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숙희 작가의 소설집 『오이와 바이올린』(푸른사상 소설선 55).
예술의 진정한 가치, 동성 간의 사랑, 성차별, 반려견 문제 등 현대사회의 다양한 면들을 보여주는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평범한 인물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기존의 문화와 관습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2023년 12월 26일 간행.
■ 작가 소개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쾌활한 광기』 『키스를 찾아서』 『이기적인 유전자』 『사르트르는 세 명의 여자가 필요했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그림에세이 『너도 예술가』 등을 펴냈다. 2014년 첫 전시회 이후 지금까지 열 번의 개인전을 개최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나에게 소설은 주로 외부에서 포착한 소재가 계기가 되어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을 쓰다 보면 어느새 나는 소설과 한 몸이 된다. 해서 내가 쓰는 소설이 아프면 나도 쓰리고 아팠고 문장 한 줄에 영혼을 통째로 내어주기도 했다. 바깥에서 건져 올린 그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들키기 싫은 내 이야기일 수도 있기에 더 그랬다. 아니다. 기어이 발설하고 싶은 나의 이야기를 타인의 이름을 빌려 교묘하게 감추는 것. 바로 그것이 소설이라는 장르의 실체일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인 듯 능청스럽게 꾸밀 줄 아는 나는 음흉한 미소와 함께 때로는 앓으면서 때로는 열정에 달뜬 채 소설을 썼다. 그렇게 쓴 소설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면서 한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너를, 그리고 나를 다시 만난다.
■ 작품 세계
박숙희 소설의 관찰과 사변은 이 ‘평범’과 ‘특별’ 사이를 오가는 방법적 매개다. 독자는 이 매개의 남다른 독서 과정으로써 ‘읽는 묘미’와 더불어 그것이 드러내는 ‘평범’ 뒤에 숨은 ‘특별’을 이해한다. 그것은 동시에 그 ‘특별’ 또한 우리의 흔한 ‘평범’이라는 것을 아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평범하다고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니며, 특별하다고 그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 둘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삶’이라는 형태를 이룬다. 세상 사람들은 이 단순한 것을 모른다. 박숙희 소설은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속인의 무식을 찌른다. ― 박덕규(소설가,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작품 속으로
오이와 바이올린. G가 오이라면 K는 바이올린이다. 꼬인 것 없이 시원한데 왠지 밍밍한, 그러나 쉽게 질리지 않는 남자가 G였다. K는 섬세하며 날카로워 다치기가 십상인, 그리고 끊어질 듯이 이어지는 그래서 온전히 다 듣고 있으면서도 뭔가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예민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떠올리게 하는 남자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K는 웃음을 잃은 남자였다. 늘 뭔가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데 그 집중이 그를 약간 화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남자였다, K는. 그에 반해 G는 느닷없이 웃음을 토해내 상대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맥락에 맞지 않는 웃음 때문에 약간 부족해 보일 때도 있었지만 나는 G의 헤픈 웃음이 싫지만은 않았다. G가 입을 활짝 연 채 그런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어쩌면 G는 완전히 솔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맛을 남기지 않는 오이처럼. 게다가 G는 영혼 따위 운운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갈 것 같은 남자였다.
(「오이와 바이올린」, 79쪽)