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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50:1-6) “할렐루-야, 할렐루-돈”
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오늘 시편 150편 말씀중심으로 “할렐루-야, 할레루-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2009년 2월 25일부터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여 말씀을 함께 살펴보기 시작해서 무려 8개월이 걸렸습니다. 2009년은 거의 시편의 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오늘 마지막으로 하게 됩니다. 참으로 긴 여정을 같이하는 동안에 우선 제 자신이 다시 한 번 십자가복음 속에 들어있는 이진법 원리가 대표 시편 기자인 다윗의 실질적인 삶을 통해서 이렇게 철저하게 실현되고 열매 맺혀지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150편은 어떻게 보면 시편을 총 정리해주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어요. 얼른 보면 여섯 절 밖에 안 되는데다가 3-6절 까지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바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찬양하라’라고 끝나니까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할렐루야'를 맨 앞에 두고 뒤에 뒀어요. 시작할 때에 '할레루야'하고 끝날 때에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이 할렐루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이에요.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기독교인의 삶의 모습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할렐루야 입니다.
순복음교회의 금식기도원 원장님으로 계시던 최자실 목사님의 특별한 별명이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이었습니다. 좋은 별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할렐루야'가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떻게 구성되었냐하면 기독교인의 삶을 그냥 이 단어 하나로 표현해줍니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이 있다고 하면 그 증거가 할렐루야로 나타나야 하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전화 걸때 ‘할렐루야! 김 집사님’라고 하시잖아요. 그리고 예배당 앞뜰에서 박 집사님을 만날 때에도 ‘할렐루야!’라고 인사하는 것을 보는데 좋아요.
그러면 할렐루야의 의미를 한 번 살펴볼까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인데 '찬양'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할랄'이고 거기에 더해서 '여호와'라는 말이 붙여진 거예요.
‘할렐루’라는 것은 ‘우리 모두 함께 찬양하자’라는 청유형도 될 수 있고 명령형도 될 수 있는데 할렐루+야의 마지막에 있는 ‘야’는 여호와의 축약형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단어는 ‘하야’라는 단어의 변형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하야’의 뜻은 ‘있다’라는 뜻이에요. 영어의 being 입니다.
동사인 하야가 변해서 여호와가 됐는데 여호와로 변하면서 ‘스스로 있다.’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렐루야'라는 말은 ‘스스로 계신 그 분을 찬양하라, 찬양하자'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기독교인의 삶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루를 살 때에 자녀와 함께 살고 부부가 함께 살고 오늘도 직장에 가실 것 아닙니까? 그 직장에 가서 살 때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말은 '호흡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할렐루야'는 ‘스스로 계신 분을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 돈 노래를 불러요. 입만 열면 돈 이야기예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찬양하는 거예요. 할렐루+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입만 열면 자식 이야기예요. 그럼 할렐루+자식이 되는 거예요. 입만 열면 다른 사람 이야기예요. 할렐루+다른 사람 되는 것이죠. 할렐루+승진 되는 것이고, 목사님들은 입만 열면 부흥 이야기니까 할렐루+부흥이 되는 거예요. 할렐루+야가 아니에요.
진짜 여러분이 교인으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믿는 자로 살면서 할렐루+야를 합니까?
오늘 아침에 양심껏 물어 봅시다. 할렐루+야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찬양'이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하면 아주 좋아요.
돈, 돈 노래를 부르네. 이게 바로 찬양하는 거예요. 입만 열면 자식 이야기고, 입만 열면 형통 이야기고, 입만 열면 부흥 이야기고, 입만 열면 비전 이야기에요. 그럼 할렐루+야가 아니고, 할렐루+비전, 할렐루+부흥, 할렐루+예배당 건축이 되는 겁니다. 누가 할렐루+야를 합니까?
내가 양심껏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것이 뭐예요?
할렐루+돈 하면서, 여호와의 축약형인 ‘야’는 내가 찬양하는 할렐루+돈을 위하여 끌어들이는 것뿐이지. 누가 할렐루야를 합니까? 그런데 아주 쉽게들 이야기해요.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돈 많이 버세요.’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부흥사 목사님들이 ‘여러분! 여러분의 사업이 번창할 것을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아니 사업이 번창할 것을 축원하려면 '할렐루+번창!'이라고 해야지 왜 ‘야’를 거기에 붙여요? 할렐루+번창! 할렐루+형통! 할렐루+자식! 할렐루+일류대학이라고 해야지요.
할레루야가 쉽지 않아요. 어디서 할렐루야를 하고 있어요?
‘할렐루야! 건강 하셔야죠.’라고 할 거면 양심적으로 할렐루+건강이라고 하세요.
여호와 하나님을 언제 찬양했다고 자꾸 ‘야’를 붙입니까?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언제 찬양했습니까? 시편의 결론이 이거라는 거예요.
이제는 절대로 할렐루야 하지 마세요. 그건 거짓말이니까.
마음에는 입만 열면 노래 부르고 싶은 것들이 하나님 이외의 것들로 가득하면서 어디서 할렐루야를 합니까?
할렐루야가 진정으로 참된 의미에서 노래 불러지고 할렐루야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예수님 같아야 돼요.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특별히 계속해서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라는 것이 여호와의 ‘있다’라는 뜻이 변형 된 것인데 그게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뜻이고 스스로 있는 분을 진정으로 찬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와 나는 구분 없이 모두 스스로 있는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스스로 계신 분이 아니었고, 형님들과 저도 아니고 제 자식 놈도 아니고 제 아내도 아니고 제가 사랑하는 선교회 나오시는 모든 분들도 스스로 계신 분이 아니에요. 아무도 아닙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스스로 계신 분이 아니고, 이명박대통령도 아니고 김정일도 마찬가지예요. 오직 한 분이에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인데 그 분을 진정으로 찬양하려면 이런 고백이 나와야 해요. 제가 주님의 입에서 나온 고백 몇 개를 읽어드릴게요.
제일 유명한 것, 요5:30절에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라는 이 말이 나와야 진정한 스스로 계신 분에 대한 찬양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요7:17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스스로 행하는 교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요7:18절에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못한다. 오직 아버지께 듣고 본 것만을 말하고 나는 스스로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주님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비파와 수금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어요. 그냥 주님께서 찬양했다는 이야기는 십자가 이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하시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임을 확인하시고 하나님 스스로 계신 분께서 당신의 운명을, 당신의 삶을, 당신의 생애를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이끌어 주실 것을 당부하신 뒤에 찬미하며 떠나신 그 때 말고는 주님께서 찬양했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그러나 주님이 바로 진정한 할렐루야의 원형이십니다.
'스스로 계신 분을 노래하라.'
진정으로 스스로 계신 분을 노래하려면, 내 삶에서 곡조를 따라 노래를 부르지 않고 통기타를 들고 피아노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지 않더라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할렐루야를 입에 담지 말라는 겁니다. 할렐루야가 뭔데 아무 때나 할렐루야를 해요? 큰일 나려고. 스스로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하고 싶으면 우리는 할렐루야를 해서는 안 돼요.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제 시편 149편의 내용을 다시 가져와 봐요. 내가 왕이 되면 스스로 판단하는 겁니다.
‘지금 주어진 이 상황은 안 좋다’라고 내가 스스로 판단 해놓고,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끌어들이면서 할렐루야를 가져 옵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왜 이게 기독교라고 말하는지 저는 모르겠다고요. 미쳤어요? 할렐루야가 뭔데 내가 스스로 이게 좋다, 나쁘다 결정을 한 뒤에 그리고 하나님을 종처럼 불러들이면서 거기에 대고 할렐루야를 하냐고요?
미치지 않고서는, 정신들이 나가지 않고서는, 이단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어요. 이건 기독교의 기초 중의 기초예요. ABC라고요.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여러분! 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할렐루+형통을 해야지, 아무데서나 할렐루야를 합니까? 솔직히 말해 봐요. 여러분 마음에 원하는 것이 돈 아닙니까? 자식을 닥달하는 이유가 돈 아닙니까? 돈 벌고 살라는 얘기 아니에요? 딴 게 있는 줄 아세요? 여러분이 그 이상인줄 아십니까? 다 돈이에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는 것이지 내 입장을 전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을 향한 이야기가 다 저를 향한 이야기예요. 제가 여러분하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돈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마6: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하나님과 재물을 나란히 놓아버리십니다.
참, 교회가 묘해요. 사업을 잘해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마음은 너무나 당연한 마음인 것으로 인정해버려요. 마땅히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 다음에 그것을 온당한 것으로 여긴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마음에 두고 자식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냥 자연인으로서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괜찮은 것이라고 놔두는데 이게 교회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미친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돈과 하나님을 나란히 놓고 계세요. 그런데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버리고 돈을 사랑하는 상태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려는 거예요. 그래놓고 어디서 할렐루야예요? 누구 맘대로 할렐루야를 합니까?
속담 중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다'는 것은 나를 객관화 시킨 말입니다. 내가 나를 돕는 겁니다. 일에 장애가 생겼다면 내 스스로 이게 해결이 되려면 어떤 길을 택해야겠다고 판단하고 행동을 하고 그러자는 거예요. 아주 딱 잘라 말씀드리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절대로 안 돕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절대 멸망으로 끝내실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영어에도 있어서 모든 인류에 다 통하고 있는 거예요.
‘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할 때 하나님도 도우신다.’라고.
그런데 여러분, 오늘 2절에 보면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라고 나옵니다.
이게 간단한 말 같고 흔한 말 같지요? 아니에요.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한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행하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무슨 말입니까? 나를 향하여 은총을 베푸시고 구원의 역사를 허락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복음 사건을 허락하신 나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행동들을 보면서 이제는 내가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매력에 빠지는 것이고 내 마음을 그 분께 드리는 두 가지 방향의 이야기가 2절 안에 들어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행하신 가장 위대한 일인,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마음에 기억할 때에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 가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며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계신 그 분 앞에서 찬양을 하며 산다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하는 그 삶의 고백이 진정한 찬양이고 진정한 할렐루야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느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리시든지 목사님이 정말 할렐루야를 말하고 계시는지, 할렐루(돈+자식+형통+건강+자식+일류대학)을 말하고 계시는지 분명히 구분하세요. 그리고 그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그분의 마음이 진정으로 할렐루야가 될 수 있고 스스로 계신 분을 찬양하는 찬양이 될 수 있도록. 목사님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시는 삶이 되도록 기도해 드리세요.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도 죽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죽어요. 이진법 복음을 먼저 들으셨다면 이진법 복음의 원리를 모르고,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해서 진정으로 할렐루야가 나오지 않는 모든 내 옆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겁니다. 그냥 준비도 안 된 분에게 이진법 복음 믿으라고 들이대지 마세요. 먼저 기도하십시다.
시편 150편이 기가 막힌 말씀으로 끝을 냅니다. 시작할 때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성소가 뭡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예요. 하나님이 성소에 임재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성소예요. 지성소예요. 그 지성소를 통해 하나님이 내게 임재하십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차고 있으므로 온 누리에 하나님의 손길이 다 보여요. 그러므로 온 궁창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내 속에 먼저 주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내 안에 하나님이 들어 오시자마자 천하 만물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있는 것이 보이면서 온 누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돼요. 우리가, 인간이 지금 행동을 취하는 것은 단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돈 버는 장소에서도 자식을 기르는 장소에서도 입만 열면 여호와의 이름이 나와야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돼요?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에 달려있는 겁니다. 그 사람만이 진정으로 스스로 계신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거예요. 현실에서. 통기타치고 비파와 수금으로 노래 끝난 다음에 ‘여러분! 할렐루야!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사업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게 어떻게 이렇게 되는가 말입니다. 이렇게 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어요? 할렐루야를 어디에 갖다 붙여요?
내가 스스로 계신 분을 찬양한다는 할렐루+야를 하고 있는지, 할렐루(돈+자식+미모+명품+외제차+형통+부흥)를 하고 있는지 오늘 아침에 가려내세요.
‘나는 주님의 십자가에 달려있기 때문에 스스로 아무것도 못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할렐루야입니다. 스스로 계신 그 분을 찬양하는 길은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주님의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백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에요. 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시편 150편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시면서 오늘 하루 종일 진정한 할렐루야의 삶을 사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입만 열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 위에 있는 인류 60억은 제쳐놓고서라도, 기독교인들 중에 진심으로 입에 할렐루야를 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아버지하나님! 교회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교회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주의 백성들이오니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이 입에 담아 흔히 말하는 할렐루야가 참된 할렐루야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종일 할렐루+돈 대신에, 할렐루+야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라오며 다시 한 번 진정한 할렐루야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내 대신 죽으신 주님께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