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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
♣ 사[思]그리움. 사모함.
♣ 사[咋]깨물다.
♣ 사[師]박수 무당.
♣ 사[使]설사. 설령.
♣ 사[辭]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고 한 점이 다르다.
♣ 사[史]형식이 내용을 앞서는 것. 즉 내용은 없이 겉만 번지르르하게 되는 것을 말함. 《論語 雍也》
♣ 사가[謝家]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20 首夏猶淸和聯句》
♣ 사가[仕加]벼슬의 자급을 올리는데 있어 달수가 차야만 올라가는 것을 사가(仕加)라 한다.
♣ 사가[謝家]사씨(謝氏)는 진대(晉代)의 명문으로 사조(謝眺) 등 시인이 배출되었다.
♣ 사가군종재[謝家群從在]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많은 자질(子姪)들 중에서도 특히 조카인 사현(謝玄)을 애지중지하였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晉書 卷79 謝玄傳》
♣ 사가녀[謝家女]진(晉)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의 질녀 사도온(謝道韞). 사안이 자질(子姪)을 데리고 시문을 논하다가 마침 눈이 쏟아지자 한번 형용해 보라고 하였는데, 조카인 사랑(謝朗)이 “공중에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다.”고 하자, 사도온이 “버들개지가 바람에 날리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안이 즐거워하며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 사가랑[謝家廊]오대(五代) 때 장필(張泌)의 시 기인(奇人)에 이별한 뒤의 그리움을 노래하여, “이별 후 꿈속에 예전처럼 사가(謝家)에 도착하니, 작은 회랑 굽었다 합쳤다 비스듬히 비끼었네.” 하였다.
♣ 사가망처[徙家忘妻]이사할 때 자기의 처(妻)를 깜빡잊고 데려가지 않음. 잘 잊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 사가청초[謝家靑草]진(晉) 나라 사혜련(謝惠連)이 10세에 능히 글을 지으니, 그 족형(族兄) 영운(靈運)은 매양 글을 지을 적에, “혜련을 만나기만 하면 문득 좋은 글귀를 얻게 된다. 일찍이 영가(永嘉)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이루지 못했는데, 갑자기 꿈에 혜련을 보고서 곧 ‘지당에 봄풀이 돋아난다[池塘生春草].’라는 글귀를 얻었다.” 하였음. 《南史 謝惠連傳》
♣ 사각승선[四角承宣]고려 의종(毅宗) 때 사람 이공승(李公升)의 별명이다. 의종이 유행(遊行)을 좋아하는데도 신하들은 직간(直諫)하는 자는 없고, 오히려 별의별 물건을 바치면서 상서(祥瑞)라고 아뢰었다. 이때 금(金)나라에서 양 2천마리를 보내왔는데 그중 한 마리가 뿔이 네개였다. 추밀사 이공승이 그것을 상서로운 짐승이라고 바치니, 사람들이 그를 사각승선이라고 조롱했다.
♣ 사갈[事葛]갈(葛)은 옛날 나라 이름. 탕(湯)의 성덕(聖德)으로도 초년에 갈백(葛伯)을 섬긴 일을 말하는데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 下)에 “탕(湯)은 갈을 섬겼고 문왕(文王)은 곤이(昆夷)를 섬겼다.” 하였다.
♣ 사갈생서정숙현[死葛生蜍定孰賢]사람은 인품(人品)이 가장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제갈량(諸葛亮)은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이며 충신으로서 훌륭한 명성이 천하 후세에 드날렸는데, 진(晉) 나라 조여(曹蜍)라는 사람은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필적할 만큼 잘 썼으나, 인품이 워낙 용렬하여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다는 논평을 받은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品藻, 黃庭堅書右軍帖後》
♣ 사강[士剛]김집(金集)의 자이다.
♣ 사강락[謝康樂]강락공(康樂公)에 봉해진 남조 송(南朝宋) 때의 문장가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그는 시를 잘하고 산수(山水)를 좋아해서 수령(守令)으로 있으면서 산수에 노는 시(詩)를 많이 지었다. 처음 진무제(晉武帝)에게 벼슬, 송(宋) 나라가 서자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로 옮기고, 뒤에 영가 태수(永嘉太守)가 됨. 뜻에 맞지 않자 소요 유람, 글짓기로 자적(自適)함. 송 문제(宋文帝)가 부르자 비서감(祕書監)이 되고, 또 시중(侍中)이 되는 등 후대를 받았으나 또 뜻에 차지 않아 칭병(稱病)하고 휴가를 얻어 돌아와, 동생 혜련(惠連)ㆍ하장유(何長瑜) 등과 함께 문장으로 교유하였는데, 뒤에 모반의 혐의로 죽음.
♣ 사객[謝客]사객은 어릴 때의 이름이 객아(客兒)였던 남조 송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 사객[詞客]사객은 한(漢)나라 때 사부가(辭賦家)인 양웅(揚雄)을 가리킨다.
♣ 사거이도[舍車而徒]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는 뜻으로, 불의(不義)의 지위를 버리고 청빈(淸貧)에 만족함을 이르는 말.
♣ 사경[邪徑]길을 바꾸다.
♣ 사경국[司經局]경적과 도서를 맡은 관서.
♣ 사경첩[仕逕捷]은사(隱士)라는 이름으로 하루아침에 높은 벼슬을 얻는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때 노장용(盧藏用)은 처음에 종남산(終南山)에 은둔하여 자못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뒤에 나와서 벼슬하였다. 이때 사마승정(司馬承禎)은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가니, 장용은 종남산을 가리키면서 “여기에도 아름다운 운치가 있는데 굳이 천태산을 찾을 것이 있나?" 하였다. 승정은 웃으면서 “내가 보기에는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뿐이네.” 하니, 장용은 부끄러워하였다. 《新唐書 卷一百九十六 司馬承禎傳》
♣ 사계[沙界]불교에서 쓰는 말로, 항하사(恒河沙)의 모래 숫자만큼 많은 모든 세계를 말한다.
♣ 사계[社禊]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토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
♣ 사계사야[使鷄司夜]닭으로 하여금 밤을 맡긴다는 뜻으로, 닭에게 밤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기는 것처럼, 알맞은 인재에 적합한 일을 맡긴다는 의미.
♣ 사고[四苦]사람의 네 가지 괴로움. 즉 생노병사(生老病死)
♣ 사고[四庫]청(淸) 나라에서 출간한 사고전서(四庫全書). 본디 궁중에서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을 따로 분류하여 네 군데의 서고에 보관했다는 데서 나온 말로, 많은 서책을 뜻하기도 한다.
♣ 사고무인[四顧無人]주위에 사람이 없어 쓸쓸함.
♣ 사고무친[四顧無親]사방을 돌아보아도 친한 이가 없다는 뜻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도무지 없는 외로움을 의미함.
♣ 사고전서[四庫全書]총서의 이름. 청(淸) 나라 건륭(乾隆)에 수집(蒐集)된 일대 총서로 약 16만 8천여 책인데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의 네 가지로 나누어 사고(四庫)에 수장(收藏)하였다.
♣ 사공[謝公]사공은 남조(南朝) 송(宋)나라 양하(陽夏)사람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영가 태수(永嘉太守)로 있으면서 산수를 유람하길 좋아하여 각처를 다니며 산수시를 많이 지었다.
♣ 사공[司空]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로서 신라 때에 사공을 지낸 이한(李翰)을 말함.
♣ 사공[社公]토지(土地)의 신(神)을 가리킨다.
♣ 사공극[謝公屐]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 사영운(謝靈運)이 산에 올라 노닐기를 좋아하여 항상 나막신을 신고 등산을 하였는데, 산에 오를 적에는 나막신 앞굽을 빼고, 내려올 적에는 뒤쪽 굽을 뺀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書 卷六十七》
♣ 사공대[謝公臺]진(晉) 나라 때의 시인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살던 곳으로, 강소(江蘇) 강녕현(江寧縣) 북쪽에 있는 사공돈(謝公墩)이란 산 이름을 말한 듯하다. 곧 시인 묵객이 살고 있는 산을 말한다.
♣ 사공도[司空圖]사공도는 시의 품격을 24종으로 나누어 논한 이십사품(二十四品)을 지은 당 나라 때 인물.
♣ 사공돈[謝公墩]이백(李白)의 시 ‘등금릉야성서북사안돈(登金陵冶城西北謝安墩)’, 자주(自注)에 “이 돈대는 바로 진(晉)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과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가 함께 올라가 초연히 고세(高世)의 뜻을 품었던 곳이다. 그래서 내가 장차 이곳에 동산을 꾸밀 생각을 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20》 사공돈은 사안돈(謝安墩) 혹은 사부돈(謝傅墩)으로 쓰이기도 한다.
♣ 사공등해교[謝公登海嶠]사공(謝公)은 명산(名山)의 유람을 즐겼던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키고, 해교(海嶠)는 사영운이 등정했던 임해군(臨海郡)의 산 정상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엄자릉(嚴子陵)은 동려의 시내에서 낚시를 했고, 사영운은 임해의 산 정상에 올랐어라.[嚴光桐廬溪 謝客臨海嶠]”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23 翰林讀書言懷 呈集賢諸學士》
♣ 사공유흥유쌍극[謝公遺興唯雙屐]동진(東晋) 사령운(謝靈雲)이 등산하기를 좋아하여 산에 오를 적에는 나무신의 뒷굽[後齒]를 떼고 내릴 적엔 앞굽을 떼었다.
♣ 사공중곡[射空中鵠]허공에 대고 쏘았는데 과녁에 적중한다는 뜻으로, 무턱대고 한 일에 성공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 사공증영중서계[謝公曾詠中書階]사공은 남제(南齊)의 문장가 사조(謝朓)를 가리킨다. 그의 자는 현휘(玄暉)로 특히 오언시(五言詩)에 능하였는데, 일찍이 중서성(中書省) 당직이 되었을 때 작약시(芍藥詩)를 읊었다.
♣ 사공지[謝公池]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령운(謝靈運)이 그의 종제(從弟) 혜련(惠連)을 높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시를 지을 때마다 혜련을 대하기만 하면 아름다운 싯구가 나온다.” 하였는데, 일찍이 영가(永嘉)의 못가에서 시를 지을 때 하루종일 시상이 떠오르지 않다가 갑자기 꿈속에서 혜련을 보고난 뒤에 “못가에는 봄풀이 돋아나고요. 동산 버들 우는 새 재주부리네[池塘生春草 園柳變鳴禽].”라는 명구(名句)를 지었다고 한다. 《南史 卷十九 謝惠連傳》
♣ 사공편[謝公篇]동진(東晉)의 명상(名相) 사안(謝安)이다. 풍류 재상으로 시(詩)에도 능했다.
♣ 사공한사[司空閑事]당(唐) 나라 유우석(劉禹錫)이 화주 자사(和州刺史)에서 면직되어 서울로 돌아왔을 때, 사공(司空) 이신(李紳)이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어주었는데, 유우석이 가기(歌妓)에게 마음이 끌려 “궁중 미녀처럼 곱게 꾸민 머리 모습, 봄바람처럼 두위랑 한 곡조 들려주네. 사공께선 실컷 즐겨 들어서 시들하겠지만, 강남 땅 자사는 애간장이 끊어지오.[髾髮梳頭宮樣妝 春風一曲杜韋娘 司空見慣渾閑事 斷盡江南刺史腸]”라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부르자, 이 사공이 그 가기를 그에게 내주었던 고사가 있다. 《本事詩 情感》
♣ 사공행악지[謝公行樂地]남조(南朝) 남제(南齊)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宣城)의 태수로 있으면서 산수 풍경을 읊으며 즐겼다는 데서 경치 좋은 지방을 가리킨다.
♣ 사공휴기[謝公携妓]동진(東晉) 때 명신(名臣) 사안(謝安)의 고사. 그는 벼슬하지 않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할 적에 항상 기생을 끌고 산에 올라 노닐었다.
♣ 사공휴취환[謝公攜翠鬟]사공은 진(晉) 나라 때의 재상 사안(謝安). 풍류를 좋아하던 사안은 기생을 데리고 동산(東山)에 은둔하고는 나라에서 불러도 가지 않으니, 고영조(高靈祖)는 말하기를 “사안이 나오지 않으니 백성을 어떻게 한단말인가.” 하였다. 그 후 사안은 다시 세상에 나와 많은 공을 세우고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晉書 謝安傳》
♣ 사관방[謝關防]관문 방어의 뜻. 마음대로 돌아다녀 구애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 사광[師曠]사광은 춘추(春秋)시대 진(晉)의 태사(太師)로 오음(五音)ㆍ육률(六律)을 다루는 데 있어 남보다 월등한 청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함. 《孟子 離婁上》
♣ 사광[思曠]진(晉) 나라 완유(阮裕)의 자이다. 성품이 호방하고 덕행으로 이름난 사람으로, 한때 대장군 왕돈(王敦)의 주부(主簿)가 되어 그의 각별한 대우를 받았으나 그가 반역할 마음을 품은 것을 알고는 온종일 술에 취해 직무를 보지 않자, 왕돈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 하여 율양령(溧陽令)으로 내쫓았다가 다시 파면시켰는데, 이로 인해 왕돈의 재난을 모면하였다. 그 뒤에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대부분 은거하고 나가지 않았다. 《晉書 卷四十九 阮裕傳》
♣ 사광무옥[思光無屋]사광은 남제(南齊) 때의 장융(張融)을 이름. 사광은 그의 자. 장융은 매우 가난하여 거주할 집도 없었으므로, 조그마한 배를 끌어다 놓고 안상(岸上)에 거주했다고 한다. 《南齊書 卷四十一》
♣ 사괴[絲蒯]사마(絲麻)와 관괴(菅蒯)
♣ 사구유[沙丘囿]주왕(紂王)이 사구(沙丘)에다 꾸며둔 유원지. 주왕이 사구에다 원(苑)을 크게 꾸미고 누대를 세워 주지육림(酒池肉林)을 하여두고는 밤이면 남녀가 모여 옷을 벗고 나체로 서로 즐기게 했던 곳. 《史記 殷本紀》
♣ 사국[射鞫]병기(兵器) 혹은 탄핵으로 해석됨.
♣ 사국[史局]사국은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를 말하는데 사기(史記)를 ‘용문사(龍門史)’라 부르기도 한다.
♣ 사군[使君]한(漢)나라 때에는 태수(太守)를 부군(府君)이라 칭하고 자사(刺史)를 사군(使君)이라 칭하였으며, 또 사명(使命)을 받든 관원도 사군이라 칭하였음.
♣ 사군비석[使君飛舃]후한 때 왕교(王喬)가 섭현령(葉縣令)으로 있으면서 거기(車騎)도 없이 머나먼 도성을 자주 왕래하므로, 임금이 그 연유를 알아보게 한 결과, 그가 올 때 쯤에 물오리 두 마리가 날아오므로 이를 그물로 잡아놓고 보니 신 한 짝만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사군승사[使君乘槎]사군은 수령의 별칭이고, 뗏목을 탄다는 것은 중국의 전설에 해변에 사는 어떤 사람이 뗏목을 타고 하수(河水)의 근원까지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 사군이충[事君以忠]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써 한다는 뜻으로, 신라(新羅) 때에 화랑(花郞)의 다섯 가지 계율(戒律)인 세속오계 (世俗五戒)중의 하나.
♣ 사군자[四君子]네 군자라는 뜻으로, 군자의 고결함과 비유될 수 있는 네 식물, 곧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이름. 혹은 묵화(墨畵)에서 네 나무를 그린 그림을 이르기도 함
♣ 사군자[士君子]학문과 덕행이 높은 사람. 신사(紳士)
♣ 사궁[四窮]네 가지 삶의 궁한 경지.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 노인. 환과고독(鰥寡孤獨)
♣ 사궁부[賜弓鈇]왕으로부터 생살권(生殺權)을 부여받는 일. 전하여 일군(一軍)의 대장(大將)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왕제에 제후(諸侯)는 궁시(弓矢)를 받아야만 정벌할 수 있고 부월(鈇鉞)을 받아야만 죽일 수 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사궁지수[四窮之首]홀아비. 사궁 중에서 제일 앞서는 환(鰥)을 말한다.
♣ 사극[謝屐]앞쪽과 뒤쪽에 굽을 단 나막신을 말한다. 사씨는 남송(南宋) 때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사영운이 산을 유람하면서 산을 오를 때에는 나막신의 앞굽을 빼고 오르고,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빼고 내려왔다고 한다. 《南史 卷19 謝靈運傳》
♣ 사극[四極]하늘의 사방. 고대 중국인들은 하늘 사방 끝에 하늘을 떠받치는 4개의 기둥인 ‘天柱’가 있다고 생각했다.
♣ 사근교원[舍近交遠]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곳과 사귄다는 뜻으로, 가까운 친척은 버리고 소원(疏遠)한 사람과 사귄다는 의미.
♣ 사근취원[捨近取遠]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을 취함.
♣ 사금투계장[賜錦鬪鷄場]당나라 시대에는 민중들 사이에 닭싸움시키는 것이 성행하였는데, 현종 때에는 그것을 궁중에까지 들여다가 황족과 외척들에게 닭싸움을 시키고 그것을 구경하다가 이긴 편에는 비단을 몇 백 필씩 상으로 하사하였다.
♣ 사급계생[事急計生]일이 다급하면 계책이 생긴다는 뜻으로, 일이 급박(急迫)하면 좋은 계책(計策)이 생겨난다는 의미.
♣ 사기[謝妓]동진(東晉) 사람 사안(謝安)으로 그가 기생을 데리고 동산(東山)에 살면서 나라에서 불러도 응하지 않으니, 고영조(高靈祖)가 “안석(安石)이 나오지 않으니 창생(蒼生)을 누가 건질꼬.”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史要聚選 相國 謝安》
♣ 사기[私忌]사가(私家)의 기일(忌日)이란 뜻이다.
♣ 사기[四氣]춘하추동 사시의 온(溫)ㆍ열(熱)ㆍ냉(冷)ㆍ한(寒)의 네 기후를 말한다.
♣ 사기상[四起賞]조선시대 중국에 파견되었던 사행(使行)에 대하여 중국 조정에서 내려주던 답례품이다. 조선이 네 번에 걸쳐 중국에 정기적으로 파송하던 성절사(聖節使), 연공사(年貢使), 동지사(冬至使), 정조사(正朝使)는 모두 방물(方物)을 가져가 바치게 되고 이에 대한 의례적인 상사(賞賜)가 있었는데 이를 사기상이라 한다.
♣ 사기절매[思幾折梅]남조 송(宋) 육개(陸凱)가 강남의 매화를 꺾어 장안에 있는 벗 범엽(范曄)에게 역로(驛路)로 부치면서 그리운 정을 표한 고사가 있다. 《太平御覽 卷970》
♣ 사기충천[士氣衝天]군사들의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음
♣ 사기포서[使驥捕鼠]천리마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한다는 뜻으로, 사람을 쓸 줄 몰라 유능한 사람을 말직(末職)에 임명함을 비유하는 말.
♣ 사나쌍수[沙羅雙樹]학수(鶴樹)라고도 한다.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장소에 서 있었던 나무 이름으로, 사찰 경내에 있는 거목을 가리킨다.
♣ 사난[四難]사미 이난(四美二難)의 준말로, 사미는 즉 양신(良辰)ㆍ미경(美景)ㆍ상심(賞心)ㆍ낙사(樂事)이고, 이난은 두 가지 갖추기 어려운 것으로, 즉 현주(賢主)와 가빈(嘉賓)을 말한다.
♣ 사낭[絲囊]승로사랑(承露絲囊)의 준말로, 명절 선물을 가리킨다.
♣ 사녀영서[謝女詠絮]진(晉) 나라 왕응지(王凝之)의 아내 사도온(謝道蘊)이 총명하여 재주가 있었는데, 그가 어릴 때 숙부 사안(謝安)이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분분한 하얀눈이 그 무엇과 흡사한고[紛紛白雪何所似]”하자, 형의 아들 낭(朗)이 말하기를 “공중에다 소금 뿌림 그런 대로 비슷하네[撒鹽空中差可擬]”하니, 도온이 말하기를 “버들개지 바람 따라 일어남과 안 같은가[未若柳絮因風起]”하였다 한다. 《世說新語 言語》
♣ 사년서새재병진[四年西塞再兵塵]인조(仁祖) 2년의 이괄(李适)의 난과 인조 5년의 정묘호란을 가리킨다.
♣ 사노[沙老]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킨다.
♣ 사농[司農]동한(東漢) 개봉(開封) 사람으로 춘추ㆍ주역ㆍ시경에 정통하였으며 대사농(大司農)을 지냈던 정중(鄭衆)을 말한다.
♣ 사농[司農]한(漢) 나라 때 9경(卿)의 하나로 농정을 맡은 벼슬인데, 우리나라의 호조(戶曹)의이다.
♣ 사농공상[士農工商]선비와 농민, 장인, 상인의 뜻으로, 과거 계급제 사회의 신분 계급의 순서처럼 여겨지던 바로잡아야 할 중 세 관념.
♣ 사단[四端]네 실마리라는 뜻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내재된 네 가지 도덕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덕적 실마리를 의미함.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 사단[四端]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단서가 되는 네 가지 마음씨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가리킨다. 《孟子 公孫丑》
♣ 사단취장[舍短取長]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한다는 뜻으로,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을 취한다는 의미.
♣ 사단칠정[四端七情]사단은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 칠정은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
♣ 사달이이의[辭達而已矣]말이 통달할 뿐이라는 뜻으로, 말은 그 뜻이 남에게 전달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말의 정교함[辭巧]보다는 의미의 전달[辭達]에 역점을 둔 공자의 입장.
♣ 사당[沙棠]곤륜산에 있는 나무 이름인데 신선의 배를 만드는 재목. 이백(李白)의 시에 “목란지사당주[木蘭之沙棠舟]”란 귀절이 있음.
♣ 사당[謝塘]사영운(謝靈運)의 지당(池塘)으로,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흔히 쓰인다. 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의 시인인 사영운이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사영운이 시를 짓다가 막혔는데, 꿈속에서 사혜련을 보고 ‘연못에는 봄풀이 새로 돋았네.[池塘生春草]’란 시구를 얻었다고 한다.
♣ 사당양자[祠堂養子]사당의 양자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대를 잇게 하는 일의 의미. 백골양자(白骨養子)
♣ 사대[四大]사대는 모든 육신을 이루고 있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말하는데, 불교에서는 이 사대가 화합하는 것은 모두 망상(妄相)으로서 이것을 분리하여야 진여(眞如)의 경지인 공적(空寂)에 돌아간다 한다.
♣ 사대가합[四大假合]불가(佛家)에서는 우리 몸이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4대 요소가 결합된 것이라고 하다. 《法華經 譬喩品》
♣ 사대부[士大夫]사와 대부라는 뜻으로, 관직이 있는 사람이나 군대의 장교 등을 의미하거나 우리나라에서는 글 읽는 선비[士]와 벼슬하는 관리[大夫] 등의 개념으로 문벌(門閥)이 높은 집안의 사람인 사족(士族)의 의미로 사용됨.
♣ 사대주의[事大主義]큰 것을 섬기는 주의라는 뜻으로, 일정한 주견도 없이 세력이 큰 쪽을 붙좇아 섬기면서 자기의 안전을 꾀하려고 하는 주의. 사대사상(事大思想), 사대당(事大黨)
♣ 사덕[四德]옛날에 부녀자가 갖추어야 할 규범으로 꼽혔던 부덕(婦德), 부언(婦言), 부용(婦容), 부공(婦功)을 말한다. 《周禮 天官 九嬪》
♣ 사도[師道]진사도는 송(宋) 나라 때의 시인인데, 특히 청빈(淸貧)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 사도사[司稻士]주례(周禮) 지관(地官)에 속한 도인(稻人)을 이름이다. 도인은 전지(田地)를 다스리고 벼 심는 일을 관장하였다.
♣ 사도소팽[司徒所烹]사도 채모(蔡謨)가 강남(江南)에 이르러 팽기(彭蜞)를 게[蟹]로 오인하고 크게 기뻐하여 삶아 먹었다가 구토(嘔吐)가 극심하여 혼이 났다. 그 뒤에 사상(謝尙)이 이 사실을 듣고 “그대가 이아(爾雅)를 잘못 읽었다가 하마터면 지레 죽을 뻔했다.”고 조롱했다. 《晉書 卷七十七》
♣ 사도운[謝道韞]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의 질녀(姪女)로서 뛰어난 여류 문인(女流文人)이었다.
♣ 사독[四瀆]중국에 있는 네 개의 큰 강. 즉 양자강(揚子江)ㆍ황하강(黃河江)ㆍ회수(淮水)ㆍ제수(濟水)를 말한다. 이 강들은 모든 냇물을 받아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이들이 곧 제후왕에 비유된다.
♣ 사독사[射毒沙]역(꞉)이 물가에서 독한 모래를 입에 물고 사람을 쏘는데, 맞으면 부스럼이 나고 병이 난다 한다. 이것은 남을 음해(陰害)ㆍ중상(中傷)하는 데 비유한 것이다.
♣ 사돈[謝墩]사공돈(謝公墩)의 준말로,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항상 노닐었던 돈대(墩臺)를 말한다.
♣ 사돈[査頓]혼인한 두 집의 부모끼리, 또는 그 두 집의 같은 항렬되는 친족끼리 서로 부르는 말.
♣ 사돈팔촌[査頓八寸]사돈의 팔촌이라는 뜻으로, 소원(疎遠)한 친척으로 남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우리나라 속담.
♣ 사두[射斗]기운이 솟구쳐서 하늘에 뻗치는 것을 말한다. 두우는 두수(斗宿)와 우수(牛宿), 즉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이다.
♣ 사두[槎頭]사두축경편(槎頭縮頸鯿)의 준말로, 사두편(槎頭鯿)이라고도 하는 물고기 이름이다. 등이 활처럼 휘고 청색을 띠고 있으며 회맛이 특히 좋다고 하는데, 당(唐)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현담작(峴潭作)’과 두보(杜甫)의 ‘해민(解悶)’이라는 시에서 소개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 사두검기[射斗劍氣]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오(吳) 나라가 멸망당하기 전에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라색 기운이 감돌았으므로 뇌환(雷煥)을 불러 바로보게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보검의 정기가 위로 하늘에 통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하였음.
♣ 사두잔전[沙頭殘篆]옛날에 조적전(鳥跡篆)이란 자체(字體)가 있었는데, 그것은 모래 위에 찍힌 새의 발자취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 사두축항편[楂頭縮項鯿]사두(楂頭)는 낚시를 하기 위하여 물고기가 있는 곳의 물길을 배로 막아 놓은 곳을 말한다. 축항편(縮項鯿)은 머리가 편평(扁平)하고 목이 오그라든 형상의 물고기로 방어(魴魚) 종류이다. 두보(杜甫)의 시 해민(解悶)에 “다시 생각나누나 양양 맹호연, 맑은 시 구구절절 영원히 전해지리. 지금 노인들 새로운 시어(詩語) 하나 없이, 그냥 사두에서 축항편만 낚누나.[復憶襄陽孟浩然 淸詩句句盡堪傳 卽今耆舊無新語 漫釣楂頭縮項鯿]”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맹호연(孟浩然)이 지은 현담작(峴潭作)의 “대 낚시 드리워 시험삼아 낚아 보니, 정말 사두의 축항편이 올라오네.[試垂竹竿釣 果得楂頭鯿]”라는 시구를 참작한 것이다.
♣ 사라[絲蘿]새삼. 매꽃과의 일년초로 나무에 붙어사는 기생 식물이다.
♣ 사라[絲蘿]토사(ꟙ絲)와 송라(松蘿)를 말하는데, 고시(古詩)에 “그대와 새로 혼인을 했으니, 토사가 송라에 부침이로다.[與君爲新婚 ꟙ絲附松蘿]" 한 데서, 혼인의 뜻으로 쓰인다.
♣ 사라밀장[沙羅密藏]원래 석가모니불이 사라수(沙羅樹) 숲에서 열반에 들 때의 오묘한 말씀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부처님의 위력을 말한다.
♣ 사라천[紗羅川]곡산(谷山)에 있는 내 이름.
♣ 사랑[四郞]사선(四仙). 신라(新羅) 때의 네 사람의 국선(國仙)으로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詳)ㆍ남석행(南石行)을 말한다.
♣ 사력[社櫟]역사수(櫟社樹). 즉 지신(地神)의 신주로 삼아 제사지내던 상수리나무를 가리킨다. 옛날 어떤 목수가 제(齊) 나라로 가다가 곡원(曲轅)이란 곳에 이르러 그곳 사당 앞에 서있는 상수리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의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리울 만하고 둘레를 재어보니 백 아름이나 되었지만, 그 목수는 그 나무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 하여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사력[社櫟]재목으로는 아무 쓸모없는 상수리나무[櫟]가 사당[社] 안에 빌붙어 살면서 잘도 장수를 누린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소개되어 있다.
♣ 사령[四靈]인(麟)ㆍ봉(鳳)ㆍ귀(龜)ㆍ용(龍)을 말하는데, 사령이 나타나는 것은 곧 제왕(帝王)이 출현할 상서라고 한다.
♣ 사령운[謝靈運]남북조 시대 남송(南宋)의 시인. 별명 사강락(謝康樂).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치적(治積)을 쌓지 못하자 그의 글재주를 아끼는 문제(文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 이후 막대한 유산으로 연일 수백 명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산야(山野)에서 호유(豪遊)하다가 반역죄에 몰려 처형됨. 서정(抒情)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문화 사상에 산수시(山水詩)의 길을 열어 놓음에 따라 ‘산수 시인’이라 불리기도 함. 산수시, 산거적(山居賊) 등의 시집을 남김.
♣ 사례[司禮]사례는 명 나라 때 궁중의 예의를 관장하던 직책인 사례감을 말한다. 사례감 위충현(魏忠賢)이 희종(熹宗)의 유모인 객씨(客氏)와 더불어서 손을 잡고는 어진 선비들을 동림당(東林黨)으로 몰아 몰살시키는 등 온갖 전횡을 하다가 의종(毅宗)이 즉위한 뒤에 그 죄가 드러나서 복주(伏誅)되었다. 《明史 卷三百五 魏忠賢列傳》
♣ 사로[四老]귤을 가리킨다. 파공인(巴邛人)의 귤밭이 있었는데, 서리가 내린 뒤 귤을 따서 저장하였다. 그 중에 크기가 서말들이 그릇만한 큰 귤이 있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어 쪼개보니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살결이 붉은 두 노인이 서로 장기를 두며 담소하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말하기를 “귤 속의 즐거움이 상산 사호(商山四皓)에 못지 않으나, 다만 깊은 뿌리와 단단한 꼭지가 못 되었기로 어리석은 사람의 손으로 따게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하였다. 《書言故事》
♣ 사로[斯盧]경주(慶州)의 고호이다.
♣ 사로[師魯]사로는 송(宋) 나라 때의 유학자인 윤수(尹洙)의 자인데, 그는 일찍이 범중엄(范仲淹)이 참소에 의해 폄척되었을 적에 급히 상주(上奏)하여, 자신도 범중엄의 당(黨)이니 함께 처벌을 받겠다고 직언을 하였다. 그는 특히 주로 군직(軍職)에 종사하면서 변방의 군비(軍備)에 심혈을 기울였다. 《宋史 卷二百九十五》
♣ 사로[四老]진(秦)의 학정을 피해 산 속에 숨어 산 동원공(東園公)ㆍ녹리 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의 네 사람의 현로(賢老). 상산(商山)의 사호(四晧)라고도 한다. 《史記 卷五十五 留侯世家》
♣ 사록[沙麓]사록은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산명임. 노 희공(魯僖公) 14년에 이 산이 무너지자, 진 나라 사관(史官)이 점을 쳐보고는 “후세에 성녀(聖女)가 이 땅에서 날 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뒤에 한 원제(漢元帝)의 왕후가 여기에서 탄생하였으므로, 전하여 왕후의 탄생을 말한다.
♣ 사록[沙鹿]사록은 하북(河北) 대명현(大名縣)에 있는 춘추 시대 진(晉) 나라 토산(土山)인데 재앙의 조짐을 말함. 《春秋左傳》 僖公 十四年에 “가을 8월 신묘에 사록이 무너졌다. 진 나라 복자(卜者) 언(偃)이 말하기를 ‘1년 후에 장차 큰 재앙이 일어나 나라가 망할 것이다.[秋八月辛卯 沙鹿崩 晉卜偃曰 斯年將有大咎 幾國亡]" 하였음.
♣ 사록[祠祿]송(宋) 나라 제도에, 대신이 파직될 경우 도교(道敎)의 궁관(宮觀)을 관리하도록 하여 특별한 직무가 없이 녹을 지급함으로써 우대하는 뜻을 보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특별히 맡은 일이 없이 예우로 받는 녹을 말한다.
♣ 사록[沙麓]전설상의 산 이름인데, 성녀(聖女)가 태어날 조짐을 미리 보임을 뜻한다. 한서(漢書) 원후전(元后傳)에 “80년 후에 사록 땅에서 귀녀(貴女)가 태어나 천하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 사록경[沙麓慶]사록(沙麓)은 산 이름인데 그 산이 무너졌는데, 후일에 그 땅에서 성녀(聖女)가 탄생하리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 그 후에 한나라의 원제(元帝)의 황후인 왕황후(王皇后)가 그 땅에서 낳다.
♣ 사롱[紗籠]먼지가 덮히지 않도록 현판에 씌워놓은 사포(紗布)를 말한다. 귀인과 명사가 지어 벽에 걸어 놓은 시문을 청사(靑紗)로 덮어 장식해서 오래도록 보존하며 존경의 뜻을 표했던 ‘벽사롱(碧紗籠)’의 고사가 있다.
♣ 사롱수불[紗籠袖拂]송(宋) 나라 때 위야(魏野)가 일찍이 구준(寇準)과 함께 어느 승사(僧寺)에 가 놀면서 각각 시(詩)를 지어 유제(留題)하였는데, 뒤에 다시 구준과 함께 그 절에 가보니, 구준의 시는 푸른 깁으로 싸 놓았고, 위야의 시는 싸지 않아 먼지가 가득 끼었으므로, 수행한 관기(官妓)가 소매로 그 먼지를 떨었다. 그러자 위야가 다시 시를 지어 쓰기를, “다만 그때마다 미인 소매로 떨 수만 있다면, 응당 푸른 깁으로 싼 것보다 나으리라.[但得時將紅袖拂 也應勝似碧紗籠]" 한 데서 온 말이다.
♣ 사롱유구재[紗籠有舊裁]지방관(地方官)으로 내려간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 나라 때 왕파(王播)가 젊어서 빈궁(貧窮)하여 양주(揚州)의 혜소사(惠昭寺)에 기식(寄食)을 하고 있자 중이 그를 무척 싫어하므로, 시 한 수를 남기고 그 절을 떠났다가 뒤에 그 지방의 장관(長官)이 되어 그 절을 찾아가 보니, 옛날 자기가 써 놓고 갔던 시를 사롱(紗籠)에 잘 보관해 놓았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사롱정호[紗籠正護]장래 재상이 될 것을 뜻함. 사롱(紗籠)은 깁을 바른 농인데, 당(唐) 나라 때 재상 이번(李藩)이 아직 벼슬하기 이전에 어떤 중이 그에게 말하기를 “공(公)은 바로 사롱 가운데 있는 사람[紗籠中人]이다.”고 하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중이 대답하기를 “재상이 될 사람은 저승에서 반드시 그의 상(像)을 세워서 사롱으로 그것을 보호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사롱호구시[紗籠護舊詩]당 나라 왕파(王播)가 일찍이 빈천하여 절에 가서 기식(寄食)하고 있었을 때 중들이 이를 미워하여 식사 종을 식사 후에 울리므로, 왕파가 그 뜻으로 시를 지어 그 절에 남겨 두었었는데, 그 후에 파가 귀히 되어 그곳을 다시 찾으니, 그 시가 모두 비단에 싸여있었다는 고사. 《尙友錄》
♣ 사롱호상인[紗籠護像人]재상(宰相)의 위치에 오를 사람을 말한다. 재상이 될 사람은 명사(冥司)에서 반드시 그의 상(像)을 세우고 사롱으로 이를 보호한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사룡[士龍]사룡은 진(晉) 나라 문인 육운(陸雲)의 자. 그는 시문에 능하여 형인 육기(陸機)와 이륙(二陸)으로 병칭되는데 순은(荀隱)을 만났을 때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운간 육사룡(雲間陸士龍)’이라고 한 적이 있다.
♣ 사룡[射龍]이 태조의 조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이 백룡(白龍)과 흑룡(黑龍)이 싸울 때에 흑룡을 활로 쏘아 죽였으므로, 그곳의 연못을 사룡연(射龍淵)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燃藜室記述 卷1 太祖朝故事本末》
♣ 사루[謝樓]남조 제(齊)의 시인 사조(謝朓)가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부임해서 높은 누대(樓臺)를 짓고 앞 산의 경치를 감상하였으므로, 후대에 이 누대를 사공루(謝公樓), 사루(謝樓) 혹은 북루(北樓)라고 일컬었는데, 일반적으로 시흥이 도도하게 우러나는 정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백(李白)의 시에 “집은 청산에 가까우니 사조와 같고, 문 앞에 드리운 푸른 버들 흡사 도잠일세.[宅近靑山同謝脁 門垂碧柳似陶潛]”라는 표현이 있다. 《李太白集 卷24 題東溪公幽居》
♣ 사륙[四六]변문(騈文) 또는 변체(騈軆)라고도 함. 글귀마다 4자 또는 6자로 문장을 이루는 것으로, 안짝과 바깥짝이 서로 대(對)가 되고 또 평측(平仄)으로 그 성운(聲韻)을 고르는 문체. 이 문체는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처음 성립되고, 당(唐)의 말기에 와서 사륙(四六)이란 이름이 붙여짐.
♣ 사륙[四六]사륙문(四六文)을 말함. 육조(六朝)와 당(唐) 나라에서 유행하던 문체인데, 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여 대구법(對句法)을 쓰며, 압운(押韻)이 많은 변려문(騈儷文)임.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함. 《類選 卷十下 詩文篇 論文門》
♣ 사륜[絲綸]사륜은 임금의 조서(詔書)를 뜻하는 말로, 예기(禮記) 치의(緇衣)의 “왕의 말은 처음엔 실오라기 같다가도 일단 나오면 굵은 명주실처럼 되고, 왕의 말은 처음엔 굵은 명주실 같다가도 일단 나오면 밧줄과 같이 된다.[王言如絲 其出如綸 王言如綸 其出如綍]”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사리[闍梨]범어(梵語)로 아사리(阿闍梨)의 약칭인데, 불자(佛子)들의 사범이 되는 큰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
♣ 사리[賜履]군주가 하사하는 봉지(封地)로, 여기서는 방백(方伯)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 사리부재[詞俚不載]속된 거리의 노래는 책에 싣지 않는 것.
♣ 사리사복[私利私腹]사사로운 이익으로 배를 채움.
♣ 사리사욕[私利私慾]사사로운 이익과 사사로운 욕심이라는 뜻으로, 공리(公利)를 버리고 자기 일신의 이익을 탐하는 행위의 의미.
♣ 사리자[舍利子]부처의 제자 가운데 지혜(智慧) 제일(第一)인 사리불(舍利佛)을 말하는데, 맨 처음에는 외도(外道)인 사연(沙然)을 스승으로 섬기다가, 뒤에 석존(釋尊)에게 귀의하자 석가(釋迦)의 교단 가운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 사림[詞林]문인들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사림기사(詞林紀事) 따위를 가리킨다.
♣ 사립고주[蓑笠孤舟]“외로운 배의 도롱이 갓 쓴 늙은 이 홀로 찬 강 눈에 낚시질하네[孤舟簑笠翁 獨釣寒江雪].”라는 시가 있다.
♣ 사마[駟馬]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
♣ 사마[絲麻]사마는 명주와 삼베 등 귀중한 것을 뜻한다.
♣ 사마[司馬]한 나라의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사부가(詞賦家)로 항상 소갈병을 앓았는데, 아름다운 문장으로 무제의 총애를 받아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 사마[司馬]한나라의 사마천(司馬遷)은 그가 지은 사기(史記)로 하여 천고의 대문장이라고 지목했다.
♣ 사마가사벽[司馬家四壁]집이 너무 가난하여 아무 것도 없음. 탁문군(卓文君)이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반하여 도망 나와 상여에게로 가자 상여는 그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달려 왔는데, 문군이 보기에 상여의 집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벽이 사방에 막혀 있을 뿐이었다. 《史記 司馬相如傳》
♣ 사마관괴[絲麻菅蒯]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9년에 “사마가 있다 하더라도, 관괴를 버리지 말 일이라.[雖有絲麻 無棄菅蒯]”는 시가 인용되어 있다.
♣ 사마군실[司馬君實]군실은 사마광(司馬光)와 자(字).
♣ 사마난추[駟馬難追]한번 입밖에 낸 말은 사마로 쫓아도 붙들지 못함[駟馬不能追]. 곧, 말을 조심하라는 비유
♣ 사마능운부[司馬凌雲賦]한 나라 무제(武帝)가 신선(神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마상여가 대인부(大人賦)를 지어 올리자, 무제가 보고는 몹시 기뻐 마치 자신이 직접 표표히 구름을 뚫고 솟아올라서 천지 사이를 유람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 사마독[司馬督]북제(北齊) 때 좌복야(佐僕射) 양음(楊愔)이 번손(樊遜)을 부좌(府佐)로 삼자, 번손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문족(門族)이 한미하고 비속하니 원외사마독(員外司馬督)에 보임해주기 바란다.”고 하니, 양음이 말하기를 “재주가 높은 사람에겐 상례(常例)를 따르지 않는다.” 하고, 상께 아뢰어 그를 부좌로 등용했던 데서 온 말이다. 《北齊書 卷四十五》
♣ 사마문성봉선기[司馬文成封禪起]한 무제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죽기 전에 책 한 권을 남기면서 황제의 사자(使者)가 와서 찾거든 주라고 하였는데, 그 책이 바로 봉선서(封禪書)였다고 한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장경(長卿)은 그의 자(字)이다.
♣ 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司馬昭).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의 권신(權臣). 자(字)는 자상(子上), 위(魏)의 대장군(大將軍)ㆍ대도독(大都督). 260년에 위나라의 황제 모(髦)를 멸망시키고 원제(元帝)를 앙립(仰立)하였으며 촉한(蜀漢)을 멸망시켜 진왕(晉王)에 봉립되었다. 위실(魏室) 탈위의 야심이 있었으나, 265년에 사망. 그의 아들 염(炎)이 원제의 선양(禪讓)을 받아 진국(晉國)을 세웠다.
♣ 사마사[司馬師]사마의(司馬懿)의 장자. 자(字)는 자원(子元). 경제(景帝)라는 시호를 받았다. 젊었을때는 하후현(夏侯玄), 하안(何晏) 등의 청담가(淸淡家)와 이름을 같이하고 특히 하안으로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역에 즈음하여 그는 은밀히 계략을 꾸며, 25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魏)의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 국내에서는 반사마씨운동(反司馬氏運動)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오(吳)의 제갈격(諸葛挌)과 싸워 승리하였다. 안질(眼疾)을 앓아 급사하였다.
♣ 사마상객유[司馬嘗客遊]사마천은 20세 때 강호(江湖)를 주유(周遊)하였고, 공자는 늘 타국에 손[客]으로 돌아다녔다.
♣ 사마수[司馬瘦]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인데, 성도(成都) 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한 무제(漢武帝)에게 부(賦)를 지어 바쳐 벼슬을 받을 정도로 글에 능하였는데, 항상 소갈병으로 고생하였다. 《史記 卷 117 司馬相如傳》
♣ 사마씨[司馬氏]진(晉) 나라의 왕족.
♣ 사마안거[駟馬安車]사마 안거는 네 필의 말이 끄는 편안한 수레로, 상고 때 임금이 초야에 있는 현인을 초빙할 때 예우를 극진히 하는 뜻에서 사용했던 것인데, 곧 임금의 정중한 초빙을 뜻한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송(宋) 나라 유학자. 이름은 광(光), 자는 군실(君實), 호는 속수선생(涑水先生)이라고 함. 죽은 뒤에 온국공(溫國公)에 추증(追贈)되었으므로 온공(溫公)이라 함.
♣ 사마자미[司馬子微]자미(子微)는 사마승정(司馬承禎)의 자(字). 사마승정은 당(唐) 나라 사람으로 호는 백운(白雲)ㆍ백운자(白雲子)ㆍ중암도사(中巖道士)이고, 시호는 정일선생(貞一先生)이다. 반사정(潘師正)을 따라 벽곡도인술(辟穀導引術)을 받아 개원(開元) 중에 소명(召命)을 입고, 조명(詔命)에 의해 왕옥산(王屋山)에 단실(壇室)을 쌓음. 세 가지 서체(書體)로 노자(老子)를 베껴 구문(句文)을 간정(刊正)함.
♣ 사마주[司馬柱]진취적으로 뜻을 세워 기필코 공명(功名)을 이루어 보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처음 장안(長安)에 갈 때 촉도(蜀都)인 성도(成都)의 승선교(升仙橋)를 지나면서 그 기둥에 “대관(大官)이 되어 으리으리한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썼던 고사가 있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 사마지려[司馬知呂]사마는 사마광(司馬光), 여는 여공저(呂公著)를 이름. 사마광이 위독했을 때 여공저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내가 내 몸은 의원에게 맡기면 되고, 집안 일은 자식에게 맡기면 되지만 나라 일은 맡길 곳이 없어 걱정하다가 지금 공(公)이 맡도록 부탁하오.” 하였음. 《宋史 卷三百三十六》
♣ 사마참석[司馬鑱石]아무리 묘를 화려하게 꾸며도 후세 사람이 파헤치니 모두 소용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예기(禮記) 단궁상(檀弓上)에 “자유(子游)가 ‘부자(夫子)가 송(宋) 나라에 있을 적에 사마(司馬) 환퇴(桓魋)가 석곽(石槨)을 아름답게 조각하느라고 3년이 되도록 완성하지 못하자 부자가 「이렇게 사치하게 꾸밀 바에야 죽어서 일찍 썩는 것이 낫다.」했다.’ 하였다.” 했다.
♣ 사마천[司馬遷]전한의 역사가. 지는 자장(子長). 경칭은 태사공(太史公). 젊었을 때 전국 각처를 주유(周遊)하며 전국 시대 제후(諸侯)의 기록을 수집 정리함. 기원전 104년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曆法)의 기틀을 마련함. 아버지 사마담(史馬談)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됨. 흉노(匈奴) 토벌 중 포로가 되어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을 받음. 기원전 97년 불후의 명저사기(史記)130권을 완성함.
♣ 사막[思邈]당(唐)의 은사(隱士) 손사막(孫思邈)이다. 음양(陰陽)ㆍ의약(醫藥)에 정통하였다.
♣ 사만보대[獅蠻寶帶]사만 보대(獅蠻寶帶)는 띠쇠[鉤]에 사자(獅子)와 만왕(蠻王)을 새겨 넣은 것으로, 고위직(高位職)의 무관(武官)이 허리에 두르는 요대(腰帶)이다.
♣ 사매지갈[思梅止渴]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曹操)가 한더위에 행군하는데 모두 목이 타서 애쓰는 양을 보고 “내가 전에 이 고개를 넘을 때 저 너머에 커다란 매화나무밭이 있었는데 지금쯤 매실(梅實)이 한창 열었을 것이라.” 하자, 군사들은 그 신 매실을 입에 넣을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아 갈증을 잊었다 한다.
♣ 사맹[謝孟]사영운(謝靈運)과 맹교(孟郊)를 가리킨다.
♣ 사면초가[四面楚歌]사방에서 초(楚)나라의 노래가 들린다. 한(漢)나라 군사가 초나라 군사를 포위한 채 오랜 시간이 흘러 양쪽 진영이 다 지쳐 있을 때,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의 민요를 불러서 초나라 군사들이 심리적인 동요를 일으켰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방이 다 적에게 싸여 도움이 없이 고립됨. 더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 사면초가[四面楚歌]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린다는 뜻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의견을 반대하여 고립된 상태를 의미함. 초한(楚漢)의 싸움에서 초의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한에게 모두 투항해 초의 노래를 구슬프게 부른다고 생각한 탄식.
♣ 사면춘풍[四面春風]사방으로 봄바람이 분다. 항상 좋은 얼굴로 남을 대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사는 것을 말한다.
♣ 사면팔방[四面八方]사면과 팔방. 모든 곳.
♣ 사명[辭命]사명은 춘추 시대 제후들간에 왕래하던 외교 문서이다.
♣ 사명[司命]세상 만물의 운명을 맡은 신(神)을 말한다.
♣ 사명광객[四明狂客]당 나라 시인 하계진(賀季眞)의 자호. 늙어서 고향인 오중(吳中)으로 돌아올 때에 현종황제(玄宗皇帝)가 경호(鏡湖) 한 구비[一曲]를 하사(下賜)하였다.
♣ 사명하감[四明賀監]당(唐) 나라 하지장(賀知章)의 벼슬이 비서감(秘書監)이었다. 그가 만년에 사명산(四明山)에 은퇴하여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 자호했으며, 일찍 이백(李白)의 시를 보고 자네는 천상에서 인간으로 귀양온 신선[謫仙]이라고 격찬했었다.
♣ 사모[四牡]네 마리의 수말로, 왕명을 봉행하는 사신이 타고 가는 말을 뜻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모(四牡)에 “사모 달리고 달리니, 큰 길이 멀고 멀다.[四牡騑騑 周道倭遲]" 하였는데, 이는 멀리 가는 사신을 천자(天子)가 위로한 시이다.
♣ 사모판포[紗帽版袍]사모ㆍ판포는 조선 시대 사대부의 관복. 사모ㆍ판포란 말은 청 나라 이불(李紱)의 목당시집(穆堂詩集)에 “紗帽版袍春人貢"이라는 글귀가 보임.
♣ 사목지신[徙木之信]나무를 옮긴 것에 대한 신의라는 뜻으로, 위정자가 백성을 속이지 않는 백성에 대한 신의를 밝힌다는 의미. 진의 상앙이 법령을 제정할 때 남문에 큰 나무를 세워놓고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는 소문을 내고는 짐짓 옮기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자 사람들이 법령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고사. 《史記 商君列專》
♣ 사무두불행[蛇無頭不行]뱀이 머리가 없으면 나아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무리를 지어 횡행하는 자는 두목이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
♣ 사무사[思無邪]시경(詩經)에 있는 구절인데, 공자는 이 구절을 시경의 요지(要旨)라 하였다. 노송(魯頌) 경(駉)편에 “공자가 시경(詩經) 3백 편을 한 글귀로 포괄한다면 ‘생각에 사가 없는 것’이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하였다.
♣ 사무여한[死無餘恨]죽어도 남은 한이 없다는 뜻으로, 죽는 한이 있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을 정도로 간절한 바램이나 그 바램을 이룬 상태를 의미함.
♣ 사무외[四無畏]불교(佛敎)의 설법(說法)에 두려움 없는 네 가지[四無畏]가 있으니, 모든 보살(菩薩)들이 모든 것을 잘 기억하는 것, 모든 사람의 마음과 자질을 다 알고 있는 것, 문답(問答)을 잘하는 것, 모든 사람의 의심되는 것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다.
♣ 사무이성[事無二成]일은 두 가지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번에 두 가지 일이 모두 이루어질 수 없어 적어도 한 가지는 실패한다는 의미.
♣ 사문[斯文]공자의 말에서 나온 문구인데, 문왕(文王)이 죽은 뒤에 자신이 이어받은 이 도(道)라는 뜻이다. 후세의 선비들은 유학(儒學)을 사문(斯文)이라 한다.
♣ 사문[斯文]사문은 이 글ㆍ이 학문ㆍ이 도(道)란 의미로, 유교(儒敎)의 학문ㆍ도의ㆍ문화 또는 유학자 즉, 선비를 말함.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려 한다면 내가 사문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거니와……" 하였다.
♣ 사문난적[斯文亂賊]이 학문(유교)을 어지럽히는 적이란 말로 즉, 유교의 교리나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말함. 일종의 이단자를 가리킴. 중세 유학이념이 지배하던 사회 속에서 다른 이념을 불인정한 상태를 반영한 용어임.
♣ 사문미상[斯文未喪]공자가 광(匡) 땅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곤욕을 당하면서,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상실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광인(匡人)이 나를 어찌하랴.” 하였다. 사문은 곧 이 도(道)라는 뜻이다.
♣ 사문부산[使蚊負山]모기로 하여금 산을 지게 한다는 뜻으로, 적은 힘으로 무거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
♣ 사문유취[事文類聚]전(前)ㆍ후(後)ㆍ속(續)ㆍ별(別)ㆍ신(新)ㆍ외(外)ㆍ유(遺)집 총 2백 36권으로서 전 후ㆍ속ㆍ별집은 송 나라 축목(祝穆)의 찬이고, 신ㆍ외집은 원(元) 나라 부대용(富大用), 유집은 축연(祝淵)의 찬임. 축목이 편찬한 것은 부류(部類)를 나누어 군서(群書)의 요어(要語)ㆍ시구(詩句)ㆍ고금(古今)의 사실ㆍ고금 문집의 순으로 배열했다. 그는 사문유취(事文類聚) 서(序)에서, “因考歐陽詢徐堅所著類書 採摭事實及詩文 合而成編…”이라 하여, 당 나라 구양순의 예문유취(藝文類聚)와 서견의 초학기(初學記)의 체재를 따랐음을 밝히고 있다. 부대용과 축연의 것은 축목의 체재를 그대로 따르고 그것에 증보한 것임.
♣ 사미[沙彌]사미는 범어로 막 머리를 깎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수행중인 어린 중을 가리킨다.
♣ 사미[四美]시(詩) 모임에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아름다운 것으로, 좋은 때[양신(良辰)], 아름다운 경치[미경(美景)], 마음에 유쾌한 것[상심(賞心)], 즐거운 일[낙사(樂事)]을 사미라 한다. 《王勃 滕王閣序》
♣ 사미수잔포[賜米酬殘圃]장헌세자를 호위했던 금군(禁軍)의 말들이 민간인의 수박밭을 짓밟아 수박이 깨지고 덩굴이 뽑혔는데, 세자가 그 말을 듣고 그 피해를 후하게 보상했던 일을 말한다. 《俟菴先生年譜》
♣ 사미인[思美人]그리운 사람의 뜻. 한문학의 미인은 군주(君主)의 뜻 외에 일반적으로 현인(賢人), 군자(君子), 애인 등을 통칭하는데, 우리말의 임에 해당한다.
♣ 사민이시[使民以時]백성을 부리는 것은 때에 맞게 한다는 뜻으로, 농번기를 피하여 백성들을 사역(使役)시킨다는 의미인데, 공자가 말한 백성을 올바로 다스리는 그 첩경의 하나임.
♣ 사바세계[娑婆世界]석가가 교화하는 곳. 인간 세계.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
♣ 사반공배[事半功倍]일은 반이면서 공은 배라는 뜻으로, 적은 노력으로 많은 효과를 거둠을 이르는 말.
♣ 사발[沙鉢]우리나라에서 사기로 만든 밥그릇을 말함.
♣ 사발농사[沙鉢農事]사발에 짓는 농사라는 뜻으로, 빌어먹는 일을 이르는 우리나라 성어.
♣ 사발통문[沙鉢通文]사발처럼 쓴 통문이라는 뜻으로, 누가 주모자(主謀者)인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필두(筆頭)가 없이 관계자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삥돌려가며 적은 통문.
♣ 사방[莎房]사방은 곧 승방(僧房)을 말한다.
♣ 사방석[四方石]수도(隧道)를 석회로 축조(築造)하고 흙을 덮은 다음 그 위를 덮는 네모난 넓은 돌을 말함.
♣ 사방지[舍方知]사방지는 사천(私賤)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 모친이 그에게 여아(女兒)의 옷을 입히고 화장을 바르고 옷 짓는 것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가 자라서는 조사(朝士)의 집을 자주 드나들면서 여시(女侍)들과 많이 간통을 했었다. 사인(士人) 김구석(金九石)의 아내 이씨(李氏)는 판원사(判院事) 이순지(李純之)의 딸이었는데, 과부로 지내면서 사방지를 끌어들여 옷을 짓는다고 칭탁하고 밤낮으로 함께 거처한 지가 거의 10여 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천순(天順; 明英宗 연호) 7년 봄에 사헌부에서 그 소문을 듣고 그를 국문하다가 그와 평소에 통해왔던 한 비구니(比丘尼)를 신문하기에 이르렀는데, 비구니가 “양도(陽道 남자의 성기를 뜻함 )가 매우 장대했다.”고 하므로, 여의(女醫) 반덕(班德)에게 그것을 만져보게 한 결과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자 상(上)이 승정원 및 영순군(永順君) 이보(李溥),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조사를 하게 하였는데, 하성위의 매(妹)가 바로 이씨의 며느리가 되었었으므로, 하성위 또한 놀라 혀를 널름거리며 말하기를 “어쩌면 그리도 장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고 하였다. 그러자 상이 웃고는 특별히 더이상 추문하지 말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순지의 가문(家門)을 오멸시킬까 염려된다.” 하고, 사방지를 순지에게 알아서 처벌하도록 하니 순지가 사방지에게 장(杖) 10여 대만을 쳐서 기내(畿內)에 있는 노자(奴子)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그런데 이윽고 이씨가 몰래 사방지를 불러들여왔다. 그리하여 순지가 작고한 뒤에는 더욱 끝없이 방자하게 굴므로, 사방지를 신창현(新昌縣)으로 장배(杖配)하였다.
♣ 사방지[四方志]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옛 풍속에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 사방지문[四方之門]증성의 문이 44개나 있었다 함.
♣ 사방팔방[四方八方]네 방향 여덟 방면이라는 뜻으로, 모든 방향이나 방면을 의미함.
♣ 사배공반[事倍功半]많은 노력에도 효과가 적음.
♣ 사백[詞伯]시문을 잘 짓는 사람. 문단의 거장(巨匠)을 뜻한다.
♣ 사벌[沙伐]경상북도 상주(尙州)의 고호.
♣ 사벽[四壁]집안 네 주위의 벽. 전하여 아무 가구(家具)도 없는 가난한 집을 말한다. 한서(漢書)에 “탁문군(卓文君)이 밤에 도주하여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로 오자, 상여는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의 살림살이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사벽(四壁)만이 서 있었다.” 하였음.
♣ 사벽독립[四壁獨立]집이 가난함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집이 가난하여 집안에 값진 물건이 하나도 없고 네 벽만 서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十七 司馬相如傳》
♣ 사변요명기양신[肆辯邀名起兩臣]괴통(蒯通)이 제(齊) 나라 처사(處士)인 동곽 선생(東郭先生)과 양석군(梁石君)을 조참(曹參)에게 추천하여 기용하게 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四十五 蒯伍江息夫列傳》
♣ 사복[射覆]엎어놓은 그릇 속에다 목표물을 놓아두고 쏘아 맞추게 하는 것. 《漢書 東方朔傳》
♣ 사본치말[舍本治末]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일의 본말이 전도된 상황을 의미함.
♣ 사봉[槎峯]나무로 깎아 만든 봉우리. 곧 솔과 돌을 예술적으로 조각해 놓은 것.
♣ 사부[斜付]노비(奴婢) 등을 본디 소속한 곳에서 빼내어 다른 역(役)에 종사하게 하는 것.
♣ 사부[謝傅]동진(東晉)의 사안(謝安).
♣ 사부[射鮒]물이 매우 적음을 뜻함. 주역(周易) 정괘(井卦) 구이효(九二爻)에 “작은 우물 구멍의 물이라, 붕어에게나 부어 줄 만하다.[井谷射鮒]” 한 데서 온 말이다.
♣ 사부고[四部藁]왕세정(王世貞)의 저서. 부부(賦部)ㆍ시부(詩部)ㆍ문부(文部)ㆍ설부(說部)로 분류되었는데, 원집이 1백 74권, 속집이 2백 18권이다.
♣ 사부동산[謝傅東山]사부는 진(晉)의 사안(謝安)으로 자는 안석(安石)인데, 태부(太傅)에 증직(贈職)되었으므로 사부라 한 것이다. 동산은 절강성(浙江省) 상우현(上虞縣)에 있는데, 사안은 여기에 은거해 있다가 뒤에 세상에 나와 충성을 바쳐 진 나라를 안정시켰다. 《晉書 謝安傳》
♣ 사부동산회[謝傅東山懷]사부는 진(晋)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인데 동산(東山)에서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
♣ 사부막상위[思婦莫傷蝛]멀리 떠나 있으면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상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東山)에, “쥐며느리가 방에 있으며, 납거미가 문에 있네.[伊威在室 蠨蛸在戶]”하였는데, 이는 방을 청소하지 않아서 쥐며느리가 방에 있으며, 사람이 출입하지 않아서 문에 거미줄이 쳐졌다는 것으로, 황폐해진 집을 형용한 말이다.
♣ 사부사감당[乍復舍甘棠]백성이 시정자(施政者)의 덕을 앙모(仰慕)하는 것을 말한다. 주(周) 나라 소공(召公)의 선정에 감격한 백성들이, 소공이 일찍이 쉬어 갔던 감당(甘棠 )을 소중히 여긴 데서 온 말이다.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에 “저 팥배나무를 베지 말라. 소백(召伯)이 쉬어간 곳이다.” 하였다.
♣ 사부풍류[謝傅風流]사부는 진(晉) 나라 태부(太傅) 사안(謝安)을 가리킨 말로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퇴하여 기녀(妓女)의 손을 잡고 산수(山水)를 즐겼던 일을 말한 것이다.
♣ 사분[蛇分]한 고조(漢高祖)가 미시(微時)에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 술에 취하여 밤에 가는 길에 큰 흰 뱀을 만나 검(劍)을 빼어 베니 뱀이 나뉘어져 두 동강이 되었다. 진(秦)을 멸하고 그가 한제(漢帝)가 될 전조(前兆)라 한다.
♣ 사분오열[四分五裂]넷으로 나뉘어지고 다섯으로 찢어짐. 하나의 집단이 이념⋅이익 등에 따라 갈라져 혼란스러움.
♣ 사불급설[駟不及舌]아무리 빠른 사마(駟馬)라도 자기 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한 번 내뱉은 말은 네 마리가 끄는 빠른 마차도 따라잡지 못하듯이 뜬소문이 쉽게 퍼짐을 비유하는 말조심을 하라는 의미.
♣ 사불여의[事不如意]일이 뜻과 같지 않다는 뜻으로, 일이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이르는 말.
♣ 사불주[沙弗州]상주(尙州)의 고호임.
♣ 사붕[射堋]화살을 쏠 때 화살을 받치는 터.
♣ 사비성[泗沘城]부소산을 감싸고 있는데, 백마강 쪽으로 반달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 사빈[泗濱]사빈은 사수(泗水)의 물가. 이곳에서 나는 돌로 경(磬)을 만든다.
♣ 사빈[司賓]원문의 사빈(司賓)도 역시 서경(書經) 요전에. “돋는 해를 큰 손님처럼 공경한다.” 하였음.
♣ 사사[蛇梭]금사(金蛇)와 척사(擲梭)를 합칭한 말인데, 금사는 전광(電光)의 별칭이고, 척사는 베를 짤 때 북을 이쪽저쪽으로 던지는 것을 이른 말로, 빠른 것을 뜻한다.
♣ 사사[査査]까치 우는 소리
♣ 사사[楂楂]까치의 우는 소리
♣ 사사[咋咋]꽥꽥. 의성어로 귀신이 외치는 소리. 큰소리.
♣ 사사[沙射]남을 음해(陰害)하는 일을 말한다. 물여우는 독벌레로,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를 모래를 머금어 쏘면 그 사람이 병에 걸린다고 한다.
♣ 사사[俟俟]많은 사람이 천천히 걷는 모양
♣ 사사[師師]송 휘종이 당시의 이름난 기생 이사사(李師師)의 집에 놀러 다닌 일이 있었다.
♣ 사사[師師]스승으로 하여 본받음, 또는 그러한 사람, 본받을 만한 훌륭한 용의의 형용, 많음
♣ 사사[寺寺]여러 곳의 절
♣ 사사[沙沙]옷이 너울거리는 모양,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모양
♣ 사사[漇漇]함치르르한 모양, 물에 젖어 윤기가 나는 모양
♣ 사사[司射]향사례(鄕射禮)에서 주인(主人)을 보좌하는 사람인데, 그는 특히 삼조(三組)로 된 6인의 사수(射手)들이 활쏘기에 앞서 그 시범을 보인다고 한다. 《儀禮 鄕射禮》
♣ 사사건건[事事件件]일마다 사건 마다라는 뜻으로, 모든 일 또는 온갖 사건을 의미하거나 일마다의 부사적 의미로 사용됨.
♣ 사사곡진령[蛇死哭秦靈]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의하면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정장(亭長)으로 있을 때 죄수들은 압송(押送)하는 도중 기병(起兵)을 결심하고 술에 취하여 밤길을 가게 되었었다. 마침 그의 앞에 큰 뱀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자, 고조는 술김에 칼을 빼어 뱀을 베었다.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이 그곳에 이르니 한 노파가 울면서 하는 말이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인데 마침 뱀으로 변해 있다가 방금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였다.” 한다.
♣ 사사삼출[士師三黜]사사(士師)는 유하혜(柳下惠)를 말한다.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유하혜가 사사가 되어 세 번 쫓겨났다.” 하였다.
♣ 사사여의[事事如意]일마다 뜻대로 다 됨.
♣ 사사오입[四捨五入]4는 버리고 5는 들인다는 뜻으로, 수학에서 우수리를 처리할 때 4이하면 잘라 버리고 5이상이면 잘라 올리는 셈법인데, 우리 현대사에서 자유당의 부정 개헌(改憲) 파동에 사용되었던 용어로 알려짐.
♣ 사상[使相]감사(監司)의 별칭이다.
♣ 사상[士尙]민성휘(閔聖徽)의 자(字)이다.
♣ 사상[四象]사상은 구수(九數)의 노양(老陽), 육수(六數)의 노음(老陰), 칠수(七數)의 소양(少陽), 팔수(八數)의 소음(少陰)을 말한다.
♣ 사상[使相]상신(相臣)에 걸맞는 신분으로 군대를 감독, 지휘하는 신하를 말한다.
♣ 사상객[槎上客]뗏목을 타고 은하수를 오가는 사람으로,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을 뜻한다. 옛날에 은하수와 바다가 서로 통해 있어서 해마다 8월이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뗏목을 타고 올라갔는데, 어떤 사람이 10여 일을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한 성(城)에 이르러서 어떤 장부(丈夫)가 물가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보고는 여기가 어디인가를 물으니, 그 장부가 답하기를, “그대가 촉군(蜀郡)에 가서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어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촉군에 가서 엄군평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수(牽牛宿)를 범하였다.” 하였는데,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은하수에 도착한 때였다고 한다. 《博物志 卷十》
♣ 사상누각[沙上樓閣]모래 위의 누각이라는 뜻으로,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여 오래 견디지 못할 일이나 물건, 헛된 것을 의미함.
♣ 사상무[謝尙舞]진(晉) 나라 때 사상은 총명이 뛰어났고 음악(音樂)도 매우 잘하였는데,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어떤 모임을 인하여 사상에게 “그대가 구욕무(鴝鵒舞)를 잘 춘다 하니, 그 춤을 좀 춰볼 수 없겠는가?" 하자, 사상이 “좋습니다.” 하고는 문득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晉書 卷七十九》
♣ 사상제자[泗上弟子]사수가의 제자라는 뜻으로, 공자(孔子)가 사수(泗水)의 근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의미에서 공자의 제 자나 공자의 학파를 의미함.
♣ 사상지위[死喪之威]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죽어서 장사 지낼까 하는 두려움에, 형제간에 몹시 걱정해 준다.[死喪之威 兄弟孔懷]”하였다.
♣ 사상채[謝上蔡]이름은 양좌(良佐), 자는 현도(顯道). 그가 상채에 살았으므로 상채 선생이라 부른다. 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에게 수학하고, 저서에는 논어설(論語說)과 상채어록(上蔡語錄)이 있음.
♣ 사상포도[槎上葡萄]한(漢) 나라 사람 장건(張騫)이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오손(烏孫)과 대완(大宛) 등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포도(葡萄)를 가지고 왔다. 《博物志》
♣ 사상포증가[謝相蒲增價]동진(東晋)의 명상(名相) 사안(謝安)의 포규선(蒲葵扇)으로, 시골로 가는 사람이 있어 돌아가려는 차에 사안에게 가 뵈었는데, 안(安)이 돌아갈 노자가 있느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포규선[부들 잎으로 만든 부채] 다섯 자루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안이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 쥐니, 경향(京鄕)의 사서(士庶)들이 다투어 사서 값이 몇 배나 더 올라갔다. 《晋書 謝安傳》
♣ 사새[四鰓]농어의 별칭으로, 아가미뼈가 네 개라 하여 이른 말이다. 《本草 䲐魚》
♣ 사색지지[四塞之地]사방의 지세가 험하여 쉬이 넘보지 못할 땅.
♣ 사생결단[死生決斷]죽음과 삶을 놓고 결단을 내린다는 뜻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대들어 끝장을 낸다는 의미.
♣ 사생관두[死生關頭]죽느냐 사느냐의 위태한 고비.
♣ 사생도[寫生圖]실물(實物)이나 실경(實景)을 그대로 잘 그려 놓은 그림을 말한다.
♣ 사생영욕[死生榮辱]죽음과 삶과 영예와 치욕의 뜻으로, 인간 삶의 파란만장(波瀾萬丈) 인생 역정의 의미.
♣ 사생취의[捨生取義]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뜻으로, 비록 목숨을 버릴지언정 옳은 일은 그만두지 않겠다는 의미.
♣ 사생편[寫生篇]사생도의 수법을 써서 그림 그대로 잘 묘사한 문장을 말한다.
♣ 사서[四書]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
♣ 사서[社鼠]사당에 사는 쥐는 사람이 함부로 잡을 수 없으므로, 전하여 임금곁에서 알랑거리는 간신을 비유한다.
♣ 사서[司書]사서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 6품 관원이다.
♣ 사서불가훈거[社鼠不可熏去]사당의 쥐는 불로 쫓을 수 없다.
♣ 사서성호[社鼠城狐]사당의 쥐와 성곽의 여우라는 뜻으로, 사람들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신전이나 성곽에 깃들어 사는 쥐나 여우처럼 임금 측근에 있는 간신들을 비유하는 말.
♣ 사서오경[四書五經]사서와 오경이라는 뜻으로, 유학(儒學)의 경전 (經傳)을 의미함.
♣ 사석위호[射石爲虎]돌을 범으로 잘못 보고 화살을 쏘았다는 말로, 일념을 가지고 하면 어떤 일이든 간에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
♣ 사석음우[射石飮羽]돌을 쏘았는데 터럭에 박혔다는 뜻으로, 돌을 범인 줄 알고 쏘았는데 깃까지 들어가 박혔다는 초(楚)의 양유기(養由基)와 한(漢)의 이광(李廣)의 고사에서 열성(熱誠)을 다하면 어떤 일이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의미.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 사선[四善]관리(官吏)의 네 가지 선행(善行). 즉 덕의가 널리 알려지는 것[德義有聞], 청신함이 밝게 드러나는 것[淸愼明著], 공평함을 칭송할 만한 것[公平可稱], 각근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恪勤匪懈]등이다. 《舊唐書 職官志》
♣ 사선[四仙]신라 시대의 사선(四仙)으로 일컬어지는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을 말한다. 이들이 사흘 동안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여 삼일포라는 이름이 생겼다.
♣ 사선봉[四仙峯]총석정은 통천(通川)에 있다. 전설에 신라의 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영랑(永郞)ㆍ안상(安詳)이 여기에서 유상(游賞)하였다 하여 사선봉(四仙峯)이라 한다.
♣ 사선성[謝宣城]남제(南齊) 사조(謝眺), 자 현휘(玄暉). 선성(宣城) 태수(太守)를 지냈으므로, 사선성이라 일컬었다. 글이 맑고도 화려하며 시(詩)에 능했다.
♣ 사선양거[謝仙煬炬]사선(謝仙)은 뇌신(雷神)을 말한다. 송(宋) 나라 진종(眞宗) 때 왕진궁(王眞宮)에 화재가 발생하여 기둥 하나만 남기고 전소되었는데 그 기둥에 ‘사선이 불을 질렀다.[謝仙火]’는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 사선정[四仙亭]사선정은, 신라 시대에 국선(國仙)으로 불렸던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안상(安祥)ㆍ남석행(南石行) 네 사람이 고성(高城)의 삼일포(三日浦)에 와서 3일을 놀았다 하여 후인이 그것을 기념하는 뜻으로 삼일포의 작은 섬에 정자를 세우고 사선정이라 이름한 것이고, 또 삼일포의 북쪽 벼랑에 단서(丹書)로 쓴 ‘영랑도 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여섯 자가 있었다는 고사가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四十五卷 高城》
♣ 사성[四聖]네 성인(聖人). 처음으로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그린 복희(伏羲), 육십사괘(六十四卦)를 그리고 괘사(卦辭)를 붙인 주(周) 나라 문왕(文王), 효사(爻辭)를 지은 주공(周公), 상전(象傳)ㆍ단전(彖傳) 등의 십익(十翼)을 지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 사성[私省]사성은 논어(論語) 위정(爲政)의 “내가 회(回)와 함께 온종일 이야기할 때는 어리석은 것 같더니, 물러가서 그 사생활을 살펴보면 그대로 행하니 회는 어리석지 아니하구나.[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私 亦足以發 回也不愚]"에서 나온 것임.
♣ 사성[四聖]사성은 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이다.
♣ 사성[使星]사신(使臣)을 이름. 한 화제(漢和帝) 때 이합(李郃)이 천문(天文)의 사성(使星)을 보고서 두 사신이 파견될 것을 미리 알았던 데서 온 말이다. 한(漢)나라 화제(和帝)가 각 지방에 민정(民情)을 순찰하는 사신(使臣)을 보내면서 미복(微服)으로 암행(暗行)하게 하였더니, 두 사신이 익주(益州)에 들어가서 이합(李郃)의 집에 자는데, 이합이 두 사람에게 묻기를, “두 분이 서울을 떠날 때에 조정에서 두 사신 보낸 것을 알고 오셨는가.” 하였다. 두 사신이 놀래어, “우리는 듣지 못하였다. 어찌 아는가.” 하니 이합이 하늘에 별을 가리키며 “두 사신별[使星]이 익주의 분야(分野)로 향하였기 때문에 천문(天文)을 보고 안다.” 하였다.
♣ 사성[四聲]평성(平聲)ㆍ상성(上聲)ㆍ거성(去聲)ㆍ입성(入聲)이니, 사성으로서 음운(音韻)의 고저(高低)와 강약(强弱)과 장단(長短)을 구분한다.
♣ 사성기[士成綺]사성기라는 사람이 노담을 찾아가 말하기를, “나는 선생께서 성인(聖人)이라고 듣고 한 번 뵙기 위하여 먼 길을 마다 않고 발을 싸매고 왔는데, 지금 와서 보니 성인이 아니로군요.” 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노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가 없었다 한다. 《莊子 天道》
♣ 사성보[四聲譜]상성ㆍ평성ㆍ거성ㆍ입성을 분류한 책으로 총 1권임.
♣ 사성착족비[蛇成着足非]전국책(戰國策) 제책 이(齊策二)에 나오는 이른바 “畫蛇添足”의 비유로, 훌륭하게 완성된 시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을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 사성환입한[使星還入漢]사성은 사자(使者)를 칭하며 한중(漢中)은 익주(益州)로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한(漢) 나라 화제(和帝)는 즉위한 다음 사자를 사방으로 파견하여 미복(微服)으로 다니면서 사방의 풍속과 민요를 채집해 오게 하였는데 이때 두 명의 사신이 익주에 이르러 원인 이합(李郃)의 집에 투숙해 있었다. 여름철이라서 함께 밖에 나와 하늘을 보았는데 이합은 “두 분께서 서울을 떠날 때 두 사신을 이곳에 파견한 사실을 모르는가? 천기를 보니 두 사성이 익주의 분야(分野)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안다.” 하였다. 《後漢書 李郃傳》
♣ 사수[死綏]군대가 퇴각하면 장군이 그 책임을 지고 죽는 것을 말한다. 사마법(司馬法)에 “將軍死綏”라는 말이 있고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24 ‘진소유몽발빈 …… 인차기운시(秦少游夢發殯 …… 因次其韻詩)’에 “관직에 몸담고 순직함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장군이 죽는 것과 같다.[居官死職戰死綏]”라는 구절이 있다.
♣ 사수[謝守]문재(文才)가 있는 고을 수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조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일찍이 영가 태수(永嘉太守)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 사수[泗洙]사수는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킨다. 공자가 사수(泗水)와 수수(洙水) 사이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 사수[泗水]사수는 노(魯) 나라에 있는 강 이름으로 흔히 수수(洙水)와 병칭되는데, 수수는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의 북쪽에 있고 사수는 그 남쪽에 있으며, 공자가 그 근처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여 공자를 가리킴. 곧 공자가 사람들을 교화시킬 때 봄바람이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듯이 하였다는 것이다.
♣ 사수[泗水]사천(泗川)의 고호(古號)이다.
♣ 사수[社首]산동성(山東省) 태안현(泰安縣)에 있는 지명. 옛날 주 성왕(周成王)은 이곳에 터를 닦고 지신(地神)에 제사하였다. 《漢書 郊祀志》
♣ 사수시[四愁詩]후한(後漢) 때 장형(張衡)이 하간효왕(河間孝王)의 상(相)이 되어 나갔을 때, 세상이 점차 쇠폐해짐을 걱정하여, 네 가지 생각 즉, 일사(一思)ㆍ이사(二思)ㆍ삼사(三思)ㆍ사사(四思)로 나누어서 불평한 마음을 노래한 시를 말한다. 《文選 卷二十九》
♣ 사수침정[泗水沈鼎]진(秦) 나라 소양왕(昭襄王) 52년에 서주(西周)를 공격하여 보기(寶器) 구정(九鼎)을 탈취하였는데, 하나가 사수(泗水)에 빠졌으므로 여덟 개만 진 나라로 들여왔다 한다. 그 뒤에 진시황(秦始皇)이 사수의 주정(周鼎)을 꺼내려고 1천 인을 동원해서 물속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史記 秦始皇本紀ㆍ史記 封禪書》 소식(蘇軾)의 시에 “사수에서 주 나라 솥 잃어버리고, 위성은 한 나라 승로반(承露盤) 거절하였네.[泗水逸周鼎 渭城辭漢盤]”라는 구절이 있다.《蘇東坡詩集 卷7 甘露寺》
♣ 사숙[私淑]직접 그분에게서 수업하지 못하고 다만 그의 학을 전수받은 이에게서 다시 자신이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는 공자의 문도가 되지 못하였으나 나는 사숙한 사람이다.” 하였다.
♣ 사슬기수흥[舍瑟沂水興]공자가 제자인 증점(曾點)에게 “혹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하고 묻자, 증점이 비파를 타다가 내려놓고는[舍瑟] 대답하기를 “따뜻한 봄날 봄 옷이 마련되면 관자(冠者) 5, 6인과 동자 6, 7인으로 더불어 기수에서 목욕하고[浴乎沂] 무우(舞雩)에서 바람 쐰 다음 노래하며 돌아오겠다.” 한 고사가 있다. 《論語 先進》
♣ 사슬자[捨瑟者]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을 말한다. 자로(子路)ㆍ염구(冉求)ㆍ공서적(公西赤)ㆍ증점(曾點)이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는 제자들에게 각각 뜻을 말하라 하였다. 자로를 비롯하여 염구ㆍ공서적은 각각 정치에 대한 것을 말했다. 공자는 비파를 타고 있던 증점에게 너도 말하라 하니, 증점은 비파를 놓고는 “저의 뜻은 저들과는 다릅니다. 늦은 봄,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며, 시를 읊고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공자는 외물(外物)에 구하지 않는 그의 높은 뜻을 가상히 여겨 “나는 증점을 허여(許與)한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자(程子)는 “그의 가슴속이 유연하여 곧바로 천지만물과 상하가 함께 통한다.[其胸次悠然 直與天地萬物 上下同流]" 하였다. 《論語 先進》
♣ 사승[師承]사승은 학문이나 기예의 맥을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 사승직[絲繩直]과거 급제를 하고도 남을 출중한 문장 실력을 말한다. 당(唐) 나라 마이(馬異)의 시 ‘송황보식부거시(送皇甫湜赴擧詩)’에 “청동의 거울 환히 밝혀 줄 것이요, 붉은 거문고 줄 직선으로 펴지리라.[靑銅鏡必明 朱絲繩必直]”라는 표현이 있다.
♣ 사시[謝詩]사조(謝朓)의 시.
♣ 사시[捨施]사찰(寺刹) 등에 물품을 희사보시(喜捨布施)하는 것을 뜻한다.
♣ 사시마조[似是馬曹]마조는 말을 관장하는 관서를 말한다. 진(晉) 나라의 호방하기로 이름난 왕휘지(王徽之)가 거기장군(車騎將軍)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으로 있을 때 환충이 “경은 무슨 관서에 벼슬하고 있소?”하자 대답하기를 “아마도 마조인 듯합니다[似是馬曹].” 하고, 또 “말을 몇 마리나 관리하고 있소?”하자 대답하기를 “말을 잘 모르는데 무슨 수로 그 수효를 알겠습니까.” 하였다는 데서 인용한 것으로, 벼슬은 하고 있으나 자기의 직무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을 뜻한다. 《晉書 卷八十 王徽之傳》 소식(蘇軾)의 ‘차운장안도독두집시(次韻張安道讀杜集詩)’에 “큰 문장은 용 잡는 솜씨이지만 미관말직 아마도 마조인 듯해[巨筆屠龍手 微官似馬曹]"라 하였다. 《分類東坡詩 卷十七》
♣ 사시반[四矢反]화살 네 대가 반복된다는 것은 화살 네 대가 한 곳을 거푸 맞춘다는 뜻으로, 노(魯) 나라 장공(莊公)이 활을 잘 쏘아서 화살 네 대가 한 곳을 맞추었다고 한다.
♣ 사시사[四時詞]도연명(陶淵明)이 사시(四時) 변화의 특징을 읊은 시로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峯 秋月揚明暉 冬嶺秀孤松”
♣ 사시이비[似是而非]옳은 것 같으나 실은 틀림.
♣ 사시장춘[四時長春]사시절이 늘 봄빛이라는 뜻으로, 늘 잘 지내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
♣ 사시정윤여[四時定閏餘]서경(書經) 요전(堯傳)에 “요임금은 ‘아, 희씨와 화씨야, 기년(期年)은 3백 66일이니 윤달을 두어야 사시(四時)를 정하여 해를 이룬다.[帝曰 咨汝羲曁和 朞三百有六十有六日 以閏月定四時成歲]’ 하였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 사시추탈불능평[四時推奪不能平]한퇴지(韓退之)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대개 만물은 평정함을 얻지 못할 때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 사계절이 서로 밀어내어 그 자리를 뺏는 것 역시 평정함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이 분명하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 …… 四時之相推奪 其必有不得其平者乎]”라는 구절이 나온다.
♣ 사시춘풍[四時春風]누구에게나 늘 좋은 낯으로 대하며 무사태평한 사람.
♣ 사시피[四時皮]마음 속에 시비판단이 분명함을 말한다. 진(晉)의 저부(褚裒)는 고귀(高貴)한 풍도가 있었으며 기국(器局)이 뛰어났다. 환이(桓彛)는 “피부 속에 포폄(褒貶)이 있다.” 하였으며, 사안(謝安)은 사시의 기후가 모두 갖춰졌다.” 하였는데 춘추(春秋)는 원래 봄은 양(陽)으로서 포상(褒賞)에 해당하고 가을은 음(陰)으로서 폄벌(貶罰)에 해당하므로 명명한 것임을 들어 말한 것이다. 《晉書 褚裒傳》
♣ 사신[詞臣]사신은 곧 임금 곁에서 윤언을 연역하는 시종신을 일컫는 말이다.
♣ 사신[詞臣]홍문관 관원 등 문학을 관장하는 신하를 말한다.
♣ 사신우귀[蛇神牛鬼]바르지 못한 신들을 가리킨다.
♣ 사신위교령[使臣違敎令]장헌세자가 온천의 서쪽 담장 밑에서 과녁에 다섯 개의 화살을 쏘아 명중시키고 그것을 기념하여 그 자리에 홰나무 한 그루를 손수 심은 뒤에 단(壇)을 둘러쌓도록 분부하였는데, 세자가 떠난 뒤 그 고을 수령이 그 분부를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수령을 가리킨다. 《俟菴先生年譜》
♣ 사심불구[蛇心佛口]뱀 같은 간악한 마음에 부처 같은 자비로운 말이라는 뜻으로, 속은 악독하면서도 겉으로는 후덕(厚德)한 체 함을 의미함.
♣ 사심수초부[思尋遂初賦]은거하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회계(會稽) 땅에서 10여 년 동안 산수(山水)를 즐기며 살면서 ‘수초부(遂初賦)’를 지었는데 뒤에 산기상시(散騎常侍)의 관직에 몸을 담았을 때 환온(桓溫)이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하려는 것을 상소하여 저지하자, 환온이 불쾌하게 여겨 말하기를 “어째서 수초부의 내용대로 행하지 않고서 남의 국사(國事)를 간섭하는가.”라고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晉書 孫綽傳》
♣ 사심알장교[邪心遏莊蹻]장갹은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도둑인데, 성질이 포악하여 도척(盜跖)과 함께 흉악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 사심자시[師心自是]자기 생각만 옳다고 함.
♣ 사심자용[師心自用]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스스로 쓴다는 뜻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일은 다 옳다 하여 그대로만 하고 남의 말은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
♣ 사십구년비[四十九年非]춘추 시대 위(衛) 나라의 현대부(賢大夫)인 거백옥(蘧伯玉)이 나이 50이 되었을 때 49년 동안의 잘못된 행동을 깨달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淮南子 原道訓》 참고로 이태백의 시 ‘자극궁’에는 이 구절이 “지난 사십구 년 잘못된 생애, 한번 지나가니 돌이킬 수 없도다.[四十九年非 一往不可復]”로 되어 있다.
♣ 사십구재[四十九齋]불교에서 죽은 이를 위한 의식 중, 재(齋)는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삼가하며 맑게 하는 의식이고, 제(祭)는 죽은 이를 위해 음식을 바치며 정성을 들이는 의식이다. 재에는 7일재(七日齋)외 49재(四十九齋)가 있는데 ‘7일재’는 돌아가신 날로부터 7일째 되는 날 지내는 것이고, ‘49재’는 7번째 돌아오는 7일재에 지내는 것이다. 7월 보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올리는 우란분재(盂蘭盆齋), 윤달에 죽기 전에 미리 공덕을 쌓기 위해 지내는 예수재(預修齋) 등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7번의 生死를 거치는 중음신(中陰身)의 과정을 거치는데 49일째 되는 날은 드디어 중음신의 신세를 벗고 삼계(三界) 육도(六道)에 다시 태어나는 날이라 한다. 남아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이 날을 기념하여 죽은 자가 三界(天界, 地界, 人界)에 가서 누리게 될 후생의 평안을 위해 독경과 공양으로 명복을 비는 것을 말함. 칠칠재라고도 한다. 흔히 제사를 연상해 ‘사십구제’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나이 사십이 되어서 미혹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세상의 도리를 분명하게 알게 되어 어떠한 일에도 의혹되는 일이 없었다는 공자의 말로, 불혹(不惑)은 나이 40세로 사용됨. 불혹지년(不惑之年)
♣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패경(貝經)은 곧 불경(佛經)을 가리킨 것으로,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인도(印度)의 중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맨 처음 중국에 전한 데서 온 말인데, 사십이장경이란 곧 불교의 요지(要旨)를 42장으로 나누어 간명(簡明)하게 설명해 놓았음을 뜻한다.
♣ 사십자매[四十字媒]궐문지기가 남이 지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읊고 벼슬에 오른 것을 두고 이른 말이다. 고려 예종(睿宗) 때 어떤 궐문지기가 정습명(鄭襲明)의 각촉시(刻燭詩)인 석죽화시(石竹花詩)를 외었는데 예종이 듣고 즉시 옥당(玉堂)에 보직했다. 오언율시는 모두 40자이다.
♣ 사십초말[四十初襪]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는 뜻으로, 늙어서야 마음먹은 일이 이루어짐을 비유하여 이르는 우리나라 성어.
♣ 사십팔자[四十八字]구루비(岣嶁碑)의 글자 수.
♣ 사아도강[士雅渡江]사아(士雅)는 진(晉) 나라 조적(祖逖)의 자(字)이다. 중원(中原)이 호(胡)와 갈(羯)에게 점령되었을 때에 조적은 강동(江東)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중원으로 향하면서 중류(中流)에서 돛대를 치며, “나는 맹세코 중원을 수복하여 황하(黃河)ㆍ낙양(洛陽)의 땅을 밝히겠다.” 하였다.
♣ 사악[四嶽]대산(岱山)ㆍ곽산(霍山)ㆍ화산(華山)ㆍ항산(恒山)
♣ 사악[四岳]사악(四岳)은 요(堯)의 신하로서 사방(四方)의 방백(方伯)들이다.
♣ 사안[謝安]동진(東晉)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자(字)는 안석(安石)이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동산(東山)에 은거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 비로소 벼슬길에 나가 외적(外敵)을 물리치고 내정(內政)을 닦는 데 탁월한 공을 세워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르렀다. 백거이(白居易)의 시 수배령공증마상희(酬裵令公贈馬相戱)에 “사안의 풍류는 또 어찌할 수 없나니, 준마를 내주어 미녀와 바꾸려 하였도다.[安石風流無奈何 欲將赤驥換靑娥]”라는 구절이 있다.
♣ 사안불기[謝安不起]진(晋)나라 사안(謝安)이 40세가 되기까지 동산(東山)에서 놀고 벼슬하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안석(安石)이 일어나지 않으면 창생(蒼生)을 어찌하랴.” 하였더니, 뒤에 나와 명재상(名宰相)이 되었다.
♣ 사안비유[謝安比喩]동진(東震) 명상(名相) 사안이 눈오는 날 자녀를 모아 놓고 글 뜻을 강론할 새, 이윽고 눈이 갑자기 오니 공이 말하기를, “흰 눈이 분분하니 무엇 같은가[白雪紛紛何所似].” 형의 아들 호아(胡兒)가 말하되, “공중에 소금을 뿌린 것과 비슷하지요[散鹽空中差可擬].” 형의 딸 도온(道韞)이 말하되, “버들강아지가 바람에 일어남만 못하죠[未若柳繁因風起].” 하니, 공이 그의 영리함을 칭찬하였다.
♣ 사안석[謝安石]진(晉) 나라 때의 명신(名臣) 사안(謝安)으로 안석은 그의 자. 그는 세상에 나갈 뜻이 없어 계속 동산(東山)에 은거하다가, 대장군 환온(桓溫)의 천거에 의해 나이 40세에 처음 사마(司馬)가 되었었다. 그후로 점차 중용되어 전진(前秦) 부견(苻堅)의 백만군을 격파 평정하였고, 또 진실(晉室)을 찬탈하려던 대사마(大司馬) 환온의 음모를 깨뜨려 이루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나라를 반석같이 보호하였다. 《晉書 卷七十九》
♣ 사안이와명유중[謝安以臥名逾重]사안(謝安)이 젊은 시절부터 명망이 있었는데,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숨어살았으므로 명망이 더 높아졌었는데, 뒤에 환온(桓溫)의 부름을 받고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끝에 가서 태부(太傅)로 추증되었음. 《晉書 謝安傳》
♣ 사암[思菴]고려 후기의 문신인 유숙(柳淑)의 호이다.
♣ 사야교[士也驕]시경(詩經) 위풍(魏風) 원유도(園有桃)에,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더러 선비가 교만하다 하누나.[不知我者 謂我士也驕]”하였다.
♣ 사양[謝楊]사씨와 양씨. 송 나라 정명도(程明道)와 이천(伊川)의 문인인 사양좌(謝良佐)와 양시(楊時)이다.
♣ 사양장랑[使羊將狼]양으로 하여금 이리의 장수가 되게 한다는 뜻으로, 약자에게 강자를 통솔하게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사양지심[辭讓之心]겸손히 마다하며 받지 않거나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인(仁)의 근본이다.
♣ 사양지심예지단야[辭讓之心禮之端也]겸허하게 양보하는 마음은 예(禮)의 근본이다.
♣ 사양지월[四陽之月]양이 넷인 달이란 대장괘(大壯卦 ▣) 즉 2월을 말하는데, 양이 이미 과반수를 차지해 강성해지는 괘로서 우레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상징한다.
♣ 사어[舍魚]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 요리도 내가 먹고 싶고,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먹고 싶다. 하지만 한 가지만 택하라면, 나는 물고기를 버리고[舍魚] 곰 발바닥을 취할 것이다. 나는 살고도 싶고, 의리를 행하고도 싶다. 하지만 한 가지만 택하라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舍生而取義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 사어[史魚]춘추 시대(春秋時代) 위(衛) 나라의 직신(直臣). 위 영공(衛靈公)이 현신(賢臣)인 거백옥(蘧伯玉)을 쓰지 않고 불초(不肖)한 미자하(彌子瑕)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을 극력 간함에도 듣지 않으므로 임종에 “나는 신하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정례(正禮)를 쓰지 말라.”고 유언을 하고 죽었다. 이때 조문(弔問) 왔던 영공이 이를 보고 크게 깨달아 그의 말을 들었다 한다. 《孔子家語 困誓》
♣ 사어지천[射魚指天]물고기를 쏘는데 하늘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물고기를 잡는데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당치 않은 일을 하려 한다는 의미.
♣ 사어취웅[舍魚取熊]어느 두 가지를 다 원하면서도 한꺼번에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의(義)에 맞는 쪽을 택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을 경우, 나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을 경우, 나는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하였다. 《孟子 告子上》
♣ 사언[謝偃]당 태종(唐太宗) 때의 시인. 본래는 직륵(直勒)씨였는데, 뒤에 사(謝)로 고쳤음. 그는 부(賦)에 능해서 당시의 시인 이백약(李白藥)과 함께 이시 사부(李詩謝賦)로 일컬어짐. 《新唐書 文藝志 上》
♣ 사업[司業]본디 수 양제(隋煬帝) 때 설치한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으로 문묘(文廟)의 제향을 보조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는 벼슬인데, 흔히 우리 나라의 성균관에 견주어 말한다.
♣ 사역[沙꞉]남을 은근히 해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하인사(何人斯)에 “귀신이고 물여우라면 말할 수 없다 하거니와[爲鬼爲꞉則不可得]" 하였는데, 집주(集注)에 “물여우는 모래를 머금어 물에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에 쏘면 그 사람은 곧 병이 드는데 여우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 사연[社燕]사연은 제비로, 제비가 봄철 사제사(社祭祀)를 지낼 때 날아왔다가 가을철 사제사를 지낼 때 날아가므로 이렇게 칭한다.
♣ 사연추홍[社燕秋鴻]제비는 춘사(春社)의 날에 왔다가 추사(秋社)의 날에 떠나가고, 기러기는 춘사의 날에 떠났다가 추사의 날에 돌아오기 때문에, 만나자마자 곧바로 헤어질 때의 표현으로 쓰게 되었다.
♣ 사염묵생비[絲染墨生悲]묵생은 전국 시대송 나라의 묵적(墨翟)을 말함. 이 말은 사람은 습관에 따라 성(性)이 선하게도, 악하게도 되는 것을 비유한 말로, 묵적이 일찍이 실에 물들이는 것을 보고 울며 말하기를 “푸른 물감을 쓰면 실이 푸르러지고, 누런 물감을 쓰면 실이 누레지나니, 물들이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墨子 所染》
♣ 사염비[絲染悲]묵적(墨翟)의 고사. 묵적이 하얀 실을 놓고, 그것을 물들이기에 따라 색깔이 얼마든지 변해질 수 있음을 슬퍼했다고 함. 《墨子 所染》
♣ 사영[槎詠]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나 중국 사신을 접반(接伴)할 때 동악이 지은 시문을 가리킨다.
♣ 사영구공[思潁歐公]구공은 송(宋) 나라 때 명신(名臣)이며 문장가인 구양수(歐陽脩)를 가리키며, 사영은 영주(潁州)를 사억(思憶)한다는 뜻으로, 구양수가 일찍이 사영시(思潁詩)를 지은 데서 온 말이다.
♣ 사영운불[思靈運佛]사영운이 부처를 신봉하던 맹의(孟顗)를 멸시한 것을 말한다.
♣ 사영지독[射影之毒]물 속에 있다는 역(꞉)이라는 조그만 여우가 입에 머금었던 모래로 사람의 그림자에 뿜으면 헌데가 나거나 앓는다고 한다. 《說文》
♣ 사예[司隷]추관(秋官)에 속하는 주(周) 나라 관직의 이름인데, 사례(司禮)의 오기(誤記)가 아닌가 여겨진다.
♣ 사예[司隸]한(漢)나라도 한 때는 왕망(王莽)이라는 찬탈자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것인데 황족들인 유씨(劉氏)가 다시 일어나서 왕망을 잡아죽이고 다시 한나라를 건국하였으나, 그 건국한 임금이라는 사람이 똑똑하지 못하여 그 아래에서 사예교위(司隸校尉)라는 벼슬로 있는 유수(劉秀)라는 사람이 다시 천하를 평정하고 완전한 국가를 건설하였으니, 그를 광무제(光武帝)라 한다.
♣ 사옹[沙翁]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가리킨다.
♣ 사옹[司饔]조선 시대 어선(御膳) 및 대궐 안의 공궤(供饋)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옹원(司饔院)을 가리킨다.
♣ 사왕사래[乍往乍來]갑자기 갔다가 갑자기 온다는 뜻으로, 변화(變化)가 심함을 이르는 말.
♣ 사우정[四雨亭]이식(李湜)
♣ 사웅부[射熊賦]양웅(揚雄)이 지은 부(賦)에 사냥을 서(叙)한 것이 많고, 곰을 쏘는 데에 관한 사구(辭句)가 많다.
♣ 사원[士元]방통(龐統)의 자(字)임.
♣ 사원[詞源]사원(詞源)은 글이 나오는 근원이란 뜻이다.
♣ 사월[使越]한(漢) 나라 때 육가(陸賈)의 고사. 육가는 한 고조(漢高祖) 때의 훈신으로 구변(口辯)이 능하였는데, 고조의 명으로 남월왕(南越王) 위타(尉佗)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한 나라에 신복(臣服)하게 하였다. 《前漢書 卷四十三》
♣ 사위성[舍衛城]석가(釋迦)가 설법하며 교화를 펼쳤던 북인도(北印道) 교살라국(憍薩羅國)의 서울로, 이곳에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가 있다.
♣ 사위성[舍衛城]옛날 인도(印度)에 있었던 성 이름으로, 명성(名聲)을 떨친 인물이 많이 배출(輩出)되었다 한다. 《金剛經 疏》
♣ 사유[四維]사유는 국가를 다스리는 네 가지 요령으로, 관자(管子) 목민(牧民)에,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耻)를 사유(四維)라 한다.” 하였고, “사유가 퍼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 하였다.
♣ 사유계성[似柳鷄聲]고려 충선왕이 원 나라에 들어가 지은 시에 “鷄聲恰似門前柳"라는 글귀가 있음.
♣ 사유불조삼[死有不弔三]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겁이 나서 자살한 경우와 압사(壓死)한 경우와 익사(溺死)한 경우는 죽어도 조문을 하지 않는다.[死而不弔者三 畏厭溺]”고 하였다.
♣ 사유천목[辭幽遷木]친구간에 연회(燕會)하는 악가(樂歌)인 시경(詩經) 소아 벌목(伐木)에 “쩡쩡 나무를 찍는데, 앵앵 새가 울더니만 깊은 골짜기에서 나와 높은 나무에 올라 앉네.[伐木丁丁 鳥鳴嚶嚶 出自幽谷 遷于喬木]" 한 데서 온 말이다.
♣ 사육[絲肉]사(絲)는 악기, 육(肉)은 사람의 목청으로, 즉 인간 세상의 음악 소리를 뜻한다.
♣ 사율[師律]군사를 통솔하는 군율(軍律).
♣ 사읍융준공[思揖隆準公]한고조(漢高祖)가 코가 높았으므로 융준공(隆準公)이라 하였는데, 역이기(酈食其)가 처음 고조(高祖)를 뵈올 때에 절하지 않고 읍(揖)하였다.
♣ 사의[徙倚]머뭇거리다.
♣ 사의[四儀]사의는 ‘사위의(四威儀)’라는 불교 용어의 준말로, 행(行), 주(住), 좌(坐), 와(臥) 등 4종 신체의 자태가 법도에 그대로 들어맞는 것을 말한다.
♣ 사의[司儀]주 나라 때 빈객에 관한 일들을 맡은 관명(官名)이다.
♣ 사이[四夷]사이는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을 가리키는 말이다.
♣ 사이[躧履]신이 발꿈치에 닿지 않는다는 말로, 반갑고 급한 뜻. 한서(漢書) 준불의전(雋不疑傳)에 “신 신을 사이도 없이 서로 맞는다.[躧履相迎]"하였다.
♣ 사이[士以]이행건(李行健)의 자(字)이다.
♣ 사이불사즉태[思而不學則殆]생각만 하고 더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태롭게 된다.
♣ 사이비[似而非]겉은 제법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것. 사시이비(似是而非)의 준말. 진짜같이 보이나 실은 가짜인 것을 가리킴
♣ 사이후이[死而後已]죽은 뒤에야 그친다는 뜻으로, 죽을 때까지 노력하여 그치지 않음을 의미.
♣ 사인[舍人]官名. 전국시대에서 漢初까지 王公貴族들이 거느린 측근에 대한 통칭.
♣ 사인[寺人]환관은 맹자(孟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항백(巷伯)에, “양원의 길이여, 높은 언덕에 얹혀 있도다. 환관인 맹자가 이 시를 짓는도다.[楊園之道 猗于畝丘 寺人孟子 作爲此詩]”하였다.
♣ 사인[蛇蚓]힘이 빠진 지렁이와 뱀 같다는 말로, 졸렬한 자체(字體)로 옮겨 쓴 글을 가리킨다. 왕희지(王羲之)가 남조 양(梁)의 소자운(蕭子雲)이 쓴 서체(書體)를 보고는, 힘이 없이 유약하기만 할 뿐 장부의 기상이 없다면서 “줄마다 봄날의 지렁이가 엉켜 있는 듯하고, 글자마다 가을날의 뱀들이 뭉쳐 있는 듯하다.[行行若縈春蚓 字字如綰秋蛇]”고 혹평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80 王羲之傳》
♣ 사인검[四寅劍]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에 만든 검.
♣ 사인명[舍人鳴]한 무제(漢武帝) 때 곽사인(郭舍人)이 투호(投壺)를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는 특히 화살을 세차게 병에 던져 넣어 그 화살이 튕겨서 다시 나오게 하는 법을 썼던 바, 그 다시 나온 화살을 ‘효(驍)’라고 하였다.
♣ 사인명야부[斯人命也夫]고치지 못할 몹쓸 병에 걸린 것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병에 걸린 염백우(冉伯牛)를 공자(孔子)가 찾아가서 창문을 통해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亡之 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라고 한 기사가 전하는데, 염백우의 병은 문둥병이었던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 사인선사마[射人先射馬]상대방을 쓰러뜨려 굴복시키려면 그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것을 먼저 쓰러뜨려라.
♣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 섬기기를 하늘 같이 하라는 뜻으로, 사람들 사이의 서로 공경함을 한울님 공경하듯이 하라는 천도교 天道敎)의 윤리 강령.
♣ 사일[社日]보통은 입춘(立春)이나 입추(立秋) 뒤의 다섯 번째 무일(戊日)을 가리키나, 사시(四時)에 치제(致祭)하는 날을 뜻하기도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늙은 농부 사일이 가까워지자, 나를 초청해서 새 술 맛보여 주네.[田翁逼社曰 邀我嘗新酒]”라는 표현이 있다.
♣ 사일[蜡日]사일은 납제(臘祭) 지내는 날을 이르는데, 자공(子貢)이 납제 지낸 것을 보고 오자, 공자(孔子)가 묻기를 “사(賜)야 즐거웠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이 즐거워했으나, 사는 그 즐거움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므로 공자가 이를 “백일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단 하루의 납제를 만났으니, 그 즐거움을 너는 알 바가 아니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禮記 雜記》
♣ 사일[社日]사직단(社稷壇)에서 토지의 신에게 제사하는 날. 입춘(立春) 후 다섯 번째의 무일(戊日)을 춘사(春社)라 하고, 입추(立秋) 후 다섯 번째의 무일을 추사(秋社)라 하는데, 특히 가을의 사일에는 제비가 둥지를 떠난다고 한다.
♣ 사일[射日]태양을 쏜다는 것은 요(堯) 임금 때에 태양이 10개가 함께 나타나서 곡식과 초목을 다 태워 백성이 살 수가 없게 되므로, 요 임금이 예(羿)를 시켜 태양 9개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게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곧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함을 비유한 말이다.
♣ 사일포우육[死日飽牛肉]두보가 일찍이 뇌양현(耒陽縣) 악사(岳祠)에 가 노닐 적에 갑자기 큰물이 져서 열흘이 넘도록 갇혀 밥을 먹지 못하다가 그곳 현령(縣令)이 구운 쇠고기와 탁주를 배에 실어 보내 주자 그것을 먹고 죽었다는 고사이다.
♣ 사자[沙觜]강이나 바다 가운데 모래 무더기가 돌출(突出)한 곳을 이름.
♣ 사자[師子]불가(佛家)에서 부처를 이르는 말임.
♣ 사자[四子]사마표와 이이(李頤)는, “왕예(王倪)ㆍ설결(齧缺)ㆍ피의(被衣)ㆍ허유(許由)다.” 했고, 이정(李楨)은, “실제로 사람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했음.
♣ 사자[四字]중용(中庸)에 나오는 ‘계신공구(戒愼恐懼)’를 가리킨다.
♣ 사자불범[師者不範]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성제 때의 사부(師傅)가 되어, 외척(外戚) 왕씨(王氏)가 전정(專政)함을 보고도 직언(直言)하지 못하고 아첨하므로 주운의 탄핵을 만났다.
♣ 사자심상빈[奢者心常貧]사치하는 사람은 마음이 항상 가난하다는 뜻으로, 사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만족할 줄 몰라 마음이 항상 가난하다는 의미.
♣ 사자연[謝自然]중국 당나라 정관(貞觀) 중의 여도사(女道士)임. 본디 과주(果州) 남충현(南充縣)의 한녀(寒女)인데 천태산(天台山)의 사마자미(司馬子微)에게 도술을 배워 신선이 되어 갔다. 한유(韓愈)의 시에 보임.
♣ 사자제[四字題]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경남 하동(河東) 쌍계사(雙磎寺) 암벽에 새겨 놓은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를 말한다.
♣ 사자차시학[寫字此是學]글자를 베끼는 것이 바로 배움이라는 뜻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글자를 베껴 쓰면 그 베껴 쓰는 일 자체가 이미 갈고 닦는 학문이라는 의미.
♣ 사자화[師子花]사자화는 당 나라 곽자의(郭子儀)의 명마(名馬) 이름이다.
♣ 사자후[獅子吼]사자의 부르짖음이란 말로써 웅변을 토한다는 의미. 부처의 설법에 뭇 악마가 굴복한 데서 ‘부처의 설법’을 의미하거나, 진리나 정도를 설하여 사설(邪說)을 갈파하는 것을 의미함. 유마경(維摩經) 불국품(佛國品)에 “두려움 없이 설법하는 것이 마치 사자가 우는 소리와 같다.” 한 데서 나온 말로, 본래 설법하는 소리가 세계를 진동하여 마치 사자의 울음에 뭇 짐승들이 모두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 사장[謝莊]남송(南宋) 사람. 자는 희일(希逸). 사부(詞賦)로 유명하였음.
♣ 사장[詞丈]사장은 문단의 어른이라는 뜻이다.
♣ 사장[社長]한 마을의 우두머리. 이장(里長)과 같다.
♣ 사장군[謝將軍]진(晉) 나라 사상(謝尙)이 우저(牛渚)에서 놀았다.
♣ 사장취거[詞場觜距]취거(觜距)는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각각 역량을 뽑내며 선두를 다투는 문단(文壇)을 말한다.
♣ 사재[四載]네 가지 타는 것. 물에서는 배를 타고, 뭍에서는 수레를 타고, 뻘밭에서는 널을 타고, 산에 오를 때는 나막신을 신음. 《書經 益稷》
♣ 사재[四材]신(身), 언(言), 서(書), 판(判)을 말한다.
♣ 사저수[死猪愁]당 덕종(唐德宗) 때 노기(盧杞)가 괵주 자사(虢州刺史)로 있으면서, 괵주에 있는 관시(官豕) 3천 마리가 백성들에게 큰 걱정거리가 된다고 상주(上奏)하자, 덕종이 동주(同州)의 사원(沙苑)으로 옮기라고 하니, 노기가 “동주도 폐하의 백성이니, 돼지를 잡아먹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던 고사에서 온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 사전[社錢]마을 또는 일정한 지방 단위의 조직을 사(社)라 하는데, 이를 통해 그 주민으로부터 거두는 돈을 말한다.
♣ 사전[師傳]사승(師承)과 같은 말이다.
♣ 사전의발[師傳衣鉢]사제(師弟)를 비유한 말인데, 의는 가사(袈裟), 발은 발우(鉢盂)로 선종(禪宗)에서 법통(法統)을 전수(傳授)할 때 신표(信表)로 사용하는 것이다. 《傳燈錄一》
♣ 사전춘추[四傳春秋]원제(原題)는 춘추사전(春秋四傳)으로서 모두 38권으로 되어 있는데 편자(編者)는 미상임. 맨 처음에 두예(杜預)ㆍ하휴(何休)ㆍ범녕(范寗)ㆍ호안국(胡安國)의 4서(序)가 실려 있고 다음으로 강령(綱領)ㆍ제요(提要)ㆍ열국도설(列國圖說)ㆍ이십국년표(二十國年表)ㆍ춘추제국흥폐설(春秋諸國興廢說)이 기재되어 있는데, 경문 아래에 모두 좌씨(左氏)ㆍ공양(公羊)ㆍ곡량(穀梁)의 3전(傳)의 주(注)를 내고 호전(胡傳)은 따로 표출(標出)하였음.
♣ 사절[使節]관찰사의 별칭.
♣ 사정[砂井]단사정(丹砂井)의 준말. 고대에 있었다는 전설상의 샘으로, 이 샘 밑에는 단사(丹砂)가 묻혀 있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 장수하였다 한다. 《抱朴子 仙藥》
♣ 사정[司正]향음주(鄕飮酒)의 예에서 빈주(賓主)의 예를 바로잡아 주는 사람을 이름. 《儀禮 鄕飮酒禮》
♣ 사제[社祭]봄과 가을의 사일(社日)에 농촌에서 지내는 제사로, 이날에는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를 즐긴다.
♣ 사제[蜡祭]사제는 납향(臘享) 제사라는 말인데, 연말(年末)에 올리는 감사(感謝)와 기원(祈願)을 위한 제(祭)이다.
♣ 사제[沙堤]새로 재상이 된 것을 뜻함. 당(唐) 나라 때 누구나 새로 재상이 되었을 때는 그의 사제(私第)로부터 성(城)의 동가(東街)에 이르기까지의 길에 모래를 죽 깔고 이를 ‘모래 둑[沙堤]’이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李德裕傳》
♣ 사제갈주생중달[死諸葛走生仲達]죽은 공명에게 살아있는 중달이 쫓겨가다.
♣ 사제동행[師弟同行]스승과 제자가 함께 간다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가 한 마음으로 배워나간다는 의미라서 학교에서 사제가 함께 하는 교육활동의 총칭으로 사용됨.
♣ 사제로[沙堤路]재상이 되었음을 의미한 것. 당(唐)나라 때의 풍속에 처음으로 재상이 된 사람은 그의 사제(私第)에서부터 성 동쪽 거리까지 모래로 길을 메웠는데, 그것을 일러 모래둑[沙堤]이라고 하였음. 《唐故事》
♣ 사제조슬[仕齊操瑟]제왕(齊王)이 비파를 싫어하는데, 제 나라에 벼슬하려는 사람이 비파를 가지고 문에 서 있는 지 3년이 되어도 들어가지 못했다. 객이 꾸짖기를, “왕은 피리를 좋아하는데 자네가 비파를 치니, 비파는 잘 쳐도 왕이 싫어함을 어쩌랴.” 하였다.
♣ 사조[姒姚]조사(姚姒)를 거꾸로 쓴 것으로, 사(姒)는 하우(夏禹)의 성(姓), 조(姚)는 우순(虞舜)의 성, 순(舜)ㆍ우(禹)성군(聖君) 때 말씀과 글.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위로 조와 사를 엿보건대 아득히 가이 없다[上規姚姒 渾渾無涯].” 하였다.
♣ 사조[謝眺]남제(南齊) 사람. 자는 현휘(玄暉)임. 시인(詩人). 특히 오언시(五言詩)를 잘 지어 시가 청아하고 아름다웠으며 글씨도 잘 썼음. 일찍이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을 적에 산 남쪽에 높은 누대(樓臺)를 짓고 앞 산의 경치를 감상하였으므로, 후대에 이 누대를 사공루(謝公樓), 사루(謝樓)라 하고 그 산 이름을 사공산(謝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南齊書 卷47 謝眺列傳》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에 “청산과 가까운 집 사조와 한가지요, 푸른 버들 드리운 문 도연명과 흡사하네.[宅近靑山同謝朓 門垂碧柳似陶潛]”라는 표현이 있다.
♣ 사조[射潮]북몽쇄언(北夢瑣言)에 “항주(杭州)에 해마다 조수가 밀려들므로 오월왕(吳越王) 전유(錢鏐)가 궁노(弓弩)를 설치하였다가 조수가 밀려들 적에 쏘니, 조수가 물러가 육지가 되었다.” 하였다.
♣ 사조[射鵰]북제서(北齊書) 곡률우전(斛律尤傳)에 “곡률우가 사냥하다가 한 마리의 큰 새를 발견하고 쏘아 그 머리를 명중시켰는데 마치 수레바퀴 같은 물체가 빙빙 돌면서 떨어졌다. 바로 보라매였다. 형자고(邢子高)가 보고 이는 옛날에 보라매 쏘던 사람의 솜씨이다.’고 감탄했다.” 하였다.
♣ 사조[謝祖]진(晉) 나라 때 난리를 평정한 명장인 사현(謝玄)과 조적(祖逖)을 지칭한다.
♣ 사조구[謝眺句]이백(李白)의 “푸른 산에 가까운 집 사조와 같고, 푸른 버들 드리운 문 도잠과 비슷하네.[宅近靑山同謝眺 門垂碧柳似陶潛]”라는 구절처럼 《李太白集 卷25 題東溪公幽居》 집 주위의 멋진 산 경치를 표현할 때에는 으레 사조를 떠올리곤 하는데, 이는 남조 제(齊)의 시인인 사조가 종산(鍾山) 아래에다 별장을 지어 놓고는, ‘유동전(遊東田)’이라는 시를 지은 고사에서 유래하는 바, 그 시의 말구(末句)에 “향기로운 봄 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푸른 산의 성곽만 머리 돌려 바라보네.[不對芳春酒 還望靑山郭]”라는 표현이 나온다. 《文選 卷22》
♣ 사조별[四鳥別]모자(母子)가 서로 이별함. 네 마리의 새끼 새가 그 어미를 떠난다는 고사에서 비롯됨.
♣ 사조산[謝脁山]남제(南齊) 때의 시인(詩人) 사조(謝脁)가 일찍이 청산(靑山) 아래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이를 사공산(謝公山)이라 이름한 데서 온 말인데, 이백(李白)의 시에는 “사조가 죽고 나니 청산이 비어버렸네[謝脁已沒 靑山空].”라고도 하였다.
♣ 사조산[謝朓山]사조는 남제(南齊)의 시인으로, 종산(鍾山) 아래 동산에 별장을 지어 놓고 노닐면서 ‘유동원(遊東園)’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매우 섬세한 감각으로 청신(淸新)한 시를 지어 이백(李白)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는데, 이백의 시 ‘제동계공유거(題東溪公幽居)’에 “청산에 가까운 집 사조와 같고, 푸른 버들 드리운 문 도잠과 흡사하네.[宅近靑山同謝朓 門垂碧柳似陶潛]”라는 표현이 있다.
♣ 사조선성[謝朓宣城]남제(南齊)의 시인이었던 사조(謝脁)는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으면서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몹시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 사조위성증만리[射鵰威聲曾萬里]사조(射鵰)는 물수리를 쏘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뛰어난 활솜씨를 말함. 한(漢) 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이 일찍이 흉노(匈奴)와 싸울 적에 이광을 따라갔던 중귀인(中貴人)이 흉노 3인의 사격을 받아 상해를 입고 돌아오자, 이광이 “이들은 반드시 물수리를 떨어뜨릴 만한 활솜씨가 있는 자들이다.” 하고는, 곧장 그 흉노 3인을 추격하여 2인은 사살하고 1인은 생포함으로써 위엄을 크게 떨쳤던 고사이다. 《史記 卷一百九》
♣ 사족[蛇足]뱀의 발. 뱀을 그릴 때 발까지 그린다는 ‘화사첨족(畫蛇添足)’의 준말로, 유해무익(有害無益)한 도로(徒勞)를 뜻하는 말이다. 뱀을 그리는데 실물에는 없는 발까지 더하여 그림. 쓸데없는 짓. 안 해도 될 쓸데없는 일을 덧붙여 하다가 도리어 일을 그르침
♣ 사족실배[蛇足失杯]쓸데없는 짓을 하면 손해를 본다는 뜻. 옛날 어떤 사람이 제사를 지낸 다음 그의 집에 사는 사람에게 술 한 잔 주었는데 두 사람이 마시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상의하기를 땅에다가 뱀을 그리기 시합하여 먼저 끝내는 자가 마시기로 하였다. 한 사람은 뱀을 다 그려 술을 먹게 되었는데, 왼손에는 잔을 들고 오른손에는 다시 땅을 그으며 “나는 뱀의 발까지 그리겠다.” 하고 발을 그렸으나 끝나기도 전에 상대편 역시 뱀을 다 그리고는 잔을 빼앗으며 “뱀은 원래 발이 없는데 자네가 어떻게 그리겠는가.” 하며 술을 마셨다 한다. 《戰國策 齊策》
♣ 사종[思宗]명 장렬제(明莊烈帝)의 시호. 장렬제는 이자성(李自成)의 난에 북경이 함락되자 만세산(萬歲山)에서 자살하였다. 처음 사종이라 하였다가 후에 의종(毅宗)으로 개시(改諡)하였고, 청(淸) 건륭(乾隆) 때에 다시 장렬제(莊烈帝)로 고쳤다.
♣ 사종[嗣宗]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진(晉) 나라 완적(阮籍)의 자(字)임.
♣ 사종곤슬유[嗣宗褌蝨喩]편협한 견해로 일시적인 안일만을 구차하게 취하는 것을 말한다. 사종(嗣宗)은 진(晉) 나라 완적(阮籍)의 자(字).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에 “군자가 이 세계 안에 처하는 것이 어찌 이가 잠방이 속에 틀어박혀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있으랴.”고 하였다.
♣ 사종백[嗣宗白]사종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인 완적(阮籍)의 자. 완적은 본디 예의를 숭상하지 않아, 자기 모친상을 당했을 때 친구 혜희(嵇喜)가 예모를 갖추어 조문을 가자, 완적이 불쾌하게 여겨 그를 백안(白眼)으로 보았고, 그후 혜희의 아우 혜강(嵇康)이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왔을 때는 완적이 크게 기뻐하여 그를 청안(靑眼)으로 보았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 사종비[嗣宗悲]세상 떠난 벗에 대한 추억이 간절해지리라는 말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황씨(黃氏)네 술집을 지나가면서 “내가 옛날 완사종(阮嗣宗)과 혜숙야(嵇叔夜)와 함께 여기에서 질탕하게 마시며 노닐었는데, 이제 그들이 죽고 난 뒤에는 내가 그만 세상에 얽매어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다. 《晉書 王戎傳》
♣ 사종비달사[嗣宗非達士]진(晉)나라의 완적(阮籍)의 자가 사종이다. 그는 세상 일을 피하노라고 술을 많이 먹고 취한 것으로 세상을 속였다. 그는 가다가 길이 막히면 통곡하고 돌아왔다 한다.
♣ 사주[社酒]봄 가을 사일(社日)에 토지신(土地神)에 제사를 지내고 모여서 마시던 술.
♣ 사주[史籒]선왕 때의 태사(太史). 그가 대전(大篆)을 만들었기 때문에 대전을 일명 주문(籒文)이라고도 함.
♣ 사주[賜酒]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내리는 것인데, 으례껏 술을 내리는 것을 ‘사주’라 한데 반해, 술과 함께 내찬(內饌)을 별도로 내리는 것을 ‘선온(宣醞)’이라 한다.
♣ 사주문[史籒文]사주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태사(太史)로서 대전(大篆) 15편을 지었는데, 여기서는 곧 대전체(大篆體)를 가리킨다.
♣ 사주팔자[四柱八字]사주의 간지(干支)가 되는 여덟 글자. 생년(生年) 생월(生月) 생일(生日) 생시(生時)를 말함. 타고난 신수(身數). 즉 사주에 의해 정해진 피할 수 없는 운수를 의미하기도 함.
♣ 사죽[絲竹]사죽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왕희지(王羲之)가 회계(會稽) 산음(山陰)에서 그 유명한 난정(蘭亭)의 모임을 개최할 때, “풍악은 비록 울리지 않았어도 술 한 잔에 한 곡조씩 뽑으면서 그윽한 감회를 풀었다.[雖無絲竹管絃之聲 一觴一詠亦足以暢舒幽情]”는 고사가 있다. 《晉書 王羲之傳》
♣ 사준성경당여제[事遵誠敬當如祭]어떤 일에든 정성과 공경을 다함을 말한다. 제사지낼 때에는 특별히 공경하므로 “일을 받들기를 제사지낼 때처럼 한다.[承事如祭]"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 사중[四重]중하게 여겨야 할 네 가지 일. 말을 중히 하고, 행동을 중히 하고, 얼굴 모양을 중히 하고, 좋아하는 것을 중히 하는 것.[重言重行重貌重好]. 《法言 修身》
♣ 사중구활[死中求活]죽음 가운데 삶을 구한다는 뜻으로,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아냄을 의미함. 사중구생(死中求生).
♣ 사중상호[紗中像護]당(唐)의 이번(李藩)이 미천했을 때 한 중이 “공은 사롱(紗籠) 안에 있는 사람이다.” 했다. 그 까닭을 묻자 “명부(冥府)에서는 장래 재상될 사람의 화상을 사롱에 넣어 수호하고 있다.” 대답했다.
♣ 사중우어[沙中偶語]모반(謀反) 또는 배신(背信)을 뜻함.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功臣) 20여 인을 봉하고 난 후, 그 나머지 사람들이 가끔 모래 위에 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므로, 고조가 그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가?"고 묻자, 장량(張良)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셨습니까? 저들이 바로 모반을 하는 것입니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留侯世家》
♣ 사지[謝池]남조(南朝) 송(宋)의 문장가 사혜련(謝惠連)이 10세에 벌써 글을 잘 지으므로, 족형(族兄)인 사영운(謝靈運)이 편장(篇章)을 지을 때마다 혜련에게서 좋은 말을 얻곤 하였다. 한번은 사영운이 영가서당(永嘉西堂)에서 종일토록 시(詩)를 생각했으나 좋은 구절을 이루지 못했는데, 갑자기 꿈에 족제(族弟)인 혜련(惠連)을 만나 “못 둑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라는 구절을 얻고는 매우 만족하게 여겼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南史 卷十九》
♣ 사지[四知]후한(後漢) 양진(楊震)이 왕밀(王密)을 추천하였더니, 왕밀이 창읍령(昌邑令)으로 가면서 밤에 황금 10근(斤)을 품고 가 그에게 주며 “어두운 밤에 알 자가 없다.” 하니, 그가 말하되,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자네가 알고 내가 아니, 어찌 앎이 없다 하느뇨.[天知神知子知我知 何得無知]”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 사지금[四知金]전한(前漢) 말기 사람 양진(楊震)은 청렴하여 사(私)를 두지 않았다. 그가 왕밀(王密)을 천거하여 창읍령(昌邑令)을 삼았다. 왕밀이 고맙다고 찾아와 10금(金)을 내놓으면서 밤이니 누가 알겠느냐고 하였다. 양진은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 또한 알지 않는가?" 하고 꾸짖었다.
♣ 사지당몽[謝池塘夢]남조(南朝) 송(宋) 나라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집안의 아우 사혜련(謝惠連)의 시를 늘 칭찬했는데, 하루는 뜨락의 연못 가에서 종일 신음만 하며 시를 짓지를 못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 혜련을 보고 깨어나서는, “연못가에 봄풀이 돋는구나.[池塘生春草]”를 얻어 뛰어난 시구라고 감탄했다 한다.
♣ 사지오등[死之五等]죽음의 다섯 등급이라는 뜻으로, 고대 시절 사람의 다섯 등급에 의해 죽음의 명칭을 달리한다는 의미. 곧 왕은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錄), 서민은 사(死)라 칭함.
♣ 사직[社稷]토지신과 곡식신의 의미에서 종묘와 함께 국가의 근간의 의미함.
♣ 사직위허[社稷爲墟]사직(社稷)이 폐허가 된다는 뜻으로, 국가의 멸망을 이르는 말.
♣ 사직지기[社稷之器]국가의 중임을 맡을 만한 인재.
♣ 사직지신[社稷之臣]사직(社稷)의 신하라는 뜻으로,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맡은 중신(重臣)의 의미.
♣ 사직지역[社稷之役]국가에 공이 있는 신하.
♣ 사직지환[社稷之患]국가의 근심. 국난(國難).
♣ 사진[謝榛]명(明)의 임청(臨淸) 사람. 자는 무진(茂榛)이며 호는 사명산인(四溟山人)으로 시가(詩歌)에 능했으며 당시의 문장이었던 이반룡(李攀龍)ㆍ왕세정(王世貞)과 함께 연시(燕市)에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장(長)으로 추대되었다.
♣ 사진당유조장군[寫眞儻有曹將軍]조 장군은 당(唐)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패(霸), 말 그림을 잘 그려 조야백(照夜白)과 사자화(師子花)의 그림을 그렸다.
♣ 사차불피[死且不避]죽어도 또한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죽음을 도피하지 않는데, 하물며 딴 것에 있어서랴라는 강한 정신적 무장을 의미함.
♣ 사차불후[死且不朽]죽어도 또한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몸은 죽어 썩어지지만 명성(名聲)은 길이 후세에까지 남는다는 의미.
♣ 사창[社倉]각 고을에 두어 환곡(還穀)을 받아 저장해두는 창고.
♣ 사책[射策]사책은 옛날 선비를 시험하던 한 방법으로 경서(經書) 또는 정치상의 의문을 죽간(竹簡)에 쓰게 하여 이것으로 우열을 분별하던 제도인데 곧 과거를 가리킨 것이다. 한서(漢書) 소망지전(蕭望之傳)에 “사책갑제(射策甲第)로 낭관(郞官)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사책은 어려운 문제와 의심스러운 것을 책(策)에 써서 제출하게 하여 이것에 따라 우열(優劣)을 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사천[史遷]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을 가리킨다. 20세 때부터 중국 전토(全土)를 종횡무진 유력(遊歷)하며 견문을 넓혔다.
♣ 사천[司天]사천은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 사천[槎川]조선 영조(英祖) 때의 문신(文臣) 이병연(李秉淵)의 호. 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인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다.
♣ 사천[斜川]중국 강서성의 호숫가에 있는 지명으로, 도잠(陶潛)이 일찍이 여기에서 이웃 사람들과 모여 노닌 적이 있었다.
♣ 사천구이릉[史遷救李陵]사기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말미에, 태사공(太史公)이 이르기를, “그가 죽던 날 이 세상에서 그를 아는 이 모르는 이 할 것 없이 모두 너무 슬퍼하였다. 그의 충직하고 진실된 마음이 사대부(士大夫)들에게 평소 미쁨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였음.
♣ 사철[駟鐵]사철은 검은 무쇠 빛깔의 사마(駟馬). 춘추 시대 진 나라의 선조 비자(非子)는 말을 잘 길러 이 공로로 진 나라에 봉해졌으며 양공은 말을 잘 달려 서융(西戎)을 몰아내고 평황(平王)을 도왔는데, 이것을 읊은 시경(詩經) 진풍(秦風) 사철(駟鐵)에 “사철이 매우 크니 여섯 고삐가 손에 있다.” 하였다.
♣ 사총[四聰]사방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으로 간(諫)하는 길을 여는 것. 《書經 舜典》
♣ 사총[思聰]송(宋) 나라 승려. 7세 때 이미 거문고를 잘 탔고, 12세가 되어서는 거문고를 놓고 서(書)를 배우다가 15세 때는 많은 기어(奇語)를 남겼음. 《新續高僧傳 卷四十二》
♣ 사충[沙蟲]전란(戰亂)의 희생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주 목왕(周穆王)이 남정(南征)할 때 군사들의 몸이 하루아침에 모두 바뀌어 장교는 원숭이와 학이 되고 사병은 모래와 벌레[沙蟲]가 되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抱朴子 內篇 釋滯》
♣ 사친이효[事親以孝]부모 섬기기를 효도로써 한다는 뜻으로, 세속오계의 하나.
♣ 사칠운대상[四七雲臺像]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남궁(南宮) 운대(雲臺)에 전대의 공신을 추념하여 등우(鄧禹) 등 28명의 장수 초상을 그려 놓은 것을 말함.
♣ 사탈궁유[屣脫弓遺]사기(史記) 封禪書에 “용이 수염을 드리우고 내려와서 황제(黃帝)를 맞았는데 황제가 타고 올라가며 활을 떨어뜨리니 백성들이 활을 안고 울었다.”는 말이 있다.
♣ 사태부[謝太傅]진(晉) 나라 사안(謝安)은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안석(安石)인데 벼슬이 상서복야(尙書僕射)로 태보(太保)에 이르렀음. 태부를 증직하여 세상에서 사 태부라 칭함. 사안이 동산(東山)에 숨어살면서 국가의 부름을 불고했는데 간문제(簡文帝)가 그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사안은 원래 즐거움을 남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므로 틀림없이 걱정도 남과 함께 나누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다.” 하고 불러서 오게 하였음. 《晉書 謝安傳》
♣ 사택향[麝澤香]사향 향기란 곧 고인들이 먹의 향기를 사향의 향기에 비유하여 먹을 사매(麝煤)라고 부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 사통오달[四通五達]길이나 교통망, 통신망 등이 사방으로 막힘 없이 통함.
♣ 사통팔달[四通八達]사면 팔방으로 다 통한다는 뜻으로, 길이 막힘 없이 사면 팔방으로 모두 통해있음을 의미하는 말. 사통오달(四通五達), 사달오통(四達五通).
♣ 사퇴산[四隤山]사퇴산은 초 패왕(楚覇王) 항우(項羽)가 단지 28기(騎)만을 가지고 한(漢) 나라의 수천 군사와 최후의 일전(一戰)을 벌인 곳이다.
♣ 사파식근[事頗食芹]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뜻이다. 옛날 시골 사람이 미나리 맛이 천하에 제일이라고 여긴 나머지 높은 사람에게 바치려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列子 楊朱》
♣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
♣ 사팔[四八]사상 팔괘. 周易 繫辭上의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에서 나온 것으로, 태양(太陽)ㆍ태음(太陰)ㆍ소양(少陽)ㆍ소음(少陰)과 건(乾)ㆍ곤(坤)ㆍ감(坎)ㆍ이(離)ㆍ손(巽)ㆍ진(震)ㆍ간(艮)ㆍ태(兌)이다. 사상에 대해 혹자는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로 보아 사계절로 해석하기도 한다.
♣ 사편[絲編]임금의 조칙
♣ 사포록[包鹿]포록(包鹿)은 노루고기를 싼 것을 가리킨다.
♣ 사표[四表]사방
♣ 사표[謝表]임금의 은혜에 사례하는 글.
♣ 사표광이상하격[四表光而上下格]서경(書經)에 요(堯)의 덕(德)을 칭찬하는 말에, “빛이 사표(四表)에 입혀서 상하에 이른다[光被四表 格于上下].”는 구절이 있다.
♣ 사필구수[死必丘首]“새는 날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토끼는 뛰어 굴로 돌아가며, 여우는 죽을 적에 제 살던 언덕으로 머리둔다.[狐死首丘]”
♣ 사필귀정[事必歸正]일은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감. 곧, 무슨 일이든 결국은 올바른 이치대로 된다는 말. 올바르지 못한 것은 오래가지 못함. 즉, 정의가 결국은 승리한다는 말
♣ 사하변[祀河邊]한무제(漢武帝)가 하동(河東)에 행차하여 후토사(后土祠)에 제사 지내고 돌아오다가 분하(汾河)에서 즐겁게 놀았다.
♣ 사학[師學]스승을 통하여 배우는 것으로 곧 연원(淵源)이 있는 학문을 말함. 순자(荀子) 정론(正論)에 “사람을 모아서 사학을 세우고 문장을 이룬다.[衆人徒 立師學 成文典]" 하였음.
♣ 사한[詞翰]사한객(詞翰客)의 준말로 뛰어난 문사(文士)를 뜻한다.
♣ 사한[司寒]사한은 겨울을 맡은 신의 이름으로, 겨울철이 되었음을 뜻한다.
♣ 사해[沙海]계신잡지(癸辛雜誌)에, “서역국(西域國)에 사해(沙海)가 있는데, 바로 요진(要津)을 점거하였고, 그 물 역시 더워서 끓어오를 정도다. 하늘이 이 물로써 화(華)와 이(夷)를 한계한 것이다.” 하였음.
♣ 사해다루[四海多壘]사방 곳곳에 전쟁이 많아 서로 경계 상태에 있다는 것임.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 “사방에 보루가 많은 것은 경대부의 수치이다.” 하였고, 그 주에 “자주 침략을 받으면 보루가 많다.” 하였다.
♣ 사해동포[四海同胞]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포라는 뜻으로, 온 세계 사람들이 형제처럼 친밀함을 의미하는 말. 四海兄弟(사해형제).
♣ 사해오우[四海吾友]온 천하가 형제처럼 친하다는 뜻.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자하(子夏)는 ‘공경하여 실수함이 없으며 공손하고 예가 있으면, 사해 안이 모두 형제이다.’ 했다.” 하였다.
♣ 사해위가[四海爲家]온 세상이 집이 된다는 뜻으로, 천하를 제 집안으로 만든다는 의미로는 제업(帝業)의 광대함을 이르고, 온 나라 어느 곳에도 집이 있다는 의미로는 떠돌아다니며 일정한 주거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됨.
♣ 사해형제[四海兄弟]사해는 온 천하는 가리키는 것으로 천하의 모든 사람은 모두 동포요 형제라는 뜻.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사마우(司馬牛)가 근심스레 ‘남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다.’ 하자, 자하(子夏)는 ‘공경하고 예의를 지키면 사해의 안이 모두 형제이니 형제 없는 것을 근심하는가.’ 했다.” 하였다.
♣ 사행[射倖]뜻밖의 행운을 바람.
♣ 사행[士行]진(晉) 나라 때 반란을 평정하고 대장군에 오른 도간(陶侃)의 자(字)이다. 범규(范逵)가 집을 방문했을 때, 도간의 모친이 머리카락을 잘라 주효(酒肴)와 바꾸었던 유명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6》
♣ 사행고류빈[士行苦留賓]사행은 진(晉) 나라 도간(陶侃)의 자. 도간이 젊어서 가난할 적에 범규(范逵)가 갑자기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아무 것도 대접할 것이 없자, 도간의 모친이 머리털을 깎아서 그것으로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마련하여 대접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六十六》
♣ 사행삭질[射幸數跌]요행(僥倖)을 노려 쏘는 화살은 번번이 차질(蹉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사행심(射倖心)으로 하는 행위는 성취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
♣ 사현[四懸]사현은 천자(天子)의 사면(四面)에 설치하는 악기(樂器)를 거는 틀을 말한다.
♣ 사현[沙峴]서울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던 고개 이름.
♣ 사현벽상현[蛇懸壁上弦]술을 마시다가 벽 위에 걸린 활이 잔에 비친 것을 뱀으로 알고 병이 났다는 고사(古事). 《晋書 樂廣傳》
♣ 사현부[思玄賦]고민하는 심정을 읊은 노래를 말한다. 후한(後漢) 화제(和帝) 때 장형(張衡)이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환관들이 전횡하여 뜻을 얻지 못하게 되자, 길흉 화복의 현원(玄遠)한 도를 생각하며 ‘사현부’를 지은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59 張衡列傳》
♣ 사현부[思玄賦]후한서(後漢書) 권59권에 “순제(順帝)ㆍ화제(和帝) 때 국가의 정사가 혼란해지자 장형(張衡)이 정사에 대하여 말하려 하였으나 이를 안 환관들의 참소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부를 지어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하였다.
♣ 사현휘[謝玄暉]현휘는 남제(南齊) 때의 시인 사조(謝眺)의 자(字). 오언시(五言詩)에 능했다. 선성 태수(宣城太守)를 지냈으므로 사선성(謝宣城)이라 함. 저서에는 사선성집(謝宣城集)이 있다. 《南齊書 謝玄暉傳》
♣ 사혈가입[使穴可入]구멍을 따라 들어갈 만 하다는 뜻으로, 부끄러워서 숨을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다는 의미의 성어.
♣ 사형[士衡]진(晋) 육기(陸機)의 자.
♣ 사혜련[謝惠連]진(晉)의 문장가 사영운(謝靈運)의 종제(從弟)인데, 또한 문장이 뛰어났다.
♣ 사호[使乎]전대(專對)는 사신이 외국에 나가 독자적으로 임기응변하며 응답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백옥(蘧伯玉)의 사신이 전대를 잘 하자 공자(孔子)가 훌륭한 사신[子曰 使乎使乎]이라고 두 번이나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論語 憲問》
♣ 사호[四皓]진(秦) 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살던 상산사호(商山四皓). 로 곧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인데, 이들은 뒤에 장량(張良)의 초청에 의하여 한 나라로 돌아와 당시 태자였던 혜제(惠帝)를 보필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 사호귀[四皓歸]한 나라 고조(高祖) 때 고조가 태자를 폐하고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이에 대해 간하였으나 고조의 뜻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때 진(秦) 나라의 학정을 피하여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어 살던 상산사호(商山四皓), 즉 동원공(東園公), 녹리 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등이 장량(張良)의 권유에 의해 산에서 내려와 태자의 우익(右翼)이 되자, 그제서야 고조가 뜻을 돌려 태자를 폐하지 않았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 사호귀한[四皓歸漢]한고조(漢高祖)가 장량(張良)의 기이한 꾀를 써서 황제의 공업(功業)을 이루어서 장량을 유후(留侯)에 봉하였다. 고조가 척부인(戚夫人)이 낳은 아들 여의(如意)를 사랑하여 여후(呂后)가 낳은 태자를 폐하려 하였으나, 여후가 장량의 꾀를 써서 상산(商山)에 숨어사는 사호(四皓)를 불러 와서 태자를 보좌하여 폐위(廢位)를 면하게 하였다.
♣ 사호장[四皓藏]파공(巴邛) 어떤 집에 귤(橘)나무가 있었는데, 서리가 온 뒤에 귤을 다 따고 두 개가 남아 있는데 크기가 삼사 두(三四斗)가 들어가는 독만큼 컸다. 따 보니 무게도 보통 귤과 같았다. 쪼개어 본즉 귤마다 흰 수염에 살결은 홍명(紅明)하고 키는 한 자 남짓한 두 노인이 장기[象戱]를 두며 웃고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한 노인이 말하기를, “이 가운데 즐거움이 상산(商山)보다 못하지 않은데 다만 오래 있을 수는 없구나.” 하고는 네 노인이 구름 속으로 올라가 버렸다.
♣ 사호전신[射虎前身]영웅호걸의 기상을 지녔던 인물이라는 말이다. 한(漢) 나라 이광(李廣)과 삼국 시대 오(吳) 나라의 손권(孫權)과 송(宋) 나라 육유(陸游)가 호랑이를 쏘아 잡았던[射虎] 고사가 있다.
♣ 사홍심[射鴻心]젊은 시절에 매사를 전심치지(專心致志)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는 말로, 혁추(奕秋)가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칠 때 한 사람은 바둑에만 전심치지를 하고, 한 사람은 마음 한 구석에 홍곡(鴻鵠)이 이르거든 주살을 당겨 쏘리라고 생각을 할 경우, 똑같이 바둑을 배우더라도 그 전심치지한 사람에 미칠 수 없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告子上》
♣ 사화[士華]남곤(南袞)의 자.
♣ 사화우[四花雨]부처가 설법할 제는 하늘에서 분타리화(芬陀利花)등 네 가지 꽃이 비오듯한다 하였다.
♣ 사환[賜環]환은 임금의 뜻을 전달하는 옥으로 된 고리이다. 죄를 지은 신하가 변방으로 좌천되어 가게 되면 3년이 지나도 감히 올 수가 없는데, 임금이 환(環)을 주면 돌아오라는 것이요, 결(玦)을 주면 사사(賜死)한다는 것이다. 《荀子 大略》
♣ 사활[司活]연산군 때에 의술에 정통한 의원을 부르던 말이다.
♣ 사황[嗣皇]사황은 뒤를 이어 즉위(卽位)한 황제를 말한다.
♣ 사회[謝晦]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 사람. 소제(少帝)가 즉위한 뒤 중서령(中書令)으로서 서연지(徐羨之) 등과 국정(國政)을 보좌하다가 이윽고 폐립(廢立)하는 계책을 세웠는데, 문제(文帝)가 즉위하여 서연지 등을 베므로 그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일으켜 반기를 들었으나 마침내 패하여 복주(伏誅)되었다.
♣ 사회남곽[死灰南郭]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있는 말. 남곽자기(南郭子綦)란 사람이 멍하니 의자에 기댄 채 한숨을 쉬고 있자, 시중들던 안성자유(顔成子游)가 “몸은 본시 마른 나무처럼 만들 수 있으며 마음은 본래 불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남곽자기는 그렇다고 하였다.
♣ 사회부연[死灰復燃]식은 재가 다시 탄다는 말은 곧 세력을 잃은 사람이 세력을 다시 회복함을 뜻함. 양 효왕(梁孝王) 때의 장군 한안국(韓安國)이 죄에 걸렸을 적에 옥리(獄吏)전갑(田甲)이 그에게 곤욕을 주자, 한안국이 말하기를 “식은 재는 다시 타지 않는다더냐.” 하니, 전갑이 말하기를 “타기만 하면 오줌을 싸버리겠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八 韓安國傳》
♣ 사효극왕융[死孝劇王戎]어버이의 상(喪)을 당해 멸성(滅性)을 면하지 못할 정도로 애훼(哀毁)의 정(情)을 극진히 한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왕융(王戎)이 모친상을 당해 예제(禮制)를 따르지 않고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도 피골이 상접하여 지팡이를 짚어야만 일어나곤 하였는데, 당시에 이를 두고 사효(死孝)라고 찬탄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43 王戎傳》
♣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죽은 뒤에 처방을 내려줌. 시기를 놓친 것을 의미한다.
♣ 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죽은 뒤의 약. 시기를 놓친 것을 의미한다.
♣ 사훈[司勳]관리의 훈적(勳績)과 고신(告身)을 맡는 관명(官名)인데, 두목(杜牧)이 일찍이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다.
♣ 사휴[四休]사휴는 자족(自足)하며 안락(安樂)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태의(太醫) 손방(孫昉)이 사휴거사(四休居士)라고 자호(自號)하였는데, 황정견이 그 뜻을 묻자 “간단히 밥과 차를 들다 배부르면 그만 먹고, 옷을 기워 추위를 막다 따뜻하면 그만 입고,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과하다 싶으면 그만두고, 욕심도 질투도 내지 않다 늙어지면 그만 쉰다.[麤茶淡飯飽卽休 補破遮寒暖卽休 三平二滿過卽休 不貧不妬老卽休]”고 말한 일화가 황정견(黃庭堅)의 ‘사휴거사시서(四休居士詩序)’에 나온다.
♣ 사흉[四凶]요(堯) 임금 시대의 흉악한 네 신하인 환도(驩兜)ㆍ삼묘(三苗)ㆍ공공(共工)ㆍ곤(鯀). 이들이 조정을 어지럽히므로 요 임금이 모조리 먼 곳으로 내쳤음. 순(舜)의 때에 이르러 비로소 제거하였다.
♣ 삭거[索居]이군삭거(離群索居)의 준말로, 친구와 떨어져서 홀로 적막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禮記 檀弓上》
♣ 삭계[朔啓]호당(湖堂)에 선발된 사람이 월말에 제술(製述)하여 올리면 대제학(大提學)이 등급을 매겨서 월초에 보고하는 제도.
♣ 삭과[削瓜]외를 쪼갠 것
♣ 삭교[朔窖]한 무제(漢武帝) 때 소무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을 때 흉노가 그를 움집에 집어넣고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는데 때마침 내리는 눈과 모직물의 털을 씹어 먹으면서 소무가 절조를 굽히지 않았다. 《漢書 卷54》
♣ 삭막[朔漠]중국 북방의 사막(沙漠) 지대. 곧 지금의 고비사막.
♣ 삭방[朔方]중국 섬서성(陜西省) 서북방이다.
♣ 삭삭[削削]매우 약한 모양, 매우 약하다
♣ 삭삭[數數]사마표의 주에, “급급(汲汲)한 것이다.”라 했음.
♣ 삭시[數詩]매연(每聯)마다 1부터 10까지 숫자로 시작되는 시를 말하는데, 포조의 이 오언시는 문선(文選) 제30권 잡시 하(雜詩下) 에 실려 있다. 포조(鮑照)는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으로, 그의 시문집인 포참군집(鮑參軍集)이 전해진다.
♣ 삭운한국[朔雲寒菊]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음산한 북방 구름 차디찬 국화 보니 이별하는 시름이 더해지누나.[朔雲寒菊倍離憂]”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3 長沙送二十一》
♣ 삭적벌수[削迹伐樹]공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머물렀던 자취를 없애고 숨었다한다. 그리하여 장자(莊子)에 “공자가 노(魯) 나라에서 두 번 쫓겨났고 위(衛) 나라에서 자취를 숨겼다.” 하였다. 또한 송(宋) 나라에서는 큰 나무 아래에서 예(禮)를 강론하고 떠나갔는데 송 나라의 사마(司馬)인 상퇴(向魋)는 공자를 죽이려고 쫓아갔으나 이미 떠나가고 없자, 그 큰 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莊子 漁父, 史記 孔子世家》
♣ 삭주굴근[削株掘根]줄기를 깎고 뿌리를 파낸다는 뜻으로, 화근(禍根)을 없앤다는 의미.
♣ 삭참[朔參]관리가 매월 초하룻날에 참조(參朝)하는 일을 말한다.
♣ 삭탈관직[削奪官職]관직을 깎아서 빼앗는다는 뜻으로, 죄 지은 벼슬아치의 벼슬과 품계(品階)를 빼앗고 사판(仕版)에서 깎아 버림. 삭탈관작(削奪官爵).
♣ 산간[山簡]진(晋) 나라 산도(山濤)의 아들.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하면서 나가 놀기를 좋아하여, 흔히 경치 좋은 습가지(習家池)에 가서 술에 취해서는 백접리(白接䍦)를 거꾸로 쓰고 말을 거꾸로 타고 돌아오는 등 풍류 기화(奇話)를 많이 남겼다. 《晉書 卷四十三》
♣ 산간벽지[山間僻地]산골짜기 시골 오지라는 뜻으로, 아주 구석진 산골의 의미.
♣ 산간벽촌[山間僻村]산골의 궁벽(窮僻)한 마을.
♣ 산거원[山巨源]거원은 산도의 자(字)임.
♣ 산경[山經]산해경(山海經), 또는 산맥을 기록한 지리책을 범칭하기도 하다.
♣ 산경가보[山扃假步]과거에 자신이 은거하던 산을 벼슬길에 나간 뒤에 다시 들르는 것을 뜻함. 남제(南齊) 때 주옹(周顒)이 일찍이 북산(北山)에 은거했는데, 뒤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해염현령(海鹽縣令)이 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경사(京師)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 북산을 들르려 하는 것을 보고, 공치규(孔稚圭)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마음은 이미 대궐에 가 있으나, 혹 산문에 발걸음을 빌리기도 하리라.[雖情投於魏闕 或假步於山扃]” 한 데서 온 말이다.
♣ 산계[山雞]산계(山雞)가 제 아름다운 꼬리를 사랑하여,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본다 한다.
♣ 산계야목[山鷄夜鶩]산 꿩과 들오리라는 뜻으로, 성미가 사나와 제 마음대로만 하여 다잡을 수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
♣ 산계희[山鷄戱]산꿩이 자기의 아름다운 깃털을 아낀 나머지 자주 물가에 그 모습을 비춰 보면서 춤을 춘다는 전설이, 남조 송(南朝宋) 유경숙(劉敬叔)의 이원(異苑) 권3에 나옴.
♣ 산고수장[山高水長]산은 높고 물은 길다는 뜻으로, 군자의 인품(人品)과 절조(節操)의 고결(高潔)함을 산의 높음과 물의 긺에 견주어 기리는 말. 범중엄(范仲奄)의 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에 “선생의 유풍이여 산처럼 높고 강물처럼 길게 가리.[先生之風 山高水長]"라 하였음.
♣ 산곡[山谷]산곡(山谷)은 송(宋) 나라 때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호이다.
♣ 산곡운룡[山谷雲龍]차가 매우 훌륭하다는 뜻이다. 운룡(雲龍)은 차 이름이고, 산곡은 송(宋) 나라 황정견(黃庭堅)의 호. 황정견이, 학원(壑源)에서 나는 차를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한 시에 “상서 구름 용[雲龍]을 따라 창벽에 내렸는데, 원풍(元豐)부터 지금까지 아는 이가 없구료.” 한 데서 온 말이다.
♣ 산공[山公]산공은 동진(東晉)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도(山濤)의 아들 산간(山簡)을 가리킨 말이다. 술을 몹시도 좋아하여 양양(襄陽)의 고양지(高陽池)에 늘상 나가 노닐면서 번번이 대취(大醉)하여 사람 등에 업혀 오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 산공계사[山公啓事]진(晉)의 산도(山濤)가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어 인물을 선발할 때 각각 품평사(品評辭)를 붙여 주달하였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그것을 산공계사(山公啓事)라 했다. 《晉書 山濤傳》
♣ 산공기마[山公騎馬]산공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냈던 산도(山濤)의 다섯째 아들인 간(簡)을 가리킨다. 산간이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어 양양(襄陽)에 있을 때 형주(荊州) 호족(豪族) 습씨(習氏)의 정원에 자주 놀러갔는데, 하루종일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저물녘에 흰두건을 거꾸로 눌러쓰고 말등에 올라타 돌아왔다 한다. 흔히 술을 취하도록 마신다는 뜻으로 인용된다. 《晉書 卷四十三 山簡傳》
♣ 산공도습가정[山公到習家筳]산공은 진(晉)나라 때 하내(河內) 회현(懷縣) 사람인 산간(山簡)을 가리킨다. 그가 영가(永嘉) 3년(309)에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어 양양(襄陽)을 수비하고 있을 당시 형주(荊州)의 호족(豪族) 습씨들이 소유한 경관 좋은 못가에서 자주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世說新語 任誕》
♣ 산공도접리[山公倒接籬]진(晋) 산간(山簡)이다. 형주(荊州)에 있을 때에 습지(習池)에 가 놀다가 술이 취하여 돌아 올 때에는 백접리(白接籬)를 거꾸로 쓰고 돌아왔다.
♣ 산공법[山公法]신중히 인물을 뽑는다는 뜻. 진(晉)의 산도(山濤)가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어 인물을 뽑을 때, 각각 제목을 만들어 주상(奏上)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그 명부를 산공 계사(山公啓事)라 일컬었다. 《晉書 山濤傳》
♣ 산공조감[山公藻鑑]인재를 잘 알아서 등용하는 것을 비유한 말. 산공은 진(晉) 나라 때의 재상 산도(山濤)를 말하고, 조감(藻鑑)은 사람을 잘 알아보는 안목을 말하는데, 산도는 특히 훌륭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산공지[山公池]진(晋)나라 하내(河內) 회현(懷縣) 사람이요, 산도(山濤)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기풍을 지녔다.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어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할 적에 습(習)씨의 집에 좋은 원지(園池)가 있어, 산간은 구경을 나가게 되면 늘 습씨 집 못[習家池]으로 가니, 세상 사람들이 산공의 못이라 칭하였다.
♣ 산구화옥[山丘華屋]위(魏) 나라 조식(曹植)의 ‘공후인(箜篌引)’에 나오는 “화려한 집에 사시더니 쓸쓸히 묘소에 묻히셨네.[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라는 시구를 집약한 것이다.
♣ 산궁수진[山窮水盡]산은 앞을 막고 물줄기는 끊어져 더 갈 길이 없다는 뜻으로, 어려움이 극도에 다다라 막다른 경우에 이름을 이르는 말.
♣ 산귀[山鬼]산에 산다는 일종의 정령(精靈). 두보의 이거공안산관(移居公安山館)이란 시에 “산귀(山鬼)는 등잔불을 불어 껐는데 부엌엔 밤이 이슥하도록 사람들 이야기 소리.” 하였다.
♣ 산기[散騎]산기상시(散騎常侍)의 준말로, 임금의 좌우에서 과실을 바로잡아 보좌하는 직책, 즉 대간(臺諫)을 말한다.
♣ 산도[山都]유인원(類人猿)의 일종이다.
♣ 산동거오몰[山動巨鰲沒]봉래(蓬萊), 영주(瀛洲) 등 다섯 선산(仙山)이 조수에 밀려 정처없이 떠다니자, 천제(天帝)가 큰 자라 열다섯 마리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게 떠받들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列子 湯問》
♣ 산동서지장상[山東西之將相]예전부터 효산(崤山)과 화산(華山)의 서쪽에선 명장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동쪽 지역에선 명상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한서(漢書) 제69권 조충국전(趙充國傳)에, “진한(秦漢) 이래로 산동에선 재상이 나오고 산서에선 장수가 나왔다.” 하였다.
♣ 산략[刪畧]깎아내어 간추림.
♣ 산뢰[山罍]산뢰는 하후씨(夏后氏)의 술잔이라 하는데 산과 구름의 무늬가 있어 이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 산룡[山龍]제왕의 입는 곤룡포(袞龍袍)의 무늬에 산(山)ㆍ용(龍)ㆍ해[日]ㆍ달[月] 등을 수놓았는데,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봉한 때문에 소상(塑像)에다 곤룡포를 입혔던 것이다.
♣ 산류[山榴]두견화, 즉 진달래의 별칭이다.
♣ 산릉청초육조지[山陵靑草六朝地]세대의 변천을 뜻한다. 건업(建業)에 도읍했던 육조(六朝;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가 모두 폐허가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 산림처사[山林處士]산 속에 살고 있는 선비라는 뜻으로, 산골에 살며 글이나 읽으며 지내는 초야(草野)에 사는 선비.
♣ 산명수려[山明水麗]산은 맑고 물은 곱다는 뜻으로, 자연의 경치가 곱고 아름답다는 의미.
♣ 산명수자[山明水紫]산수의 경치가 아름다움.
♣ 산명수청[山明水淸]산수가 맑고 깨끗하여 경치가 좋음.
♣ 산목보천년[山木保天年]산중에 있는 나무. 그 나무는 재목(材木)이 못되므로 천 년을 보전할 수가 있다는 말인데, 천 년은 곧 제 수명대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莊子 山木篇》
♣ 산목진병[山木晉兵]적국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부견이 동진을 칠 적에 비수(淝水)의 싸움에서 패한 뒤 수춘성(壽春城)에 올라가 팔공산(八公山) 쪽을 바라보다가, 산 위의 나무들이 모두 사람 모습으로 보이자 두려워하는 기색을 나타냈다. 《晉書 卷114 苻堅載記下》
♣ 산무욕성의[山霧欲成衣]신녀(神女)가 무의(霧衣)를 입고 다닌다고 한다.
♣ 산보[山甫]산보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어진 재상인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엄숙한 왕명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며 나라의 선악을 중산보가 밝히도다 이미 밝고 또 현철하여 그 몸을 보전하고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아서 천자를 섬기도다[肅肅王命 仲山甫將之 邦國若否 仲山甫明之 旣明且哲 以保其身 夙夜匪懈 以事一人]”하였다.
♣ 산보[山甫]산보는 중산보(仲山甫)인데 주 선왕(周宣王)의 명을 받아 제(齊) 나라에 성(城)을 쌓기 위해 나가면서 임금을 보필하지 못하여 불안해하자 윤길보(尹吉甫)가 ‘속히 돌아오도록 선왕께 고하겠다’는 시를 지어 위로하였다. 《詩經 大雅 烝民》
♣ 산불사토고능성기고[山不辭土故能成其高]산은 사소한 흙덩이 하나라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능히 높음을 이루었듯이 도량(度量)을 널리 하여 모든 것을 포용함을 비유하는 말.
♣ 산불염고[山不厭高]산은 높음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덕은 쌓을수록 좋음을 비유하는 말.[魏武帝 <短歌行>]
♣ 산붕[山棚]당(唐) 나라 때의 부족(部族) 이름으로 이들은 활을 잘 쏘고 싸움을 잘하여 이들에게 관성(官城) 호위하는 일을 맡게 했다고 하는데, 전하여 여기서는 변방의 유랑민들을 가리킨 말이다.
♣ 산붕[山棚]산붕은 산대(山臺), 즉 산디놀이를 벌이는 높다란 연극 무대를 뜻한다.
♣ 산산[汕汕]고기잡이를 함,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양
♣ 산산[滻滻]많음, 우는 모양
♣ 산산[山山]산산은 출(出) 자의 파자(破字). 밖으로 나감.
♣ 산상수훈[山上垂訓]예수가 산꼭대기에서 행한 설교. 예수의 사랑의 윤리가 표현되어 있다.
♣ 산서[山西]한(漢)나라 때에 산동(山東)에서는 정승이 많이 났고, 산서(山西)에서는 장수가 많이 났다.
♣ 산서곡음[山棲谷飮]산에 깃들어 살며 계곡 물을 마신다는 뜻으로, 은자(隱者)의 생활을 비유하는 말. 산림처사(山林處士), 산림학사(山林學士).
♣ 산서철간[山西鐵幹]산서는 원(元) 나라의 산서도(山西道)를 가리킨 것이요, 철간은 소나무의 경절(勁節)을 말한다.
♣ 산서철간교[山西鐵幹喬]한(漢) 나라 때에 산동(山東)에서는 재상[相]이 나고, 산서(山西)에서는 장수(將帥)가 났다.
♣ 산서출장[山西出將]산서는 효산(崤山)과 화산(華山)의 서쪽 지역으로, 예로부터 이곳에서는 장수가 많이 난다고 한다.
♣ 산서호기[山西豪氣]옛날 연(燕)ㆍ조(趙)의 땅인 유주(幽州)ㆍ병주(幷州) 지역을 이르는데, 그곳 풍속은 기절(氣節)을 숭상하고 유협(游俠)을 일삼았으므로, 전하여 시풍(詩風)의 호협(豪俠)함을 비유한다.
♣ 산석여랑[山石女郞]산석의 글귀란 바로 한유(韓愈)의 산석(山石) 시를 말하고, 여랑(女郞)의 시란 곧 여인같이 온순한 풍의 시를 뜻한다. 원(元) 나라 때의 시인 원호문(元好文)의 논시절구(論詩絶句)에 “정이 있는 작약은 봄 눈물을 머금었고 기력 없는 장미는 저녁 가지가 누웠다(이상은 송나라 진관(秦觀)의 시임) 하니, 이를 한퇴지의 ‘산석’ 시에 대조해 보면, 이것이 여랑의 시임을 비로소 알리라.[有情芍藥含春淚 無力薔薇臥晩枝 拈出退之山石句 始知渠女郞詩]" 한 데서 온 말로, 즉 송(宋) 나라 진관(秦觀)의 시를 한유의 ‘산석’ 시와 비유하면 한유의 시는 장부에 해당하고, 진관의 시는 여랑에 해당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
♣ 산선[散仙]산선은, 선계(仙界)에도 관부(官府)의 일이 있다고 봄에 따라 즉 직무가 없는 신선이란 뜻이다.
♣ 산설[霰雪]싸라기눈
♣ 산수조[山水操]전국 시대 진에 멸망당한 조왕(趙王)이 자기 고향이 그리워서 지은 노래. 《淮南子 泰族訓》
♣ 산수주아현[山水奏牙絃]백아가 태산에다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鍾子期)가 “좋다, 높다란 태산 같도다.” 하더니, 백아가 다시 유수(流水)에다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는 또 “좋다, 양양한 강하 같구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산시[刪詩]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고대의 시가 3천여 편이었는데, 공자가 그 중복된 것을 버리고 예악(禮樂)에 시용(施用)될 만한 것을 취택하여 3백 5편으로 산정(刪正)했다.” 하였음.
♣ 산양[山陽]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노닐었던 하내(河內)의 산양현(山陽縣)을 말한다. 그런데 죽림칠현 가운데 완적(阮籍)과 완함(阮咸)이 들어 있었던 관계로, 간혹 숙질(叔姪)간의 즐거운 모임에 빗대기도 한다.
♣ 산양[山陽]옛날에 친구와 함께 놀던 곳을 말한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모여서 노닐었던 혜강(嵇康)의 우거(寓居)로, 중국 하내(河內)의 산양현(山陽縣)에 있었다. 혜강이 죽은 뒤에 상수(向秀)가 그곳을 지나다가 누군가가 부는 젓대 소리를 듣고는 혜강과 여안(呂安)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서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고 한다. 《晉書 向秀傳》
♣ 산양감구[山陽感舊]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산양은 하남(河南)에 있는 지명으로, 진(晉) 나라의 혜강(嵇康), 상수(向秀) 등이 일찍이 이곳에 살면서 죽림(竹林)의 놀이를 하였다. 그 뒤에 상수가 산양 땅을 지나면서 누군가가 부는 젓대 소리를 듣고는 죽은 친구인 혜강과 여안(呂安)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서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고 한다.
♣ 산양객[山陽客]진(晉) 나라 향수(向秀)가 산양(山陽)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피리[笛] 소리를 듣고 죽은 친구 혜강(嵇康)ㆍ완적(阮籍)과 그곳에서 놀던 것을 생각하여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
♣ 산양관원[山陽灌園]춘추 시대의 고사(高士)인 진중자(陳仲子)가 벼슬을 마다하고 아내와 함께 산양(山陽)으로 피해 가서 남의 집 전원(田園)을 가꿔 주며 살았다 한다.
♣ 산양구여[山陽舊侶]죽림칠현(竹林七賢)처럼 막역하게 어울려 노닐던 친구들이라는 말이다. 진(晉) 나라 혜강(嵇康)의 우거(寓居)인 하내(河內) 산양현(山陽縣)에 죽림칠현들이 모이곤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 산양기왕년[山陽記往年]막역한 벗들끼리 고향 산골에서 즐겁게 노닐던 추억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이 혜강(嵆康)의 우거(寓居)인 하내(河內) 산양현(山陽縣)의 죽림에서 노닌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註》
♣ 산양려[山陽侶]막역지우(莫逆之友). 죽림칠현(竹林七賢)처럼 깊이 마음을 허여하며 격의 없이 지냈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이른바 죽림칠현(竹林七賢)이 혜강(嵆康)의 우거(寓居)인 하내(河內) 산양현(山陽縣)의 죽림에서 노닌 고사에서 기인한 것이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註》
♣ 산양루[山陽淚]세상을 떠난 벗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진(晉) 나라 상수(向秀)가 혜강(嵆康), 여안(呂安) 등과 산양(山陽)에서 친하게 지냈는데, 두 사람이 죽고 나서 상수가 다시 옛 벗의 집을 찾았을 때 이웃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던 고사가 있다. 《晉書 卷49 向秀傳》
♣ 산양린적[山陽鄰笛]진(晉) 나라 때 상수(尙秀)가 친구 혜강(嵇康)이 죽은 뒤 산양에 있는 혜강의 옛 집을 지나다가 이웃 사람이 피리 부는 소리를 듣고 회구심(懷舊心)을 일으킨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 산양적[山陽篴]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산양은 하남(河南)에 있는 지명이다. 진(晉) 나라 때 상수(向秀)가 산양 땅을 지나면서 누군가가 부는 젓대 소리를 듣고는 죽은 친구 혜강(嵆康)과 여안(呂安)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어서 사구부(思舊賦)를 지었다고 한다.
♣ 산양적성[山陽篴聲]진(晉) 나라 상수(向秀)가 산양의 옛집을 지나다가 이웃 사람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 지금은 죽고 없는 혜강(嵇康)과 여안(呂安)을 생각하여 사구부(思舊賦)을 지어 읊었는데, 그 뒤로 산양의 피리 소리는 옛 친구를 생각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晉書 卷四十九 向秀列傳》
♣ 산양택[山陽宅]세상을 떠난 친구의 고택(故宅)을 말한다. 진(晉) 나라 상수(向秀)가 친구인 혜강(嵆康)과 여안(呂安)이 사마소(司馬昭)에게 피살된 뒤 산양(山陽)에 있는 그들의 옛집을 찾아갔을 때,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고는 감회에 젖어 사구부(思舊賦)를 지은 고사가 있다. 《晉書 卷49 向秀傳》
♣ 산옹[筭甕]혼자 멋대로 생각을 치달리며 망상하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항아리 하나를 애지중지하면서 밤에도 끌어안고서 자곤 하였는데, 어느 날 저녁 항아리 하나를 밑천 삼아 부자가 되는 생각에 젖은 나머지 기쁨에 겨워 춤을 추다가 그 항아리를 밟아 깨뜨려 버렸다는 ‘옹산(甕算)’의 고사가 전한다. 《梅磵詩話 卷中》
♣ 산왕[山王]높이 출세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산왕은 진(晉) 나라 산도(山濤)와 왕융(王戎)의 병칭인데, 남조 송(宋)의 안연지(顔延之)가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대한 시를 지으면서, 산도와 왕융은 벼슬로 현달(顯達)했다 하여 제외시키고는 ‘오군영(五君詠)’을 지은 고사가 있다. 《宋書 卷73 諺延之傳》
♣ 산왕[山王]산왕은 불경 용어로 산 중에 가장 높은 산. 보주는 마니(摩尼)의 별칭. 곧 가장 높은 산이 마니산으로 생겨났다는 것.
♣ 산왕락사[山王樂事]산왕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산도(山濤)와 왕융(王戎)을 합칭한 말인데, 그들은 특히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겼으므로 즐거운 일이란 바로 이것을 이른 말이다.
♣ 산왕종괴오군편[山王終愧五君篇]산왕은 진(晉) 나라의 산도(山濤)와 왕융(王戎)의 병칭인데, 남조 송(宋)의 안연지(顔延之)가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대해서 시를 지을 적에, 산도와 왕융은 현달하여 귀인(貴人)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 두 사람은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에 대해서만 시를 지어 ‘오군영(五君詠)’이라고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宋書 卷73 顔延之傳》
♣ 산용[山龍]왕이 입는 옷에 수놓인 산무늬와 용무늬로, 곧 곤룡포를 말한다.
♣ 산용대축빈[山容黛蹙顰]산의 능선이 마치 미녀가 검푸른 눈썹을 찡그리는 듯하다는 말이다. 홍루몽(紅樓夢) 제30회(回)에 “가보옥(賈寶玉)이 어떤 여자 아이를 보니, 눈썹을 찡그리는 것이 봄의 산과 같고[眉蹙春山]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가을 물을 연상시켰는데[眼顰秋水],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임대옥(林黛玉)과 흡사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 산유[山楰]산에 있는 광나무. 상록관목(常綠灌木)으로 과실이 약재로 쓰이는데, 시경(詩經)남산유대(南山有臺)에, “남산에는 구(枸)가 있고, 북산에는 유(楰)가 있네. 즐거울사 우리 님 오래오래 사시리로세…….” 하였음.
♣ 산유화[山有花]민요 메나리의 다른 이름.
♣ 산융[山戎]북방의 오랑캐를 가리킨다. 만주(滿洲)의 야인(野人)을 산융(山戎)이라 불렀다.
♣ 산음방선인[山陰榜船人]진(晉) 나라의 왕자유 휘지(王子猷徽之)가 산음(山陰)에 있다가 밤에 폭설이 내리자 홀연히 친구인 대안도 규(戴安道逵)의 생각이 나서 밤새 배를 저어 섬(剡)에 있는 그 집 문앞까지 가서는 그냥 돌아온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 산음설[山陰雪]산음은 산의 북쪽이란 뜻으로, 진(晉)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살던 곳이다. 왕희지가 산음에 살고 있었는데, 밤에 눈이 내렸다. 그러자 왕희지는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서 밤중에 작은 배를 타고 그를 찾아갔는데, 문 앞에 도착해서는 만나 보지 않고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왕희지는 “내가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왔는데, 하필 대규를 만나 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후대에는 친구를 방문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世說新語 任誕》
♣ 산음설야주[山陰雪夜舟]진(晉) 나라 때 산음에 살던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날 밤에 눈이 막 개고 달빛이 청랑하자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서, 그날 밤에 바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가서 대규의 집 문 앞에 당도했다가 들어가지는 않고 다시 돌아왔는데,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왕휘지가 대답하기를, “내가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온 것인데, 어찌 꼭 대규를 만날 필요가 있겠는가.”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산음설월[山陰雪月]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았는데, 하루 밤에는 설월(雪月)의 경치를 보다가 홀연히 섬계(剡溪)에 있는 친구 대안도(戴安道)가 그리워서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가서 안도(安道)의 문 앞에 이르러서는 만나보지 않고 돌아왔다. 누가 물으니 그는 답하기를, “흥(興)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 되면 돌아가는 것이지 하필 안도를 볼 것이랴.” 하였다.
♣ 산음승흥객[山陰乘興客]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산음(山陰) 땅에서 눈 경치에 취한 나머지, 친구인 대규(戴逵)를 찾아볼 흥이 발동하여 밤중에 배를 몰고 그의 집 문 앞까지 갔다 와서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다.[乘興而行 興盡而返]”고 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任誕》
♣ 산음아[山陰鵝]왕희지가 거위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때 산음(山陰)의 한 도사(道士)가 좋은 거위를 기르고 있었다. 희지가 가서 보고 마음에 들어 그 거위를 팔 것을 권하자 그 도사가 말하기를, “나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써주면 이 거위들을 주겠노라.” 하여, 희지는 그가 요구한 대로 다 써주고 그 거위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晉書 王羲之傳》
♣ 산음이현편[山陰理縣編]남제(南齊) 때 부염(傅琰)이 산음령(山陰令)으로 있으면서 매우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에서 신명(神明)으로 일컬어졌는데, 그의 부자(父子)가 똑같이 산음현을 잘 다스렸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르기를, “부씨(傅氏) 집안에는 고을 다스리는 문서[理縣譜]가 있어 자손이 대대로 전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南齊書ㆍ卷五十三》
♣ 산음진적[山陰陳迹]왕희지(王羲之)가 3월 3일에 회계(會稽) 산음(山陰)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명사(名士) 40명과 놀면서 각각 시(詩)를 짓고 희지가 서문(序文)을 지었는데, 그 글에, “한 번 구부리고 한 번 우러러 보는 사이에 벌써 묵은 자취가 된다[俯仰之間 己成陳迹].”는 귀절이 있다.
♣ 산음회도흥[山陰回棹興]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산음(山陰)에 살았는데, 한밤중에 눈이 내리자 친구인 대규(戴逵)가 갑자기 생각났다. 이에 즉시 밤을 새워 배를 타고 대규가 사는 집 문앞까지 갔는데,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나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이다.” 하였다. 《世說新語 任誕》
♣ 산음흥[山陰興]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 왕희지(王羲之)의 아들)가 산음(山陰) 땅에 살던 때, 구름이 걷히고 사방이 눈으로 덮여 달빛이 청랑한 밤 혼자 술을 마시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읊던 도중 갑자기 대규(戴逵)가 생각나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섬(剡) 땅에 있는 대규의 집에 갔다가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도로 돌아왔는데,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이 나서 왔다가 흥이 다해 갈 뿐[乘興而來 興盡而反]”이라고 했다 한다. 《世說新語 任誕》
♣ 산이종차[散而鍾此]서원여의 모란부(牡丹賦)에 “꽃 중에도 붉은 빛은 모란으로 다 뭉쳤네.[英之甚紅 鍾於牡丹]"라는 구절이 있다.
♣ 산인[散人]세상에서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겸사(謙辭)이다. 장자(莊子)에 쓸모없는 나무라는 뜻의 산목(散木)에 대한 글이 있다.
♣ 산자견[山字肩]사람의 양쪽 어깨가 목과 합하여 산(山) 자 모양이 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산자관원[山字官員]정석견(鄭錫堅)이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시절에 다른 관아(官衙)의 구사(丘史)를 빌어쓰지 않고 어디를 갈 때면 납패(鑞牌)를 단 조졸(皂卒) 한 명만을 전도(前導)로 하고 뒤에는 한 노자(奴子)만을 딸게 하여 그 행차 모양이 마치[산(山)]자 같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일컫던 말이다.
♣ 산자수명[山紫水明]산은 붉고 물은 맑음. 산수의 경치가 아름다움을 말함
♣ 산장가[酸漿歌]산장은 꽈리풀을 말한 것 같다.
♣ 산재녕외부근구[散材寧畏斧斤求]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 이런 내용이 있다. 혜자(惠子)가 말하기를, “내가 큰 나무가 있는데, 저(樗)라 부른다. 그 뿌리는 옹종(擁腫)하여 먹줄에 맞지 않고, 작은 가지는 굽어져 규구(規矩)에 맞지 않으므로, 길 가에 서 있어도 대목이 돌아보지도 아니한다.” 하니,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자네가 그런 큰 나무가 있어 쓸 데 없는 것이 걱정되거든 그 나무를 무하유향(無何有鄕) 광막(廣漠)한 들에 심어 놓고 그 옆에서 방황(彷徨)하여 무위(無爲)하고, 그 밑에서 소요(逍遙)하여 누웠으면 그 나무는 도끼와 자귀[斧斤]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산재저력[散材樗櫟]세상에서 버림받아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을 보전했다는 말이다. 상수리나무[櫟]와 가죽나무[樗]는 장자(莊子)의 인간세(人間世)와 소요유(逍遙遊)에서 대표적인 산목(散木)으로 등장하는 나무 이름이다.
♣ 산저귀저[山底貴杵]산밑에서 절구공이가 귀하다는 뜻으로, 물건이 그 생산지(生産地)에서 도리어 더 귀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산전수전[山戰水戰]산과 물에서 싸웠다는 뜻으로, 세상의 온갖 고생과 시련을 다 겪어 경험이 많음을 이르는 말.
♣ 산주[山廚]원래는 산 속의 푸줏간을 이르는 말이다.
♣ 산죽렬[山竹裂]두견새 울음을 말한다. 두견새가 울면 그 소리가 너무도 처절하여 산죽(山竹)이 갈라진다 한다. 두보의 현도단가기원일인(玄都壇歌寄元逸人)에 “두견새가 밤에 우니 산죽이 갈라진다.” 하였다.
♣ 산중목천장[山中木千章]부친이 물려주신 산골의 가산(家産)이라는 말이다. 한말(漢末)의 청렴한 관리였던 이형(李衡)이 남몰래 감귤 일천 그루를 심어 놓고는 임종할 적에 자기 아들에게 일러 주었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休傳》
♣ 산중백운[山中白雲]산 속의 흰 구름이라는 뜻으로, 산중의 백운은 내 마음을 기쁘게 해주지만 선물로 당신에게 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방문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의미로 사용됨.
♣ 산중편편가저작[山中片片可抵鵲]양(梁) 나라 재상(宰相) 장영(張影)이, 산의 까치가 날아[飛翔] 원석(圓石)이 된 것을 얻어 깨어 보니, “충효후인(忠孝侯印)”이라고 새겨진 금인(金印)을 얻었다 한다
♣ 산지사방[散之四方]산산히 흩어지다.
♣ 산진동해금[散盡東海金]한(漢)나라 소광(疏廣)이 태자(太子)의 스승으로 있다가 하루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동해(東海)로 돌아가니, 임금과 태자가 황금을 많이 주었는데, 그는 돌아가서 금으로 매일 잔치를 차려 친척 친구들과 즐기며 다 써 버렸다.
♣ 산진습령지하처[山榛隰苓知何處]시경(詩經) 패풍(邶風)에, “산에는 개암이 있고, 진펄에는 감초가 있다네.” 한 구절이 있는데, 이 시는 위(衛) 나라가 어진 자들을 등용하지 않은 것을 풍자한 시임.
♣ 산처[山妻]은사(隱士)의 처라는 뜻으로, 보통 자신의 아내를 가리키는 겸사(謙辭)로 쓰인다.
♣ 산천우공외[山川禹貢外]중국 땅이 아니라는 말. 우공(禹貢)은 서경(書經)의 편명인데 우(禹)의 치산치수(治山治水) 실상을 적어놓은 내용임.
♣ 산천의구[山川依舊]자연은 옛 모양대로 변함이 없음.
♣ 산천초목[山川草木]산과 물과 풀과 나무의 뜻으로, 곧 ‘자연’을 일컫는 말.
♣ 산첨[蒜尖]뾰족하게 돋은 마늘의 새순.
♣ 산택능장질[山澤能藏疾]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 조(條)에 “川澤納汚 山藪藏疾"이라 하였음.
♣ 산택일구선[山澤一癯仙]사기(史記) 사마상여 열전(司馬相如列傳)에 나오는 말로, 속진(俗塵)을 벗어난 청수(淸瘦)한 은사(隱士)를 뜻하는데, 간혹 매화를 가리키는 시어(詩語)로도 쓰인다.
♣ 산토월[山吐月]두보의 시에, “사경에 산은 달을 토하고[四更山吐月]”란 명구(名句)가 있다.
♣ 산패[滻浿]원시의 ‘패(浿)’는 원래 ‘파(灞)’임. 파수와 산수는 중국 장안(長安)의 동남쪽을 북으로 흐르다가 위수로 들어가는데, 우리 나라 서울 부근의 지방을 뜻한다.
♣ 산하대려[山河帶礪]한(漢) 고조(高祖)가 공신(功臣)들에게 나라를 봉해 주면서 맹세한 글에, “황하가 띠와 같이, 태산이 숫돌과 같이 되도록 나라가 길이 있게 하고 이것이 후손들에게 미치리라.” 하였다.
♣ 산하보위국[山河寶魏國]사기(史記) 제65권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무후(武侯)가 서하(西河)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다가 중간에서 오기(吳起)를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아름답구나, 산하의 튼튼함이여. 이는 우리 위(魏) 나라의 보배이다.’ 하니, 오기가 대답하기를, ‘나라가 튼튼한 것은 덕(德)에 있지 험함에 있지 않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덕을 닦지 않는다면 이 배 안에 탄 사람이 모두 적국 사람일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 산하서[山河誓]공신(功臣)에게 작(爵)을 봉하는 맹세. 한 고조(漢高祖)가 공신에게 땅을 봉해 줄 때에 그 맹세하는 글에 “황하(黃河)가 띠[帶]가 되기까지, 태산이 숫돌이 되기까지 나라가 길이 보전하고 자손에게까지 미치라.”는 말이 한서(漢書) 공신표서(功臣表序)에 보인다.
♣ 산하여대[山河礪帶]공신(功臣)을 봉(封)해 주는 맹세의 말인데, “황하의 물이 띠[帶]와 같이 줄고, 태산이 숫돌같이 작게 되도록 영원히 서로 나라를 보전하여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자.”는 것이다.
♣ 산하표리[山河表裏]외산 내하(外山內河)의 뜻으로, 즉 큰 산과 큰 강으로 둘러싸인 험한 요새지를 가리킨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28년에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밖과 안으로 산과 강물이 막고 있으니 반드시 해 될 것은 없다.[若其不捷 表裏山河 必無害也]”라는 말이 나온다.
♣ 산해지[山海誌]산해경. 작자(作者)를 알 수 없는 지리서(地理書)로서 특히 인류(人類)를 비롯하여 산천(山川), 초목(草木), 조수(鳥獸) 등에 관한 기괴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 산해진미[山海珍味]산과 바다의 진귀한 맛이라는 뜻으로, 산과 바다의 산물을 다 갖추어 썩 잘 차린 진귀한 음식의 의미. 산진해미(山珍海味), 수육진미(水陸珍味).
♣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고려 명종 때에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의 망이(亡伊), 망소이(亡所伊)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는 스스로 일컬은 이름.
♣ 산호[山胡]새 이름임.
♣ 산호격[珊瑚擊]진(晉)나라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서로 호부(豪富)를 자랑하였는데, 왕개는 진무제(晉武帝)의 외숙이었므로 무제가 왕개에게 높이가 이척(二尺)이나 되는 산호수(珊瑚樹)를 주므로 석숭에게 보이자, 석숭이 쇠방망이로 때려부수니 왕개가 노하였다. 이에 석숭이, “내가 지금 자네에게 갚아 주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자기 집에 있는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게 하니 석 자 넉 자 되는 것이 6, 7개나 되고, 왕개의 것과 같은 것은 매우 많았다.
♣ 산호격처유교심[珊瑚擊處有驕心]진(晉) 나라 때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은 부호(富豪)로 유명했었는데, 한 번은 왕개가 2척(尺)이 넘는 산호수(珊瑚樹)을 하사받고는 자랑삼아 보이자, 석숭은 하찮게 여기고 부숴버렸다. 왕개는 자기의 보물을 질투한 것이라고 하자, 석숭은 자기 집의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 중에는 3~4척이 넘는 것만도 6~7개나 있었다 한다. 《晉書 石崇傳》
♣ 산호망수[珊瑚網收]불림(拂箖)이라는 나라에서 뱃사람들이 바다 밑바닥으로 철망을 던져 산호를 뿌리째 캐내는데, 산호를 제때에 캐지 않으면 썩어 버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新唐書 西域傳下》
♣ 산호전상자금용[珊瑚殿上紫金容]법주사에 산호전이 있고, 거기 금신(金身) 장륙상(丈六像)이 있다.
♣ 산화녀[散花女]법회중(法會中)에 한 천녀(天女)가 하늘꽃[天花]을 뿌렸는데, 여러 보살(菩薩)에 닿은 꽃은 다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사리불(舍利弗)ㆍ목건련(目犍連) 등 10대 제자에게 닿은 꽃은 떨어지지 않자 천녀가 “이는 습기(習氣)가 다하지 못한 때문에 꽃이 몸에 붙어 있다.” 한 데서 인용된 말이다. 《維摩經》
♣ 산화루[散花樓]산화루는 서촉에 있는 누각이다. 이백(李白)의 상황서순남경가(上皇西巡南京歌)에 “비단 빨던 맑은 강이 만리를 흐르는데 구름 돛단 큰 배가 양주로 내려가네 북쪽 서울엔 비록 상림원을 자랑하지만 남경에는 도리어 산화루가 있다오[濯錦淸江萬里流 雲帆龍舸下揚州 北地雖誇上林苑 南京還有散花樓]”하였다. 《李太白集 卷七》
♣ 산화어이[散花於爾]유마힐(維摩經) 관중생품(觀衆生品)에 “유마힐(維摩詰)이 설법하고 있을 때 한 천녀(天女)가 현신(現身)하여 그 방에서 설법을 듣는 여러 보살 제자의 머리 위에 천화(天花)를 뿌려 주었다.” 하였음.
♣ 산화천[散花天]산화천녀(散花天女)의 준말로, 유마경(維摩經)에 의하면, 한 천녀(天女)가 천화(天花)를 여러 보살(菩薩)에게 뿌리자, 꽃이 몸에서 모두 떨어졌는데, 대제자(大弟子)에 이르러서는 꽃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므로, 천녀가 말하기를 “결습(結習)이 미진한 때문에 꽃이 몸에 붙는 것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승려를 의미한다.
♣ 산화천상녀[散花天上女]유마경(維摩經)에 의하면, 회중(會中)에 한 천녀(天女)가 있어 천화(天花)를 여러 보살들에게 흩뿌리매 꽃이 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대제자(大弟子)에 이르러서는 꽃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자, 천녀가 말하기를 “번뇌의 해탈이 미진하기 때문에 꽃이 몸에 달라붙는 것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산회검극[山回劒戟]유자후가 귀양가 있으면서 지은 시에, “바닷가 뾰족한 산이 칼날 같아 가을이 오면 곳곳에 시름하는 창자를 베누나.” 한 글귀가 있다.
♣ 산회용호[山回龍虎]풍수설(風水說)에, 왼쪽은 청룡(靑龍)이요, 오른쪽은 백호(白虎)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경복궁(景福宮)의 동편 언덕은 청룡이요, 인왕산(仁王山)은 백호가 된다.
♣ 살[樧]살(樧)은 수유(茱萸)라는 나무로서 산초나무[椒] 같으면서도 아니므로, 이는 곧 사이비 군자에 비유한 말이다.
♣ 살마[薩摩]살마는 일본 구주(九州)의 국명으로, 곧 일본을 가리킨다.
♣ 살생유택[殺生有擇]살생(산목숨을 죽임)할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살생을 할 때에는 가려서해야 한다는 말로, 곧 함부로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는 말
♣ 살수[薩水]즉 청천강.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수(隋)나라의 백만 군사를 청천강에서 대파하였다.
♣ 살신성인[殺身成仁]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는 뜻으로, 자기 몸을 희생해서 세상의 대의(大義)를 지킨다는 의미.
♣ 살축[薩筑]일본(日本) 구주(九州)에 있는 살마주(薩摩州)와 축주(筑州)를 가리킨다.
♣ 살풍경[殺風景]의산잡찬(義山雜簒)에 살풍경(殺風景)을 열거(列擧)했는데, “꽃 위에 잠방이 말리는 것[花上曬禈].” “꽃을 대해 차 마시는 것[對花噶茶]” 등이 있다.
♣ 삼가[三加]관례 때의 가관(加冠)의 예로서, 먼저 치포관(緇布冠)을 쓰고 다음에 피변(皮弁)을 가하고 또 그 다음에 작변(爵弁)을 가하므로 이른 말이다. 《禮記 冠義》
♣ 삼가[三家]춘추 시대노(魯) 나라의 세 대부(大夫)를 말하는데, 모두 노 환공(魯桓公)의 자손이므로 삼환(三桓)이라고도 한다.
♣ 삼가례[三加禮]관례(冠禮)때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는 의식. 초가(初加)ㆍ재가(再加)ㆍ삼가(三加)로 나뉘는데 초가에는 단령(團領)ㆍ도아(絛兒)차림에 갓을 씌우고, 재가에는 단령 각대(角帶)차림에 사모(紗帽)를 씌우고, 삼가에는 공복(公服)차림에 복두(幞頭)를 씀.
♣ 삼가시[三家詩]한대(漢代)에 시경(詩經)을 전승해 온 삼가(三家), 곧 원고생(轅固生)이 해설한 제시(齊詩), 신배(申培)가 해설한 노시(魯詩), 한영(韓嬰)이 해설한 한시(韓詩)를 삼가시(三家詩)라 한다.
♣ 삼각[三恪]왕자(王者)가 선왕(先王)을 공경하는 뜻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을 멸한 뒤에 우(虞)ㆍ하(夏)ㆍ은(殷)의 자손을 봉(封)하여 삼각(三恪)이라 한 데서 온 말이다.
♣ 삼각[三閣]진 후주(陳後主)가 세운 임춘각(臨春閣)ㆍ결기각(結綺閣)ㆍ망선각(望仙閣)을 말한다.
♣ 삼간두옥[三間斗屋]세 칸의 썩 작은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작은 오막살이집을 의미함.
♣ 삼간상[三竿上]해가 세 길쯤 올라온 오전 8시 경을 말한다.
♣ 삼간초가[三間草家]세 간이 되는 초가. 썩 작은 집.
♣ 삼강[三綱]명명덕(明明德)ㆍ신민(新民)ㆍ지어지선(止於至善)의 3강령을 말한다.
♣ 삼강[三剛]불교의 도를 깨치려면 반드시 닦아야 하는 세 가지 법으로, 계학(戒學)ㆍ정학(定學)ㆍ혜학(慧學)을 말한다. 삼학(三學).
♣ 삼강[三江]압록강(鴨綠江)의 별칭으로, 압록강이 의주 부근에서 세 갈래로 흐르므로 이렇게 부른다.
♣ 삼강[三綱]유교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綱領). 부위자강(父爲子綱),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부강(夫爲婦綱). 이 삼강(三綱)은 아버지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가 마땅히 지켜할 도리이다.
♣ 삼강오륜[三綱五倫]세 가지 벼리가 되는 것과 다섯 가지 인륜. 유교 도덕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 유교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綱領)과 다섯 가지 인륜. 삼강은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과 오륜은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 삼강칠택[三江七澤]삼강(三江)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고 칠택(七澤)은 초(楚) 나라의 일곱 연못을 말하는데, 보통 악양(岳陽)의 삼강(三江)과 운몽택(雲夢澤)을 가리킨다.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洞庭蕭湘意渺綿 三江七澤情洄沿”이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7 當塗趙炎少府粉圖山水歌》
♣ 삼거[三擧]세 마디의 곡(哭) 소리. 포숙아(鮑叔牙)가 관중(管仲)을 얻고 나서 세 마디의 곡을 했으니, 관중이 금방 죽게 된 순간에 가까스로 얻어진 것을 슬퍼한 때문이다. 《管子》
♣ 삼거[三車]당 나라 자은대사(慈恩大師)가 불경(佛經)을 많이 읽어서, 출입할 때에 반드시 책을 세 수레[三車]에 싣고 다녔으므로 삼거법사(三車法師)라 한다.
♣ 삼거[三車]우차(牛車)ㆍ양차(羊車)ㆍ녹차(鹿車)가 3차(三車)인데, 불교에서 그것을 대승(大乘)ㆍ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에 비유한다.
♣ 삼걸[三傑]한 고조(漢高祖)가 말하기를, “관중(關中)에서 군사와 군량(軍糧)을 징발하여 전장으로 보내어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은 소하(蕭何)요, 장막 가운데서 계책을 내어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하는 것은 장량(張良)이요, 싸움하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한신(韓信)이니, 이 세상 사람은 다 인걸(人傑)이다.” 하였다.
♣ 삼경[三京]남경(南京)인 서울, 중경(中京)인 개성(開城), 서경(西京)인 평양(平壤)을 말한다.
♣ 삼경[三逕]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삼경(三逕)은 황무(荒蕪)하여졌으나, 솔과 국화는 오히려 있다.” 하였으며, 한(漢) 나라 은사(隱士) 장허(蔣詡)가 대밭 속에 세 갈래 길을 내었으므로, 은사(隱士)의 집에 삼경(三逕)이란 말을 쓴다.
♣ 삼경[三逕]뜨락의 세 갈래 소로(小路). 한(漢) 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뜨락에다 송(松)ㆍ국(菊)ㆍ죽(竹)을 심어 놓고 구중(求仲)ㆍ양중(羊仲)과 교유하며 고요하게 노닐었던 고사이다. 《漢書 卷七十二 蔣詡傳》
♣ 삼경[三鏡]삼경은 즉 삼감(三鑑)으로 동(銅)으로 거울을 삼고, 예를 거울로 삼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는다는 것인데, 이는 인심(人心)을 바로잡아서 자신의 표준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당서(唐書) 위징전(魏徵傳)에 “위징이 죽자 제(帝)가 조회에 참석한 후 탄식하면서, 동으로 거울을 삼으니 의관(衣冠)을 바룰 수 있고, 예로 거울을 삼으니 흥망을 알 수 있고,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니 득실을 알 수 있다. 나는 항시 이 세 가지를 소중히 여기고 안으로 나의 허물을 경계했는데 이제 위징을 잃었으니 한 개의 거울이 없어졌구나.” 하였다.
♣ 삼경[三經]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 삼경오로[三更五老]조정에서 벼슬하다가 나이가 들어 물러난 자들을 천자가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주 나라의 제도인데 한 나라 때에도 보존되었다. 경(更)은 세 사람, 노는 다섯 사람이다.
♣ 삼경장후[三徑蔣詡]한 나라 때의 은사 장후(蔣詡)는 향리에 은둔하여 지내면서 집 마당에 가느다란 세 길[三徑]을 내고서 오직 친구인 구중(求仲)ㆍ양중(羊仲) 두 사람과 종유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七十二》
♣ 삼경취황[三逕就荒]청빈한 은사의 생활을 말함.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 “세 오솔길은 묵어가는데 솔 국화는 그대로 있네[三逕就荒 松菊猶存]" 하였음.
♣ 삼경황송국[三徑荒松菊]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길이 비록 거칠었으나, 솔과 국화는 아직 있네[三徑雖荒 松菊猶存].”라는 말이 보인다.
♣ 삼계[三界]범부(凡夫)가 나고 죽고 가고 오는 세계를 말하는데, 즉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이다.
♣ 삼계[三界]천계(天界)ㆍ지계(地界)ㆍ인계(人界) 또는 과거ㆍ현재ㆍ미래.
♣ 삼계[三階]천문의 세 계단으로, 즉 상계(上階)는 천제의 자리이고, 중계(中階)는 제후(諸侯)와 공경 대부(公卿大夫)의 자리이고, 하계(下階)는 사서인(士庶人)의 자리라 한다.
♣ 삼계[三季]하(夏)ㆍ는(殷)ㆍ주(周) 삼대(三代)의 말세(末世)를 이름.
♣ 삼계[三階]하늘의 삼계로서, 즉 천자(天子)의 상계(上階), 제후ㆍ공경ㆍ대부의 중계(中階), 사서인(士庶人)의 하계(下階)를 말하는데, 삼계가 안정되면 음양(陰陽)이 조화되어 천하 태평의 시대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漢書 東方朔傳 泰階六符 注》
♣ 삼계좌[三階坐]3층 계단이 있는 곳으로 군왕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管子 君臣上에 “삼계 위에 앉아 남쪽을 향하여 요구를 받아들인다.” 하였다.
♣ 삼고[三顧]세 번 돌아봄[三顧]은, 삼국 때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남양(南陽) 초려(草廬)로 세 번 찾아간 일이다.
♣ 삼고[三高]오강(吳江)에 삼고사(三高祠)가 있는데, 삼고(三高)는 세 사람의 고사(高士)로, 곧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범예(范蠡), 진(晉) 나라 장한(張翰), 당 나라 육귀몽(陸龜蒙)을 말한다.
♣ 삼고[三孤]주 나라의 관제(官制). 왕을 보좌하여 군사 정치의 대권을 쥔 최고의 관원으로 소사(少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를 말한다.
♣ 삼고초려[三顧草廬]풀로 엮은 오두막을 세 번이나 찾아감. 인재를 얻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음 또는 임금의 두터운 사랑을 입음.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서 유래된 말로 유현덕(劉玄德)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얻기 위해 세 번 찾아가 겨우 만났다는 데서 유래된 말
♣ 삼공[三空]전야(田野)가 비고 조정이 비고 창고가 비는 등 국가의 재정이 고갈된 것을 가리킨다. 《後漢書 卷96 陳蕃傳》
♣ 삼공[三公]주 나라의 관제(官制). 왕을 보좌하여 군사 정치의 대권을 쥔 최고의 관원으로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를 말한다.
♣ 삼공삼고[三公三孤]삼정승과 육경(六卿) 등 고관대작들을 말한다.
♣ 삼공오악[三公五嶽]예기(禮記)에, “천자가 명산과 대천에 제사하면서 삼공에 비기었다.” 하였다.
♣ 삼과절필[三過折筆]세 번씩 붓이 지나감.
♣ 삼관[三關]눈ㆍ귀ㆍ입을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에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신기(神氣)가 흩어지는 것이니, 삼관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삼관[三觀]불가어로서 공관(空觀)ㆍ가관(假觀)ㆍ중관(中觀)을 말함. 법화경(法華經) 삼관 조(三觀條)에 “空觀破見思惑 證一切智 成般若德 假觀 破塵沙惑 證道種智 成解脫德 中觀 破無明惑 證一切種智 成法身德"이라 하였음.
♣ 삼관[三觀]불교의 삼제(三諦), 곧 공(空)・가(假)・중(中)
♣ 삼관[三關]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입ㆍ손ㆍ발[口手足]을 말한 것임. 《黃帝內景經 三關章》
♣ 삼관[三官]주(周) 나라 때의 간신(諫臣)이었던 당굉(唐宏)ㆍ갈옹(葛雍)ㆍ주실(周實)이라 한다.
♣ 삼광[三光]삼광은 천상의 일(日)ㆍ월(月)ㆍ성(星)이다.
♣ 삼광요자미[三光耀紫微]삼광은 해ㆍ달ㆍ별이고 자미는 천제좌(天帝座)인 자미성(紫微星)으로 대궐을 뜻함. 조정에서 중요한 인물.
♣ 삼괴[三槐]삼괴는 삼공(三公)을 뜻하는 말로, 주대(周代)에 조회(朝會)할 적에 궁정의 세 그루 회화나무 쪽으로 삼공이 얼굴을 향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周禮 秋官》
♣ 삼괴[三槐]송(宋) 나라 왕우(王祐)는 음덕(陰德)이 많았는데, 손수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는 “내 자손 중에 반드시 삼공(三公)이 될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는 스스로 삼괴당(三槐堂)이라 호했었다. 그 후 과연 그의 아들 왕단(王旦)이 정승에 올랐다. 《宋史 王旦傳》
♣ 삼괴구극[三槐九棘]세 그루 홰나무와 아홉 그루 멧대추나무라는 뜻인데, 주(周)나라 때 조정의 뜰에 홰나무 세 그루와 멧대추나무 아홉 그루를 심고 공경 대부와 삼공(三公)들이 그 아래에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중국 조정의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가리킨다. 《周禮 秋官 朝士》
♣ 삼괴상[三槐祥]재상이 나올 조짐을 뜻함. 삼괴는 세 그루의 괴나무인데, 주(周) 나라 때 외조(外朝)에 이 나무 세 그루를 심어놓고 삼공(三公)이 이 나무를 향해 앉았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삼괴수[三槐樹]세 그루의 홰나무. 주(周) 나라 때 조정에 이 나무를 세 그루 심어서 삼공(三公)의 좌석의 표지로 삼았으므로, 삼괴수는 삼공의 뜻으로 쓰인다.
♣ 삼구[三九]부추로만 만든 세 가지 반찬. 남제(南齊)의 유고지(庾杲之)가 자기 먹을 것을 자기가 가꾸면서 청빈하게 지냈는데 그의 식탁에는 언제나 부추로 만든 세 종류의 반찬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일러 삼구(三九)라고 하였고, 구(九)는 구(韮)와 음이 같기 때문에 한 말임. 《南齊書 庾杲之傳》
♣ 삼구[三韭]삼구는 세 가지의 부추나물[韭葉]로서, 남제(南齊) 때에 유고지(庾杲之)가 매우 청빈(淸貧)하여 부추 김치, 삶은 부추, 생 부추 세 가지 만을 먹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삼구[三驅]주역(周易)에, “삼구(三驅)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사냥할 때에 뒤쪽 왼쪽 오른쪽 삼면만으로 짐승을 몰이한다는 것이다.
♣ 삼구유랑[三九庾郞]유랑은 남제(南齊) 때의 유고지(庾杲之)를 말하고, 삼구는 유고지가 매우 청빈(淸貧)하여 부추나물 세 가지[부추김치ㆍ삶은 부추ㆍ생부추]만 먹고 살았던 것을 이루는데, 부추 구[韮]자의 음이 구(九) 자와 같으므로 어떤 이가 이를 전용하여 장난삼아 말하기를, “누가 유랑더러 가난하다고 하는가. 어채(魚菜)를 항상 27종(種)씩이나 먹는다오.” 한 데서 온 말이다. 27은 곧 3×9=27을 의미한 것이다. 《南齊書 卷三十四》
♣ 삼구채[三九菜]부추로만 만든 세 가지 나물을 말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앞의 주 417)에 나타나 있다.
♣ 삼국정립[三國鼎立]삼국에 세 발 솥처럼 나누고 있음.
♣ 삼군[三軍]여말 선초(麗末鮮初)의 중(中)ㆍ좌(左)ㆍ우(右)의 세 군영. 이를 통제하는 기관은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였다.
♣ 삼군[三軍]천자의 군대는 육군(六軍), 제후의 군대는 삼군(三軍)이다. 《左傳 襄公 14年》
♣ 삼군가탈수[三軍可奪帥]아무리 많은 군졸의 호위도 화합하지 못한 부하들이라면 그 대장도 탈취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반대로 필부의 의지는 절대로 빼앗을 수 없다는 의미.
♣ 삼군공취투하음[三軍共醉投河飮]장수가 사졸(士卒)들과 고락을 같이함을 이른 말로, 옛날에 훌륭한 장수가 용병(用兵)할 적에, 어떤 이가 호리병 막걸리를 선사하자 이를 혼자 먹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강물에 쏟게 한 다음, 수많은 사졸들과 함께 강물로 들어가 마셨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三略 上略》
♣ 삼군자[三君子]호헌(胡憲)ㆍ유면지(劉勉之)ㆍ유자휘(劉子翬)를 이름. 주자연보(朱子年譜)에, “當韋齋疾革時 手自爲書 以家事屬少傅劉公子羽 而訣於籍溪胡憲原仲 白水劉勉之致中 少傅之弟屛山劉子翬彦冲 且顧謂先生曰 此三人者 吾友也 學有淵源 吾所敬畏 吾卽死 汝▣父事之”라고 보임.
♣ 삼굴[三窟]토끼가 위험한 상황을 감안하여 미리 세 개의 굴을 뚫어 놓는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의 준말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퇴로(退路)를 미리 확보해 놓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4에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놓고서 죽음을 면할 방도를 강구한다.[狡兎有三窟 僅得免其死耳]”라고 하였다.
♣ 삼권[三權]귀(貴)ㆍ부(富)ㆍ친(親).
♣ 삼귀[三歸]대(臺) 이름.
♣ 삼귀[三歸]불(佛)ㆍ법(法)ㆍ승(僧)ㆍ삼보(三寶)에 귀의함을 말한다.
♣ 삼귀의[三歸依]불법에 삼귀의는 불(佛)에 귀의(歸依)하고 법(法)에 귀의하고 승(僧)에 귀의한다는 것이다.
♣ 삼귀정[三龜亭]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풍산현(豐山縣) 서쪽 6리 지점에 있는 정자로, 거북이 엎드린 모양의 암석 세 개가 있었으므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 삼극[三極]동극ㆍ남극ㆍ서극을 말함.
♣ 삼극[三極]삼재(三才). 즉, 천(天)ㆍ지(地)ㆍ인(人)을 말한다.
♣ 삼극최가[三戟崔家]창[戟]은 고관들의 집 정문 앞에 배치된 위장(衛仗)을 말한다. 당(唐) 나라 최림(崔琳)은 최신경(崔神慶)의 아들로 정치에 밝았다. 개원(開元) 중에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는데, 그와 그의 아우 태자첨사 규(珪)와 광록경(光祿卿) 요(瑤) 삼형제가 모두 고관이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삼극최가(三戟崔家)라고 했다 한다. 《唐書 崔神慶傳》
♣ 삼급[三級]용문삼급(龍門三級)의 준말로, 황하(黃河)의 상류에 있는 세 단계로 된 용문 폭포를 이르는데, 강해(江海)에서 모여든 수천 마리의 대어(大魚)들 중에 이곳을 통과하여 올라간 고기는 용(龍)이 된다고 하므로, 전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한 것을 여기에 비유한다.
♣ 삼급비등[三級飛騰]황하(黃河)의 상류에 있는 용문(龍門)의 여울에는 폭포가 3단계로 나누어졌는데, 대어(大魚)가 그곳을 뛰어오르면 용(龍)이 된다는 고사에서, 즉 과거(科擧)에 급제하는 것을 비유한다.
♣ 삼기[三紀]36년. 1기(紀)는 12년임.
♣ 삼기[參旗]성좌(星座)의 이름으로, 높은 곳을 의미한다. 삼성(參星).
♣ 삼년과구극[三年過駒隙]3년이 빠르기가 달리는 망아지가 문틈을 넘어 가는 것처럼 빠르다는 말이다.
♣ 삼년불비[三年不飛]3년 동안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훗날 큰 일을 행하려고 얼마동안 자중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함을 비유하는 말.
♣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초(楚)나라의 장왕(莊王)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지나도 영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신하 오거(伍擧)가 간한 말.
♣ 삼년수축실[三年羞築室]자공(子貢)이 공자가 죽자 심상 삼년(心喪三年)을 마치고 다시 무덤 곁에 작은 집을 짓고 삼 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함. 《孟子 藤文公上》
♣ 삼년애[三年艾]큰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양약(良藥)을 이름. 7년 동안 앓아 온 큰 병에 뜸질을 하기 위해 3년 묵은 약쑥을 구한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孟子 離婁上》
♣ 삼년작저엽[三年作楮葉]옛날 송(宋) 나라 사람이 임금을 위해 3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옥(玉)으로 닥나무 잎사귀를 감쪽같이 만들었는데, 이에 대해 “가령 천지(天地)가 만물을 낼 때 3년 걸려 잎사귀 하나를 만든다면 잎사귀 있는 물건이 많지 않을 것이다.”고 비평한 글이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실려 있다.
♣ 삼년적[三年笛]삼년적은 3년 동안 시끄럽게 들려오는 호적(胡笛) 소리. 두보의 세병마행(洗兵馬行) 시에 “3년 동안 호적 소리에 관산의 달 비치누나[三年笛裏關山月]" 하여 당시의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를 말하였다.
♣ 삼노[三老]장년 삼로(長年三老)의 준말로 뱃사공을 말하는데, 혹은 뱃사공을 장년, 노젓는 사람을 삼로라 하기도 한다.
♣ 삼농[三農]봄, 여름, 가을 세 철에 철에 맞게 농사짓는 것을 말한다.
♣ 삼농[三農]산농(山農), 야농(野農), 택농(澤農)으로, 농사짓는 것을 가리킨다.
♣ 삼다[三多]많이 보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함을 말한다.
♣ 삼다학[三多學]많이 읽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玉海》
♣ 삼달덕[三達德]지(知)ㆍ인(仁)ㆍ용(勇)을 말하는데, 예기(禮記) 중용(中庸)에 “지ㆍ인ㆍ용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다.” 하였다.
♣ 삼달존[三達尊]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존경하는 세 가지 존귀한 것으로, 즉 작위(爵位)가 높고, 나이가 높고, 덕(德)이 높음을 말한다. 《孟子 公孫丑下》
♣ 삼당[三黨]낙당(洛黨), 촉당(蜀黨), 삭당(朔黨).
♣ 삼당[三唐]당대(唐代)를 시학(詩學) 연구상의 분류로, 초(初)ㆍ성(盛)ㆍ중(中)ㆍ만(晩)의 사기(四期)로 나누어 사당(四唐)이라 하는데, 삼당(三唐)은 초ㆍ성ㆍ중만을 말한 것이다.
♣ 삼당[三唐]당시(唐詩)에 조예가 깊었던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 삼대[三代]하(夏), 은(殷), 주(周) 시대를 말한다.
♣ 삼대[三代]하(夏)ㆍ상(商)ㆍ주(周) 시대를 말한 것이다.
♣ 삼대의원[三代醫員]삼대 동안 의술을 가업(家業)으로 하여 솜씨가 좋은 의원을 말한다.
♣ 삼대편[三大篇]두보의 소작으로 북정(北征)ㆍ봉선현영회(奉先縣詠懷)ㆍ장유(壯遊)를 말한 것임.
♣ 삼도[三島]삼도는 일본을 지칭한 말이다.
♣ 삼도[三島]삼신산(三神山)으로,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말한다. 이 산들은 발해(渤海) 바다 가운데 있는데, 신선들이 살고 불사약(不死藥)이 있으며, 새와 짐승이 모두 희고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선가(仙家)의 십주삼도(十洲三島)를 말함.
♣ 삼도[三都]세 도읍. 서울인 한성(漢城)과 개성(開城)ㆍ평양(平壤)을 이르는바, 삼경(三京)이라고도 칭한다.
♣ 삼도[三度]세 차례.
♣ 삼도[三塗]중국에서 험준하기로 유명한 산 이름이다. 《左傳 昭公 4年》
♣ 삼도[三刀]진(晉) 나라 왕준(王濬)이 대들보 위에 칼 세 개[三刀]가 걸리고 얼마 뒤에 다시 칼 하나가 더 걸리는 꿈을 꾸고 나서 매우 불쾌하게 여기자, 주부(主簿) 이의(李毅)가 축하하며 말하기를, “칼 세 개는 주(州)를 뜻하고 거기에 칼 하나가 덧붙여졌으니[益] 익주 자사(益州刺史)로 승진해서 나갈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과연 그 뒤에 그 말대로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王濬傳》
♣ 삼도[三塗]혹도(惑道)ㆍ업도(業道)ㆍ고도(苦道). 혹도는 우주의 진리와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망심(妄心), 업도는 망심으로 일어나는 몸ㆍ입ㆍ뜻으로 짓는 업, 고도는 3계ㆍ6도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 삼도몽[三刀夢]지방관이 됨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왕준(王濬)이 어느날 밤에 칼 세 자루를 들보에 걸어놓고 조금 뒤에 한 자루를 더 걸어놓는 꿈을 꾸고 나서 이를 불길하게 생각하였는데, 주부(主簿) 이의(李毅)가 말하기를 “삼도(三刀)는 곧 ‘리(▣)’로 주(州) 자가 되는데 여기에 칼 하나를 더했으니, 익주(益州)가 된다. 그러니 익주 태수가 될 길몽(吉夢)이다.”고 하였던바,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王濬傳》
♣ 삼도부[三都賦]진(晉) 나라 때의 문장가인 좌사(左思)가 10년 걸려서 지었다는 촉도부(蜀都賦), 오도부(吳都賦), 위도부(魏都賦)를 가리키는데,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다가 황보밀이 서문을 써 주자 천하에 명문장으로 회자(膾炙)되어 사람마다 이것을 베낌으로 인하여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폭등했다고 한다. 《晉書 左思傳》
♣ 삼도원[三桃苑]반악(潘岳)은 진(晉) 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안인(安仁). 일찍이 하양(河陽)의 원이 되어 곳곳에 복숭아를 심었다. 삼도(三桃)는 후도(候桃)ㆍ앵도(櫻桃)ㆍ호도(胡桃)를 말하는데 그의 한거부(閑居賦)에 “삼도는 앵도와 호도의 다른 종류를 표했다.” 하였다. 《晉書 潘岳傳》
♣ 삼독[三毒]불가어. 하나는 탐독(貪毒)으로 탐람(貪婪)의 마음이고, 하나는 진독(瞋毒)으로 분에(憤恚)의 마음이고, 하나는 치독(癡毒)으로 우매(愚昧)의 마음임. 대승의장(大乘義章)에 “此三毒統攝三界 一切煩惱 能害衆生 有如毒蛇毒龍 故名爲毒"이라 하였음.
♣ 삼독[三獨]어사대부(御史大夫)ㆍ상서령(尙書令)ㆍ사예교위(司隸校尉)는 조회(朝會) 때에 모두 전석(專席)으로 앉기 때문에 삼독좌라 한다.
♣ 삼독좌[三獨坐]후한(後漢) 선병(宣秉)이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는데, 광무제(光武帝)가 특히 명하여 어사중승과 사예교위(司隸校尉)와 상서령(尙書令)이 회동(會同)하되 각기 전석(專席)으로 앉으라 하니, 경사(京師)에서 이르되 “삼독좌(三獨坐)”라 하였다. 《後漢書 宣秉傳》
♣ 삼동족용[三冬足用]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의 글에, “나이 열둘에 글을 배워, 삼동(三冬) 공부에 문사(文史)를 족히 쓸 만하다.”는 말이 있다.
♣ 삼두[三蠹]삼두는 속어(俗語)에 이른바 밥벌레, 잠벌레, 글벌레를 말한다.
♣ 삼두[三斗]서 말은 많은 양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 삼두담[三斗膽]담이 커서 겁이 없다는 말. 두보(杜甫)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집주(集注)에 “당사습유(唐史拾遺)를 살펴보니, 여양왕 진(汝陽王璡)이 어느 날 임금 앞에서 취하여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므로, 임금이 사람을 시켜 겨드랑을 부축하여 계단을 내려가게 하니, 진이 사죄하기를 ‘신(臣)이 삼두(三斗)쯤 되는 장담(壯膽)을 지니고서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습니다.’ 했다.” 하였다.
♣ 삼라만상[森羅萬象]온갖 만물과 온갖 현상이라는 뜻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모든 물건과 현상을 의미함.
♣ 삼락[三樂]군자의 세 가지 낙. 곧 부모가 모두 생존하고 형제들이 무고함이 한 가지 낙이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는 것이 두가지 낙이요, 천하의 영재(英才)들을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가지 낙이다. 《孟子 盡心上》
♣ 삼락[三樂]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공자가 태산(太山)에 노닐 적에 영계기(榮啓期)가 녹피(鹿皮)의 갖옷을 입고 새끼[索] 띠를 허리에 매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 공자가 묻기를 “선생의 낙(樂)은 무엇입니까?" 하자, 영계기가 대답하기를 “나의 낙은 퍽 많다오. 하늘이 만물을 냈으나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한 가지 낙이요,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남자로 태어났으니 두 가지 낙이요, 사람이 태어나서 강보(襁褓)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는 자가 많은데 나는 나이가 90세이니 세 가지 낙입니다.” 하였다. 《列子 天瑞》
♣ 삼랑[三郞]당 현종(唐玄宗)의 소명(小名). 현종황제는 그 집안에서 같은 항렬 중에 셋째가 되므로 이삼낭(李三郞)이라고 자칭하였다.
♣ 삼랑갈고[三郞羯鼓]삼랑은 당 현종(唐玄宗)의 소명(小名)인데, 현종이 일찍이 내정(內庭)의 복사꽃ㆍ살구꽃이 머금은 것을 보고는 갈고(羯鼓)를 가져다가 스스로 춘호광(春好光)이란 곡조를 지어 한 곡을 치고 나서 보니, 복사꽃ㆍ살구꽃이 모두 이미 피었더라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삼량섬[三良殲]삼량은 춘추 시대 진(秦) 나라의 훌륭한 신하로서 목공(穆公)의 순장(殉葬)에 희생되었던 자거씨(子車氏)의 엄식(奄息)ㆍ중항(仲行)ㆍ겸호(鍼虎)의 3형제. 시경(詩經) 秦風 黃鳥에 “나는 꾀꼬리여, 뽕나무에 그치누나. 누가 목공을 따라 순장(殉葬)하는가 하면 자거씨의 중항이로다. 이 중항이여 백 명을 당해낼 만하네. 구덩이에 임하여 몹시도 두려워하누나. 저 하늘이여 이 훌륭한 사람 죽이네. 만일 저들을 대신 구원할 수 있다면 사람마다 자기 몸을 백 번이라도 바칠 걸세.[交交黃鳥 止于桑 誰從穆公 子車仲行 維此仲行 百夫之防 臨其穴 惴惴其憟 彼蒼者天 殲我良人 如可贖兮 人百其身]" 하였다.
♣ 삼려경수[三閭敬嬃]너무 강직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는 뜻. 초(楚)의 삼려 대부(三閭大夫)굴원(屈原)이 쓴 이소경(離騷經)안에, 굴원의 누이[女嬃]가 굴원을 끌어당기면서 너무 유별나게 강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고 했음.
♣ 삼려대부[三閭大夫]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관명(官名)으로, 왕족인 소씨(昭氏)ㆍ굴씨(屈氏)ㆍ경씨(景氏) 세 집안의 계보(系譜)와 인재 등용을 관장하였는바, 여기서는 이 벼슬을 지낸 굴원(屈原)을 가리킨 것이다.
♣ 삼려대부[三閭大夫]초 왕실의 삼성(三姓)인 소(昭), 굴(屈), 경(景) 삼가(三家)의 벼슬.
♣ 삼려찬국[三閭餐菊]초(楚)의 삼려대부(三閭大夫) 굴원(屈原)을 이른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아침에는 목란(木蘭) 위의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국화꽃을 먹는다.” 했다.
♣ 삼련[參連]주례(周禮)의 오사(五射) 가운데 한 가지 활쏘는 법으로서, 즉 앞에 화살 하나를 쏘고 뒤에 세 화살을 연속으로 쏘는 것을 말한다.
♣ 삼령[三靈]천신(天神), 지기(地祇), 인귀(人鬼)를 말한다.
♣ 삼령[三靈]해ㆍ달ㆍ별, 혹은 천(天)ㆍ지(地)ㆍ인(人)을 가리킨다.
♣ 삼령오신[三令五申]세 번 호령하고 다섯 번 거듭 말함. 곧 군대에서 자세히 명령함. 사기(史記) 손무전(孫武傳)에, “약속이 이미 보고되자 바로 부월(鈇鉞)을 설비하고 삼령 오신을 하였다.” 하였음.
♣ 삼례[三禮]유가의 경전으로, 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의 합칭이다.
♣ 삼로[三老]고대에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의 자리를 설치하여 노인을 봉양하였다. 《禮記 文王世子》
♣ 삼로[三老]노젓는 사람을 삼로라 한다.
♣ 삼로[三老]삼로는 정직(正直)ㆍ고명(高明)ㆍ침잠(沈潛)의 삼덕(三德)을 아는 장로(長老)로 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세 사람이라고도 한다.
♣ 삼로[三老]옛날에 임금이 부형(父兄)에 대한 예로써 우대하던 노인을 말하는데, 그는 한 향중(鄕中)의 교화를 맡았다고 한다.
♣ 삼롱적[三弄笛]있는 실력을 모두 발휘하여 한껏 뽐내면서 피리를 부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피리의 명인 환이(桓伊)를 만나 한 곡조 청하자 아무 말 없이 세 곡조나 불어 주고[三弄] 떠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 삼료응시[參寥凝始]언어와 문자의 길이 끊어진 현묘(玄妙)한 상태를 말한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오구(於謳)는 현명(玄冥)에게서 듣고, 현명은 삼료(參寥)에게서 듣고, 삼료는 의시(疑始)에게서 들었다.”고 되어 있다.
♣ 삼료자[參廖子]송(宋) 나라의 고승(高僧) 도잠(道潛)의 호. 삼료자집(參寥子集) 12권을 남겼다.
♣ 삼룡[三龍]파지국(波知國)의 삼지전(三池傳)에 의하면, 큰 못에 용왕(龍王)과 용부(龍婦)와 용자(龍子)가 있는데, 행인(行人)들이 제사를 지내면 편히 그 곳을 지날 수가 있으나,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반드시 풍우(風雨)를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
♣ 삼류대화성[三流大火星]3년이 지났음을 말한다. 화성(火星)은 심성(心星)을 말한 것으로, 음력 7월이 되면 그 별이 서쪽으로 흐른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에 ‘칠월유화(七月流火)’라는 구절이 나온다.
♣ 삼리술[三里術]후한(後漢) 장해(張楷)가 도술(道術)을 좋아하여 5리 안개를 만들고, 같은 때의 관서(關西) 사람 배우(裴優)가 또한 3리 안개를 만들었다. 후한서(後漢書)
♣ 삼마[三摩]삼마는 삼마발저(三摩鉢底)로 정(定)을 가리키는데, 곧 정력(定力)에 의하여 혼침(惛沈)ㆍ도거(掉擧)의 번뇌를 여의고 마음이 평등 평정(平靜)해짐을 말한 것으로 불교의 진리를 가리킨 것이다.
♣ 삼마지[三摩地]불가의 말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산란하지 않게 하는 정신작용.
♣ 삼마태수[三馬太守]한고을의 수령이 부임지로 나갈 때나 또는 임기가 끝날 때 감사의 표시로 보통 그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여덟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인데 송흠(宋欽)이라는 사람은 새로 부임해 갈 때 세 마리만 받아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렸다 함.
♣ 삼막삼보[三藐三菩]불교 용어로서, 이는 곧 부처의 깨달은 지혜를 말한다.
♣ 삼매[三昧]불교 용어로, 삼매는 원래 범어(梵語)의 음(音)을 단순히 표기한 것.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집중시키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 어떤 일에 열중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
♣ 삼매강[三昧講]삼매는 불교의 용어로, 즉 한 가지 일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이른 말이니, 바로 강론(講論)에 마음을 집중시킴을 뜻한다.
♣ 삼매경[三昧境]잡념이 없이 오직 한가지 일에만 정신력을 집중하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를 의미하는 불교의 범어(梵語).
♣ 삼매수[三昧手]마음속에 잡념이 없는 오묘한 경지에 든 솜씨를 말한다.
♣ 삼맹호[三猛虎]조선시대 연산군(燕山君) 때 상주목사(尙州牧使) 신극성(愼克成), 선산부사(善山府使) 남경(南憬), 의성현령(義城縣令) 이장길(李長吉) 등 세사람이 읍민에게 과도한 징세를 부과하고 학대함이 심하므로 영남인들이 이들을 지적하여 부른 별명.
♣ 삼면[三眠]삼면은 누에가 세 번 잠자는 것을 이르는데, 누에는 세 번을 자면 섶에 올라 고치를 짓으므로 늘그막을 뜻한다.
♣ 삼면[三眠]삼면은 한 무제(漢武帝)의 원중(苑中)에 있는 버들인데 모양이 사람처럼 생겼으므로 인류(人柳)라고 하는데, 하루에 세 번 자고 세 번 일어난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삼면잠우레[三眠蠶遇雷]석 잠을 잔 누에는 아무리 우레를 만나도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인간 세상 그 어찌 봄날 한 꿈이 있으려나, 이 몸 장차 석 잠 잔 누에처럼 늙으리.[人間何有春一夢 此身將老蠶三眠]”하였다.
♣ 삼명[三命]거듭 왕명을 받고 2품(品)인 경(卿)의 지위로 승진된 것을 말한다. 주대(周代)에 관직을 9등(等)으로 나누고 이를 9명(命)이라 칭했는데, 삼명(三命)은 공후백(公侯伯)의 경(卿) 벼슬에 해당된다.
♣ 삼명순장[三命循墻]춘추시대 공자의 조상 정고보(正考父)가 송(宋)나라의 상경(上卿)으로 제수 될 때 처음에 명이 내리자 고개를 숙이고, 두 번째 명이 내리자 몸을 구부리고, 세 번째 명이 내리자 허리를 완전히 굽히고서 담장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春秋左傳 昭公 七年 九月條》
♣ 삼모[三謨]서경(書經)의 편명인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益稷)을 가리킨다.
♣ 삼모호사[參眸豪士]순(舜)과 항우는 모두 눈에 동자가 둘이었다고 한다.
♣ 삼묘[三泖]삼묘는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묘수(泖水)를 상ㆍ중ㆍ하로 나누어 부르는 이름인데, 강남(江南) 사람들은 특히 여울이 없이 조용히 고여 있는 물을 묘(泖)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삼무오다[三無五多]울릉도에는 도둑, 거지, 바퀴 달린 물건이 없고, 눈, 바람, 오징어, 향나무, 미인이 많다는 말.
♣ 삼물교합[三物交合]건축재료의 하나. 석회(石灰), 세사(細沙), 황토(黃土) 세가지를 배합한 것인데, 주로 기초(基礎)를 다지는데 썼다.
♣ 삼박[三亳]땅 이름. 황보밀(皇甫謐)의 설에 의하면, 삼박(三亳)은 곡숙(穀熟)인 남박(南亳), 즉 탕(湯) 임금의 도읍지와 몽(蒙)이 북박(北亳) 즉 경박(景亳)으로 탕임금이 명(命)을 받은 곳과 언사(偃師) 즉 서박(西亳)으로 곧 반경(盤庚)이 도읍을 옮긴 곳이라 하였다.
♣ 삼반[三反]사색이 깊은 것을 말함.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한쪽 모서리를 들어보였을 때 그 나머지 세 모서리를 헤아리지 못하면 더 이상 말해주지 않는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하였음.
♣ 삼발[三發]세 곳에서 출발함. 옛날에 제주도를 가려면 세 곳에서 출발하게 되었었다. 즉 나주(羅州)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무안ㆍ영암ㆍ해남 등을 거쳐 7주야 만에 추자도에 이르고, 해남(海南)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삼재포로 해서 삼내도를 거치며, 탐진(耽津)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군영포로 해서 모든 섬을 거치는데, 모두 3주야만에 추자도에 이르게 된다. 세 곳에서 출발한 배는 다 이 추자도를 거쳐서 조천관(朝天館)에 이르렀던 것이다.
♣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한(汗)이 성 아래 왔을 때 최명길이 상국(相國) 홍학곡(洪鶴谷)과 함께 찾아가니 그가 초구(貂裘)를 주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입고 춤을 추면서 황은(皇恩)에 감사하다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후 나왔다.
♣ 삼배통대도[三杯通大道]이태백(李太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청주 탁주 성현의 술 이미 다 마셨으니, 신선을 구태여 찾을 필요 뭐 있으랴. 석 잔의 술에 대도를 통하고, 한 말술에 자연과 합치됐느니.[賢聖旣已飮 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라는 표현이 있다.
♣ 삼배통도[三杯通道]이백(李白)의 월하독작시(月下獨酌詩)에 “하필 신선을 구할 게 뭐랴, 석 잔 술에 대도를 통하고, 한 말 술에 자연과 합한다.[何必求神仙 三杯通大道 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라는 구절이 있다.
♣ 삼백[三白]납전삼백(臘前三白)에서 나온 말로 풍년의 징조라 한다. 본초(本草) 납설(臘雪)에 “동지(冬至) 지난 뒤 세 번째 술일(戌日)이 납(臘)인데 납 이전에 세 차례 눈이 오면 보리 농사에 아주 좋다.” 하였다.
♣ 삼백기송시[三百其誦詩]공자의 말에, “시경(詩經) 3백 편을 읽고,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전대(專對)하지 못하면 많이 읽은 것이 무슨 소용이랴.” 하였다. 시경(詩經)은 모두 3백 편이며, 옛날 중국에서는 시경(詩經)이 외교에 매우 많이 응용되었다.
♣ 삼백전[三百廛]삼백은 다수(多數)를 뜻하고 전은 단위 백 묘(百畝)에 해당하는 것으로, 시경(詩經) 위풍(魏風) 벌단(伐檀)에 “씨뿌리고 거두지 않으면 삼백전의 곡식을 어떻게 취하랴[不稼不穡 胡取禾三百廛兮]” 한 데서 온 말이다.
♣ 삼백편[三百篇]시경(詩經). 시경(詩經)에 수록된 시를 가리킴.
♣ 삼법사[三法司]법의 집행을 맡은 세 관사(官司). 특히 의금부(義禁府)ㆍ사헌부(司憲府)ㆍ형조(刑曹)를 아울러 부르는 말.
♣ 삼변[三變]당나라 문장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초당(初唐)ㆍ중당(中唐)ㆍ만당(晩唐)으로 구별된다.
♣ 삼변[三變]자하(子夏)가 군자의 용태를 말하면서 “군자의 용태는 세 가지 변화가 있으니 멀리 바라보면 장중하고 그의 면전에 나아가면 온화하면서도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매우 엄정하다.” 하였음. 《論語 子張》
♣ 삼보[三輔]도성(都城) 부근의 지방장관을 뜻함. 한(漢) 나라 때 장안(長安) 부근에 경조윤(京兆尹)ㆍ좌풍익(左馮翊)ㆍ우부풍(右扶風)을 두었던 데서 온 말이다.
♣ 삼보[三寶]불가에서 말하는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를 이르는데, 전하여 부처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 삼보[三輔]삼보(三輔)는 서울에서 가까운 고을을 말한다.
♣ 삼보[三輔]삼보는 서한(西漢) 때 서울 장안(長安)의 주변을 다스리는 세 벼슬로, 우내사(右內史)ㆍ좌내사(左內史)ㆍ도위(都尉) 등을 말한다.
♣ 삼보[三輔]서한(西漢) 때 세 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던 경기(京畿) 지방의 합칭(合稱)이다.
♣ 삼보결록[三輔決錄]한(漢) 나라 조기(趙岐)의 찬으로 총 2권. 본래의 책은 전하지 않고 현재의 것은 청(淸) 나라 사람의 집본(輯本)임.
♣ 삼복[三復]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의 제자 남용(南容)이 시를 읽다가 백규장(白圭章)에 이르면 그 뜻을 음미하며 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하였다.
♣ 삼복백규[三復白圭]백규를 세 번 반복한다는 말로, 말을 신중하게 함.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편에 “백옥(白玉)으로 만든 규(圭)의 흠은 갈아서 없앨 수 있지만, 말을 한 번 잘못하면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시를 남용(南容)이 하루에 세 번 반복해서 외우자[三復白圭], 공자가 칭찬하며 조카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論語 先進》
♣ 삼부[三賦]세 시부(詩賦). 진(陳) 나라 강총(江總)의 일일성삼부응령시(一日成三賦應令詩)에 “붓을 들어 삼부를 이루고, 술잔을 전하면서 구추를 대하누나.[下筆成三賦 傳觴對九秋]" 하였다.
♣ 삼부속[三釜粟]아주 작은 양의 곡식을 뜻함. 부(釜)는 용량의 단위로서 6두(斗) 4승(升)에 해당한다.
♣ 삼부양[三釜養]박봉(薄俸)으로나마 어버이를 잘 봉양함을 이름. 일부(一釜)는 6두(斗) 4승(升)이니, 삼부는 아주 작은 봉록을 뜻하는데,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내가 어버이 계실 때 벼슬하면서는 삼부의 봉록으로도 마음이 즐거웠는데, 어버이 돌아가신 뒤에는 삼천종(三千鐘)의 봉록을 받아도 내 마음이 슬프기만 하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寓言》
♣ 삼분[三墳]상고(上古) 시대 삼황(三皇)의 책을 가리키는 말인데, 즉 매우 소중함을 의미한다.
♣ 삼분구구[三墳九丘]삼분은 고서(古書)로서 삼황(三皇)의 책을 이르고, 구구(九丘) 또한 고서로서 옛날 중국 구주(九州)의 지리서(地理書)인데, 둘 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 삼분오전[三墳五典]삼황 오제(三皇五帝) 때에 있었다는 책이라 하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여기서는 공부를 많이 했다는 뜻. 좌전(左傳) 소공(昭公) 12년에 “좌사(左史) 의상(依相)이 왕을 뵈매, 왕이 ‘그대는 훌륭한 사관(史官)이라, 삼분 오전과 팔색 구구(八索九丘)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 삼분위주[三分危主]삼분은 후한(後漢) 말기에 천하를 삼분하여 할거(割據)한 촉(蜀), 위(魏), 오(吳)의 세 나라를 가리키고, 위주는 곧 후한의 맨 끝 황제(皇帝)로 나이 9세에 즉위했던 헌제(獻帝)를 가리킨다.
♣ 삼분정족[三分鼎足]셋으로 나뉜 것이 솥의 발 같다는 뜻으로, 솥발처럼 삼자(三者)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있다는 의미.
♣ 삼불거[三不去]칠거지악(七去之惡)의 이유가 있는 아내라도 버리지 못하는 세 가지 경우. 즉 보내도 아내가 의지할 곳이 없는 경우, 부모의 삼년상을 같이 치른 경우, 장가들 때에 가난하다가 뒤에 부귀하게 된 경우.
♣ 삼불후[三不朽]덕업(德業)을 이루고 뛰어난 공을 세우고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4년에 “최상은 입덕(立德)이요, 그 다음은 입공(立功)이요, 그 다음은 입언(立言)이니,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는 이것을 불후(不朽)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삼사[三事]불서(佛書)에 의(衣)・식(食)・자리라는 귀절이 있다.
♣ 삼사[三事]삼공(三公). 곧 고려 때 정1품인 태위(太尉)ㆍ사공(司空)ㆍ사도(司徒)를 일컫는다.
♣ 삼사[三事]삼공(三公)의 지위로, 즉 재상(宰相)을 가리킨다.
♣ 삼사[三事]삼사는 삼농(三農)과 같은 뜻으로, 즉 평지(平地)ㆍ고원(高原)ㆍ저습(低濕) 세 지대의 농사를 이름.
♣ 삼사[三事]삼사는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
♣ 삼사[三士]삼사는 춘추 시대 진 문공(晉文公)이 19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할 적에 고락(苦樂)을 함께 하며 제후의 패자(霸者)가 되게 했던 호언(狐偃), 조쇠(趙衰), 가타(賈佗) 3인을 가리킨다.
♣ 삼사[三事]임금, 부모, 스승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 삼사[三司]조선 초기에 재정(財政)을 맡아보던 관아인데, 전하여 재정의 뜻으로 쓴 것이다.
♣ 삼사관[三司官]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리.
♣ 삼사또[三使道]조선 시대 관찰사(觀察使)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를 합쳐 일컬은 명칭.
♣ 삼사생[三舍生]성균관 유생이라는 말이다. 송(宋) 나라 때 태학(太學)에 상사(上舍), 내사(內舍), 외사(外舍)의 삼사(三舍)를 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 삼사속[森似束]묶어둔 것처럼 많이 서있다.
♣ 삼산[三山]삼각산(三角山)을 빗대어 옛날 이백(李白)이 노닐던 금릉(金陵)의 봉황대(鳳凰臺)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 시적 표현이다. 이백의 등금릉봉황대시(登金陵鳳凰臺詩)에 “三山半落靑天外 一水中分白鷺洲”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 삼산[三山]삼신산(三神山)으로,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말한다. 이 산들은 발해(渤海) 바다 가운데 있는데, 신선들이 살고 불사약(不死藥)이 있으며, 새와 짐승이 모두 희고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 삼산[三山]유희해(劉喜海)의 호임.
♣ 삼산[三山]충청북도 보은(報恩)의 옛 이름. 보령(報令)이라고도 한다.
♣ 삼산도[三山島]삼산도는 해로(海路)로 북경에 가는 도중에 있는 섬으로, 정자산(亭子山)과 평도(平島)의 사이에 있다.
♣ 삼산수천심[三山水淺深]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는 말이다. 마고 선녀(麻姑仙女)가 신선인 왕원(王遠)을 만났을 때, “예전에 당신을 만난 이후로 동해 바다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 봉래산(蓬萊山)으로 오다 보니 저번보다 물이 반이나 줄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할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왕원이 “성인들도 모두 바다 속에서 다시 먼지가 풀풀 날릴 것이라고 하였다.”고 대답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神仙傳》
♣ 삼산약[三山約]조운(朝雲)은 소식(蘇軾)의 애첩(愛妾) 이름인데, 여러 첩 가운데 유독 조운이 소식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므로, 소식이 장난삼아 지은 조운시(朝雲詩)에 “단약 이루러 나를 따라 삼산으로 가서 무양의 운우 선녀가 되지를 않았네[丹成逐我三山去 不作巫陽雲雨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三十八》
♣ 삼산은궐[三山銀闕]바다 속 삼신산 꼭대기에 금은 주옥으로 만든 누대와 전각이 서 있다는 전설이 있다. 《列子 湯問》
♣ 삼삼[三三]바둑판의 가로세로 각각 제3선이 만나는 네 귀의 점
♣ 삼삼[三三]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세 가지 삼매(三昧), 즉 공삼매(空三昧)ㆍ무상삼매(無想三昧)ㆍ무원삼매(無願三昧)를 말한다.
♣ 삼삼[三三]삼삼(三三)은 곧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구궁(九宮)을 의미한다.
♣ 삼삼[毿毿]털이 긴 모양, 버들가지 같은 것이 가늘고 길게 늘어진 모양
♣ 삼삼[參參]빽빽이 선 모양
♣ 삼삼경[三三徑]삼삼경은 한(漢) 나라 때 은사(隱士)인 장후(蔣詡)가 자기 마당에 세 길을 내놓고 송(松)ㆍ국(菊)ㆍ죽(竹)을 심었다는, 즉 삼경(三徑)과 같은 뜻이다.
♣ 삼상[三上]구양수(歐陽修)가, “시를 지을 때는 대개 베개 위ㆍ뒷간ㆍ말 위에서 생각한다.” 하였다.
♣ 삼상[三湘]상강(湘江) 유역과 동정호(洞庭湖) 일대를 지칭하는 말.
♣ 삼상[參商]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삼성(參星)은 서남쪽에 있고 상성(商星)은 동쪽에 있어서 서로 방향이 달라 동시에 뜨는 일이 없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원년(元年)에 “옛날 고신씨(高辛氏)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은 알백(閼伯), 아우는 실침(實沈)으로 광림(曠林)에 거하여 서로 우애하지 못하고 날마다 싸움을 벌였다. 이에 상제(上帝)는 괘씸하게 여겨 알백을 상구(商邱)에 옮기니 이것이 상성이 되었고, 실침을 대하(大夏)에 옮기니 이것이 삼성이 되었다.” 하였다.
♣ 삼상[三上]시문을 지을 때 생각이 잘 떠오른다는 세 곳. 곧 말을 탔을 때[馬上], 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枕上], 뒷간에 갔을 때[廁上]를 말함.
♣ 삼상[三湘]중국 장사부(長沙府)에 있는 소상(瀟湘)ㆍ증상(蒸湘)ㆍ원상(沅湘)의 세 강을 말한다.
♣ 삼상[三湘]중국 호남(湖南)의 상향(湘鄕), 상담(湘潭), 상음(湘陰)으로, 상강(湘江)의 유역 및 동정호(洞庭湖) 일대 지방을 가리킨다.
♣ 삼상구인난[三湘舊紉蘭]조정에서 쫓겨나 불우하게 보낼 적에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방축(放逐)된 뒤 상강(湘江) 언덕을 거닐며 비가(悲歌)를 읊조렸던 고사가 있다.
♣ 삼상리[參商離]서남방 신위(申位)에 있는 삼성(參星)과 동방 묘위(卯位)에 있는 상성(商星)처럼 멀리 떨어진 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 삼상별[參商別]삼성(參星)과 상성이란 두 별 이름. 삼성은 서남방 신(申)의 위치에 있고, 상성은 동방 묘(卯)의 위치에 있어서 서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서로 흩어져 만나지 못한다는 비유이다.
♣ 삼상서[三上書]한유(韓愈)의 글에 “三上書去官”이라는 표현이 있다.《唐正議大夫尙書左丞孔公墓誌銘》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는 이를 전송한 시의 서(序)에도 “三獻書不報長揖而去”라는 구절이 있다.《韓昌黎集 補遺 送張道士 幷序》
♣ 삼색도화[三色桃花]인조 때 이조 판서(吏曺判書)인 남이웅(南以雄)이 관리(官吏)를 전주(銓注)할 때 반드시 서인(西人)ㆍ남인(南人)ㆍ북인(北人)의 삼색인(三色人)을 삼망(三望)에 올렸으므로 당시에 그것을 가라켜 ‘삼색도화’라고 하였다.
♣ 삼색리[三色李]진(晉) 나라 때 부현(傅玄)의 이부(李賦)에 “……방릉(房陵)의 표청리(縹靑李 옥색 오얏)는 한 나무에 세 가지 색깔의 오얏이 열리고 맛과 이름이 각기 다르다.” 하였다.
♣ 삼생[三生]불가(佛家)의 용어로, 사람이 태어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즉 전생(前生), 현생(現生), 후생(後生)을 가리킨다. 당(唐) 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 이원(李源)이 낙양 혜림사(惠林寺)의 승려 원관(圓觀)과 깊은 우정을 나누다가 원관이 죽은 뒤 그가 다시 환생한 목동을 만나 서로들 알아보았다는 삼생석(三生石)의 전설이 전한다. 《甘澤謠 圓觀》
♣ 삼생[三牲]삼생은 소ㆍ양ㆍ돼지임.
♣ 삼생석[三生石]전생의 숙연(宿緣)을 말한다. 삼생은 불가(佛家)의 용어로, 전생(前生), 현생(現生), 후생(後生)을 가리킨다. 당 나라 때 이원(李源)과 중 원관(圓觀)이 서로 친하게 지내었는데, 함께 삼협(三峽)을 유람하다가 물을 긷는 어떤 부인을 보고 원관이 말하기를, “임산부 가운데 왕씨(王氏) 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내가 몸을 의탁할 곳이다.” 하고는 12년 뒤 중추(中秋) 달밤에 항주(杭州)의 천축사(天竺寺)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 원관이 죽고 임산부가 출산을 하였다. 그 뒤에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가 되어 이원이 약속 장소에 가서 어떤 목동(牧童)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 목동이 바로 원관의 후신인 줄을 알았다. 후대에는 이를 인해서 천축사 뒷산에 있는 돌을 삼생의 돌이라 하였다.
♣ 삼생숙계[三生夙契]삼생은 불교에서 말하는 과거ㆍ현재ㆍ미래, 즉 인간의 전생(前生)ㆍ현생(現生)ㆍ후생(後生)을 이른 말이고, 숙계는 즉 전세(前世)의 약속이란 뜻이다.
♣ 삼생업[三生業]불가어로 삼세전생(三世轉生)의 뜻임.
♣ 삼생유행[三生有幸]서로간에 각별한 인연이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
♣ 삼선[三禪]삼선은 이른바 운문선사(雲門禪師)가 대중을 교화한 삼자선(三字禪)으로, 고(顧; 나를 돌아봄), 감(鑑 남을 비춰 봄), 이(咦; 일체를 초월하여 자적(自適)함)를 말한다.
♣ 삼선[三羨]훌륭한 선비, 좋은 경치, 좋은 명절 등 이 세 가지 부러운 일이란 뜻으로 쓰인 말이다.
♣ 삼선설[三禪舌]절가에서 즐겁게 나누는 정담(情談)을 말한다. 능엄경(楞嚴經)에 “안온(安穩)한 마음 가운데 환희(歡喜)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을 이름하여 삼선이라 한다.” 하였다.
♣ 삼성[參星]28수(宿)의 하나. 오리온 좌(座)에 속한 남쪽의 세 개의 별과 그 부근의 별들을 가리킨다. 마치 쟁기의 형상과 비슷하여 여성(犁星)이라고도 하는데, 겨울에 가장 똑똑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별자리이다.
♣ 삼성[三省]강상죄인(綱常罪人)을 추국하는 세 아문(衙門). 곧 의정부(議政府)ㆍ사헌부(司憲府)ㆍ의금부(義禁府)
♣ 삼성[三聲]군호(軍號)를 말한다. 옛날에 군중(軍中)에서 금고(金鼓), 가(笳), 탁(鐸)의 소리로 명령을 전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 삼성[三性]불교에서 모든 법을 성질상으로 보아 세 가지로 나눈 것, 첫째 미망(迷妄)한 소견과 억측으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잘못 판단하는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둘째 다른 인연에 의하여 생긴 만유(萬有)에 집착하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셋째 현상의 본체인 원만ㆍ성취ㆍ진실의 진여(眞如)인 원성실성(圓成實性)을 가리키며, 또한 선성(善性)ㆍ악성(惡性)ㆍ무기성(無記性)을 가리키기도 한다.
♣ 삼성[三聖]삼성은 설이 많아 유가(儒家)에서는, 복희씨(伏羲氏)ㆍ주 문왕(周文王)ㆍ공자(孔子) 또는 요(堯)ㆍ순(舜)ㆍ우(禹) 또는 문왕ㆍ무왕(武王)ㆍ주공(周公)을 일러 삼성이라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이른바 법화삼성(法華三聖), 화엄삼성(華嚴三聖), 미타삼성(彌陀三聖)으로 칭하기도 하며, 혹은 공자ㆍ석가(釋迦)ㆍ노자(老子)를 들어 삼성이라고도 함.
♣ 삼성[三省]세 가지 면에서 반성하는 것.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에 “나는 매일 세 가지 일을 가지고 자신을 향해 반성해 보는데, 남을 위하여 일을 할 때 충실히 나의 능력을 다하는지, 벗과 사귀면서 성실하지 않은 점은 없는지, 스승이 나에게 전수한 학업을 힘써 익히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하였다.
♣ 삼성[三聲]세속에 전하는, 이른바 인가(人家)에 있어야 할 세 가지 소리로서 글 읽는 소리, 베 짜는 소리, 아기 우는 소리를 가리킨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 삼성[三聖]주역을 찬한 세 성인으로 우(禹)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를 가리킨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나도 인심을 바루어 사설(邪說)을 없애고 나쁜 행실을 막고 음란한 말을 물리쳐 삼성(三聖)을 받들고자 한다.” 하였다.
♣ 삼세의[三世醫]삼대 동안 의술을 가업(家業)으로 하여 경험과 문견이 풍부한 명의(名醫)를 말한다. 특히 군부(君父)의 병은 아무 의원에게나 맡기지 않고 반드시 삼대(三代) 동안 계속하여 의료에 종사한 의원의 약을 쓴다는 데서 온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삼대 이상 의원을 한 사람이 아니면 그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 하였다.
♣ 삼세지습지우팔십[三歲之習至于八十]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 삼소[三蘇]북송(北宋) 시대 문장가였던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 형제를 합칭한 말. 모두 글을 잘 하므로 세상에서 삼소(三蘇)라 한다.
♣ 삼소[三疏]윤증약(尹曾若)의 호.
♣ 삼소[三笑]진(晉)의 고승(高僧) 혜원(慧遠)이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때 호계(虎溪)를 지나온 줄도 모르고 마음을 논하면서 서로 크게 웃었다는 고사이다. 지금의 삼소도(三笑圖)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 삼소과계동[三笑過溪東]옛날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손님을 전송하면서 호계(虎溪)를 넘은 일이 없었는데, 언젠가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전별하면서는 서로 의기가 상합하여 얘기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호계를 지나치고는 세 사람이 껄껄 웃었다고 함. 《廬山記》
♣ 삼소도[三笑圖]혜원(慧遠)이 여산(驪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었는데,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이 찾아 왔다가 돌아갈 때, 혜원이 전송하매, 평일에는 손님 전송에 호계(虎溪)를 넘지 않았는데 이 날은 세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어느덧 호계를 지나왔으므로 모두 웃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삼소도(三笑圖)를 그려서 전하였다.
♣ 삼수[三手]사람을 해치는 세 가지 방법으로 평지수(平地手)ㆍ대급수(大急手)ㆍ소급수(小急手)를 가리키는 말이다. 평지수는 돈으로 내시(內侍)들과 교결하여 죄에 얽어넣어 조정에서 내쫓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고, 대급수는 궁중(宮中)에 은밀히 숨어 들어가서 직접 임금을 시해하는 자객(刺客)을 가리키는 말이고, 소급수는 독약(毒藥)으로 임금을 시해하는 일을 맡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 삼수[三秀]지초(芝草)를 이름. 지초는 일 년에 꽃이 세 번 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임. 《爾雅翼 芝》
♣ 삼수지[三秀芝]영지(靈芝)를 말함. 영지는 1년에 세 번 꽃이 피므로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 삼수초[三秀草]상서로운 풀로 불리는 영지초(靈芝草)의 별칭. 1년에 세 번 꽃이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삼숙[三宿]승려가 만행(萬行)을 할 때 뽕나무 아래에서 쉬되 한 나무 아래에서는 3일 이상을 쉬지 않고 자리를 옮기는데, 이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연연해하는 마음이 생길까 염려해서, 세속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사흘 이상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0下 襄楷列傳》
♣ 삼숙[三宿]조정을 떠나면서 왕이 다시 부르기를 기대하여 천천히 가는 것을 말함. 맹자(孟子)가 천리 먼길을 꺼리지 않고 제(齊) 나라 왕을 찾아갔다가 뜻이 맞지 않자 떠나면서 왕이 다시 부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3일 동안이나 제 나라 동남쪽에 있는 주(晝)라는 고을에서 묵고 간 일을 말한다. 맹자(孟子) 공손추하(公孫丑下)에 “3일 동안을 묵고 주 고을[晝邑]을 나왔다.[三宿而出晝]" 하였다.
♣ 삼숙상하지연[三宿桑下之戀]한 곳에 오래 머물러 정이 든다는 말로, 부도(浮屠)가 애착을 두지 않으려 한 데서 나온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권30 하 양해전(襄楷傳)에 “부도가 뽕나무 아래 3일을 머물지 않는 것은 오래 있어 은애(恩愛)가 생기지 않게 하고자 함이니, 정신(精神)을 지극하게 하려는 것이다.[浮屠不三宿桑下 不欲久生恩愛 精之至也]" 하였다.
♣ 삼숙출주[三宿出晝]맹자가 제 나라에서 불우(不遇)하여 타국으로 떠나면서도 아직 희망을 가져 차마 얼른 떠나지 못하고 사흘 밤이나 주(晝)에서 머물렀다가 떠났다 한다.
♣ 삼순구식[三旬九食]한달(30일, 三旬)에 아홉 끼를 먹는다는 뜻으로, 빈궁하여 먹을 것이 부족함을 말함.
♣ 삼승[三乘]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성문(聲聞)ㆍ연각(緣閣)ㆍ보살(菩薩)에 대한 세 가지 교법(敎法)을 말한다.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
♣ 삼승법[三乘法]중생을 태우고 생사의 바다를 건널 때의 세 가지 교법(敎法). 곧 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
♣ 삼시[三尸]삼시는 사람의 몸속에 들어앉아 재앙을 일으키며 상제에게 고자질한다는 도가(道家)의 귀신 이름이다. “사람의 몸에 삼시충(三尸蟲)이 있는데, 그것이 없어져야 오래 산다.” 하였다. 당(唐) 나라 유종원(柳宗元)의 글에 매시충문(罵尸蟲文)이 있다.
♣ 삼시기해[三豕己亥]문자(文字)를 잘못 알고 있음을 말함. 삼시(三豕)와 기해(己亥)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기해를 삼시로 잘못 판독했다는 데서 온 말임.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
♣ 삼시충[三尸蟲]사람의 몸에 삼시충(三尸蟲)이란 벌레가 있어서, 경신일(庚申日)마다 하늘에 올라가서 그 사람이 지은 허물을 고해 바친다 하는데, 신선이 되려면 이 삼시충을 몸에서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 삼신[參辰]유시(酉時)에 서방(西方)에 나오는 삼성(參星)과 묘시(卯時)에 동방(東方)에 나오는 신성(辰星)처럼 서로 동떨어져 있는 관계로, 세불양립(勢不兩立) 혹은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지는 일을 말한다.
♣ 삼신[三辰]일(日)ㆍ월(月)ㆍ성신(星辰)을 합칭한 말이다.
♣ 삼신[參辰]삼상(參商)과 같은 말인데, 삼성(參星)은 서쪽에 상성(商星)은 동쪽에 서로 등져 있어 동시에 두 별을 볼 수 없으므로, 친한 사람과 서로 헤어져서 만나지 못하는 데에 비유한다.
♣ 삼신산[三神山]삼신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봉래산(蓬萊山)ㆍ방장산(方丈山)ㆍ영주산(瀛州山)의 세 산을 가리키는데, 동해(東海)에 있다 함.
♣ 삼십만수백[三十萬樹白]오난설의 부춘매은설(富春梅隱說)에 “九里洲在富春山水佳處 計畝種梅 可得三十萬樹"라 하였음.
♣ 삼십삼동파[三十三東坡)]고려 문사(文士)들이 오로지 동파를 숭상하였기 때문에 매년 과거 합격자를 발표할 때면 사람들이 “올해도 또 33명의 동파가 배출되겠구나.”라고 하였다 함. 《大東韻府群玉 第六卷》
♣ 삼십오년진일별[三十五年眞一瞥]진시황이 신선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임금이 된지 35년 만에 죽었다.
♣ 삼십육계 주위상계[三十六計走爲上計]일의 형편이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란 의미.
♣ 삼십육궁[三十六宮]중국 고대 역법(曆法)에 30도(度)가 한 궁(宮)이므로, 한 주천(周天)이 11궁, 봄ㆍ여름ㆍ가을 세 철을 양(陽)으로 잡으면 합하여 36궁. 겨울만이 음(陰)인데 동지(冬至)에 양(陽)이 처음 발생하므로 동지로부터 36궁의 봄이 벌써 시작된다 함. “36궁이 모두 다 봄[三十六宮 都是春]” 《邵雍 詩》
♣ 삼십육린[三十六鱗]잉어 양 옆면에 모두 36개의 비늘이 있고 비늘 위에는 작은 흑점(黑點)이 있다.
♣ 삼아[三雅]’雅’는 술그릇을 말함. 매곡우필(梅谷偶筆)에 “魏文帝典論 荊州牧劉 表弟子以酒器命三爵 上曰伯雅 中曰仲雅 小曰季雅"라 하였음.
♣ 삼아[三雅]석 잔의 술을 이름. 옛날에 어떤 사람이 못[池]을 수축하다가 마치 술찬처럼 생긴 동기(銅器) 세 개를 얻었는데, 가장 큰 것은 백아(伯雅), 다음 큰 것은 중아(仲雅), 가장 작은 것은 계아(季雅)라고 각각 전서(篆書)로 쓰여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삼아오엽[三椏五葉]인삼(人蔘)을 이름.
♣ 삼악삼토[三握三吐]밥을 먹거나 머리를 감을 때에 손님이 오면 먹던 밥은 뱉고, 감던 머리는 쥐고 바로 나가 마중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삼야[三耶]삼야삼불(三耶三佛)의 준말로, 정변지(正遍智)ㆍ정등정각(正等正覺) 등의 뜻인데, 곧 부처가 깨달은 지혜를 말한다. 삼막삼보리(三藐三菩提)라고도 한다.
♣ 삼양[三陽]세 개의 양효(陽爻)로 음력 정월을 가리킨다. 열두 달을 주역(周易)의 육십사괘(六十四卦)에 연관시켜, 동짓달에는 한 양(陽)이 처음 아래에서 생긴 복괘(復卦)가 되고 섣달에는 두 양인 임괘(臨卦)가 되고 정월에는 세 양인 태괘(泰卦)가 되므로 말한 것이다.
♣ 삼양지회[三陽之會]음력 정월을 인월(寅月)이라고 하는데, 정월은 봄인 동시에 목위(木位)이며 3양(陽)이 이미 생겼기 때문에 삼양교태(三陽交泰)의 달이라고도 한다.
♣ 삼양진[三陽進]주역(周易)의 태괘(泰卦)는 정월에 해당하며, 음(陰)이 물러가고 양(陽)이 전진하는 상이므로 이른 말이다.
♣ 삼양회태[三陽回泰]11월은 1양(陽)이 처음으로 생기기 때문에 복괘(復卦)가 되고, 12월에는 2양이 생겨나서 임괘(臨卦)가 되고, 정월이면 3양이 생겨서 태괘(泰卦)가 된다.
♣ 삼어연[三語掾]연은 연리(掾吏)의 뜻. 진(晉) 나라 때 사도(司徒) 왕융(王戎)이 완첨(阮瞻)을 처음 만나서 “성인은 명교(名敎)를 귀히 여겼고, 노자(老子)ㆍ장자(莊子)는 자연(自然)을 밝혀놓았으니, 그 지취가 같은가?”고 묻자, 완첨이 대답하기를 “결국 서로 같지 않겠는가[將無同].” 하니, 왕융이 그를 대단하게 여겨 즉시 불러 연리로 삼았으므로, 당시에 완첨을 삼어연이라고 일컬었다. 삼어는 곧 ‘장무동(將無同)’ 세 글자를 가리킨다. 《晉書 阮瞻傳》
♣ 삼어이상[三語貳相]인조(仁祖) 25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민형남(閔馨男)은 차자를 올려 시무를 논하면서 당론(黨論)이 성하여 일어나는 온갖 폐단에 대해 진언하였다. 이에 대해 인조는 그가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세력있는 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진언한 것을 극찬하고 몇일 뒤에 그를 우찬성(右贊成)에 제수하였다. 이에 당시 사람들은 그가 “당론이 성하다[黨論盛]"는 세 글자 때문에 이상(貳相)이 되었다 하여 ‘삼어이상’이라고 하였다.
♣ 삼업[三業]불교(佛敎)에서 쓰는 말인데, 몸으로 짓는 것[身業], 입으로 짓는 것[口業], 마음으로 짓는 것[意業]을 말한다. 신업은 살생ㆍ투도 등 몸으로 짓는 죄업, 구업은 입으로 짓는 죄업, 의업은 사념(思念)으로 짓는 죄업을 말한다.
♣ 삼여[三餘]바쁜 가운데 잠깐 한가한 시간을 말함. 여는 세(歲)와 일(日)과 시(時)의 여(餘)인 동(冬), 야(夜), 음우(陰雨). 위략(魏略)에 “겨울은 해의 나머지이고 밤은 낮의 나머지이고 날이 흐린 것은 때의 나머지이다[冬者歲之餘 夜者日之餘 陰雨者時之餘].” 하였음. 공한(空閑)한 시간을 이용해서 독서하는 것을 뜻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왕숙전(王肅傳)의 주(注)에 “학문을 함에 있어서 이 나머지 시간만 이용해도 충분하다[讀書當以三餘]”라 하였다. 도잠이 ‘책자(責子)’ 시에서 자기 자식들이 게을러서 공부하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
♣ 삼연[三淵]김창흡(金昌翕)의 호. 창협의 동생으로 시문에 뛰어났다.
♣ 삼연[參淵]공자의 제자들로 증자(曾子)의 이름이 삼(參)이요, 안자(顔子)의 자가 연(淵)이다.
♣ 삼연옹[三淵翁]조선 숙종 때의 시인인 김창흡(金昌翕)을 가리킨다.
♣ 삼연유사[三椽遺事]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꿈을 해몽한 이야기인 석왕사(釋王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를 말한다. 이성계가 어느날 밤 꿈에, 여러 닭이 만 집에서 일제히 울어대고 다듬이 소리가 천 집에서 동시에 나는데 몸은 무너진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고 꽃은 휘날리고 거울은 떨어져 깨지는 꿈을 꾸었다. 이에 하도 이상하여 수소문 끝에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만나 꿈의 해몽을 부탁하였더니, 사양하다가 해몽하기를, “길몽이오. 만 집에서 닭이 고귀위(高貴位)하였으니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며, 천 집에서 다듬이 소리가 일제히 났으니 만 백성 천 벼슬들이 임금된 경사를 알리는 풍악소리요, 서까래 세 개를 지었으니 임금 왕(王) 자요, 꽃이 날렸으니 필경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떨어져 깨졌으니 반드시 큰 소리가 날 것이라, 이는 임금이 될 꿈이니, 여기 설봉산(雪峯山)에 절을 짓고 기원하면 소원을 성취할 것이오.” 하였다. 이것이 이성계가 즉위하기 8년 전의 일로, 이성계는 기원소(祈願所)로 석왕사(釋王寺)를 짓고 길주(吉州)의 천불사(千佛寺)에서 오백나한을 배로 실어날라 석왕사에 안치시켰다는 내용의 설화이다.
♣ 삼오[三五]삼황오제(三皇五帝)를 가르킨다. 중국고대의 전설적 제왕, 3황(皇)은 일반적으로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을 가르키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복희(伏犧),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들기도 한다. 또는 수인(燧人), 축융(祝融), 여왜(女媧)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사마천은 3황(皇)의 전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사기(史記)의 기술을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마천이 5제(帝)로 든 것은 황제헌원(皇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 제순중화(帝舜重華) 등이며, 별도로 복희(伏犧), 신농(神農) 또는 소호(小昊) 등을 드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아니하다. 원래 이 전설은 다양한 신화 전설이 혼입된 것이며, 도덕적 정치적으로 끌여들인 것이어서, 그 기원은 애매하다. 오행설이 일반화된 전국시대 말 이후 이야기 경향을 띠게 되었다.
♣ 삼오[三吳]지명. 오흥(吳興)ㆍ오군(吳郡)ㆍ회계(會稽), 또는 오왕(吳王)부차(夫差)의 도읍지인 고소(姑蘇), 비(濞)가 도읍했던 광릉(廣陵), 손권(孫權)이 도읍했던 건업(建鄴), 또는 동오(東吳)인 소주(蘇州), 중오(中吳)인 윤주(潤州), 서오(西吳)인 호주(湖州)등으로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불리움. 양자강(揚子江)을 비롯한 많은 강하의 합류 지대로서 삼오수고(三吳水考)ㆍ삼오수리록(三吳水利錄)등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강하가 많은 곳임. 《四庫提要 史 地理類》
♣ 삼오기변[參伍機變]주역(周易) 계사 상에, “삼오(參伍)로써 변하여 그 수효를 착종(錯綜)한다.” 하였는데, 설문(說文)에, “세 사람이 서로 섞인 것을 삼(參)이라 하고 다섯 사람이 서로 섞인 것을 오(伍)라 한다.” 하였음.
♣ 삼오유애[三吳遺愛]삼오는 세 곳의 지명(地名)으로, 진(晉) 나라 때는 오흥(吳興), 오군(吳郡), 회계(會稽)를 말하고, 당(唐) 나라 때는 오흥(吳興), 오군(吳郡), 단양(丹陽)을 말하고, 송(宋) 나라 때는 소주(蘇州), 상주(常州), 호주(湖州)를 말한다. 진서(晉書) 손은전(孫恩傳)에, “천하에 군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진(晉) 나라 국운이 다하였다고 판단하여 백성을 선동하였더니, 삼오 지방의 백성들이 많이 따라왔다.” 하였다. 삼오에 끼친 사랑이란 이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
♣ 삼오재자삼한사[三吳才子三韓士]삼오(三吳)의 재자(才子)는 절강(浙江)에서 살던 육비(陸飛)ㆍ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이며, 삼한(三韓)의 선비는 홍대용을 가리킨다. 삼오(三吳)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오군(吳郡)ㆍ오흥(吳興)ㆍ회계(會稽)를 말한다.
♣ 삼오칠언[三五七言]삼오칠언은 시의 별체로서 당(唐)의 시인 이백(李白)이 일찍이 3자ㆍ5자ㆍ7자로 된 육구시(六句詩)를 지어 ‘삼오칠언’이라 제(題)하였다. 즉 “가을바람 시원도 하고, 가을달 밝기도 하여라. 낙엽은 모였다 다시 흩어지고, 갈가마귀는 나무에 앉았다 다시 놀래어 나도다. 서로 생각하니 어느날에나 만나 볼까? 이때 이 밤 심정 가누기 어렵네.[秋風淸 秋月明 落葉聚還散 寒鴉棲復驚 相思知見知何日 此時此夜難爲情]" 하였는데 바로 이 시의 체를 따른 것이다.
♣ 삼오풍미[三吳風味]삼오는 장강(長江) 하류 지역을 가리킨다. 진(晉) 나라 때 깨끗한 지조로 이름 높았던 장한(張翰)이 가을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고향인 오중(吳中)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나서 말하기를, “인생살이에 있어서는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귀한 법인데, 어찌 벼슬에 얽매여서 수천 리 밖을 떠돌면서 명예와 관작을 노리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수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 고사를 가리킨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張翰》
♣ 삼옹[三雍]벽옹(辟雍), 명당(明堂), 영대(靈臺)를 통틀어 일컫는데 고대 제왕들이 제사와 전례를 거행하는 장소이다.
♣ 삼옹[三雍]삼옹은 벽옹(辟雍)ㆍ명당(明堂)ㆍ영대(靈臺)를 지칭한다.
♣ 삼왕묘[三王墓]간장(干將)이 초왕을 위해 검을 주조하였는데, 자검ㆍ웅검 한 쌍으로 삼 년을 고생하여 겨우 완성하였다. 그는 자신이 검을 너무 늦게 만들어낸 것 때문에 초왕이 필히 그를 해칠 것임을 알고, 당시 임신 중이던 아내 막야(莫邪)에게 웅검을 감춰두었다가 후에 만약 아들을 낳으면 그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려 아버지를 위해 원수를 갚게 하도록 당부하였다. 초왕은 과연 막야를 죽였다. 막야의 유복자 적비(赤比)는 장성한 후 아버지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연유를 알게 되었고, 곧 웅검을 찾아내고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초왕은 이 소문을 접한 후, 전국에 상을 내걸고 적비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적비는 산중을 유랑하다 한 협객을 만나는데, 협객은 만약 적비가 자신의 머리와 검을 건네준다면 그가 적비를 대신해 복수를 하겠다고 한다. 적비는 전혀 망설임 없이 즉시 스스로 목을 베어 “두 손으로 머리와 검을 받쳐들고 그에게 바쳤다”. 협객은 적비의 머리와 검을 초왕에게 바쳤고, 초왕은 크게 기뻐한다. 협객은 초왕에게 적비의 머리를 큰 가마솥에 넣어 삶도록 권했는데, 초왕이 그 앞에 나아가 구경을 하자 협객은 잠시 무방비한 틈을 타서 그의 목을 베어 암살하고, 그 또한 동시에 스스로 목을 베었다. 세 사람의 머리가 가마솥에서 함께 삶아지면서 구분할 방도가 없었으므로 초나라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세 사람을 함께 장사지냈고, 그곳을 ‘세 왕의 무덤’이라 불렀다.
♣ 삼우도[三友圖]근세 화가들은 송(松)ㆍ죽(竹)ㆍ매(梅)를 합해 그려 세한삼우(歲寒三友)라고도 하고 또한 매ㆍ죽ㆍ석(石)을 그리는 자도 있음. 소동파가 문여가(文與可)의 그림에 제하여 이르기를 “梅寒而秀 竹瘦而壽 石醜而文 是爲三益之友"라 하였음.
♣ 삼우반[三隅反]네 모퉁이가 있는 물건이 있을 때, 한 모퉁이를 들어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유추(類推)하여 알아내는 것을 이른 말로, 즉 학문에 대단히 힘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공자가, “한 귀퉁이[一隅]를 가르쳐 주거든 그가 삼우(三隅)로 미루어서 돌려 생각하지 못하면 말해 주지 않았다.” 하였다. 《論語 述而》
♣ 삼우제[三虞祭]장사를 지낸 뒤 죽은 이의 혼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말함. 장사 당일 지내는 제사를 초우(初虞), 다음날 지내는 제사를 재우(再虞), 그 다음날 지내는 제사를 삼우(三虞)라 한다. 오늘에 와서는 흔히 장사 지낸 후 삼일째 되는 날 삼우제만 지내고 있다. 흔히 ‘삼오제’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 삼원[三元]연(年), 월(月), 일(日)이 새로 시작된다는 뜻에서 정월 초하루를 일컫는 말이다.
♣ 삼원[三垣]천체의 항성(恒星)을 크게 나눈 세 개의 분야로, 태미원(太微垣), 자미원(紫微垣), 천시원(天市垣)을 말한다.
♣ 삼원[三元]향시(鄕試), 회시(會試), 정시(廷試)에서 모두 장원(壯元)한 것을 이르는데, 전하여 인재를 의미한다.
♣ 삼원각상합[三元角上合]삼원(三元), 즉 연(年), 월(月), 일(日)의 시작인 새해의 첫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을 말한다.
♣ 삼원변혁년[三元變革年]삼원은 연월일(年月日)의 시작이 되는 정월 초하루를 뜻하는 말로, 황제가 새로 즉위하여 연호가 바뀌게 된 것을 가리킨다.
♣ 삼원일[三元日]연(年), 월(月), 일(日)의 시작인 정월 초하루를 말한다.
♣ 삼원절[三元節]정월 초하루를 이름. 세시(歲始)이고 월시(月始)이며 일시(日始)라는 뜻에서 이렇게 말한다.
♣ 삼월불위인[三月不違仁]공자가 말하기를 “안회(顔回)는 그 마음이 석달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 한 데서 온 말로, 즉 사욕(私欲)이 없음으로써 그 선심(善心)을 오래도록 잡아 간직함을 말한 것이다. 《論語 雍也》
♣ 삼월회일[三月晦日]가도(賈島)를 비웃는다는 것은 곧 가도가 봄이 가는 것을 몹시 애석하게 여기어, 삼월회일증류평사(三月晦日贈劉評事) 시에 “삼월이 정히 삼십일에 딱 당하였으니, 봄 경치가 괴로이 읊는 나를 작별하려 하네. 오늘 밤엔 그대와 함께 잠을 자지 말자꾸나, 새벽 종이 울리기 이전은 아직 봄이라오.[三月正當三十日 風光別我苦吟身 共君今夜不須睡 未到曉鐘猶是春]" 한 것을 조롱한 말이다. 《長江集 卷十》
♣ 삼의[三衣]승려(僧侶)의 세 가지 의복. 즉 궁중(宮中)이나 마을을 출입할 때에 입는 승가리(僧伽梨)와 예불(禮佛)ㆍ독경(讀經) 등을 할 때에 입는 울다라승(鬱多羅僧)과 절 안에서 작업할 때에 입는 안타회(安陀會)를 합칭한 말이다.
♣ 삼의사[三醫事]천명은 어쩔 수 없음을 뜻함. 옛날 양주(楊朱)의 친구 계량(季梁)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이 세 의원[三醫]인 교씨(矯氏)ㆍ유씨(兪氏)ㆍ노씨(盧氏)를 데려와 부친의 병을 진찰한 결과, 교씨는 한온(寒溫)과 허실(虛實)에 절도를 잃은 것이니 점차로 치료할 수 있다 하였고, 유씨는 하루아침에 생긴 병이 아니니 치료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노씨는 이미 타고난 명이 다했으니 어찌할 수 없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列子 力命》
♣ 삼이용[三耳湧]총명(聰明)이 더욱 뛰어난다는 뜻이다. 속수신기(續搜神記)에 “장심통(張審通)이 꿈에 태산부군(泰山府君)의 부름을 받아 갔더니 이마 위에 귀 하나를 붙여 주었다. 얼마 후에 꿈을 깨니 과연 이마가 가려우면서 귀 하나가 더 생겨나 더욱 총명하여졌다.” 하였다.
♣ 삼익[三益]삼익은 세 가지 유익한 관상물(觀賞物)로 매화ㆍ수석(壽石)ㆍ대나무를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찬문여가매석죽(贊文與可梅石竹) 시에 “매화는 차갑지만 빼어나고 대나무는 깡마르지만 장수(長壽)하고 수석은 못생겼지만 문채가 있으니, 이는 삼익의 벗이다.” 하였다.
♣ 삼익[三益]세 가지 유익한 벗을 말함.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은 이가 바로 그들이다.[益者三友 友直友諒友多聞 益友]”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 삼익우[三益友]세 가지 유익한 벗. 매화ㆍ대나무ㆍ돌을 말한다.
♣ 삼익우[三益友]세 가지의 유익한 벗. 논어(論語) 계씨(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이 있으니 정직한 벗, 신실한 벗, 식견이 많은 벗이다.[益者三友 友直友諒友多聞 益友]" 하였다.
♣ 삼인[三仁]삼인은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으로,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미자는 떠나가고 기자는 종이 되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는데, 공자가 이르기를, ‘은나라에는 삼인이 있었다.’ 하였다.” 하였다.
♣ 삼인검[三寅劍]삼인검이라 함은 대체로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그 검이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는 삼인검은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물리쳐 준다 한다.
♣ 삼인성호[三人成虎]세 사람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냄. 거리에 범이 나왔다고 여러 사람이 함께 말하면 거짓말이라도 참말로 들린다는 말, 근거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곧이 듣는다는 뜻.
♣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삼아 배울 만한 사람이 있음.
♣ 삼일유가[三日遊街]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온 거리로 돌아다녔던 관례.
♣ 삼일천하[三日天下]짧은 동안 정권을 잡았다가 곧 실패함을 이름, 영화가 짧다는 뜻의 고사성어.
♣ 삼자각모외[三子各慕外]자로(子路),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증점보다 먼저 자신들의 뜻을 말했는데, 모두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 삼자부[三字符]송(宋) 나라 때 유자휘(劉子翬)가 위원리(魏元履)에게 부친 시에 “일찍이 머지않아 회복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을 삼자부로 삼아 찼노라[嘗聞不遠復 佩作三字符]” 한 데서 온 말인데, 머지않아서 회복한다는 것은 바로 주역(周易) 복괘(復卦)의 초구효사(初九爻辭)에 “머지 않아서 회복하는 것이라, 후회하는 일이 없으리니, 크게 길하다.[不遠復 無祗悔 元吉]” 한 것을 가리킨다.
♣ 삼자부[三字符]주자(朱子)가 친구에게 지어준 시에, “주역의 불원복(不遠復)으로 삼자부(三字符)로 삼아 찬[佩]다.” 하였다. 불원복(不遠復)은 허물 있는 이가 머지 않아 빨리 뉘우쳐서 회복된다는 뜻이다.
♣ 삼잔[三孱]잔(孱)은 연약하여 무능한 것으로 (劣弱)한 자는 아무리 많아도 쓸모가 없다는 것을 가리킴. 송(宋) 황정견(黃庭堅)의 예장집(豫章集) 권6 차운양명숙시(次韻楊明叔詩)에 “필사는 능히 나라를 빛내지만 삼잔은 한 구석도 못 채운다오[匹士能光國 三孱不滿隅]" 한 데서 온 말이다. 《黃山谷詩集 卷十二》
♣ 삼장[三藏]불전(佛典)의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총칭이며. 이에 통달한 고승의 총칭이기도 하다.
♣ 삼장[三長]사(史)를 짓는 데는 재(才)ㆍ학(學)ㆍ식(識)의 세 가지 장점이 있어야 한다.
♣ 삼장[三章]지방관(地方官)을 청하는 세 차례의 상소문이라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외직(外職) 청하는 세 차례 상소 글자가 반쯤 기울어져, 혹시 눈병 걸렸냐고 조정의 비웃음을 받았다오.[乞郡三章字半斜 廟堂傳笑眼昏花]”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6 七年九月自廣陵召還…》
♣ 삼장[三章]한 고조(漢高祖)가 처음 진(秦) 나라를 평정하고 관중(關中)에 들어가서 진(秦)의 가혹한 법률을 모두 폐지하고 부로(父老)들을 불러 말하기를, “진 나라의 법은 너무 혹독하고 까다로웠으므로, 나는 이제부터 진 나라 법을 모두 없애고, 법 삼장(三章)만을 약속한다. 살인한 자는 죽이고, 사람을 상해(傷害)한 자와 도둑질한 자는 처벌한다.” 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한다.
♣ 삼장사[三壯士]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가리킨다.
♣ 삼재[三宰]좌참찬(左參贊)의 별칭이다.
♣ 삼재[三才]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으로, 천지 만물을 가리킨다.
♣ 삼적사적금포만[三摘四摘今抱蔓]여러 자식을 잃는 것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아들이 4형제인데, 태자(太子) 홍(弘)은 매우 어질었으나 무후가 그를 짐살(鴆殺)하자, 차자(次子) 현(賢)이 태자가 된 다음, 스스로 늘 두렵게 여기어 황대과사(黃臺瓜辭)를 지어서 상(上)을 감오(感悟)시키려 하였으니, 그 황대과사에 “황대의 아래 오이를 심어 오이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 세 번 땄을 땐 그래도 괜찮더니 네 번 따매 덩굴만 남는구나[種瓜黃臺下 瓜熟子離離 …… 三摘尙云可 四摘抱蔓歸]” 한 데서 온 말이다. 그런데 현(賢) 역시 끝내 무후에게 배척되어 죽었다. 《唐書 建寧王傳》
♣ 삼전[三典]경(輕)ㆍ중(中)ㆍ중(重) 세 종류의 형법.
♣ 삼전[三田]고대 의학용어로서 삼단전(三丹田)인 상원단전(上元丹田; 뇌(腦))ㆍ중원단전(中元丹田; 심(心))ㆍ하원단전(下元丹田; 정문(精門))을 말한다.
♣ 삼전[三鱣]공경(公卿)의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양진(楊震)이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서도 여러 차례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있었는데, 새가 전어(鱣魚) 세 마리를 물고 날아와 강당(講堂)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형상을 하였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전어는 대부들이 입는 옷의 무늬이고, 세 마리는 삼태(三台)의 조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양진이 과연 태위(太尉)에 올랐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 삼전[三箭]당(唐) 나라 때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화살 셋을 쏘아 적병 3명을 죽이자, 10여 만의 적군이 기가 꺾이어 모두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천산(天山)을 평정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삼전[三殿]천자와 태후(太后), 황후(皇后)를 가리킨다.
♣ 삼전정천산[三箭定天山]당나라 장수 설인귀(楔仁貴)가 천산(天山)에서 세 화살로 세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병이 물러갔다. 사람들이, “장군삼전정천산(將軍三箭定天山)이라.” 하였다.
♣ 삼절[三絶]삼절은 시(詩)ㆍ서(書)ㆍ화(畫)의 뛰어난 재주를 말한다.
♣ 삼절굉[三折肱]경험을 많이 쌓으면 저절로 조예가 깊게 된다는 뜻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정공(定公) 13년 조(條)에, “팔을 세 번 꺾어서 세 번 고친 다음에야 부러진 팔을 치료하는 방법을 안다.” 하였다.
♣ 삼절기[三絶技]시(詩)ㆍ서(書)ㆍ화(畫) 세 가지에 다 뛰어난 것을 삼절이라 하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삼접[三接]하루에 세 번을 접견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신하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역(周易) 진괘(晉卦)에,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제후에게 많은 말을 하사하고 하루에 세 번씩이나 접견한다.[晝日三接]”하였다.
♣ 삼정[三庭]도교(道敎)의 용어로, 황정궁(黃庭宮)의 3개 부위 즉 뇌(腦), 심(心), 비(脾)를 말한다.
♣ 삼정[三鼎]돈정(豚鼎)ㆍ어정(魚鼎)ㆍ석정(腊鼎)을 말한다. 의례(儀禮)의 사혼례(士昏禮)와 사우례(士虞禮)에 “삼정(三鼎)을 차려 놓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집안의 혼사(婚事)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삼정[三精]해ㆍ달ㆍ별.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 찬(光武帝紀贊)에 “구현에 회오리바람이 일고 삼정은 안개가 끼어 깜깜하였다.[九縣飆廻三精霧塞]" 하였음.
♣ 삼정[三庭]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에 “내경(內景), 외경(外景), 중경(中景)의 황정(黃庭)에서 자라는 가곡(嘉穀)에 황명(蝗螟)이 발생한다.”라는 말이 있다. 삼정(三庭)은 바로 황정(黃庭)이다.
♣ 삼정촉[三丁燭]보통 촛불 세 자루를 가지면 하룻밤을 난다고 한다.
♣ 삼조[三條]공경(公卿)들이 왕께 올리는 중요한 진언(進言). 북조(北朝) 위문제(魏文帝)가 공경들에게 달마다 봉사(封事) 3조씩을 올려 득실(得失)을 극언(極言)토록 조서(詔書)를 내렸다.
♣ 삼조[三俎]삼조는 돼지[豕]ㆍ어물[魚]ㆍ포[腊]를 가리키는데 모두 제수(祭需)이다
♣ 삼조[三組]삼조는 세 개의 인끈으로서, 즉 세 가지 직무를 겸대한 것을 뜻함. 한(漢) 나라 때 양복(楊僕)이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고 또 누선장군(樓船將軍)이 되어 장량후(將梁侯)까지 겸대하여 세 인끈을 한꺼번에 차고서 향리에 과시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삼조[三朝]세(歲), 월(月), 일(日)의 시작이라는 뜻으로, 정월 초하루를 가리킨다.
♣ 삼조보서[三鳥報書]세 마리의 새. 초사(楚辭) 구가(九歌)에 “삼조에게 말을 붙이려 해도 빨리 가버려 잡을 수 없다.” 한 주에 “첫째는 기러기, 둘째는 학, 셋째는 제비이다.” 하였다.
♣ 삼조양[三朝養]하루에 세 차례를 조현(朝見)하는 것으로,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문왕이 세자로 있을 적에는 왕계(王季)에게 매일 세 번씩 조현하였다.” 하였다.
♣ 삼조지[三條止]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곤륜산(崑崙山)을 북(北)ㆍ중(中)ㆍ남(南)의 세 가닥으로 나눌 수 있다.” 하였다.
♣ 삼족오[三足烏]태양 속에 산다는 세 발을 가진 까마귀. 이것이 곧 태양의 정기(精氣)라고 한다.
논형(論衡) 설일(說日)에, “태양 속에는 삼족오(三足烏)가 살고 달 속에는 토끼와 두꺼비가 산다.” 하였다.
♣ 삼족정[三足鼎]삼족정(三足鼎)은 재상의 지위를 말한다.
♣ 삼존달[三尊達]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존경하는 세 가지의 조건으로 높은 벼슬, 많은 나이, 훌륭한 덕행을 말함. 《孟子 公孫丑下》
♣ 삼종[三終]36년. 12년을 일기(一紀) 또는 일종(一終)이라 하는데, 이는 세성(歲星) 곧 목성이 일주천(一周天)하는 기간이다.
♣ 삼종[三宗]부족(父族)ㆍ모족ㆍ처족을 말한다.
♣ 삼주[三住]도가(道家)에서 수련(修鍊)하는데 쓰이는 말로 기주(氣住)ㆍ신주(神住)ㆍ형주(形住)를 말함. 당(唐)의 시견오(施肩吾) 삼주명(三住銘)에 이르기를, “기가 안정되면 정신이 안정되고, 정신이 안정되면 형체가 안정되는데, 이는 장생(長生)의 방법인 것이다.” 하였음.
♣ 삼주[三住]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십주(十住) 가운데 제삼주(第三住)에 해당하는 즉 만선 만행(萬善萬行)을 닦는 지위인 수행주(修行住)를 말한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 삼주[三酒]주례(周禮) 천관(天官)주정(酒正)에, “주정(酒正)이 삼주(三酒)의 물(物)을 분변하는데, 1은 사주(事酒), 2는 석주(昔酒), 3은 청주(淸酒)다.” 하였고, 그 주에 ‘사주(事酒)는 일이 있어 마시는 술이요, 석주(昔酒)는 일 없이 마시는 술이요, 청주(淸酒)는 제삿술이다.’ 하였음.
♣ 삼주수[三珠樹]당(唐) 나라 때 왕거(王劇)ㆍ왕면(王勔)ㆍ왕발(王勃) 3형제가 모두 재사(才士)로 이름이 높아 당시에 이들을 삼주수(三珠樹)라 일컬었다.
♣ 삼주수[三珠樹]염화(厭火)의 북쪽 적수(赤水)의 위에서 자란다는 신선 세계의 나무로, 잣나무와 비슷한데 잎이 전부 구슬로 이루어졌다 한다. 《山海經 海外南經》
♣ 삼중제실동가회[三重緹室動葭灰]후기(候氣)의 법에 의하면, 삼중의 밀실(密室)을 만들고 그 안에 명주[緹]를 펴고서 그 위에 십이율관(十二律管)을 각각 방법대로 안치한 다음, 그 율관에 갈대의 재를 채우고 다시 그 위에 명주로 덮어놓으면, 동지절(冬至節)이 될 경우, 율(律)이 황종관(黃鐘管)에 맞아서 황종관에 들어있는 갈대 재가 날아 움직이게 되는 것 등을 이른 말이다.
♣ 삼지[三池]개성 용화원 숭교사에 있던 연못 이름.
♣ 삼진록[三秦錄]신씨(辛氏)의 삼진기(三秦記)에 “한 무제(漢武帝)의 과원(果園)에 있는 큰 밤은 열 다섯 개로 한 말[斗]이 된다.” 하였다. 《淵鑑類函 卷四百三 果部五 栗》
♣ 삼차[三車]우차(牛車)ㆍ양차(羊車)ㆍ녹차(鹿車)가 3차(三車)인데, 불교에서 그것을 대승(大乘)ㆍ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에 비유한다.
♣ 삼차로[三叉路]한(漢) 나라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죽림(竹林) 속에 세 갈래 길을 내어 놓고 친구 양중(羊仲)구중(裘仲)과 서로 왕래하였다.
♣ 삼차하[三叉河]북경(北京) 동북방에 있다.
♣ 삼창[三昌]광해군(光海君) 때 군호(軍號)에 ‘창(昌)’자가 있는 3인의 권신(權臣)을 일컫는 말. 이이첨(李爾瞻)은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 유희분(柳希奮)은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 박승종(朴承宗)은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이었음.
♣ 삼창[三蒼]서명(書名)인데 ‘蒼’은 ‘倉’이라고도 함. 진(秦) 나라 승상 이사(李斯)가 창힐편(倉頡篇) 칠장(七章)을 짓고, 중거부영(中車府令) 조고(趙高)가 원력편(爰歷篇) 육장(六章)을 짓고, 태사령(太史令) 호모경(胡母敬)이 박학편(博學篇) 칠장을 지었는데, 모두가 옛 주서(籒書)를 합하여 만든 것으로 무릇 3천 3백 자이다. 한 나라 때에 창힐ㆍ원력ㆍ박학을 합하여 60자를 끊어 한 장(章)씩 만들었는데 모두 55장으로 아울러 창힐편이라 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를 삼창이라 칭함.
♣ 삼책[三策]세 가지 계책. 원래는 소진(蘇秦)이 조왕(趙王)을 유세하면서 쓴 말이었으나 국가의 긴요한 정책을 들어 그렇게 표현한 것임.
♣ 삼처굴[三處窟]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교활한 토끼란 세 굴이 있어서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다.[狡免有三窟 僅得免其死耳]" 한 데서 온 말이다.
♣ 삼척검[三尺劍]삼척검은 3척쯤 되는 칼. 한 고조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나는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일어나서 삼 척(三尺)의 검을 쥐고 천하를 취했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 高祖本紀》
♣ 삼척동자[三尺童子]키가 석 자 정도 되는 어린 아이, 한 자는 약 30cm이니 4-5세 정도의 어린 아이에 해당한다. 철모르는 어린 아이나 혹은 그처럼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킴.
♣ 삼척수[三尺水]검(劍)을 가리킨다. 당 나라 이하(李賀)의 시 ‘춘방정자검자가(春坊正字劍子歌)’에, “선배의 칼집 속의 삼척수는, 일찍이 오 연못에 들어가서 용자를 베었다네.[先輩匣中三尺水 曾入吳潭斬龍子]”하였다.
♣ 삼척신규시발감[三尺神虯始發礛]신검(神劍)을 말한다. 진(晉) 나라 때 오(吳) 땅에 자색 기운이 하늘의 우수(牛宿)와 두수(斗宿) 사이로 뻗치는 것을 보고 장화(張華)가 뇌환(雷煥)을 시켜서 돌감옥을 파고 용천검(龍泉劍)과 태아검(太阿劍)을 얻었는데, 이 두 보검이 나중에 신룡으로 화하였다 한다.
♣ 삼척자[三尺子]검(劍)을 가리킨다. 당 나라 이하(李賀)의 ‘춘방정자검자가(春坊正字劍子歌)’에, “선배의 칼집 속의 삼척자는, 일찍이 오 연못에 들어가서 용자를 베었다네.[先輩匣中三尺水 曾入吳潭斬龍子]”하였다.
♣ 삼척죽[三尺竹]옛날에는 종이가 없어서 법률이나 역사를 세 자쯤 되는 댓조각에 기록하였다.
♣ 삼척훼장[三尺喙長]육여경(陸餘慶)이 모든 일에 있어 말로는 잘하나 판결력이 부족하므로 사람들이 “말할 적에는 부리가 석 자나 길어지고 판결할 적에는 손이 닷 근처럼 무거워진다.”고 조소하였다. 《唐書 陸餘慶傳》
♣ 삼천[三天]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곳. 옥청(玉淸)ㆍ상청(上淸)ㆍ태청(太淸)을 삼청경(三淸境)이라 하며 또 삼천(三天)이라고도 한다.
♣ 삼천[三川]부주(鄜州)의 현(縣) 이름으로, 화수(華水), 흑수(黑水), 낙수(洛水)의 세 강물이 모이는 곳이라서 이렇게 이름하며, 안녹산(安祿山) 난리에 두보(杜甫)가 숨으러 갔던 곳이다.
♣ 삼천[三天]삼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이다.
♣ 삼천[參天]양지는 지수(地數)인 2를 말하고 삼천(參天)은 천수(天數)인 3을 말한 것으로, 지수 2와 천수 3을 서로 곱하면 6[六同]이 된다.
♣ 삼천[三川]의주(義州) 앞에 있는 압록강(鴨綠江)의 별칭이 삼강(三江)이다.
♣ 삼천결자도[三千結子桃]훌륭한 물건은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는 뜻. 신선의 세계에 3천 년 만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 반도(蟠桃)가 있는데 이것을 먹으면 장수(長壽)를 누린다고 한다.
♣ 삼천경[三千境]화엄경(華嚴經)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도(道)를 구하여 남방으로 다니며 53명의 선지식(善知識)을 방문하였다. 수희(隨喜)는 남의 착함을 따라서 기뻐한다는 뜻이다.
♣ 삼천계[三千界]삼천 세계는 삼천 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는 불가의 용어로, 온 천하를 뜻한다.
♣ 삼천대계[三千大界]무량무변한 세계를 말한다. 불설(佛說)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1천을 합하면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되고, 소천세계 1천을 합하면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다시 중천세계 1천을 합하면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되어 총합 삼천세계(三千世界)가 된다는 것이다.
♣ 삼천도[三千桃]선계(仙界)에 있다고 하는, 3천 년 만에 꽃이 한 번 피고 열매가 한 번 맺는 복숭아나무를 말한다.
♣ 삼천독[三千牘]임금에게 올리는 장편의 상소문. 뛰어난 문장력을 비유한 말. 한 무제(漢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長安)에 들어가 상서(上書)할 적에 모두 3천 통의 서찰을 올리어, 공거령(公車令) 두 사람이 겨우 맞들어 임금에게 올렸는데, 임금은 무려 두 달이 걸려서야 그 서찰을 다 읽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六》
♣ 삼천리[三千履]춘추 때 초(楚) 춘신군(春申君) 문객 3천인 중에 상객(上客)은 모두 구슬 신[珠履]을 신었다.
♣ 삼천세계[三千世界]불경에서 이 우주계를 삼천세계(三千世界)라 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천으로 된 것을 소천세계(小千世界), 소천세계가 천(千)으로 된 것을 중천세계(中千世界), 중천 세계가 천으로 된 것을 대천세계(大千世界)라 한다.
♣ 삼천심여덕개동[三千心與德皆同]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칠적에 “힘이 같을 적엔 덕(德)으로 헤아리고 덕이 같을 적엔 의(義)로 헤아린다. 주(紂)는 억만 명의 신하가 있지만 억만 명의 마음이 각기 다른데, 나에게 있는 3천 명의 신하는 모두 한 마음이다.”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泰誓》
♣ 삼천약수[三千弱水]산해경(山海經)에 “서해(西海)의 남과 유사(流沙)의 가에 큰 산이 있어 이름은 곤륜산이고 그 아래는 약수가 감돌았다.” 하였고, 그 주에 이르기를 “그 물은 홍모(鴻毛)도 이기지 못한다.” 하였음.
♣ 삼천육백조[三千六百釣]태공 망(太公望)이 나이 80에 위수(渭水)에 낚시를 드리우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10년 후인 90세에야 비로소 문왕(文王)을 만났다고 한 데서 온 말임.
♣ 삼천이[三千履]주리(珠履)의 자리. 구슬로 꾸민 신을 신은 빈객, 즉 상등의 빈객을 말한다. 《史記 春信君傳》
♣ 삼천죄대[三千罪大]삼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제일 큰 죄라는 것을 말한다.
♣ 삼첩[三疊]삼첩은 시나 노래에서 같은 구절을 세번 반복하는 즉 첩음법(疊音法). 이별을 뜻함. 당(唐) 나라 때 왕유(王維)가 친구를 송별하면서 양관곡(陽關曲; 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勸君更進一盃酒 西出陽關無故人)을 불렀던 데서 온 말인데, 삼첩은 곧 제4구(句)인 ‘西出陽關無故人’을 세 번 반복하여 노래한 것을 가리킨다.
그 뒤에 악부(樂府)에 올려 송별곡으로 유행된 것이다.
♣ 삼청[三淸]삼청은 도교(道敎)의 삼신(三神)인 옥청원시천존(玉淸元始天尊)ㆍ상청령보도군(上淸靈寶道君)ㆍ태청태상로군(太淸太上老君)을 말하며, 삼동(三洞)의 교주(敎主)가 사는 최고의 선경(仙境)인 옥청경(玉淸境), 상청경(上淸境), 태청경(太淸境)의 세 선경을 말한다.
♣ 삼초[三楚]동초(東楚)ㆍ서초(西楚)ㆍ남초(南楚)를 가리키는 듯하다.
♣ 삼촌설[三寸舌]장량(張良)이 유후(留侯)에 봉해진 뒤에 말하기를, “내가 세 치 혀[三寸舌]로써 임금의 스승이 되었으니 만족하다. 이제는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겠노라.” 하고, 화식(火食)을 끊고 도인법(導引法)을 배웠다.
♣ 삼최일박[三崔一朴]최씨 셋은 최치원(崔致遠)ㆍ최승우(崔承祐)ㆍ최언위(崔彦撝)를 말하며, 박씨(朴氏) 하나는 박인범(朴仁範)을 가리키니, 이들은 모두 당 나라에 유학하고 과거에 급제하였다.
♣ 삼추[三秋]삼추는 가을 석 달인데, 정든 사람끼리 서로 그리는 마음을 노래한 시경(詩經) 王風 采葛의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삼추처럼 지루하네.[一日不見 如三秋兮]"에서 나온 말임.
♣ 삼출[三黜]논어(論語) 미자(微子)에 “유하혜(柳下惠)가 사사(士師)의 직책을 수행하다가 세 번이나 쫓겨나자[三黜] 왜 다른 나라로 떠나가지 않느냐고 어떤 이가 물었는데, 이에 대답하기를 ‘올곧게 도를 행하면서 섬긴다면 어디를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겠는가.[直道而事人 焉往而不三黜]’라고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 삼출[蔘朮]인삼(人蔘)과 백출(白朮). 모두 한약재(韓藥材)로 인삼은 강장제, 백출은 소화제로 널리 쓰인다.
♣ 삼출도[三黜道]직도(直道)를 뜻한다. 옥관(獄官)으로 있던 유하혜(柳下惠)가 세 번이나 쫓겨나면서도[三黜] 직도(直道)를 견지하며 굽히지 않았던 고사에 기인한다. 《論語 微子》
♣ 삼취[三臭]논어(論語) 향당(鄕黨)에 “자로(子路)가 꿩을 잡아 바치자 공자는 세 번 냄새만 맡고 일어났다.” 하였다.
♣ 삼탄슬[三嘆瑟]조촐하면서도 근엄한 여운(餘韻)이 있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청묘(淸廟)의 주악(奏樂)에 쓰는 비파는 붉은 줄을 매고 밑에 구멍을 뚫어 소리가 느리게 나며, 한 사람이 선창하면 겨우 세 사람이 화창할 정도로 아름다운 음악은 아니나 그 속에는 끝없는 여운이 있다.” 하였다.
♣ 삼태[三笞]옛날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그의 숙부(叔父)인 강숙(康叔)과 함께 입조(入朝)하였다가 아버지인 주공을 세 차례 뵈었는데 번번이 매를 맞았다. 강숙의 제의로 상자(商子)라는 현인(賢人)을 찾아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남산(南山)의 양지쪽과 음지쪽에 있는 두 나무를 보고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가보니 남산 양지쪽에는 교(橋)라는 나무가 쳐들려 있었고 음지쪽에는 자(梓)라는 나무가 수그러져 있었다. 백금이 다녀와서 본 대로 말하자 상자는 “교는 부도(父道)를, 자는 자도(子道)를 의미한 것이다.” 말하였다. 백금이 그 이튿날 주공을 뵈올 때 정문에 들어서서는 빨리 걷고 당(堂)에 올라서는 무릎을 꿇자 주공이, “어디서 군자를 만났더냐.” 하고 위로해 주었다. 《說苑 建本》
♣ 삼택방[三宅邦]자는 원여(元與)이고 일본 가하(加賀) 사람임.
♣ 삼통[三通]군대의 북소리를 뜻한다. 삼통(三通)의 통은 북을 칠 때 하나의 단락을 이루는 단위 이름으로, 위공병법(衛公兵法) 부오영진(部伍營陳)에 “일출(日出)과 일몰(日沒) 때에 1천 번씩 북을 울리는데, 3백 33번 치는 것을 1통(通)이라 한다.” 하였다.
♣ 삼파[三巴]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 지역인 파군(巴郡), 파동(巴東), 파서(巴西)의 지역을 말한다. 즉 파촉(巴蜀) 지방으로 사천분지(四川盆地)를 가리킨다.
♣ 삼팔서중종공맹[三八書中宗孔孟]삼팔은 삼황(三皇)의 일을 기록한 삼분(三墳)과 팔괘(八卦)의 이치를 서술한 팔색(八索)으로 삼분ㆍ오전(五典)과 팔색ㆍ구구(九丘)의 모든 서적을 지칭한 것으로 보이며, 공맹(孔孟)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가리킨 것이다.
♣ 삼팽[三彭]삼시신(三尸神)으로, 병마(病魔)가 찾아드는 것을 말한다. 도가(道家)의 설에 의하면, 사람 몸 속에 빌미를 일으키는 세 신이 있어 이를 삼시신이라고 하는데, 경신일(庚申日)마다 사람의 잘못을 천신에게 아뢰면 천신이 그 사람의 수명을 줄인다고 한다.
♣ 삼팽[三彭]세 마리의 벌레를 말하는데 삼시(三尸)라고도 한다. 이 벌레가 인체 내에 숨어 있으면서 그 사람의 잘못을 낱낱이 기억했다가 경신일(庚申日)이 되면 그 사람이 잠든 틈을 타 하늘로 올라가서 상제(上帝)에게 그 사실을 다 일러바치기 때문에 도(道)를 배우는 자는 언제나 경신일이면 잠을 자지 않고 그 벌레가 못 나가도록 하는데, 이를 일러 수경신(守庚申)이라고 하였음. 《避暑錄話》
♣ 삼팽참[三彭讒]삼팽은 도가(道家)의 말로 인체 중에 있는 세 시신(尸神)을 말하는데, 상충(上蟲)은 뇌속에, 중충(中蟲)은 명당(明堂; 이마)에, 하충(下蟲)은 배에 있다 한다. 유종원(柳宗元)의 매시충문(罵尸蟲文)에 “도사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시충 셋이 있는데 뱃속에 있다가 사람이 조금만 잘못한 것을 보면 경신일에 나가 제에게 참소한다.[道士言 人皆有尸蟲三處腹中伺人隱微失誤 日庚申 出讒於帝]" 하였다.
♣ 삼표[三表]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올린 흉노(匈奴)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삼표오이(三表五餌)의 준말이다. 삼표는 인도(仁道), 상의(常義), 연낙(然諾)이고, 오이는 이(耳), 목(目), 구(口), 복(腹), 심(心)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다. 《新書 匈奴》
♣ 삼품[三品]삼품에 대해서 주자(朱子)는 제사 음식용, 빈객 대접용, 주방 비축용이라고 해설하였다.
♣ 삼풍[三風]삼풍은 십건(十愆)을 묶어 말한 정사를 그르치는 세 가지 풍인데, 곧 무풍(巫風)ㆍ음풍(淫風)ㆍ난풍(亂風)이다.
♣ 삼풍십건[三風十愆]무풍(巫風)ㆍ음풍(淫風)ㆍ난풍(亂風)에 해당한 사항으로서 늘 궁중에서 춤을 추거나 실내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면 그것이 무풍이고, 재물 또는 여색에 목숨을 걸거나 놀이와 사냥만을 즐기면 그것이 음풍이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충직(忠直)한 이를 거역하고, 덕망 있는 원로를 멀리하고, 완악한 동자를 가까이하면 그것이 난풍이라는 것으로 탕(湯)이 후세 자손을 경계하는 뜻에서 관형(官刑) 제도를 두고 이러한 풍습을 제재하였음. 《書經 伊訓》
♣ 삼하[三河]낙양(洛陽) 부근의 세 강물을 가리키는 말로, 북방(北方)을 뜻한다.
♣ 삼하[三河]삼하는 중국의 하남(河南)ㆍ하동(河東)ㆍ하내(河內)를 말한 것이다.
♣ 삼하[三夏]음력 사ㆍ오ㆍ륙 삼개월.
♣ 삼하[三河]중국의 하남(河南)ㆍ하동(河東)ㆍ하북(河北)을 가리킨다. 《後漢書 光武紀贊 注》
♣ 삼한[三韓]상고 시대에 우리나라 남부에 있었던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의 합칭이다.
♣ 삼한갑족[三韓甲族]우리나라의 옛적부터 문벌이 높은 집안
♣ 삼한사온[三寒四溫]우리나라의 겨울 날씨로, 삼일은 춥고, 나흘은 따뜻한 날씨.
♣ 삼한외방장[三韓外方丈]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奉贈太常張卿▣)’에, “방장산은 삼한 나라 밖이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이라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하였다.
♣ 삼한지외방장산[三韓之外方丈山]삼한(三韓)은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인데,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위치하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솟아 있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時集 卷3 奉贈太常張卿▣ 20韻》
♣ 삼함[三含]삼함은 입을 세 겹으로 봉한다는 뜻으로 말조심하는 것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주(周) 나라에 가서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가면서 보니, 사당 우측계단에 금인(金人)이 서 있는데 그 금인의 입은 세 겹으로 봉해졌고 그 등에는 “옛날에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古之愼言人也]"고 새겨져 있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觀周》
♣ 삼함각[三緘刻]말조심하는 사람. 공자(孔子)가 주(周)의 태묘(太廟)에 갔더니 바른편 뜰 앞에 쇠붙이로 주조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입을 세 군데를 얽어매고는 그 등에다 조각하기를, “옛날에 말을 조심했던 사람이다.” 하였다고 함. 《孔子家語 觀周》
♣ 삼함계금구[三緘戒金口]설원(說苑) 경신(敬愼)에, “공자(孔子)가 주(周)에 갔을 때에 태묘(太廟)에서 보니 오른쪽 계단 곁에 금인(金人)이 있었는데, 그 입을 세 겹으로 봉하였으며, 등에다가는 명(銘)하기를, ‘옛날에 말을 삼간 사람이다.’ 하였다.” 하였다. 후대에는 이를 인해 말을 신중하게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 삼합[三合]천(天)ㆍ지(地)ㆍ인(人) 셋이 합하여 덕(德)을 이룸을 말함.
♣ 삼해[三亥]삼해는 해(亥)의 일진(日辰)이 세 번 든 것인데, 그 해에는 장마가 진다는 말이 있음.
♣ 삼해주[三亥酒]음력 정월 상해일(上亥日)에 찹쌀가루로 죽을 쑤어 누룩과 밀가루로 반죽한 다음 독에 넣고, 다시 중해일(中亥日)에 찹쌀가루와 멥쌀가루를 쪄서 독에 넣고, 하해일(下亥日)에 또 흰쌀을 쩌서 독에 넣어 빚은 술인데 춘주(春酒)라고도 한다.
♣ 삼허[參墟]삼성(參星) 분야를 말하는데 사천(四川) 지방을 가리킨 것이다.
♣ 삼헌[三獻]초 여왕(楚厲王) 때 변화(卞和)가 산중에서 옥박(玉璞)을 얻어 이를 받들고 가서 여왕에게 바치자, 여왕이 옥인(玉人)에게 감정(鑑定)을 시킨 결과, 옥박이 아니고 돌이라 하므로, 여왕이 변화가 임금을 속였다 하여 그의 왼쪽 발꿈치를 베었다. 여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한 다음 변화가 다시 그 옥박을 무왕에게 바치자, 역시 옥인에게 감정을 시킨 결과 또 돌이라 하므로, 무왕이 또 변화가 임금을 속였다 하여 그의 오른쪽 발꿈치를 베었다. 그 후 무왕이 죽고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그 옥박을 안고 초산(楚山) 아래에서 3일 낮밤을 울었더니, 문왕이 그 전후 내막을 듣고는 옥인을 시켜 그 옥박을 쪼개어 과연 보배를 얻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韓非子 和氏》
♣ 삼헌옥[三獻玉]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박옥(璞玉)을 얻어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쳤더니, 여왕은 속인다고 하여 그의 왼쪽 발꿈치를 잘랐다. 그 후 초 무왕(楚武王)이 즉위하여 다시 바치니, 무왕 역시 그의 오른쪽 발꿈치를 잘랐다. 그 후 초 문왕(楚文王)이 즉위하여 그 옥을 갈게 하였더니 보옥(寶玉)이 되었다 한다. 《韓非子 和氏》
♣ 삼협[三峽]사천(四川)‧호북(湖北) 두 성(省)의 경계에 있는 양자강(揚子江; 長江) 중류의 세 협곡(峽谷). 사천(四川) 봉절(奉節)에서부터 호북(湖北) 의창(宜昌)지역까지의 산악지대를 흐르는 장강 줄기 가운데 가장 험난하기로 이름난 구당협(瞿塘峽)ㆍ무협(巫峽)ㆍ서릉협(西陵峽)을 말한다.
♣ 삼호[三號]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노담(老聃)이 죽자, 친구 진일(秦佚)이 세 번 호곡하고[三號] 나왔다.” 하였다.
♣ 삼호[三壺]전설 속에 나오는 삼신산(三神山)으로,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말한다. 이 산들은 발해(渤海) 바다 가운데 있는데, 신선들이 살고 불사약(不死藥)이 있으며, 새와 짐승이 모두 희고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 삼호[三戶]초(楚)의 삼대성(三大姓)인 소(昭)ㆍ굴(屈)ㆍ경(景)인데 여기는 초의 유장(遺將)인 항량(項梁)과 항우(項羽)를 말한다. 사기(史記) 항우기(項羽紀)에 “초가 비록 유민밖에 남지 않았지만 진(秦)을 멸망시킬 자는 반드시 초의 사람이다.” 하였다.
♣ 삼호[參乎]효성스럽고 우애로운 사람을 말한다. 삼은 증자(曾子)의 이름으로, 공자가 증자를 부를 때 이렇게 불렀다.
♣ 삼호가보[三戶可報]전국(戰國) 말년에 진 나라에서 초 회왕(楚懷王)을 속여서 청하여다가 붙잡아 보내지 아니하고, 그 곳에서 죽었으므로 초 나라 사람이 진 나라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초 나라가 비록 세집[三戶]이라도 진 나라를 망치는 것은 반드시 초 나라일 것이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뒤에 초 나라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삼호(三戶; 지명)를 건넜으니, 그 말이 예언(豫言)이 된 것이다.
♣ 삼화[三花]패다수(貝多樹)를 이름. 패다수는 1년에 꽃이 세 번 피므로 삼화수(三花樹)로 불리운다.
♣ 삼화수[三花樹]1년에 꽃이 세 번 피는 나무라는 뜻으로 패다수(貝多樹)를 말한다.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역시 모두 유리(琉璃)요 수정(水晶)인데, 그 속에는 삼화(三花)의 나무와 오색(五色)의 열매가 있었다.” 하였음.
♣ 삼화수[三花樹]삼화수는 곧 인도(印度)에서 나는 패다수(貝多樹)의 이명(異名)으로 이 나무는 1년에 꽃이 세 번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이백(李白)이 오애산(五崖山)으로 들어가는 자기 숙부를 전송한 시에 “가실 때 응당 숭소 사이를 들르시리니, 날 생각하여 삼화수를 꺾어 보내소서[去時應過嵩少間 相思爲折三花樹].” 한 데서 온 말이다. 《李太白集 卷七》
♣ 삼황[三皇]삼황(三皇)은 태고 시대 전설적인 성왕(聖王)으로 즉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을 말하는데, 천황씨는 형제 12인이 각각 1만 8천세 씩 왕위를 누리었고, 지황씨 또한 형제 11인이 각각 1만 8천세씩 왕위를 누렸다 한다. 《史略 卷一》
♣ 삼황[三皇]상고 시대(上古時代)의 세 황제로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이라고도 하며, 태호 복희씨(太昊伏羲氏)ㆍ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ㆍ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라고도 한다.
♣ 삼황강삼치[三皇降三畤]삼황이 삼치(三畤)에 내린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설문(說文)에 “치(畤)는 천지(天地)와 오제(五帝)에게 제사하는 땅이다. 우부풍(右扶風) 옹(雝)에 오치(五畤)가 있는데, 호치(好畤)와 녹치(鄜畤)는 다 황제(黃帝) 때에 쌓았다 하고 혹은 진 문공(秦文公)이 세웠다고 한다.” 하였다.
♣ 삼회곡구방천앵[三回谷口放遷鶯]세 번 과거의 시관(試官)으로 급제자들을 뽑았음을 뜻한다.
♣ 삼후[三嗅]두보의 시 ‘추우탄(秋雨歎)’에, “당상의 서생 괜히 머리만 세었기에, 바람 따라 몇 번이고 향내 맡고 우누나.[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하였다
♣ 삼훈욕[三薰浴]향초를 넣어 끓인 물에 머리를 감고 또 몸에 향수를 수차 발라서 몸을 맑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 삼휴[三休]사람이 휴식하여야 할 세 가지 조건. 삼휴는 당(唐) 나라 시인 사공도(司空圖) 호로, 만년에 중조산(中條山) 왕관곡(王官谷)에 정자를 짓고 이를 삼휴정(三休亭)이라 이름하고 은거했던 데서 온 말이다. 즉 재능을 헤아린 결과[量才] 이것이 첫번째 휴식해야 할 조건이요, 분수를 헤아린 결과[揣分] 이것이 두 번째 휴식해야 할 조건이며, 늙어서 귀가 어두운 것[耄聵]이 세 번째 휴식해야 할 조건이라고 하였다. 《唐書 卓行傳》
♣ 삼휴[三休]세 번 휴식한다는 말. 하손칠소(何遜七召)에 “걷다가 세 번 휴식하니 반도 못 되고 길은 중간에서 자면서 바야흐로 희미해졌네.” 하였는데, 여기서는 도학의 길이 쉽지 않으니 쉬어가면서 차분히 간다는 뜻이다.
♣ 삼희[三希]성인은 하늘같이 되기를 바라고[聖希天], 현인은 성인같이 되기를 바라고[賢希聖],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士希賢]을 세 가지 바람이라고 한다. 《通書 志學》
♣ 삽[翣]상여(喪輿)의 양쪽 옆에 세우는 제구. 네모진 화포(畫布)에 길이 다섯 자의 나무 자루가 있고 깃털을 장식하였다.
♣ 삽삽[颯颯]바람이 부는 소리.
♣ 삽우한[揷羽翰]고려시대 승상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사모 위에 꿩의 날개를 꽂아 그 위의를 표시하도록 하였다.
♣ 삽화[翣畫]상여의 양쪽에 세우고 가는 제구(祭具)이다. 원래는 깃으로 만들었으나 후세에 네모진 화포(畫布)에 다섯 자 길이의 자루를 달고 깃털로 장식하였다. 《禮記 喪大記》
♣ 상[相]살펴보다. 조사하다.
♣ 상[殤]상이란 미성년으로 죽은 것을 말하는데, 19~16세에 죽으면 장상(長殤), 15~12세에 죽으면 중상(中殤), 11~8세에 죽으면 하상(下殤), 8세 이하에 죽으면 복(服)이 없는 상이라 한다. 《儀禮 喪服傳註》
♣ 상[相]외계(外界)에 나타나 마음의 상상(想像)이 되는 사물의 모양을 말한다. 곧 속세를 떠났다는 말.
♣ 상가[商歌]곤경에 처해서도 끄떡하지 않고 의연한 기풍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증자(曾子)가 10년 동안 옷을 해 입지 못하고 3일 동안 밥을 지어 먹지 못하는 고달픈 환경 속에서도 상송(商頌)을 소리 높이 부르니, 그 음성이 천지를 가득 진동시키면서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듯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莊子 讓王》
♣ 상가[商歌]비량(悲凉)한 가락의 노래. 상성(商聲)은 가을을 상징하는 소리로, 슬프고 쓸쓸한 느낌을 자아낸다.
♣ 상가[商歌]비통한 곡조의 노래. 진(晉) 나라의 영척(寗戚)이 제 환공(齊桓公)에게서 벼슬을 하고자 하였으나 너무 곤궁하여 환공을 만날 길이 없으므로, 상려(商旅)가 되어 제 나라에 들어가 남의 소를 먹이면서 환공의 행차를 바라보고 소의 뿔을 두드리며 상가를 슬피 부르니, 환공이 그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그를 데려오게 해서 등용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淮南子 道應訓》 도잠(陶潛)의 시에 “상가는 나와 상관없는 일, 오늘도 여전히 짝지어 밭 간다오.[商歌非吾事 依依在耦耕]”라는 구절이 나온다.《陶淵明集 卷3 辛丑歲七月赴假還江陵 夜行塗中》
♣ 상가구[喪家狗]초상집의 개. 여위고 초라한 모습으로 일정한 지위를 못 얻고 걸식하며 떠도는 신세. 초상집은 슬픈 나머지 개에게 먹을 것을 줄 경황이 없어서 개가 파리해지기 때문에, 기운이 없어 축 늘어진 사람에게 비유한 것인데,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사람이, 때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공자에게 비유했던 말이다. 《史記 卷十七 孔子世家》
♣ 상가금석당[商歌金石撞]곤궁한 속에서 도를 즐김을 비유한 말. 증자(曾子)가 일찍이 위(衛) 나라에 있을 적에 매우 곤궁하여 옷은 다 헤지고, 얼굴은 초췌했으며, 3일간을 굶기도 했으나, 그가 상송(商頌)을 노래하면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여 마치 금석(金石)에서 나온 소리와 같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讓王》
♣ 상가자유별반림[商家自有別般霖]상(商) 나라 임금 무정(武丁)이 부열(傅說)을 얻어 재상으로 임명한 뒤 “만약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내가 그대를 단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書經 說命上》
♣ 상가지구[喪家之狗]초상집의 개처럼 여위고 초라한 모습으로 일정한 지위를 못 얻고 걸식하며 떠도는 신세. 평성(平聲)으로 읽으면 상갓집의 개라는 뜻이고, 거성(去聲)으로 읽으면 집을 잃어버린 개라는 뜻이다. 공자가 정(鄭) 나라에 가서 혼자 성(城) 동문에 서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공(子貢)에게 말하기를, “동문에 어떤 사람이 어릿어릿 초상집 개 같더라.” 하였다.
♣ 상가출금석[商家出金石]증자(曾子)가 위(衛) 나라에 있을 적에 몹시 곤궁하여 10년 동안 옷을 지어 입지 못하고, 3일 동안을 굶고도, 그가 신을 끌면서 상송(商頌)을 노래하면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마치 금석(金石)의 악기를 연주하는 듯이 고아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莊子 讓王》
♣ 상간[霜簡]상간은 어사가 혐의자를 탄핵하는 상주서(上奏書)인데, 또는 백간(白簡)이라고도 한다.
♣ 상감만수향[霜柑滿袖香]정월 대보름날 밤에 근신(近臣)들이 임금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 귀척들이 근신들에게 서로 다투어 감귤을 전해 주면 이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상갑[上甲]상갑은 춘ㆍ하ㆍ추ㆍ동 각 철마다 첫 번째에 든 갑자일을 가리키는데, 농가에서는 이날의 일기를 가지고 해의 풍흉 등을 점친다고 한다.
♣ 상강구객[湘江久客]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을 지칭한 말로, 여기서는 귀양온 필자 자신을 의미하고 있다.
♣ 상강의[湘江意]소상강(瀟湘江)에 대[竹]가 유명한데, 여기서는 대[竹]가 작은 분(盆)에 있으면서,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 있다.
♣ 상강이녀[湘江二女]순(舜) 임금의 두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술이기(述異記)에 “옛날 순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수(巡狩)하다가 붕어하자 아황과 여영이 상강 가에 이르러 통곡하다가 빠져 죽었다.” 하였고 그곳에는 아황과 여영의 황릉묘(黃陵廟)가 세워졌다.
♣ 상계[上界]천상의 세계. 곧 신선의 세계를 뜻함.
♣ 상곡[桑穀]모두 나무 이름. 옛날엔 이 두 나무가 한꺼번에 조정에 나면 상서롭지 못한 징조로 여겼었다.
♣ 상곡[桑穀]상곡(桑穀)은 뽕나무와 닥나무이다.
♣ 상곡생조[桑穀生朝]상과 곡은 다 나무 이름이다. 이것들이 대궐 뜰에 나는 것을 불상(不祥)으로 여겼는데, 사기(史記) 은기(殷紀)에 “태무(太戊)가 즉위하고 이척(伊陟)이 정승으로 있을 때, 상곡이 대궐 뜰에 나서 하룻밤 사이에 두 손아귀가 가득 찰 정도로 크자, 임금이 놀라 이척에게 물으니 이척이 ‘신은 듣건대, 요사함이 덕을 이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덕을 닦으십시오.’ 하므로 태무가 그대로 따르니, 상곡이 말라죽었다.” 하였다.
♣ 상골[霜骨]상골은 소나무를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 상곽[向郭]진(晉)나라 상수(向秀)와 곽상(郭象).
♣ 상관황후[上官皇后]상관안(上官安)의 딸로 겨우 6세 때에 한 소제(漢昭帝)의 황후가 되었는데, 얼마 후에 자기 아버지는 역모(逆謀)를 하다가 발각되어 멸족(滅族)을 당하였다. 황후가 14세 때에 소제가 붕어하자, 황후는 이 때부터 홀로 되어 슬픔 속에 지내다가 선제(宣帝)가 즉위한 후에 나이 52세로 붕어하였다. 《漢書 卷九十七》
♣ 상광[詳狂]미친 짓을 하다. 詳은 佯의 통가자(通假字).
♣ 상구[床龜]거북 모양의 평상 발. 육구몽(陸龜夢)의 유거부(幽居賦)에 “거북으로 평상을 받치고 사슴 가죽으로 수건을 만들어 생활하며 은사(隱士)를 부르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 상구[喪狗]상구는 초상집 개라는 뜻으로, 초상집은 슬픈 나머지 개에게 먹을 것을 줄 경황이 없어서 개가 파리해지기 때문에, 기운이 없어 축 늘어진 사람에게 비유한 것인데, 춘추 시대 정(鄭) 나라 사람이, 때를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공자에게 비유했던 말이다. 《史記 卷十七 孔子世家》
♣ 상구[床龜]옛날 남방에 노인이 거북을 가지고 평상 다리[牀足]를 받쳤더니, 20년이 지난 뒤에 노인이 죽고 평상을 옮기니 거북이 아직 살아 있었다. 《史記》
♣ 상구[爽鳩]오제(五帝)의 하나인 소호씨(少昊氏) 시대에 도적을 막는 일을 담당한 관리이다.
♣ 상구[相求]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종류는 서로 구하여 모인다.[同氣相求]” 한 데서 온 말로, 지기(知己)의 친구임을 의미한다.
♣ 상구[商瞿]춘추(春秋)시대 사람.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유독 주역을 좋아했기 때문에 공자가 그의 뜻대로 그에게 주역을 전수하였음. 《史記 卷六十七》
♣ 상구씨[爽九氏]옛날의 관명(官名)인 사구(司寇)를 말한다. 사구는 형벌을 맡은 벼슬이다.
♣ 상구씨[爽鳩氏]처음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을 가리킨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경공이 술을 마시며 “옛날부터 죽는 일이 없었다면 그 즐거움이 어떠할까.”라고 하자, 안자(晏子)가 “옛날 상구씨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만약 죽는 일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이곳의 즐거움은 상구씨가 독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던 고사가 전한다. 《左傳 昭公 20年》
♣ 상구어산풍[上九於山風]주역(周易) 고괘(蠱卦)의 상구(上九)에, “군왕을 섬기지 않고 한가로움을 추구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하였다.
♣ 상국홍[上國洪]상국은 중국을 말하며, 홍은 고려 때 원 나라로 귀화한 홍다구(洪茶丘)가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므로 일컫는 말이다.
♣ 상군[商君]위(衛) 나라의 공자였던 공손앙(公孫鞅)은 진(秦) 나라의 효공(孝公)을 도와 개혁정치를 단행하여, 그 공로로 상(商) 땅에 봉해졌으므로 상군 또는 상앙(商鞅)이라 불렀는데, 그의 부국 강병(富國强兵) 정책에 힘입어 진 나라는 마침내 산동(山東)의 제후들을 복종시키고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인의(仁義)를 버렸으므로 무도(無道)하기로 유명하여 2대 만에 망하고 말았다. 《史記 秦本紀ㆍ秦始皇本紀》
♣ 상군상지수[桑君上池水]상군은 편작(扁鵲)에게 의술(醫術)을 전한 장상군(長桑君)을 가리킨 것이고, 상지수는 대[竹] 잎의 이슬을 말하는데, 장상군이 편작에게 약을 주면서 상지수로 먹게 하자 편작이 그 약을 30일 동안 먹고 나서 의술을 통하였다는 고사이다. 《史記 卷一百五 扁鵲傳》
♣ 상군정[賞軍政]공민왕(恭愍王) 3년 원 나라에서 장사성(張士誠) 등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을 때, 부족한 장교를 보충하기 위하여 정원 외에 몇 명씩을 첨설(添設)한 일.
♣ 상궁사가경[傷弓事可驚]예전에 화살을 맞아 본 경험이 있는 새는 활시위 튕기는 소리만 들어도 지레 놀라 땅에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戰國策 楚策4》
♣ 상궁조[傷弓鳥]한 번 환란을 겪고 난 뒤로부터 항상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것을 말한다. 화살에 한 번 혼이 났던 기러기가 활 튕기는 소리만 듣고서도 땅에 떨어졌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戰國策 楚策 四》
♣ 상궁지조[傷弓之鳥]활에 다친 새. 한번 화살에 맞은 새가 항상 의심하고 두려워함과 같이 한번 궂은 일을 당하고 나면 늘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상규요사궁무애[上窺姚姒窮無涯]순(舜)ㆍ우(禹)의 도를 탐구한다는 뜻으로, 요(姚)는 우순(虞舜)의 성이므로 곧 순 임금을 가리킨 것이고 사(姒)는 하우(夏禹)의 성이므로 곧 우 임금을 가리킨 것이다. 한창려집(韓昌黎集) 권12 진학해(進學解)에 “위로 요사를 넘어다보건대, 혼혼하여 가이없다.[上規姚姒 渾渾無涯]" 하였다.
♣ 상금[傷錦]춘추 시대 정(鄭) 나라 자피(子皮)가 재능이 부족한 윤하(尹何)에게 고을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자, 자산(子産)이 자피에게 말하기를 “그대에게 아름다운 비단이 있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비단으로 옷 짓는 일을 배우게 하지 않을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左傳 襄公三十一年》
♣ 상금의미석[償金疑未釋]한(漢) 나라 때 직불의(直不疑)가, 같은 방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금(金)을 훔쳐갔다는 의심을 받고는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그 금을 보상해 주었는데, 그 사람은 내내 직불의가 참으로 자기 금을 훔쳐간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결국은 직불의가 금을 훔쳐가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다.
♣ 상금재파[祥琴纔罷]대상(大祥)을 막 지냈음을 뜻함. 예기(禮記) 상복사제(喪服四制)에 “대상을 지낸 날에 소금을 탄다.[祥之日鼓素琴]”하였다.
♣ 상금졸능[傷錦拙能]벼슬을 할 만한 경륜(經綸)이 없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유성공전(劉聖公傳)에 “작위(爵位)와 거복(車服)은 성인(聖人)이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소중하게 여긴 것을 적합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해 준다면, 마치 재목을 못쓰게 만들고 비단을 상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상납인정[上納人情]뇌물의 한 가지. 조선조 때 북방야인들은 으례 모물(毛物)을 진상(進上)했다. 진상할 때에는 반드시 소속 변장(邊將)에게 품종을 검사받게 되었다. 그러면 변장은 그것의 다과(多寡)에 따라 각각 징취(徵取)하였으니, 이것을 상납인정(上納人情)이라 하였다.
♣ 상누[湘櫐]원죄(寃罪)로 방축(放逐)되어 상수(湘水)에 투신 자살한 충신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 상달[上達]위를 향하여 진보하는 것.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군자는 항상 위를 향하여 진보하고 소인은 항상 아래를 향하여 퇴보한다.[君子上達 小人下達]" 하였음.
♣ 상담[祥禫]삼년상(三年喪) 때 지내는 소상(小祥), 대상(大祥)의 제사와 담제(禫祭)를 말한다.
♣ 상담[湘潭]상담은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현(縣) 이름으로, 한때 장사군(長沙郡)에 딸리기도 하였는데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賈誼)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된 곳이라 하여 흔히 귀양지의 별칭으로 사용한다.
♣ 상담[賞膽]오왕(吳王) 부차(夫差)가 그의 아버지가 월(越) 나라에게 패전하여 죽은 원수를 갚으려고 짐승의 쓸개를 거처하는 곳에 달아두고 아침저녁으로 그 쓴맛을 맛보면서 “월 나라 사람이 아버지 죽인 원수를 잊지 않겠다.” 하였다.
♣ 상담[湘潭]초 나라 충신 굴원이 귀양갔던 상수(湘水) 물가로, 궁벽한 귀양지를 가리킨다.
♣ 상담수[湘潭愁]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무고를 당하여 상수(湘水)로 쫓겨나 있으면서 시름하였다.
♣ 상담초사[湘潭楚辭]상담은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딸린 고을 이름으로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충신 굴원이 참소를 받고 쫓겨났던 곳이고, 초사는 그가 지은 이소경(離騷經)ㆍ어부사(漁父辭) 등의 총칭인데, 주로 간신은 뜻을 얻어 판을 치고 충신은 쫓겨나는 현실에 대한 비분강개한 뜻을 노래한 글이다.
♣ 상담축객[湘潭逐客]조정에서 억울하게 죄를 받고 쫓겨난 사람들을 말한다.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에 강담(江潭)을 서성이고 택반(澤畔)에서 읊조렸다.”는 말이 나오는데, 강담은 바로 상담(湘潭)이다.
♣ 상담한[湘潭恨]초(楚)의 굴원이 상수(湘水) 깊은 물에 빠져 죽은 한을 말함.
♣ 상당[上黨]중국 산서성(山西省) 동남부에 위치한 군명. 지대가 너무 높아 하늘과 무리를 이루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 상당[上黨]충청북도 청주(淸州)의 옛 이름으로, 곧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등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일족(一族)을 가리킨다.
♣ 상당송연[上黨松煙]상당은 지명. 득수루잡초(得樹樓雜鈔)에 “옛사람이 먹[墨]을 만드는 데 있어 모두 송연(松煙)을 사용하는데, 당(唐) 나라 때는 상당의 송연을 사용했다.” 하였다.
♣ 상대[霜臺]상대는 어사대(御史臺)로 사헌부(司憲府)의 별칭.
♣ 상대[霜臺]어사대부(御史大夫)의 아칭(雅稱)이 상대(霜臺)인데, 서릿발같이 엄한 관서라는 뜻이다.
♣ 상대[上台]삼대성(三臺星)은 삼공(三公)을 표상하는 별인데, 상대는 수상(首相)을 뜻한다.
♣ 상도[常道]상도는 떳떳한 도임.
♣ 상돈[上暾]아침해가 떠오르다.
♣ 상동[床東]상동은 사위의 별칭이다. 진(晉) 나라의 태위(太尉) 치감(郗鑒)이 왕 승상의 집에서 사윗감을 구했을 때, 다른 자제들은 모두 단정한 모습으로 각자 선발되기를 기대하였으나, 왕희지(王羲之)만은 동상(東床)에 엎드려 누운 채 태연자약하게 떡을 먹고 있었는데, 이에 치감이 그의 풍도에 경도된 나머지 왕희지에게 딸을 주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王羲之傳》 악부(樂府)의 금곡(琴曲) 가운데 부부가 이별할 때의 아내의 슬픈 심정을 노래한 ‘별학원(別鶴怨)’이 있다.
♣ 상락[桑落]나이 들어 용모가 쇠해진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맹(氓)의 “桑之落矣 其黃而隕”에서 나온 말이다.
♣ 상락[桑落]술의 한 가지.
♣ 상락공[上洛公]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해진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을 가리킨다.
♣ 상락백[上洛伯]김사형(金士衡)의 봉호이다.
♣ 상락은[商洛隱]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 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이상 네 사람. 이들은 진(秦)의 난을 피하여 상락(商洛)깊은 산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였음. 《漢書 王貢傳序》
♣ 상락주[桑落酒]술 이름. 하동(河東)의 상락(桑落)고을에 우물이 있는데 뽕잎이 지는 시기에 그 물을 길어다 술을 빚으면 그 술맛이 매우 좋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霏雪錄》
♣ 상렴[緗簾]비단으로 만든 주렴.
♣ 상령[商嶺]상령은 즉 상산(商山)으로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
♣ 상령[湘靈]상수(湘水)의 신으로, 상수에 빠져 죽은 순(舜) 임금의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요(堯) 임금의 딸인 아황과 여영이 순 임금에게 시집 가 비가 되었는데, 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창오(蒼梧)의 들에 묻혔다. 그러자 두 비가 순 임금이 그리워 통곡하면서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져서 반점이 생겼다. 두 비가 그 뒤에 상강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칭하였다. 《列女傳》
♣ 상령[商嶺]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
♣ 상령[爽靈]태미령서(太微靈書)에 “人有三魂 一曰爽靈 二曰台光 三曰幽精"이라 하였음. 소식의 부용성시(芙蓉城詩)에 “天門夜開飛爽靈"의 구가 있음.
♣ 상령고슬[湘靈鼓瑟]상령이 거문고를 탄다는 뜻. 상령은 상수(湘水)의 신(神)임. 초사(楚辭)에, “使湘靈鼓瑟”이란 것이 보임. 당(唐) 나라 시인 전기(錢起)가 일찍이 상령고슬시(湘靈鼓瑟詩)를 지었다.
♣ 상로[霜露]부모와 선조에 대한 애틋한 생각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린 곳을 군자가 밟고 가면 반드시 처창(悽愴)한 마음이 들게 마련인데, 이는 결코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註)에 “이는 계절의 변화에 어버이 생각이 나서 그런 것이다.” 하여, 가을이 되면 돌아간 부모를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미를 말하였다.
♣ 상로감[霜露感]돌아간 조상을 슬퍼하는 마음을 이름.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君子)가 그것을 밟아 보고는 반드시 슬픈 마음이 들게 된다.” 하였다.
♣ 상로병[霜露病]감기 기운으로 일어나는 병.
♣ 상로비[霜露悲]돌아간 부모를 슬퍼하는 것을 이름.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거든 군자가 그것을 밟아 보고 반드시 슬퍼하는 마음이 있게 된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상로지사[霜露之思]어버이에 대한 사무친 생각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서리와 이슬[霜露]이 내린 뒤에 군자가 이를 밟고 가노라면 처창(悽熗)한 마음이 들게 마련인데, 이는 그 한기(寒氣)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해설하기를 “추운 계절이 돌아오자 어버이 생각이 사무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상론자[尙論者]고인(古人)의 언행(言行)ㆍ인격(人格)을 논한 사람.
♣ 상루[湘纍]죄를 지어 관직에서 내쫓기는 것을 말한다.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무고를 당하여 상수(湘水)로 쫓겨나 있다가 죽었으므로 이렇게 이른 것이다.
♣ 상류[湘櫐]굴원(屈原)이 죽은 것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굴원을 가리킨다. 양웅(揚雄)의 반이소(反離騷)에 “초(楚)의 상루에 조상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죄없이 죽은 것을 누라 하며, 상강(湘江)의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으므로 상루라 한다.” 하였다.
♣ 상류전[上留田]악부(樂府)의 이름. 그 내용은 옛날 상류전(上留田) 사람이 부모가 죽은 뒤에 그 형되는 자가 외로운 동생을 부양해주지 않으므로, 그 이웃 사람이 그 아우된 사람을 위해 슬픈 노래를 지어 그 형을 풍자한 것이라고 한다
♣ 상률숙금형[商律肅金刑]상은 오음(五音) 중의 하나로 가을에 해당하며 금(金)은 오행(五行)의 하나로 역시 가을에 해당하는데, 상이나 금이 모두 오색(五色)으로 말하면 흰색이 된다.
♣ 상릉[上陵]상릉은 제왕의 선왕 능묘에 올라가서 제례(祭禮)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 상린[祥麟]제왕의 말을 사육하는 곳을 말한다. 당(唐) 나라 때 상린(祥麟)과 봉원(鳳苑)이라는 천자의 마구간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 《新唐書 兵志》
♣ 상린리화[祥麟罹禍]공자가 기린[麟]이 나왔다가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울었다. 그가 춘추(春秋)를 짓다가 그 때부터 붓을 끊고 말았다.
♣ 상림[上林]궁중의 동산으로 상림원(上林苑)을 말한다. 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흉노족에게 잡혀 있어 죽은 줄 알았는데, 하루는 천자가 상림원에서 활을 쏘아 흰 기러기를 잡으니, 기러기의 다리에 ‘소무가 어느 못가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한다. 《古文眞寶 前集 蘇武》
♣ 상림[商霖]상 나라의 장마비. 서경(書經) 열명(說命)에서 상 고종(商高宗)이 부열(傅說)을 재상으로 삼고 나서 이르기를 “만일 해가 큰 가뭄이 들거든 그대를 장마비로 삼으리라.[若歲大旱 用汝作霖雨]” 한 데서 온 말이다. 《書經 說命上》
♣ 상림[上林]상림원은 진(秦)ㆍ한(漢)시대 때 장안(長安)에 있었던 황제의 정원으로, 대궐을 뜻한다.
♣ 상림[上林]상림은 곧 한(漢) 나라 때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상림원(上林苑)에서 지은 상림부(上林賦)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상림부가 문장이 훌륭하기로 유명하다.
♣ 상림[上林]원래 진(秦) 나라 때부터 있던 동산이었는데 한 무제(漢武帝)가 그 규모를 크게 확장하였다. 천자(天子)가 군신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즐기는 곳. 《司馬相如 上林賦》
♣ 상림[桑林]지명으로, 탕왕(湯王)이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탕왕(湯王) 때의 음악. 또는 송(宋)나라의 무악(舞樂)이라고도 함.
♣ 상림가수응전차[上林嘉樹應全借]당대(唐代) 이의문(李義文)의 고사를 인용한 말. 즉 당 태종이 이의문을 처음 불러 보고 까마귀[烏]를 두고 시를 지으라 하니, 그가 “상림원에 나무가 많기도 한데, 한 가지도 빌려서 살지 못하네.[上林多少樹 不借一枝棲]" 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하여 지었으므로 태종이 말하기를 “앞으로 너에게 나무 전체를 빌려 줄 것인데 어찌 가지 하나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唐書 太宗本紀》
♣ 상림부[上林賦]상림부는 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었다.
♣ 상림오[上林烏]상림은 천자(天子)의 동산인 상림원(上林苑)의 준말로, 즉 까마귀를 의인화하여 벼슬길에 나감을 비유한 말이다.
♣ 상림원[上林苑]상림원은 한 무제(漢武帝)때 천자의 봄 가을 사냥놀이를 제공하기 위하여 각종 새와 짐승을 기르는 숲으로 상원(上苑), 또는 금림(禁林)이라고도 한다.
♣ 상림원[上林苑]한(漢) 나라 때의 궁원(宮苑) 이름으로, 도성에 있는 왕의 비원(祕苑)을 뜻한다.
♣ 상림일지[上林一枝]당(唐) 이의보(李義父)가 임금 앞에 불려 나가 뵈옵는데, 태종(太宗)이, “‘까마귀’를 두고 시를 지으라.” 하니 그가 읊되, 끝 구에, “상림(上林)엔 나무도 많건만, 깃들일 한 가지도 안 빌려주는구나.”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장차 온 나뭇가지를 네게 빌려주리니 어찌 다만 한 가지뿐이랴.” 하였다. 뒤에 등용되어 벼슬이 상위(相位)에 올랐다.
♣ 상림차일지[上林借一枝]상림(上林)은 상림원(上林苑)의 준말. 당 태종(唐太宗)이 이의보(李義父)를 처음으로 불러들여 영오시(詠烏詩)를 짓게 하자, 이의보가 읊기를 “태양은 아침에 나부끼고 거문고에선 야제곡을 듣네. 상림원의 하많은 나무, 한 가지도 빌려주지 않네[日影颺朝彩 琴中聞夜啼 上林多少樹 不借一枝棲]" 하니, 태종이 “어찌 가지 하나뿐이겠는가, 내가 너에게 나무 전체를 다 빌려주리라.” 했다는 고사이다.
♣ 상림축[桑林祝]인조(仁祖)가 친히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것을 말한다. 은(殷) 나라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탕왕(湯王)이 모든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며 상림(桑林)의 사당에 나아가 상제(上帝)에게 기도를 드리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가 쏟아져 내렸다는 이야기가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전한다.
♣ 상마[相馬]진목공(秦穆公)이 좋은 말[馬]을 구하려 하는데 말을 잘 알아 보는 백락(伯樂)이 자기보다 말을 더 잘 안다는 구방고(九方皐)를 추천하였다. 목공(穆公)이 말을 구하러 보내었더니 석달 만에 돌아왔기에, “어떤 말인가.” 하니, “암컷이고 털빛은 누릅니다.” 하였다. 사람을 시켜 말을 몰고 온즉 수컷이고 흑색이었다. 목공이 백락을 불러, “말을 구해 놓았다는 사람이 암컷인지 수컷인지 황색인지 흑색인지도 모르니 어찌 좋은 말을 알아보았겠는가.” 하였다. 백락이, “구방고는 말의 상(相)을 보는데 천기(天機)만을 보고 암컷ㆍ수컷, 황색ㆍ흑색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은 잊은 것입니다.” 하였다. 구방고가 구한 말은 과연 천하에 제일가는 말이었다. 구방고의 높은 눈은 도리어 처음에 목공에게 의심을 받았다.
♣ 상마경[相馬經]서명(書名). 옛날 말 상을 잘 보았던 백락(伯樂)이 지은 책으로, 말을 상 보는 데 대한 법을 설명한 것이다. 《隋書 經籍志》
♣ 상마상[上馬桑]말에 실은 뽕이란 뜻으로, 많은 뽕을 의미한다. 원호문(袁好問)의 추잠(秋蠶) 시에, “……아침에 그것들에게 상마상을 먹였더니, 대밭에 빗소리가 잠박 너머에서 들려오네.[朝來飼却上馬桑 隔簇仍聞竹間雨]" 하였음.
♣ 상망도술[相忘道術]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명리(名利)가 아닌 도 속에서 서로 피아(彼我)의 구분이 없이 깊이 사귀는 벗이라는 것임.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물고기는 강이나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의 세계에서 서로를 잊는다[魚相忘乎江湖 人相忘乎道術].” 하였음.
♣ 상망수각질[象罔手脚疾]황제(黃帝)가 적수(赤水) 북쪽에서 노닐다가 돌아오는 길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는 중에 상망(象罔)만이 찾아냈다는 이야기이다.《莊子 天地》 여기에서 상(象)은 비무(非無), 망(罔)은 비유(非有)를 지시하고 있는데, 보통 무심(無心)의 상징으로 인지되고 있다.
♣ 상맥[桑麥]후한(後漢) 때 장감(張堪)이 어양태수(漁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뽕나무는 붙은 가지가 없고 보리 이삭은 두 갈래가 졌네 장군이 정사를 하니 즐거움을 감당치 못하겠도다[桑無附枝 麥穗兩岐 張君爲政 樂不可支]”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상목[商木]3승포(升布)를 ‘상목’이라 하고, 5∼6승포를 ‘회봉(回俸)’이라 함. 그런데 무명, 즉 면포의 품질은 날 80올을 1새[승(升)]로 하여 기준을 삼는데 새수가 많은 것일수록 곱다.
♣ 상문[桑門]상문은 범어(梵語)로 사문(沙門)과 같은 말. 불교 또는 승려를 말한다.
♣ 상반고신[湘畔孤臣]상반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난 뒤 상수(湘水) 가를 거닐며 행음택반(行吟澤畔)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귀양 간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 상방[上方]사찰의 주지(主持)가 거처하는 곳으로, 보통 사찰을 뜻한다.
♣ 상방[尙方]상의원(尙衣院)의 별칭. 궁중의 기물과 의복, 음식 등을 관장하는 임무, 또는 이를 관장하는 관청. 조선 시대 임금의 의복을 진공(進供)하고 궁중의 재물과 어보(御寶) 등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 상방검[尙方劍]전권(全權)을 위임하면서 임금이 대신이나 장수에게 내려 주는 검을 말한다.
♣ 상방참마[尙方斬馬]한(漢) 나라 주운(朱雲)이 성제(成帝) 때 권세를 멋대로 휘두르던 장우(張禹)를 제거하겠다고 하면서 황제의 검을 빌려 달라고 청했던 고사이다. 《漢書 朱雲傳》
♣ 상방하방[上方下方]상방은 주지승의 거처를, 하방은 일반 승려의 거처를 말한다.
♣ 상보[尙輔]이경석(李景奭)의 자(字)이다.
♣ 상보[尙父]주 문왕(周文王)의 스승이었던 태공 망(太公望)으로 당 고종(唐高宗) 상원(上元) 원년에 무성왕(武成王)에 추시(追諡)되었는데, 곧 훌륭한 국사(國師)를 가리킨 것이다.
♣ 상복[象服]법도의 복(服). 옛날 후비(后妃)와 귀부인(貴夫人) 등이 입던 예복과 의물(儀物)을 말한다. 시경(詩經)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에 “상복이 이에 알맞다.[象服是宜]" 하였는데, 그 주에 “상복은 존자(尊者)가 꾸미는 것이다.” 하였다.
♣ 상복[桑濮]상복은 지명(地名)으로 상간(桑間)ㆍ복상(濮上)을 가리키는데,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상간ㆍ복상의 음악은 망국(亡國)의 음악이다.” 하였다.
♣ 상봉[桑蓬]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이라는 상호봉시(桑弧蓬矢)의 약칭으로, 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고대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남자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여섯 개와 쑥대 화살 여섯 개로 천지 사방에 쏘았으니 이는 남자가 큰 뜻을 갖는 의미라 한다.” 하였음.
♣ 상봉지[桑蓬志]상봉은 상호봉시(桑弧蓬矢)로,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줄기로 만든 화살이다. 상고 때 사내아이가 출생하면 뽕나무 활로 쑥대 화살 여섯 개를 천지와 사방에 각각 쏘아날려 사나이의 뜻이 사방에 있다는 의미를 붙였다. 곧 사나이의 원대한 포부를 뜻한다. 《禮記 內則》
♣ 상부[翔鳧]동한(東漢)의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현령으로 임명된 뒤에 자신의 신발을 물오리로 변하게 하여 그 등 위에 타고 서울을 왕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傳上 王喬傳》
♣ 상부[商婦]상부는 장사하는 아낙을 말한다.
♣ 상부[祥符]송 진종(宋眞宗)의 연호(1008-1016)
♣ 상부시[孀婦詩]청상 과부(靑孀寡婦)라는 제목으로 읊은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七十老孀婦單居守空壺 慣讀女史詩 頗知姙姒訓 旁人勸之嫁 善男顔如槿 白首作春容 寧不愧脂粉”
♣ 상분[祥氛]상분은 상서와 요기를 이르는 것이다.
♣ 상분[嘗糞]지극한 효성이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에게 아첨하는 뜻의 고사성어.
♣ 상비[湘妃]순(舜)의 이비(二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이 남순(南巡)하다가 창오산(蒼梧山)에서 죽자, 소상강(瀟湘江)을 건너지 못하고 슬피 울다가 마침내 이 물에 빠져 죽어 상수(湘水)의 신(神)이 되었다는 전설에 의한 것으로 상군(湘君)이라고도 한다.
♣ 상비만[象鼻彎]술병의 주둥이가 ‘s’(에스) 자로 구부러진 것을 표현한 말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碧筩時作象鼻彎 白酒微帶荷心苦”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9 泛舟城南 會者五人 分韻賦詩 得人皆苦炎字》
♣ 상비배[象鼻杯]줄기가 붙은 연잎을 이용한 술잔. 위(魏)의 정시(正始) 연간에 정각(鄭慤)이 삼복 더위에 빈료(賓僚)들을 데리고 사군림(使君林)으로 피서를 가서 큰 연잎을 연격(硯格) 위에 올려놓고 술을 따른 다음 잎 가운데를 비녀로 찔러서 줄기로 술이 흘러내리게 하고는, 그 줄기를 마치 코끼리의 코 모양과 같이 굽혀서 이를 빨아먹었는데, 그 이름을 벽통배(碧筩杯)라고 하였다 한다. 《西陽雜俎 酒食》
♣ 상비한루흔[湘妃恨淚痕]순(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수하다가 죽었으므로 창오(蒼梧)에다 장사지냈다. 순 임금의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상강(湘江)에 이르러 둘이 부둥켜안고 울다가 상강에 빠져 죽었는데, 그들이 흘린 피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졌으므로 반죽(斑竹)이 생겼다 한다. 《述異記》
♣ 상사[上駟]가장 좋은 사마(駟馬)를 말한다.
♣ 상사[上巳]음력 3월 초3일, 즉 삼짇날을 말한다. 한(漢) 나라 이전에는 3월 상순(上旬)의 사일(巳日)을 상사(上巳)라고 하였는데, 위진(魏晉) 이후로는 사일(巳日)에 관계없이 3월 3일을 상사라고 하였다.
♣ 상사[上舍]진사(進士)나 생원을 가리킨다. 성균관 유생을 말한다.
♣ 상사심기제동정[常使心旗齊動靜]마음을 언제나 잘 안정하라는 뜻이다. 심기(心旗)는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여 마치 깃발처럼 동요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초일(楚一)에 “초왕(楚王)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이 누워도 자리가 편치 않고 먹어도 맛이 달지 않고 마음이 흔들리어 마치 달아놓은 깃발[懸旌]과 같다’ 했다.” 하였다.
♣ 상사일[上巳日]음력 3월 첫째 사일(巳日)을 말한다. 예부터 이날에는 수계(修禊)하는 풍속이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에 “3월 상사일에는 관민(官民)이 다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불상(不祥)을 불제(祓除)한다.” 하였는데, 위(魏) 이후로는 3월 삼짇날만을 이용하였고 다시 사일을 택하지 않았다.
♣ 상사자[相思字]서신(書信)을 가리키기도 하며, 이별한 시름이나 친한 이를 그리는 정을 뜻하기도 한다. 당 나라 때 장안(長安)에 사는 곽행선(郭行先)의 딸 소란(紹蘭)이 장사꾼인 임종(任宗)에게 시집갔는데, 임종이 장사를 하러 나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소란이 제비가 쌍쌍이 노는 것을 보고는 제비에게, “너는 저 바다 동쪽에서 오니 갈 때에는 반드시 상(湘) 땅을 지나갈 것이다. 네가 가는 편에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하자, 제비가 허락하는 듯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이에 상사(相思)라는 글자를 써서 제비 다리에 묶어 주었다. 임종이 형주(荊州)에 도착하였을 때 제비가 날아와서 어깨에 앉았는데, 제비 다리에 쪽지가 매여져 있었다. 이에 펴 보니 바로 아내가 보낸 것이었다. 《開元天寶遺事》
♣ 상산[裳山]무주현(茂朱縣) 남쪽 15리에 있는 산 이른다. 속칭 상성산(裳城山)으로 불리는데, 마치 사람의 치마처럼 층층으로 잘라 놓은 듯한 절벽이 사면에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9》
♣ 상산[商山]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다.
♣ 상산[商山]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의 동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살던 곳이다. 한(漠) 나라 시대에 상산(商山)의 사호(四皓)인 하황공(夏黃公)ㆍ각리선생(角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ㆍ동원공(東園公)이 숨어살며 한가(漢家)의 작록(爵祿)을 받지 아니하였다.
♣ 상산구어[上山求魚]산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다. 당치 않은 데 가서 되지도 않는 것을 원한다는 말이다.
♣ 상산노옹[商山老翁]진(秦) 나라 때에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즉 상산사호(商山四皓).
♣ 상산만세[商山晩歲]진(秦) 나라 말년에 전란을 피하여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숨어 살던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史記 張良世家》
♣ 상산사호[商山四皓]상산사호란 상산에 숨은 네 늙은이라는 뜻으로, 곧 동원공(東園公)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을 말하는데,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다 하여 일컬어진 말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태자를 폐위(廢位)하고, 척부인(戚夫人) 소생인 조왕 여의(趙王如意)를 세우려 하자, 장량(張良)이 계책을 내어 고조가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상산사호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폐백과 예를 갖추고 상산사호를 초빙한 다음 고조가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 그들로 하여금 태자를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고조가 그들이 상산사호임을 알고는 매우 놀라 태자를 폐위하려던 생각을 바꾼 다음 척부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 초가(楚歌)를 부르기를, “큰 고니가 높이 낢이여, 단번에 천리를 가도다. 날개[羽翼]가 이미 자람이여, 사해를 가로지르도다. 사해를 가로지르나니, 또한 어찌하리요. 아무리 주살이 있은들 오히려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漢書 張良傳》
♣ 상산선삼성[象山選三聲]상산은 송 나라 육구연(陸九淵)의 호이고, 세 소리란 곧 베 짜는 소리, 아이가 우는 소리, 글 읽는 소리를 합해서 이른 말이다.
♣ 상산설[常山舌]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에 입각하여 상대를 꾸짖는 것을 말한다.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의 아우 고경(杲卿)이 상산 태수(常山太守)로 있다가 안녹산(安祿山)에게 포로로 잡혀 혀가 끊어질 때까지 준열하게 꾸짖다가 죽은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상산송부자[常山宋夫子]상산은 진천(鎭川)의 고호이므로, 즉 본관이 진천인 송영구(宋英耈)를 높여 이른 말이다. 송영구의 자는 인수(仁叟)이고 호는 표옹(瓢翁)인데, 여러 관직을 거쳐 벼슬이 병조 참판에 이르렀고, 특히 광해군 때는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서 파직되었다.
♣ 상산외[商山隈]진 나라 말기에 동원공, 녹리선생, 기리계, 하황공 등 네 사람의 은사(隱士)가 진 나라의 학정을 피하여 상산(商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 상산은[商山隱]상산의 은자는 진(秦) 나라 말기에 80여 세의 나이로 상산 속에 숨어 살다가 장량(張良)의 권유를 받고 나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태자를 돌보았다는 ‘상산사호(商山四皓)’를 가리킨다.
♣ 상산중백발사호[商山中白髮四皓]파군(巴郡)에 귤원(橘園)이 있는데 귤이 다 없어진 뒤에 마지막 남은 큰 귤 한 개를 쪼개어 본즉, 두 노인이 그 속에서 장기를 두면서, “이 즐거움[樂]이 상산(常山)의 사호(四皓)에서 바둑 두는 것보다 못하지 않다.” 하였다.
♣ 상산지[商山芝]사호(四皓)가 처음 상산에 숨었을 때에 자지가(紫芝歌)를 지어 불렀는데, “붉은 지초는 요기(療飢)할 수 있도다.” 하였다.
♣ 상산하수[象山河數]송 나라 상산 육구연(陸九淵)이 소싯적에 항상 임안(臨安)의 시장에서 바둑 두는 구경을 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는데, 이에 바둑판 하나를 사가지고 와서 방 벽에 걸어 놓고 누워서 그것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깨닫고 말하기를, “이것이 하도수(河圖數)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상상[▣▣]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양
♣ 상상[象床]상아로 장식한 침상(寢床).
♣ 상상[上相]수위(首位)에 있는 재상(또는 장군)을 말한다. 영의정(領議政).
♣ 상상[常常]일상, 늘, 언제나, 무심한 모양, 성한 모양
♣ 상상[上上]최상급
♣ 상상[惕惕]바로 가서 빠른 모양
♣ 상상[惕惕]바로 가서 빠른 모양.
♣ 상서[象胥]통역과 외교 절차 등을 맡는 통사(通事)의 직책을 말한다.
♣ 상서고예리[尙書高曳履]한(漢) 나라의 상서 복야(尙書僕射) 정숭(鄭崇)이 직간(直諫)을 잘 올렸는데, 애제(哀帝)가 그의 신발 소리만 듣고서도 그가 온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는 고사가 있다. 《漢書 鄭崇傳》
♣ 상서광범[上書光範]한유는 자기를 추천하는 글을 요로(要路)에 많이 올렸다. 참고로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상재상서(上宰相書) 서두에 “정월 27일 전 향공진사(鄕貢進士) 한유는 삼가 광범(光範)의 문하에 엎드려 거듭 절하고 글월을 올립니다.” 하였다.
♣ 상서리[尙書履]한(漢) 나라 정숭(鄭崇)이 간쟁(諫爭)을 하러 갈 때마다 가죽 신발을 끌면서 갔는데, 그럴 때마다 황제가 웃으면서 “정 상서의 발자국 소리인 줄을 내가 알겠다.[我識鄭尙書履聲]”고 하였다 한다. 《漢書 鄭崇傳》
♣ 상서성[尙書省]육조(六曹)의 관아를 말한다.
♣ 상서팔절탄[尙書八節灘]상서는 역시 당 나라 때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를 이름. 백거이는 만년에 용문담(龍門潭) 남쪽 팔절탄(八節灘)의 초석(峭石)들을 개착하여 백성들의 수로 통행(水路通行)을 편리하게 해주고, 그곳 향산(香山)에 누각을 짓고 여기에서 끝내 유유자적하였던 고사이다. 《唐書 卷一百十九》
♣ 상석[象席]불법(佛法)의 거물(巨物)을 용상(龍象)이라 하는데, 그것은 물에서는 용이 가장 큰 동물이요, 육지에서는 코끼리가 가장 큰 동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비유하였다.
♣ 상선[象先]당(唐) 나라 때 여러 지방관을 지내면서 선정으로 대단히 명성이 높았던 육상선(陸象先)을 말한다. 그는 초명(初名)이 경초(景初)였는데, 예종(睿宗)이 특별히 그에게 상현(象賢)의 뜻을 부여하여 이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唐書 一百十六》
♣ 상선[象先]상(象)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로, 선천(先天)과 같은 말임.
♣ 상설[象設]무덤 앞에 사람이나 짐승의 형상을 본따 만든 석물(石物).
♣ 상설만[霜雪滿]눈이나 서리를 맞은 듯이 하얗게 백발(白髮)이 되었다는 뜻이다.
♣ 상성[商聲]상성(商聲)은 오음(五音)의 하나로 금석성(金石聲)을 가리킨다. 옛날 공자의 제자였던 증자(曾子)는 시골에 있으면서 며칠 동안 끼니를 굶었는데도 글 읽는 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한다.
♣ 상성[商聲]오음(五音) 가운데 하나인 상(商) 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로, 슬프고 처량하며 애원하는 듯한 소리를 말한다. 사시(四時)로는 가을에 속하고 방위(方位)로는 서방에 속하는 소리이다.
♣ 상성안[尙成安]성안은 상진(尙震)의 시호(諡號)이다.
♣ 상소[緗素]서권(書卷)을 말함. 옛사람의 사본(寫本)은 겸소(縑素)를 많이 쓰는데 물들여 천황색(淺黃色)을 이룬 것을 상소라 칭함.
♣ 상송금석향[商頌金石響]상송은 시경(詩經)의 편명. 공자 제자인 원헌(原憲)은 가난하여 3일 동안 굶었는데도 상송을 읽는 소리가 금석처럼 울렸다 한다.
♣ 상수[象數]좌전(左傳) 희공(僖公) 15년의 “귀(龜)는 상(象)이요, 서(筮)는 수(數)이다. 물(物) 이후에 상(象)이 있고, 상 이후에 자(滋)가 있고, 자 이후에 수(數)가 있게 된다.”라는 말에서 기인한 것으로, 즉 역(易)에 나타나는 상과 수를 말한다. 상(象)은 천(天), 일(日), 산(山), 택(澤)과 같은 종류를 말하고, 수(數)는 초(初), 상(上), 구(九), 육(六)과 같은 것을 말하는데, 송(宋) 나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서 상수학이 집대성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상수[上首]상수(上首)는 우두머리.
♣ 상수[湘水]중국 호남성(湖南省)의 가장 큰 강. 하류에서 소수(瀟水)와 합류하여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가는 강으로 소상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초(楚)의 굴원(屈原)이 이를 건너며 원망하였고, 한(漢)의 가의(賈誼)도 이를 건너며 굴원을 조상했다.
♣ 상수[向戍]상수는 춘추(春秋) 시대 송(宋)의 대부(大夫)로 일찍이 진(晉)ㆍ초(楚)가 패(霸)를 다툴 때에 그가 전쟁을 중지할 것을 제후(諸侯)들에게 통고하여 제후들이 그의 말을 따름으로써 천하를 안정시켰던 사람이다.
♣ 상수역[湘水驛]경기도 적성현에 있던 객관.
♣ 상수지주해옥충[桑樹之籌海屋充]세 사람의 노인들이 서로 만났는데, 나이를 물으니 한 노인이, “나는 바다가 뽕나무밭으로 변할 때마다 산가지 한 개씩을 내려놓았는데, 그 사이에 벌써 이 산가지가 열 칸짜리 집을 가득 채웠답니다.” 하였다 한다.
♣ 상숙[桑宿]어떤 것에 대해 연연해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수행하는 중이 뽕나무 아래에서 쉬되 한 나무 아래에서는 세 번 이상을 쉬지 않고 자리를 옮기는데, 이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면 연연해하는 마음이 생길까 염려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後漢書 卷30下 襄楷列傳》
♣ 상숙미증[桑宿未曾]불자(佛者)는 은애(恩愛)의 정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뽕나무 밑에서 사흘 밤을 계속 자지 않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襄楷傳》
♣ 상슬[湘瑟]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상령으로 하여금 비파를 타게 한다[使湘靈鼓瑟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상령이란 바로 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어했을 때 소상강(瀟湘江)에 투신 자살한 순비(舜妃)의 영혼이라고 한다.
♣ 상승[上乘]도가(道家)의 용어로서 최상의 교법(敎法)인 제일동진(第一洞眞)을 말함.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의하면, 제일동진이 상승이고, 제이동현(第二洞玄)이 중승(中乘)이고, 제삼동신(第三洞神)이 하승(下乘)이라고 하였다.
♣ 상승선[上乘禪]불교의 용어로, 일체의 번뇌(煩惱)를 버리고 진리(眞理)를 깨달음을 말한다.
♣ 상승체악부[相承棣萼跗]서로 떠받는 상체(常棣)의 꽃받침. 상체는 아가위나무. 이는 곧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상시이소[相視而笑]자사(子社)ㆍ자여(子輿)ㆍ자리(子犛)ㆍ자래(子來) 네 사람이 생사(生死)를 초월한 친구를 서로 찾다가, 서로 보고는 웃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자 마침내 친구가 되었다[四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는 이야기가 장자(莊子) 대종사에 나온다.
♣ 상식[尙食]옛날 임금의 식사를 맡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 상심영대동[傷心詠大東]백성들이 모두 식량이 떨어졌다는 뜻. 시경(詩經) 소아 대동(大東)에 “소동과 대동에 모든 그릇 다 비었네.[小東大東 杼柚其空]" 하였는데, 이는 동쪽의 작은 나라나 큰 나라에 모두 양식이 떨어진 것을 읊은 것이다.
♣ 상아[孀娥]달속에 있다는 선녀의 이름으로, 즉 달을 뜻한다.
♣ 상아[桑鵝]상아는 뽕나무 위에 생기는 버섯을 말한다.
♣ 상아탑[象牙塔]학자나 예술가가 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색하고 연구하는 곳. 코끼리는 죽을 때 자기들만 아는 비밀스런 장소로 가서 죽어 아름다운 상아의 탑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상아탑은 이 사회와는 조금 떨어져 진리 탐구에만 힘쓰는 대학(大學)의 특성을 지적한 표현이다. 즉, 상아탑은 자유로운 진리탐구를 추구하는 대학(또는 대학의 연구실)을 상징하는 말이다.
♣ 상아회[喪我懷]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내용으로, 남곽자기(南郭子綦)가 멍하게 앉아 있자, 안성자유(顔成子游)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남곽자기가 “지금 내가 나 자신을 잃고 있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하였다.
♣ 상악[象樂]주 무왕(周武王)이 문왕(文王)의 무공(武功)을 상징하여 지은 악무(樂舞)를 말하는데, 이 악무에는 살벌한 격자(擊刺)의 법칙이 있으므로, 가을 소리에 비유한다.
♣ 상안[商顔]상산(商山)의 꼭대기. 진(秦) 나라 말기에 은사(隱士)인 상산사호(商山四皓)가 있던 곳으로, 지금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남쪽에 있다.
♣ 상안[商顔]상산사호(商山四皓)와 같은 얼굴빛이라는 뜻으로, 노인의 안색을 높여 부른 말이다.
♣ 상안사인[商顔四人]상안은 상산(商山)의 남쪽이라는 뜻이며 네 분이란 곧 상산 사호(商山四皓)인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를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은자(隱者)로서 한 혜제(漢惠帝)가 태자로 있을 때 그의 부름을 받고 와서 태자를 보필했었다. 《漢書 張良傳》
♣ 상앙[商鞅]전국 시대, 진나라의 명재상. 제자 백가(諸子白家)의 한 사람. 별명은 공손앙(公孫鞅). 상군(商君).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 일찍이 형명학(刑名學)을 공부하고 진나라 효공(孝公)을 섬김. 법치주의(法治主義)에 입각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단행하여 진나라의 국세(國勢)를 신장시킴. 효공이 죽자 그간 반감이 쌓인 귀족들의 참소(讒訴)로 사형 당함.
♣ 상양[相羊]떠돌다. 머뭇거리다. 배회하다.
♣ 상양[商羊]큰 비가 올 무렵이면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춤을 춘다는 전설상의 새 이름이다. 전하여 홍수(洪水)나 수재(水災)의 예보의 뜻으로도 쓰인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변정(辯政)에 “天將大雨 商羊鼓舞"라 하였음.
♣ 상양무[商羊舞]상양은 전설상의 새 이름인데, 이 새가 춤을 추면 큰 비가 내린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상업[相業]상업은 정승으로 이룬 업적을 뜻한다.
♣ 상여[象輿]신상(코끼리)의 수레.
♣ 상여[相如]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전국(戰國) 때의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하여 스스로 상여(相如)라고 이름을 지었다. 장경(長卿)은 사마상여의 자(字)이다.
♣ 상여간도귀[相如間道歸]사기(史記) 인상여열전(藺相如列傳)에 “相如乃使其從者 衣褐懷其璧 從間道亡 歸璧于趙"라 하였음.
♣ 상여갈[相如渴]한 나라 때 효문원(孝文園)의 영(令)을 지낸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항상 소갈병을 앓았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 상여굴진[相如屈秦]전국 시대 때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초(楚) 나라의 화씨벽(和氏璧)을 얻었는데, 진(秦) 나라 소왕(昭王)이 이를 빼앗고자 하여 거짓으로 15개의 성(城)과 바꾸자고 하였다. 조 나라에서는 화씨벽만 빼앗기고 성은 얻지 못할까 염려하여 진 나라에 사신으로 갈 사람을 구하였는데, 인상여(藺相如)가 가게 되었다. 인상여는 “진 나라에서 성을 주면 화씨벽을 진 나라에 줄 것이고, 성을 주지 않으면 화씨벽을 손상 없이 가지고 오겠다.” 하고는 진 나라로 갔는데, 소왕이 화씨벽만 빼앗고 성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상여는 화씨벽에 흠집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서 화씨벽을 손에 잡고 말하기를, “대왕이 성을 주지 않고 화씨벽을 빼앗으려고 하면 옥을 깨뜨려 버리겠다.” 하면서, 소왕에게 5일 동안을 재계(齋戒)하고서 받으라고 하였다. 소왕이 재계하는 사이에 인상여는 사람을 시켜서 몰래 화씨벽을 조 나라로 돌려보냈다. 소왕이 재계를 마친 뒤 화씨벽을 달라고 하자, 인상여는 “화씨벽은 이미 조 나라로 보냈다. 진 나라에서 먼저 15개의 성을 주면 조 나라에서 화씨벽을 당장 돌려보낼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인상여는 무사히 조 나라로 돌아왔으며, 진 나라에서는 화씨벽과 성을 바꾸지 않았다. 《史記 卷81 藺相如列傳》
♣ 상여권유[相如倦遊]한(漢) 나라의 문인(文人), 사마상여(司馬相如). 그의 전기(傳記)에, “노는 데 지쳤다[倦遊].”는 말이 있다.
♣ 상여벽립[相如壁立]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임공(臨邛) 고을의 갑부인 탁왕손(卓王孫)의 딸 문군(文君)과 야합하여 함께 성도(成都)로 도망가서 살 때 매우 가난하여 살림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다. 《史記 卷一百七十七 司馬相如傳》
♣ 상여소[相如痟]상여(相如)의 소갈증이란 곧 한(漢) 나라 때 문장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지병인 소갈증을 말한다.
♣ 상여유사벽[相如猶四壁]상여는 사마상여(司馬相如)이다. 사기(史記)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 “탁왕손(卓王孫)이 딸 탁문군(卓文君)이 밤에 상여에게 도망해서 같이 집에 돌아가니 네 벽만 있었다.”는 말이 있다.
♣ 상여재[相如才]한무제(漢武帝)의 진황후(陳皇后)가 소박을 당하여 장문궁(長門宮)에 물러가 있었는데, 무제가 부(賦)를 좋아하므로, 황후가 부(賦) 잘 짓는 사마상여에게 천금(千金)의 폐백을 보내어, 자기를 위하여 부(賦)를 한 편 지어 주기를 청하니, 사마상여가 장문부(長門賦)를 지어서 황후의 고독하고 처량함과 임을 사모하는 정을 잘 표현하였다.
♣ 상여재부객[相如纔賦客]한(漢) 나라 때 문호(文豪)인 사마상여는 특히 사부(辭賦)에 뛰어나, 자허부(子虛賦)ㆍ상림부(上林賦)ㆍ대인부(大人賦) 등의 명문(名文)을 남겼다.
♣ 상여촉도유[相如蜀道遊]촉(蜀) 땅 성도(成都) 출신인 한(漢) 나라의 천재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산천을 많이 유람하였다 한다.
♣ 상여피염파[相如避廉頗]전국(戰國) 때 조(趙) 나라의 신하 상여가 진(秦) 나라에 외교로 공을 세우고 돌아와 중상(重賞)과 높은 벼슬을 얻으니, 당시의 명장(名將)인 염파가 불평하여 상여를 만나기만 하면 욕뵈리라 하니, 상여가 늘 피하였다. 하루는 길에서 멀리 염파가 오는 것을 보고 수레를 돌려 피해 숨었다. 부하가 그를 비겁하다 말하니 그가 대답하되, “아니다, 내가 진왕(秦王)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찌 염파를 겁내랴마는, 이제 조나라의 두 인물이 서로 싸우면 나라의 일은 누가 어찌 감당하겠느냐. 내가 염파를 피하는 것은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돌리고 국가의 급한 것을 먼저 함이로써이다.” 하니 파가 듣고 감복하여 가시매체[莉]를 지고 가 사과하고 죽음을 바치는 친교(親交)가 되었다.
♣ 상여함궐계[相如銜橛戒]임금에게 사냥을 간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의 문호 (文豪) 사마상여는 사냥을 좋아하는 무제(武帝)에게 부(賦)를 지어 간했는데, 여기에 “길을 깨끗이 소제한 다음 행하고, 법에 알맞게 말을 몬다 하더라도 때로는 함궐(銜橛)의 변이 있다.” 하였다. 함(銜)은 말의 고삐이며 궐(橛)은 말의 입에 물린 재갈로, 수레나 말이 달리다가 전복할 위험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 상역[象譯]예기(禮記) 왕제에 “남방은 상(象)이라 하고 북방은 역(譯)이라 한다.” 하였는데, 다 외국의 언어를 통역하는 사람들이다.
♣ 상영산뢰[顙映山罍]제사지낼 적에 임금의 이마가 술잔에 비침을 뜻함. 산뢰(山罍)는 산운(山雲)의 모양을 새긴 하후씨(夏后氏)의 술그릇이다.
♣ 상오[湘吳]상오는 곧 미주(美酒)의 이름인 상오주(湘吳酒)의 약칭인데, 상천(湘川)의 영릉현(酃陵縣)에는 물이 좋아 술을 빚기로 유명하고 오흥(吳興)의 오정현(烏程縣)에는 약하주(若下酒)가 유명하므로, 상천(湘川)의 상(湘) 자와 오흥(吳興)의 오(吳) 자를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謝惠連 雪賦注》
♣ 상용[商容]은(殷) 나라 주왕(紂王) 때 사람. 주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쫓겨났는데 무왕(武王)이 은을 정벌한 후 그의 여리(閭里)에다 정표(旌表)를 하였음. 《書經 武成》
♣ 상우[尙友]상우는 거슬러 올라가 옛 어진이를 벗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만장하(萬章下)에 “그의 시를 외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세상을 논한다. 이것이 상우(尙友)이다.” 하였다.
♣ 상우[商羽]상조(商調) 우조(羽調). 상조는 오음(五音) 가운데 하나인 상(商)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로 슬프고 처량하며 애원하는 듯한 소리를 말하며, 우조는 맑은 소리를 말한다.
♣ 상우경[相牛經]소를 품별하는 법을 쓴 책.
♣ 상웅담[嘗熊膽]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는 뜻이다. 당서(唐書) 유중영전(柳仲郢傳)에 “어머니 한씨(韓氏)가 중영 등 여러 아들들에게 웅담환(熊膽丸)을 만들어 주어 밤에 씹으면서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하였다.” 하였다.
♣ 상원[上元]1월 15일, 즉 정월 보름. 또는, 정월 대보름에 실시하던 연등 행사를 말한다.
♣ 상원[上苑]대궐 안에 있는 동산을 이르는 말.
♣ 상원[上元]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선녀(仙女) 상원부인(上元夫人)을 가리키는데, 또는 사람의 뇌(腦)를 말하기도 한다.
♣ 상원[上苑]왕이 풍경을 관상하고 사냥을 즐기는 동산으로, 곧 춘당대가 있는 창경궁(昌慶宮)주변의 비원(祕苑)을 가리킨다.
♣ 상원[上園]임금의 동산인 장안(長安)의 상림원(上林園)을 말한다.
♣ 상원일[上元日]음력 정월 15일을 말하는데, 금오(金吾)에게 분부하여 밤에 통행금지를 풀게 하고 전후(前後) 각 1일에 걸쳐 관등(觀燈)놀이를 하게 하였다.
♣ 상원충엽자[上苑蟲葉字]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를 모함하기 위하여 희빈(熙嬪) 홍씨(洪氏)를 이용해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해 무고한 일을 말한다.
♣ 상월[霜月]서리 속에 뜬 달. 가을 달 또는 겨울철 추운 밤의 달을 가리키는 시어이다.
♣ 상위[象緯]상위는 일(日)ㆍ월(月)ㆍ오성(五星)을 말한 것이다. 오성은 금성(金星)ㆍ목성(木星)ㆍ수성(水星)ㆍ화성(火星)ㆍ토성(土星)이다.
♣ 상유[桑楡]서쪽 해지는 곳으로 노년(老年)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태종기(太宗紀)에 “몸이 점점 쇠하여지는 것을 보니, 상유가 가까워지는구나.” 하였다.
♣ 상유[桑楡]서쪽으로 해가 기울 때면 뽕나무와 느릅나무 가지 끝에 걸린다는 회남자(淮南子)의 기사에서 유래하여 인생의 만년(晩年)을 뜻하는 표현이다.
♣ 상유일[桑楡日]인생의 말년이 된 것을 말한다. 상유는 해가 질 때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의 꼭대기에 비치는 것으로, 태평어람(太平御覽) 제3권에, “해가 서산으로 떨어질 때 햇빛이 나무의 꼭대기에 비치는 것을 상유라고 한다.” 하였다.
♣ 상음[商音]오음(五音)의 하나. 오음은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 상음은 굳세고 맑은 음으로 사시(四時)로는 가을, 오행(五行)으로는 금(金), 방위로는 서쪽에 해당한다.
♣ 상의[尙衣]임금의 의대(衣帶)를 진공(進供)하고 대궐 안의 재물과 보물을 맡아 관리하던 관아. 상의원(尙衣院).
♣ 상의허성[床蟻虛聲]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귀를 앓을 적에 와상(臥狀) 밑에서 개미 움직이는 소리가 소 싸우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는 고사이다. 《晉書 卷八十四 殷仲堪傳》
♣ 상이하정[商彝夏鼎]이(彝)와 정(鼎)은 모두 종묘(宗廟)에서 쓰는 제기(祭器)들로서 즉 하상(夏商) 시대의 국가 보물을 가리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이를 현자(賢者)에 비유한 것이다.
♣ 상인[上人]상인은 승인(僧人)의 존칭임.
♣ 상인중성인[上人中聖人]상인은 불가에서 지덕을 갖춘 사람이고 성인은 맑은 술을 칭한다. 위지(魏志)에 “조정에서 술을 금하는데 서막(徐邈)이 몰래 취해 가지고는 ‘이는 성인에 일치한다.’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이 말을 듣고 성내자 선우보(鮮于輔)가 ‘취객이 술에 대해 맑은 것을 성인이라 하고 탁한 것을 현인(賢人)이라 한다.’ 하였다.”
♣ 상일절진도[喪一絶塵途]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천하에 제일가는 말은 자질이 뛰어나서 제몸 자체도 잊어버리고, 또 달릴 때는 질풍과 같이 빨라서 가는 길에 먼지도 나지 않는다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상일(喪一)의 일(一)은 몸[身]을 뜻한다.
♣ 상잉[相仍]끊이지 않다.
♣ 상자[相者]회동(會同)같은 것의 예식(禮式)을 행할 때 주인을 돕는 사람. 또는 관상쟁이, 상인(相人).
♣ 상자[向子]상자는 후한 때의 고사(高士)로서 자가 자평(子平)인 상장(向長)을 이르는데, 그는 자녀들의 혼인을 다 마치고 나서는 오악(五嶽) 등의 명산에 두루 다니며 놀았고, 그의 죽은 곳도 모른다고 한다.《後漢書 卷八十三》 혜강(嵇康) 고사전(高士傳)에 “상장(尙長)의 자는 자평(子平)인데 하내(河內) 사람으로 숨어살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자녀(子女)의 혼사가 끝나자 집일도 상관하지 않고 유람으로 일삼았다.” 하였다.
♣ 상자평[向子平]자평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의 자(字)이다. 자제들을 모두 시집 장가 보내고 나서 “이제는 내가 죽은 것처럼 생각하고 절대로 상관하지 말라.[勿復相關 當如我死矣]”하고는 뜻이 맞는 벗들과 오악(五岳) 명산을 유람하며 종적을 감춘 고사가 있다.《後漢書 逸民傳》 혜강고사전(嵆康高士傳)에 “상장은 하내 사람이니 숨어살았으며 자녀(子女)의 가취(嫁娶)가 끝나자 산천유람에 나섰다.” 하였다.
♣ 상장[相將]상장은 서로 전송한다는 말이다.
♣ 상재[桑梓]뽕나무와 재나무로 본래 공경하여야 할 물건을 말했으나 뒤에는 향리(鄕里)에 대한 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변(小弁)에 “뽕나무와 재나무를 반드시 공경하여야 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하였는데, 이는 부모가 생전에 누에치고 재목으로 쓰는 이 나무들을 담 아래에 심어 자손에게 남겨주어 생계(生計)의 자료가 되게 하였으므로, 자손들이 부모의 유물인 그 나무에 경의(敬意)를 붙였었다. 전(轉)하여 부모의 유업(遺業)이 있는 고향을 칭하게 되었다.
♣ 상재감[桑梓感]상재의 감회. 고향의 어버이 생각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반(小弁)에 “뽕나무며 가래나무, 그저 공경스러워라. 보이나니 아버님, 그리나니 어머님.[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이라는 구절이 있다.
♣ 상재도[桑梓圖]고향을 그린 것. 상재는 뽕나무와 노나무로 고향에 대한 대명사로 쓴다. 시경(詩經) 소아 소변(小弁)에 “뽕나무와 노나무를 반드시 공경해야 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 하였는데, 이는 옛날 집 주위에 이들 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물려줬으므로, 부모가 심어 놓으신 것이니, 공경해야 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온 것이다.
♣ 상재유[象載瑜]일명 적안가(赤雁歌)라고도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태시(太始) 3년에 동해(東海)에 행행하여 붉은 기러기 여섯 마리를 얻고 이 노래를 지었다 한다. 그리고 상재유(象載瑜)란 곧 코끼리 수레가 아름답다는 뜻으로, 이것 또한 서방(西方)에서 얻었다 한다
♣ 상저망국[象箸亡國]상아로 만든 젓가락. 사치를 상징한 것으로, 주(紂)가 상저를 쓰자 기자(箕子)는, “그가 지금 상저를 쓰고 있으니 틀림없이 옥배(玉盃)도 만들 것이다.” 하고 그의 망국적 사치성을 통탄하였음. 《史記 殷本紀》
♣ 상적광[常寂光]부처[佛]의 경계(境界)를 상적광토(常寂光土)라 하는데, 항상 고요하며 광명이 가득 찬 세계라는 뜻이다.
♣ 상전배[床前拜]상하(床下)의 인사. 덕이 높은 은자(隱者)에게 절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매번 방덕공(龐德公)을 찾아가서 상하(床下)에서 절을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尙友錄 1》
♣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됨. 세상의 변화가 심하거나 덧없음. 마고(麻姑)라는 선녀(仙女)가 왕원(王遠)에게 “그대를 만나 본 이후로 동해 바다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다. 《神仙傳 王遠傳》
♣ 상전변[桑田變]옛날 신선인 마고(麻姑)는 동해(東海)가 세 번이나 뽕나무밭으로 변한 것을 보았다고 한다. 《神仙傳 麻姑》
♣ 상점눈한[湘簟嫩寒]상(湘)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지방을 말하는 것이니, 그곳에 대[竹]가 많이 생산되고 그 대로 고운 자리를 만들어 내는데, 여름에 그것을 깔면 매우 시원하지만 가을이 되면 도리어 차져서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 상정[上丁]봄가을로 중월(仲月)의 첫 정일(丁日)에 공자(孔子)를 향사하는 제사, 즉 석전(釋奠)을 이른 말이다.
♣ 상정[觴政]주연(酒宴)의 흥을 더하기 위하여 마련한 음주(飮酒)의 규칙(規則)을 말하는데, 상령(觴令) 또는 주령(酒令)이라고도 한다.
♣ 상제[霜蹄]준마(駿馬). 곧 준마를 타고 다니는 조신(朝臣)들을 가리키는 말.
♣ 상제선[象帝先]도(道)는 천지가 아직 출현(出現)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말한 것이다. 노자(老子) 무원(無源)에 “나는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천제보다 앞서 존재한 것인 듯하다[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하였다.
♣ 상조[霜槽]서리 덮인 구유.
♣ 상조[商調]오음(五音) 가운데 하나인 상(商) 음을 위주로 하는 소리로, 슬프고 처량하며 애원하는 듯한 소리를 말한다. 오음(五音)은 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이다.
♣ 상종[商宗]상(商) 나라 고종(高宗)을 말한다.
♣ 상주[桑洲]상주는 해 뜨는 부상(扶桑)의 섬이라는 뜻으로, 동해 바다 속의 십주(十洲), 즉 신산(神山)을 가리킨다.
♣ 상주[相州]후위(後魏) 때 설치한 하남성(河南省)의 한 고을
♣ 상주[霜麈]흰색 주미. 고라니의 꼬리는 먼지가 잘 떨린다 하여 그 꼬리털로 만든 먼지떨이를 청담(淸談)하던 사람들이 많이 가졌었는데, 뒤에는 불도(佛徒)들도 많이 가지고 다녔다.
♣ 상주상각[商周相角]상탕(商湯)이 하(夏) 나라를 쳐서 천하를 차지한 일과 주 무왕(周武王)이 상 나라를 쳐서 천하를 차지한 일을 가리킨 말이다.
♣ 상주유치순[桑疇有雉馴]지방관의 선정을 비유한 말. 후한(後漢) 때 노공(魯恭)이 중모령(中牟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자, 뽕나무 밑에 길들은 꿩이 있는 상서가 있었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二十五》
♣ 상준[上尊]제일 좋은 술. 상준주(上尊酒).
♣ 상중금환[桑中金鐶]진(晉) 나라 때 양호(羊祜)가 5세 적에 유모(乳母)에게 자기가 가지고 놀던 금환(金鐶)을 내놓으라고 하므로, 유모가 애당초 그런 것이 없었다고 말하자, 양호가 이웃 이씨(李氏) 집에 있는 뽕나무 속을 더듬어 금환을 찾아내니, 그 주인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죽은 아이가 잃어 버린 물건이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씨 집 아이가 곧 양호의 전신(前身)이었다고 일컬었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어릴 때의 추억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 상중지희[桑中之喜]뽕나무 밭에서의 밀회, 음사(淫事), 간통(姦通). 예법(禮法)에 맞지 않는 남녀간의 결합, 혹은 남의 눈을 피해 즐기는 청춘 남녀간의 사랑놀이를 말한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굴무신(屈巫臣)이 정(鄭) 나라의 하희(夏姬)에게 뜻을 두고는, 바야흐로 출정(出征)을 할 때 가산(家産)을 모두 수습하여 가지고 가자, 대부(大夫) 신숙궤(申叔跪)가 “이상하도다. 그대는 삼군 출동과 관련된 두려운 임무를 맡고 있는 터에, 또 뽕나무밭에서 여자와 밀회하는 기쁨을 맛보려 하고 있구나.[異哉 夫子有三軍之懼 而又有桑中之喜]”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左傳 成公 2年》
♣ 상중환[桑中鐶]진(晋)나라 양호(羊祜)가 5세 때 유모를 시켜 옆 이씨집 담 구멍에서 전생에 가지고 놀던 금환(金環)을 가져오게 했다는 고사.
♣ 상지[商芝]상산사호(商山四皓)가 지어 불렀다는 자지가(紫芝歌). 또는 그 노래 속에 나오는 버섯. 진시황(秦始皇)의 학정(虐政)을 피해 남전산(藍田山)에 숨어살면서 그들이 불렀다는 이른바 ‘자지가(紫芝歌)’에 “색깔도 찬란한 보랏빛 버섯이여, 배고픈 사람에겐 그만이라오.[曄曄紫芝 可以療飢]”라는 구절이 있다.
♣ 상지[傷指]춘추(春秋) 시대에 진(晉) 나라의 범선자(范宣子)가 여덟 살 때 후원(後園)에서 채소를 뜯다가 잘못 손을 다치고 크게 울기에, 곁에 있던 사람이 “아파서 우느냐?”고 묻자, 범선자가 대답하기를, “아파서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감히 훼손할 수 없기에 운다.” 하였다.
♣ 상지수[上池水]상지수는 대[竹] 잎의 이슬을 말하는데, 장상군(長桑君)이 편작에게 약을 주면서 상지수로 먹게 하자 편작이 그 약을 30일 동안 먹고 나서 의술을 통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 상지수[上池水]좋은 약을 가리키는 말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 나뭇잎에 붙어 있는 이슬을 말한다. 사기(史記) 편작전(扁鵲傳)에 “신선이 편작에게 약을 내어 주면서, 이것을 상지수에 타서 먹으라" 하였는데, 그 주에 “상지수는 이슬과 대나무 위에 맺혀 있는 물이다.”라고 하였다.
♣ 상지수[上池水]한(漢) 나라 때의 명의(名醫)인 창공(倉公) 순우의(淳于意)가 꿈에 봉래산(蓬萊山)에서 노닐다가 금빛이 찬란한 높은 궁실(宮室)을 만났는데, 갑자기 한 동자(童子)가 일배수(一杯水)를 갖다 주므로 창공이 그것을 다 마시고 나니 오장(五臟)이 서늘하였다. 인하여 그 궁전을 쳐다보니 ‘상지선관(上池仙館)’이라 쓰여 있으므로, 그제야 자기가 상지수를 마셨음을 알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그가 진맥(診脈)에 신통력을 얻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상지회[上之回]한 무제(漢武帝) 14년에 흉노(匈奴)가 소관(蕭關)에 들어와 기병(騎兵)을 시켜 회중(回中)의 궁전(宮殿)을 불태웠는데, 뒤에 무제가 흉노를 평정하고는 자주 회중의 길을 통하여 북쪽으로 소관에 나가 노닐었던 일을 찬미한 노래이다
♣ 상참[常參]당(唐) 나라 때 문관(文官) 5품(品) 이상과 문하성(文下省)ㆍ중서성(中書省)의 공봉관(供奉官)ㆍ감찰어사ㆍ원외랑(員外郞)ㆍ태상박사(太常博土)는 매일 편전(便殿)에서 임금께 뵙고 국무(國務)를 아뢰었는데, 이를 상참이라 하고 이에 참여하는 이들을 상참관(常叅官)이라 했음.
♣ 상채[上蔡]상채는 송(宋) 나라 정자(程子)의 제자 사양좌(謝良佐)를 말함. 사양좌가 처음에 거업(擧業)을 익혀 그로 인하여 이름이 크게 났는데 어느 날 정호(程顥)로부터 “너희들이 이곳에서 나를 따르면서 오직 나의 말만을 배우고 있기 때문에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하는 학문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떠나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는 책망을 받았다. 《宋元學案 卷二十四 上蔡學案》
♣ 상채승상동시곡[上蔡丞相東市哭]진(秦) 나라 이사(李斯)가 사형장으로 끌려나간 때를 가리킨다. 사형을 받기 직전에 이사가 그의 아들을 돌아보며 “사냥개와 매를 몰고 상채(上蔡)의 동문을 나가 토끼 사냥을 하고 싶어도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李斯傳》
♣ 상채응[上蔡鷹]상채의 매사냥은, 초(楚)나라 이사(李斯)가 진(秦)나라 승상(丞相)이 되었다가 화를 당하여, 부자가 함께 함양(咸陽) 저자 거리에서 사형을 당하면서 아들을 보고 통곡하기를, “너와 내가 고향인 상채(上蔡)에서 매[鷹]와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하던 것이 그립다.” 하였다.
♣ 상천[霜天]서리 내리는 하늘. 늦가을의 추운 날씨를 뜻한다.
♣ 상천함[上天咸]하늘에 오르는 무함. 황제(黃帝) 때(혹설에는 은(殷) 중종(中宗) 때) 신무(神巫). 그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르내렸다 한다.
♣ 상청[上淸]도가(道家) 삼청(三淸)의 하나. 삼청은 상청ㆍ옥청(玉淸)ㆍ태청(太淸). 운급칠첨(雲笈七籤)에 “상청의 하늘은 끊어진 노을 밖에 있는데 팔황노군(八皇老君)이 있어 구천(九天)의 선(仙)을 운용(運用)하며 상청의 궁(宮)에 거처한다.” 하였다.
♣ 상체[喪遞]벼슬아치가 부모상(父母喪)을 당해 관직에서 갈리는 일.
♣ 상체[常棣]상체는 아가위로서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주공(周公)이 지은 형제들과 연회에서 즐기는 악가(樂歌)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아가위꽃 활짝 피니 꼭지까지 광채 있네. 요새 보통 사람 중에 형제보다 친함 없어[常棣之華 鄂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라고 하였다. 이는 곧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상체화[常棣華]아가위꽃.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의 “아가위꽃 그 꽃송이 울긋불긋 아름답네 오늘의 모든 사람 중에 형제보다 좋은 건 없네[常棣之華 卾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에서 나온 것으로, 우애 있는 형제를 가리킨다. 그것은 그 꽃이 한데 다닥다닥 붙어 있는 까닭이다.
♣ 상치[尙齒]백거이가 만든 것으로, 즉 노인(老人)들을 모아 나이 차례로 앉히고 연회를 베풀어 즐겁게 놀도록 하던 모임이다.
♣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깨끗하지 못함. 곧 윗사람이 바르지 않으면 아랫사람도 이를 본받아 행실이 바르지 않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 상태[上台]삼정승(三政丞)을 하늘의 삼태성(三台星)에 비유하여 삼태라고 하는데 상태는 영상(領相)을 가리킨 말이다. 《晉書 天文志》
♣ 상토선음우[桑土先陰雨]위험스런 사태를 미연에 방비한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에, “하늘이 비 내리지 않을 적에, 저 뽕나무 뿌리를 주워다가, 틈과 구멍 튼튼히 얽어매라.[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하였다
♣ 상파[上坡]당(唐) 나라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옮겨지는 것을 ‘비탈길을 오른다.[上坡]’고 표현했던 고사가 있다. 《石林燕語 卷5》
♣ 상평[尙平]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였던 상장(尙長)의 자. 그의 자는 원래 자평(子平)이었는데, 줄여서 평(平)으로 한 것이며, 성의 상(尙) 자는 상(向)으로 쓰기도 한다. 그는 벼슬하지 않고 은둔하였으며 손괘(損卦)와 익괘(益卦)를 읽고는 “나는, 이미 부가 가난만 못하고 천한 것이 귀한 것만 못한 것을 알았지만 다만 죽는 것이 사는 것과 어떤지를 모른다.” 하였다.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는 중국의 명산들을 유람하였는데 죽은 곳을 모른다. 《後漢書 卷八十三 向長傳》
♣ 상평법[常平法]조선조 초기에 상평청(常平廳)ㆍ상평창(常平倉) 등을 두고 물가 조절을 관장하게 하던 법. 뒤에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됨에 따라 선혜청(宣惠廳)이 창설되고 상평청은 진휼청(賑恤廳)과 함께 선혜청으로 통합되었음.
♣ 상평염법[常平鹽法]상평염법은 당(唐) 나라 때 유안이 염철사(鹽鐵使)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하여 제정한 염법으로, 소금이 적은 지방에 한하여 일정한 소금을 관고(官庫)에 저장해 두었다가 소금이 귀할 때에 이를 싼 값으로 백성들에게 매출(賣出)하도록 했던 것이다. 《唐書 卷一百四十九》
♣ 상평혼가[尙平婚嫁]상평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로 자가 자평(子平)인 상장(尙長)을 말하는데, 상장은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에 정통하였고, 늙어서 자녀들의 남혼 여가를 마치고 나서는 집안 일을 전혀 관여하지 않고 오악(五嶽)의 명산들을 두루 유람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八十四》
♣ 상포[觴蒲]단오에 창포(菖蒲)를 자르거나 가루로 만들어서 술에 띄워 마신다는 말이 있다. 《歲時記》
♣ 상포[湘浦]상포는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쫓겨나 거닐다가 뛰어들어 자결했다는 소상강(瀟湘江)을 말한다.
♣ 상포객[湘浦客]상포(湘浦) 즉 상수(湘水)에 몸을 던져 죽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 상풍[商風]궁(宮)ㆍ상(商)ㆍ각(角)ㆍ치(徵)ㆍ우(羽) 오성(五聲) 중에 상성(商聲)은 금성(金聲)에 해당하며, 금(金)은 또한 서방(西方)으로서 가을에 해당하므로 가을의 서풍을 가리킨다.
♣ 상풍고절[霜風高節]고된 서리와 바람을 맞아도 꺾이지 않는 높은 절개. 고난에 처하여도 굽히지 않는 높은 절개
♣ 상하[桑下]불사(佛寺)를 가리킨다. ‘승려는 애착을 끊기 위해 비록 뽕나무 아래라 할지라도 사흘을 묵지 않는다.[浮屠不三宿桑下]’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後漢書 襄楷傳》
♣ 상하[桑下]불편한 잠자리를 말한다. 이는 원래 불가의 말로, 뽕나무 아래서도 3일 밤을 자지 않는다는 말에 근본한 것인데, 이는 대개 뽕나무 아래서라도 3일 밤을 자게 되면 애착(愛着)이 생기므로 이 애착을 버리라는 데서 나온 것이다.
♣ 상하극[上下屐]진(晉) 나라 사령운(謝靈運)이 등산(登山)을 좋아하였다. 등산할 때에 나무신[屐]을 신고 산에 올라갈 때에는 나무신의 앞 굽을 떼고, 내려올 때에는 뒷굽을 떼었다.
♣ 상하련[桑下戀]사찰에 계속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원래 사문(沙門)은 뽕나무 아래 그늘에서 3일 이상 계속 머물러 공양을 받을 수 없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後漢書 卷60 下 襄楷傳》
♣ 상하상여삼숙련[桑下尙餘三宿戀]잠시 동안의 인연에도 연연해한다는 뜻이다. 수행하는 중이 뽕나무 아래에서 쉬되 한 나무 아래에서는 3일 이상을 쉬지 않고 자리를 옮기는데, 이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연연해하는 마음이 생길까 염려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後漢書 卷30下 襄楷列傳》
♣ 상하숙[桑下宿]어떤 것에 대해 연연해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수행하는 중이 뽕나무 아래에서 쉬되 한 나무 아래에서는 3일 이상을 쉬지 않고 자리를 옮기는데, 이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연연해하는 마음이 생길까 염려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後漢書 卷30下 襄楷列傳》
♣ 상하연[桑下緣]불자(佛者)는 은애(恩愛)의 정이 생길까 염려하여 뽕나무 밑에서 3일 밤을 계속 묵지 않는다는 데서 온 말이다.
♣ 상하중래[桑下重來]옛말에, “중[浮屠]은 한 뽕나무 밑에서 세 번 다시 자지 않는다.” 한다. 그것은 정이 들어 애착이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 상하탱석[上下撐石]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 곧 일이 몹시 꼬이는데 임시 변통으로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
♣ 상학경[相鶴經]송 신종(宋神宗) 원풍(元豊) 연간에 사맹(師孟)이란 사람이 당시의 유명한 도사(道士) 진경원(陳景元)에게서 상학경(相鶴經)을 얻었다. 상학경은 바로 선술(仙術)에 관한 책이다.
♣ 상학경[相鶴經]옛날 신선 부구공(浮丘公)이 왕자 진(王子晉)과 학을 타고 놀면서 그에게 가르쳤다는 책 이름. 《唐書 藝文志》
♣ 상한부녀[桑閒婦女]노는 계집을 말한다. 시경(詩經)의 상중편(桑中篇)은 남녀의 밀회(密會)를 읊은 것이며, 예기(禮記)에서 상간(桑間)은 음탕한 음악이라 하였다.
♣ 상한취장[相漢趣裝]한나라 초년에 조참(曹參)이란 사람이 지방에 태수로 있었는데, 중앙에서 소하라는 정승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곧 서울로 갈 준비를 명령하면서, “이제 내가 곧 들어가서 정승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황제의 부르는 명령이 내리고 들어가서 정승이 되었다.
♣ 상향[桑鄕]선대(先代)의 고향을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변(小弁)에,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보면, 반드시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하였는데, 그 주(註)에, “뽕나무와 가래나무는 부모께서 심으신 바라 반드시 공경하는 것이다.” 하였다.
♣ 상향[桑鄕]속세를 떠난 시골.
♣ 상현[上弦]상현달은 음력 7, 8일에 해당 한다.
♣ 상현[湘絃]초사(楚辭) 원유(遠遊)에 “상령이 비파를 탐하여, 해약과 풍이를 춤추게 하도다[湘靈鼓瑟兮 令海若舞馮夷].” 한 데서 온 말인데, 상령은 곧 상수(湘水)에 빠져 죽어 수신(水神)이 되었다는 아황(娥皇)ㆍ여영(女英)의 넋을 이른 말로, 여기서는 아주 훌륭한 시가(詩歌)를 비유한 것이다.
♣ 상호[桑弧]뽕나무 활로 쑥대 화살을 사방에 쏘는 것으로, 천하를 경략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고대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 상호[商皓]상산사호. 진(秦) 나라 때 산중에 숨어살던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등 네 노인. 《廣韻》
♣ 상호[霜毫]서리 내린 뒤의 짐승 가죽. 송서(宋書) 예지(禮志)에 보인다.
♣ 상호[桑扈]장자(莊子)에 나오는 자상호(子桑戶)와 같은 사람으로 접여와 같이 세상을 피해 살았다 한다.
♣ 상호결우[桑戶決疣]춘추 시대에 자상호ㆍ맹자반(孟子反)ㆍ자금장(子琴張) 세 사람은 매우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자상호가 죽자 그의 친구들이 노래를 불렀다. 이때 조문을 갔던 자공(子貢)이 그들에게 노래를 하는 것은 실례가 아니냐고 묻자, 그들이 자공에게 “그대가 예의 본뜻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공이 돌아와 공자에게 이 사실을 말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그들은 삶을 붙어 있는 혹으로 여기고, 죽는 것은 바로 그 혹을 터버리는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莊子 大宗師》
♣ 상호봉시[桑弧蓬矢]아들을 낳았음을 뜻함. 옛날에 아들을 낳으면 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 여섯 개로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을 향하여 한 개씩 쏘았던 데서 온 말인데, 그것은 곧 남아(男兒)가 사방에 웅비(雄飛)하기를 축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예기(禮記) 사의(射義) 편에, “남자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 6개 쑥대살 6개로 천지사방을 쏜다[男子生 桑弧六 蓬矢六 以射天地四方].”는 말이 있음.
♣ 상호지[桑弧志]큰 뜻을 품도록 다른 사람을 면려할 때 쓰는 말이다. 고대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화살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경략할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 상혼침침[湘魂沈沈]충신 굴원(屈原)이 상수(湘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억울한 혼이 잠겼다.
♣ 상홍양[桑弘羊]한(漢)나라 사람. 상홍양은 무제(武帝) 때의 치속도위(治粟都尉)로서 평준법(平準法)을 실시하여 천하의 염철(鹽鐵)을 물샐틈없이 통제함으로써 국용(國用)을 풍요하게 만들었음. 《史記 卷三十》
♣ 상화[賞花]꽃을 감상하다.
♣ 상화[桑火]뽕나무 불로, 화력이 강한 불을 말한다. 늙은 거북은 보통의 불로는 삶을 수가 없고 오직 뽕나무 불로만 삶을 수가 있다고 한다.
♣ 상화루견금문내[霜靴累趼金門內]아침 조회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리 가득한 신발을 신고 달려갔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새벽 조회 시간 기다리느라 신발에 서리가 가득한 벼슬살이보다는, 한여름 해가 높이 솟도록 늦잠을 자며 북창의 시원한 바람을 즐기는 것이 훨씬 낫지 않으랴.[五更待漏靴滿霜 不如三伏日高睡足北窓涼]”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4 薄薄酒》
♣ 상효[桑鴞]교화에 감화를 받아 지난날의 흉포함을 고치고 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효(鴞)는 올빼미로, 흉한 소리로 우는 새인데, 오디를 먹으면 좋은 소리를 낸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에, “이리저리 나는 저 올빼미, 저 반궁의 나무숲에 모였도다. 우리 뽕나무 오디를 먹고 좋은 소리로 날 회유하누나.[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黮 懷我好音]”하였다.
♣ 상효[上爻]주역의 박괘 상효. 다 없어지고 오직 하나 남은 최후의 보루라는 뜻. 모든 일의 막바지.
♣ 새마[塞馬]길흉화복이 수시로 변한다는 뜻인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변방 근처에 사는 노인의 말이 도망쳐서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위로하니, 그 노인이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몇 달 뒤에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 여러 마리를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자, 노인은 ‘이것이 화가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집에 좋은 말이 많아졌는데, 그의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여 말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지니,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1년 뒤에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하자 장정들이 모두 나가 싸워 변방 근처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죽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만은 다리가 부러진 관계로 부자가 모두 온전하게 살 수 있었다.” 하였다.
♣ 새북[塞北]중국의 북쪽 변방. 흔히 강남(江南)의 대칭으로 사용된다.
♣ 새상옹[塞上翁]길흉 화복이 수시로 변한다는 뜻인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에 나오는 노인. 회남자(淮南子)에 “새상(塞上)의 한 늙은이가 말을 잃었을 때 이웃 사람들이 위문하자, 말하기를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그 후 그 말이 호준마(胡駿馬)를 거느리고 돌아오매 사람들이 축하하자, 늙은이는 ‘이것이 화가 될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그의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상하매 사람들이 위문하자, 늙은이는 또 ‘복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했다. 1년 후에 징병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다리를 절어 출정하지 않아 목숨을 보전하였다.” 한다.
♣ 새서[璽書]새서는 중국 천자의 조칙을 말함.
♣ 새안불정하리침[塞雁不征河鯉沈]기러기와 잉어는 둘 다 편지를 전한다는 사자인데, 기러기는 한(漢) 나라 소무(蘇武)의 고사요, 잉어는, “객이 먼 곳에서 와 내게 잉어 한 쌍을 주기에, 삶으니 그 가운데 편지 한 장 있었네.”라는 고시(古詩)가 있다.
♣ 새연[塞淵]시경(詩經) 정지방중(定之方中)에 “사람의 마음가짐 성실할 뿐만이 아닌지라, 우람한 말 삼천 마리 들어찼도다.[匪直也人 秉心塞淵 騋牝三千]”하였다.
♣ 새옹[塞翁]길흉화복이 수시로 변한다는 뜻인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에 나오는 변방에 살던 노인.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이야기. 즉 새옹에게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이 혹은 도망치고 혹은 준마(駿馬)를 끌고 돌아오곤 하는 등 화복이 무상하였고, 또 그 사이 새옹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출전(出戰)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였다는 줄거리로서, 인간의 화ㆍ복과 길ㆍ흉은 항상 무상한 것이라서 예측할 수가 없다는 대의이다.
♣ 새옹녕구마[塞翁寧求馬]세상의 화복(禍福)은 무상함. 새옹실마(塞翁失馬). 《淮南子 人間訓》
♣ 새옹실마[塞翁失馬]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말한다. 회남자(淮南子) 인간훈(人間訓)에, “변방 근처에 사는 노인의 말이 도망쳐서 오랑캐 땅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모두 위로하니, 그 노인이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몇 달 뒤에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 여러 마리를 데리고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자, 노인은 ‘이것이 화가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집에 좋은 말이 많아졌는데, 그의 아들이 말타기를 좋아하여 말을 타다가 다리가 부러지니, 사람들이 와서 위로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이것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1년 뒤에 오랑캐들이 대거 침입하자 장정들이 모두 나가 싸워 변방 근처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죽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만은 다리가 부러진 관계로 부자가 모두 온전하게 살 수 있었다.” 하였다.
♣ 새옹지마[塞翁之馬]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馬).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란 항시 바뀌어 예측할 수가 없음. 처음엔 말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버려서 낙담했는데, 후에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이끌고 돌아 와서 복이 되었고, 아들이 그 말들을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니 도로 화를 초래한 격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나서 장정들이 끌려가 많이 죽는 일이 생겼는데 아들은 다리가 부러져 나가지 못해서 목숨을 건졌으니 또다시 복이 된 것이다. 즉, 세상 일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인다.
♣ 새원[塞垣]장성(長城)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관북(關北) 지방을 가리킨다.
♣ 새태수렴[塞兌垂簾]노자(老子) 52장에, “입을 꽉 다물고 욕망의 문을 닫으면 종신토록 수고롭지 않을 것이다.[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라는 말이 나온다.
♣ 색[索]구하다.
♣ 색공[色空]불가(佛家)의 용어로, 색은 물질의 현상적인 모습을 말하고 공은 본질적인 체성(體性)을 말한다.
♣ 색공신[色功臣]광해군 떄 정사공신인 신응구(申應榘)에게 왕이 “뜻은 고변하려 하였고, 얼굴에는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고 한 것을 빗대어 신응구를 부른 말.
♣ 색구[色丘]한 광원을 모시고 다니며 시중드는 하인들 중의 우두머리. 색구(色驅). 丘는 구사(丘史), 驅는 구종(驅從).
♣ 색난[色難]공자가 말하기를, “부모를 섬기는 얼굴빛을 가지기가 어렵다.” 하였으니, 이것은 얼굴빛을 부드럽고 화하게 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 색맹[色盲]노자(老子)의 “오색(五色)은 사람의 눈을 봉사로 만들고 오음(五音)은 사람의 귀를 귀머거리로 만든다.” 한 말에서 온 것이다. 《老子 十一》
♣ 색부치[嗇夫馳]정사를 잘못한다는 뜻.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희(羲)와 화(和)가 달력과 천문을 맡았는데, 그 책임을 수행하지 않고 방탕하였으므로 절서가 어긋나자 “색부는 달리고 서인은 분주하다.” 하였는데, 그 주에 “색부는 폐백을 맡은 소신(小臣)으로, 일식이 있게 되면 북을 울리며 하늘에 제사드리는 자다.” 하였다.
♣ 색사[色絲]위(魏) 나라 무제(武帝)가 어느 곳을 지나다 보니 비석(碑石) 뒷면에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 外孫虀臼)’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때 무제와 함께 가던 양수(楊修)가 이 글을 풀이하기를 “황견(黃絹)은 색사(色絲)니 합치면 절(絶) 자가 되고, 유부(幼婦)는 소녀(少女)이니 합치면 묘(妙)자가 되고, 외손(外孫)은 딸의 아들로서 곧 여자(女子)이니 합치면 호(好) 자가 되고, 제구(虀臼)는 매운 양념을 찧는 절구이니 수신(受辛)의 뜻이라 합치면 사(辭) 자가 되며, 모두 합치면 절묘호사(絶妙好辭)로서 절묘한 좋은 글이라는 뜻입니다.” 하였다.
♣ 색상[色相]형체가 갖추어져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일체의 외물(外物)을 말한다.
♣ 색색[摵摵]잎이 지는 소리
♣ 색색[愬愬]놀라 두려워하는 모양”
♣ 색소첨매적력피[索笑簷梅的皪披]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추녀 밑 돌며 매화 찾아 웃음을 함께하려 하니, 싸늘한 꽃술 성긴 가지 반쯤은 웃음을 못 참는 듯.[巡簷索共梅花笑冷蘂疎枝半不禁]”이란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1 舍弟觀赴籃田取妻子到江陵喜寄》
♣ 색양[色養]안색을 화열(和悅)하게 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것, 혹은 부모의 안색을 살펴 잘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의 색난(色難)과 같은 뜻이다.
♣ 색우[嗇雨]색우는 이슬비를 뜻한다.
♣ 색우[色憂]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말함. 예기(禮記) 文王世子에 “혹시 거처가 편치 못한 일이 있을 때 내시가 문왕에게 고하면 문왕은 걱정스러운 얼굴빛을 하고 걸음걸이가 흔들렸다.[其有不安節 則內豎以告文王 文王色憂 行不能正履]" 하였음.
♣ 색즉동[色卽同]색(色)에 의하여 표현된 온갖 현상은 평등 무차별한 공(空), 곧 실상(實相)과 상즉(相卽)하여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
♣ 색찬금문객[索粲金門客]다년간 조정의 학사(學士) 신분으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이 무제(武帝)에게 “주유(侏儒)들은 배가 불러 죽을 지경인데, 나는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다. 나의 말이 쓸 만하다면 좀더 대우를 잘해 주어야 할 것이요, 쓸모가 없다면 바로 파직시켜서 장안에서 쌀을 구걸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不可用 罷之 無令但索 長安米]”라고 호소를 하자. 무제가 크게 웃고는 금마문(金馬門)에서 대조(待詔)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漢書 卷65 東方朔傳》 금문객은 보통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별칭으로 쓰는 말이다.
♣ 색하[索下]내려달라고 간청하다.
♣ 생[生]남자의 성씨 뒤에 흔히 붙이던 호칭
♣ 생가[笙歌]생황(笙簧)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 옛날 연회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생황을 연주하곤 했는데, 이 노래와 연주곡은 모두 시경(詩經) 소아에 있는 것들로, 합쳐서 생가(笙歌)라 하며, 바뀌어 전아한 노래로서의 아악(雅樂)을 뜻하기도 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의하면, 공자가 일찍이 대상(大祥)을 마친 10일 후에야 생가가 제대로 되었다고 하였다.
♣ 생계공사[省啓公事]일이 잗단 것이므로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처리하는 공사.
♣ 생공[生公]양(梁) 나라 때의 고승(高僧)인데, 그가 일찍이 호구사(虎丘寺)에서 돌들을 모아 청중(聽衆)으로 삼고 불경(佛經)을 강설하자, 그의 뛰어난 설법에 감화되어 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고 한다.
♣ 생관[甥館]생관은 사위가 머무는 집을 가리킨다.
♣ 생관[生棺]생관은 생존시에 미리 만들어 놓은 관을 가리킨다.
♣ 생구[生韭]생 부추.
♣ 생구[甥舅]외삼촌(外三寸)과 생질(甥姪)의 사이를 말한다.
♣ 생구불망[生口不網]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말.
♣ 생금린[生金鱗]술잔에 가는 파문이 이는 것을 말한다.
♣ 생년수가의[生年輸賈誼]33세로 요절한 한(漢) 나라의 천재 문사(文士) 가의(賈誼)보다 더 일찍 죽었다는 말이다. 《史記 卷84》
♣ 생대[生臺]불교(佛敎)의 용어로, 선사(禪舍)에서 여러 스님이 밥을 먹을 때 언제나 밥[生飯]을 조금씩 떼어모아 새나 짐승에게 주는 대(臺)이다.
♣ 생로병사[生老病死]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일. 곧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네 가지 고통
♣ 생로병사고[生老病死苦]북송(北宋) 때 참지정사(參知政事) 당개(唐介)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쟁론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자, 당시 사람들이 왕안석과 왕안석의 신법을 쟁론한 네 사람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비유하였는데, 즉 왕안석을 생(生)에 비유하고, 왕안석의 신법을 쟁론한 이들 가운데 증공량(曾公亮)을 노(老)에 비유하고, 부필(富弼)은 의논이 맞지 않아서 병을 칭탁했으므로 그를 병(病)에 비유하고, 당개는 죽었으므로 그를 사(死)에 비유하고, 조변(趙抃)은 왕안석을 어찌할 수 없어 괴롭게만 여겼으므로 그를 고(苦)에 비유했던 고사이다.
♣ 생멸법[生滅法]생멸법은 무상(無常)한 현상계 일반을 가리키는데,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로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의 교설을 시설해 놓고 있다.
♣ 생민[生民]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 조상 숭배의 뜻을 담은 시로 후직(后稷)이 강원(姜嫄)에게서 태어난 것과, 후직이라는 조상이 있었기 때문에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있게 되었음을 노래한 시.
♣ 생민출고화[生民出膏火]국학(國學)의 학생들이 독서를 부지런히 할 수 있도록 백성들이 기름을 대주었다는 뜻이다.
♣ 생반[生飯]선종에서 언제나 밥을 먹을 때에 밥을 조금씩 떼어 광야귀(曠野鬼) 등에게 주는 밥.
♣ 생백[生魄]백(魄)은 달의 어두운 부분으로, 16일 이후에는 백이 점점 자라난다.
♣ 생백실[生白室]생백실은 순백(純白)하고 우뚝한 마음이란 뜻.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저 공허한 경지를 보니 허실이 생백하다.[瞻彼闋者 虛室生白]" 하였다.
♣ 생사[生祠]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그 덕을 기려 세우는 사묘(祠廟)이다.
♣ 생사[生師]양(梁)의 고승(高僧) 도생(道生)을 말한다. 그가 소주(蘇州) 호구사(虎丘寺)에 있으면서 돌을 모아 놓고 설법하자 돌들도 다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吳郡諸山錄》
♣ 생사고락[生死苦樂]죽음과 삶과 괴로움과 즐거움.
♣ 생성[生成]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이루어 주는 은혜를 말한다.
♣ 생송몽[生松夢]높은 작위(爵位)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장발(張勃)의 오록(吳錄)에 “정고(丁固)가 자기 배 위에 소나무가 나는 꿈을 꾸었는데, 누가 이르기를 ‘송(松) 자를 파자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되니, 18년 뒤에 틀림없이 공작(公爵)이 될 것이오.’ 했다.” 하였다.
♣ 생순[牲脣]생순은 소의 입술로 팔진미의 하나다.
♣ 생순사안[生順死安]장재(張載) 서명(西銘)의 “존오순사 몰오영야(存吾順事 沒吾寧也)"에서 나온 말로서 살고 있을 때는 천리(天理)에 순응하여 일을 행하고 죽을 때는 마음이 편안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임.
♣ 생순사역안[生順死亦安]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마침 이런 때에 태어난 것이야말로 그대의 시운(時運)이라 할 것이니, 마침 이런 때에 죽게 되는 것 역시 그대가 순응해야만 할 것이다. 태어난 때에 편안하고 순응해야 할 때에 안온히 대처한다면, 기뻐하고 슬퍼할 것이 마음속에 있지 않게 될 것이다.[適來 夫子時也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라는 말이 나온다.
♣ 생애[生涯]우리의 생명이란 애(涯)가 있다. 이 말은 양생주(養生主) 편에 보임.
♣ 생양[生陽]평남(平南) 중화(中和)의 속역(屬驛)이다.
♣ 생양관[生陽館]평안도 중화군(中和郡)에 있던 역참의 이름이다.
♣ 생우익[生羽翼]당서(唐書) 마주전(馬周傳)에 “임금이 마주에게 글을 써주기를 ‘난봉이 하늘 높이 날려면 반드시 날개를 얻어야 하니, 고굉(股肱)이 있는 것은 오직 충성 때문이다.’ 했다.” 하였다.
♣ 생원론[生員論]청(淸) 나라 고염무(顧炎武)가 쓴 생원에 대한 논(論).
♣ 생이지지[生而知之]태어나면서 앎.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통해서 앎, 타고난 지혜. 생지(生知)
♣ 생자필멸[生者必滅]태어난 것, 살아 있는 것은 반드시 죽을 때가 있다.
♣ 생제[生祭]생사(生祠)와 같은 뜻으로, 특히 공덕이 있는 사람을 사모하여 그가 생존한 때에 그를 마치 신(神)에게처럼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 생지[生知]나면서부터 저절로 도(道)를 아는 성인(聖人)의 자품을 말한다. 중용(中庸)에 훌륭한 사람을 세 등급으로 나눴는데, 첫째는 생지, 둘째는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 셋째는 애써서 아는 곤지(困知)이다.
♣ 생직[生直]논어(論語) 옹야(雍也)에,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하니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가는 것은 죽음을 요행히 벗어난 것이다.” 하였다.
♣ 생추[生芻]변변치 못한 예물(禮物)을 비유하는 말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의 “새하얀 흰 망아지 깊은 골짜기에 있는데, 싱싱한 꼴 먹이는 저 주인 백옥과 같네.[皎皎白駒 在彼空谷 生芻一束 其人如玉]”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현인을 사모하는 것을 가리킨다.
♣ 생추[生芻]조촐한 제물(祭物)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서치(徐穉)가 곽임종(郭林宗)의 모친상 때 싱싱한 풀 한 다발[生芻一束]을 여묘(廬墓) 앞에 놔두고 갔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徐穉傳》
♣ 생추공곡[生芻空谷]생전의 현인(賢人)의 풍모를 말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의 “깨끗한 흰 망아지 저 빈 골짜기에 있나니, 싱싱한 꼴 한 다발 먹이는 그분 모습 마치 옥과 같도다.[皎皎白駒 在彼空谷 生芻一束 其人如玉]”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생추일속[生蒭一束]벤 지 얼마 안 된 싱싱한 꼴 한 묶음. 시경(詩經) 소아(小雅)백구(白駒)에 “생추 일속을 바치노니, 그 사람 옥 같도다.” 한 데서 온 말로, 원래는 현인(賢人)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가 타고 온 망아지에게 꼴을 먹인다는 뜻에서, 미박한 예물의 뜻으로 쓰였었는데, 후한(後漢) 때 곽태(郭太)의 모친상에 서치(徐穉)가 생추 일속을 부의한 일이 있고부터 미박한 부의의 뜻으로 전용되었다. 《後漢書 徐穉傳》
♣ 생추조옥음[生芻阻玉音]오래도록 서로 소식이 막혔음을 비유한 말. 생추는 벤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마르지 않은 꼴을 말하고, 옥음(玉音)은 남의 음신(音信)을 높여 이른 말인데, 즉 하찮은 꼴을 가지고 떠나는 현자(賢者)의 망아지를 먹이면서 작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것으로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생추가 일속이로소니 그 사람이 옥과 같구려 그대의 음신을 금옥 같이 여겨 나를 멀리할 마음을 두지 마오[生芻一束 其人如玉 毋金玉爾音 而有遐心]”한 데서 온 말이다.
♣ 생취[生聚]인구를 증가시키고 재정을 넉넉하게 쌓아 가는 것을 말한다.
♣ 생학[笙鶴]신선이 타는 선학(仙鶴)을 말한다.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 왕자교(王子喬)에, “왕자교는 바로 주(周) 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으로, 생황을 불기를 좋아하였는데, 봉새가 우는 소리가 났다.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과 함께 숭산(嵩山)에 올라갔다가 30여 년 뒤에 흰 학을 타고 와 구씨산(緱氏山) 꼭대기에 머물렀다.” 하였다.
♣ 생허좌자열[生虛坐自閱]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빈 방에서 흰 빛이 난다.”는 말을 줄인 것이다. 사마 표(司馬彪)는 주에서 “방[室]은 마음에 비유한 것이니, 마음을 공허하게 할 수 있으면 순백(純白)함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했다.
♣ 생화필[生花筆]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말한다. 오대(五代) 왕인유(王仁裕)의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천보 하(天寶下)에 “이태백(李太白)이 소싯적에 쓰던 붓 끝에서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뒤에 과연 천재성을 발휘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하였다.
♣ 서[序]가곡(歌曲) 등의 중요한 부분을 시작하기 전에 연주(演奏)하는 곡(曲)을 말한다.
♣ 서[庶]아마. 거의
♣ 서가조[犀可照]서각은 물소의 뿔인데, 이를 태우면 밝은 빛을 낸다고 한다. 진(晉) 나라의 온교(溫嶠)가 여행을 하다가 무창(武昌)의 저기(渚磯)에 당도하니, 물이 아주 깊은데, 사람들이 모두들 물 속에 괴물이 산다고 하였다. 이에 온교가 서각에 불을 붙여서 물 속을 비추니, 얼마 뒤에 물 속에 있던 기이한 모습의 물고기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晉書 卷六十七 溫嶠列傳》
♣ 서가지폐[徐家之肺]서씨는 당 나라 때 강직하기로 이름난 서회(徐晦)이고, 심가는 그와 같은 시대의 심전사(沈傳師)인데, 한림학사(翰林學士)ㆍ중서사인(中書舍人) 등 청직과 여러곳의 지방관을 오랫동안 지냈으나 세상의 영욕에 관심이 없어 권세가에 아부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서회는 술을 즐겨마시고 심전사는 음식을 잘 먹어 당시의 재상인 양사복(楊嗣復)이 말하기를 “서가의 폐장과 심가의 비장은 참으로 편안한가.”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唐語林》
♣ 서간[徐幹]삼국시대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하나로 뛰어난 문장으로 조조(曹操)부자(父子)의 예우를 받았다.
♣ 서간[鼠肝]세상 만물 가운데 대단히 미세한 존재.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위대하도다. 조화(造化)여! 너를 장차 무엇으로 만들려나? 너를 쥐의 간[鼠肝]으로 만들 것인가, 너를 벌레의 팔뚝[蟲臂]으로 만들 것인가?”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 서간충비[鼠肝蟲臂]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너를 쥐의 간으로 만들어 주랴, 너를 벌레의 팔로 만들어 주랴.”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만물의 태어난 형태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
♣ 서강월[西江月]사곡(詞曲) 이름인데, 남녀의 애정을 노래한 것이다.
♣ 서강중[徐剛中]강중은 서거정(徐居正)의 자(字).
♣ 서거[犀渠]방패 이름. 좌사(左思)의 오도부(吳都賦)의, “家鶴膝 戶有犀渠”라고 한 그 주에, ‘渠楯也’라 하였음.
♣ 서거[犀炬]진(晉) 나라 온교(溫嶠)가 배를 타고 우저기(牛渚磯)를 지날 적에 물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무소의 뿔에 불을 붙여 비춰 보자, 말과 수레를 타고 붉은 모자를 쓴 물속의 괴물들이 나타났는데, 그날 밤에 온교가 괴물로부터 “너와 나는 각각 다른 이승과 저승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에게 불을 비췄느냐.”고 꾸지람을 당하는 꿈을 꾸고 나서 얼마 뒤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晉書 溫嶠傳》
♣ 서거유위[西去遊渭]태공이 주를 피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면서 지내다가 문왕을 만나 등용되고, 그 뒤에 다시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정벌하였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무왕에게 정벌하지 말 것을 간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었다. 《史記 卷六十一 伯夷列傳》
♣ 서검[書劍]글[書]은 문(文)을 배우는 것이요, 검(劍)은 무(武)를 배운다는 것인데, 문무(文武)의 재주를 지녔다는 말이다. 항우(項羽)의 숙부 항량(項梁)이 항우에게 글을 가르치고 칼 쓰는 법은 가르쳤다.
♣ 서검[書劍]글을 읽어 관리가 되고 칼을 잡고 종군(從軍)하는 것으로 문관이나 무관이 되는 것을 말함. 맹호연집(孟浩然集) 권3 자락지월(自洛之越) 시에 “삼십 년을 허둥지둥 글과 칼 다 못 이뤘네[遑遑三十年 書劍兩無成]" 하였음.
♣ 서검응난적만인[書劍應難敵萬人]항우(項羽)가 젊을 때 글공부도 안하고 검술(劍術)도 전념하지 않으므로 그의 삼촌인 항량(項梁)이 꾸짖으니, 항우가 “글이란 성명(姓名)이나 기록하는 것이고 칼이란 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나는 만인(萬人)을 상대하는 것을 배우려 합니다.”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 《史記 卷七 項羽本紀》
♣ 서검탁심정[徐劍托深情]춘추 시대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상국(上國)에 사신 가는 길에서 서(徐) 나라에 들렀을 때, 서 나라 임금이 계찰의 보검(賓劍)을 보고 좋아하면서도 차마 말을 못 하였는데, 계찰은 그의 생각을 알기는 했으나 사신을 가는 길이라 보검을 그에게 선사하지 못하고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서 나라에 들르니, 서 나라 임금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보검은 그이 묘소의 나무에 걸아 놓아서 일찍이 그에게 선사하고 싶었던 뜻을 편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吳太伯世家》
♣ 서검현[徐劍懸]춘추 시대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사행(使行) 중에 서군(徐君)을 방문하였을 때, 서군이 계찰의 칼을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자, 계찰이 그 마음을 헤아리고는 사신의 임무를 끝내고 돌아올 때 그에게 칼을 주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는데, 돌아오고 보니 서군이 이미 죽어서 땅속에 묻혔으므로, 그 칼을 서군의 무덤가 나무 위에 걸어 놓고 떠나간 고사가 전한다. 《史記 吳太伯世家》
♣ 서견[噬犬]깨무는 개.
♣ 서경[署經]당하관(堂下官)을 임용할 때, 이조(吏曹)에서 피임자(被任者)의 문벌ㆍ이력ㆍ내외 4조(父ㆍ祖ㆍ曾祖ㆍ外祖)와 처(妻)의 4조를 기록하여 양사(兩司; 司憲府ㆍ司諫院)에 제출하면, 양사는 그를 심사한다. 그리하여 결점이 없다고 판단되면, 양사의 대간(臺諫)이 모두 서명하는데 이를 서경(署經)이라 하고,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서명을 거부하는데 이를 월서(越署) 또는 월서경(越署經)이라고 하였다. 서경에 통과되어야 직첩(職牒)을 발급하는 것이 법례이므로, 이조(吏曹)는 양사에 3차 서경(署經)을 요구하는데 그래도 통과되지 않을 경우는 부득이 체임(遞任)시켰던 것이다.
♣ 서경[西京]한(漢)나라 때의 도성(都城)인 장안(長安)을 이름. 서한(西漢)의 수도는 장안이고, 동한(東漢)의 수도는 낙양(落陽)이었는데, 이 때문에 낙양을 일컬어 동경(東京)이라 하고, 장안을 일컬어 서경(西京)이라 이르게 되었다. 또한 원 뜻을 확대, 파생하여, 동한을 동경, 서한을 서경이라 하기도 함.
♣ 서경[西坰]한준겸(韓浚謙)의 봉호(封號)이다.
♣ 서경루망[西京漏網]서경은 전한(前漢) 시대의 도읍지를 말하고, 누망(漏網)은 죄인이 법망(法網)을 빠져나가는 것을 이르는데, 육기(陸機)의 오등제후론(五等諸侯論)에 “육신은 약망을 범하였고, 칠자는 누망에 저촉되었다.[六臣犯其弱網 七子衝其漏網]" 한 주석에 “누망은 한 경제(漢景帝) 때에 법망이 느슨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하였다.
♣ 서경이자[徐卿二子]서경(徐卿)의 두 아이란, 두보(杜甫)가 서씨(徐氏)의 비범한 두 아이를 찬미하여 지은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에 “그대는 서경의 비범하게 생긴 두 아이를 못 보았나 …… 장부가 아이를 낳아 이 두 아이 같은 아이를 둔다면 후일에 명위가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君不見徐卿二子生絶奇 …… 丈夫生兒有如此二雛者 異時名位豈肯卑微休]” 한 데서 온 말이다. 《白氏長慶集 年譜ㆍ佔畢齋集 年譜ㆍ杜少陵集 卷十》
♣ 서경지자[西京之字]한 나라 서경의 예서(隸書) 임.
♣ 서계[書契]문자(文字)를 말함. 중국의 아주 태고 적에는 문자가 없어서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정령(政令)의 부호로 삼다가, 복희씨(伏羲氏)가 왕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周易 繫辭下》
♣ 서곡[黍谷]연(燕) 나라에 치운 골[谷]이 있어 곡식이 되지 않는데, 추연(鄒衍)이 음률(音律)로서 양기(陽氣)를 불어넣었더니 따뜻하여져서 기장[黍]이 나서 자랐다. 그러므로 서곡(黍谷)이라 한다.
♣ 서곡[黍谷]중국 하북(河北) 밀운현(密雲縣)에 있음. 서곡은 땅이 아름다우나 너무 차서 오곡이 나지 않는데 추연(鄒衍)이 살면서 율(律)을 불어 따뜻하게 하여 화서(禾黍)가 자식(滋殖)했다고 함. 《列子 湯問》 주희의 매화시(梅花詩)에 “自欣羌笛娛夜永 未要鄒律回春溫"의 구가 있음.
♣ 서곤[西崑]서곤은 서방의 곤륜군옥산(崑崙群玉山)으로 고대 제왕의 장서각(藏書閣)이 있던 곳이다.
♣ 서곤장길[西崑長吉]서곤은 중국의 서쪽에 있는 곤륜산(崑崙山)인데, 여기서는 옥(玉)이 많이 생산되므로 전(轉)하여 제왕(帝王)의 도서관을 칭한다.
♣ 서공[書空]속마음이 불평스러우나 겉으로는 표출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때 은호(殷浩)가 중군장군(中軍將軍)이 되었다가 남의 무함을 입어 신안(信安)으로 쫓겨났는데, 겉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평상시처럼 담소하였다. 그러면서 매일 손가락으로 허공에 대고 무슨 글자를 썼는데, 사람들이 몰래 엿보니 ‘돌돌괴사(咄咄怪事)’라는 글자를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世說新語 黜免》
♣ 서공부[舒公賦]서공은 당(唐) 나라의 서원여(舒元輿)를 말한다. 그의 모란부(牡丹賦)에 “저 하늘의 상서, 기운 별이 되고 구름 되고.[圖元瑞精 有星而景 有雲而卿]"라는 구절이 있다.
♣ 서광[曙光]새벽 빛.
♣ 서군[書裙]진(晉) 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양흔(羊欣)이 낮잠을 잘 적에 입고 있던 새 치마에 글씨를 쓴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書 羊欣傳》
♣ 서궁오기[鼠窮五技]쥐가 지닌 다섯 가지 졸렬한 기예. 날긴 해도 지붕에는 오르지 못하고, 헤엄은 치지만 계곡을 건너지 못하며, 나무를 오를 수 있으나 꼭대기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달릴 수는 있으나 사람보다 빠르지 못하며, 굴을 팔 수 있지만 제 몸도 다 가리지 못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詩經 魏風 碩鼠 疏》
♣ 서권[舒卷]폄과 맒. 전하여 경우에 따라서 자기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함을 의미한다.
♣ 서귀[西歸]올바른 길을 가는 것, 또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함.
♣ 서극[西極]서극은 극서쪽으로 곤륜산(崑崙山) 부근의 서역(西域) 지방을 가리킨다.
♣ 서극곤륜[西極崑崙]한사(漢使)가 서역의 우전국(于寘國)에서 하원(河源)을 찾아내었는데, 그 산 이름을 곤륜(崑崙)이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사기(史記) 대원열전(大宛列傳)에 나온다.
♣ 서극풍[西極風]말을 형용한 것이다. 서극은 중국 서쪽에 있는 대완국(大宛國)에서 준마가 나오므로 인용한 듯하다.
♣ 서긍위도[徐兢爲圖]서긍은 송(宋) 나라 사람인데, 산수(山水)와 신물(神物)을 잘 그리었고 전주(篆籒)도 잘 썼다. 선화(宣和) 때에 사신을 따라 고려(高麗)에 나와서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지었다. 《宋史翼 卷二十七》
♣ 서기실[徐記室]남조(南朝) 시대 진(陳) 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기실참군(記室參軍)을 지냈던 서릉(徐陵)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당시 유신(庾信)과 병칭되었다. 《陳書 卷二十六》
♣ 서기형환사[胥起荊還社]서는 춘추시대 초 나라 대부 신포서(申包胥)임. 오자서(伍子胥)가 이끄는 오 나라의 군대에 의해 초 나라의 서울이 함락되자, 진(秦) 나라로 달려가 진 나라 조정에서 7주야를 통곡하며 구원을 요청하여 마침내 오 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았다. 《史記 卷四十 楚世家》
♣ 서길사[庶吉士]서상(庶常)이라고도 한다.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관원(官員)으로, 진사(進士) 중에 문학과 서법(書法)에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임명했다.
♣ 서냉교[西冷橋]중국 절강성(浙江省) 항현(杭縣) 서쪽 호반(湖畔)의 고산(孤山)과 소제(蘇隄) 사이에 있는 다리인데, 고산처사(孤山處士) 임포(林逋)가 고산에 은거하면서 집안에 매화를 많이 심고 음영자적(吟詠自適)하였음. 임포의 유명한 매화시가 있음.
♣ 서년[書年]명(明) 나라 절신(節臣) 소노풍(蕭露豐)의 자. 장헌충(張獻忠)이 난을 일으켜 성을 함락시켰을 때 그가 아내와 함께 부모를 모시고 달아나다가 아버지가 적에게 붙잡히므로, 아버지를 구출해내고 자기가 대신 붙잡혀 있었는데, 그것을 안 그의 아내가 다시 그를 구출하러 갔다가 부부가 함께 적에게 살해되었다.
♣ 서당[書堂]문신(文臣)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던 곳.
♣ 서대[犀帶]서대는 일품관(一品官)의 조복(朝服) 위에 두르는 물소뿔로 장식한 띠이다.
♣ 서대[西臺]중서성(中書省)을 말한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중서성을 후위(後魏)에서 서대라 하였다. 선무제(宣武帝)가 중서감(中書監) 최광(崔光)에게 말하기를 ‘경은 짐의 서대 대신이다’ 했다.” 하였다.
♣ 서대육[西臺肉]서대(西臺)는 당(唐)의 서가(書家) 이건중(李建中)의 호인데, 그의 글씨가 명필이었으되 비속(肥俗)하여 살이 많고 뼈가 적다는 평이 있었다.
♣ 서대초[書帶草]다년생으로 꽃은 담자색(淡紫色)이고 열매는 벽록색(碧綠色)에 모양이 둥글다. 삼제기략(三齊記略)에 “정강성(鄭康成)이 불기성(不其城) 남산(南山) 속에서 학도를 가르칠 때, 잎은 부초와 같고 길이는 한 자 남짓한 풀이 산 밑에 났으므로, 사람들이 강성의 서대초라 불렀다.” 하였다.
♣ 서대초[書帶草]한(漢) 나라 정현(鄭玄)의 제자들이 책을 맬 때 썼다는 길고도 질긴 풀 이름이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庭下已生書帶草 使君疑是鄭康成”이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14 書軒》
♣ 서도[西都]고려 때 평양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 서도[西都]주(周) 나라 때의 호경(鎬京)을 말함.
♣ 서도[書徒]학궁(學宮)에서 공부하는 유생(儒生)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매일 읽은 글을 기록해서 매달 예조(禮曹)에 보고하는데, 이를 서도라고 한다. 예조에서 이를 근거로 장부를 비치하면 이에 의거 수시로 유생들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보이고 일정 기간의 점수를 통계한다. 그리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는 직부(直赴)를 허락하는 특전을 베풀고, 성적이 저조한 자는 벌을 시행하게 되어 있다.
♣ 서동부언[胥動浮言]거짓말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함.
♣ 서랑[徐郞]명(明) 나라 때의 시인인 서정경(徐禎卿)을 말한다. 당인(唐寅)ㆍ축윤명(祝允明)ㆍ문징명(文徵明) 등과 함께 오중(吳中)의 사재자(四才子)로 불렸다.
♣ 서래의[西來意]조사 서래의(祖師西來意)의 준말로, 선가(禪家)에서 흔히 쓰는 화두(話頭)의 하나이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가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을 전한 그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가 참구(參究)하는 것으로, 즉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뜻한다. 오등회원(五燈會元) 조주장(趙州章)에, 어떤 승려가 조사 서래의를 물으니 조주 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라고 대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 서래의[西來意]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준말로,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摩)가 전한 불법의 의취(意趣)라는 뜻이다. 곧 불법의 근본의(根本義), 선의 진면목(眞面目)을 말한다.
♣ 서량자사[西凉刺史)]한(漢) 나라 영제(靈帝) 때 환관(宦官) 장양(張讓)이 권세를 한 손에 쥐었는데, 맹타(孟他)가 그에게 뇌물을 주면서 포도주 한 말을 바친 결과, 서량(西凉)의 자사(刺史)에 임명되었던 고사가 전해 온다. 《三國志 魏書 明帝紀 注》
♣ 서령[西泠]서령교(西泠橋)를 말함.
♣ 서령일휘휘[西嶺日暉暉]노모(老母)의 자애로운 은덕을 비유한 말이다.
♣ 서로[犀顱]이마뼈가 서골(犀骨)로 된 것을 말하는데, 귀인의 상(相)이라 한다.
♣ 서롱[西隴]당(唐) 나라 때 뛰어난 시인 이백(李白)의 고향인 농서(隴西)를 가리키는 말이다.
♣ 서룡[瑞龍]서룡(瑞龍)은 여지(荔支)를 말한다.
♣ 서룡뇌[瑞龍腦]양비외전(楊妃外傳)에 “교지국(交趾國)에서 서룡뇌를 진상해 왔는데 그 모양이 선잠(蟬蠶)과 비슷하였다. 이를 임금이 귀비에게 주었는데 귀비가 몰래 안녹산에게 주었다.” 하였다.
♣ 서류불부동[西流不復東]중국 사람들은 강물은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중국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였다. 그래서 아무데로 구부러져도 반드시 동으로 간다[百折必東]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한 번 망한 뒤에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는 말이 헛말이라는 말이다.
♣ 서릉[徐陵]남조(南朝) 양(梁)ㆍ진(陳) 때의 사람으로, 어려서 매우 총명하여 석보지(釋寶誌)로부터 천상(天上)의 석기린(石麒麟)이란 칭찬을 받기도 했었는데, 그는 특히 당시에 시문(詩文)으로 유신(庾信)과 병칭(竝稱)되었었다.
♣ 서리[黍離]서리는 시경(詩經) 왕풍(王風)의 편명(篇名)으로 이것은 대부가 옛 도읍터를 지나다가 화려하였던 궁궐이 모두 헐리고 기장만이 무성한 것을 보고 서글퍼하여 읊은 시이다.
♣ 서리[黍離]주(周) 나라가 쇠약하여 동으로 옮긴 뒤에 시인(詩人)이 옛 서울을 지나며 서리편(黍離篇)을 지어서 옛 도읍터 “기장이 우거졌다[彼黍離離].”고 읊었다.
♣ 서리불부아[黍離不復雅]유왕(幽王)이 망하고 그 아들 평왕(平王)이 도읍을 동도(東鄕; 洛陽)에 옮긴 뒤로 지위가 일반 제후와 같이 낮아져서, 그 지방의 시(詩)를 왕풍(王風)이라 하고 다시 아(雅)로 칭하지 않았다. 서리편(黍離篇)은 왕풍의 첫 편이다.
♣ 서린[西隣]서쪽의 인근 마을이라는 뜻으로, 주역(周易) 기제괘(旣濟卦) 구오효(九五爻)의 “동쪽 인근 마을에서 거창하게 소 잡는 것보다는 서쪽 인근 마을에서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고 복을 나눠 받는 것이 훨씬 낫다.[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祭 實受其福]”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 서림[西林]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 기슭에 있는 절 이름. 주자(朱子)가 그곳에 머물면서 승(僧) 가사(可師)와 학문을 강론하였으므로 인용한 것임. 《朱子大全 卷二》
♣ 서림[書林]서책이 숲처럼 많이 쌓여 있다는 것으로 서책을 간직해둔 곳을 뜻한다.
♣ 서막[徐邈]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 상서랑(尙書郞)으로 있을 때 금주령(禁酒令)이 있었는데, 막이 술을 마음껏 마시고 취하여 “중성(中聖)이다.” 했다. 조조(曹操)가 듣고 성을 내자, 선우보(鮮于輔)가 “취객들이 술이 맑은 것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술이 탁한 것을 현인이라 한다.” 했다는 고사가 있다.
♣ 서명[西銘]송(宋) 나라 때 학자(學者) 장재(張載)가 서재(書齋)의 서쪽 창에 걸어 놓았던 명(銘)인데, 인도(仁道)의 원리를 밝혀 놓은 글이다.
♣ 서목[鼠目]소견이 작다는 뜻. 쥐의 눈은 작으면서도 밖으로 툭 불거져나와 있어 흡사 탐욕스러워하는 모양이므로 전하여 이렇게 비유한다.
♣ 서묘[誓墓]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육유(陸游)의 상서걸사(上書乞祠) 시에 “서묘하는 것이 어찌 한갓 조상이 그리워서겠는가. 세상이 곳곳마다 위기일레.[誓墓那因一懷祖 人間處處是危機]" 하였는데, 이는 난세를 만나 시골로 내려갈 것을 선영에 고하기 때문이다.
♣ 서문루[西門淚]옛 추억을 떠올리며 비통한 심정으로 흘리는 눈물을 말한다. 진(晉) 나라 사안(謝安)의 외생(外甥)이었던 양담(羊曇)이 사안 사후에 추억이 깃들었던 서주(西州)의 성문을 술에 취하여 지나게 되었을 때, 말 채찍으로 성문을 치면서 “살아서는 화려한 집에 사시더니 죽어서는 낙엽처럼 산언덕으로 돌아갔네.[生存華屋處 零落歸山丘]”라는 조자건(曹子建)의 시를 외우고는 대성통곡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謝安傳》
♣ 서문표[西門豹]전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인데, 그가 일찍이 업령(鄴令)으로 나갔을 적에 그곳 풍속이 하백(河伯)에게 부녀자를 시집보내야만 해를 입지 않는다하여, 늙은 여자 무당의 지휘 아래 자주 부녀자를 하수(河水)에 바쳤으므로, 서문표는 그 사실을 들은 즉시 그 늙은 무당들을 하수에 빠뜨려 죽여서 영원히 그런 폐해가 없게 하였다.
♣ 서미[胥靡]죄수(罪囚)를 말함.
♣ 서박[鼠璞]쥐를 포떠서 말린 쥐포. 쓸모도 없고 별다른 해로움도 없는 하찮은 것을 뜻함. 후한서(後漢書) 응소전(應劭傳)에 “정(鄭) 나라 사람은 다듬지 않은 옥(玉)을 박(璞)이라 하고, 주(周) 나라 사람은 말리지 않은 쥐를 박(璞)이라 한다. 주 나라 사람이 쥐의 박을 가지고 정 나라 상인을 찾아가서 박을 사지 않으려는가 하므로, 정 나라 상인이 가져다 보니, 바로 쥐의 박이었다.” 하였음. 송(宋) 나라 대식(戴埴)이 이를 따서 책 이름으로 했는데, 그는 명물(名物)의 동이(同異)를 구별한다는 뜻이었음.
♣ 서발[舒發]신라 17관등(官等)의 첫째 위계(位階)인 서발한(舒發翰)의 준말로, 벼슬이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었던 김유신(金庾信)을 가리키는 말이다.
♣ 서방미인[西方美人]서방(西方)의 미인이란 곧 서쪽 주(周) 나라의 성왕(聖王)을 가리킨 것으로, 시경(詩經) 패풍(邶風) 간혜(簡兮)에 “누구를 생각하느뇨, 서방의 미인이라네. 저 미인이야말로 먼 서방 사람이라오[云誰之思 西方美人 彼美人兮 西方之人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위(衛) 나라의 한 현사(賢士)가 미관 말직인 악공(樂工)의 자리에 있으면서 은밀히 그 불만을 토로함과 동시에 주 나라의 옛 성왕을 사모하여 노래한 것이다.
♣ 서백[西伯]서백은 주(周) 나라 문왕(文王)으로, 문왕이 주 나라를 세우기 전에 은(殷) 나라의 서백으로 있었다. 문왕이 은 나라 주(紂)를 물리치자 봉황이 글을 물고 오는 상서가 있었다고 한다.
♣ 서백창성[西伯彰聖]고공단보(古公亶父)에게는 맏인 태백(太伯)과 둘째인 우중(虞仲), 그리고 태강(太姜)이 낳은 막내 계력(季歷),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계력이 장차 서백(西伯)이 될 창(昌)을 낳자 그 창이 성덕이 있음을 알고는 계력에게 위(位)를 전할 뜻을 비쳤으므로 태백ㆍ우중이 자기 아버지 뜻을 알아차리고 형만(荊蠻)으로 망명하여 살면서 막내 계력에게 양보하였음. 《史記 周本紀》
♣ 서벽[西壁]홍문관원의 별칭. 홍문관원이 사진(仕進)하여 앉는 좌차(座次)가 그 벼슬의 별칭이 되었으니, 곧 직제학(直提學)ㆍ전한(典翰)ㆍ응교(應敎)ㆍ부응교(副應敎)를 동벽, 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을 서벽, 박사(博士)ㆍ저작(著作)ㆍ정자(正字)를 남상이라 했다. 그리고 모두 경연을 겸임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 서복[徐福]진시황(秦始皇)의 명을 받고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떠난 방사(方士)의 이름인데, 뒤에 일본에 건너갔다는 설이 있다. 《史記 秦始皇本紀》
♣ 서복사[徐福祠]진(秦)의 방사(方士). 혹 서시(徐市)라고도 함.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초(不死草)를 구해온다고 진시황(秦始皇)을 달래어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3천 명을 거느리고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전설에 의하면 그의 일행이 일본에 건너가 정주(定住)했다 하며 와까야마[和歌山] 지방에 그 유적과 신사(神祠)가 있었다고 한다.
♣ 서봉[西鳳]서봉사(西鳳寺) 즉 건봉사(乾鳳寺)의 옛 이름이다.
♣ 서부[西浮]서쪽에서 떠 와서 동쪽으로 간다.
♣ 서부등단[西府登壇]서부(西府)는 추밀부(樞密府)다. 등단(登壇)은 대장이 된 것을 말하는데, 한왕(漢王)이 한신(韓信)을 대장으로 삼을 때에 단을 쌓고 예식을 갖추어 임명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 서분금고문[書分今古文]서경(書經)에는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이 있는데, 금문은 총 29편으로 진(秦) 나라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복생(伏生)이 숨겨두었다가 한(漢) 나라 때 다시 강(講)한 것이며, 고문은 한 나라 경제(景帝) 때 공자(孔子)의 옛 집을 헐다가 벽 사이에서 발견됐다. 고문은 총 45편인데, 고문자(古文字)인 과두문(蝌蚪文)으로 쓰여져서 알아보지 못하다가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 서불[徐巿]서불은 진(秦) 나라 때의 방사(方士)였는데, 진시황(秦始皇)에게, 해중(海中)의 삼신산(三神山)에는 신선(神仙)이 살고 있으니,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가서 신선을 찾겠다고 청하여 과연 동남 동녀를 5백 명을 거느리고 신선을 찾으러 해중으로 들어간 뒤 소식이 없었다 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전설에 그가 일본에 가 살았다 한다. 특히 화가산(和歌山 와카야마) 지방에 서불사(徐巿祠)가 있었다 한다.
♣ 서불가진신[書不可盡信]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다 믿어서는 안 된다.
♣ 서불사[徐巿祠]서불은 진(秦) 나라의 방사(方士) 서복(徐福)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에게 동해의 삼신산(三神山)으로 가서 불로초(不老草)를 캐 오라고 하면서 동남 동녀(童男童女) 3천 명을 데리고 가게 하였는데, 서복이 일본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면서 돌아오지 않아 일본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화가산현(和歌山縣)에 서복의 무덤이라는 것이 있고, 그의 사당이라는 것도 있다.
♣ 서비[犀比]무소의 뿔로 만든 요대(腰帶)의 꾸미개를 말한다.
♣ 서비[西飛]새로 벼슬길에 올라 승문원(承文院)에 속하여 있다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나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어 영전(榮轉)하는 것. 예문관, 승정원이 승문원의 서쪽에 있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 서비[徐妃]서비(徐妃)는 양 원제(梁元帝)의 비(妃)로 이름은 소패(昭佩)인데, 원제가 한 눈이 애꾸눈이었으므로, 반면(半面)에만 화장(化粧)을 하고 임금을 맞이했다가 임금의 노염을 샀다. 그 뒤에 그녀는 임금의 근신(近臣)과 음통(淫通)하였다.
♣ 서사[西祀]무제가 서쪽으로는 분음(汾陰)에 가서 땅의 신인 후토(后土)를 제사지냈다.
♣ 서사[西思]서쪽을 그리워하다.
♣ 서사가[徐四佳]세종~성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의 호가 사가(四佳)이다.
♣ 서산[西山]송(宋) 나라 진덕수(眞德秀)인데, 자는 경원(景元) 또는 희원(希元)이다. 세상에서 서산 선생(西山先生)이라 일컬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서산결[西山訣]진서산(眞西山)이 엮은 심경(心經)을 말함. 심경은 거경(居敬) 공부를 위주하여 마음의 혼침과 나태함을 일깨우는 내용이 많음.
♣ 서산아[西山餓]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서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어 먹다 굶어 죽은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절개를 말한다.
♣ 서산연의[西山衍義]송(宋) 나라 진덕수(眞德秀)의 호는 서산인데, 대학을 해설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어 임금께 올렸는데, 이때에 경연(經筵)에서 그 책을 강의하였다.
♣ 서산오색환[西山五色丸]서산이란 절강성(浙江省) 태호(太湖) 가운데 있는 동정서산(洞庭西山)을 가리킨다. 예부터 동정귤(洞庭橘)이 유명했다.
♣ 서산의사[西山義士]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주무왕(周武王)이 은(殷) 나라를 치자 두 사람이 말을 두드리며 간하였으나 은 나라가 망하자 주 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수양산[西山]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드디어 굶어 죽었다.
♣ 서산이자[西山二子]서산의 두 사람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이들은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하는 것을 반대해서 간하다가 듣지 않자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면서 지내다가 굶어 죽었다. 《史記 卷61 伯夷列傳》
♣ 서삽체[徐澁體]당(唐) 나라 서언백(徐彦伯)이 문(文)을 만들면 많이 변경하여 새로운 것을 구했다. 그래서 봉각(鳳閣)은 언각(鶠閣)으로, 용문(龍門)은 규호(虯戶)로, 죽마(竹馬)는 소참(篠驂)으로 고쳐서 쓰니, 후진들이 본받아, 그를 서삽체(徐澁體)라 하였음.
♣ 서상[鉏商]서상은 노(魯) 나라 애공(哀公) 14년에 서쪽 교외의 사냥에서 기린을 잡은 사람의 이름인데, 성군(聖君)의 시대에만 출현한다는 기린이 난세에 나타나 붙잡힌 것과 관련하여 공자가 자신의 신세를 또한 한탄하면서 여기에서 춘추(春秋)의 저술을 끝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서상시[徐常侍]남당(南唐)의 마지막 임금인 이욱(李煜)과 함께 송(宋) 나라에 항복하여 누차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서현(徐鉉)을 가리킨다. 당시에 한희재와 명성을 다퉈 한서(韓徐)로 병칭되었다. 《宋史 卷441》
♣ 서새녹사의[西塞綠蓑衣]당(唐) 나라의 은자(隱者) 장지화(張志和)를 가리킨다. 잠시 벼슬살이를 하다가 물러나와 강호(江湖)에 노닐며 연파조도(煙波釣徒)라 자칭하고는 낚시로 소일을 하였는데, 그의 시 ‘어가자(漁歌子)’에 “서새의 산 앞에 백로가 날고, 복사꽃 흐르는 물 궐어가 살졌도다.[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라는 표현이 있다. 《新唐書 卷196》
♣ 서새풍우[西塞風雨]당 나라 장지화(張志和)가 벼슬을 버리고 스스로 연파조수(煙波釣叟)라 호(號)하며 배를 타고 살면서, 어부가(漁父歌)를 짓기를, “서새산 앞에 백로가 나는데, 복사꽃 흐르는 물에 궐어가 살찐다. 푸른 갈대 삿갓, 푸른 도롱이로 비낀 바람 가방비에 돌아가지 않으리라[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 靑篛笠綠蓑衣晩 斜風細雨不須歸].” 하였다.
♣ 서생[徐生]서생은 서복(徐福)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돌아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 서생륵비[書生勒碑]전승 기념비를 말한다. 서생(書生)은 한(漢) 나라의 반고(班固)로, 두헌(竇憲)이 흉노를 격파하고 나서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공적비를 세울 때, 반고가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을 지어 주었다. 《後漢書 竇憲傳ㆍ文選 封燕然山銘序》
♣ 서생입해[徐生入海]서생은 서복(徐福)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불사약은 캐 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 서서[棲棲]거마를 검열하는 모양,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모양, 안달하는 모양
♣ 서서[恓恓]마음의 번뇌하는 모양. 바쁜 모양
♣ 서서[西澨]서쪽 개펄.
♣ 서서[湑湑]잎이나 가지가 무성한 모양, 바람이 부는 형용, 샘물이 솟는 형용
♣ 서서[徐徐]행동이 침착한 모양, 잠을 자고 있는 모양, 조용히, 천천히, 의심하여 두려워하는 모양
♣ 서서추로[栖栖鄒魯]추로(鄒魯)는 공자와 맹자를 말하는 것이니, 추(鄒)는 맹자의 고국이요 노(魯)는 공자의 고국이다. 서서라는 말은 서성댄다는 말인데, 그렇게 서성대고 쫓아다녀도 옳게 길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는 말이다.
♣ 서서추로[棲棲鄒魯]추로는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가리킨 말로, 서서추로는 공자와 맹자가 세상에 도(道)를 행하기 위하여 허둥지둥 천하를 주류했던 것을 이른 말이다.
♣ 서서황황[棲棲遑遑]쉴 틈도 없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을 바로잡기 위하여 중니(仲尼)는 서서(棲棲)했고 묵자(墨子)는 황황(遑遑)했다는 말이 있다. 《後漢書 蘇竟傳》
♣ 서석[瑞石]광주(光州)의 옛 이름이다.
♣ 서석산[瑞石山]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
♣ 서소[西笑]부러워하여 사모하는 것을 뜻함. 환담신론(桓譚新論) 거폐(袪蔽)에 “사람들이 장안의 좋은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와 서쪽을 향해 웃는다.[人聞長安樂 則出門向西而笑]”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쪽 향해 웃는다는 것은 서울인 장안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다.
♣ 서소일[西笑日]서울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환담(桓譚)이 지은 신론(新論)의 거폐(袪弊)에, “사람들이 장안(長安)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가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웃고, 고기가 맛이 좋으면 푸줏간 문을 마주 보며 씹는다.” 하였다.
♣ 서소지[西笑地]서울을 말한다. 사람들이 장안(長安)의 음악 소리를 듣고나서 성문을 빠져 나와서는 서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웃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曹植ㆍ與吳季重書 注》
♣ 서수[犀首]고대 중국의 관명(官名)인데, 전국 시대 위(魏) 나라의 공손연(公孫衍)이 일찍이 이 관직에 몸담았으므로 그의 이칭(異稱)이 되었다.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공손연이 “공은 어찌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느냐.[公何好飮]”는 물음을 받고 “일이 없어서 그렇다.[無事也]”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 서수사혜구백[庶脩辭兮求白]초사(楚辭) 이소(離騷)에 “중화(重華 순임금의 이름)에게 나아가 글을 올리리라[就重華而陳詞]”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즉 굴원(屈原)이 순임금께 글을 올려 의심난 것을 물어서 스스로 도를 깨닫고자 했던 데에 비유한 것이다.
♣ 서수음[犀首飮]서수는 호아장군(虎牙將軍)과 유사한 상고 때의 벼슬 이름인데, 전국시대 위(魏) 나라 공손연(公孫衍)이 그 벼슬을 하였다 하여 그를 가리킨다. 당시의 유세가(遊說家) 진진(陳軫)이 공손연을 연(燕)ㆍ조(趙)ㆍ제(齊) 세 나라의 재상을 만들어 주기 위한 계책을 말해주기 위해 그를 만났을 때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까?”하자, 대답하기를 “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七十 陳軫傳》
♣ 서시[西施]서시는 춘추(春秋) 때 월(越) 나라 미녀의 이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패한 뒤에, 그의 모신(謀臣) 범려(范蠡)가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자, 부차가 서시에게 혹하여 관왜궁(館娃宮)을 짓고 갖은 향락을 누리다가 마침내 오 나라는 정사가 어지럽게 되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부차가 서시를 고소대(姑蘇臺)에 두고는 무척 총애했으므로 미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서자(西子)라고도 한다.
♣ 서시[徐市]진(秦) 나라 때의 방사(方士)로 진 시황(秦始皇)을 위하여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데리고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려고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 서시불환[徐市不還]서시와 안기생(安期生)은 모두 진(秦) 나라 때의 방사(方士). 시황(始皇)은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서시를 삼신산(三神山)에 보냈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자(使者)를 해중(海中)으로 보내어 안기생을 만나려 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史記 秦始皇本紀, 列仙傳》
♣ 서시빈[西施嚬]월(越)나라 미인(美人) 서시(西施)가 속 아픈 병이 있어서 얼굴을 찡그리니 그의 찡그리는 것도 어여쁘고 아름다웠다 한다.
♣ 서시빈목[西施矉目]월(越)나라의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가 눈을 찌푸린 것을 아름답게 본 못난 여자가 그 흉내를 내고 다녀 더욱 싫게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남을 따라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 서시옥골[西施玉骨]작약을 취서시(醉西施)라고 하는 데서 온 말. 서시는 춘추(春秋) 때 월(越)의 미인으로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계획에 의하여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쳐져 오궁(吳宮)에 있으면서 온갖 총애를 받았다.
♣ 서시유소추[西施有所醜]월(越)나라의 서시(西施)같은 이름난 미인도 추(醜)한 구석이 있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과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 서시혼소[徐市魂銷]진 시황(秦始皇) 때, 서시가, 삼신산(三神山)의 불로초(不老草)를 구하여 오겠다고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동해(東海)로 가서 오지 않았음을 말한다. 《史記 秦皇本紀》
♣ 서식일지변[棲息一枝邊]뱁새는 깊은 숲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나뭇가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사람이 각각 자기 분수에 만족해야 함을 비유한 말이다. 《莊子 逍遙遊》
♣ 서신[書紳]오래 두고 보며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장(子張)이, 공자에게서 명심(銘心)할 교훈을 듣고 자기의 띠[紳]에 그것을 썼는데, 항상 보고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 서신도기[棲神道氣]모두 도가(道家)의 술어로서, 서신은 마음을 통일시켜 신(神)이 엉기게 하는 것이고, 도기는 도가의 기풍(氣風)을 말함.
♣ 서씨적[徐氏迹]진(秦) 나라의 방사(方士) 서불(徐巿)이 시황(始皇)을 위하여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명을 거느리고 떠나간 채 뒷 소식을 모르는데, 전설에 그가 일본에 가 살았다 한다. 특히 화가산(和歌山 와카야마) 지방에 서불사[徐巿祠]가 있었다 한다.
♣ 서아습[棲鴉濕]까마귀는 검은 빛을 뜻하므로, 즉 문서를 기록할 적에 먹물이 종이에 젖는 것을 이른 말이다.
♣ 서악서원[西岳書院]경주에 있는 서원으로, 명종(明宗) 때 귀암(龜巖) 이정(李楨)에 의해 세워졌다.
♣ 서악정사[西岳精舍]경주(慶州)의 서악정사(西岳精舍)를 가리킨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각간(角干) 김유신(金庾信)을 향사(享祀)하는 곳으로, 명종(明宗) 16년(1561)에 세워졌다.
♣ 서암승[瑞巖僧]마음 수양(修養)하는 것을 뜻한다. 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서암(瑞巖)의 중[僧]은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主人翁)은 성성(惺惺)하는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성성하노라.’고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心經 卷一》
♣ 서암한로[瑞巖閒老]주희(朱熹)가 이르기를, “서암(瑞巖)의 중[僧]은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主人翁)은 성성(惺惺)하는가?’ 하고, 또 스스로 답하기를, ‘성성하노라.’고 하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心經 卷一》
♣ 서애상공[西厓相公]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柳成龍).
♣ 서액[西掖]중서성(中書省)을 말한다. 중서성이 대궐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우조(右曹)라 하고, 오른편은 서쪽이 되므로 서액이라고도 한다.
♣ 서어[鉏鋙]서로 어긋남.
♣ 서엄가[西崦家]두보의 적곡서엄인가시(赤谷西崦人家詩)에 “ …… 참새들은 띠 지붕에 노닐고 울타리엔 솔과 국화가 섞이었네, 마치 무릉의 저문 경치와도 같아 도원을 찾아서 묵고 싶어라[鳥雀依茅茨 藩籬帶松菊 如行武陵暮 欲問桃源宿]”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二》
♣ 서여왕찬[書與王粲]나이는 연소하지만 재질이 특출하여 자신의 학문을 전수해 주고 싶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三國時代) 위(魏) 나라의 채옹(蔡邕)이 소년 왕찬의 자질에 탄복한 나머지 극진한 환대를 베풀며 “내 집에 있는 서적을 모두 그에게 줘야 하겠다.”고 말한 고사가 전해 온다. 《三國志 卷21 王粲傳》
♣ 서오[徐吾]제(齊)나라에 서오(徐吾)라는 가난한 부인이 있었다. 이웃 부인들과 밤에 촛불을 어울려 방적(紡績)을 하는데, 서오는 가장 가난하여 촛불을 계속해 대지 못하니 이웃 부인들이 촛불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서오는, “내가 가난하여 촛불을 같이 대지 못하므로, 항상 먼저 와서 소제(掃除)하고 자리를 정돈하여 당신들 오기를 기다린다. 한 방에서 나 한 사람 더 있음으로 해서 촛불이 따로 소비될 것도 아니니 동벽(東壁)의 남은 빛을 왜 아끼는가.” 하니, 이웃 부인들이 서오에게 촛불을 같이 쓰기를 허락하였다.
♣ 서오거[書五車]장자(莊子)의 친구 혜시(惠施)가 학식이 많아 그 서책이 다섯 수레나 되었다 한다. 장자(莊子)
♣ 서오조[棲梧鳥]봉황새를 가리킴. 시경(詩經) 대아(大雅) 권아(卷阿)에 “봉황새가 날아서 퍼덕퍼덕 날개짓을 하도다[鳳凰于飛 翽翽其羽]” 한 데서 온 말로, 봉황은 곧 어진 신하를 비유한 것이다.
♣ 서옥[鼠獄]서옥은 쥐에 대한 옥사(獄事)라는 뜻이다. 전한(前漢) 때 법관 장탕(張湯)이 어렸을 때에 쥐가 고기를 도식(盜食)한 것을 보고 그것을 들어 쥐를 탄핵하여, 심문한 문서를 갖추어 논죄(論罪)하고 쥐를 당(堂) 아래에서 찢어 죽였는데, 그 문사(文辭)가 매우 노련하여 옥리(獄吏)와 같았다는 고사이다. 뒤에 장탕은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자 과연 옥을 다스림에 있어 매우 각혹(刻酷)하게 하였다 한다. 《史記 卷一百二十二 酷吏列傳》
♣ 서왕[徐王]진시황(秦始皇)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간 서복(徐福)을 가리킨다. 진시황(秦始皇)이 서복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배에 싣고 바다로 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不死藥)을 캐 오게 하였는데, 돌아오지 않고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고 한다.
♣ 서왕모[西王母]금모(金母)라고도 하니, 옛날 곤륜산(崑崙山)에 있던 선녀(仙女)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한다고 하고, 한 무제(漢武帝)가 장수(長壽)를 빌고 있을 때 서왕모가 선도(仙桃) 7개를 가지고 내려와 무제에게 주었다고 한다.
♣ 서우[瑞羽]봉황의 별칭이다.
♣ 서운관[書雲觀]고려 때 천문(天文)을 보던 곳을 서운관(書雲觀)이라 하였는데 조선 세종(世宗)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하였다.
♣ 서울[徐울]수도를 이르는 말이다. 서완은 경주(慶州)의 옛 이름인데 경주가 오랜 세월 도읍지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중국에서 수도를 장안(長安)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임.
♣ 서원[西原]서원은 서원경(西原京)으로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 서원[西園]서원은 한말(漢末)에 조조(曹操)가 업도(鄴都)에 만든 동산 이름으로, 귀공자들이 연회를 즐기는 곳으로 유명하다.
♣ 서원[西垣]중서성(中書省)의 이칭(異稱).
♣ 서유[徐庾]서능(徐陵)ㆍ유신(庾信). 모두 진(陳) 때 사람으로, 다같이 문사(文辭)에 뛰어나 당시에 서유체(徐庾體)라 불렸다.
♣ 서유[書帷]서재(書齋)에 치는 장막을 말한다.
♣ 서유[徐孺]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서치(徐穉), 자는 유자(孺子). 태수 진번(陳蕃)이 원래 손님 접대를 않는데 서치만은 찾아오면 특별히 자리 하나를 깔고 대접하다가 그가 가면 곧 그 자리를 걷어 다시 매달아 두었다 한다. 《後漢書 高士傳》
♣ 서유잠건개[書帷暫褰開]책 읽고 연구하는 일도 잠시 접어 두었다는 말이다. 한(漢) 나라 동중서(董仲舒)가 강학(講學)을 할 때 항상 휘장을 드리웠으므로 제자들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며, 이런 일을 무려 3년 동안이나 지속하면서 정원에 나와 거닐어 보지도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史記 儒林列傳 董仲舒傳》
♣ 서유탑[徐孺榻]서유는 후한 때 서치(徐穉)를 가리키는데 그의 자가 유자(孺子)이므로 서유라 한 것이다. 그 당시 태수(太守)인 진번(陳蕃)이 일반 빈객(賓客)은 접견하지 않고 오직 서치가 올 때에만 걸상[榻]을 내놓았다가 그가 가면 걸상을 매달아 놓았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卷五十三 周黃徐姜列傳》
♣ 서음[書淫]독서(讀書) 또는 장서(藏書)에 탐미(耽味)하는 벽성(癖性)을 말한다. 또는 정도(正道)가 아닌 서적을 즐겨 읽는 것을 말한다.
♣ 서응시졸악[徐凝詩拙惡]육조(六朝) 때에 서응(徐凝)의 폭포(瀑布)시에, “한가닥으로 청산의 빛을 한계지어 깨었다[一修界破靑山色].”는 글귀가 있는데 소동파는 그것을 악시(惡詩)라 하였다.
♣ 서이음와[徐摛淫哇]서이는 남조 때 양(梁) 나라 사람으로 자는 사수(士秀). 신기한 문장을 만들었는데 곧 염문체(艶文體)로서 궁체(宮體)라 이름한바, 애정의 시문이 되었으므로 음와라 한 것이다.
♣ 서인[西人]당 나라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두보가 일찍이 사천성(西川省) 봉절현(奉節縣) 양수의 서쪽에서 살았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 서일[西日]서일은 지는 해로서 즉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 서자[西子]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첩이었던 서시(西施)를 말한다. 오 나라는 월(越) 나라와 이웃하였는데 오가 월을 쳐서 항복을 받았었다. 월은 그 후 군비에 더욱 힘쓰고 미인 서시를 오왕에게 바쳐 오왕을 고혹하게 하였다. 오왕이 과연 서시에게 반하여 정사를 태만히 하자 월이 다시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소식(蘇軾)의 음호상초청후우시(飮湖上初晴後雨詩)에 “물 빛은 넘실넘실 맑음이 좋거니와, 산 빛은 어둑하여 비오는 것 또한 기이하네. 서호를 가지고 서자에 비유하자면, 묽은 화장 짙은 화장이 다 아름다움이로세[水光瀲艶晴方好 山色空濛雨亦奇 欲把西湖比西子 淡粧濃抹總相宜]” 한 데서 온 말이다.
♣ 서자몽부결[西子蒙不潔]서자는 미인으로 소문난 서시(西施)를 가리킨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서자라도 오물을 뒤집어쓰면 사람들이 모두 코를 감싸쥐고 지나간다.” 하였다.
♣ 서자생추[徐子生蒭]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서치(徐穉). 태수 진번(陳蕃)은 사람의 접대에 인색했으나, 서치가 찾아가면 매달아 두었던 의자를 내려놓고 환대했다 함. 한번은 곽임종(郭林宗)이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서치가 생추(生蒭) 한 묶음을 가지고 가서 조문하였다.
♣ 서자탑[徐子榻]동한(東漢) 때 남창 태수(南昌太守) 진번(陳蕃)이 일반 손님은 접대하지 않았으나 오직 그 고을 은사(隱士) 서치(徐穉)가 오면 특별히 그를 위해 앉을 자리를 내놓고 그가 떠나면 그 자리를 다시 걸어두었다고 함. 《後漢書 卷五十三 徐穉傳》
♣ 서자호[西子湖]서자호는 중국 북평(北平)에 있는 서호(西湖)를 말하는데, 이곳에는 물이 맑고 연꽃이 많다. 《讀史方輿紀要 直隸》
♣ 서작경청[黍嚼更淸]복숭아를 먹고 나서 기장밥으로 입을 맑게 씻는다는 뜻이다. 공자가 일찍이 노 애공(魯哀公)을 모시고 앉았을 때, 공이 복숭아와 기장밥을 하사하자 공자가 기장밥을 먼저 먹고 복숭아를 뒤에 먹으니 애공이 말하기를 “기장은 복숭아를 먹은 뒤에 입을 씻는 것이다.” 하였다. 《韓非子 外儲說》
♣ 서장[庶長]진(秦) 나라 때의 작위(爵位)의 이름이다.
♣ 서재[西齋]문인의 서재(書齋)를 뜻하는 말.
♣ 서재영설[書齋映雪]눈빛이 밝아 서재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말. 진(晉) 나라 손강(孫康)이란 사람이 집이 가난하여 눈빛으로 책을 읽었다 한다. 《蒙求上》
♣ 서저[棲苴]가뭄이 들어 나무 위에 바짝 말라 엉겨 붙은 수초(水草)를 말하는데, 백성들이 은택을 입지 못한 채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소민(召旻)의 “저 가뭄이 든 해에, 풀도 뻗지 못하는 듯하며, 나무 위의 시든 부평초와 흡사하니, 내가 이 나라를 살펴보건대, 어지럽지 않은 것이 하나 없도다.[如彼歲旱 草不潰茂 如彼棲苴 我相此邦 無不潰止]”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서적[徐積]송(宋) 나라 때 서적(徐積)이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는데, 뒤에 과거를 보려고 도성(都城)에 들어갔다가 차마 어버이를 오래 떠날 수 없어 다시 되돌아와버렸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史 卷四百五十九》
♣ 서절구투[鼠竊狗偸]쥐가 물건을 훔치고 개가 남의 눈을 속이는 것. 남 모르게 숨어서 부당한 물건을 취하는 좀도둑을 말함.
♣ 서점양치지재삼[序點揚觶至再三]서점은 사람 이름이다. 공자가 서점을 시켜서 잔을 들고 소리치기를, “배우기를 좋아해서 게을리하지 않고, 예를 좋아해서 변치 않으며, 8, 90의 나이가 되도록 도를 받들어 행해 이단에 빠지지 않을 자만 이 자리에 있으라.” 하니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禮記 射義》
♣ 서제막급[서臍莫及]배꼽을 물려고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 곧 기회를 잃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음의 비유한 고사성어.
♣ 서조[西曺]병조(兵曹)의 별칭이다.
♣ 서조우저[犀照牛渚]못된 행위는 반드시 남에게 밝혀지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온교(溫嶠)가 우저(牛渚)라는 못가에 이르렀을 때 물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당시에 그 못속에는 괴물(怪物)이 많이 있다는 말이 있었으므로, 마침내 서각(犀角)에 불을 붙여서 비추어 보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서족이기성명[書足以記姓名]글은 성과 이름만 기록할 줄 알면 그만이다란 뜻으로, 너무 학식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웃는 뜻으로도 쓰이고, 지식보다는 행동이 우선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함.
♣ 서주[黍珠]서주는 지극히 작은 구슬을 이름인데 실상(實相)의 묘리를 비유한 것임.
♣ 서주[絮酒]솜 뭉치에 적신 술. 후한(後漢) 서치(徐穉)의 고사로 먼 곳에 조문하러 갈 때 솜에 술을 적셔 볕에 말린 다음 가지고 가 필요할 때 물에 적셔서 술기운이 나오게 하여 사용했다 함.
♣ 서주[絮酒]술에 담근 솜. 후한 때 서치(徐穉)가 항상 미리 솜을 술에 담가 바싹 말린 다음, 여기에 구운 닭[炙雞]한 마리를 싸 두었다가, 어디에 상사(喪事)가 있을 경우에는 그의 무덤으로 찾아가 그 술에 담근 솜을 물에 적시어 주기(酒氣)가 있게 한 다음 백모(白茅)를 깔고 그 솜과 닭을 차려서 전작(奠酌)을 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徐穉傳注》
♣ 서주[西疇]전원(田園)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농부가 알려 주는 봄철 농사 소식, 이젠 서쪽 밭을 갈아야겠네.[農人告余以春及 將有事於西疇]”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서주문외루[西州門外淚]죽고 없는 자를 그리워하여 흘린 눈물. 진(晉)의 사안(謝安)이 신성(新城)을 진무하다가 병이 위독하여 환도(還都)하면서 그 수레가 서주문(西州門)을 통과했었는데, 사안이 죽은 후 그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던 양담(羊曇)이 일부러 그 길을 피하여 서주(西州) 길을 가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크게 취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문 앞에 당도하였는데, 좌우에서 여기가 서주문이라고 하자 양담은 비감을 못이겨 말채찍으로 문짝을 두드리며 통곡을 하고 갔었다. 《晉書 謝安傳》
♣ 서주철복동[西周轍復東]중국의 서쪽 풍호(豐鎬)에서 도읍하던 주(周) 나라는 유왕(幽王)이 학정(虐政)을 하다가 견융(犬戎)에게 시해(弑害)된 후, 평왕(平王)은 동쪽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기었다. 이것을 동천(東遷)이라 하며, 이 이전을 서주라 한다. 평왕이 동천하고 나서부터 주 나라는 쇠약해졌다. 《史記 卷四 周本紀》
♣ 서주화류[西州花柳]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신성(新城)을 지키다가 병이 위독해져 부득이 서주의 성문을 통하여 돌아오게 되자, 평소 동산(東山)에 은거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함을 매우 슬퍼했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 그의 생질인 양담(羊曇)이 자기 외숙의 일을 가슴아프게 여겨 서주의 길로 다니지도 않았는데, 한번은 크게 취해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지나다가 좌우 사람이 “이곳이 서주의 성문이라.”고 말하자, 양담은 비감(悲感)을 견디지 못해 통곡을 하고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七十九》
♣ 서지영대[棲遲靈臺]동한(東漢)의 제오힐(第五頡)이 낙양(洛陽)에 기거할 집이 없어 영대(靈臺)에서 기숙(寄宿)하면서 며칠 동안이나 불을 때지 못한 채 실의에 잠겼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41 第五倫列傳 附 第五頡》
♣ 서지책[西知柵]경주(慶州)에 있는 진보(鎭堡)의 하나인 하서지목책(下西知木柵)의 준말이다.
♣ 서진[犀鎭]서는 무소의 가죽으로 견고하다. 따라서 크고 견고한 진영(鎭營)을 가리킨다.
♣ 서진[西塵]진(晉) 나라의 실권자 유량(庾亮)이 외지의 군사를 휘몰아 왕궁을 공격할 것이라는 말을 왕도(王導)가 듣고는, 때마침 서풍이 불면서 먼지를 휘날리자 왕도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원규의 먼지가 사람을 오염시키누나.[元規塵汚人]”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輕詆》
♣ 서진갑자[書晉甲子]도연명(陶淵明)이 시(詩)를 지은 연(年)ㆍ월(月)을 기록하는데, 진(晉) 나라 망하기 전에는 연호(年號)를 썼고, 망하고 송(宋) 나라가 된 후에는 갑자만 썼다 한다.
♣ 서참[舒慘]서참은 음양(陰陽)ㆍ고락(苦樂) 등 대립 개념을 총괄하여 표현하는 말이다.
♣ 서참[舒慘]양서 음참(陽舒陰慘)의 줄임말로 따뜻하게 펴주고 참혹하게 처벌함을 이른다.
♣ 서창곡[徐昌縠]서창곡은 명 나라 때의 문장가 서정경(徐禎卿)을 말하는데 창곡은 그의 자이다.
♣ 서천[西川]고향을 말함. 서천은 촉(蜀)을 가리키는데 촉 망제(蜀望帝)가 그의 신하 별령(鱉靈)의 아내를 간음하고서 왕위를 내놓고 도망갔다. 이때 촉인(蜀人)들이 망제를 슬퍼한 나머지 두견새 울음 소리가 불여귀거(不如歸去)라고 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함. 그래서 후세에 고향에 가고픈 소망을 말할 때 흔히 두견새와 서천을 인용함. 《蜀王本紀》
♣ 서천[西天]성군(聖君)이 있는 나라를 상징한 것. 시경(詩經)에서는 서주(西周)를 말하고 있음. 《詩經 邶風 簡兮》
♣ 서천십양금[西川十樣錦]촉(蜀) 나라 때 만든 열 가지 비단을 말한 것인데 사람의 조업(操業)이 무상한 것을 말함. 《佩楚軒客說》
♣ 서청[西淸]궁궐 안에 있는 서방(書房)을 말한다.
♣ 서청[西淸]궁성 내의 맑고 조용한 곳으로 보통 관각(館閣)을 뜻한다.
♣ 서청[西淸]홍문관의 별칭.
♣ 서촉민유화[西蜀民猶化]한(漢) 나라 경제(景帝) 때 문옹(文翁)이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을 크게 떨치자, 그곳에 남아 있던 오랑캐의 풍속이 교화되었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
♣ 서촉유통사마격[西蜀喩通司馬檄]사마(司馬)는 곧 한(漢) 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한 무제(漢武帝) 때 낭중(郞中) 당몽(唐蒙)이 야랑(夜郞)ㆍ북중(僰中) 등 오랑캐의 땅을 점령하기 위해 파촉(巴蜀)의 이졸(吏卒) 수천 명을 징발하여 그들의 괴수를 군법(軍法)으로 베죽이곤 하므로, 파촉의 백성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자, 무제의 명을 받고 사마상여가 격문(檄文)을 지어 파촉의 백성들을 효유하여 진정시켰던 일을 말한다. 《史記 卷一百十七 司馬相如傳》
♣ 서총대[瑞葱臺]임금이 임어(臨御)하여 무관(武官)의 활 쏘는 것을 점검하던 대(臺).
♣ 서총대[瑞蔥臺]창덕궁(昌德宮) 후원에 쌓았던 석대(石臺)와 정자. 연산군 때 만든 것으로 영화당(映花堂) 동남쪽인 지금의 춘당대(春塘臺) 동편에 있었다.
♣ 서총대포[瑞蔥臺布]연산군의 명으로 서총대 앞에 못을 파는 역사에 동원된 백성이 혹시라도 일을 빠지거나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감역관이 그 대가로 면포를 받아들였다. 이에 백성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재산이 탕진되면 헌 옷에서 썩은 솜까지 빼내어 면포를 짜서 변상하였는데, 제품이 너무 헐어 쓸 수 없었으므로 후인들이 이 베를 ‘서총대’라고 하였고 시장에서 팔려고 하여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함.
♣ 서추[西樞]중추원을 이름.
♣ 서추[西樞未歸客]서추는 중추부의 별칭이다.
♣ 서축[西竺]서축은 천축국(天竺國)으로, 인도(印度)를 말한다.
♣ 서치[徐穉]후한 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자는 유자(孺子). 동한(東漢) 남창(南昌) 사람으로 가난하여 농사를 짓고 살면서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았는데, 진번(陳藩)이 그곳의 태수(太守)가 되어 여타 손님들은 접대하지 않았으나 서치가 찾아오면 항상 특별히 자리 하나를 놓아주고 그가 떠나면 도로 걸어두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五十三 徐穉傳》
♣ 서침등욕절[鼠侵藤欲絶]불경(佛經)에, “어떤 사람이 깊은 구렁에 떨어지다가 칡덩굴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인데, 밑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붉고 흰 쥐 2마리가 번갈아 칡덩굴을 쪼고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해와 달이 재촉하여 죽음이 가까워온다는 비유이다.
♣ 서탑[徐榻]서탑은 서치(徐穉)의 걸상. 후한 때 홍주(洪州)의 태수 진번(陳蕃)이 여간해서는 손님들을 접대하지 않는데 서치에게 만은 그의 덕을 흠모하여 특별히 걸상을 만들어 벽에 걸어놓았다가 그가 오면 앉게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後漢書 卷五十三 徐穉傳》
♣ 서토[西土]서토는 서촉(西蜀) 지방으로 오대 시대 촉(蜀)을 말한다.
♣ 서판[書判]서법(書法)과 문장의 우열을 판정하는 일. 당대(唐代)의 관리 선발의 네 가지 기준인 신(身)ㆍ언(言)ㆍ서(書)ㆍ판(判)을 말함. 신당서(新唐書) 선거지(選擧志)에, “凡擇人之法有四 一曰身 言體貌豊偉 二曰言 言言辭辯正 三曰書 言楷法遵美 四曰判 言文理優長 四事皆可取 則先德行 德均以才 才均以勞 得者爲留 不得者爲放…”이라 했음.
♣ 서평[西平]서평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을 말한다.
♣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인조(仁祖)의 장인인 한준겸(韓浚謙)의 봉호(封號)이다.
♣ 서포[漵浦]지금의 호남성 진양부(辰陽府) 서포현(漵浦縣).
♣ 서풍[山西風]장재(將材)다운 인물이 있음을 뜻함. 진한(秦漢) 이래로 산동(山東) 지방에는 재상이 나고, 산서 지방에는 장수가 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九》
♣ 서풍[緖風]여풍(餘風), 한풍(寒風). 찬기운이 남아 있는 바람
♣ 서풍오인[西風汚人]진(晉) 나라 유량(庾亮)과 왕도(王導) 두 사람이 서로 권세를 다투었는데, 유량은 석두(石頭)에 있고, 왕도는 야성(冶城)에 있었다. 왕도가 앉았을 때에 서풍이 크게 불어 티끌을 날리니 왕도가 부채를 들어 티끌을 막으며, “원규(元規 유량(庾亮)의 자(字))의 티끌이 사람을 더럽히네.” 하였다.
♣ 서하[西河]전국시대 위(魏)나라 땅으로 오늘날의 섬서(陝西) 동부와 황하(黃河) 서쪽의 일대인데, 공자의 문인 자하(子夏)가 그곳에서 아들을 잃고 통곡하다 실명(失明)하였다 하여, 자식을 잃은 슬픔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된다.
♣ 서하삭거[西河索居]서하는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를 가리키고, 삭거는 벗을 떠나 홀로 외로이 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자하가 서하에서 노년을 보내던 중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상명(喪明)을 하고는 증자(曾子)의 꾸지람을 받자 “내가 벗들을 떠나 혼자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吾離群而索居 亦已久矣]”고 사과했던 고사가 있다. 《禮記 檀弓上》
♣ 서하통[西河慟]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말한다.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있을 때 아들을 잃은 슬픔에 통곡하다가 실명(失明)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仲尼弟子傳》
♣ 서학[書鶴]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학서(鶴書)가 언덕 위로 달려온다.” 한 주에 “한(漢) 나라 때 선비를 초빙하는 편지를 마치 학의 머리처럼 쓰는 전자체(篆字體)를 이용한 까닭에 그 편지 명칭을 학두서(鶴頭書)라 했다.” 하였다.
♣ 서함구수영용혈[鼠銜窶籔寧容穴]세상에 용신(容身)하기 어려움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 양운(楊惲)의 말에 “쥐가 굴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또아리를 물었기 때문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서향각[書香閣]서향각은 춘당대(春塘臺) 북쪽에 있음.
♣ 서혈재통[鼠穴纔通]진(秦)나라와 한(韓)나라가 알여(閼與)에서 싸우면서 한(韓)나라가 조(趙)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조사(趙奢)가 말하기를, “길이 험하고 좁아서 두 쥐가 구멍에서 싸우는 것 같아서 장수가 용맹한 자 이길 것입니다.” 하였다.
♣ 서호[西湖]중국 절강(浙江) 항주(杭州)에 있는 호수 이름인데, 송(宋) 나라의 임포(林逋)가 학을 기르고 매화를 가꾸며 은거한 채 살던 곳이다. 구양수(歐陽脩)ㆍ소식(蘇軾) 등도 모두 이 곳에서 연회를 베풀고 절경(絶景)을 감상했었다.
♣ 서호농말여서시[西湖濃抹如西施]소동파의 시에, “만일 서호(西湖)를 가지고 서자(西子)에 비한다면, 얕은 화장과 짙은 화장이 모두 마땅하다.” 하였다, 이것은 서호의 경치가 개인 날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는 뜻이다.
♣ 서호처사[西湖處士]송(宋) 나라 때의 은사인 임포(林逋)를 이름. 그는 서호의 고산(孤山)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혼자서 매화를 심고 학(鶴)을 길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까지 하였다. 서화(書畫)와 시를 잘하여 그가 읊은 산원소매시(山園小梅詩)의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에 비끼어 있고 은은한 향기는 황혼 달 아래 부동하누나[疏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한 것을 세상에서 절창(絶唱)으로 일컬었다.
♣ 서호칠월주[西湖七月舟]참고로 소동파(蘇東坡)는 6월의 서호가 좋다고 하여 “畢竟西湖六月中 風光不與四時同”이라는 구절을 남겼다. 《蘇東坡詩集 卷50 西湖絶句》
♣ 서호팔경도[西湖八景圖]서호(西湖)는 중국 항주부(杭州府) 서쪽에 있는 둘레가 30 리쯤 되는 호수로 주위 산천이 수려하고 모든 물색도 화려하여 당(唐) 나라 이후로 손꼽히는 명승지인데, 거기에는 평호추월(平湖秋月)ㆍ소제춘효(蘇堤春曉) 등 십경(十景)이 있다고 한다. 《明一統志》
♣ 서화[西華]공자의 제자 공서화(公西華)이다. 공자가 자로(子路)ㆍ증석(曾晳)ㆍ염유(冉有)ㆍ공서적 등에게 세상에서 혹시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공서화는 대답하기를 “종묘의 제사에 관한 일이거나 혹은 외국 사신과의 회동이 있을 때 조정에서 예복을 갖춰 입고 예절을 보좌하는 조그만 재상이 되고 싶습니다.” 하였다 한다. 《論語 先進》
♣ 서회종[書會宗]서한(西漢) 때 광록훈(光祿勳) 양훈(楊惲)이 폐서인(廢庶人)이 된 것을 억울해하는 글을 그 친구 손회종(孫會宗)에게 보냈다가 그것이 화근이 되어 사형당한 고사가 있다.
♣ 서희[徐熙]오대(五代) 남당(南唐)의 종릉(鍾陵) 사람으로, 자연의 생물을 잘 그린 것으로 이름난 화가이다. 사생(寫生)을 잘하여 무릇 화죽소과금충(花竹蔬果禽蟲)의 유에 있어서 옛사람의 뜻 밖에 나왔다. 그래서 몰골도(沒骨圖)를 잘 그렸는데 필묵(筆墨)의 골기(骨氣)는 없고 다만 그 농려(濃麗)한 생태를 취하였음. 청 나라 초에 혼수평(渾壽平)이 오로지 그 법을 사용하여 세상에 유명하였음.
♣ 서희수묵도[徐熙水墨圖]서희(徐熙)는 남당(南唐)의 강령(江寧)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화과(花果)에 솜씨가 절묘하여 후주(後主)의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고 함. 《聖朝名畵評》
♣ 석[腊]석(腊)은 추석(酋腊)으로 잘 익은 독주(毒酒).
♣ 석가[石家]만석군(萬石君)의 집안을 말한다. 한(漢) 나라 석분(石奮)과 그의 네 아들이 모두 2천 석(石)의 관직에 이르렀으므로 경제(景帝)가 석분에게 내린 호(號)인데, “만석군의 질행(質行)은 제(齊)ㆍ노(魯)의 제유(諸儒)들도 모두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는 기록이 전한다. 《史記 萬石張叔列傳》
♣ 석가만석[石家萬石]석가는 한(漢) 나라 때의 명신(名臣) 석분(石奮)을 이른다. 그는 아들 건(建)ㆍ갑(甲)ㆍ을(乙)ㆍ경(慶) 4형제와 함께 모두 이천석(二千石)의 관직에 올랐으므로 만석군(萬石君)이라 일컬어졌는데, 그의 부자(父子)간에는 특히 효근(孝謹)으로 명망이 높았었다. 《史記 卷一百三》
♣ 석가산[石假山]바로 돌을 산의 모양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 석가측의향[石家厠衣香]한(漢)의 석건(石建)은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았으나 5일 간격으로 돌아오는 휴가 때마다 아버지 분(奮)의 한삼(汗衫)을 몰래 가져다가 손수 깨끗이 세탁하였다고 한다.
♣ 석간주[석간주]붉은 산화철(酸化鐵)을 많이 포함한 빛이 붉은 흙.
♣ 석간토혈[石間土穴]바위사이에 구멍을 팔만한 자리.
♣ 석갈[釋褐]천자(賤者)의 의복을 벗고 관복을 입는다는 말임. 중국의 옛 제도에 전시(殿試)를 치른 뒤에 새 진사(進士)는 태학(太學)에 나아가 석갈(釋褐)을 하고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 잠화(簪花)를 꽂고 술을 마시고 나오는 것으로 되었음.
♣ 석갑천년자기함[石匣千年紫氣含]경륜을 펴 보지 못하는 불우한 신세를 비유한 것이다.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보검이 땅속에 묻혀 두우(斗牛) 간에 자색 기운을 내뿜고 있다가 진(晉) 나라 뇌환(雷煥)에 의해 발굴되었던 고사가 있다.《晉書 張華傳》 참고로 이백(李白)의 시에 “유성처럼 빠른 화살 허리춤에 꽂아 넣고, 연꽃무늬 칼빛 번쩍 돌궤 속에서 꺼냈어라.[流星白羽腰間挿 劍花秋蓮光出匣]”라는 구절이 있다. 《李太白集 卷2 胡無人》
♣ 석거[石渠]돌로 둑을 쌓은 수로(水路)로 어구(御溝)와 같다.
♣ 석거[石渠]한(漢) 나라 때에 소하(蕭何)가 지은 각(閣)인데, 유향(劉向)이 일찍이 여기에서 오경(五經)을 강론하였다. 《漢書 劉向傳》
♣ 석거각[石渠閣]석거각(石渠閣)은 한(漢) 나라의 비서(秘書)를 쌓아둔 집이다. 석거각(石渠閣).
♣ 석거각[石渠閣]창덕궁 안에 있던 규장각을 가리킨다.
♣ 석경[石逕]돌 길.
♣ 석경[石經]돌에 새긴 경서(經書).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 채옹이 조명(詔命)을 받아 고문(古文)ㆍ전(篆)ㆍ예(隸)ㆍ3체(軆)로 오경(五經)을 돌에 새겨 태학(太學) 문밖에 세웠음.
♣ 석경[石鯨]한무제(漢武帝)가 곤명(昆明)을 치기 위하여 수전(水戰)을 연습시키려고 장안(長安)에 곤명지란 큰 못을 파고 거기에 돌고래[石鯨]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 뒤에 한 나라가 망한 뒤에 곤명지는 황폐하고 돌고래만 남아 있다.
♣ 석계룡[石季龍]후조(後趙)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로서 이름은 호(虎), 계룡은 그의 자임. 후조 석늑(石勒)의 조카로, 늑이 죽자 늑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후조의 황제가 되었음.
♣ 석고[石鼓]주(周) 나라 선왕(宣王) 때 사주(史籒)가 선왕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서 북처럼 생긴 돌에 새겼다고 하는데, 이 돌이 북경 부자묘(夫子廟)의 대성문(大成門) 안에 있다.
♣ 석고가[石鼓歌]석고(石鼓)에 대한 노래. 석고는 중국 고대의 석비(石碑). 그에 대해 한유(韓愈)는 석고가를, 소식(蘇軾)은 후석고가(後石鼓歌)를 지었는데 두 석고가는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에도 보임.
♣ 석고문[石鼓文]주 선왕(周宣王)이 기양(岐陽)으로 사냥 나갔을 때 그의 업적을 돌을 다듬어 북[石鼓] 열 개를 만들어서 공을 기록하였는데, 그 자체(字體)는 사주(史籒)의 대전(大篆)이었다 한다. 처음에는 기양현(岐陽縣)에 세워졌는데, 당(唐) 나라 사람 정여경(鄭餘慶)이 봉상현(鳳翔縣)의 공자묘(孔子廟)로 옮겼다 함.
♣ 석곡[石谷]조박(趙璞)의 호이다.
♣ 석과[碩果]큰 열매로, 큰 이익이나 공적을 말한다. 주역(周易) 박괘(剝卦) 상구(上九)에, “큰 열매가 먹히지 않는다.[碩果不食]”하였다.
♣ 석과부지[碩果扶持]석과는 큰 과일, 곧 군자(君子)의 뜻. 역경(易經) 산지박괘(山地剝卦)에 “상구(上九)는 석과가 먹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군자는 여론의 추대를 받는다.” 하였는데, 군자를 보존하여 여론의 추대하는 바가 되게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 석관[石關]한대(漢代)의 궁관(宮觀)이름. 석궐관(石闕觀).
♣ 석교[石橋]삼제략기(三齊略記)라는 책에 “진시황(秦始皇)이 돌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가 뜨는 곳을 살펴보려 하였다. 그러자 신인(神人)이 바위를 몰아 바다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속도가 느리면 문득 채찍질을 가하였으므로, 바위마다 모두 피를 흘린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 석교진제단[石橋秦帝斷]진 시황(秦始皇)이 해상(海上)에다 석교(石橋)를 만들 적에 해신(海神)이 기둥을 세워주었으므로, 진 시황이 그를 고맙게 여겨 해신을 만나보려고 하자, 해신이 말하기를 “내 형상이 추하니 내 형상을 그리지 않기로 약속만 한다면 만나드리겠소.” 하므로, 진 시황이 석교를 타고 30리를 들어가 해신과 만났는데, 진 시황의 좌우에서 몰래 해신의 다리를 그렸다. 그러자 해신이 크게 성내어 “황제가 나와의 약속을 저버렸으니 빨리 가시오.” 하므로, 시황이 곧장 말을 타고 나오는데, 말 뒷다리가 석교에서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석교가 무너졌다고 한 고사이다.
♣ 석권[席卷]자리를 마는 것처럼 한쪽으로부터 모조리 감아 취하는 것으로, 완전히 자기의 세력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것. 토지 등을 공략하여 쉽게 차지함.
♣ 석궐[石闕]너무 슬퍼 말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고악부(古樂府)에 “입안에 석궐이 생기니 빗돌을 문 듯 말할 수 없네.[石闕生口中 銜碑不得語]" 한 데서 나온 것이다.
♣ 석규[石閨]바위 틈에다 규방(閨房)을 만든 것으로 선녀(仙女)의 거실임.
♣ 석기린[石麒麐]자품이 뛰어난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말. 진서(陳書) 서릉전(徐陵傳)에 “서릉이 어렸을 때 보지상인(寶誌上人)이란 도사가 그를 보고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이 아이는 천상의 석기린이다.’ 했다.” 하였다.
♣ 석녀[石女]유마힐경(維摩詰經)의 번역된 이름. 《通俗編 石女》
♣ 석녀[石女]아이를 낳지 못하는 계집. 당(唐) 나라 현장(玄奘) 이후에는 허녀(虛女)라 번역했다.
♣ 석노[石砮]돌화살촉. 고대에 우리나라가 중국에 공물로 바쳤음.
♣ 석노[釋老]석가와 노자
♣ 석두일편요강기[石頭一片搖降旗]항복했음을 뜻함. 진(晉) 나라 때 왕준(王濬)이 석두성을 격파하여 손호(孫皓)에게 항복을 받고 위명(威名)을 크게 떨쳤는데, 유우석(劉禹錫)의 서새산회고시(西塞山懷古詩)에 “천 길의 쇠사슬은 강물 속에 잠겨버리고 한 조각 항복 깃발만 석두성에 나왔네[千尋鐵鎖沈江底 一片降旛出石頭]” 한 데서 온 말이다.
♣ 석두저노[石竇猪奴]석두저노는 중국의 삼국(三國) 시대 위(魏) 나라 왕필(王弼)의 호칭임. 왕필은 뛰어난 문인(文人)으로서 주역(周易)ㆍ노자(老子)의 주석을 내었다.
♣ 석란산[錫蘭山]석란산은 인도양 가운데 있는 섬.
♣ 석랑[石郞]석랑은 후진 고조(後晉高祖)인 석경당(石敬塘)을 말하는데, 경당이 거란의 힘을 빌려 후당(後唐)을 멸망시켰고 이어 거란의 힘에 의하여 후진의 황제가 되었으므로, 거란에 대하여 신하라고 일컬으면서 섬겼다.
♣ 석루[石樓]당(唐) 나라 때 백거이(白居易)가 만년에 향산(香山)에다 석루를 짓고 여기에서 유유자적하였다.
♣ 석루[石樓]돌로 만든 패방(牌坊)으로, 패방은 어떤 사람의 덕행을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일종의 건축물을 말한다. 공덕패방(功德牌坊), 정절패방(貞節牌坊) 등이 있다.
♣ 석류[錫類]효자(孝子)의 덕행이 널리 퍼져서 계속 남에게까지 미침을 이른 말이다.
♣ 석류시[錫類詩]석류는 시경(詩經) 대아(大雅) 기취(旣醉)에 “효자가 다하지 않아서 길이 너의 유를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 한 데서 온 말로, 효자의 행실이 널리 퍼져서 효자가 계속하여 나오게 됨을 이른 말이다.
♣ 석륵[石勒]중국 후조(後趙)의 시조 갈(羯)족 출신, 원래 노예이며 도적이었다. 후에 북한(北漢) 즉 전조(前趙)의 유연(劉淵)의 장군으로 활약하였으나, 나중에 배반, 자립하여 건국하였다. 양국(襄國)에 도읍하고, 한때 강북(江北)을 지배하였다.
♣ 석륵씨[石勒氏]석륵씨(石勒氏)는 중국을 점령하여 남북조 시대가 되었다.
♣ 석름[石廩]중국 형주부(衡州府) 형산(衡山)의 한 봉우리임.
♣ 석름봉[石廩峯]형산(衡山)에 있는 한 봉우리의 이름인데, 이 봉우리의 모양이 창름(倉廩)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 한다.
♣ 석림[石林]돌이 나무와 같이 생긴 것. 석목의 숲, 이 속에 말하는 짐승이 있다 함.
♣ 석마[石馬]돌을 조각하여 만든 말. 무덤 앞에다 세워둠.
♣ 석막[石幕]부령의 옛 이름이다.
♣ 석만경[石曼卿]만경은 송(宋) 나라 석연년(石延年)의 자(字). 송 진종(宋眞宗) 때 대리시승(大理寺丞)을 지냈으며, 그의 문장은 매우 기운이 있고 더욱 시에 뛰어났다 함.
♣ 석목[析木]별자리 이름이다. 이십팔수 중 기(箕), 두(斗)에 해당하고,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 중 인마궁(人馬宮)에 해당하며, 십이지(十二支)의 인(寅)에 해당한다. 옛날 중국에서는 국가의 위치를 별들의 방위에 따라 배분하여 불렀는데, 우리나라와 중국 북경이 여기에 속한다 하여 이 지역을 석목지위(析木之位)라 불렀다. 《晉書 卷十一 天文志上》
♣ 석목[析木]이아(爾雅) 석천(釋天)에 “석목은 기성(箕星)ㆍ두성(斗星)의 사이요 은하수 가에 있다.” 했는데, 그 주에 “십이차(十二次)로 나누면 석목은 연(燕) 나라의 위치이다.” 하였다.
♣ 석목[析木]중국의 유연(幽燕) 지역을 가리킨다. 본디는 성차(星次)의 이름으로, 십이진(十二辰)으로는 인(寅)이고, 이십팔수(二十八宿)로는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의 사이에 속하는데, 이곳은 유연(幽燕)의 분야(分野)에 해당되므로, 유연 지방의 대칭(代稱)으로 쓴다.
♣ 석목진[析木津]기성(箕星)과 두성(斗星) 사이에 천한(天漢)이 있고, 기성이 목(木)에 속하기 때문에 석목의 나루라고 한 것인데, 지역으로는 바로 요동(遼東) 땅을 의미한다. 《春秋左傳 昭公 8年, 讀史方輿紀耍 山東 遼東都指揮使司 海州衛》
♣ 석목진[析木津]하늘의 석목성(析木星) 별자리에 속한 분야로, 중국에 있어서는 연(燕) 나라 즉 유주(幽州)가 여기에 해당된다. 《晉書 天文志上》
♣ 석문[石門]이백(李白)이 젊어서 은거하던 곳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뜻한다. 이백의 하도귀석문구거(下途歸石門舊居)에 “석문(石門)에 흐르는 물엔 온통 복사꽃이 떠 있네.”라 하였다.
♣ 석문[席門]헌 자리로 단 문으로 가난한 집을 뜻함.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집이 성 밑 궁벽한 마을에 있고 떨어진 자리로 문을 달았으나 문밖에는 찾아오는 장자(長者)의 수레가 많이 있었다.” 하였음.
♣ 석문군평복[石問君平卜]군평(君平)은 한(漢) 나라 엄준(嚴遵)의 자로, 성도(成都)의 시장에서 점을 치던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황하(黃河)의 근원에서 한 부인이 비단을 빠는 것을 보고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여기는 천하(天河)이다.” 하고는 돌 하나를 주면서 돌아가 군평에게 물어 보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군평에게 물으니, “이 돌은 직녀(織女)의 베틀을 괴었던 돌이다.” 하였다.
♣ 석문륜제[席門輪蹄]석문(席門)은 거적을 매달아 놓은 문으로 청빈한 집이나 은자(隱者)의 거처를 뜻하는데,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다 떨어진 거적으로 문을 매달아 놓은 집에 장자의 수레 소리가 많이도 찾아왔다.[以弊席爲門 然門外多有長者車轍]”하였다.
♣ 석문인[席門人]거적으로 문을 달만큼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史記 陳丞相世家》
♣ 석범[石帆]왕사정(王士禎)의 석범정(石帆亭)을 말한 것인데 옹방강이 그 석범 두 글자를 자기의 당 앞에 새겨 두고 시경헌(詩境軒)이라 이름하였음.
♣ 석범구게자[石帆舊偈子]석범은 왕어양(王漁洋)의 석범정(石帆亭)을 말함. 옹방강의 소석범정저(小石帆亭著)가 있음. 왕어양의 추림독서도(秋林讀書圖)는 문점(文點)이 그린 것인데 소재(蘇齋)에 수장되어 있었음.
♣ 석범정[石帆亭]왕사정이 육유를 사모하는 뜻에서 육유가 살았던 석범에다 정자를 짓고 이를 석범정이라 하였다.
♣ 석본[石本]석각(石刻)의 탁본을 말한다.
♣ 석부[舃鳧]한 나라 때 왕교(王喬)가 신었던 신발로, 신선들이 신는 신발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전(方術傳) 왕교에, “왕교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섭령(葉令)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臺)에 나와 조회하였다. 황제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였다. 태사가 엿본 뒤에 왕교가 올 때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상방(尙方)에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전에 상서원(尙書院)의 관속들에게 하사한 신발이었다.” 하였다.
♣ 석불난[席不暖]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戲)에 “성철(聖哲)들은 세상을 구제하기에 항시 급급하여 늘 천하를 주유하느라 공자(孔子)가 앉은자리는 따스해질 겨를이 없었고, 묵자(墨子)가 사는 집에는 굴뚝에 그을음이 낄 여가가 없었다.” 하였다.
♣ 석불반면[石佛反面]돌부처가 얼굴을 돌린다는 뜻으로, 아주 미워하고 싫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석사[夕死]진리를 탐구하는 일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이인(里仁)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 석상번경호경참[石上繙經虎更參]옛날에 어느 고승이 불경을 연역(演繹)하여 설법하면 문 밖에 호랑이가 와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다.
♣ 석상와준[石上窪樽]바위 구덩이 술동이로, 바위가 움푹 패여 그곳에 술을 부어놓고 떠 마실 만하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다. 당(唐) 나라 호주 별가(湖州別駕) 이적지(李適之)가 현산(峴山)에 올라가 한말 술을 부어놓을 만한 바위 구덩이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와준정(窪罇亭)을 세우고 놀았다 하여 산에서 술자리를 벌여 호방하게 노는 경우에 흔히 인용된다.
♣ 석상정혼[石上精魂]당(唐) 나라 때의 고승(高僧) 원택(圓澤)이 그의 친구 이원(李源)과 함께 삼협(三峽)에 이르러 어느 물 긷는 부인(婦人)을 보고는 이원에게 말하기를, “저 부인이 바로 내 몸을 의탁할 곳이다. 앞으로 12년 뒤에 항주(杭州)의 천축사(天竺寺) 뒷산의 삼생석(三生石)에서 서로 다시 만나자.” 하고는, 그날 밤에 원택이 죽었는데, 그 후 12년 만에 이원이 약속대로 그곳을 찾아가 보니, 과연 원택이 재생(再生)하여 목동(牧童)이 되어 노래하기를, “삼생석 위의 옛 정혼이 풍월을 읊는 것은 논할 필요도 없네 친구가 멀리 찾아와 주니 부끄러워라 이 몸은 달라졌지만 본성은 길이 그대로라오[三生石上舊精魂 賞月吟風不要論 慚愧情人遠相訪 此身雖異性長存]”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석상진[席上珍]상고(上古)의 아름다운 도(道)를 늘어 놓은 것을 말하는데, 유자(儒者)의 학덕(學德)을 비유하기도 한다.
♣ 석서[碩鼠]시경(詩經) 위풍(魏風)의 편명으로, 폭정(暴政)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달픔을 읊은 시이다.
♣ 석서[石鼠]쥐의 일종으로 석서(碩鼠)라고도 한다. 중화고금(中華古今) 주에 “석서는 다섯 가지 기능이 있으나 모두 능통하지 못하다. 날기는 하지만 집을 뛰어넘지 못하고, 기어오르기는 하지만 나무 끝까지 가지 못하고, 헤엄치기는 하지만 골짜기를 건너지 못하고, 땅을 파기는 하지만 제몸 하나 감추지 못하고, 달리기는 하지만 사람을 피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여러 가지 재주가 있으나 한 가지도 능통하지 못함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 석서편[惜誓篇]초사(楚辭) 편명. 혹은 가의(賈誼)가 지었다고 하고, 혹은 작자 미상이라고도 하는 작품으로 내용은 초 회왕(楚懷王)이 자기와 약속을 하고서도 끝에 가서 그 약속을 저버려 결국 유시무종의 인물이 되었음을 풍자한 것임. 《楚辭 賈誼 惜誓 章句》
♣ 석석[析析]나뭇가지에 부는 바람 소리
♣ 석석[淅淅]바람 소리, 방울 소리
♣ 석선[石扇]부채 모양의 바위.
♣ 석성[石城]석성은 지명(地名)으로 막수(莫愁)의 고향인데 막수는 노래를 잘 불렀다. 《唐書 樂志》
♣ 석성악[石城樂]남조 송(南朝宋) 때 장질(臧質)이 경릉내사(竟陵內史)로 있으면서 그곳에 있던 석성(石城) 위에 올라가, 멀리 관망을 하다가 뭇 소년들의 통창한 가요 소리를 듣고 이를 인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 석수[石髓]삼국 시대 위(魏) 나라 왕렬(王烈)이 태행산(太行山)에 갔을 때 산이 쪼개지며 그 속에서 골수(骨髓) 같은 푸른 진액(津液)이 나왔으므로 그것을 환약(丸藥)으로 만들어 복용해서 장생했다는 이야기와, 그 약을 다시 혜강(嵆康)에게 건네 주자 곧바로 딱딱한 청석(靑石)으로 변해 버렸으므로 혜강이 신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왕렬이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神仙傳 王烈ㆍ晉書 嵆康傳》
♣ 석수[石髓]석종유(石鍾乳), 즉 돌 고드름의 이명(異名)인데, 선인(仙人)들이 곧잘 이것을 복용한다고 한다. 《本草 石髓》
♣ 석수[石髓]석종유(石鍾乳). 약으로 쓰인다 한다. 진(晋)나라 왕렬(王烈)이 산중에 들어갔더니 바위가 벌어지며 그 속에서 푸른 진흙 같은 것이 흘러 나왔다. 왕렬은 그것을 조금 가지고 집어 왔더니 단단한 돌이 되고 말았다. 혜강(嵇康)이 듣고, “그것은 석수(石髓)인데 먹었더라면 신선이 될 수 있다.” 하였다.
♣ 석수[石獸]옛날 무덤 앞에 세우던 돌로 만든 짐승의 형상을 말한다.
♣ 석수황정[石髓黃精]모두 선인(仙人)이 복용하는 약명(藥名)이다.
♣ 석숭[石崇]자는 계륜(季倫), 아명(兒名)은 제노(齊奴), 청주(靑州) 사람. 산기랑(散騎郞)과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을 지냄. 당대의 최고 갑부로서 귀척(貴戚) 왕개(王愷)‧양수(羊琇) 등과 부(富)를 다툼. 나중에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에게 살해됨.
♣ 석실[石室]석실은 금궤석실(金匱石室)의 준말로, 국가의 귀중한 도서를 보관하는 곳이다.
♣ 석실[石室]신선이 사는 석혈(石穴)을 이름. 상고 시대 선인(仙人) 광성자(廣成子)가 공동산(崆峒山) 석실에서 살았다 한다.
♣ 석실[石室]청음(淸陰) 즉 김상헌(金尙憲)의 전리(田里)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 자호(自號)하기도 하였다.
♣ 석실낭함[石室琅函]석실은 옛날 도서(圖書)를 소장하는 곳을 가리킨 말로, 즉 엄중히 봉장(封藏)하는 뜻을 부쳐 이른 말이다.
♣ 석실박[石室縛]석실은 돌로 만든 장서실(藏書室)인데, 즉 그 안에 소장된 서적을 말한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진(秦) 나라가 고문(古文)을 없애버리고 시(詩)ㆍ서(書)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명당(明堂) 석실에 서적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하였다.
♣ 석실서[石室書]석실(石室) 금궤(金匱)에 영원히 보관될 가치 있는 저술을 말한다. 한편 김상헌(金尙憲)은 청음(淸陰) 외에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 석실서재[石室書齋]양주목(楊州牧)에 있는 서원(書院). 효종 7년(1656)에 건립한 것으로,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ㆍ김수항(金壽恒)ㆍ민정중(閔鼎重)ㆍ이단상(李端相)등이 배향되었음. 《新增東國輿地勝覽》
♣ 석실옹[石室翁]호가 석실산인(石室山人)인 김상헌(金尙憲)을 가리킨다.
♣ 석씨전가록[石氏全家祿]한 나라 때 하내(河內) 온현(溫縣) 사람인 석분(石奮)을 가리킨다. 15세 때 하급 관리로부터 시작하여 고조(高祖)ㆍ문제(文帝)ㆍ경제(景帝)를 계속 섬기는 동안 태중대부(太中大夫)ㆍ태자태부(太子太傅)를 지내고 구경(九卿)에 까지 이르렀으며, 그의 건(建)ㆍ경(慶)등 네 아들의 받는 녹이 각각 2천 석에 이르러 그의 몫까지 모두 1만 석이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만석군(萬石君)이라 불렀다. 《史記 卷一百三 石奮傳》
♣ 석씨지궁근[石氏持躬謹]한대(漢代)의 석분(石奮)을 말함. 석분이 15세 때 한 고조(漢高祖)를 만났는데, 고조는 그의 공손하고 조심성 있는 태도가 좋아서 그의 누이를 미인으로 맞아들이고 석분을 가까이 했다. 경제(景帝)때는 천자(天子)가 만석군(萬石君)이라고 부를 만큼 네 아들과 함께 부귀를 누렸는데 자손들도 그 가르침을 받아 효근(孝謹)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史記 卷一百三》
♣ 석양[石羊]능(陵) 앞에 세워놓은 돌로 조각한 양을 말한다
♣ 석양문적루응점[夕陽聞笛淚應霑]진(晋) 나라 향수(向秀)의 사구부(思舊賦)에, “산양(山陽)을 지나다가 피리소리를 듣고 옛날 혜(嵇)ㆍ완(阮)과 함께 놀던 생각이 나서 슬프다.” 하였다.
♣ 석양풍수제자오[夕陽風樹啼慈烏]돌아간 부모를 생각하여 슬퍼하는 말이다. 바람 부는 나무란 곧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고, 까마귀는 본디 제 어미에게 반포(反哺)를 하는 효조(孝鳥)이므로 이른 말이다.
♣ 석연[石鷰]모양이 제비처럼 생긴 돌로 뇌풍(雷風)을 만나면 제비처럼 날아 오르는데, 이는 큰비가 내릴 조짐이다. 본초(本草) 석연(石鷰)에 “제비처럼 생겼고 무늬가 있는데 둥글고 큰 것이 수놈이고, 길고 작은 것이 암놈이다.” 하였다.
♣ 석연[石燕]제비처럼 날아다니는 돌이라는 뜻이다. 상수(湘水) 부근에 있는 석연산(石燕山)의 돌이 바람을 맞으면 마치 제비처럼 공중에 날린다는 고사가 있다. 《水經注 湘水》
♣ 석연[石燕]중국 영릉산(靈陵山)에 있는 모양이 마치 제비처럼 생긴 돌인데, 비바람을 만나면 즉시 날아오른다고 한다.
♣ 석연배녹평[錫宴陪鹿苹]시경(詩經)의 녹명편은 조정의 연회에 쓰는 시편(詩篇)인데, “내가 아름다운 손이 있어 비파를 두드리고 피리를 분다.”는 구절이 있다.
♣ 석요[石銚]소식의 돌솥이 우수촌(尤水村)의 집에 남아있었는데 수촌이 화모(畫摹)하여 옹방강에게 부쳤음.
♣ 석우도[석우도]진(秦) 나라 혜왕(惠王)이 촉 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이에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들고는 그 뒤에다가 금(金)을 놓아 둔 다음 “소가 금똥을 누었다.”고 소문을 내니, 촉 나라 사람들이 그 소를 달라고 하였다. 혜왕이 주겠다고 하자, 촉에서 역사(力士) 다섯 명을 보내어 길을 뚫고 끌어오게 하였다. 그 뒤 신왕(愼王) 때에 이르러서 그때 뚫은 길을 통하여 가서 촉 나라를 정벌하였다. 《華陽國志》
♣ 석우풍[石尤風]거세게 부는 역풍(逆風)을 말한다. 옛날에 석씨(石氏)에게 딸이 있어서 우랑(尤郞)에게 시집갔는데, 우랑이 다른 곳으로 장사를 가겠다고 하였다. 아내가 한사코 말렸으나 듣지 않고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다. 아내가 몹시 애통해하다가 병을 얻어 죽게 되었는데, 임종할 때 “내가 죽은 뒤에 멀리 항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큰바람을 일으켜서 배가 떠나지 못하게 해 천하의 부인네들이 화를 당하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로는 배가 떠나려 할 때 거센 역풍이 불면 이를 석우풍이라 하여 출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江湖紀聞》
♣ 석위[石尉]일찍이 남만 교위(南蠻校尉)를 지낸 진(晉) 나라의 거부(巨富) 석숭(石崇)을 말한다.
♣ 석음빙[夕飮氷]왕명(王命)을 받들고 책임감에 의해 몹시 두렵고 걱정이 되어 속이 타는 것을 이른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나는 아침에 명(命)을 받고 저녁에 얼음을 마셨으니, 나에게 내열(內熱)이 생겼는가 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석인[碩人]석인은 덕이 높은 은사(隱士)를 가리킨다.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에, “은사의 집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하였다.
♣ 석인[碩人]아름다운 덕의 소유자를 일컫는 말로, 옛날 시랑(侍郞) 이상의 부인을 봉(封)할 때 이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 석일모[惜一毛]세상이 이기주의(利己主義)로 변한 것을 탄식한 말. 양주(楊朱)는 전국(戰國) 때 사람으로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하여 자신의 털 하나를 뽑으면 천하가 태평해진다 하여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다 . 《孟子 盡心上》
♣ 석작[石碏]석작은 춘추시대 때 위(衛)나라의 대부이다. 그의 아들 후(厚)가 자기의 경계를 듣지 않고 공자 주우(公子州吁)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서 환공(桓公)을 죽이고 주우를 왕으로 추대할 계책을 꾸미자, 그들을 진(陳)나라로 유인하여 죽인 뒤에 공자 진(公子晉)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 《左傳 隱公 三年, 四年條》
♣ 석작준[石作尊]소식(蘇軾)의 시에 “산사람이 권하는 술 국자가 필요 있나, 바윗돌 움푹 패어 술통을 이뤘는걸.[山人勸酒不用勺 石上自有尊罍窪]”이라는 표현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39 次韻正輔同遊白水山》
♣ 석장[錫杖]선장(禪杖)을 이름. 막대에 육환(六環)의 금석(金錫)이 달려 있기 때문에 석장(錫杖)이라 칭함.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游天台山賦)’에 “진정한 도인은 석장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라는 말이 있다.
♣ 석장군[石將軍]진(晉) 나라 갑부였다는 석숭(石崇)을 가리킨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태치(汰侈)에 “석숭은 금곡원(金谷園)에서 기생들이 손님에게 술을 취하도록 권하지 않으면 기생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였다.
♣ 석장무진[石藏無盡]불가의 무진장(無盡藏)을 말하는데 천만 덩이의 돌을 뜻하는 것임.
♣ 석전[釋奠]신(神) 앞에 술잔을 올리고 제사하는 것을 이름. 예기(禮記) 문왕 세자(文王世子)에 “무릇 학궁(學宮)을 세우면 반드시 선성(先聖)ㆍ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한다.” 하였으므로, 주자(朱子)는 창주(滄洲)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孔子)를 위시,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와 송조(宋朝)의 군자(君子)를 모셔 사시로 제사하였음.
♣ 석전[石戰]음력 대보름날 각지방에서 행하던 남성의 돌던지기 놀이는 ‘편쌈’ ‘石戰’ ‘便戰’ 으로도 불리었다. 전쟁에 대비하여 鍊武의 큰 뜻을 가지는 전투적 놀이로 삼포 왜변 때 석전선수들을 모아 왜인의 난동을 막기도 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전승은 되고 있지 않음.
♣ 석전성선생[石田成先生]석전(石田)은 성로(成輅)의 호이다.
♣ 석점두[石點頭]도리(道理)가 투철하고 설복(說服)하는 힘이 강하여 다른 사람을 능히 신복(信服)시키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축도생(竺道生)이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돌들을 모아 놓고 문도(門徒)로 삼은 다음 열반경(涅槃經)을 강론하면서 “내가 설법한 것이 부처의 마음과 들어맞는가?”하니, 돌들이 모두 머리를 끄덕였는데, 열흘 만에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蓮社高賢傳 道生法師》
♣ 석정[石井]강릉부(江陵府) 동쪽 15리 지점의 한송정(寒松亭) 옆에 있는 우물 이름으로, 이곳에서 술랑(述郞) 등 네 선인(仙人)이 차를 다려서 마셨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4 江陵大都護府》
♣ 석정[石井]석정은 수경(水經) 사수주(沙水注)에 “상동(湘東) 음산현(陰山縣)에 있는 후담산(候曇山) 위에 석정이 있는데, 평소에 물이 없다가 기도를 할 때에는 물이 솟아난다.” 했다.
♣ 석정연구[石鼎聯句]도사(道士) 헌원 미명(軒轅彌明)과 유사복(劉思服)ㆍ후희신(侯喜新)이 합작한 시. 한퇴지는 이상 세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석정연구서(石鼎聯句序)를 지었다.
♣ 석주[石洲]석주는 권필(權韠)의 호이다. 정철의 문인으로 과거에는 뜻이 없이 유생들을 가르치고 가난하게 살면서 시명(詩名)을 떨쳤는데, 광해군 척족(戚族)들의 방종한 행태를 비방하다가 시안(詩案)에 걸려 귀양가는 도중에 폭음으로 죽었다. 성로(成輅)가 특히 석주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가 죽은 뒤로는 항상 비통하게 여겨 체읍(涕泣)하면서 자신의 시고(詩稿)도 모두 불태운 채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國朝人物考 下》
♣ 석주집[石洲集]조선 선조(宣祖) 때 학자 권필(權鞸)의 문집.
♣ 석죽군[石竹裙]석죽은 패랭이꽃으로, 곧 이 꽃의 무늬가 놓인 치마를 말한다.
♣ 석지[石砥]석지는 돌 주춧돌을 말함.
♣ 석지국[析支國]석지국은 임강(臨江)서쪽에 있었던 상고 때의 나라 이름이다.
♣ 석진[席珍]석상(席上)의 보배. 유자(儒者)의 학덕을 석상(席上)의 진품(珍品)에 비유한 것.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儒有席上之珍 以待聘"이라 하였음.
♣ 석참충빙루[昔慚蟲氷陋]여름에만 사는 벌레는 겨울을 모른다는 뜻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 석채[釋菜]문묘(文廟)에서 공자를 제사하는 의식. 석전(釋奠).
♣ 석책[射策]석책은 과거의 일종으로 경서(經書)의 의의(疑義)와 시무(時務)에 대한 문제의 답안을 책(策)에 써서 올리게 하여 그 사람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이다.
♣ 석척[蜥蜴]석척은 도마뱀으로, 오랫동안 가물어 기우제를 지낼 때 도마뱀을 물동이 속에 넣고 동자(童子)들이 비를 내려 달라고 제사를 지낸다.
♣ 석척[夕惕]저녁에 두려운 마음
♣ 석척기우[蜥蝪祈雨]중국에서 기우제를 용과 비슷한 도마뱀을 잡아 병 속에 넣고 지냈다는 고사.
♣ 석척시우아[蜥蝪狋吽牙]석척은 도마뱀이고, 시우아(狋吽牙)는 개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이름. 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엎어놓은 그릇 속에 수궁(守宮)을 넣어 두고는 여러 수가(數家)들에게 이를 알아맞히게 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다 못 알아맞혔으나 동방삭(東方朔)은 이를 “수궁이 아니면 석척입니다.”고 알아맞혔고, 또 곽사인(郭舍人)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시우아(狋吽牙)는 뭐냐?"며 알아맞히라고 하자, 동방삭은 또 “시우아는 개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이다.” 하여 대번에 알아맞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卷六十五》
♣ 석천[石川]임억령(林億齡)의 호이다. 임억령은 나주 인근의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지냈다.
♣ 석천[石泉]조선 말기 순조(純祖) 때의 학자로, 일찍이 학문에 전심하여 경서(經書)들을 고증학적 방법으로 주석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겼던 신작(申綽)의 호이다.
♣ 석천노[石川老]임억령(林億齡)을 말함. 문장과 풍류가 뛰어났으며 아우 임백령(林百齡)이 을사사화에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과 합세함을 보고 은퇴하였다.
♣ 석천옹[石泉翁]조선 후기의 경학자로 호가 석천인 신작(申綽)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경서(經書)에 많은 주해(註解)를 냈다고 한다.
♣ 석청[石靑]안료(顔料) 이름. 도자기 장식용으로 쓰이는 물건. 《本草 扁靑》
♣ 석치[石癡]석치는 영조(英祖) 때의 화가(畫家)인 정철조(鄭喆祚)의 호이다.
♣ 석탄[石灘]이존오가 석탄(石灘)에 살았기 때문에 호(號)가 석탄이었다.
♣ 석허중[石虛中]석허중은 돌 벼루를 의인화(擬人化)한 표현이다.
♣ 석호[石湖]원 나라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호인데 일찍이 국보(菊譜)의 서(序)를 짓고 30여종의 국화를 유별로 모아 명품(名品)에 따라 서술하였음.
♣ 석호궁중형극생[石虎宮中荊棘生]남북조(南北朝) 시대에 후조(後趙) 임금 석호(石虎)가 궁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중[僧] 불도증(佛圖證)이 읊조리기를, “전(殿)이여, 전이여, 가시[棘]가 숲을 이루어 장차 사람의 옷을 찢으리로다.” 하므로 석호가 사람을 시켜 궁전의 돌 밑을 파보니 가시가 나 있었다. 석호의 수양손(收養孫) 염민(冉閔)의 아명(兒名)이 극노(棘奴)인데, 후일에 석호의 자손이 모두 염민의 손에 죽음을 당하였다.
♣ 석호룡[石虎龍]후조(後趙)의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 석호봉누[石戶蓬累]석호농(石戶農)은 순(舜) 임금의 친구였던 농사꾼 석호를 말하고, 봉루(蓬累)는 날리는 쑥대처럼 정처없이 떠돌며 사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순(舜)이 석호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 처자를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 석호열경현[石虎裂驚絃]석호(石虎)는 범처럼 생긴 돌. 옛날 초(楚) 나라의 웅거자(熊渠子)가 밤에 길을 가다가 돌을 보고는 엎드려 있는 범으로 착각한 다음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깊이 박혔다. 뒤에 돌임을 확인하고는 다시 화살을 쏘았으나 촉이 들어가기는커녕 흔적조차 나지 않았다. 이것은 먼젓번에는 거자가 꼭 범인줄 알고 온 정성을 쏟아 쏘았기 때문에 지성에 감동되어 돌이 쪼개진 것이라 한다. 《韓詩外傳》
♣ 석화[石畫]치밀하고 원대한 계책을 말한다. 석(石)은 석(碩)과 같은 뜻이다.
♣ 석획지신[石畫之臣]석(石)은 석(碩)과 통용하는 것으로서, 즉 큰 계책을 지닌 신하들을 말한다. 《漢書 匈奴傳下》
♣ 선[蟬]고관들이 갓 옆에 다는 장식품이니, 예복의 일부이다.
♣ 선[善]잘하다.
♣ 선가[善價]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을 가지고 있을 경우 궤 속에 보관해 둘 것인지 아니면 비싼 값을 받고 팔 것인지[求善賈而沽諸]를 묻자, 공자가 “나는 비싼 값으로 나를 사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論語 子罕》
♣ 선가계견[仙家鷄犬]한(漢)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신선의 도술을 터득하여 온 가족을 데리고 승천(昇天)하였는데, 그가 먹고 남긴 선약(仙藥)을 개와 닭들이 핥아먹고는 그를 따라 하늘로 함께 올라갔다는 ‘견폐백운(犬吠白雲)’의 전설이 전한다. 《論衡 道虛》
♣ 선가욕란[仙柯欲爛]술이기(述異記)에 “진(晉) 나라 왕질(王質)이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동자(童子)가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중에 동자가 주는 대추씨 같은 물건을 먹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도끼를 놓고 차분히 앉아서 바둑을 구경하는 중에, 동자가 그에게 ‘당신의 도끼자루가 벌써 썩었소.’ 하므로 동리로 돌아와 보니, 전에 살던 사람은 생존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한 데서 온 말로, 세월이 덧없이 흘러 변천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선갑[先甲]상갑(上甲)과 같은 뜻.
♣ 선개[扇蓋]울긋불긋한 비단이나 화려한 새깃으로 만든 일산(日傘). 옛날 귀인(貴人)의 행차 뒤에서 받치던 것이다.
♣ 선거[仙居]선거(仙居)는 신선이 머물러 사는 곳으로 태평한 고장을 뜻한다.
♣ 선견지명[先見之明]앞을 내다보는 밝음. 앞일을 미리 예측하는 지혜
♣ 선계[先戒]먼저 알리다.
♣ 선계[仙桂]월궁(月宮)에 있는 계수 나무. 과거에 급제한 사람, 또는 남의 자제를 미칭(美稱)하는 말로도 쓰는 말이다.
♣ 선계동반[仙桂同攀]동방급제(同榜及第).
♣ 선계소무[璿系昭誣]선계는 조선 왕실(朝鮮王室)의 계보(系譜). 명(明) 나라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왕조 태조(太祖)가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을 수차의 요청 끝에 정정한 것을 말한다.
♣ 선계후압[先雞後鴨]당 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이인(異人)에게 샀노라 하여 궁예(宮裔)에게 바친 옛 거울에 새긴 문구 중의 일절, “선조계 후박압(先操鷄 後搏鴨).”이것을 왕건(王建)이, “먼저 계림(신라)를 멸하고 뒤에 압록강을 취한다.”는 뜻으로 당시 해석했다.
♣ 선고[先考]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음.
♣ 선고애[仙姑艾]서왕모(西王母)의 선약(仙藥) 가운데 영총애(靈藂艾)가 있었다 한다. 《漢武內傳》
♣ 선고장[先考丈]돌아가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음.
♣ 선고천소양[仙姑倩搔痒]시가 마음에 딱 들어맞아 시원스럽다는 뜻이다. 선고는 신선인 마고(麻姑)를 가리킨다.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시 ‘독한두집(讀韓杜集)’에, “두보 시와 한유 글을 수심 속에 읽어보니, 마고 시켜 가려운 데 긁는 것만 같구나.[杜詩韓集愁來讀 似倩麻姑痒處㧓]”하였다.
♣ 선공[先公]돌아간 아버지
♣ 선공후사[先公後私]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미룸. 사사로운 일이나 이익보다는 공적인 일이나 이익을 앞세움
♣ 선관[蟬冠]관(冠)에다 대모(玳瑁)로 매미 형상을 만들어 꽂은 것인데, 품질(品秩)이 높은 조관(朝官)을 말한다. 삼공(三公)과 친왕(親王)이 조회(朝會) 때에 쓰는 것이다.
♣ 선관[仙官]벼슬을 지닌 신선. 곧 규장각ㆍ예문관ㆍ홍문관 등의 청직(淸職)을 띤 사람을 가리킨다.
♣ 선괴[璇魁]선괴는 북두성의 첫째 별과 둘째 별로서 북두칠성을 가리킨다.
♣ 선극[璿極]선극은 옥으로 꾸민 궁궐로 대궐의 미칭임.
♣ 선극유종[鮮克有終]능히 종(終)이 있는 자가 적다. 이 말은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에, “시초는 없지 않으나 능히 종말을 보는 자가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라고 한 데에서 인용된 것임.
♣ 선금[仙禽]선인(仙人)이 타고 다니는 새, 즉 학(鶴)을 가리킨다.
♣ 선기[禪機]선문(禪門)에서 설법(說法)할 때의 기봉(機鋒). 즉 무엇인가를 포착할 기회조차 없어 마치 활의 오늬를 조종하는 기(機)이거나 또는 닿기만 하면 상처가 나는 예리한 칼날과 같이 하는 설법을 이름. 선종(禪宗)의 조사(祖師)들이 후학의 속물 근성을 뿌리채 뽑아 버리고 대번에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해 주기 위하여 취하는 돌발적인 언행으로, 갑자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할(喝)이나 몽둥이를 들고 때리는 방(棒)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선기[璿璣]천문(天文)을 살피는 기구.
♣ 선기[璇璣]천체(天體)를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선기능개석[先幾能介石]통달한 이란 곧 군자를 뜻함. 군자는 기미(幾微)의 은미함을 사전에 알아서 기미를 보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당장에 행동을 취하여 절의(節義)를 돌같이 굳게 지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周易 豫卦, 繫辭下》
♣ 선기옥형[璇璣玉衡]혼천의(渾天儀)로 천체(天體)를 관측하는 기구이다.
♣ 선기제정[璿璣齊政]선기는 천체(天體)의 운행을 측량하는 기계이고, 칠정은 일월오성(日月五星)을 말한다. 《書經 虞書 舜典》
♣ 선남선녀[善男善女]착한 남자와 여자. 보통의 사람.
♣ 선니[宣尼]한(漢) 나라 평제(平帝) 때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으로 추시(追諡)된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 선니절위편[宣尼絶韋編]공자가 만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워낙 많이 읽었기 때문에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이다. 《史記 孔子世家》
♣ 선니칭부운[宣尼稱浮雲]선니(宣尼)는 공자(孔子)의 시호이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귀를 누리는 것은 나에겐 마치 뜬구름[浮雲]처럼 보이기만 한다.”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 선니호향[宣尼互鄕]논어(論語) 술이(述而)에 “호향은 어울려 말하기도 어려운 곳인데 동자(童子)가 공자(孔子)를 뵙자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기니, 공자는 ‘사람이 몸을 깨끗이 하고 오면 그 깨끗함을 받아들일 뿐, 옛일은 묻지 않아야 한다.’ 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선단[善端]선단은 사단(四端)을 가리킨다. 맹자(孟子)는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눈동자에 정기가 없다.” 하였으며, 또 “사람에게는 선(善)한 본성(本性)에서 우러나오는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마음이 있으니 이 사단을 잘 확충하여야 한다.” 하였다. 《孟子 離婁上ㆍ公孫丑上》
♣ 선대부인[先大夫人]돌아가신 남의 어머니를 일컬음.
♣ 선대인[先大人]돌아가신 남의 아버지를 일컬음.
♣ 선덕[宣德]명 나라 선종(宣宗)의 연호이다.
♣ 선덕감리로[宣德坎離爐]선덕(宣德; 明宣宗의 연호) 시대에 만든 감괘와 이괘를 새긴 화로.
♣ 선도[仙桃]전설상의 여인인 서왕모(西王母)가 심은 복숭아로 먹으면 오래도록 산다고 한다. 일찍이 한 무제(漢武帝)가 장수를 원하여 기도드리매, 이를 가상히 여긴 서왕모가 선도(仙桃) 7개를 주었다 한다.
♣ 선도[善刀]칼을 잘 닦다.
♣ 선등폐소림[禪燈廢少林]절에 참선하는 중이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소림(少林)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절 이름인데, 옛날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이곳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여 참선을 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 선련[蟬聯]같이 벼슬하였다는 말.
♣ 선령[先零]먼저 시들다.
♣ 선로[宣罏]송 나라 선화(宣和;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연간에 만든 구리화로.
♣ 선로[先路]이 말은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先輅左塾之前”이라고 보임.
♣ 선리[仙李]노자(老子)의 별칭인데 전하여 이씨(李氏)를 가리킨 말이다.
♣ 선리[仙吏]신선 같은 관리. 명승지로 이름난 지방의 수령에 대한 별칭이다.
♣ 선리[善利]선(善)을 좋아하는 마음과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을 말한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의 차이를 알고 싶은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과 선을 추구하는 마음의 차이일 따름이다.[利與善之間也]”라는 말이 있다.
♣ 선리군[仙李君]선리군은 노자의 별칭이다.
♣ 선리운손[仙李雲孫]당 나라는 옛날 노자(老子)의 후예로 성이 이씨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기 신선이던 노자의 자손[雲孫]이라 한 것이다.
♣ 선리조화만갱번[仙李條華晩更繁]노자(老子)가 이수(李樹) 아래에서 태어났으므로 성(姓)을 이(李)로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노자의 후손으로 자처하는 당(唐) 나라 왕실의 번창함을 표현하는 말로 ‘선리반근(仙李蟠根)’이라는 말이 흔히 쓰인다. 《神仙傳 老子》 두보(杜甫)의 시에 “선리의 서린 뿌리 크기만 하여, 걸출한 후손들 대대로 빛났어라.[仙李蟠根大 猗蘭奕葉光]”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 冬日洛城北謁玄元皇帝廟》
♣ 선림[禪林]선원(禪院)을 가리킨다. 선림보훈음의(禪林寶訓音義)에 “선은 조용히 사색하는 것이요, 임금은 수풀인데, 중들이 절에 모여 불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 선마[宣麻]재상의 임명을 발표하는 것. 당나라 때 재상의 임명을 백마지(白馬紙)라 한데서 유래됨.
♣ 선만[蟺蠻]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소재 동해비(東海碑)에는, “蜒蠻”이라고 보임. 또 한유(韓愈)의 청하군공방공묘갈명(淸河郡公房公墓碣銘)에, “林蠻洞蜒’이라 했고 그 주에, ‘蜒當作蜑 南方夷也 蜑音誕’이라 했음.
♣ 선말[仙襪]낙신부(洛神賦)에 “凌波微步 羅襪生塵"이라 하였고 황정견(黃庭堅) 시에 “凌波仙子生塵襪"이란 글귀가 있다.
♣ 선명[先鳴]먼저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주작(州綽)이 제(齊) 나라와의 평음(平陰) 싸움에서 식작(殖綽)과 곽최(郭最)보다 앞서서 성(城)에 올라 닭이 울듯 크게 소리쳤다[平陰之役 先二子鳴]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春秋左傳 襄公 21年》
♣ 선명도[蟬鳴稻]올벼[早稻]의 별칭이다. 고려 때 이규보(李奎報)의 시(詩)에, 그 이름 어기지 않으려고 매미 우는 때를 기약했네. 눈으로 직접 새 곡식 보니 금년 일도 다했나 보구료. (不欲負其名 趁得蟬鳴詩 眼見新穀升 今年事亦畢)라고 하였다.
♣ 선모[旋毛]말의 털결이 선회한 모양으로 된 것. 이아 주(爾雅 注)에 “선모가 배 아래에 젖꼭지처럼 나면 천리마이다.” 하였음.
♣ 선묘실록[宣廟實錄]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말한다.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北人)인 기자헌(奇自獻),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편찬된 선조실록의 내용이 공정치 못하다고 하여 인조 19년(1641)에 이식(李植)의 상소에 의하여 수정실록을 편찬하기로 결정하고 이식이 전담하여 편찬하였으나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어 중단되었다. 그 뒤 효종 8년(1657) 3월에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김육(金堉), 윤순지(尹順之), 이일상(李一相), 채유후(蔡裕後) 등으로 하여금 편찬하게 하여 그해 9월에 완성을 보았다.
♣ 선문[羨門]옛 선인(仙人)으로 이름은 자고(子高)이다. 전한서(前漢書)에, “시황(始皇)이 동으로 노닐면서 신선(神仙) 선문(羨門)의 무리를 구했다.” 하였음.
♣ 선문비침[扇蚊飛枕]후한(後漢)의 황향(黃香)이 아버지를 지극한 효도로 섬겨, 여름에는 잠자리에 부채질하여 드렸다 한 데서 온 말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을 말한다.
♣ 선문자[羨門子]옛날 선인(仙人)인 선문자고(羨門子高)를 말하는데,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에 노닐면서 선인 선문의 무리를 찾았다 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 선미[璿楣]궁궐의 문미(門楣)를 말함.
♣ 선반[仙班]임금을 시종(侍從)하는 관직의 반열을 말한다.
♣ 선반[仙班]청귀(淸貴)한 한림원(翰林院)의 벼슬을 가리킨다.
♣ 선발제인[先發制人]본래는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뜻.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면 능히 남을 제어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 선방[璇枋]방(枋)은 병(柄)과 같은데 즉 군병(君柄)과 같은 말임.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가 있음.
♣ 선방궁[宣房宮]한 무제 원봉(元封) 연간에 호자에서 황하가 터졌을 때 그 입구를 막고 위에 세웠던 궁전 이름이다.
♣ 선백약[宣伯藥]가선백(賈宣伯)이 삼충(三蟲)을 다스리는 신약(神藥)을 갖고 있었는데, 오강(吳江)의 교룡이 사람을 해친다는 말을 듣고 몇 숟가락의 약을 던져 넣자, 그 다음날 아침에 교룡이 죽어 물에 떠 올랐다고 한다. 《淵鑑類函 卷438 蛟部》
♣ 선복구창[蟬腹龜脹]가난하여 굶주린다는 뜻. 매미는 이슬만 먹고 살고 거북은 오래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 하여 일컫는 말이다. 《南史》 檀珪傳에, 단규가 가난하여 승건(僧虔)에게 벼슬하기를 청했다가 거절당하자 편지하기를 “매미 배와 거북 창자가 된 지 이미 오랩니다. 굶주린 표범이 울부짖으면 사람이 고기를 주나, 굶주린 기린은 물지 않으니 누가 털 하나라도 주겠습니까.” 하였다.
♣ 선봉[旋蓬]봉(蓬)이란 풀은 잎이 흩어져 나는데 바람을 만나면 뿌리가 빠져서 돈다.
♣ 선부[宣父]공자를 말한 것인데 선니(宣尼)와 같다. 한(漢) 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원년(서기1)에 공자(孔子)에게 포성선니공(褒成宣尼公)의 시호를 소급해서 올렸다. 《漢書 卷 12 平帝紀》
♣ 선부[仙鳧]부(鳧)는 오리. 관직의 전임을 오리가 가을이 되어 북쪽으로 날아가는 것에 비유한 것.
♣ 선부금[宣父琴]선보(宣父)는 공자(孔子)이다. 공자가 지은 거문고 곡조에 의란조(猗蘭操)가 있다.
♣ 선부승이불구[鮮負乘而不寇]소인이 분수에 넘치게 군자의 자리에 있으면 패망을 부르게 된다는 뜻이다. 주역(周易) 해괘(解卦) 63에 “지고 또 타면 도적이 오게 된다.[負且乘 致寇至]” 한 데서 온 말로, 즉 짐을 등에 지는 것은 소인의 일이고, 수레를 타는 것은 군자의 일인데, 소인이 분수에 넘치게 수레를 타면 화가 미치게 됨을 말한 것이다.
♣ 선불당[選佛堂]부처를 뽑는 장소. 당나라 중 천연(天然)이 처음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는 길에 황매산(黃梅山)을 지나는데, 한 중이 묻기를, “어디로 가는 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과거보러 간다.” 하였다. “과거는 무엇하는 데인가.” 하고 중이 물으니, “벼슬하는 장소다.” 하였더니, “벼슬 뽑는 장소보다 선불당(選佛堂)은 어떠한가.” 하니 또 묻기를, “선불당은 어디 있는가.” 하였더니, “이 산중에 있다.” 하였다. 천연은 즉시 과거를 버리고 황매산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 선비[先妣]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일컬음.
♣ 선사[仙槎]바닷가에 해마다 8월이면 어디선지 떼배가 왔다 갔다는 말도 있고, 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떼배를 타고 은하수(銀河水)에 갔다가 왔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바다에 배타고 가는 사신(使臣)의 배를 거기에 비한다.
♣ 선사난반[仙槎難攀]선사는 하늘의 은하수로 올라가는 뗏목이라는 뜻으로, 보통 사신의 행차를 비유하는 말이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시에 “선인(仙人)의 사닥다리도 오르기 힘들 텐데, 속세의 인연이 중하니 또 어찌하랴.[仙梯難攀俗緣重]”라는 표현이 있다. 《韓昌黎集 卷6 華山女》
♣ 선사상한간성상[仙槎上漢干星象]서역(西域)의 사신으로 갔던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博物志 卷3》
♣ 선사애세망[先師隘世網]선사는 공자를 가리킨 것으로, 공자가 이르기를, “도가 행해지지 않은지라, 떼를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公冶長》
♣ 선산[仙山]금강산을 가리킨다.
♣ 선삼린대[蟬衫麟帶]매미 날개 같은 옷과 기린의 문채가 있는 허리띠. 아름답고 화려한 복장을 말함.
♣ 선서[仙書]선인(仙人)의 서체(書體), 즉 기교(奇巧)한 서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곧 보내준 편지를 의미한다.
♣ 선선[姍姍]여자의 자늑자늑하게 걷는 모양
♣ 선선[善善]좋은 것을 좋다고 인정함
♣ 선선[仙仙]춤추는 모양
♣ 선성[宣聖]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의 약칭으로 공자를 말한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때에 공자의 시호를 ‘포성선공(褒成宣公)’이라 하였으며, 그후 ‘선보(宣父)’, ‘문선왕(文宣王)’ 등으로 칭한 데서 연유하였다.
♣ 선성[宣城]예안(禮安)의 옛 이름이다.
♣ 선성부해[宣聖浮海]선성은 포성선공(褒成宣公)의 시호(諡號)를 받은 공자를 가리킨다. 공자가 난세(亂世)를 개탄하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싶다.[乘桴浮于海]”고 했던 고사가 전한다. 《論語 公冶長》
♣ 선성사조[宣城謝朓]사조(謝朓)는 남제(南齊)의 시인으로, 일찍이 선성 태수(宣城太守)를 역임하였으며, 그의 저술로 사선성집(謝宣城集)이 전한다.
♣ 선성율리[宣城栗里]선성은 남제(南齊)의 사조(謝脁), 율리는 진(晉)의 도연명(陶淵明)을 일컫는다.
♣ 선성태수[宣城太守]남조(南朝)의 시인 사조(謝眺)가 이 선성 태수(宣城太守)로 있었다.
♣ 선소곡[仙韶曲]당 문종(唐文宗) 때 선소원(仙韶院)에서 연주하던 궁중 음악이다.
♣ 선소패[宣召牌]권내(闕內) 사람의 바깥 출입 허가를 증명하기 위하여 내어 주는 패. 궐문(闕門)을 나갈 때에 지니는 것을 명출패라 하고, 들어올 때에 지니는 것을 선소패라 한다.
♣ 선수[仙樹]일명 사미목(四味木)이라고도 하는 영수(靈樹)의 이름인데, 여기서는 궁궐 주변의 수림을 미화해서 일컫는 말이다.
♣ 선승비응[禪僧飛鷹]선승(禪僧)이 매(鷹)를 날리는 것은 옛 사람이 열거(列擧)한 살풍경(殺風景) 몇 가지 중에 하나로 친다.
♣ 선시어외[先始於隗]먼저 외(隗)부터 시작하라, 가까이 있는 나(너)부터 또는 말한 사람(제안자)부터 시작하라는 말. ☞ 시외(始隗)
♣ 선식조기봉혈의[先識粗期封穴蟻]역림(易林) 에 “개미가 그 혈호(穴戶)를 봉쇄하고 나면 큰비가 온다.” 하였다.
♣ 선실[宣室]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가의(賈誼)를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시킨 뒤, 다시 미앙궁(未央宮) 앞의 정실(正室)인 선실(宣室)에서 가의를 만나보고 그 자질에 탄복한 나머지 막내 아들인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로 임명했던 고사가 전해 온다. 《史記 卷84》
♣ 선실귀석[宣室鬼席]선실은 한(漢) 나라 미앙궁(未央宮) 안에 있던 선실전(宣室殿)으로 황제가 재계하는 곳인데, 한 효문제(漢孝文帝)는 선실에서 가의(賈誼)를 불러 귀신(鬼神)에 대한 일을 물었다 한다.
♣ 선실소[宣室召]왕의 부름을 받음. 한(漢) 나라 사람 가의(賈誼)가 문제(文帝) 때 장사(長沙)로 좌천(左遷)되었다가, 1년 뒤에 다시 소환되어 밤중에 선실(宣室) 앞에 있는 정실에 앉아 있는 제(帝)를 대하였다.
♣ 선실잠[宣室箴]선실은 한 문제(漢文帝)의 궁전 이름인데, 가의(賈誼)가 일찍이 문제의 부름을 받고 선실에 들어갔을 때 문제가 귀신(鬼神)에 관한 일을 묻자, 가의가 그 소이연을 자세히 말해주었던 데서 온 말이다. 《漢書 卷四十八》
♣ 선심[禪心]청정(淸淨)하고 적정(寂靜)한 본래의 마음을 뜻하는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 선아[仙娥]달 속에 있다는 항아(姮娥)를 가리킨다.
♣ 선아응전녹운의[仙娥應剪綠雲衣]과거에 급제할 것을 비유한 말. 선아는 달 속에 있다는 신녀(神女) 항아(姮娥)를 가리킨 말이고, 녹운의(綠雲衣)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녹포(綠袍)를 이르는데, 비파기(琵琶記)에 “상아가 녹운의를 만들어 놓으니, 달 속의 계수나무 첫째 가지를 꺾었네.[嫦娥剪就綠雲衣 折得蟾宮第一枝]”하였다.
♣ 선앙[善殃]서경(書經) 이훈(伊訓)에 “상제의 거취는 일정하지가 않아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를 내려 주고 불선을 행하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上帝不常 作善降之百祥 作不善降之百殃]”라고 하였다.
♣ 선약[仙藥]전설상 벽도(碧桃)는 선인들이 상식(常食)하는 선과(仙果)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 선어[仙馭]신선이 타고 다니는 것으로 보통 학(鶴)을 뜻한다. 옛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학을 타고 유람을 한다고 여겼다.
♣ 선여인동[善與人同]자기에게 훌륭한 면이 있으면 타인과 함께 공유하고[善與人同], 타인에게 훌륭한 점이 있으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舍己從人]는 말로,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 선오[仙鼇]등에 삼신산을 지고 있었다는 큰 자라. 사기(史記)에는 “여와씨(女媧氏)가 이 자라의 네 발을 절단하여 사극(四極)을 세웠다.” 하였다.
♣ 선온[宣醞]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술을 말한다. 으례껏 술을 내리는 것을 ‘사주(賜酒)’라 한데 반해, 술과 함께 내찬(內饌)을 별도로 내리는 것을 ‘선온’이라 한다.
♣ 선옹조사과[仙翁棗似瓜]선옹은 천세옹(千歲翁)으로 불렸던 선인(仙人) 안기생(安期生)으로,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그가 오이만한 대추를 먹었다.[安期生食巨棗大如瓜]”는 말이 나온다.
♣ 선우[單于]흉노(匈奴)의 왕(王)의 칭호임.
♣ 선우[先憂]선우후락(先憂後樂)의 준말로, 세상 사람들에 앞서서 근심을 하고, 즐거움은 가장 나중에 누리는 것을 말한다.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범문정공집(范文正公集) 권7 악양루기(岳陽樓記)의 “천하 사람의 걱정에 앞서서 걱정한다[先天下之憂而憂].”에서 나온 말이다.
♣ 선우[鮮于]성씨의 하나. 주(周)의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는데, 그의 지자(支子)인 중(仲)이 우(于)를 채지(采地)로 받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선우씨가 되었다고 함. 《尙友錄》
♣ 선우후락[先憂後樂]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김. 천하의 모든 사람이 근심하기에 앞서서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즐거워한 뒤에 마지막으로 즐거워함. 지사(志士)⋅인자(仁者)⋅학문하는 사람⋅위정자(爲政者)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선비는 의당 천하의 근심거리는 남보다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운 일은 남보다 뒤에 즐거워해야 한다.”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 선운[仙雲]초 회왕(楚懷王)이 고당(高唐)에서 노닐 적에 무산(巫山)의 신녀(神女)를 만나 동침(同寢)하였는데, 그 신녀가 떠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어 머물고 저녁에는 비를 내리겠다.”고 했다는 전설이,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 서문에 나온다.
♣ 선원[嬋媛](슬픈생각)맺혀 걸리다. 마음이 끌리다.
♣ 선원[仙源]선원은 김상용(金尙容)의 호임.
♣ 선원[仙源]신선이 거주한다는 지역.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선경(仙境)을 말한다.
♣ 선원[禪源]예로부터 연면히 이어온 불교의 연원.
♣ 선위[仙尉]한(漢) 나라 때 일찍이 남창 현위(南昌縣尉)를 지냈던 매복(梅福)이 왕망(王莽)의 전정(專政)을 증오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떠나서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바로 매복을 가리키는 말이다. 《漢書 梅福傳》
♣ 선위[仙尉]현령을 뜻하는 말이다.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을 지냈던 한(漢) 나라 매복(梅福)이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기인한 것이다. 《漢書 卷67 梅福傳》
♣ 선위[蟬緌]선위는 고대 갓 모양이 매미 머리와 같았다 하여 생긴 이름으로 조관(朝冠)을 가리킨다.
♣ 선유[仙遊]선유는 신선이 되어 선계에 노닐러 갔다는 말로, 사람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 선유자익[善游者溺]헤엄치는 사람이 물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재주만 믿고 설치다가 오히려 화를 입음을 나타내는 말.
♣ 선의[茜衣]꼭두서니의 뿌리에서 채취한 자황색 물감을 들여서 만든 옷.
♣ 선익주사[蟬翼蛛絲]매우 얇고 가볍고 아름다운 직물을 뜻한다.
♣ 선인[先人]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음.
♣ 선인관[仙人關]선인관은 섬서성(陝西省) 봉현 서남쪽에 있음. 한 성제(漢成帝) 때 어사대 안의 잣나무에 늘 까마귀 수천 마리가 서식하면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곤 하였으므로 조석오(朝夕烏)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음.
♣ 선인장[仙人掌]한무제(漢武帝)가 신선이 되기 위하여 하늘의 이슬을 받아 먹으려고 궁중에 이백 척 높이의 선인장(仙人掌)을 만들어 이슬을 받았다.
♣ 선인해교수기서[仙人海嶠授奇書]장량(張良)이 이교(圮橋)에서 어떤 노인에게 태공병법(太公兵法)을 받은 것을 비기어서 쓴 것이다. 장량이 이교에서 어떤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이 신발을 이교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장량으로 하여금 주워오게 하였다. 이에 장량이 신을 주워다가 노인에게 신기자, 그 노인이 장량에게 《태공병법》을 주었다. 《史記 卷五十五 留侯世家》
♣ 선입견[先入見]선입관이라고도 함. 처음부터 품고 있는 생각에 나중의 새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
♣ 선자[仙子]선랑(仙郞). 신라의 국선(國仙) 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영랑(永郞)ㆍ안상(安詳) 등이 총석정에 와 놀았으므로 사선봉(四仙峯)이라 일컫는다.
♣ 선자당[先慈堂]돌아가신 남의 어머니를 일컬음.
♣ 선자옥질[仙姿玉質]신선의 자태에 옥같은 바탕. 심성이 고우며 용모가 아름답고 재질도 뛰어남을 뜻하는 말이다. 빙자옥질(氷姿玉質)
♣ 선자친[先慈親]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를 일컬음.
♣ 선자화상[船子和尙]이름은 덕성(德誠)으로 약산(藥山)에서 득법(得法)하고 화정(華亭)에 이르러 배를 띄우고 세월을 보냈으므로 선자화상이라 불렀다 한다.
♣ 선장[仙漿]신선이 먹는 술을 말한다.
♣ 선장[仙掌]신선이 손바닥으로 소반을 받들고 감로(甘露)를 받는 형상을 구리[銅]로 만든 그릇, 즉 승로반(承露盤)을 말한다. 한서(漢書) 낙사지(酪祀志) 상(上)에 “신선이 손바닥으로 이슬 받는 형상을 만들었다.” 하였다.
♣ 선장[仙仗]천자(天子)의 의장(儀仗)을 말한다.
♣ 선장로[仙掌露]금경(金莖)의 승로반(承露盤). 한무제(漢武帝)가 세운 것인데, 이를 선인장(仙人掌)이라 칭함. 무제가 신선 되기를 원하여 구리로 신선의 손바닥을 만들어 세워 감로(甘露)를 받았다.
♣ 선장향로[仙掌香罏]선장은 중국 태화산(太華山)의 동쪽 봉우리이고 향로는 중국 여산(廬山)의 북쪽에 있는 봉우리이며 부용은 여산의 동남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이 세 봉우리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 선재[善財]상좌중을 이름. 선재가 문수사리(文殊舍利)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고 그로부터 점차 남으로 가서 오십삼 선지식에 참예하여 법계(法界)에 증입(證入)하였다 함.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立法戒品)에 “53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찾아뵈고 나중에 보현보살을 만나 10대원(大願)을 듣고, 아미타불 국토에 왕생하여 입법계(立法界)의 지원(志願)을 채웠다.” 한다. 선재동자(善財童子)
♣ 선재동자[善財童子]덕운(德雲). 일찍이 53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뵙고, 맨 나중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만나서 십대원(十大願)을 듣고 아미타불국토(阿彌陀佛國土)에 왕생하였다는 구도자(求道者)이다.
♣ 선적[禪寂]선적은 불가(佛家)에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조용히 명상(冥想)에 잠기는 것을 말한다.
♣ 선전상형[善戰上刑]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전투를 잘하는 자는 극형을 받아야 하고, 외교를 잘하는 자는 그 다음 형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 선정[禪定]불교(佛敎)에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진리(眞理)를 직관(直觀)하는 것을 말한다.
♣ 선조[仙曹]중앙 관서. 당(唐)나라 때에 상서성(尙書省)의 제조(諸曹)를 선조라고 하였음. 《稱謂錄》
♣ 선조용상[仙曹龍象]도가(道家)의 선인(仙人)과 불가(佛家)의 고승(高僧)을 말한다. 지리산 천왕봉(天王峯)과 반야봉(般若峯)에 태을(太乙)이 거하는데, 이곳에 군선(群仙)이 모이고 용상(龍象)이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9 南原都護府》
♣ 선조적편[先祖逖鞭]조적은 진(晉) 나라 범양(范陽) 추현(遒縣) 사람으로 자는 사치(士稚)이다. 중산(中山) 위창(魏昌) 사람 유곤(劉琨)이 그와 우정이 매우 두터웠는데, 혜제(惠帝) 때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조정이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해 있을 때 두 사람이 함께 항상 중원(中原)을 수복해야겠다는 결심을 갖고 있던 중, 조적이 자기보다 먼저 벼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창을 베고 아침을 기다리며 역적 오랑캐의 목을 벨 것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항상 조생(祖生)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들어 말을 몰을까 염려되었다.” 하였다. 자기보다 먼저 채찍을 들어 말을 몰았다는 말은 조적이 한걸음 먼저 뜻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晉書 卷六十二 劉傳》
♣ 선종외시[先從隗始]먼저 외[郭隗]부터 시작하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큰 뜻을 이루려면 우선 비근한 일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뜻. ☞ 시외(始隗)
♣ 선주[仙舟]지기(知己)를 전송하기 위하여 명사(名士)들이 벌이는 물 위의 뱃놀이를 말한다. 동한(東漢)의 이응(李膺)이 낙양(洛陽)에서 고향으로 떠나는 곽태(郭太)를 전송하면서 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는데, 이 광경을 보고서 사람들이 신선의 뱃놀이라고 부러워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8 郭太傳》
♣ 선주고[先主顧]선주는 촉한의 유비(劉備)를 지칭한 말이며, 삼고초려는 유비가 제갈공명을 초빙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 세 번이나 찾아가 정성을 보인 고사를 말한다.
♣ 선즉제인[先則制人]선손을 쓰면(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
♣ 선지식[善知識]불법을 잘 아는 이
♣ 선진[先軫]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의 이름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33년에 “선진이 갑주(甲冑)를 벗고 적(狄)의 군대에 뛰어들어가 죽자, 적인(狄人)이 그의 머리를 돌려주었는데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하였다.
♣ 선착편[先着鞭]유곤(劉琨)이 젊어서 지기(志氣)를 자부했는데 조적(祖逖)과 벗이 되었다. 적이 등용(登用)되자 친구에게 주는 편지에 말하되, “내가 창을 베고 새벽을 기다리며 늘 조생이 나보다 먼저 채찍을 칠까[先着鞭] 두려워했느니라.” 했다.
♣ 선천[先天]선천은 복희씨(伏羲氏)가 만든 역(易)을 말한다.
♣ 선천리[先天理]주역의 이치. 문왕(文王)의 역(易)을 후천이라 한 데 대하여, 복희씨(伏羲氏)의 역을 선천이라고 함.
♣ 선천수[先天數]복희 선천(伏羲先天)을 말하니 곧 주역(周易) 점을 가리킨다.
♣ 선천이불위[先天而不違]주역(周易)에, “하늘보다 먼저하매 하늘이 어기지 못한다.”[先天而天不違] 란 말이 있다.
♣ 선천획[先天畫]송 나라 소강절(邵康節)이 주역(周易)의 괘도(卦圖)를 해설하고 선천도(先天圖)와 후천도(後天圖)를 구분하여, “복희씨(伏羲氏)의 팔괘(八卦)는 선천(先天)이요, 주문왕(周文王)의 팔괘는 후천(後天)이라.” 하였다.
♣ 선청[善聽]백아는 거문고를 잘 연주하고 종자기는 그 음을 잘 들어 주었다[伯牙善鼓琴 鍾子期善聽]는 고사가 전하며, 이백(李白)의 시에도 “사광(師曠)은 귀로 잘 들어 주고 이루는 눈으로 잘 보았네.[子野善聽 離婁至明]”라는 구절이 있다. 《列子 湯問ㆍ李太白集 卷8 雪讒詩》
♣ 선청전[選靑錢]청동전(靑銅錢)은 만 번을 뽑아도 규격이 일정하여 어긋남이 없으므로, 전하여 시험을 볼 때마다 합격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선체[選體]문선(文選) 가운데 실려있는 시체(詩體)를 말한다.
♣ 선초[蟬貂]옛날 고관(高官)들이 관(冠)을 꾸민 장식품이다.
♣ 선초칠엽성서도[蟬貂七葉盛西都]서한(西漢) 때에 장안세(長安世)의 집이 칠대(七代)로 선초(蟬貂)를 다는 귀족(貴族)이었다.
♣ 선춘령[先春嶺]두만강 북쪽 7백 리에 있음. 고려 때 윤관(尹瓘)이 선춘령에까지 국토를 확장하여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고 이곳에 ‘고려의 국경’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 선친[先親]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일컬음.
♣ 선침[扇枕]후한(後漢) 때의 효자였던 황향(黃香)은 효성이 지극했는데, 9세 때에 어머니를 잃자, 아버지를 잘 받들어 여름이면 아버지의 베개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하고 겨울이면 아버지의 이불 속에 들어가 따뜻하게 해 드렸다 한다. 《後漢書 黃香列傳》
♣ 선팽[鮮烹]국정(國政)을 처리하는 일을 물고기를 삶는 일에 비유하여 경계한다는 말. 곧 작은 물고기를 요리할 때 지나치게 많이 끓이면 도리어 문드러지고 만다는 비유인데, 노자(老子)의 “큰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작은 생선을 삶듯이 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나온 말이다.
♣ 선평[宣平]선평은 선평문(宣平門)의 약자로, 한(漢) 나라 장안(長安)의 동문 이름이다.
♣ 선평[宣平]신선의 이름. 속선전(續仙傳)에 “당 의종(唐懿宗) 함통(咸通) 7년에 허명노(許明奴)의 집 늙은 할미가 남산에서 복숭아 따먹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자기는 명노의 선조 선평이라고 하면서 할미에게 복숭아 한 개를 주어 먹게 하고는 ‘이 복숭아는 산신이 아끼는 바이므로 가지고 갈 수는 없다.’하고 나무하러 온 사람을 따라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뒤 할미는 밥을 먹지 않고도 얼굴이 홍안(紅顔)으로 변했다.” 하였다.
♣ 선풍도골[仙風道骨]신선의 풍모와 도사의 골격. 남달리 뛰어난 풍채를 이르는 말. 옥골선풍(玉骨仙風)
♣ 선하[禪河]선하는 불교의 교리를 가리킨다.
♣ 선형[璇衡]순(舜) 임금이 천문(天文)의 운행을 모방하여 선기옥형(璇璣玉衡)이란 기묘한 기계를 만들었다.
♣ 선화[禪和]불도를 닦는 중이라는 뜻이다.
♣ 선화[宣和]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 선화[仙花]술을 마신 뒤에 얼굴이 붉어지는 모양을 형용한 말.
♣ 선화[仙花]차의 별칭이 선아(仙芽)이므로 차의 꽃을 이른 말이다.
♣ 선화도[宣和圖]선화도는 송(宋) 나라 서긍(徐兢)이 고려(高麗)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림과 글로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는 견문기(見聞記)를 말한다. 모두 40권으로 되어 있으며 보통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고 약칭하는데, 지금은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
♣ 선환[仙寰]신선이 사는 선경(仙境)과 같은 뜻인데, 여기서는 왕궁을 가리킨다.
♣ 선후도착[先後倒錯]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이 거꾸로 뒤바뀜.
♣ 선후책[先後策]뒷 처리를 잘 하려는 계책
♣ 선후천[先後天]선천은 복희씨(伏羲氏)가 만든 역(易)을 말하고, 후천은 황제(皇帝)가 만든 역을 말한다.
♣ 설[囓]씹다. 깨물다.
♣ 설거[薛據]송대(宋代)의 학자. 자는 숙용(叔容)으로 일찍이 제자백가에서 추려 뽑아 공자집어(孔子集語)를 만들고, 또 고금을 통하여 당시 재상이나 경략가들이 한 국가 정치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추려서 택규성감(宅揆成鑑)이라는 것을 만들어 조정에 올리기도 하였음. 《宋元學案 卷四十七》
♣ 설거[雪車]당(唐) 나라 때 한유(韓愈)의 친구 유차(劉叉)가 한유를 처음 찾아가서 지었다는 시(詩)의 이름인데, 노동(盧仝)ㆍ맹교(孟郊)의 시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 설계승흥[雪溪乘興]진(晉)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눈이 내리자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보고 싶어서 밤중에 작은 배를 타고 그를 찾아갔는데, 문 앞에 도착해서는 만나 보지 않고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왕희지는 “내가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이니 어찌 꼭 대규를 만나 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후대에는 친구를 방문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世說新語 任誕》
♣ 설고[薛鼓]노고는 노 나라의 북이고, 설고는 설 나라의 북이다. 노고와 설고의 구분은 곧 음절이 서로 길고 짧고 한 데에 있었다. 《禮記 投壺》
♣ 설관[薛館]설(薛) 나라 객관(客館). 전하여 규모가 가장 작은 나라의 객관.
♣ 설관탄협[薛館彈鋏]설관은 전국시대 제 나라 설공(薛公) 맹상군(孟嘗君)의 객관(客館)이다. 그의 수많은 식객(食客)가운데 하나인 풍환(馮驩)이 처음에 자기에 대한 대우가 소홀하자 칼자루를 치며 노래하기를 “긴 칼 차고 돌아왔으나 식탁에 고기가 없네.” 하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七十五 孟嘗君傳》
♣ 설교신[雪窖臣]설교는 눈으로 덮인 움막. 이는 전한(前漢)의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억류되어서도 굽히지 않고 눈을 먹으며 지냈던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 설니홍조[雪泥鴻爪]눈이 녹은 진 땅에 큰 기러기가 걸어가 발자취를 남기나 그것은 곧 사라진다. 인생이 허무하고 남는 것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과거의 역사 속에 묻힌 채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는 말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인생길 이르는 곳 무엇과 비슷하다 할까, 눈밭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다 하리. 우연히 발톱 자국 남겨 놓았을 뿐,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쪽 서쪽 헤아리리.[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蘇東坡詩集 卷3 和子由 池懷舊》
♣ 설당[雪堂]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황주(黃州)로 귀양가 집을 짓고 사방 벽에 눈[雪]을 그려 놓고 설당(雪堂)이라 하였다.
♣ 설당노[雪堂老]황주(黃州)로 유배된 뒤 그곳에 설당(雪堂)이라는 초가집을 짓고 살았던 소동파(蘇東坡)를 가리킨다. 그의 ‘설당기(雪堂記)’에 “동파(東坡) 옆에 버려진 밭이 있기에 집을 짓고 담을 두른 뒤 설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큰 눈이 내리는 가운데 그 집을 지었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방 벽에다 설경을 그린 그림을 빈틈없이 걸어 놓고는 앉거나 눕거나 이를 쳐다보면서 감상을 하였다.” 하였다.
♣ 설당월토[雪堂月ꟙ]설당은 소식(蘇軾)의 당명(堂名), 월토는 차 이름인데, 소식(蘇軾) 월토다시(月ꟙ茶詩)에 “고리 같으나 고리가 아니요 패옥 같으나 패옥이 아닌데, 가운데 희미하게 옥토아(玉ꟙ兒)가 걸려 있네" 하였다.
♣ 설도[薜濤]당(唐) 나라 중기의 명기(名妓). 음률(音律)과 시사(詩詞)에 능하여 항상 원진(元稹)ㆍ백거이(白居易)ㆍ두목(杜牧) 등과 창화(唱和)하였다.
♣ 설도[薛濤]설도는 당(唐) 나라 때 선홍색(鮮紅色)의 종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 설도잔[薛濤箋]설도는 촉(蜀) 나라의 명기(名妓)로서 뒤에 교서(校書)가 되어 설 교서라고도 하는데 원미지(元微之)와 서로 좋아하였음. 촉잔보(蜀箋譜)에 “설도가 백화담(百花潭)에 교거(僑居)하면서 심홍소채잔(深紅小采箋)을 만들어 쓰고 읊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설도잔이라 하였다.” 하였음.
♣ 설도전[薛濤牋]당 나라 시대에 설도(薛濤)라는 기생이 좋은 종이를 새로 고안하였으므로, 그것을 설도전(薛濤牋)이라 하고, 또 그가 살았던 곳의 이름을 따라 촉전(蜀牋)이라고도 한다
♣ 설두[雪竇]송 나라 때 고승의 호임. 소식의 재화답양차공시(再和答楊次公詩)에 “此生初飮廬山水 他日徒參雪竇禪"이라 하였음.
♣ 설라[薛蘿]덩굴이 벋는 벽려(薛荔)와 여라(女蘿)를 합칭한 말인데, 전하여 은자(隱者)의 옷을 가리키기도 한다.
♣ 설례돈시[說禮敦詩]춘추 시대 진 문공(晉文公)이 삼군(三軍)의 원수(元帥)를 임명하려 할 적에 조최(趙衰)가 말하기를 “극곡(郤穀)은 예악(禮樂)을 말하고 시서(詩書)를 힘쓰는 사람이니, 그가 반드시 군대를 거느리는 방도를 알 것입니다.” 하므로, 문공이 그의 말에 따라 극곡을 중군장(中軍將)으로 삼았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三十九》
♣ 설루[雪樓]설루는 명나라 때의 시인 이반룡(李攀龍)의 서실(書室) 이름인 백설루(白雪樓)의 준말이다.
♣ 설루[雪樓]청(淸) 나라 여순(黎恂)의 자. 순은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에 두루 능하였으며 시에 더욱 능했다 한다. 저서에는 천가시주(千家詩注)와 영석헌시문집(蛉石軒詩文集)이 있다.
♣ 설류[泄柳]춘추 때 노(魯) 나라의 어진 선비로서 자(字)는 자류(子柳)이다. 목공(繆公)이 그 어짐을 듣고 찾아가 보려 했으나 유가 문을 닫고 들이지 않았다.
♣ 설리송황독후조[雪裏松篁獨後凋]백설 속의 송죽은 맨 나중에 시든다. 극심한 역경속에서도 꿋꿋하게 절개를 지키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 설리순생[雪裏筍生]효성(孝誠)의 징험(徵驗)을 뜻하는 말.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효자 맹종(孟宗)의 모친이 겨울에 죽순을 먹고 싶다 하므로, 종(宗)이 눈 속을 무릅쓰고 대밭에 가서 죽순 나오기를 호흡(呼吸)하며 기도하였더니 홀연히 눈 속에서 순이 나왔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江夏傳錄》
♣ 설망어검[舌芒於劍]혀가 칼보다 날카롭다. 논봉(論鋒)이 날카로움을 뜻한다.
♣ 설미[褻味]맛있게 요리한 음식을 말한다.
♣ 설부[雪賦]눈을 읊은 부. 한(漢) 나라 양 효왕(梁孝王)이 토원(兎園)에다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추양(鄒陽)ㆍ매승(枚乘)ㆍ사마상여(司馬相如)를 불렀다. 때마침 싸락눈이 내리다가 이내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양왕은 북풍시(北風詩)와 남산시(南山詩)을 읊고 나서 상여에게 설경(雪景)을 읊게 하니, 상여는 곧 설부(雪賦)를 지었다. 상여의 설부를 본 추양은 충심으로 감탄, 그 설부를 한 번 읊고 나서 설부의 끝을 이어 적설가(積雪歌)를 지었다. 양왕은 그 적설가를 한 번 읊조리고 나서 매승에게도 한 편 짓게 하니, 매승은 난(亂; 終章)을 지었던 것이다. 사마상여는 자는 장경(長卿). 그의 작품에는 자허부(子虛賦)ㆍ상림부(上林賦)ㆍ대인부(大人賦)가 유명함. 추양은 변사(辯士)로 유명함. 매승은 자는 숙(叔), 문장에 뛰어났음.
♣ 설부[說郛]명(明) 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술한 총서(叢書)의 서명. 1백 20권. 청(淸) 나라 요안(姚安)ㆍ도정(陶珽) 등이 보완하였다. 내용은 역대의 소설(小說)ㆍ사지(史志) 등이 망라되었으며, 부분별로 저자가 각기 명기되어 있음. 공씨(孔氏)의 잡설(雜說)은 이 중에 한 부분임.
♣ 설부기[雪膚肌]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의 “묘고야(藐姑射) 산에 신인(神人)이 사는데 그 살결이 마치 얼음과 눈 같다.[肌膚若氷雪]”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선이나 미녀 그리고 특히 매화를 표현할 때 많이 쓴다.
♣ 설부화용[雪膚花容]눈처럼 흰 피부와 꽃처럼 고운 얼굴. 빼어난 미인을 말함.
♣ 설비[齧臂]설비는 팔뚝을 씹는다는 말로 곧 결심을 뜻하는데, 전국 시대 오기(吳起)가 고향을 떠날 때 자기 어머니와 작별하면서 팔뚝을 씹고 맹세하기를 “제가 경상(卿相)이 되지 않고서는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않으렵니다.” 하였다. 《史記 卷六十五 吳起傳》
♣ 설비아[說比兒]왕자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들의 옷을 갈아입게 하는 일. 고려 충렬왕(忠烈王)의 비(妃)인 원(元)나라의 원성공주(元成公主)가 원자(元子; 후의 충선왕)를 낳자, 왕자와 백관들이 모두 하례하러 가는데 공주의 종자(從者)가 문에서 들어오는 자의 옷을 죄다 갈아입게 하였다.
♣ 설빈화안[雪鬢花顔]눈처럼 희고 고운 얼굴.
♣ 설산[雪山]설산은 중국 서강성(西康省) 강정현(康定縣)에 있는 산이름으로, 언제나 눈이 쌓여 있으므로 설산 또는 대설산(大雪山)이라 한다.
♣ 설산[雪山]천산(天山)의 별칭(別稱). 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으므로 설산(雪山) 또는 백산(白山)이라 한다.
♣ 설산동자[雪山童子]설산동자는 곧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설산(雪山)에서 수도할 때의 이름이다. 열반경(涅槃經)에 “내가 그때 설산에 가니 산이 맑고 깨끗하며, 수림과 약초가 가득하였다.” 하였다.
♣ 설상[舌相]불교의 용어인데 삼십이상(三十二相)의 하나인 장광설(長廣舌)을 말함.
♣ 설상가상[雪上加霜]눈 위에 서리가 내림. 엎친 데 덮친다는 말로, 어려운 일이 연거푸 일어남.
♣ 설상존[舌尙存]전국(戰國) 시대의 유세가(遊說家)로서 제후(諸侯)에게 유세하여 소진(蘇秦)의 합종설(合從說)에 반대하고 열국(列國)은 진(秦)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했던 장의(張儀)가, 일찍이 초상(楚相)과 노닐다가 구슬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그들에게 모진 곤욕을 받고는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 혀가 아직 남아 있는지 살펴보시오.” 하자, 그의 아내가 웃으면서 “혀가 있습니다.” 하니, 장의는 “그것으로 족하오.” 하였다.
♣ 설상함담홍[舌上菡萏紅]설법을 잘하는 혀라는 말이다. 불상(佛像)의 등 뒤에는 둥근 광명을 그린다.
♣ 설생련[舌生蓮]구마라십(鳩摩羅什)이 평생에 설법(說法)을 잘하였는데, 죽은 뒤에 혀[舌]가 연꽃으로 화(化)하였다 한다.
♣ 설생연[舌生蓮]어느 나무꾼이 호주(湖州) 법화산(法華山)에서 한 줄기 청련(靑蓮)을 발견하고 그곳을 파보았더니 석갑(石匣) 속에 동자(童子)가 들어있었는데 그의 혀가 아직 말짱하고 연꽃은 그 혀 위에서 돋아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평소 법화경(法華經)을 늘 외웠던 소치라 하여 그 산을 법화산이라고 했다는 것임. 《淵鑑類函 釋敎部》
♣ 설석회자유[雪夕懷子猷]자유(子猷)는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의 자(字)인데, 폭설이 쏟아진 날 밤에 갑자기 친구인 대규(戴逵)가 생각이 나서 밤 내내 배를 몰고 그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 설설[渫渫]“설설”은 잘못된 독음, 바른 독음과 뜻은
♣ 설설[挈挈]급한 모양, 절박한 모양
♣ 설설[屑屑]잗단 모양, 부지런한 모양,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모양, 애달프게 구함. 가랑비가 내리는 모양.
♣ 설설[泄泄]해이하고 완만하여 남 따르기만을 좋아하는 것을 말함.
♣ 설설[屑屑]후한(後漢)의 왕량(王良)이 형양(滎陽)으로 부임하는 길에 병이 위독해져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친구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 친구가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충성스러운 말과 기막힌 계책으로 높은 자리에는 오르지 못하고, 어찌하여 꺼리는 마음도 없이 잗달게 굴면서 쏘다니는 것인가.[不有忠言奇謀而取大位 何其往來屑屑不憚煩也]”라고 하자, 왕량이 부끄러운 마음에 다시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던 고사가 있다. 《後漢書 王良傳》
♣ 설수[爇鬚]명황잡록(明皇雜錄)에 “임금은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다섯 군데의 장막을 설치해 놓고 제왕(諸王)들과 바꿔가며 거처했으므로 이름을 ‘오왕장(五王帳)’이라 했으며, 설왕(薛王)이 병났을 적에는 손수 약을 달이다가 실수하여 수염까지 태웠다.” 하였다.
♣ 설수[爇須]자씨(姉氏)의 병구완하는 것을 비유한 말. 당(唐) 나라 때의 명신 이적(李勣)의 자씨가 질병이 있자, 이적이 손수 죽을 쑤다가 수염을 태웠던 데서 온 말이다. 《唐書 李勣傳》
♣ 설숙[雪宿]설두산인(雪竇山人)을 말함.
♣ 설아[雪]설아는 당(唐) 나라 이밀(李密)의 애희(愛姬)의 이름인데, 이밀이 매양 빈붕(賓朋)들의 시문(詩文) 가운데 기려(奇麗)한 것이 있으면 설아에게 맡기어 음률(音律)에 맞춰서 노래하게 했던 데서 온 말로, 기예(技藝) 있는 기녀(妓女)를 의미하기도 한다.
♣ 설아[雪兒]설아는 당 나라 이밀(李密)의 애희(愛姬). 이밀은 손님이나 벗들의 훌륭한 시문을 보면 반드시 그녀로 하여금 음률에 맞춰 노래하게 하였다. 아름다운 기생.
♣ 설안[雪案]손강(孫康)이 집이 가난하여 촛불이 없으므로 항상 눈빛을 이용하여 글을 읽었음. 원개(袁凱)의 시에, “瞑歸雪案同溫習……”이란 것이 보임.
♣ 설야구양체[雪夜歐陽體]구양수(歐陽修)가 여러 사람과 함께 눈[雪]을 두고 시를 지으면서 옥(玉)ㆍ은(銀)ㆍ경(瓊)ㆍ가(梨) 등 눈에 대하여 늘 쓰이는 여러 글자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 설야방대도[雪夜訪戴圖]설야방대도는 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눈 온 날 밤에 대규(戴逵)를 찾아간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 말함. 왕휘지는 본디 풍류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일찍이 산음(山陰)에 살 적에 밤 눈이 막 개어 달빛이 청랑(淸朗)하자,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가 생각나서, 문득 조그마한 배를 타고 섬계를 향해 밤새도록 가서 친구의 문 앞에까지 이르러서는 들어가지 않고 다시 되돌아와버렸는데,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본디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온 것인데, 어찌 꼭 안도(安道)를 만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다《晉書 卷八十》
♣ 설야행[雪夜行]송 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천하를 평정하기 이전 어느 눈 내리는 날 밤에 조보(趙普)를 찾아가, 지금은 자기가 앉아있는 자리 하나 이외에는 모두가 남의 것이라는 심정을 말하고 조보의 도움을 얻어 뒤에 천하통일을 성취하였음. 《邵氏聞見錄》
♣ 설야회주[雪夜回舟]손이 왔다가 찾지도 않고 그냥 가버림. 왕휘지(王徽之)가 어느 눈 내리는 밤에 섬계(剡溪)에 배 띄우고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갔다가 그의 문 앞까지 가서는 흥이 다하여 찾지도 않고 그냥 돌아와버렸음. 《晉書 卷80》
♣ 설영잠[雪盈簪]옛날에는 머리를 끌어 올려서 상투를 짜고 그 상투에 조그만 관(冠)을 만들어 씌웠는데, 그것을 상투관이라 한다. 그 상투관은 비녀를 만들어서 가로로 상투에 꽂는다. 설(雪)은 흰머리칼이요, 잠(簪)이라 함은 그런 비녀를 말한다.
♣ 설왕설래[說往說來]말이 가고 옴. 무슨 일의 시비를 따지느라고 말을 서로 주고받으며 옥신각신 함
♣ 설월[雪月]설월은 김부륜(金富倫)의 호이다.
♣ 설월기부방섬주[雪月期浮訪剡舟]왕자유(王子猷)가 눈 내린 달밤에 배를 타고 섬계(剡溪)로 대안도를 찾으려 했다는 고사. 진서(晉書) 왕휘지전(王徽之傳)에 보인다.
♣ 설월풍화[雪月風花]1년 사시(四時)의 경물(景物)을 말한 것이다.
♣ 설유[설貐]사나운 동물의 이름인데 간신을 비유한 말. 이아(爾雅) 석수(釋獸)에 “설유는 이리와 비슷한데, 호랑이 발톱을 가졌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하였다.
♣ 설의[雪衣]백앵무(白鸚鵡)를 가리킨다. 설의랑(雪衣娘).
♣ 설의[雪衣]흰옷에 비유한 것이다.
♣ 설의랑[雪衣娘]명황잡록(明皇雜錄)에 “영남(嶺南)에서 진상한 앵무새를 궁중에 두고 길러 길이 매우 잘들어 사람의 말을 다 깨쳤는데, 이름을 ‘설의랑’ 이라 하였다. 하루는 귀비의 화장대 위에 날아와 앉으며 ‘새매에게 덮치기 당하는 꿈을 꾸었다.’ 하였다. 귀비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가르쳐 주어 지성으로 지송(持誦)했다. 그 뒤에 데리고 원중(苑中)에 나갔다가 과연 몹시 사나운 새에게 죽음을 당하자 무덤까지 만들어 주었다.” 하였다.
♣ 설존환치폐[舌存還齒弊]강한 이는 부러지고 혀는 아무 탈 없다.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勉學)에 나오는 말이다.
♣ 설중송백[雪中松柏]송백은 눈 속에서도 그 색이 변하지 않는다 하여 사람의 절조(節操)가 굳은 데 비유하는 말이다.
♣ 설중유객휴회도[雪中有客休回棹]왕자유(王子猷)는 산음(山陰)에 살고 대안도(戴安道)는 섬계(剡溪)에 살았는데, 눈이 내린 밤에 왕자유가 술이 거나하여 배를 타고 섬계를 거슬러 올라 대안도의 집 문 앞에 이르러서는, 그냥 도로 돌아서므로,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처음에 흥이 나서 찾아왔는데, 이제 흥이 식었기에 도로 돌아간다.” 하였다.
♣ 설중지조[雪中指爪]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 기러기가 날아갔다가 다시 와 보면 흔적이 없게 되듯이 덧없는 인생도 그와 같음을 비유한 것으로, 소식(蘇軾)의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 시에 “인생이 이르는 곳에 아는 것이 무엇 같으랴. 응당 나는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과 같으리. 눈 위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기었지만, 기러기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서를 헤아리랴.[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蹈雲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詩集 卷三》
♣ 설창[雪窓]진(晉) 나라 손강(孫康)이 등불이 없어 눈 온 날 창 앞에서 글을 읽은 고사.
♣ 설창의[雪氅衣]신선이 입는다는 새하얀 학창의(鶴氅衣).
♣ 설촉[薛燭]춘추 시대 월(越) 나라 사람으로, 칼을 잘 감정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 설파[囓破]깨물다.
♣ 설편[雪片]송사리 등 잡어(雜魚) 또는 은빛 물고기를 표현하는 시어(詩語)이다.
♣ 설포[薛包]후한(後漢) 때의 효자(孝子). 계모에게 쫓겨났으나 밤낮으로 울며 차마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이문(里門)에 여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정성(定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뒤에 계모도 뉘우치고 다시 그를 맞아들였다 함. 시중(侍中)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음.
♣ 설형[雪螢]진(晉) 나라 차윤(車胤)은 여름에 반딧불의 빛을 이용하여 책을 읽었고, 손강(孫康)은 겨울 밤에 눈에서 반사되는 빛을 이용하여 책을 읽었다. 이는 가난한 선비가 어렵게 공부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 설호[挈壺]술병으로 양웅(楊雄)의 글에 처세 잘하는 것을 설호(挈壺)에 비유하였다.
♣ 설홍유[薛弘儒]신라 때 학자 설총(薛聰).
♣ 설홍초창전유사[雪鴻怊悵篆留沙]과거 일을 말함. 눈에 찍힌 발자국이 눈이 녹으면 없어지므로 하는 말임.
♣ 설회초무[雪回楚舞]눈[雪]이 돌며 내리듯 기생들이 빙빙 돌면서 춤추는 것을 말한다. 초무는 옛날 초(楚) 나라에서 추던 춤을 말한다.
♣ 섬[陝]섬은 중국 지역 이름.
♣ 섬가[纖歌]미인(美人)이 부르는 고운 노랫소리를 말한다.
♣ 섬강[蟾江]강원도 횡성군(橫城郡)에서 발원하여 원성군(原城郡)을 지나 한강으로 합류하는 강.
♣ 섬계[蟾桂]월궁(月宮)을 섬(蟾)궁이라 하고 계수나무가 있다. 과거 합격에 비유한 것이다.
♣ 섬계[剡溪]지명으로, 진(晉) 나라 때 처사(處士) 대규(戴逵)의 집이 있던 곳이다.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데, 조아강(曹娥江)의 상류(上流)이다. 진(晋)나라 사람 왕자유(王子猷)가 설월(雪月)의 좋은 밤에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가기 위하여 섬계로 갔다가 흥이 다하여 보지도 않고 도로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 섬계방대[剡溪訪戴]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의 고사. 그의 자는 자유(子猷)로, 눈 내리는 어느 날 밤에 섬계(剡溪)에 있는 대규(戴逵)가 불현듯 생각 나자, 배를 띄워 나섰다. 그러나 대규의 문 앞까지 당도하였다가 그냥 되돌아와 버렸다. 누가 그 까닭을 묻자 “흥이 나서 찾아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으니 그만이다. 어찌 꼭 만나보아야 하는가.” 대답하였다 한다.
♣ 섬계생[剡溪生]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눈 내리는 밤에 섬계(剡溪)에 있는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나서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갔다가 정작 그곳에 도착해서는 문 앞에서 다시 돌아오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내가 본래 흥에 겨워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대안도를 보아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한다.
♣ 섬계주[剡溪舟]섬계는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물 이름인데 진(晉) 나라 왕 휘지(王徽之)는 눈 내리는 밤 친구인 대규(戴逵)를 찾아 섬계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저었었다.
♣ 섬계흥[剡溪興]눈이 온 날 취흥에 겨워 친구를 찾아볼 생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 자(字)는 자유(子猷))가 눈 내린 밤 홀로 산음(山陰)에서 술을 마시다가, 불현듯 섬계(剡溪)에 있는 벗 대규(戴逵 자는 안도(安道)) 생각이 나자 밤새도록 배를 타고 그 집 앞에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는데, 그 이유를 묻자 “흥이 일어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돌아왔다.[乘興而行 興盡而返]”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任誕》
♣ 섬곡회도[剡曲廻棹]진(晉) 나라 때 산음현(山陰縣)에 살던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린 어느 날 밤에 달빛 또한 청명하자,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서 그대로 밤에 배를 타고 밤새도록 가서 대규의 문 앞에 이르렀다가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다시 배를 되돌렸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왕휘지가 대답하기를, “처음에 흥(興)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서 그냥 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꼭 대규를 만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섬곡회도거[剡曲迴棹去]진(晉) 나라 왕자유(王子猷)가 눈 내리는 밤에 섬계(剡溪)에 있는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나서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갔다가 정작 그곳에 도착해서는 문 앞에서 다시 배를 돌리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내가 본래 흥에 겨워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대안도를 보아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한다.
♣ 섬굴[蟾窟]섬굴은 달의 별칭.
♣ 섬굴계[蟾窟桂]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월궁에 있는 계수나무 꽃을 꺽는 데 비하므로 과거에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선비들을 급제시키는 것을 계수꽃을 나누어 준다 한 것이다. 섬굴(蟾窟)은 월궁을 말한 것이다.
♣ 섬궁[蟾宮]달 속에 있다고 하는 궁궐을 가리킨다.
♣ 섬서[蟾蜍]두꺼비
♣ 섬섬[摻摻]여자의 손이 여리고 가냘픈 모양
♣ 섬섬옥수[纖纖玉手]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을 형용하는 말이다.
♣ 섬수[剡水]중국에 있는 섬계(剡溪)를 이름. 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일찍이 섬계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서 갑자기 눈 내리던 밤에 배를 타고 섬계를 건너간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섬자입무변[纖者入無邊]양웅(揚雄)이 자기가 짖는 태현경(太玄經)을 이렇게 말하였다. “무변(無邊)을 넓다는 뜻으로 쓰지 않고 가늘[細]다는 뜻으로 썼는데, 그것은 너무 가늘어서 복판과 가이없다는 뜻이다.”
♣ 섬주선[剡州船]섬주는 중국 절강(浙江)승현(嵊縣)서남쪽에 있던 섬현인데,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가 섬현의 섬계(剡溪)가에 살고 있는 벗이 그리워 눈내리는 밤에 배를 타고 찾아나선 일이 있었다.
♣ 섬죽[剡竹]중국 섬계(剡溪)의 등지(藤紙)ㆍ죽지(竹紙)를 말함.
♣ 섬중이선[剡中移船]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눈 오는 밤에 갑자기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서 즉시 배를 타고 섬계를 향해 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섬토[蟾兎]달속에 있다고 하는 금두꺼비와 옥토끼로서, 달 표면에 보이는 검은 반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 섬현[剡縣]중국 절강성(浙江省) 승현(嵊縣)서남부에 있는 고을 이름. 진(晉)의 왕휘지(王徽之)가 눈 오는 날 밤에 대규(戴逵)를 찾아갔던 섬계(剡溪)가 있는 경치 좋은 곳임. 《太平寰宇記》
♣ 섭강편[涉江篇]섭강편(涉江篇)은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9장(章)의 편명으로, 굴원 자신이, 풍모가 남달리 특이하고 뜻도 고원(高遠)한데도 알아주는 이가 없으므로 강가를 배회하면서 소인(小人)들이 집권하고 군자들은 해를 당하는 것을 탄식한 내용이다.
♣ 섭공[葉公]섭공은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섭자고(葉子高).
♣ 섭공[涉公]전진 시대(前秦時代)의 고승으로 서역인(西域人) 승섭(僧涉)을 말한다. 《晉書 卷九十五》
♣ 섭공당[躡孔堂]학식이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란 뜻이다. 공당은 공자(孔子)가 사는 집의 당이다. 공자의 문인들이 자로(子路)를 공경하지 않자, 공자가 말하기를, “유(由)는 당에는 올랐고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하면서 자로를 추켜 주었다. 《論語 先進》
♣ 섭공룡[葉公龍]옛날 초나라 섭공(葉公)이 용(龍)을 좋아하여 용의 그림을 그려서 보고 있었는데, 하늘의 용이 그것을 듣고 그 집으로 내려와서 창문에 머리를 들이밀고 마루에 꼬리를 끄니, 섭공이 놀래고 두려워하여 정신을 잃었다. 이것은 섭공이 참용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거짓용을 좋아한 것이었다. 장자(莊子)
♣ 섭리[燮理]섭리하는 사람이란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陰陽)의 기운을 조화시키는 책임을 맡은 재상(宰相)을 말한다. 서경(書經) 주관(周官)에 “삼공은 음양을 섭리한다.” 하였음. 또, 한(漢) 나라 진평(陳平)의 말에, “재상(宰相)은 천자(天子)를 보좌하여 음양(陰陽)을 섭리(燮理[調和])하는 직책을 가졌다.” 하였다.
♣ 섭리도[燮理道]삼공(三公)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도. 원래 서경(書經) 주관(周官)의 “玆惟三公 論道經邦 燮理陰陽"이란 대목에서 나온 말로, 삼공의 직에 있는 자는 천지 음양을 조화시켜야 된다는 데서 나온 문자. ‘섭(燮)‘은 조화(調和), ‘이(理)’는 다스림의 뜻.
♣ 섭섭[囁囁]말을 머뭇거리는 모양, 소심해서 말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모양, 말이 많음, 떠들썩함, 속삭임
♣ 섭세하론지숙맥[涉世何論知菽麥]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시비를 따지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 즉 콩과 보리[菽麥]는 아무리 구별하기 쉬운 물건이지만 굳이 구별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좌전(左傳) 성공(成公) 18년에 “주자(周子)가 형이 있으나 슬기가 없어서 숙맥(菽麥)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울 수가 없다.” 하였다.
♣ 섭심[攝心]마음을 한 곳에 거둬들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
♣ 섭운[籋雲]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에 “뜬구름을 밟고 하늘로 치달린다.[籋浮雲晻上馳]" 한 주에 “구름을 밟는다는 말은, 천마(天馬)가 올라가서 뜬구름을 밟는다는 뜻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 섭유[囁嚅]말을 하려다가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것을 말한다.
♣ 섭유옹[囁嚅翁]섭유는 말을 머뭇거리는 것을 이르는 말로, 당(唐) 나라 때 두공(竇鞏)이 평소 남과 얘기할 적에 말을 매우 머뭇거리어 세상에서 그를 섭유옹이라 불렀는데, 전하여 무능한 사람을 가리킨다.
♣ 섭이중[聶夷中]섭이중(聶夷中)은 당(唐) 나라 사람. 자는 탄지(坦之). 시에 능하였음. 그의 전가시(田家詩)는 다음과 같다. “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 我願君王心 化作光明燭 不照綺羅筵 徧照逃亡屋”
♣ 섭정능[葉靜能]고대의 선인(仙人)임.
♣ 섭제[攝提]십이지(十二支)의 인(寅)의 고갑자(古甲子) 이름. 섭제격(攝提格). 주자집주(朱子集註)에, “攝提 星名 隨斗柄以指十二辰者也”라 했음.
♣ 섭주[섭主]얼굴이 주름진 임금. 혜종
♣ 섭현부[葉縣鳧]동한 현종(東漢顯宗) 때 섭현령(葉縣令) 왕교가 신술(神術)을 사용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임금을 찾아뵙곤 하였는데, 그가 타고 온 거마(車馬)는 보이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임금이 태사(太史)를 시켜 지켜보게 한바, 한 쌍의 오리가 섭현(葉縣) 쪽에서 날아오므로 그물로 그 오리를 잡아 놓고 보니, 두 짝의 신이었다는 고사인데, 후세에 부석(鳧舃)은 지방관의 이칭으로 쓰여졌다.
♣ 성[醒]술이나 잠이 깸.
♣ 성각[騂角]자식이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함을 비유한 말.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염옹(冉雍)의 아버지는 아주 천하고 행실이 나빴으나, 염옹은 덕행(德行)이 뛰어났으므로, 공자(孔子)가 염옹을 두고 이르기를 “얼룩소[犁牛; 제사의 희생으로 쓰지 못하는 소임]의 새끼일지라도 색깔이 붉고 뿔이 반듯하게 잘 났으면, 비록 그를 쓰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산천은 그것을 버리겠는가.[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 성거산[聖居山]직산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음. 고려 태조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주필(駐蹕)하여 동으로 산 위를 바라보니 오색의 구름이 있어 신이 있다고 여기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붙여진 이름.
♣ 성경금간여일제[聖敬今看與日躋]시경(詩經) 상송(商頌) 장발(長發)에 “하늘의 명이 어기지 않아 탕왕에 이르러 천심과 가지런하시니 탕왕이 때에 맞추어 강림하사 성명하고 공경함이 날로 상승하였네[帝命不違 至于湯齊 湯降不遲 聖敬日躋]” 한 데서 온 말이다.
♣ 성계공사[省啓公事]일이 잘된 것이므로 임금에게 아뢰지 않고 처리하는 공사(公事).
♣ 성고[成皐]지명. 전국 시대부터 싸움이 많던 곳으로 초(楚)와 한(漢)이 이 곳에서 겨루었다.
♣ 성공[星拱]뭇별 호위는 논어(論語) 위정(爲政)의 “정사를 하되 덕으로 하는 것은 말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고 뭇별이 호위하는 것과 같다.”에서 나온 것으로, 북극성은 임금이고 뭇별은 신하들을 뜻한다.
♣ 성공[聖功]성인(聖人)의 공덕(功德).
♣ 성공불퇴다화기[成功不退多禍機]장량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소서(素書)라는 비결(祕訣)을 받았는데, 그 글 속에, “성공하고 나면 물러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 성곽학신[城郭鶴身]정령위(丁令威)가 천 년 만에 학이 되어 요동(遼東) 성곽(城郭)에 돌아와 앉은 고사.
♣ 성관[星官]천문을 관측하는 관상감(觀象監) 관원.
♣ 성광[聖狂]성광은 성인과 미치광이란 말. 서경(書經) 周書 多方에 “오직 성인도 생각 없으면 미치광이 되고 미치광이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 된다.” 하였다.
♣ 성교[星橋]청 나라 고종태(顧宗泰)의 자.
♣ 성궐[城闕]시경(詩經)에, “경박한 자가 성궐(城闕)에 논다. 하룻동안 보지 못하니 몇 달이 된 것 같도다.” 하였다.
♣ 성기[聲伎]궁중이나 귀족의 집에 종사하는 가희(歌姬)와 무녀(舞女)를 말한다.
♣ 성기[星紀]일(日)ㆍ월(月)ㆍ오성(五星)의 종(終)과 시(始)가 되는 남두성(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을 가리킨다.
♣ 성기[誠幾]주렴계(周濂溪)의 통서(通書)에, “성은 무위이고 기는 선악이 있다.[誠無爲 幾善惡]”라 하였음.
♣ 성기[成己]한서(漢書)에 의하면, 무제(武帝)가 조선을 쳐 조선은 이미 항복을 하였으나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지 않았었는데, 우거(右渠)의 신하 성기(成己)가 다시 반기를 들고 역공해 오므로 순체(荀彘)가 그 곳 백성들을 달래어 성기를 죽였기 때문에 조선을 평정할 수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동국통감(東國通鑑)에다 그대로 써 놓았다.
♣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젊은 시절은 거듭 오지 아니하니, 젊은 시절에 시간을 아껴 공부하라는 뜻.
♣ 성노[星奴]당 나라 한유의 종에 성(星)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었으므로 뒷사람이 종을 통칭하여 성이라 함.
♣ 성단[城旦]옛날 형벌의 일종. 낮에는 적을 방어하고 밤에는 성을 쌓는 형벌.
♣ 성대[星臺]삼태성(三台星)으로, 조정의 중추기관인 의정부를 뜻한다.
♣ 성도[成都]도시를 이룬다는 말은 순 임금이 사는 마을이 삼년 만에 사람이 모여들어 도시가 되었다는 말. 《書經 舜典》
♣ 성도은[成都隱]촉(蜀) 땅 성도(成都)에서 사람들에게 점을 쳐 주며 숨어 살았던 고사(高士) 엄군평(嚴君平)을 가리킨다.
♣ 성도지당[成都之堂]성도 초당은 곧 성도에 있는 두보(杜甫)의 초당을 말 한 것으로, 두보의 문장이 검각산(劍閣山)처럼 높고 훌륭함을 의미한다.
♣ 성도팔백상[成都八百桑]자기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자산을 말한 것. 제갈량(諸葛亮)이 후주(後主)에게 말하면서, “신에게는 성도(成都)에 뽕나무 팔백 주와 밭 십오 경(頃)이 있어 자손들이 먹고살기에는 넉넉합니다.” 운운하였음.
♣ 성동격서[聲東擊西]동쪽에서 소리내고 서쪽을 침. 동쪽을 친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실제로는 서쪽을 침. 기묘한 용병用兵으로 승리를 거둠
♣ 성동격서[聲東擊西]상대방을 속여 교묘하게 공략한다는 뜻의 고사성어.
♣ 성두[星斗]성두는 별을 가리킨 것으로, 즉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을 뜻한다.
♣ 성랑[省郞]성금(省禁) 안에서 근무하는 임금의 시종신(侍從臣)을 가리키는 말이다.
♣ 성랑[星郞]성랑은 낭관(郞官)의 별칭이고 사군은 수령의 별칭으로, 낭관으로 있다가 수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 성렴[省斂]춘추 시대 제(齊) 나라 안자(晏子)가 경공(景公)의 물음에 답하기를 “임금이 봄이면 백성들의 농사짓는 것을 살피어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가을이면 수확하는 것을 살피어 넉넉하지 못한 것을 도와 주는 것이다.[春省耕而補不足 秋省斂而助不給]”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梁惠王下》
♣ 성명[姓名]성씨와 이름
♣ 성명[誠明]성은 성심이고 명은 도리에 밝다는 뜻으로, 하늘과 인간의 이치가 하나라는 것을 말할 때 쓰는 용어이다. 중용(中庸) 제21장의 “성심 상으로부터 이 도리에 밝아지는 것을 자연적인 천성이라 말하고, 이 도리에 밝아진 다음에 다시 성심을 함양하는 것을 인위적인 교화라 말한다.”에서 나온 말로, 학문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 성명옥여[聖明玉女]고생을 경험시켜 옥처럼 만든다는 말이다.
♣ 성무[星騖]유성(流星)이나 강물처럼 신속히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양(梁)의 유준(劉峻)의 광절교론(廣絶交論)에 “권세가의 그림자만 비치면 너 나 할 것 없이 유성처럼 치달리고, 그의 말소리만 들리면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그쪽으로 휩쓸려 들어가곤 한다.[靡不望影星奔 籍響川騖]”라는 표현이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 성문[聲聞]불교(佛敎)의 성문각(聲聞覺)을 말함. 두보(杜甫)의 숙봉선사시(宿奉先寺詩)에 “欲覺聞晨鐘 令人發深省"이 있음.
♣ 성문[星門]진소(陣所)의 문, 즉 군문(軍門)을 가리킨다.
♣ 성문벽지불[聲聞辟支佛]성문과 벽지불은 대승(大乘) 측에서 소승(小乘)의 수행 경지를 폄하하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으로서 문자적으로는 각각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치거나 외연(外緣)을 통해 스승 없이 혼자 깨닫는 이를 말한다.
♣ 성문승비자[聖門乘肥者]공자(孔子)의 문인(門人) 공서적(公西赤)이 공자의 심부름으로 제(齊) 나라에 가면서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고 갔다.
♣ 성문필관란[聖門必觀瀾]맹자(孟子)에, “바닷물을 본 사람의 눈에는 다른 물은 물 같지도 않다.” 하였고, 또, “물을 보려면, 반드시 그 파란(波瀾)을 보라.” 하였다. 여기서는 바닷물과 같은 성인(聖人)의 문하(門下)란 뜻이다.
♣ 성백[星魄]태백성(太白星)의 정기를 말한다. 철언(摭言)에 “하지장(賀知章)이 이태백(李太白)에게 ‘공(公)은 인세(人世)의 사람이 아니니, 아마 태백성의 정기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했다.” 하였다.
♣ 성번중[成蕃仲]번중은 대제학을 지낸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의 아들 성세창(成世昌)의 자(字)이다.
♣ 성복[盛服]엄숙하게 차린 의복.
♣ 성부난색[腥腐難色]성부난색이란 말은 신선전(神仙傳)의, “호공(壺公)이 비장방(費長房)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제부터는 오물(汚物)을 마시라고 했는데, 비장방은 그 냄새가 너무나 궂어서 난색을 표했다.” 한 데서 온 것임.
♣ 성불영운후[成佛靈運後]남조 송(南朝宋) 때 회계 태수(會稽太守) 맹의(孟顗)가 부처[佛]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사령운(謝靈運)이 맹의를 업신여기어 일찍이 말하기를, “그가 죽어서 극락 세계에 태어나는 것은 나보다 먼저 할지언정, 성불(成佛)하는 일은 반드시 나보다 늦게 할 것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宋書 卷六十七》
♣ 성사[星使]사신을 말한다. 천문가(天文家)에서 하늘에 사신을 맡은 별이 있다 하여 세상에서 천자의 사신을 성사라 한다. 《後漢書 李郃傳》
♣ 성사[聖姒]성사는 현숙한 후비(后妃)를 가리킨다. 주 문왕(周文王)의 모친 태임(太任)과 주 무왕(周武王)의 모친 태사(太姒)를 임사(任姒)로 병칭하여 현비(賢妃)의 대명사로 쓰게 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 성사[城社]성호 사서(城狐社鼠)의 준말로, 즉 성중(城中)의 여우나 사중(社中)의 쥐가 안전한 곳에서 나쁜 짓을 하듯이, 소인(小人)이 임금의 측근에 있으면서 간사한 짓을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성사[星槎]은하수를 오간다고 하는 뗏목으로, 사신이 타고 가는 배를 말한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무제(武帝)가 장건(張騫)으로 하여금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가다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를 만났다.” 하였다. 또, 송지문집(宋之問集) 연안악공주댁래(宴安樂公主宅來)에 “손 이르자 성사가 떨어지고, 선인 오자 달이 텅 비었네[賓至星槎落 仙來月宇空]”하였음.
♣ 성사유허한신통[星槎猶許漢臣通]한(漢) 나라 장건(張騫)이 황하(黃河)의 근원(根源)을 탐사(探査)하려고 뗏목을 탔다가 자기도 모르게 하늘로 올라가 견우(牽牛)ㆍ직녀(織女)의 두 별을 보았다는 고사이다.
♣ 성사호리[城社狐狸]성벽과 사당의 틈에 굴을 뚫고 서식하는 여우와 살쾡이처럼, 임금의 곁에서 보호를 받으며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는 간신(奸臣)을 뜻하는 말이다.
♣ 성산[星山]성주(星州)의 옛 이름이다.
♣ 성삼영[成三影]밝은 달 아래서 독작(獨酌)하는 것을 말한다. 이백(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 시에 “잔 들어 밝은 달 맞으니 그림자를 대하매 세 사람이 되었네.[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하였는데 이는 잔 속에 비치는 모습과 달에 비치는 그림자에 자신을 합하여 셋이 됨을 말한 것이다.
♣ 성상소[城上所]사헌부의 관원이 대궐문에 드나드는 벼슬아치를 살피는 곳 또는 그 직임(職任)을 말한다. 성상소의 위치는 경복궁 문 오른편 곡장(曲墻)이었고, 장관(長官) 즉 대사헌이 대청에 나아가 하대(下臺) 즉 지평(持平)ㆍ장령(掌令) 중 한 사람을 시켜서 그 곳에 앉아 규찰(糾察)케 했다. 그런데 모든 기록에서는 흔히 장소(場所)이자 직임(職任)으로 나타내고 있다.
♣ 성서기재진신전[城西耆宰盡新傳]육신이 소진되면서 사업을 후대에 물려주게 되었다는 말로,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은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말미에 “관솔불의 기름은 다할 때가 있지만, 불씨는 새로 전해져 끝날 줄을 알지 못한다.[指窮於爲薪 火傳也 不知其盡也]”라는 말이 있다.
♣ 성서피구수[盛暑披裘叟]청렴하여 5월까지도 갖옷을 입었던 오(吳) 나라 사람을 말한다. 그는 춘추 시대의 고사(高士)로서 성명이 전하지 않으므로 피구공(披裘公)으로 불리는데, 섶을 지고 가다가 길에서 오(吳)의 왕자이며 명사인 연릉 계자(延陵季子)를 만났다. 그는 길에 흘린 황금을 보고는 “주워라.” 하였으나, 공은 성을 내면서 “그대는 어찌 자처하기는 높이 하면서 남은 낮게 보오. 오월에도 갖옷을 입고 섶을 지는데 어찌 황금을 줍는 사람이겠소.” 하였다. 《高士傳》
♣ 성선[聖善]모친의 덕을 이름. 시경(詩經) 패풍(邶風) 개풍(凱風)에 “어머니는 성스럽고 착하시나 우리들이 착한 사람 없구나[母氏聖善 我無令人]”하였다.
♣ 성선지설[性善之說]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의 대문이 있음.
♣ 성성[星星]머리털이 희뜩희뜩한 모양, 잔 것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모양
♣ 성성[猩猩]성성은 원숭이의 일종인데 그 피의 빛깔이 진홍색(眞紅色)이기 때문에 즉 진홍색 모전(毛氈)을 깐 성대한 연회(宴會)를 비유한 것으로, 당(唐) 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감흥시(感興詩)에 “술동이 앞에 유치시킨 것은 성성의 피이고 장막 위에 안일을 도모한 건 연연의 집이로다[樽前誘得猩猩血 幕上偸安燕燕▣]” 한 데서 온 말이다. 《白樂天集 後集 卷十三》
♣ 성성[惺惺]스스로 마음을 항상 경계하여 개오(開悟)하는 모양
♣ 성성[惺惺]영리한 모양, 꾀꼬리 울음소리, 주사위의 딴 이름
♣ 성성법[惺惺法]성성은 마음을 깨우고 깨워 어둡지 않게 함을 이른다.
♣ 성성이[猩猩이]상상의 동물. 사람과 비슷하여 말을 잘 한다는 전설이 있다. 성성이는 효양국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개와 비슷하였으나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눈과 코가 모두 단정하게 생겼다. 무척이나 총명하였고, 사람의 말을 할줄 알았으며, 사람을 보면 몸을 돌려 가버리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줄도 알았다. 예기(禮記)에 “猩猩能言, 不離禽獸”하였고, 산해경(山海經) 해내남경(海內南經)에 “猩猩之人名, 其爲獸如豕而人面.”라 하였다.
♣ 성성족[猩猩族]성성은 원숭이 비슷한 짐승인데 그 털로 붓을 만들기도 하였으므로, 즉 성성모필(猩猩毛筆)을 가리킨다.
♣ 성성주인옹[惺惺主人翁]성성은 마음을 일깨워 어둡지 않게 하는 것이며, 주인옹은 주인공과 같은 말로 사람의 한 몸을 지휘할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 성성필[猩猩筆]성성은 원숭이와 비슷한 짐승인데, 이 짐승의 털로 만든 붓을 말한다.
♣ 성성혈[猩猩血]성성(猩猩)은 피가 매우 붉으므로, 즉 화려한 모전(毛氈)을 깐 성대한 잔치 자리를 비유한 말로, 백거이(白居易)의 감흥시(感興詩)에 “술동이 앞에 유치시킨 건 성성의 피이고 장막 위에 안일 도모함은 연연의 집이로다[樽前誘得猩猩血 幕上偸安燕燕窠]” 한 데서 온 말이다. 《白樂天後集 卷十三》
♣ 성소축[成小築]두보의 시에 “사람이 무서워 조그만 집 지었나니, 속 좁은 내 성격엔 으슥한 여기가 맘에 들어.[畏人成小築 褊性合幽棲]”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0 畏人》
♣ 성수[星宿]중국 황하(黃河)의 발원지. 성수해(星宿海). 《宋史 河渠志》
♣ 성순웅장[猩脣熊掌]성성이의 입술과 곰의 발바닥으로, 팔진미(八珍味)의 두가지이다.
♣ 성신[聖神]성스럽고 신령스러운 분
♣ 성씨송[成氏松]사육신(死六臣)의 하나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이 심은 소나무.
♣ 성액진교절수취[聖厄陳郊絶數炊]공자가 진(陳)ㆍ채(蔡)에서 액을 당하여 끼니를 굶은 일을 말한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진(陳)ㆍ채(蔡)의 사이에 있을 적에 초(楚) 나라에서 사람을 시켜 공자를 초빙하자, 진ㆍ채의 대부(大夫)들이 말하기를 ‘공자는 현자(賢者)이므로 만약 초 나라에 그가 쓰이게 된다면 진ㆍ채의 대부들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하고 서로 역도(役徒)들을 시켜 공자를 포위하므로 공자가 가지 못하고 양식이 떨어져서 제자들이 주린 기색이 있었다.” 하였다.
♣ 성야운[星夜隕]제갈량이 위(魏)나라를 토벌하다가 군중에서 병을 얻어서 죽을 때에 별이 영중(營中)에 떨어졌다.
♣ 성오미필포[城烏尾畢逋]후한 환제(後漢桓帝) 때 경도(京都)의 동요(童謠)에 “성상오 미필포(城上烏尾畢逋)”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곧 까마귀가 높은 데에 앉아 이익을 독식한다는 뜻으로, 즉 당시 윗사람의 탐학한 정사를 풍자한 것이라 한다.
♣ 성왕고기폐흥[成王考其廢興]주성왕(周成王)이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기면서 점을 쳤다.
♣ 성왕지리[成王之理]주(周) 나라의 성왕(成王)이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뒤를 이어 주공(周公)의 섭정(攝政)으로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제도(制度)를 세우며 인재를 육성하였다.
♣ 성운[成運]조선 전기의 전원시인.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 벼슬을 버리고 보은의 속리산 속에 들어가 오두막 집을 짓고 살았다. 자연 속의 삶을 노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문집에 대곡집(大谷集)이 있다.
♣ 성월[性月]성월은 본성(本性)이 청명하여 달과 같다는 말이다.
♣ 성위[省闈]대궐 안을 말함.
♣ 성위[姓偉]한 성제(漢成帝) 때의 부호가.
♣ 성유[成帷]유(帷)는 장막. 그늘이 장막을 드리운 것 같다는 뜻.
♣ 성유불난석[聖有不暖席]공자가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세상을 구하기에 급급하여 한 군데에 오래 있지 못했음을 이른 말이다.
♣ 성음초신[醒吟楚臣]초 나라 신하는 곧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충신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굴원이 소인들로부터 참소를 당하여 소원(疎遠)되므로 임금에게 충간(忠諫)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자, 시나 읊으면서 강가에 떠돌아다닐 적에 어부(漁父)가 “왜 세상에 잘 맞추지 않고 이 꼴이 되었느냐?"고 물으니 굴원이 대답하기를 “모든 사람이 다 취하여 있으나 나만이 깨어 있다.” 하여 자신의 결백함을 표명하고 곧장 회사부(懷沙賦)를 짓고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는데, 그가 죽은 날이 곧 단오절(端午節)인 5월 5일이었다. 《史記 卷八十四 屈原傳》
♣ 성의[誠意]성의는 팔조목(八條目)의 하나임.
♣ 성이실이불이문야[誠以實而不以文也]덕을 닦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하는 것은 실(實)로 하늘을 받드는 것이 되고, 겉치레로 기우제(祈雨祭)나 지내는 척하고 자기의 허물을 반성하는 척 모든 사람에게 바른 말을 하여 올리라는 교서(敎書)나 내리는 것 등은 문(文)뿐으로 실지가 없다는 말이다.
♣ 성인[聖人]성인은 맑은 술을 칭한다. 위지(魏志)에 “조정에서 술을 금하는데 서막(徐邈)이 몰래 취해 가지고는 ‘이는 성인에 일치한다.’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이 말을 듣고 성내자 선우보(鮮于輔)가 ‘취객이 술에 대해 맑은 것을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한 것을 현인(賢人)이라 한다.’ 하였다.”
♣ 성일[聖日]임금의 덕을 높여 일컫는 말이다.
♣ 성자필쇠[盛者必衰]한 번 성한 자는 반드시 쇠할 때가 있다는 말.
♣ 성재공선범석호[誠齋空羨范石湖]송나라 범성대(范成大)의 호(號)가 석호(石湖)인데, 임금이 ‘석호’ 두 글자를 친필로 써주니,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가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 성전[星躔]대관이 오르는 자리
♣ 성정[誠正]대학(大學) 팔조목(八條目)의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임.
♣ 성제[省題]당(唐) 나라 이후로 진사(進士)를 시험보이는 시제(詩題)를 성제(省題)라 칭하였는데, 고시관이 옛 사람의 시구(詩句)로 명제(命題)하는 것임.
♣ 성조[聖朝]성스러운 조정.
♣ 성주[星州]성주는 옛날 여섯 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伽倻)였다.
♣ 성주[城主]자기 선조(先祖)의 분묘가 있는 고을의 수령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장담(張湛)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갈 때 관문(官門)을 바라보고 말에서 내리므로 그 주부(主簿)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하자, “공자는 향당(鄕黨)에서 공손하였다 하였으니 선영(先塋)이 계신 고을에서는 예절을 지켜야 한다.” 하였다는 고사의 유풍(遺風)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간찰(簡札) 같은 데 흔히 보이는 문자로, 자신의 품계가 더 높더라도 자기 고향의 수령은 반드시 성주라 불렀다.
♣ 성주[星主]제주도의 특별한 벼슬이었는데 고려 말년과 조선 초기에 있었다. 그 곳 고씨(高氏)만이 할 수 있었는데, 뒤에 와서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 성주[星主]탐라 시조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 등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도착했을 때 객성(客星)이 남쪽에 보였으므로 신라왕이 내조한 고후를 별한[星主]이라 일컬었다 한다. 《高麗史 地理志》
♣ 성주망소릉[聖主望昭陵]당 태종(唐太宗)이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소릉에 장사지낸 뒤 황후를 잊지 못하여 원중(苑中)에 층루(層樓)를 짓고 소릉을 바라보곤 하였다. 하루는 위징(魏徵)과 함께 층루에 올라 소릉을 가리키며 바라보라고 하므로 위징이 일부러 딴 데를 바라보고 있다가 “신(臣)은 폐하(陛下)께서 헌릉(獻陵)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벌써 보았습니다.” 하자, 그날로 층루를 헐어버렸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
♣ 성진[聖眞]성진은 공자의 영정(影幀)이다.
♣ 성찬인지일[聖讚仁之一]공자는 “기자(箕子)ㆍ미자(微子)ㆍ비간(比干)을 들어 은(殷) 나라에 세 어진이가 있다.” 하였다. 《論語 微子》
♣ 성찰[省察]성찰은 자신을 반성하여 살피는 것이다.
♣ 성처풍류진일존[聖處風流盡一尊]취객(醉客)들이 보통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에 비기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에 비기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27 魏書 徐邈傳》
♣ 성천[成川]평안도의 지명.
♣ 성천포락[成川浦落]논밭이 흐르는 냇물에 스쳐서 떨어짐.
♣ 성천희[聖千希]성인(聖人)은 하늘처럼 되기를 바라고, 현인(賢人)은 성인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聖希天 賢希聖] 《通書 志書》
♣ 성철욕승부[聖哲欲乘桴]공자는,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는다. 떼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갈꺼나.” 하였다.
♣ 성청[星廳]아전들이 모여서 사무를 보는 곳을 말한다.
♣ 성초[星軺]봉명사신(奉命使臣)의 수레. 고대에 제왕의 사자를 성사(星使)라고 불렀다는 데서 사자가 타는 수레를 말하며 사자의 별칭으로도 씀. 당(唐)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아침 바람 불어와 거리에 가득하니 역기와 성초가 다 빨리 달리누나[早風吹土滿長街 驛騎星軺盡疾驅].” 하였음.
♣ 성충[成忠]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 때의 충신인데, 그가 일찍이 주색(酒色)에 빠진 왕을 간했다가 왕의 노염을 사서 투옥(投獄)되자, 옥중에서 죽을 적에, 만일 적군이 침입하면 육군(陸軍)은 탄현(炭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백강(白江)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난한 지형을 의지해서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끝내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 성취초[醒醉草]유사(遺事)에 “흥경지(興慶池) 남쪽 언덕에 풀 몇 포기가 났는데, 자주빛 잎에 향내가 맑았다. 한 사람이 술에 취하여 그 옆을 지나다가 술이 저절로 깨어 버린 일이 있은 뒤로는 취한 자가 그 풀잎을 따서 향내를 맡으면 즉시 깨어나므로 이름을 성취초라 했다.” 하였다.
♣ 성칭십실읍[聖稱十室邑]공자가 “십 실(十室) 정도의 작은 고을에도 타고난 바탕이 충신(忠信)하기가 나[丘] 정도 되는 이는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論語 公冶長》
♣ 성탕인[姓湯人]당 나라 시승(詩僧) 탕혜휴(湯惠休)를 말함. 두보의 시에 “湯休起我病 微笑索題詩"가 있음. 여기서는 혼허를 이름.
♣ 성편행음[醒便行吟]굳은 절조(節操)를 말한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참소를 입어 임금에게 내침을 받은 후 “온 세상이 혼탁해도 나만은 맑고, 모든 사람이 취해 있어도 나만은 깨어 있다.” 하며, 유유히 택반(澤畔)에서 행음(行吟)하던 일을 말한다. 《史記 屈原傳》
♣ 성표지인[星杓又指寅]음력 정월 즉 초봄이 돌아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 성필종획린[聖筆終獲麟]노 애공(魯哀公) 14년에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기린을 잡았는데, 공자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의 도가 궁해졌구나.” 하였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다가 이 때에 이르러 중지하였다. 《史略 卷 1》
♣ 성하동요[星河動搖]은하수가 움직인다
♣ 성하산[成夏山]성희안.
♣ 성하지맹[城下之盟]성(城) 밑에서 강화의 맹약을 체결한다는 뜻으로 대단히 굴욕적인 항복이나 강화를 의미하는 뜻의 고사성어.
♣ 성한천장결[星漢天章抉]송(宋) 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조주한문공묘비문(潮州漢文公廟碑文)에 “공이 옛날 용을 타고 백운향에 노닐면서, 은하수 도려내고 하늘 문채 나누었네[公昔騎龍白雲鄕 手抉雲漢分天章].” 한 데서 온 말이다.
♣ 성해[性海]진여(眞如)의 성품이 넓고 깊음을 바다에 비유한 말.
♣ 성현[聖賢]성현은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를 이르는 말로, 이백(李白)의 독작시(獨酌詩)에 “천지가 이미 술을 좋아하니 술 좋아한 것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라 듣건대 청주는 성인에 비유하였고 또 탁주는 현인과 같다고 하였네[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한 데서 온 말이다.
♣ 성혜[成蹊]샛길이 생긴다는 뜻. 곧 덕(德)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듦의 비유. 한서(漢書) 권24 계광소건전찬(季廣蘇建傳贊)에 “속담에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 下自成蹊]’하였다.” 하였음.
♣ 성혜리[成蹊李]당(唐)의 이예(李乂)가 천성이 강직하고 모든 일에 사(私)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성(姓)을 따서, 오얏나무 밑에는 지름길이 없다고 했다.
♣ 성혜수[成蹊樹]복숭아나무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이광열전 찬(李廣列傳贊)에 “복숭아꽃 오얏꽃은 말이 없지만, 그 아래에 자연히 길이 이루어진다.[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말이 있다.
♣ 성호[星湖]이익(李瀷)을 가리킨다.
♣ 성호[星弧]호시성(弧矢星)으로 일명 천궁(天弓)이라고도 한다. 모두 아홉 개의 별 가운데 여덟은 궁형(弓形)을 이루고 바깥의 한 별이 화살 모양을 하고 있다.
♣ 성호사서[城狐社鼠]성(城)에 굴을 가진 여우나 사직단(社稷壇) 밑에 구멍을 가지고 사는 쥐는 밉기는 하나 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성과 사직단은 헐 수도 없고 연기를 피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성중(城中)의 여우나 사중(社中)의 쥐가 안전한 곳에서 나쁜 짓을 하듯이, 소인(小人)이 임금의 측근에 있으면서 간사한 짓을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성홍[星泓]벼루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시에 “이것을 급히 소범의 집에 보내어서, 별을 적신 연지(硯池)를 호위하게 하노라.[急送小范家 護此涵星泓]”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함성홍(涵星泓)은 연지(硯池)에 13개의 별이 새겨져 있는 유명한 벼루를 말한다. 《蘇東坡詩集 卷36 軾近以月石硯屛獻子功中書公》
♣ 성홍[星虹]성홍은 남조 양(梁) 유준(劉峻)의 ‘변명론(辯命論)’에 나오는 “성홍 추전이라, 성덕의 상서를 드러냈네.[星虹樞電昭聖德之符]”라는 말에서 기인하여 성자(聖子)의 탄생을 뜻하게 되었는데, 그 주(註)에 “큰 별이 마치 무지개처럼[大星如虹] 화저(華渚)에 흘러내려 옴에, 여절(如節)이 꿈속에서 그 기운에 감응하여 주선(朱宣), 즉 소호씨(少昊氏)를 낳았다.”고 하였다. 참고로 추전(樞電)은 황제(黃帝)의 탄생과 관련된 설화로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그 내용이 나온다.
♣ 성홍[猩紅]성홍은 성성(猩猩)의 피처럼 붉은 빛을 말한 것인데, 술을 가리키기도 한다.
♣ 성화[成化]명 나라 헌종(憲宗) 때의 연호로, 헌종을 가리킨다.
♣ 성회숙고한안국[成灰孰顧韓安國]권좌에 있다가도 일단 실세(失勢)를 하면 주위에서는 냉대를 함. 한(漢) 나라 때 양 효왕(梁孝王)의 중대부(中大夫)였던 한안국(韓安國)이, 무슨 일로 죄를 받게 되었을 때 몽현(蒙縣)의 일개 옥리(獄吏)인 전갑(田甲)이 안국에게 욕을 하였다. 이때 안국은 그에게 말하기를, “죽은 재라고 해서 다시 불붙지 말라는 법이 있다더냐?" 하자 옥리가 대답하기를, “불이 붙기만 하면 오줌을 싸버리리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안국은 다시 양(梁)의 내사(內史)가 되자 당시 옥리였던 전갑은 그를 찾아가 육단사죄(肉袒謝罪)를 하였다. 《史記 卷一百八》
♣ 성훼[成毁]이루어지는 것과 허물어지는 것. 또는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허물어진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 세[世]30년을 1세라 한다. ☞ 원회운세(元會運世)
♣ 세가[稅駕]달리는 말의 멍에를 풀어 쉬게 함. “사물이 극하면 쇠하나니, 나는 멍에를 풀 바를 모르노라[物極則衰 吾未知所稅駕也].” 사기(史記)
♣ 세간강륵[世間韁勒]세상일에 얽매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 세간손익[世間損益]상평이 일찍이 주역(周易)의 손괘(損卦)와 익괘(益卦)를 읽고는 탄식하기를 “부귀가 빈천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마는, 삶과 죽음 중에 과연 어떤 것이 나은지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 세갈[細葛]가는 올로 짠 베옷.
♣ 세갑만은황[洗甲挽銀潢]은하수이다. 은하수를 끌어다가 무기인 갑옷과 칼과 창을 깨끗하게 씻어 간직해 두었다는 말이다.
♣ 세객[說客]교묘하고 능란한 말솜씨로 각처를 유세(遊說)하고 다니는 사람. 제국(諸國)의 군주(君主)가 저마다 패자(覇者)를 지향하며 패도정치(覇道政治)를 펼쳤던 전국 시대(戰國時代)에는 책사(策士)‧모사(謀士) 또는 종횡가(縱橫家) 출신의 세객이 많았음.
♣ 세검정[洗劍亭]세검정은 창의문에서 북쪽으로 5리 거리에 있음. 세검(洗劍)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앞두고 김유(金瑬)ㆍ이귀(李貴) 등이 그곳에 모여 거사(擧事)를 모의한 다음 그 물에 칼을 씻어 칼집에 넣었다 하여 생긴 이름임.
♣ 세군[細君]원래 제후(諸侯)의 부인을 뜻하였는데, 동방삭(東方朔)이 자신의 처를 세군이라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뒤로부터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 무제(漢武帝)가 관원들에게 하사한 고기를 동방삭이 허락도 받지 않고 칼로 잘라 집으로 가져가자 무제가 자기 비판을 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에 동방삭이 “허락도 받지 않다니 이 얼마나 무례한가. 칼을 뽑아 잘랐으니 이 얼마나 씩씩한가. 많이 가져가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청렴한가. 돌아가 세군에게 주었으니 이 얼마나 인자한가.[歸遺細君 又何仁也]”라고 하자, 무제가 그만 웃고 말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5 東方朔傳》
♣ 세군용기합단청[洗群龍驥合丹靑]출중한 문장 실력을 비유한 말이다. 당(唐) 나라 화가 조패(曹覇)의 유명한 그림 솜씨와 불우한 신세를 읊은 두보(杜甫)의 ‘단청인(丹靑引)’이라는 시에 “잠깐 사이 대궐 안에 진짜 용마를 그려 놓자, 만고의 보통 말들 깨끗이 씻겨 없어졌네.[須臾九重眞龍出 一洗萬古凡馬空]”라는 표현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13》
♣ 세기[世紀]제왕세기(帝王世紀)를 말함. 진(晉) 나라 황보밀(皇甫謐)이 지었는데 총 1권.
♣ 세기군평[世棄君平]한 나라 시대에 엄군평(嚴君平)이란 사람이 학식과 포부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고 점치는 것을 생계로 삼으면서, 세상에서 군평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군평이 세상을 버린다고 하였다.
♣ 세난[說難]세난은 신하가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회유하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한비자(韓非子)의 편명이다.
♣ 세념[世念]세속의 명리(名利)에 관한 생각을 말한다.
♣ 세답족백[洗踏足白]남의 빨래를 하였더니 제 발이 희어졌다. 남을 위하여 한 일이 자기에게도 이득이 있다, 혹은 일을 하고 아무런 보수도 얻지 못하였을 때를 비유하기도 한다.
♣ 세뢰[洗罍]’洗’는 관기(盥器)이고, ‘罍’는 술그릇임.
♣ 세류[細柳]세류영(細柳營)으로 한 문제(漢文帝) 때에 주아부(周亞夫)가 군사를 주둔시켰던 군영이다. 군령이 아주 엄하였기 때문에 후에 모범적인 군영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史記 卷 57 周勃世家》 오늘날의 섬서(陝西) 함양시(咸陽市) 서남 지방이다.
♣ 세류영[細柳營]한 문제(漢文帝)때 주아부(周亞夫)가 장군이 되어 세류(細柳)에 군사를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을 방비하고 있을 때, 문제가 군사들을 위문하기 위해 영문(營門)에 이르렀으나 군령(軍令)이 없다는 이유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사자에게 부절(符節)을 들려 들여보내 장군에게 지시한 뒤에야 들어갔다. 문제(文帝)가 엄숙한 그 군율에 탄복하면서 ‘진짜 장군[眞將軍]’이라고 찬탄했다 한다. 《史記 絳侯世家》
♣ 세류정분애[細柳淨氛埃]전쟁 없이 군영(軍營)을 잘 다스릴 것이라는 뜻이다. 세류영은 곧 세류에 있는 군영의 이름인데, 한 문제(漢文帝) 때 주아부(周亞夫)가 장군이 되어 이곳에 진(陣)을 쳤을 적에, 그 군영의 규모와 군기가 다른 군영에 비해 월등하므로, 순시차 나왔던 문제가 크게 감동하였다 한다. 《漢書 周亞夫傳》
♣ 세린[細鱗]농어(鱸魚)를 말한다. 소식(蘇軾)의 후적벽부(後赤壁賦)에 “입은 크고 비늘은 가늘어서 모양이 송강의 농어와 같다.[巨口細鱗 狀如松江之鱸]" 한 말에서 기인한 것이다.
♣ 세망[世網]세상살이에 계루(係累)되는 일을 뜻한다.
♣ 세모[歲暮]깊은 겨울.
♣ 세미[世美]세제기미(世濟其美)의 준말로, 전대(前代)의 미덕을 후대에서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左傳 文公 18年》
♣ 세병[洗兵]군대(軍隊)를 젖게 한다는 것은 곧 대장(大將)이 출정(出征)하는 것을 뜻한다. 위 무제(魏武帝)의 병요(兵要)에 의하면 “대장이 출정하려고 할 때 비가 내려서 의관(衣冠)을 적시는 것을 세병(洗兵)이라 한다.”고 하였다.
♣ 세병[洗兵]병기를 깨끗이 씻어 거두어 두는 것으로, 전쟁이 끝난 것을 뜻한다.
♣ 세병마[洗兵馬]세병마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싸움이 없다는 표시로서 무기와 말을 깨끗이 씻는 것을 이름.
♣ 세병정[洗兵亭]선조(宣祖) 36년(1603)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충무(忠武)에 창건한 세병관(洗兵館)을 가리킨다.
♣ 세병하미만[洗兵河未挽]갑병은 갑옷과 무기로, 갑병을 씻는다는 것은 곧 전쟁을 그만둠을 뜻하는데, 두보(杜甫)의 세병행(洗兵行)에 “어떻게 하면 장사를 얻어 은하수를 끌어다가, 갑병을 깨끗이 씻어 길이 쓰지 않을꼬[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集 卷六》
♣ 세부[世婦]후궁(後宮)의 여관(女官). 정원이 27명이다.
♣ 세사[細思]곰곰이 생각하다.
♣ 세서례[洗書禮]책씻이. 옛날 책을 한권 다 읽고 나면 떡을 해서 나누어 먹던 일. 원래는 어린이들이 서당(書堂)에서 책 한 권을 떼면 부모들이 떡을 해주어 같이 나누어 먹게 하던 데에서 유래된 말이다.
♣ 세설신어[世說新語]남조(南朝)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찬함. 양(梁) 유효표(劉孝標)가 주석을 담. 원명은 세설(世說)로 고대소설집이다. 유의경세설, 세설신서라 불렀으나, 북송(北宋) 이후로 현재의 명칭이 되었으며, 덕행(德行)ㆍ언행(言行)부터 혹닉(惑溺)ㆍ구극(仇隙)까지의 36문(門)으로 나눈 3권본으로 정해졌다. 지인소설(志人小說)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선행하는 동류의 재료와 진(晉)나라 배계(裵啓)의 어림(語林)이나 곽반(郭頒)의 위진세어(魏晉世語) 등을 바탕으로 하여, 유의경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이 선택,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지식인과 중세 호족(豪族)의 생활태도를 생기발랄한 콩트식으로 묘사하였으며, 한말부터 위ㆍ진 무렵의 귀족계급 주변의 사상ㆍ풍조를 후세에 상세히 전하고 있다. 양(梁)나라 유효표(劉孝標)의 주(註)는 나중에 없어진 사료(史料)를 풍부하게 인용하여 육조(六朝) 때의 동류(同類)의 주석인 송나라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注), 북위(北魏)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와 함께 존중된다. 그 밖에 명(明)나라 왕세정(王世貞)의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등이 있다. 현재 왕조(汪藻)의 서록(敍錄)을 곁들인 송판(宋版; 尊經閣本)이 진정(秦鼎)의 주해 세설전본(世說箋本)과 함께 이용되고 있다.
♣ 세성[歲星]동방(東方)의 목성(木星). 궤도대로 잘 가면 군주(君主)가 복이 있고 농사가 잘 되며 그렇지 못하면 백성들이 질병이 많다고 함.《史記 天官書 注》 한(漢) 나라 동방삭(東方朔)이 무제(武帝)를 섬기던 18년 동안에는 세성(歲星)이 하늘에 보이지 않다가 그가 죽고 나자 비로소 하늘에 다시 나타났으므로 무제가 후회하며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 세성재세[歲星在世]한 무제(漢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있는 18년 동안에는 세성이 보이지 않았다가 그가 죽은 뒤에 세성이 다시 나타났다 하여, 그의 전신(前身)이 세성이었다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 세세[世世]거듭된 세대, 대대(代代)
♣ 세세[歲歲]해마다
♣ 세세향류전[細細香留篆]가느다랗고 구불구불한 전서의 획이 마치 향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는 데서 한 말이다.
♣ 세속오계[世俗五戒]세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승려 원광(圓光)이 화랑(花郞)에게 일려준 다섯 가지 계율. 원광이 중국 수(隋)나라에서 불법(佛法)을 구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歸山)과 추항(箒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金言)을 청하자, 원광이 아래 다섯 가지 계율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뒤에 화랑도의 신조가 되어 화랑도가 크게 발전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세수강표[世修降表]오대(五代) 때 촉(蜀) 나라 사람 이호(李昊)가 네 번이나 항복하는 표문(表文)을 기초(起草)한 것을 기롱하는 말이다. 전촉(前蜀)이 당(唐) 나라에 항복할 때 이호가 그 표문을 기초하였으며, 후주(後周)가 송(宋) 나라에 항복할 때도 역시 이호가 그 표문을 기초하자, 당시 어떤 사람이 그의 집 문에 몰래 ‘대대로 항복하는 표문을 기초한 이가의 집[世修降表李家]’이라고 써 붙여 놓았다. 《宋史 卷479 世家列傳 李昊》
♣ 세심[洗心]마음의 번루(煩累)를 깨끗이 씻어버리는 것을 말함.
♣ 세아전백만[洗兒錢百萬]안녹산을 황제의 수양 아들이라고 말한 지 이레[七日] 되는 날, 안녹산을 궁중으로 데려다가 아이를 씻긴다고 하여 양귀비가 궁녀들과 같이 수놓은 어린애 옷같이 만들어서 입히고, 포대기로 싸고 하면서 웃고 떠들어대니, 황제가 들어가 보고 아이 씻는 돈[洗兒錢] 백만(百萬)을 하사하였는데도, 안녹산은 돌아가서 곧 반기를 들었으므로, 백만 전(錢)으로 도망치는 것을 샀다고 조롱한 것이다.
♣ 세악[細樂]아주 맑고 가는 악성(樂聲)을 말한다.
♣ 세야순풍호[勢若順風呼]풍부한 학식을 바탕으로 적절한 비유와 표현을 구사하여 잘 알아듣게 한다는 말이다.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높은 산 위에서 손짓을 하면 팔이 더 길어진 것도 아닌데 먼 데에서도 잘 볼 수 있고, 바람결을 타고서 소리 지르면 목소리가 더 커진 것이 아닌데도 더 뚜렷이 들을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 세어[世語]세설신어(世說新語). 남조(南朝)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찬함.
♣ 세요척계[細腰尺髻]남이 좋아한다고 자기를 희생해가며 무턱대고 따름. 마원(馬援)의 아들 요(廖)가 명덕황후(明德皇后)에게 상소하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오왕(吳王)이 검객(劍客)을 좋아하니 상처입은 백성들이 많았고, 초왕(楚王)이 세요(細腰)를 좋아하니 궁중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 하였으며, 또 장안(長安)에서 하는 말들이 ‘성안에서 상투 높은 것을 좋아하니 사방에서 한 자씩이나 높아졌다.’ 하였습니다.” 하였음. 《後漢書 馬援傳》
♣ 세원우[洗寃雨]이 태조(李太祖)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오랫동안 부묘(祔廟)되지 못했다가 현종(顯宗) 10년(1669)에 부묘되었다. 이날 정릉(貞陵)에 제사를 지냈는데 갑자기 큰 소나기가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원통함을 씻은 비라 하여 세원우라 일컬었다.
♣ 세월여류관아생[歲月如流觀我生]서능(徐陵)이 양복야(楊僕射)에게 준 글에 “세월이 물 흐르듯 빠르니, 반생(半生)이 얼마나 남았으랴.” 한 데서 인용된 말인 듯하다.
♣ 세유[繐維]영위(靈位)에 치는 휘장을 말함.
♣ 세유백락연후유천리마[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어야 천리마(千里馬)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재능(才能)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진가(眞價)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재능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썩어버린다.
♣ 세율기운모[歲律旣云暮]소동파가 친구에게 보내는 단찰(短札)에, “해는 저물었다. 죽창(竹窓)에 푸른 등불이 깜박이는데, 이 풍취의 반을 그대에게 나누어주고 싶다.” 한 문구가 있다.
♣ 세의훈옥[勢倚熏屋]지붕 위에 있는 쥐를 연기를 피워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 세이[洗耳]요 임금 때에 허유(許由)의 고사. 요 임금이 천하를 허유에게 맡기려 하니, 받지 않고 영수(潁水)의 양지쪽 기산(箕山) 아래에 숨었다. 또 불러 구주(九州)의 장관(長官)으로 삼으려 하니 허유가 듣지 않고 귀를 더럽혔다 하여 영수에서 씻었다 한다. 《史記 燕世家》
♣ 세이불문진세사[洗耳不聞塵世事]요(堯)가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사양하였으나 받지 않고 영수(穎水)에 가서 더러운 말을 들은 귀[耳]를 씻었다.
♣ 세전[細氈]좋은 자리
♣ 세정[世情]세태와 인정.
♣ 세존[世尊]석가세존(釋迦世尊).
♣ 세진영[洗塵纓]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창랑(滄浪)의 물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는 말이 있다.
♣ 세진환하석[勢盡還下石]무정한 인심을 비유한 말.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에 의하면 항간의 주식(酒食) 친구들은 조그마한 이해 관계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되어버리고, 게다가 하나가 함정에 빠지면 구해주기는커녕 도리어 함정으로 밀어넣고 또 돌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창려집(昌黎集) 卷三十二》
♣ 세초[洗草]세초는 실록의 편찬이 완료된 뒤에 그 초고(草稿)를 없애 버리는 일로, 자하문(紫霞門) 밖에 있던 조지서(造紙署)에서 사초(史草)를 물에 씻어 흐려버리고 그 종이는 다시 제지(製紙)하여 썼다.
♣ 세한[歲寒]추운 계절, 즉 역경(逆境)을 뜻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하여, 난세를 당하여야 군자의 절의(節義)를 볼 수 있음을 비유하였다.
♣ 세한고절[歲寒孤節]세월이 추워진 후에도 홀로 지키는 절개.
♣ 세한맹[歲寒盟]절조(節操)를 변치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말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의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송백이 그 푸른빛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세한(歲寒)은 어지러운 세상에 비유한 것이요, 송백은 절조를 상실하지 않은 군자에 비유한 것이다. 즉 어지러운 세상에도 절개를 잃지 말자는 맹서를 말한 것임.
♣ 세한삼우[歲寒三友]겨울철 관상용인 세 가지 나무. 곧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일컬음. 송죽매(松竹梅)
♣ 세한송백[歲寒松柏]날씨가 추워진 후의 송백.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한겨울에도 변색되지 않기에 날이 추워져야 그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굳음을 보여주는 진가(眞價)가 드러난다. 군자는 역경에 처하여도 지조와 절의를 굳게 지켜 변치 않음
♣ 세한심[歲寒心]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마음.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꿋꿋이 서 있는 송백(松柏) 같은 마음.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계절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조락하는 것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하였는데, 이는 어려운 시기를 만나야 군자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변치 않는 절조를 의미함.
♣ 세한연후지송백[歲寒然後知松栢]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송백의 진가를 알게 된다. 즉, 지조와 절개가 굳은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되어야 구별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질풍지(疾風知勁草)
♣ 세한의[歲寒意]역경에 굴하지 않고 절조를 지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추운 계절이 돌아온 뒤에야 송백(松柏)이 끝까지 푸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 세한정[歲寒情]어떠한 역경을 만나더라도 절개를 꿋꿋하게 지키는 마음을 말함.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추운 겨울이 닥친 뒤에야 솔과 잣나무가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안다.” 하였음.
♣ 세한조[歲寒操]세한은 세한송백(歲寒松柏)의 준말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추운 겨울철을 지내보아야 송백이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후세 시문(詩文) 가운데 이 말로 역경(逆境) 속에서 지조를 변치 않은 사람을 비유하였다.
♣ 세한후조[歲寒後凋]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나는 해가 저물어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마른다는 것을 알았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하여, 군자의 굳은 지조는 환난(患難)을 당해야 알 수 있음에 비유한 말이 있다.
♣ 세화[歲畵]정초에 대궐에서 쓰던 그림. 화공(畵工)들로 하여금 미리 그 해에 소용될 그림들(인물ㆍ화훼ㆍ누각 등)을 그려 놓게 한 다음, 그림을 아는 재상에게 명하여 그 작품들의 등급을 매기게 하여 우선 대궐에서 얼마간을 쓰고, 나머지는 재상들이나 근신(近臣)에게 나눠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