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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1-17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입니다. 구약과 신약이라고 할 때 ‘약(約)’이라는 단어는 언약 혹은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구약이나 신약을 통해 약속하신 바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은혜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은혜언약을 시행하는 방식이 구약과 신약에 있어 다르게 시행되었습니다. 구약의 경우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와 유월절 어린양, 기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예표와 규례들에 의해서 이 약속이 시행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것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들이었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오신 것은 아니지만, 성령께서는 택자들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심으로 동일한 믿음과 동일한 구속의 은총으로 베푸셨습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입고 나타나심으로 율법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이루시는데,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신약을 시작할 때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특히 신약 맨 첫 네 권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이 네 권의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다는 점에 있어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의 경우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바라보는 시각이 좀 다르다고 하여 칼빈은 요한복음을 그리스도의 영혼으로 비유합니다. 반면 다른 복음서들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경우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다고 할 때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공관복음서와 관련해 “왜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가?”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이것입니다. 구약이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표하고 있다면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여러 면에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증거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경우 그 시작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개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금 말씀드릴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예수님은 누구시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먼저 드러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1:1)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이 사실과 관련된 일임을 더욱 부각시켜 말하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함으로서 그분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을 알림으로 그분이 자기 백성을 위해 오신 참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고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분이 이 땅에 오신 참 사람이라는 사실도 믿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될 것은 그리스도가 중심이지 시작과 끝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보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개혁주의를 말하는 사람들도 보면 성경을 이렇게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심이 되다보니 무엇을 놓치느냐 하면 그 시작과 끝을 놓친다는 게 올무로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리스도 중심, 즉 십자가 중심이 되다보니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작정하심이 약화되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신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역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성정에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칭의가 출발이 아니라 선택이 출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이고,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따라 생각하고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빙크가 이해한 개혁주의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그 시작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말하고 있고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지만,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마지막절인 38절만 보겠습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지만 그 시작은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택자를 위한 수단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이해를 가지고 마태복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읽었지만 다시 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그리고 이어 나오는 내용이 아브라함부터 다윗 왕까지(마1:2-6a), 다윗 왕부터 여고냐와 그 형제들까지(마1:6b-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 여고냐부터 그리스도까지(마1:12-16)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리하는 것이 17절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그러니까 지금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초점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과 연결시켜 말하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다윗과 연결시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그룹으로 해서 열 네 대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단 아브라함과 다윗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언약에 초점을 두고 있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실 때 그 언약의 핵심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내용이 아브라함과의 언약,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경우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세우신 언약의 내용을 보면 처음부터 단지 육적 이스라엘을 위해 부르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에 보면 이런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아브라함으로부터 특별한 민족이 생겨나지만,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3절 마지막 부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이 약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22장 18절에 보면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에서는 어떻게 이해되느냐? 갈라디아서 3장 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분명 창세기 22장에서는 이삭을 염두해 두시면서 약속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씨가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심지어 갈라디아서에 보면 창세기에서 말한 복에 대해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창3: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다윗과 관련하여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2-16) 분명 이 약속 자체는 솔로몬을 염두해 둔 표현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집과 나라가 영원히 보전된다, 영원히 견고히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로서만 생각해 보자면 실패한 말씀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는 그런 역사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 보면 누가 다윗의 씨로 오시느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란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그리고 다윗과 맺으신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가 된다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관련하여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와 관련해 성경은 처음부터 혈통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방금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 때부터 이방 민족까지 다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경우 이삭을 낳기 전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성경은 약속의 아들로서 이삭을 말하지 이스마엘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삭 역시 에서와 야곱을 낳지만 에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민족이 되고 맙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3) 에서의 경우 육적으로는 분명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삭으로부터 난 자입니다. 그러나 영적 이스라엘은 아니었던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철저히 육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소위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데,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 위해 뭐가 필요한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은 믿음의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실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반면 다윗은 그가 왕으로 있었지만 그의 인생을 통해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신다고 할 때 그 방편으로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일한 왕은 누구신가 할 때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 1절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다만 2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보여주는 것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를 따라 올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는가? 여기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이후 언급되는 계보의 내용이 의도적으로 열 네 대에 맞추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실제로 열 네 대인가를 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2절 아브라함부터 6절 중간에 있는 다윗 왕까지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여기까지는 열 네 대가 맞습니다. 다만 역대상 2장과 비교해 보면 마태복음에서는 나손이라고 이름하지만, 역대상에서는 살마로 이름하고 있다는 부분만 다를 뿐입니다(cf.대상2:3-15).
그 다음 6절 중간부터 11절도 확인하겠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경우는 앞에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에 뺀다면 열 네 대가 맞습니다. 그러나 17절 말씀은 다윗부터해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다윗을 포함하면 열 다섯 대가 됩니다. 그리고 다윗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부분은 왕들의 이름인데, 여기에 보면 모든 유다 왕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대상 3장 10절 이하 15절에 보면 솔로몬 이후 왕들에 대한 계보가 나오는데, 마태복음과는 약간 차이를 보입니다. 거기에는 요람 이후 아하시야, 요아서, 아마샤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요람 이후 웃시야가 있는데, 역대상에서는 웃시야를 아사랴로 이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인 12절부터 16절까지를 보시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 보면 앞 내용처럼 여고냐를 빼면 열 네 대가 아니라 열 세 대입니다. 그러나 여고냐로부터 시작하면 열 네 대입니다. 그러나 여러 주석을 참고해서 설명하자면 다윗을 빼고, 여고냐를 빼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마지막 부분에서는 열 네 대가 아니라 열 세 대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칼빈은 복사자들의 실수나 잘못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에피파니우스라는 사람의 추론을 말하는데, 이 사람은 <이단 공박>이라는 책의 첫 권에서 여고냐의 이름이 두 번 나오자 무식한 사람이 이것을 쓸 데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삭제해 버렸다고 추론합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여호야긴의 부친 여호야김이 여고냐라는 이름을 자기 아들과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삭제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로버투스 스테파누스라는 사람은 여호야김이라는 이름이 삽입되어 있는 한 헬라어 사본을 증거로 내놓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매튜헨리도 역시 11절에서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의 여고냐는 엘리야김이라고 말하고, 12절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는 엘리야김의 아들 엘리야긴이라고 주석합니다. 그러니까 여고냐로 불리고 있는 사람이 두 사람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성경 자체로 볼 때 여호야긴에 대해서는 여고냐로 불리고 있지만(대상3:16) 여호야김이 여고냐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칼빈이 말한 사본에 대해서도 확인한 바가 없고, 또한 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지금 마태복음을 통해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로 나누어 열 네 대씩 일부로 나눠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중반부에서는 다윗 이후 솔로몬으로 시작되는 유다의 왕들 가운데서는 빠진 왕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람 이후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고냐가 엘리야김이 아니면 엘리야김도 빠져 있습니다. 그럼 왜 빠져 있는가? 매튜 헨리는 앞선 세 왕의 경우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아합의 우상 숭배를 다윗의 집에 끌어 들여 그 낙인이 그 가문에 찍히게 되고 그 죄악에 대한 형벌이 3, 4대까지 미치게 된 아달리야의 직계 자손인 이 세 왕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 아닌가로 생각합니다. 특히 세 왕은 다 살해를 당했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세 왕이 빠져서 열 네 대를 일부러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내용에서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스알디엘은 브다야를 낳고, 브다야가 스룹바벨을 낳았습니다(대상3:17-19). 따라서 주석가들의 말대로 엘리야김을 여고냐로 이해해서 양쪽에 넣는다면 여기서도 브다야가 빠져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는 지금 일부로 열 네 대를 맞추고 있는 겁니다.
그럼 왜 열 네 대를 맞추고 있는가? 숫자 14에 대한 어떤 의도가 있어서인가? 어떤 사람은 다윗이라는 히브리 알파벳 자모의 수가 도합 14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위를 이을 자라는 것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칼빈의 경우 마태복음은 독자의 기억을 돕는 의미에서 14대씩 세 그룹을 간단하게 기록해 나가면서 일부는 제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독자들의 기억을 돕기 위해 세 그룹으로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것도 말합니다.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세 가지 다른 상황을 특징으로 보여 주려는 것이다. 즉 처음 시기는 왕권이 없었던 때입니다. 그러나 중간 시기의 경우 저들의 요구 때문에 왕권을 사람에게 주었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마지막 시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벨론으로 끌어가는 것 외에 보여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마태복음은 열 네 대로 세 시기를 말하고 있고, 그 세 시기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실패한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왕권이 없었던 때가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라는 사실이었고, 그러다 세상의 왕들처럼 왕을 요구하는 저들에게 왕을 주셨지만 그런 왕정 제도 자체가 무엇을 거부하는 것이었는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자 하는 형태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 7절을 읽어드리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자를 세우심으로 다윗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이라 할지라도 죄로 물들어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왕정 제도의 결과가 뭐냐? 바벨론 포로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실패의 역사란 것이고, 그런 실패의 역사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고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는가에 대한 물음의 답변이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심으로 그 모든 실패의 역사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첫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 되어 온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의 경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11:1) 그런데 이 말씀의 배경이 뭐냐?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사10:33-34)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렘33:15)
그럼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런 실패의 역사 속에서 좀 더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담겨 있는 여인들의 이름입니다. 보통 족보 안에 여인들의 이름은 잘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제외한 4명의 여인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여인 가운데 문제가 없는 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나오는 여인이 3절에 나오는 다말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며느리가 창녀로 가장해서 시아버지와 불륜을 저지르게 됩니다. 물론 창세기 38장에 보면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 모세 법 이전에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씨를 잇도록 하는 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의 경우 장자 엘이 죽자, 동생인 오난이 형의 씨를 이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오난도 죽이십니다. 그리고 셋째인 셀라가 형의 씨를 이어야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일이 바로 유다를 속여 자손을 낳게 된 일인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의 법으로 하자면 죽어 마땅한 일입니다(레20:12). 그런데도 이런 여인의 이름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라와 있는 겁니다.
두 번째로 라합이라는 인물입니다(5). 이 사람은 가나안 사람입니다. 이방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직업은 기생입니다. 우리말로는 기생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창녀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심지어 여호수아에 보면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으로 표현되고 있는데(수2:1), 어떤 면에서는 그곳 주인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라합은 그곳 포주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룻입니다(5). 이 여인 역시 모압 사람으로서 이방여인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23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이스라엘 안에 머물게 되었던 여인입니다.
마지막으로 밧세바입니다. 6절 중간에 보면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되어 있는데, 밧세바의 이름은 거론되어 있지 않지만 솔로몬이 누구를 통해 낳았느냐 하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 낳았습니다. 남의 아내인 것입니다. 특히 성경에 보면 우리아의 경우 충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를 일부러 죽음에 내몰기까지 한 것이 다윗입니다. 이미 우리아가 죽기 전에 동침을 했지만, 그를 죽음에로 내몬 뒤 취한 아내가 밧세바인 것이고,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이 솔로몬인 것입니다.
이처럼 마리아를 제외한 여인의 이름이 네 명이 나오지만, 그 여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엇을 드러내느냐 하면 수치스러움과 혈통에 있어 어떤 문제점들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인들만 문제가 있는가? 아닙니다. 남자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만 보더라도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 위대한 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점과 흠이 있는 자인 겁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만, 이삭을 낳기 전 누구를 먼저 낳았습니까? 이스마엘입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문제가 없는 이가 없습니다. 점과 흠이 있고, 죄로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경우 마리아를 죄 없다 하지만, 그것처럼 거짓도 없습니다. 지금 마태복음 1장의 이 계보는 점과 흠이 있는 계보, 죄의 역사로 말미암아 실패한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계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만 죄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계보 속에서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약속하신 바대로 오신 것입니다. 점과 흠이 있는 자들 속에서 오셨다는 것이고, 심지어 유대인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을 취급조차 하지 않지만 바로 그런 이방인들조차 이 계보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은혜를 주기시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하지 않는 인생들에게 점과 흠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왕이심을 알리는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참된 왕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도록 그 길을 마련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서 소개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과 함께 생각하자면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류 보편 역사가 죄로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누구를 부르셨느냐 하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와 은혜언약을 맺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겁니다. 거기에는 죄도 막을 수 없고, 혈통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의 주체가 누구시냐? 하나님이신 겁니다(눅3:38).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자 하신 것이고, 이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 그 은혜언약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약속되어온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때가 되어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 신약에서부터 복음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부터 복음이 있었지만 그 약속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온 복음의 성취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곧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로 말하자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인간의 역사는 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런 인간의 죄 가운데 들어오시되 죄 없이 들어오셔서 자기 백성을 불러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그런 믿음의 삶 속에서도 이 죄의 모습은 근절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죄를 하나하나 다 들춰낸다면 어느 누구도 감히 부끄러워서,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의 죄, 그리고 유다의 죄를 볼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도 다를 바 없는 인간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우리 마음의 완악함이란 더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겁니다. 약속을 따라 오시되,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말씀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런 말씀 앞에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리고 감사가 넘쳐나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