 그랬다. TSR을 타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딱 잘라 ‘슬기로운 감방생활’ 정도가 적절한 표현이겠다. 수행 공간쯤 된다는 의미다.
열차가 도착하면 노점상이 나와 승객들에게 먹을 것을 판다. 사진 김동률
1916년 개통된 TSR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에 이르는 지구에서 가장 긴 철도 노선이다. 평균 시속 100km 미만. 꼬빡 일곱 날이 걸린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설원을 헤치며 기적을 울리던 바로 그 열차다. “빨리빨리”와 함께 평생 살아온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무한의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눈치 빠른 여행객은 주요 거점이 되는 역마다 하루나 이틀 정도 쉬었다가 다시 타고 가는 방식을 택한다. 바이칼이 최종 목적지인 나는 항공편으로 하바롭스크에 도착해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구간을 경험했다.
바이칼 호수 알혼섬 북부의 다산 바위. 아이 낳은 산모의 모습이라고 해서 불임 부부가 단골로 찾는다고 한다. 사진 김동률
기진맥진, 지린 땀 냄새 속에 도착한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고풍스럽다. 여기서 바이칼까지는 차로 6시간 거리다. 낡은 버스는 무모한 속력으로 여행객을 바이칼로 나른다. 음력 사나흘 달 같은 호수다. 남한의 절반 크기인 호수는 수심(1621m)이 워낙 깊어 엄청난 담수량을 자랑한다. 바이칼 여행의 백미는 알혼섬에 있다. 이 일대는 몽고족 계통 브리야트족의 고향이다. 생김새가 우리와 워낙 비슷해 이웃 같은 느낌이다. 바이칼은 기(氣)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알혼섬의 샤먼(부르한) 바위는 미국 애리조나주의 세도나와 함께 전 세계 명상가에게 꿈의 장소가 된다.
샤먼 바위에 앉아 도를 닦고 있다는 자칭 명상가. 100루블(약 1700원)을 주고 촬영했다. 사진 김동률
여행은 여행이다. 일찍이 모더니티에 푹 젖은 시인 김기림이 말했다. ‘세계는 나의 학교/여행이라는 과정에서/나는 수 없는 신기로운 것을 배우는/유쾌한 소학생’이라고. 맞는 말이다. 게다가 돌아올 집이 있는 여행은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즐겁다. 관광객이 북적대는 유럽 도시와는 달리, 인적 드문 창밖은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만 빼곡하다. 통나무로 경계를 둔 들판에는 옥수수가 여물고 있고 가끔 외로운 양치기가 지팡이를 흔들어 준다. 투명한 햇볕이 벌판에 뭉텅뭉텅 쏟아진다. 대륙의 늦여름은 남루하지만 그래도 눈부시다.
바이칼 호수 인근에서 만난 남매. 이웃집 아이들 모습이다. 사진 김동률
그러나 계절의 끝자락, 들녘은 이미 푸른빛을 시름시름 잃어가고 있다. 무심한 풀들은 금빛으로 물들고 들녘의 콩들은 태양에 스스로 여물어 간다. 가을은 곧 깊어갈 것이며 들꽃들도 저 혼자 바싹 마를 것이다. 시베리아 여행은 여름과 같이 끝났다. 덜컹거리는 긴긴 기차여행, 차창으로 본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터질 듯이 걸려 있었고 나는 가만히 2층 침대칸에 앉아 올드 팝을 숨죽여 들으며 몰래 보드카를 마셨다. 차창에는 『닥터 지바고』를 읽던 스무 몇 살의 젊은 내가 보인다. 과거는 썩지 않는다. 그저 야위어 갈 뿐이다.
◇여행정보=TSR 승차권은 국내에서 앱으로 살 수 있다. 한국인은 항공으로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이르쿠츠크로 가서 바이칼에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TSR을 이용한다. 겨울 여행은 무모하다. 일부 항공편은 봄부터 늦가을까지만 운행되니 출발에 앞서 확인이 필수다. 무비자 입국. 영어 안내문이 거의 없다. 간단한 러시아어는 말로 하는 구글 앱이 편리하다. 물가는 한국의 3분의 1 수준. 시베리아 들꽃으로 채집된 자연산 꿀이나 보드카가 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